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에 울다
마루야마 겐지 지음, 한성례 옮김 / 자음과모음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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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정말 오랜만에 마루야마 겐지의 소설을 읽었다. 몇 년 전 에세이 한 편을 읽은 기억은 분명하게 나는데 소설은 기억이 가물가물한다. 인터넷 서점 목록만 놓고 보면 읽었다는 확신을 가질 만한 소설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 다만 사 놓고 오랫동안 묵혀 두고 있는 소설만 눈에 들어올 뿐이다. 늘 이 책들을 보면서 언젠가는 읽어야지 생각했는데 다른 책들처럼 기약할 수 없다. 사실 이번 소설도 이벤트에 당첨되지 않았다면 읽지 못했을 것이다. 물론 이벤트에 신청한 것이 오래전 읽은 에세이의 영향과 늘 보던 다른 책들 때문이지만 말이다. 최근 책읽기가 조금 더딘데 이 책은 용감하게 신청했다. 결과만 먼저 말하면 성공적인 선택이다.


두 편의 중편 소설이 실려 있다. 표제작인 <달에 울다>와 <조롱을 높이 매달고>다. 이 두 편의 소설을 아주 흥미롭게 읽었다. <달에 울다>는 한 편의 산문시를 읽는 느낌을 받았는데 알고 보니 시소설이라고 분류하기도 하는 모양이다. 시어처럼 풀어낸 문장과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각 10년의 세월과 병풍 속 법사의 이미지가 겹쳐지고 엮이면서 이미지를 하나씩 만들어낸다. 10대, 20대, 30대, 40대의 화자는 사과 농사를 짓고, 야에코란 여성을 그리워한다. 10년 주기의 흐름 속에 급속하게 변하는 세상이 녹아 있는데 몇 개의 상징적인 이야기로 잘 요약하고 표현했다. 작은 산골 마을의 권력과 도시로의 이탈이 나오는데 산업화의 과정 속에서 흔히 보여지는 풍경이다.


이 중편 소설 속에서 나의 시선을 강하게 끌어당기는 소재가 두 개 있다. 하나는 사과나무고, 다른 하나는 생선 껍질 옷이다. 야에코의 사과가 특별히 더 달고 맛있다고 할 때, 그 사과나무 숲에 그녀의 아버지가 묻혀 있다고 할 때, 그 죽음이 어떤 연유를 가지고 있는지 과거의 사건을 돌아볼 때, 과거의 사건 때문에 화자와 야에코가 맺어질 수 없다고 할 때 그의 삶은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멈추어 있다. 다른 사람들처럼 도시로 나갈 수 있겠지만 그는 사과 농사에 집중할 뿐이다. 그것도 홀로. 그리고 생선 껍질 옷은 그의 아버지가 2차 대전 당시 중국에서 가져온 옷이다. 이 옷에 어떤 역사적 비극이 담겨 있을지 모르지만 그가 이 옷을 입고 나타났을 때 보여준 부모의 반응은 결코 유쾌한 기억은 아님이 분명하다. 야에코 아버지를 잡으러 갔을 때 입었던 기억도 한몫한다.


<조롱을 높이 매달고>는 읽으면서 영화의 이미지를 떠올렸다. 정신 이상 진단을 받고, 집을 나와 고향인 M마을로 돌아온 그의 일상과 심리 묘사를 황폐화된 마을 풍경 속에 풀어놓았다. 그가 피리새에 작은 집착을 보이고, 이 피리새 때문에 누구도 살 것 같지 않은 마을에 살고 있는 노인을 발견한다. 그 노인을 돌보는 빨간 하이힐의 여성은 또 어떤가. 그 여성이 매춘으로 노인의 생계를 돌보는데 그 사실을 알고 그녀를 뒤좇다가 발견한 먹먹한 울음은 삶의 저 밑바닥을 떠올리게 만든다. 이것은 그가 집을 떠나기 전 전반기 40년과 M마을로 돌아와 보낼 후반기를 생각하면 그녀의 삶은 전반기에 해당할 것 같다. 끊어내지 못한 관계가 만들어내는 삶의 무게는 홀로 떨어져 나와 자신만의 삶을 살아가는 화자에 비교되는 부분이기도 하다.


