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순간에
수잰 레드펀 지음, 김마림 옮김 / 열린책들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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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으면서 자신에게 수없이 많이 묻게 되는 책이다. 나라면 과연 어떻게 했을까? 하는 물음이다. 선택과 도덕적 결정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님을 이 소설을 잘 보여준다. 제목대로 한순간에 일어난 사고와 그 이후 각자의 선택이 가져온 후폭풍을 죽은 사람의 전지적 시점에서 자세히 다룬다. 그리고 아주 무거울 수 있는 이야기인데도 작가는 흥미진진하고, 잘 읽히는 전개로 이야기를 풀어놓았다. 처음 예상한 것보다 훨씬 잘 읽혔고, 그 이야기의 무게에 가슴이 무거웠고, 어느 순간에는 작은 이야기에 눈시울을 붉혔다. 나의 사고실험과 이전까지 삶을 돌아보면 과연 내가 밥처럼 행동하지 않을 수 있을까 하는 물음을 던질 수밖에 없다.


열여섯 고등학생 핀이 화자다. 그리고 그녀는 두 가족이 함께 스키 여행에서 사고로 죽었다. 두 가족은 핀과 엄마의 절친 캐런 이모 가족이다. 여기에 핀의 절친 모린과 클로이 언니의 남자 친구 벤스가 동행한다. 목적지에 잘 도착해 식사하러 가는 도중 차가 고장난 카일을 태운다. 하지만 가는 도중 동물을 피하려다 차가 가드레일을 박는다. 이 가드레일이 튼튼하게 차를 받쳐주었다면 작은 해프닝을 끝났을 테지만 캠핑카는 추락한다. 이때 핀이 바로 죽었다. 자신이 죽었다는 사실을 알고 가족들 주변에 머물면서 이들이 겪게 되는 상황을 위에서 내려다본다.


핀은 사고 이후 상황을 단순히 지켜보기만 할 뿐이다. 죽은 딸의 옷과 신발을 벗겨 모에게 주는 것을 보고, 클로이 언니 커플이 함께 구조대를 찾아 떠나는 곳을 따라가면서 그들에게 일어난 상황을 보고, 가장 상대적으로 멀쩡한 엄마와 카일이 구조를 요청하기 위해 떠나면서 겪게 되는 일들을 본다. 그리고 캠핑카 안에 남은 사람들이 각자의 생존을 위해 어떤 선택을 하는지도. 떠나거나 머문 사람들 모두 자산의 바람과 달리 선택을 강요받는 순간이 생기고, 이 선택이 이후 삶에 큰 영향을 미친다. 작가는 이 과정을 차분히 보여주면서 그들의 두려움이 허상이 아님을 알려준다.


선택은 언제나 일순위가 있다. 딸의 옷과 신발을 모에게 줄 때 절친 캐런 이모는 감정이 상했다. 클로이 커플이 눈 속을 헤매면서 거리가 멀어질 때 잠시 밴스가 주저했지만 앞으로 나아간 것도 두려움 때문이다. 카일이 헛눈을 밟아 빠졌을 때 살기 위해 그의 손을 놓으려고 한 엄마의 심리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밥이 오즈가 자신의 개에게 먼저 물을 먹이겠다고 욕심을 낸 것과 죽을지도 모르는 외부로 내몬 것은 어떤 것일까? 덩치는 아주 크지만 겨우 열세 살 정신지체가 있는 아이를 말이다. 위험을 느꼈다고 거짓말을 하고, 수색할 때 방향도 반대로 알려줬다면.


“두려움은 변명이 될 수 없다.” 이 문장은 이 소설 속에서 벌어진 상황과 선택에 대한 가장 간결한 답변이다. 이해는 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 상황을 계속 용인해줄 수는 없다. 열여섯 모가 엄마가 구조를 요청하러 갈 때 자신이 받은 신발을 다시 준 것이나 책과 눈과 불을 이용해 물을 만든 것은 두려움에 먹히지 않고 최선의 상황을 만들고 유지하려고 노력한 결과다. 하지만 밥과 그 가족은 어땠는가? 그들 가족은 뭉쳐있었지만 한 것이 아무 것도 없다. 엄마가 눈으로 캠핑카를 막을 때 도와준 것을 제외하면 말이다. 기절한 아빠를 제대로 돌본 것도 아니다.


