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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핑 더 벨벳 ㅣ 세라 워터스 빅토리아 시대 3부작
세라 워터스 지음, 최용준 옮김 / 열린책들 / 2020년 12월
평점 :
작가의 첫 작품이자 빅토리아 시대 3부작 첫 권이다. 번역 출간은 <핑거스미스>가 먼저였고, 우리에겐 박찬욱 감독의 영화 <아가씨>의 원작자로 알려졌다. 내 기억이 정확하다면 영화 <아가씨> 이후 <핑거스미스>가 새롭게 표지를 바꿔 나왔다. 이번 작품도 이전에 <벨벳 애무하기>로 나왔었다. 이전 제목은 절판이고, 이 책은 개정판이다. 두툼한 분량 때문에 선뜻 손이 나가지 않는 작품들 중 한 권이었다. 그러다 이번에 이 책을 시작으로 3부작을 한 번 달려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최근 두툼한 책을 멀리하고 있는데 과연 3부작을 모두 읽을 수 있을지는 자신할 수 없다.
책 줄거리에 대해서는 작가가 잘 요약해 놓았다. “빅토리아 시대의 굴 파는 소녀가 남장 여가수에게 마음을 빼앗겨 그 여가수와 같이 자고 또 함께 연예장 무대에 서게 되고, 그러다가 잔인하게 버려진 뒤, 한동안 남장을 하고 피커딜리에서 매춘을 하다가, 돈 많고 나이 든 여자의 섹스 노리개가 되었다가, 마침내 이스트엔드의 사회주의자에게서 진정한 사랑과 구원을 찾는 이야기”라고. 좋은 책은 간결한 줄거리에 수많은 살들이 붙어 진행된다. 이 소설도 그렇다. 빅토리아 시대를 충실하게 재현하고, 부족한 부분은 상상력으로 채웠다. 레즈비언 소설인데 어떤 부분에서는 엄청 야하고, 노골적이다. 은어와 속어가 난무한다. 제목도 그렇다. 작가도 한정된 독자들만 읽을 것이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이 소설이 드라마로도 제작되었다고 하는데 과연 수위가 어디까지 표현되었는지 궁금하다.
윗스터블 굴 식당집 딸 낸시는 평범한 소녀였다. 그녀에게 남장 여가수 키티가 나타나기 전까지는. 그녀가 무대에 선 그날 이후 그녀는 자신 속에 가려져 있던 레즈비언 성향이 밖으로 드러난다. 동성애에 대한 인식이 요즘도 그렇게 좋지 않은데 이 시대는 더욱 심했다. 소설 속에서 여자를 좋아했다는 이유로 감옥에 보내는 이야기가 나온다. 누구에게 당당하게 말할 수 없는 일이다. 실제 언니에게 그녀의 성향을 편지로 보냈다가 일어난 일들은 좋은 예다. 감추고 숨길 수밖에 없다. 많은 동성애자들이 자신의 성향을 숨긴 채 살아간다. 키티가 낸시를 버린 이유도, 낸시가 섹스 노리개가 된 후 일어난 몇 가지 에피소드들도 이것을 잘 보여준다.
연예장의 스타인 키티의 스타일리스트로 취직했다가 그녀의 연인이 되고, 같이 공연도 한다. 그녀도 나름 스타였지만 키티가 느낀 불안감 때문에 버려진다. 첫 사랑의 실패는 그녀에게 큰 상처를 준다. 방황하고 우연히 발견한 집안에 틀어박힌다. 남자 복장을 하고 밖으로 나갔다가 그녀가 남자인 줄 알고 다가온 남성에게 매춘을 한다. 이 과정을 보면서 그녀의 삶이 나락으로 떨어지겠구나 생각했다. 그러다 나타난 한 부유한 여자의 성적 노리개가 되면서 또 다른 삶 속으로 빠져든다. 이때의 그녀를 보면서 예전에 본 영화가 떠올랐다. 자신을 성적 노리개로 만든 사람에 빠진 여자를 다룬 영화다. 부유한 레즈비언의 섹스는 그녀에게 새로운 세상을 눈뜨게 한다. 하지만 작은 실수와 욕망이 결합하면서 쫓겨난다. 소설에서 가장 야한 장면들로 가득한 순간은 바로 이 시기다.
살기 위해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다. 가장 쉬운 것은 이전처럼 몸을 파는 것이다. 하지만 지저분하고 상처 입은 그녀가 바로 그 일을 시작하기는 힘들다. 그렇게 찾아간 인물이 잠시 마음이 갔던 플로렌스다. 하루 전까지 가장 화려한 삶을 살았던 그녀는 플로렌스에게 빌붙어 살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야기는 예상한대로 흘러간다. 세상을 더 좋은 곳으로 만들려고 노력하는 사회주의자와 자신의 성 정체성에 충실하고자 하는 사람들의 무리 속으로 한 발 내딛는다. 자신의 과거를 아는 사람을 만나고, 그녀를 숭배했던 사람들을 알게 된다. 이때 표현되는 섬세하고 미묘한 감정과 그 시대의 모습은 강하게 마음에 와 닿는다.
가볍게 읽기 힘들다. 책 초반부는 속도가 상당히 더디었다. 풍부한 복장과 장면과 상황에 대한 묘사는 그 시대를 이해하는데 도움을 주지만 가독성은 떨어진다. 키티가 낸시를 버린 이유도 통속적이고 현실적인 이유 때문이다. 자신의 성 정체성을 숨긴 사람들은 사회의 시선으로부터 멀어진 곳을 찾아갈 수밖에 없다. 매춘은 그 욕망을 해소하는 가장 간단한 방법이다. 계급에 따라 이 쾌락을 누리는 방법이 다르다. 낸시의 상황 변화가 이것을 잘 보여준다. 어떻게 보면 성적 모험을 다루었다고 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버려진 후 그녀가 선택한 삶은 일상과 사랑이다. 작가가 만약 이 이야기의 후속작으로 쓴다면 키티가 주인공일 것이라고 한 부분에 눈길이 간다. 자신의 성 정체성을 숨긴 그녀의 불안하고 불만족스러운 삶이 어떨지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