3명의 기마무사 환영은 주인공이 자신의 환상과 대화하는 부분과 겹쳐진다. 현실과 환상을 오가고, 과거와 현재가 뒤섞이는 묘사 속에서 이 환상은 그가 온전한 상태가 아님을 보여준다. 황량할 것만 같은 M마을이 생각보다 많은 생명들이 살아 있음을 바다가 보여준다. 과거와의 단절을 바라며 찾아온 마을이 그가 어린 시절 한 순간을 보낸 곳이란 점도 의미심장하다. 어쩌면 이 곳은 생을 시작한 곳이기에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시발점으로 생각했는지 모르겠다. 매춘하는 딸에게 기생하는 노인이 화자에게 “자넨 마음이 가난하고 비열해!”라고 말했을 때 분노했지만 이 문장은 그 노인이라고 별다를 것이 없다. 어쩌면 노인이 자신에게 한 말인지도 모르겠다.


단순히 이야기의 줄거리만 따라간다면 이 두 편의 소설은 크게 재미가 없을 수도 있다. 하지만 간결한 문장과 시어 같은 문장들이 이미지를 만들어내고, 독자로 하여금 그 이미지를 이어가게 하면서 그 속에 머물고 빠져들게 만들었다. 그 이미지들 몇 개가 지금도 머릿속을 휘저어 놓는다. 영화로 만들면 좋겠다고 생각하는데 아마 만들면 흥행은 하지 못할 것이다. 다만 그 이미지를 영상으로 옮기고 싶은 마음에서 비롯했을 뿐이다, 이런 경험은 흔한 일이 아니다. 마루야마 겐지의 소설에 좀 더 관심을 둬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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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비 팜
조앤 라모스 지음, 김희용 옮김 / 창비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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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을 읽기 전 대리모에 대한 나의 생각은 불완전하고 단순하고 피상적이었다. 하지만 모두 읽은 지금 내가 언론을 통해 알고 있던 몇 가지 사례를 떠올리고, 이미 산업화된 사업의 시선으로 보게 만들었다. 소설을 읽다 보면 SF적인 상상력으로 발전하게 된다. 결국 대리모 대신 인공 자궁 시설에서 자라는 태아들의 모습이다. 수많은 SF 영화 속에서 이미 많이 보여준 장면이다. 어떻게 보면 이 소설 속 설정들은 그 과도기의 모습일 것이다. 아주 불편한 현실의 한 모습이다. 대리모란 것이 있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이 정도일 것이라고는 생각조차 못했기 때문이다.


얼마 전 사유리가 정자 기증으로 아이를 낳았다. 한국에서는 불법이라 일본에서 낳았다. 비혼 여성이 정자 기증을 받는 것이 불법인 나라에서 대리모가 가능해지기는 아주 먼 미래의 일이다. 하지만 이 대리모가 외국에서는 생각보다 쉬운 모양이다. 물론 일반 사람들은 상상도 못할 큰 비용이 들어간다. 실제 이 소설 속에서는 고령의 난임 부자들이나 자신의 경력을 망치길 바라지 않는 엄마들이 대리모를 통해 자신의 아이를 낳는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임신 기간이 사라지고, 대리모를 통해 낳은 아이만 받아 키운다. 당연히 이 아이들도 자신들이 직접 키우기보다 유모 등을 통해 키울 것이다. 생각이 다양한 방면으로 뻗어 나간다.


모두 네 명의 여성들이 화자로 등장해 이 산업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서로 다른 입장에서 대리모가 된 두 사람, 제인과 레이건과 이 일을 성공시켜 큰 돈과 경력을 쌓으려는 관리자 메이와 제인의 사촌이자 브로커 역할을 하는 아테 등이다. 작가는 이들 각자의 사연을 이야기 속에 녹여 내면서 점점 산업화되고 있는 대리모 제도를 보여준다. 내가 호나우도 등을 통해 알고 있던 간단한 대리모가 아니라 골든 오크스란 리조트 시설을 통해 관리, 통제되는 산업 이야기다. 수십 명의 대리모를 한 곳에 모아 놓고 관리하면서 생길 수 있는 문제점 등을 소설을 잘 보여준다. 여기에 리사 같은 아웃사이드 한 명을 넣어 순응적일 수 있는 대리모의 반전을 이끌어낸다.