인간관계는 위기 상황에서 드러난다는 말이 있다. 작가는 이 상황을 극단으로 몰아넣고, 두려움과 마주한 사람들의 선택과 결정을 보여준다. 단순히 이 선택에만 집중하지 않고 그 이후 이 일이 일으킨 여파를 다루면서 용서와 회복을 이야기한다. 여친을 버린 밴스가 어떻게 되었는지, 카일의 손을 놓으려고 한 엄마가 어떻게 그를 피하는지, 병실에 남겨진 물품을 통해 핀의 엄마가 자신의 딸 모를 어떻게 돌보게 되었는지 등을 간결하지만 섬세하게 그려낸다. 그 고마움을 알고 감사함을 전달할 때, 딸의 상실을 다시 알게 되는 그 순간 울컥했다. 그리고 이들은 조금씩 회복한다. 하지만 두려움이란 변명을 내세운 캐런 이모 가족은 다른 길로 간다. 올해를 마무리하는 순간 아주 멋진 소설 한 권을 읽었다. 일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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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책의 책 - 100개의 주제로 엮은 그림책 북큐레이션 북
제님 지음 / 헤르츠나인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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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대로 그림책에 대한 책이다. ‘100개의 주제로 엮은 그림책 북큐레이션 북’이란 부제가 붙어 있는데 이것은 2부부터다. 그림책에 한정해서 이야기를 다루고 있지만 읽다보면 자신이 좋아하는 분야의 책들로 큐레이션하는 것도 가능하다. 얼마 전 읽었던 일본 추리소설에서도 추리 소설 장르만 가지고 전시회를 여는 장면이 나왔다. 나눈다면 정말 다양한 방식으로 나눌 수 있다. 이 책에서는 100개의 주제로 나누었지 않은가. 물론 이렇게 나누기 위해서는 그 분야에 대한 넓고 깊은 지식이 있어야 가능하다. 소개글에 나온 15년간 기록한 1만여 권의 목록이 있었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그리고 단순히 그림책뿐만 아니라 동화, 청소년책, 소설, 에세이 등 다양한 분야의 책을 사랑하는 마음을 담고 있어 인식의 폭을 넓힐 수 있다.


100개의 주제로 나누기 전 그림책 북큐레이션 현장을 다룬 도서관 이야기를 보면서 오랫동안 도서관에 가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집에 있는 책 읽기도 벅차기에, 신간 읽기에 바빠, 사 놓고 묵혀두고 있는 책이 많아, 잊고 있던 공간이다. 예전에 한창 책을 빌려 읽을 때 그곳은 새로운 세계를 열어주는 공간이었다. 인터넷 게시판에서 본 책 정보를 들고 달려가 열심히 검색하고 찾아 대출해 읽던 그 시절 말이다. 그때 얼마나 긴 목록을 만들면서 한 권씩 대출해 읽었던가. 그리고 오래 전 도서관에서 아이와 함께 부모들이 앉아 책을 읽는 것을 보고 얼마나 훈훈하고 부러웠던가. 물론 늦은 밤 잠자리 들기 전 가끔 아이에게 책을 읽어주지만 그 장면과는 다른 풍경이다. 한 번 데리고 가고 싶지만 이젠 코로나 19로 더 힘들다.


