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아가, 나의 악마
조예 스테이지 지음, 이수영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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띠지의 광고 문구가 정말 인상적이었다. ‘지옥 같은 데뷔작’, ‘<케빈에 대하여>, <나를 찾아줘>, <오멘>의 만남’이란 문구다. 이 문구들 중에서 나의 시선을 특히 끌었던 단어는 ‘지옥’ 과 ‘오멘’이었다. 예전에 대충 본 영화 <오멘>과 워낙 유명해서 읽었던 소설 <오멘>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번역 제목에도 ‘악마’란 단어가 들어가기에 그대로 초현실적인 능력을 가진 악마가 등장할 것이란 생각을 했다. 어떤 면에서는 <오멘>이나 <로즈메리의 아기>를 떠올렸다. 착각이었다. 이렇게 생각하고 소설을 읽기 시작했는데 예상과 다른 전개가 펼쳐졌다.


소설은 엄마와 딸의 시선이 교차하면서 진행된다. 한 명은 엄마 수제트. 다른 한 명은 딸인 해나다. 수제는 크론병으로 고생하다 현재의 남편 알렉스를 만나 행복한 가정을 꾸미고 예쁜 딸 해나를 낳았다. 평범한 딸이라면 육아의 힘겨움에 멈출 수 있지만 이 딸은 결코 평범하지 않다. 일곱 살이 되었는데도 말을 하지 않는다. 선택적 함구증이라도 걸린 것일까? 말을 못한다면 그에 해당하는 학교에 보내면 되지만 유치원 등도 제대로 적응하지 못하고 문제를 일으킨다. 속된 말로 잘린다. 엄마가 딸을 홈스쿨링 하는 데 진도를 잘 따라온다. 처음 봤을 때 수제트는 조금 특수한 아이 육아 지친 엄마 정도로 보였는데 이야기가 진행되면서 이것이 큰 착각임을 보여준다.


해나가 처음 말을 했을 때 나의 머릿속은 드디어 ‘악마’가 등장했다고 좋아했다. 악마가 어떤 능력을 보여줄까 기대했다. 그런데 이 등장은 연습한 연극이었다. 마녀처럼 자신을 꾸민 것이다. 해나가 이렇게 하는 이유는 엄마에게서 아빠 알렉스를 독차지하기 위해서다. 육아에 지친 엄마가 보여주는 몇 가지 반응들에 비해 회사 일을 마치고 돌아온 아빠는 해나를 사랑으로 보듬어준다. 육아에서 배제된 아빠가 보여줄 수 있는 최상의 모습이다. 해나가 말을 못해도. 유치원 등에서 문제를 일으켜도 그는 현실을 제대로 보려고 하지 않는다. 해나에게 아빠는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최고의 선물이자 존재다. 모녀의 갈등은 여기서 시작한다.


수제트는 신화가 된 모성애에 짓눌린다. 말을 못하는 것 때문에 진단을 여러 곳에서 받는다. 아이가 유치원에서 문제를 일으켰을 때 늘 가까이에서 본 것 때문에 딸이 저지른 것임을 직감한다. 늘 붙어지내야 하는 그녀에게 쉴 틈이 없다. 독박육아의 어려움을 호소하는 엄마들의 고통을 그대로 투사해놓았다. 여기에 해나의 점점 심해지는 장난과 악의 가득한 행동은 도를 넘어선다. 다행이라면 아직 해나가 일곱 살 여자 아이란 사실이다. 그녀는 딸의 문제를 파악하고 고칠 수 있는, 혹은 받아줄 학교를 열심히 찾을 수밖에 없다. 잠시 천사 같은 딸과 놀아주는 아빠는 그것이 불만이지만.


해나는 아주 똑똑하다. 몰래 움직이는데도 능숙하다. 이 때문에 이 소녀는 엄마 아빠의 정사를 보고, 엄마 몰래 들어가 엄마의 머리카락을 싹둑 잘라낸다. 아빠의 컴퓨터를 이용해 자신에게 필요한 인물을 찾아내 그 역할에 몰입하고. 이것으로 엄마를 겁준다. 엄마에게 들려준 첫 말도 여기서 나왔다. 첫 시작은 이런 작은 위협이지만 강도가 점점 심해진다. 엄마가 먹는 약을 바꿔 놓고, 머리카락을 자르고, 압정을 바닥에 깔아놓는다. 이 강해지는 정도가 이 소설의 긴장감을 점점 고조시키고, 과연 어떤 결말을 맞이할까 기대하게 만든다. 이런 아이를 마주해야 하는 부모의 심리 묘사도 아주 현실적이다.