이 소설의 작가도 필리핀 출신이라고 한다. 작가의 이력을 보면서 메이 유에 그녀의 삶이 상당 부분 들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메이는 대리모 산업의 성공에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있다. 그 중 하나가 바로 중국 거부의 아이를 임신시켜 골든 오크스 같은 조직을 늘리는 것이다. 사업적인 측면에서 이 대리모들을 다루면서 이 조직 구성원들까지 관리해야 한다. 순간순간 생기는 사건과 사고는 법률적인 측면까지 고려해야 한다. 작가는 메이를 단순하게 이익만 생각하는 비정한 인물로 그리기보다는 그들의 현실에 공감할 수 있게 만들어 훨씬 입체감 있게 만들었다.


제인과 레이건은 대리모이지만 그들의 출발선은 다르다. 제인은 유모일을 하다 실수로 잘린 후 어쩔 수 없이 대리모가 된 반면 레이건은 자신의 미래와 난임부부를 돕는다는 선한 의지가 결합해서 대리모가 되었다. 대리모로 지내면서 받게 되는 급여와 출산에 성공하면서 받게 되는 보너스가 당연히 이 둘의 삶에 큰 영향을 미친다. 생계를 유지하면서 아말리아란 딸까지 키워야 하는 싱글맘 제인에 비해 레이건은 부유한 아버지가 있다. 출산에 실패한다고 해도 각자가 받게 되는 충격의 강도는 아주 큰 차이가 있다. 물론 레이건은 엄마가 알츠하이머를 앓고 있다는 유전적 결함 문제를 가지고 있기는 하지만 이것은 대리모와 관계가 없다. 다만 제인에게는 돌도 지나지 않은 딸과 떨어져 지내면서 생기는 불안감이 강하게 작용하고, 이것이 후반부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아테. 열심히 일하면서 성공적인 경력을 쌓았지만 병에 걸려 더 이상 보모일을 하지 못한다. 대신 그녀는 자신의 인맥을 통해 필리핀에서 온 여성들을 보모 등으로 소개한다. 선의에서 한 일이지만 소개비가 들어오기도 한다. 제인에게 보모일을 소개한 것도, 제인의 실수로 잘린 후 대리모로 연결시켜준 것도 아테다. 당연히 그녀는 소개 수수료를 받았다. 받지 않을 이유가 없지 않은가. 하지만 딸과 떨어져 지내는 제인에게 아테가 저지른 몇 가지 사소한 실수는 큰 공포로 돌아온다. 이 공포는 대리모 문제로 태아에 이상이 생길 수 있다고 생각하는 실제 유전적 부모와 연결된다. 그리고 이 공포와 두려움을 골든 오크스는 적절하게 이용해 대리모를 통제한다. 일상의 산모들을 생각하면 과도한 통제라는 느낌이 강하게 들지만 거액의 산업이라면 다를 수 있다.


솔직히 말해 부분 부분은 재밌고 잘 읽혔다. 긴 시간을 들여 읽기에는 조금 힘든 순간도 있었다. 하지만 후반부로 가면서 쉼없이 달리게 만들었다. 예상하지 못한 상황들이 이어지고, 새로운 사실들이 하나씩 밝혀지기 때문이다. 소개글처럼 이 소설은 단순히 대리모 문제만을 다루지 않고 다양한 인종적, 경제적, 계급적 문제들을 다룬다. 대리모의 학력이나 인종 등을 따지는 부분이 나오는데 이것도 현실의 문제를 그대로 보여주는 대목이다. 에필로그는 어떻게 보면 해피엔딩이지만 다른 시각에서 본다면 이 대리모 제도가 우리 주변에서 일상적인 것으로 변할 수 있다는 암시일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전통적인 모성애를 다시 생각하게 만든다. 10개월 동안 자신의 배속에 품고 있던 시절이 끝났음을 알려주기 때문이다. 한동안 생각의 가지들이 여러 곳으로 뻗어 나갈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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꼭두각시 조종사
요슈타인 가아더 지음, 손화수 옮김 / 현대문학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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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오래 전 <소피의 세계>를 아주 재밌게 읽었었다. 3권으로 출간된 책을 정신없이 읽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현대로 넘어오면서 나의 이해력이 딸려 재미가 조금 덜했지만 서양철학에 관심있는 초심자용으로 최소의 소설로 기억하고 있다. 그래서 이후 나온 그의 책 몇 권을 더 샀다. 당연히 그 책 읽기는 기약 없는 일이 되었지만 언젠가 <소피의 세계>를 다시 한 번 읽고 싶다는 마음과 함께 가슴 한편에 품고 있었다, 오늘 이 글을 쓰기 위해 인터넷 서점으로 작가의 작품들을 검색하니 내가 놓친 책들이 생각보다 많이 있다. 음… 이 책들은 일단 미루어 두자.