이 책을 선택한 이유는 간단하다. 그림책을 다루었기 때문이다. 아직 나에게 그림책은 그렇게 흥미로운 분야가 아니다. 아이에게 그림책을 읽어주고, 관심을 가진 작가가 몇 명 있지만 딱 거기에 멈춰 있다. 내가 좋아하는 장르들의 경우 꼬리에 꼬리를 물고, 책을 다룬 책에서 새로운 책 목록을 만들면서 책탑을 쌓아가지만 이 분야는 새로운 도전이다. 집에 있는 그림책들 대부분도 주변 사람들이 준 것이다 보니 전집류가 많다. 개인적으로 선호하는 출판사의 그림책을 몇 권 사기도 했지만 내 책만큼은 아직 아니다. 나이에 맞지 않아, 아이가 흥미를 보이지 않아 그냥 꽂아두거나 읽을 생각이 없는 책들이 상당히 많다. 아이가 좋아하는 책은 같은 책이라도 몇 번이나 읽어달라고 하지만 내가 관심을 둔 책은 한 번도 겨우 읽는다. 대표적인 책이 모리스 샌닥의 <괴물들이 사는 나라>다. 다시 읽자고 했을 때 ‘읽었잖아’란 대답으로 그냥 책장 어딘가로 들어갔다.


나 자신이 체계적으로 책을 읽지 않다 보니 그림책도 중구난방으로 읽어준다. 주로 아내가 출판사별로 내놓은 책들이나 소파 위에 놓인 책을 읽는데 호기심의 정도에 따라 한 번 읽거나 연속해서 두 번 읽어주는 경우가 있다. 특별히 글자가 많지 않으면 두 번 읽는 것이 어렵지 않지만 어떤 책은 생각보다 글이 많아 힘든 경우도 있다. 공룡사전을 들고 와 전부 읽어달라고 할 때는 정말 난감하다. 뭐 대충 몇 개 읽고 지나가지만. 어른과 다른 관점을 가지고 있기에 쉽게 예측하기 어렵다. 장난감 가지고 놀기를 더 좋아하기에 책을 내가 먼저 읽어주면 살짝 관심을 보여주는데 이것도 잠시일 뿐이다. 이때 도서관의 분위기라면 어떨까?


100개의 주제로 나누어진 책들을 천천히 읽다 보면 속도가 느려진다. 간단한 책 소개글들이 주제별로 묶여 있는데 표지와 작가들과 출판사 이름을 하나씩 확인하다 보면 예상한 시간보다 더딘 책읽기가 된다. 그냥 휙하고 읽고 지나갈 수 있지만 왠지 저자가 분류하고 소개하고 있는 책들이 나의 시선을 잡고 놓아주지 않는다. 단숨에 끝까지 읽을 수는 없지만 차분하게 눈으로 읽고, 책장을 괜히 한 번 뒤져본다. 혹시 집에 그 책들이 있는지 확인하고 싶어서. 이전에 읽었던 책도 있는지 눈을 크게 뜬다. 생각보다 이 책에 소개된 책 중에 읽은 책은 그렇게 많지 않다. 그런데 읽으려고 묵혀둔 책들이 눈에 들어오면서 마음을 새롭게 다잡는다. 자신할 수 없는 마음이지만 작은 씨앗 하나를 가슴 속에 심어 놓았다. 그것은 그림책도 이제 더 많은 눈길을 줘야 한다는 것이다.