작가는 육아의 어려움에 아이가 소시오패스라면 어떨까? 하는 공포를 엄마의 시선으로 그려내었다. 아이가 자라고, 적대감의 강도가 점점 심해지는 과정을 통해 그 두려움을 단계를 하나씩 높인다. 그래도 엄마라는 모성애 때문에 갈등하게 만들고, 죄책감을 느낀다. 읽다 보면 나도 모르게 혹시 다른 반전이 있는 것 아닌가 하는 의심을 한다. 엄마가 숨긴 사실이 있을지 모른다는 의심 때문이다. 물론 숨긴 것은 있다. 이 소설을 모두 읽고 난 지금 왠지 이 작품의 후속작을 기대하게 된다. 착한(?) 딸로 돌아온 해나가 진짜로 엄마와 대결하는 장면으로 가득한 소설을 말이다. 마지막 문장 “최고로 착한 소녀가 되어야 한다.”가 이렇게 섬뜩하게 다가온 것은 처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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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우주로 출근합니다 - 놀랍도록 유쾌한 우주비행사의 하루
마리옹 몽테뉴 지음, 하정희 옮김 / BH(balance harmony)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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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좋아하는 sf 장르는 스페이스 오페라다. 그렇다고 다른 장르를 읽지 않는 것은 아니다. 쉽고 빠르고 재밌게 읽을 수 있기에 이 장르를 좋아하지만 하드 sf도 좋아한다. 이런 장르 소설을 읽다 보면 우주라는 공간이 너무 쉽게 다가온다. 누구나 쉽고 빠르게 갈 수 있는 곳으로. 하지만 현실은 지구의 중력을 벗어나는 것도 힘들다. 1969년 달에 인류가 발을 내딛은 후 우리가 우주비행사이라고 부르는 인물들은 지구 주변에서 맴돌 뿐이다. 우주 정거장을 만들었다고 하지만 영화처럼 쉽고 가볍게 돌아다닐 수 있는 곳이 아니다. 저자는 실존 인물인 토마스 페스케를 통해 이 과정을 사실적이고 유쾌하게 그려내었다.


제목만 보면 우주를 쉽게 나가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현실은 우주로 나가는 것이 결코 쉽지 않다. 일단 우주비행사 후보에 선발되는 것부터 어렵다. 수많은 훈련과정도 어렵고, 공부할 것도 많다. 내 기억으로도 우주왕복선을 보내려고 하다가 실패한 후 더 이상 보내지 않고 있다. 우주왕복선을 보내지 않는다고 우주선을 보내지 않은 것은 아니다. 우주정거장의 수선과 우주에서의 실험 등을 위해 각국이 끊임없이 보내고 있다. 당연히 수많은 우주비행사 지원자들이 모집 공고가 나오면 지원한다. 유럽우주국 우주비행사 지원자는 8천여 명이었고, 그 중에서 합격자는 단 여섯 명이었다.


십 수 년 전 한국도 우주에 한 명을 보냈다. 이소연 씨다. 엄청난 경쟁을 뚫고 그녀와 고산 씨가 뽑혔다. 이소연은 예비 우주인이었지만 결국 그녀가 갔다. 그 당시 크게 홍보되었지만 나에게는 관심 밖이었다. 몇 년 전 <중력>이란 소설을 읽고 우주비행사가 된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지 알게 되었다. 이 소설에서 우주로 나가는 것이 얼마나 힘들며, 운이 좋아야 하는지 알 수 있었다. 이 만화 속 토마스도 그의 동료들이 먼저 우주로 나가는 것을 봐야 했고, 그가 갈 차례에 몸에 이상이 없어야 했다. 만약 그에게 문제가 생기면 예비 우주비행사가 그 대신 간다. 실제 이런 일은 가끔 벌어진다고 한다. 이 만화에도 자주 나오지만 이 우주비행사들은 아주 승부욕이 강하고, 언제라도 우주로 나가고 싶어한다. 훈련을 받을 때도 마찬가지다.