이번 책의 선택은 단순하다. 앞에서 말한 <소피의 세계>를 재밌게 읽었기 때문이다. 가끔 어떤 책을 선택할 때 작가 이름만 보고 책 내용은 확인도 제대로 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이번도 마찬가지다. 노년의 언어학자를 주인공으로 오늘날 유럽 대부분 언어의 뿌리인 인도유럽어족을 탐구한다고 했는데 솔직히 이 언어 부분은 읽으면서 하나도 이해를 하지 못했다. 나의 외국어 이해 능력도 부족하다. 하지만 이 부분을 잘 모른다고 소설을 이해하는데 큰 어려움이 있는 것은 아니다. 언어학이 목적이 아니라 수단으로 활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 부분에 관심이 있다면 새로운 재미를 누릴 수 있을 것이다.


주인공의 이름은 야코브 야콥센이다. 학교 교사인데 신문 부고란을 읽고 옛 스승의 장례식에 참석한다. 그가 스승과의 일화를 말하는데 유족들이 의심의 눈빛을 보낸다. 고인의 손녀인 윌바가 그의 말에 딴지를 건다. 그와 언어학에 대화를 나누는데 이때만 해도 이 부분이 의미하는 바를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소설의 시작에 나오는 앙네스에게 보내는 편지 형식도. 그가 절친인 펠레에 대해 이야기할 때도 이 인물이 실존하는 사람이 아니라 꼭두각시란 것을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펠레 때문에 그가 이혼했다고 했을 때조차도 말이다. 작가는 중요한 사실을 숨긴 채 중간에 하나씩 풀어내는데 이때마다 앞에서 벌어진 일들을 돌아보게 된다.


야코브가 장례식에 가는 것은 그 인물들을 개인적으로 알기 때문이 아니다. 아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 습관처럼 찾아가는데 그 이면에는 대가족에 대한 선망이 깔려 있다. 장례식장에 가기 전 그는 고인에 대해 조사하고, 그와의 관계에 대해 치밀한 이야기를 만들어 놓는다. 모른 채 이야기를 읽다 보면 그가 만들어낸 이야기들이 사실처럼 다가온다. 많은 장례식장에서 큰 문제없이 지나갔는데 한 장례식장에서 그는 큰 실수를 한다. 고인의 가장 중요한 부분을 놓쳤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일로 앙네스에게 관심을 받고, 그녀에게 편지를 쓰게 된다. 이 소설이 편지 형식으로 시작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읽다 보면 두 번 크게 놀란다. 펠레가 꼭두각시란 사실을 알게 되는 순간과 장례식장의 고인과 직접적인 관계가 있는 것은 아니란 사실이다. 펠레와 대화를 나누면서 언어학에 대한 이해와 지식을 쌓고, 어린 시절 왕따의 괴로움에서 벗어나지만 펠레와의 관계가 깊어지면서 아내와 불화가 생기고 이혼하게 된다. 만약 인형극으로 이 대화를 본다면 재밌는 무대가 될지 모르지만 일상 생활에서 자주 본다면 소설 속 그의 학생들 같은 반응이 나올 것이다. 장례식장의 고인에 대한 가공의 관계는 이 소설이 풍부한 지식을 전달하는 지식소설임을 알려준다. 고인의 분야에 따라 전달하는 지식은 바뀐다. 물론 그에 따라 언어학에 대한 이야기도 같이 나온다.