100개의 주제들을 읽으면서 내가 놓친 수많은 재미와 감동을 떠올렸다. 최근 더욱 한쪽으로 치우치는 독서를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시간 부족은 선택과 집중이란 문제에 부딪치고 그 선택은 언제나 한쪽으로 치우친다. 그렇다고 그 분야의 전문가가 될 정도로 파고들지도 않는다. 욕심만 더 늘어나는 것일까? 저자가 풀어낸 매력적인 소개들이 이 욕심만 부채질하는 것일까? 물론 아니다. 편협했던 시선을 바로 잡아준다. 특정 출판사나 그림에 혹했던 나를 더 넓게 보게 만들었다. 대충 눈길만 준 주제나 그림책에 좀더 시선을 오래 두게 한다. 그림책에서 이런 이야기도 다루나 하고 놀랐던 주제들도 많아 읽으면서 얼마나 놀랐던가. 나보다 더 자주 열심히 아이에게 그림책을 읽어주는 아내에게 주고 참고하라고 하고 싶은 책이다. 내가 준 책은 거의 읽지 않지만 그림책을 아주 열심히 읽어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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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랑한 갱은 셋 세라 명랑한 갱 시리즈
이사카 고타로 지음, 김선영 옮김 / 현대문학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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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랑한 갱 시리즈 세 번째 작품이다. 1권과 2권을 사 놓고 오랫동안 묵혀 두고 있는 사이에 3권이 나왔다. 일본 출간 기준으로 보면 3권이 2015년도에 나왔으니 한국 번역도 늦은 편이다. 아내가 읽을 책을 추천하라고 했을 때 1권을 권했더니 재밌다고 한 기억이 난다. <골든 슬럼버>를 재밌게 읽었다고 하면서 아는 척도 하는데 2권은 읽지 않았다. 워낙 책 읽기를 좋아하는 편이 아니다 보니 방송에 나오는 작가의 작품을 전달해도 그냥 덮어둔다. 이 책을 들고 읽을 때 머릿속을 스쳐 지나간 단상이다. 당연히 역주행의 기다림은 가슴 한 켠에서 꿈틀거린다. 기약할 수 없는 계획이지만.


최근에 서평은 쓰지 않았지만(언제 쓸지 모르지만) 몇 권의 이사카 고타로 소설을 읽었다. 이전에 읽을 때는 깨닫지 못한 그만의 독특한 문체가 최근에는 읽으면서 눈에 들어왔다. 약간의 거부감, 독특함, 기발함 등이 전해졌는데 이런 부분들은 이전에는 전혀 느끼지 못했다. 이번 소설을 읽으면서는 약간 덜했는데 익숙해져 그런 것인지, 아니면 작품의 성격 탓인지 잘 모르겠다. 하지만 여전히 가독성과 재미 측면에서는 취향 저격이다. 전작들을 읽지 않아 놓치는 부분들도 많겠지만 3편만 읽어도 큰 무리가 없다. 역자 후기를 보면 세 권이 어떤 이야기를 다루는지 간단하게 알려줘 참고할 수 있다.


명랑한 갱들이 은행을 터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순조롭게 은행털이가 진행되는데 마지막에 경비원이 던진 경찰봉에 일행 중 한 명의 팔이 다친다, 구온이다. 유키코의 아들 신이치가 일하는 호텔로 장면이 바뀐다. 신이치가 근무를 잘 하는지 둘러보기 위해서다. 그런데 이 호텔 로비에서 상당히 기분 나쁜 손님이 나타난다. 신이치를 괴롭힌다. 구온이 소매치기한 정보에 의하면 프리랜서 기자다. 이 소설의 진짜 악당인 히지리다. 그의 지갑을 돌려주기 위해 방을 찾다가 공격당하는 그를 구해준다. 그때 은행털이범에게 경찰봉을 던진 경비원 인터뷰 장면이 방송에 나온다. 구온이 다친 부위가 히지리의 눈에 들어온다. 관계가 꼬이는 순간이다.


이 일이 생긴 후 나루세 일당들에게 이상한 일이 생긴다. 미행과 성추행이나 폭력 등을 둘러싼 협박이 일어난다. 다행이라면 이들이 보통 사람과 달라 이 상황을 잘 피한다는 점이다. 나루세는 이 상황이 왜 생긴 것인지 알게 된다. 바로 히지리가 자신의 도박 빚을 없애기 위해 꾸민 작전이다. 그리고 호텔에서 히지리에게 일어난 일을 조사한다. 누가 어떤 의도를 가지고 이런 일을 했는지. 이 과정에서 히지리의 기사 때문에 최소 3명 이상이 죽었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무책임하고 자극적이고 악의적인 기사가 한 인간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잘 보여준다. 그가 얼마나 추악한 인물인지 알려주는 대목은 뒤로 가면서 하나씩 드러난다.