선발과정부터 괴상하다. 약간 희극적으로 묘사한 부분이 있겠지만 시험은 늘 어렵고 괴상하지 않은가. 유럽우주국이란 단체의 특성 상 선발에 국가 배정에 신경을 쓸 수밖에 없다. 한 우주비행사를 우주로 보내는데 엄청난 비용이 소요된다. 그들이 받는 훈련은 또 어떤가. 미국 나사와 러시아 등을 오가면서 훈련과 교육을 끊임없이 받는다. 대단한 열정과 체력이 없다면 견딜 수조차 없을 것 같다. 이런 훈련들을 받는 것은 우주란 낯선 곳에 가야 하기 때문이다. 우주에서 몇 개월 살다 지구로 돌아온 후 간단하게 묘사한 장면을 보면 다른 환경에 적응한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알 수 있다. 우주복에 난 작은 구멍 하나가 죽음으로 이끌 수 있다는 것도 보여준다. 그리고 우주에 나가서 그들이 얼마나 바쁘게 움직이고 실험하는지 알려준다. 이것도 역시 그들끼리 경쟁한다.


우주에서 그들이 수많은 실험을 하지만 지구에 돌아온 이후 그들이 바로 훌륭한 실험 재료다. 낯선 환경에서 살다 온 그들이 피부, 혈액, 뼈 등의 상태는 많은 정보를 제공한다. 실제 우주선을 운영하면서 알게 된 것들이 현실에서 제품으로 만들어져 나온 것들이 많다. 가끔 광고 방송에서도 본다. 읽으면서 내가 별똥별이라고 생각한 것들 중 최소한 한두 개 정도는 우주에서 버린 쓰레기일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실제 우주 쓰레기를 대기권에서 불태우기 때문이다. 뭐 각도가 잘못되면 그냥 땅에 떨어지는 경우도 있는 모양이다. 이것은 우주비행사들의 귀환에서도 적용된다. 자그마한 실수로 귀환 각도가 잘못되면 그 속에 타고 있는 우주비행사들이 받는 중력이 달라진다. 이 중력에 대한 설명은 그림으로 확인하는 것이 더 확실하다.


어떻게 보면 따분한 일상이고 반복이다. 우주비행사의 일상을, 그 중에서 훈련과 교육을 누가 재밌게 보겠는가. 하지만 작가는 이 일을 흥미롭게 그려낸다. 뛰어난 연출력으로 생동감 있게 정보를 제공한다. 왜 이런 훈련을 받는지, 중력이 우리에게 어떤 영향력을 끼치는지, 우주복을 입고 바뀐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 어떤 행동을 하는지, 우주선에서 재활용되는 것은 무엇인지 등의 소소하지만 중요한 정보들을 보여준다. 그리고 화면 뒤의 모습을 보여주면서 웃게 만든다. 우리가 보게 된 장면들에 담긴 의미를 알려준다. 사소한 것들에 대한 재미있는 묘사는 이 책의 가독성을 높인다. 내가 살아 있는 동안 한 번이라도 우주에 나갈 수 있을까? 잠깐 우주로 나간 나를 꿈꾸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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ㅇㄹㄹ 2021-02-02 22: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ㅇㅊㅁㄴㅁㅇㄹ
 
유행가들
김형수 지음 / 자음과모음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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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은 음악을 잘 듣지 않지만 한때는 늘 옆에 끼고 살았다. 그 당시 유행하는 음악을 흥얼거리고 내가 좋아하는 가수의 음반을 샀다. 앨범이 점점 사라지고 음원으로 음악을 들으면서 점점 음악과 멀어졌다. 다른 분야에 더 관심이 생기면서, 텔레비전에서 멀리 떨어지고 음악 방송을 거의 보지 않으면서 음악이 낯설어졌다. 한때 ‘나는 가수다’나 ‘복면 가왕’에 빠져 집중하던 시절도 얼마 지나 사라졌다. 최근에 나오는 아이돌 음악은 나와 맞지 않거나 너무 낯설다. 그러다 우연히 보게 된 트로트 방송은 트로트에 대한 인식을 바꾸게 만들어주었지만 트로트 가수들이 내세우는 ‘민족의 음악’이란 말에는 콧방귀를 뀐다. 물론 누군가에게는 이 트로트가 자신의 삶을 바꾸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을 것이다. 이런 글을 쓰는 이유는 이 책 도입부에 트로트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내었기 때문이다.