거짓과 사실이 교묘하게 섞였고, 오해와 진실이 서로의 이해 속에서 엮인다. 윌바와의 만남이 그의 거짓을 밝혀내는 역할을 하는 동시에 사실을 오해하게 만들기도 한다. 오랜 시간이 흐르고, 서로가 일정한 거리를 두고, 좀더 편안하게 대할 때 이 둘의 관계는 미묘한 흐름을 가진다. 아는 것을 안다는 사실이 주는 안정감과 약간의 불안감이 이 둘의 대화 속에 묻어 있다. 그리고 처음 그가 에리크 룬딘의 장례식장에서 느낀 데자뷔는 후반부에 예상하지 못한 사실을 풀어놓는다. 그의 이야기 중간 중간에 나왔던 몇 가지 사실들이 엮이면서 만들어진 사실이다. 소설을 다 읽을 때는 발견하지 못했는데 이 글을 쓰면서 그 문장을 발견하고 이 소설이 얼마나 치밀하게 구성되고 전개되었는지 깨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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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집에 사는 네 여자
미우라 시온 지음, 이소담 옮김 / 살림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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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의 1년만에 미우라 시온의 새로운 소설을 읽었다. 전작 <사랑 없는 세계>도 흥미로웠지만 이번 작품도 재밌다. 너무 낯익은 작가 이름이라 많은 소설을 읽은 것 같은데 집에 사놓은 책들이 많은 것이지 읽은 책은 몇 권 되지 않는다. 사실 이런 작가들의 작품들이 책들이 상당히 많다. 한두 권 읽고 마음에 든 작가들의 작품을 한때 열심히 사 모은 덕분이다. 뭐 지금도 마찬가지다. 새로운 작가가 나오면 이런 책더미는 더 쌓이는데 요즘 조금 절제하고 싶은 마음은 있지만 실제는 잘 되지 않고 있다. 몇 번이나 글로 쓴 듯한데 어느 순간에는 읽었는지 불명확한 경우도 있다. 다행이라면 한때 열심히 서평을 쓴 덕분에 대부분 확인이 가능하다는 정도랄까.


신간의 경우 독서 여부를 확실히 알 수 있다. 재간이 아닌 경우에 한해서다. 이 소설이 2019년 일본 드라마 원작이었다고 하는데 소설을 읽으면서 드라마는 어떤 느낌일까 궁금했다.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열심히 일본 드라마를 봤기에 이런 생각을 하게 된다. 이 글을 쓰면서 드라마에 대한 정보를 찾아보니 반가운 배우 이름이 보인다. 한때 그녀의 출연작을 열심히 찾아본 적이 있었다. 그리고 원작과 다른 설정들이 눈에 들어온다. 개인적으로 원작의 이미지가 많이 바뀔 것 같다. 정확한 평가는 드라마를 본 후에 바뀔 수도 있다. 특히 유키노의 경우에 말이다.


소설의 분위기는 크게 두 번 바뀐다. 첫 번째는 열리지 않는 방이 열리면서 갓파 미라가 발견되고, 이 순간 화자가 까마귀로 바뀌면서부터다. 그 다음은 위기에 처한 사치의 상황에서 나온다. 화자가 영혼이란 사실을 알려주기 때문이다. 처음 읽을 때만 해도 전혀 예상하지 못한 전개와 구성이다. 그런데 이런 전개에도 불구하고 크게 위화감을 느끼지 않는다. 이야기의 전개 과정 속에 자연스럽게 녹아 있기 때문이다. 물론 어떤 장면에서는 초자연적 현상이라고 불릴만한 사건도 있다. 그 상황이 누군가에게는 공포스럽게 다가왔을지 모르지만 작가는 보는 시각에 따라 코믹할 수도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개인적으로 이 장면과 이후 벌어지는 몇 가지 에피소드가 아주 재밌었다.


한 집에 네 명의 여자가 사는 것이 이상한 일은 아니다. 하지만 이 네 명의 여성들이 어떻게 모였는지, 그들의 일상이 어떻는지 들여다보는 것은 다른 문제다. 자수를 놓는 사치를 중심으로 놓고, 그녀의 엄마인 쓰루요, 이상하고 우연한 만남을 통해 알게 된 유키노, 유키노를 통해 다시 연결된 다에미 등이 한 집에 같이 산다. 그런데 이 집이 우리가 알고 있는 일본의 작은 주택이 아니다. 도쿄에 위치해 있지만 넓은 부지를 가지고 있다. 소위 말하는 땅부자인데 이 부동산 개발을 통해 자산을 늘릴 생각을 이 모녀는 하지 않는다. 현상 유지하고 노년에 자금이 부족하지 않으면 된다는 생각이다. 물론 불안감은 있다. 사치의 불안감이 몇 번이나 나올 정도니까.