시리즈 앞권을 읽지 않아 이 갱들이 어떤 성격인지 정확히 알 수 없다. 히지리를 자신들이 처리하면 될 텐데 그들은 그에게 손도 데지 않는다. 히지리는 협박의 강도를 높인다. 자신의 도박 빚을 없애라고 날짜까지 통보한다. 은행에서 훔친 돈이면 가능하지 않을까 하는 순진한 생각도 하지만 이 한 번으로 끝낸다면 그렇게 나쁜 놈이 아닐 것이다. 이 위기 상황을 탈출할 방법은 무엇일까? 이 소설의 재미는 바로 이 부분의 설계에 담겨 있다. 독특한 능력을 가진 네 사람이 힘을 합쳐 한 순간에 반전을 이루어내는 그 계획 말이다. 읽으면서 쉽게 감을 잡을 수 없었던 계획이 실현될 때 통쾌함과 약간의 씁쓸함을 느낀다. 씁쓸함은 아직 이런 기자들이 현실에 많다는 부분과 이렇게까지 해야 하는가 하는 의문 때문이다. 그리고 아내에게 2권 읽고, 3권도 읽어라고 말해야겠다. 당연히 나는 1권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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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로워도 외롭지 않다 정호승의 시가 있는 산문집
정호승 지음 / 비채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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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정호승의 시가 있는 산문집이다. 한 편의 시와 그 시를 둘러싼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방식이다. 개인적으로 이런 방식의 산문집을 좋아한다. 읽었던 시는 기억을 더듬어 감상하고, 새로운 시는 읽고 바로 시인의 의도와 나의 감상을 비교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의 기억이 부정확해 그의 시집이나 산문집을 얼마나 읽었는지 알 수 없지만 아마도 시인 중에서 가장 많이 읽은 시인에 들어갈 것 같다. 그의 초기 시집도 한두 권 읽었지만 근래 시집들을 읽으면서 비교적 왕성한 활동을 하는 시인들 시집을 더 읽게 되었다. 그런 시인들 중에 정호승 시인이 포함된다.


이번 산문집은 일흔이 된 그의 ‘삶의 외로운 흔적’과 ‘그리운 편린들’을 담고 있다. 시를 풀어낸 산문 속에서 그런 감정들을 솔직하게 드러낼 때 나의 삶을 잠시 회상하거나 피상적으로 알고 있던 시인 등의 삶을 조금은 더 알게 되었다. 어떤 산문은 여행기라고 해도 좋을 정도다. 윤동주의 무덤을 찾아간 이야기나 백두산 정상을 올라가 소변을 본 이야기 등은 왠지 시보다 산문이 더 인상적이다. 어떤 면에서 이런 글들은 어딘가에서 연재된 듯한 느낌도 있다. 그가 직장에서 일하면서 얻은 기회를 잘 활용한 것 같은데 살짝 부러운 마음도 들었다.


예전에 어디선가 동화작가 정채봉 이야기를 읽고 책을 몇 권 구해 놓은 적이 있다. 동화라 잘 읽지 않지만 그의 창작 동화에 대한 평이 너무 인상적이었다. 그런데 정채봉과의 인연을 풀어낸 시와 산문을 읽으니 다시 그의 동화에 관심이 생긴다. 물론 바로 읽겠다는 의지의 표현은 아니다. 이 산문집에서 가장 많이 나오는 인물 중 한 명이 정채봉이다. 어디에서는 형이란 호칭을, 또 다른 지면은 씨라는 호칭을 붙인 것을 보면 이 산문집이 지금 바로 모두 쓴 것은 아닐 것이란 생각이 든다. 하지만 이런 지엽적인 이야기보다 그의 병간호를 그렇게 열심히 한 부분이 내 심금을 더 울린다. 내가 가족 이외 이렇게 열심히 간호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도.