이 책의 글들은 한 번에 집필한 것이 아니다. 긴 세월 동안 걸쳐 연재하고 고쳐 쓴 것들을 새롭게 덧붙여 낸 것이다. 도입부 글을 읽고 트로트 이야기가 많이 나올 것이란 생각을 했는데 아니었다. 저자 자신이 음악 전문가가 아니다 보니 음악 자체보다 자신의 경험과 시대를 엮어 그 시절과 가수들에 대한 이야기를 할 뿐이다. 일제강점기 노래를 말하면서 트로트만 말하지 이 음악의 기원인 엔카와 그 표절작에 대한 부분은 생략되어 있다. 그리고 그 당시 세계적으로 유행하던 재즈를 한국 경성에서 연주했다는 부분도, 그 가수들 일부가 클래식 등을 공부했다는 사실도 말이다. 음악사 부분에서는 아쉬운 점이 많지만 가볍게 읽기에는 부족함이 없다. 개괄적 흐름은 쫓아가기 때문이다.


누구나 한때 자신의 삶을 뒤흔든 음악들이 있다. 시대별로 장르가 다르겠지만 말이다. 내가 좋아한 음악들은 멜로디 중심이었다. 가사는 솔직히 뒷전이었다. 팝송의 경우 가사를 알고 들은 경우는 없었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나중에 즐겨 들었던 팝송 가사가 얼마나 충격적이었는지 알게 되는 순간들이 생겼다. 하지만 늘 나의 시선을 끈 것은 멜로디였다. 그 다음에 가사가 귀에 들어오기 시작하는데 나의 생각과 다른 사람들의 생각이 너무 달라 놀란 경우도 적지 않다. 그리고 어릴 때 아무 것도 모른 채 불렀던 유행가들은 또 어떤가. 지금 내 아이가 따라 부르는 유행가의 가사 의미를 알까? 따라 추는 춤은? 시대에 따라 바뀌는 창법은? 작은 푸념을 해본다.


유행가는 그 노래가 불리는 순간 그 노래를 아는 모든 사람을 하나로 묶어준다. 저자도 개그맨과 가수 이야기에서 다루었지만 히트곡 하나만 있어도 평생 그 노래를 우려먹을 수 있다. 이 노래는 시위 현장에서, 거리 응원에서, 노래방의 작은 모임에서도 동일하다. 그 멜로디를 흥얼거릴 때 우린 그 감정을 잠깐 그 감정을 교류한다. 저자가 5.18 광주를 겪으면서 80년대 대중 가요를 잊고 지냈다고 한 것은 그날의 충격을 대중 가요의 가사들로 치유할 수도, 멈출 수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의 이야기가 김건모에서 멈춘 것은 그의 감성이 따라갈 수 있는 한계점이 그 곳까지가 아니였을까.  <스피드>를 인문학적으로 풀어낸 해석은 씁쓸한 현실이지만 그 시대를 지난 사람에게는 한때의 유행가였다. 그것은 저자가 어린 시절을 회상하며 다룬 노래들과 비교해볼 필요가 있다.