네 명의 여자가 함께 살지만 연애 비슷한 것을 그려내는 인물은 세 명이다. 당연히 엄마인 쓰루요가 있고, 전 남친의 스토킹 때문이 이 집에 들어와 살게 된 다에미와 집에서 자수만 놓으면서 사람들과 만날 기회가 거의 없는 사치 등이다. 미녀이지만 존재감이 거의 없는 유키노의 연애 이야기는 소설 속에서는 등장하지 않는다. 드라마에서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설정이 나오지만. 작가는 이 네 명의 연애 이야기는 작은 에피소드 정도로 다룬다. 진짜 이야기는 이 네 명의 여성들이 함께 머물면서 보고 느끼고 경험하는 일들을 그려내는 것이다. 느슨한 연대라는 표현이 딱 맞다. 하지만 이 연대는 아주 강력하게 힘을 발휘한다. 언젠가 서로 헤어질 수 있지만 지금 현재 그들의 빈 공간을 채워주는 역할을 한다.


그렇게 길지 않은 소설이지만 상당히 많은 이야기가 담겨 있다. 쓰루요의 과거, 태어날 때부터 아버지가 없었던 사치, 늘 경비실 같은 곳에 살면서 이 모녀 주변에 머문 야마다 등이 미묘한 관계 속에서 상상력을 북돋는다. 그리고 순간 순간 일어나는 작은 에피소드는, 특히 유키노의 물재난 이야기는 하나의 관계를 만들어내는 역할을 한다. 유키노에겐 사치가, 사치에겐 가지가 등장한다. 도배를 위해 온 가지에 대한 연심을 품고 있는 사치의 순수하고 엉뚱한 행동은 또 다른 재미다. 이런 그녀를 행동으로 옮기게 하는 인물은 유키노다. 다에미가 전 남친에게 스토킹 당하면서 흔들리자 이것을 바로 잡아준 인물도 역시 유키노다. 드라마에서는 불륜녀로 만들어 놓았으니 내가 불만일 수밖에.


느슨한 연대 속 네 여자의 관계는 어떤 특별한 감정에 휘둘리는 장면이 나오지 않는다. 모녀지간인 사치와 쓰루요도 마찬가지다. 이들은 각자 역할과 순서를 정하고 집안에서 행동한다. 다만 남자가 없다 보니 다에미의 스토킹이 신경 쓰인다. 자신들이 사는 곳을 숨기기 위해 택시를 타면서 경제에 큰 타격을 입자 역공을 멋지게 펼치지 않았던가. 그리고 각자 자신들의 삶에 충실하다. 일정 거리를 유지한 채 같이 살아간다. 이것이 이들의 관계를 더욱 견고하게 만든다. 새로운 가족의 모습이라고 해도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최근 가족을 다양한 형태로 다루는 작품들이 나오고 있지 않은가. 개인적으로 이 다음 이야기가 궁금한데 더 나왔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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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의 시민들
백민석 지음 / 열린책들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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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백민석이 러시아 도시들을 돌아다니며 보고 느낀 것을 적은 여행 산문집이다. 백민석의 소설을 읽은 지 상당히 오래되었다. 이미지만 희미하게 남은 <목화밭 엽기전>이 다른 소설의 이미지를 모두 삼켜버렸다. 그 후 몇 권의 소설을 더 사고, 한두 권 정도 소설을 읽었지만 그 첫 이미지가 너무 강렬했다. 그 이미지를 이번 여행 산문집을 통해 조금이나마 희석시켜보려고 했는데 이 책을 모두 읽은 지금 그가 찍은 사진과 감상들이 조금씩 그 자리를 대체하고 있다. 반가운 일이다. 그의 글에서 본 몇 개의 여행 감상은 여행 팟캐스트들에서 들었던 러시아 여행의 이미지를 새롭게 고쳐주는 역할까지 했다.


그가 지닌 러시아의 이미지는 독재와 냉전 시절 구축된 것들이다. 나 자신도 이 이미지에서 완전히 자유롭지 못하다. 그 시절 영화나 드라마나 소설 등에서 소련은 악의 축이었다. 너무나도 분명했기에 의심할 필요조차 없었다. 소련이 무너진 후 자본주의가 그 자리를 비집고 들어가면서 일어난 수많은 사회문제를 다룬 영화나 소설 등을 읽었지만 쉽게 그 이미지는 무너지지 않았다. 어쩌면 인터넷에 떠도는 러시아 불곰 이미지가 그 자리를 대체했는지 모르겠다. 푸틴마저도 이 불곰 이미지와 같이 묶여 있다. 그런데 작가가 찍고, 만나고, 언어가 통하지 않는 대화를 한 러시아인들은 그 이미지를 쉽게 날려버린다.