저자는 유행가가 장르가 아니라고 말한다. 맞다. 시대마다 유행했던 노래들의 장르는 다양하다. 60~70년대, 아니 그 이전 유행했던 노래들도 모두 뽕짝은 아니었다. 그 시절을 풍미했던 인물들 덕분에 착시 효과가 생긴 것이다. 이런 부분들을 세밀하게 다루지 않은 것은 앞에서도 말했듯이 아쉬운 대목이다. 통기타로 대변되는 포크 음악이나 락 등을 다룬 이야기에서 많은 이야기가 생략된 채 거시적으로 다룬 부분도 아쉽다. 정치와 음악을 엮어 들려준 이야기는 머릿속에 담아둘 만하다. 정치 홍보곡들이 만들어져 뿌려진 반면에 민중가요가 나와 그에 대응해 불리게 된 현상도 같이 말이다. 그리운 이름인 김광석과의 인연을 다룬 부분은 괜히 마음이 짠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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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헌의 영지순례 - 기운과 풍광, 인생 순례자를 달래주는 영지 23곳
조용헌 지음, 구지회 그림 / 불광출판사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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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호동양학자 조용헌의 책을 오랜만에 읽었다. 이전에 읽었던 그의 책들은 상당히 재미있었다. 내가 풍수지리나 사주명리학을 완전히 신뢰하지 않는다 하여도 그의 시선은 한 번쯤 되돌아보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몇 권 읽다가 이런 저런 이유로 중단되었는데 어느 날 다른 곳에서 다시 그의 이름을 듣고 기억을 되살리게 되었다. 이 책을 선택하게 된 이유도 그 이름과 더불어 영지란 단어 덕분이다. 저자는 영지를 “말 그대로 신비하고 신령스러운 땅”이라고 말한다. 무협 마니아인 나에게 이 단어는 아주 낯익다. 어쩌면 영물이 더 익숙할지 모르지만 어릴 때부터 풍수지리에 대한 온갖 이야기를 듣고 보고 자란 나이기에, 코로나 19로 해외는 꿈도 꾸지 못하는 현실이기에 더욱 관심이 갔다.


저자는 23곳의 영지를 3개 기운으로 구분했다. 신령, 치유, 구원 등이다. 신령의 땅은 낯선 곳이 많지만 치유의 땅은 최근에 관심을 두었거나 알게 된 곳들이다. 구원의 땅은 가본 곳이 한 곳 밖에 없지만 늘 한 번 가봐야지 하고 마음으로 생각만 한 곳이 나와 반가웠다. 그리고 3개로 구분된 영지들은 기운에 따라 이야기의 방향이 조금씩 바뀌는데 읽을 때는 그렇게 강하게 느끼지 못했다. 아마 멋진 풍경을 담은 사진과 구지회의 그림과 재밌는 이야기들에 빠져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 글을 쓰면서 목차를 다시 훑어보았고, 간략한 부제들로 인해 이 차이를 조금씩 알게 되었다.


신령의 땅에서 저자는 영발에 대해 자주 말한다. 계룡산이야 워낙 유명하니까 넘어가자. 그런데 장락산 통일교 본부와 보리산 오하산방은 아주 낯설다. 통일교와 기업인이란 이유 때문이다. 삼성의 이병철 회장이 얼마나 사주와 풍수지리에 관심 많았는지 생각하면, 그와 그 후대들이 얼마나 많은 땅을 사 놓았는지 생각하면 이런저런 생각들이 머릿속을 오고 간다. 그리고 이 책을 읽으면서 오대산을 새롭게 인식했다. 이전에는 그냥 이름 정도 알고 있는 산이었는데 오랜 기억 속 한국 선인들의 계파를 다시 떠올리며 한 번 가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체력이 된다면 다섯 곳 모두 둘러보고 싶다.


치유의 땅에서 두 곳은 최근에 가보고 싶은 곳이다. 한 곳은 며칠 전 이웃 블로그에서 본 서산 간월암이고, 다른 한 곳은 작년에 알게 된 철원 고석정이다. 이 두 곳 모두 풍경이 아주 멋있었는데 이미지와 실제 풍경의 간격이 얼마나 될지도 궁금하다. 운길산 수종사의 경우 예전에 친구와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간 듯한데 기억이 분명하지 않다. 다만 그곳에서 공짜 차를 마셨고, 잘 쉬다 온 정도만 기억난다. 두물머리를 갈 때면 다시 한 번 가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는데 이제 단서를 찾았으니 갈 수 있을 것 같다. 경주 문무대왕릉이 전국 최대 무당 굿터란 사실은 처음 들었는데 언젠가 다시 가면 그 기운을 한 번 느껴보고 싶다.


저자는 십승지를 치유의 땅으로 분류했는데 구원의 땅이 맞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피난과 구원은 다른 의미일까? 구원의 땅에서 가장 중요한 산은 지리산이다. 재밌는 대목은 한국 페미니즘의 시원이자 원형으로 삼신할머니를 꼽은 것이다. 두세 번 지리산에 갔지만 단순한 놀이 이상이 아니었기에, 역사 속 비극의 장소란 인식과 한때 유행이었던 지리산 종단의 이미지 때문에 저자가 풀어낸 당취란 존재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상당히 많은 이야기 속에 여러 번 당취를 녹여 내었는데 조선의 승려들을 새롭게 인식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얼마전 시인의 글 속에서 만났던 선운사를 다시 만났다. 다른 감상과 이미지이지만 반가웠다.


이 글을 쓰면서 만약이란 단어를 떠올린다. 내가 결혼 전이고 더 어렸다면 이 영지들을 몇 곳은 반드시 다녀왔을 텐데 하는 가정 때문이다. 차 몰고 가벼운 마음으로 두세 시간이면 갈 수 있는 곳이 많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책 속 사진들이 주는 시원하고 새로운 이미지는 보는 나로 하여금 감탄하게 만든다. 다른 높이와 시각에서 본 사찰의 모습은 발로 걸어가서 만난 풍경과 너무 달랐다. 저자가 풀어낸 산세에 대한 이야기도 솔직히 나에겐 와 닿지 않았는데 그것은 아마도 나의 심안이 막혀 있기 때문일 것이다. 보여주어도 보지 못하는 단계에 머물고 있다. 하지만 이런 곳을 자주 다닌다면 대자연의 기운이 조금은 그 문을 열어주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해본다. 날씨가 풀리고 코로나 19가 잠잠해지면 가까운 곳 한 곳이라도 다녀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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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더브레 저택의 유령
루스 웨어 지음, 이미정 옮김 / 하빌리스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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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도 부끄러운 이야기부터 하나 하자. 나는 이 소설의 작가를 다른 작가로 이번에도 착각했다. 내가 착각한 작가는 ‘루스 랜들’이었다. 얼마 전 루스 웨어의 소설 한 권을 읽었는데도 불구하고 말이다. 작은 변명을 한다면 이 기억이 두 이름을 혼란스럽게 했을지도 모른다. 내가 이름에 대한 저질 기억력을 가지고 있다고 몇 번이나 말했지 않은가. 소설 등을 읽을 때 가장 곤혹스러운 부분 중 하나도 비슷한(최소한 나에게는 비슷하게 보이는) 이름이 나오면 한참 헤맨다. 그래서인지 이 책을 펼쳐 읽자 마자 ‘루스 랜들’이 최근작인가 하는 착각을 했다. 이야기의 시작이 2017년이었기 때문이다. 혹시나 해서 작가 이력을 빠르게 확인하니 다른 작가였다. 하지만 루스 웨어의 소설도 재밌게 읽었으니 반가운 일이다.


현재 한국에 출간된 루스 웨어의 소설은 모두 세 권이다. 이 책은 다섯 번째 소설이라고 한다. 이 책을 포함하면 두 권을 읽었다. 귀차니즘 때문에 한 권은 아직 서평을 완성해 올리지 않았다. 최근 읽고 서평을 쓰지 않는 책들이 늘어나고 있다. 읽은 책은 <인 어 다크, 다크 우드>다. 상당히 잘 읽혀 다음 책도 구해 놓고 묵혀 두고 있다. 나의 특기 중 하나이지 않은가. 솔직히 이름에 약한 나에게 이 책의 제목도 쉽게 들어오지 않았다. 며칠을 읽는데도 말이다. 가독성이 좋아 진도가 쭉쭉 나가는데도 말이다.  ‘헤더브레’란 이름이 나에게는 어렵기만 했다. 소리 내어 자꾸 읽으면 이름이 잘 기억되겠지만 눈으로 읽다 보니 이런 현상이 더 심해진다.


데이비드 발다치가 루스 웨어를 우리 시대의 애거사 크리스티라고 불렀다. 아직 이 평가는 조금 미루어 두자. 처음 편지 형식으로 시작되는 것을 보고, 편지가 오고 가거나 날짜 별로 편지가 가지 않을까 예측했다. 그런데 둘 다 아니었다. 아이 돌보미가 무죄를 호소하면서 보낸 편지는 한 권의 장편 소설이 되었다. 가독성 있게 잘 읽히지만 이런 두께의 편지라면 몇 십 개로 나누었으면 더 좋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있다. 나중에 왜 이랬는지 알 수 있는 이유가 나오지만 쉽게 납득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다. 그리고 작가는 몇 가지 반전을 숨겨 놓고 뒤에 하나씩 풀어놓는다. 개인적으로 선호하는 구성은 아니다. 반전의 단서를 내가 찾지 못한 것일 수도 있지만.