목차에 나온 ‘혼자 하는 여행은 결국 마음과 함께 하게 된다.’란 문장이 먼저 마음을 끌어당겼다. 공감하는 문장이고, 나 자신도 경험한 것이다. 뒷모습을 관찰하기 좋은 곳이란 목차와 사진만 보면 ‘뭐지?’하는 생각이 들지만 글 속으로 들어가면 사진 속 사람들의 시선이 향한 곳으로 나의 눈도 같이 간다. 그리고 그가 사람들의 동의를 구한 후 사진을 찍고, 일정 거리를 두고 촬영했다는 글을 읽고 다시 사진을 쳐다본다. 망원렌즈로 당겨 찍었다는 사실에 놀란다. 어떤 사진은 돈을 주고 찍기도 했다는데 그 평범한 모습이 왠지 더 시선을 끈다.


영어가 제대로 통하지 않는 러시아 여행은 분명 불편하다. 하지만 친절해도 너무 친절한 러시아 시민들의 참견은 이 불편함을 상당히 많이 지운 것 같다. 러시아어로 말을 내뱉고, 그를 새로운 곳으로 끌고 가는 모습은 어떻게 보면 상당히 위험하지만 그가 겪은 시민들은 아주 친절했다. 표정 뒤에 숨겨진 친절함을 그는 여행 기간 중 아주 많이 경험했다. 물론 언어가 통하지 않아. 그 나라의 문화를 잘 몰라 실수한 부분의 이야기는 혹시 그 나라를 여행할 독자에게 좋은 안내서가 되기도 한다. 대표적인 것이 미술관에서 겉옷을 벗는 것이다. 그리고 몇 가지 여행 팁은 참고할 만하다.


푸시킨. 이 이름이 러시아에 얼마나 큰 의미가 있는지 다른 사람의 글에서 읽었지만 그렇게 와 닿지 않았다. 그런데 이 책에서 다시 이 이름을 만나면서 어느 정도 이해가 되었다. 구 소련이 무너지면서 사라진 수많은 동상들을 떠올리면서 압도적인 1위의 동상이 푸시킨이라는 것과 레닌을 제외하면 대부분 문화 예술계 인물들 동상으로 가득하다는 글은 아주 인상적이다. 도스토옙스키의 동상이 늘 구부정하다고 했는데 다른 거대하고 영웅적은 모습의 동상과 크게 비교된다. 또 그가 둘러본 미술관이나 박물관이나 공연장의 풍경은 기존에 가지고 있던 소련의 이미지를 단숨에 날려버린다.


시베리아 횡단 열차에 대한 환상을 다루는데 나 자신도 조금은 가지고 있다. 이 열차를 타고 유럽 여행을 시작한 사람들의 이야기도 가끔 듣고 읽었다. 개인적으로 기차 여행을 좋아하지 않지만 하나의 환상처럼 자리 잡고 있다. 아마 예전에 읽은 책의 이미지가 좋은 쪽으로 변했을 것이다. 러시아 정교에 대해 작가가 보고 느낀 감상은 피상적인 이미지를 새롭게 만들어주었다. 공산주의 본진에서 살아남았다는 사실을 뛰어넘는 현실을 보여준다. 그리고 다시 도끼옹으로 돌아오는 것은 그의 소설이 전 세계 독자에게 끼친 영향 때문일 것이다. 도스토옙스키 게임이란 것이 있다니 놀랍지 않은가. 언제나처럼 이런 여행 산문집을 읽으면 그 곳을 돌아다녀보고 싶다. 이렇게 쌓인 가보고 싶은 나라와 도시가 얼마나 많은가.


표지 사진 속 아이들 옷차림을 ‘이례적일 만큼 후줄근’하다고 했는데 쉽게 납득이 되지 않는다. 내가 우리 주변에서 너무 이런 옷차림의 아이들을 많이 본 탓일까? 어쩌면 작가가 모스크바나 상트페테르부르크의 학생들과 비교한 탓인지도 모른다. 사진 속 아이들은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타고 내린 옴스크의 변두리에서 만났다. 이 동네는 변두리 빈민가였다고 한다. 이런 시선은 지역의 문제일 수도, 그가 작은 범위에서 경험한 편향된 결과일지도 모른다. 작가가 찍은 수백 장의 인물 사진 중 미소를 담지 않은 유일한 사진이란 표현은 또 다른 방식으로 이해하려고 하지만 계속 마음에 걸린다. 작은 딴지를 하나 걸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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