로완은 유치원에서 일하다 좋은 조건의 구직 광고를 보고 지원한다. 스코틀랜드의 대저택에서 입주 돌보미를 하는 일이다. 연봉도 아주 높다. 마감 당일 자신의 이력서 등을 작성해 지원한다. 인터뷰 요청이 와 휴가를 내고 간다. 헤더브레 저택은 예전에 성으로 이용되었던 거대한 저택이다. 그런데 이 부부가 매입해서 집 전체를 스마트 시스템으로 연결해 놓았다. 앱으로 모든 일을 처리한다. 입구도, 전등의 불을 켜는 것도, 샤위기의 물 온도 설정도. 대단한 최신식 주택이지만 익숙해지는 데는 시간이 필요하다. 작가는 영리하게도 이 시스템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을 등장시켜 불안과 짜증과 두려움을 뒤섞었다. 물론 이 시스템에 익숙한 사람에게는 무척 편리하다.


인터뷰를 마친 후 돌아가는 로완에게 둘째 딸 매디가 불안한 말을 전달한다. 이 말이, 그녀가 방에서 들은 이상한 소리들이 과거 헤더브레 저택에서 있었던 사건과 엮이면서 유령의 존재를 의심하게 만든다. 헨리 제임스의 고전 <나사의 회전>을 오마주한 작품이라고 하는데 그 작품을 읽지 않아 이 부분은 그냥 지나갈 수밖에 없다. 좋은 이력서와 추천서는 빨리 일 할 수 있다는 이유와 더불어 그녀를 고용하게 만든다. 빠르게 퇴사를 진행한 후 이 집에 온 그녀에게 날벼락 같은 소식이 전해진다. 그것은 바로 다음 날 이 부부가 회의 때문에 출발한다는 것이다. 아직 이 집에, 아이들에 익숙해지지도 않았는데 말이다.


혼자 아이들을 돌보면서 실수를 몇 번 저지른다. 아니 서로 친밀하지 않고, 낯선 돌보미와 함께 머물러야 하는 아이들에게도 이 일은 힘든 일이다. 이 아이들이 숨었는지 보이지 않아 찾아다니지만 결국 찾지 못한다. 해피 앱은 아직 익숙하지 않다. 갑자기 나타난 가사 도우미 아줌마는 아이들이 문밖에서 집에 들어오지 못해 추위에 떨고 있었다고 말하면서 적대감을 드러낸다. 로완의 입장에서는 억울한 일이다. 아이들도 매디를 적대적으로 대한다. 쉽지 않다. 하지만 진짜 문제는 밤에 벌어진다. 천정에서 들리는 이상한 소리는 제대로 잠을 자지 못하게 한다. 그리고 갑자기 집에 울리는 큰 소음은 또 어떤가. 앱으로 제어가 잘 되지 않는다. 결국 운전기사 잭이 와서 해결해준다. 그는 아주 익숙하게 아이를 돌본다.


아이들의 적대감, 이 집을 둘러싼 과거의 사건과 소문, 밤이면 들리는 괴상한 소음 등은 긴장감을 고조시킨다. 혹시 ‘유령이 있는 것 아니야’ 하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 첨단 기계로 가득한 집에서 들리는 고전적인 유령의 발소리라니. 힘든 육아와 수면 부족과 실직에 대한 두려움과 괴상한 소문 등은 이 불안감을 더욱 강하게 만든다. 아이들이 내뱉은 으스스한 말까지. 그런데 몇 가지 의문이 생긴다. 왜 아이들 엄마는 이 소리를 듣지 못했을까? 이전 돌보미들이 떠난 이유도 이것 때문일까? 그녀를 살인죄로 기소했는데 죽은 아이는 누구지? 등이다. 이 모든 의문은 뒤로 가면서 하나씩 풀린다. 그리고 반전이 이어진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반전이다. 이 반전이 앞에 펼쳐진 몇 가지 상황을 이해할 수 있게 만든다. 개인적 취향에 완전히 맞지는 않지만 영리한 설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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