그는 직장 생활을 하면서 많은 사람을 만났다. 기자 생활도, 출판사 대표도 맡았다. 현대문학북스란 출판사 대표 시절 선인세를 둘러싼 이야기는 인간관계의 미묘함을 잘 보여준다. 친한 사람들은 선인세를 돌려주지 않고 돌려주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 사람들이 돌려줬다. 서로 힘든 것은 마찬가지일 텐데 예상외의 결과에 그가 놀랐다. 언제나 그렇지만 인간관계에 돈이 엮이면 그들의 관계가 밑바닥이 드러난다. 천상병 시인에 대한 이야기는 그에 대한 피상적인 이야기에 조금은 실체를 더 할 수 있었다. 그의 시집을 사놓고 묵혀두고 있는데 언젠가 찾으면 몇 편 조용히 읽어보고 싶다. 김수환 추기경과 법정 스님에 대한 기억들은 나 또한 그 시대를 지나왔기에 가슴 속에서 작은 울림들이 계속 이어졌다.


가족에 대한 이야기 중 어머니보다 아버지에 눈길이 간 것은 내가 아버지이기 때문일 것이다. 좋은 아버지가 되고 싶은 마음이 나 자신도 있으니까. 어린 시절 아버지와의 추억을 회상하면 별로 없는 것은 조금 아쉽지만 같이 술 한 잔 하고 엄마에게 전화해 이야기하는 추억은 지금도 찡하다. 하지만 현실의 부딪힘은 어쩔 수 없다. 군 복무 중 신춘문예에 당선되어 등단했는데 쉬운 일이 아니다. 지금도 수많은 시인과 작가들이 문단에 올라가기 위해 얼마나 노력하는가. 지금은 그럴 필요가 없다고 하지만 문단이란 집단을 생각하면 쉬운 일은 아니다. 이런 글들에서 그에게 도움을 준 스승들과 지인들에 대한 감사의 마음은 나 자신도 배워야 할 부분이다.


60편의 시가 실려 있는데 내가 기억하는 시는 몇 편 없다. 읽지 않은 시집 속 시도 적지 않다. 워낙 외우는 것을 싫어나는 성격이라 짧은 시의 강렬한 인상만 남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풍경 달다>가 대표적이다. 물론 대표적인 시 몇 편은 읽은 기억이 남아 있다. 읽은 듯한 시도 당연히 몇 편 있다. 그렇지만 그 기억과 시인의 시 창작을 둘러싼 이야기는 다른 의미로 다가온다. 그의 시에 대한 오독 이야기(<밥그릇>)도 나오는데 혹시 나도 그의 시를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런 의심을 지우는 방법 중 하나가 이 책을 읽는 것이다.


아마 10년 전에 내가 이 산문집을 읽었다면 많이 다른 느낌을 받았을 것이다. 시인이 그리워하고, 외로움을 다루고, 고마워하고, 뒤늦게 깨달은 몇 가지 감정들보다 다른 부분들에 시선이 더 갔을 것이다. 시간이 나에게 더 많은 인간관계를 맺고, 현실을 더 치열하게 살게 만들고, 이전 관계들을 다시 돌아보게 만들면서 이 산문집을 받아들이는 폭이 더 넓어졌다. 나이듦이란 것이 주는 작은 선물 중 하나다. 그의 어린 시절 추억들을 읽으면서 내 어린 시절을 떠올리며 비교하고 즐거워하고 무서워했던 순간들을 회상하며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나이 대에 따라 감상이 많이 갈릴 시가 있는 산문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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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성 탐정 이상 5 - 거울방 환시기
김재희 지음 / 시공사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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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을 쓰기 전 1권의 서평을 찾아봤다. 그런데 인터넷 서점에 내가 쓴 서평이 보이지 않는다. 분명 1권을 이전에 읽은 것 같은데 아닌 모양이다. 열심히 찾아보면서 추리한 결과 <경성탐정록>과 착각한 것 같다. 물론 한동안 <경성 탐정 이상> 1권이 책꽂이에 꽂혀 있었다. 이 두 가지 사실이 나의 머릿속에서 혼란을 일으킨 것이다. 그래서인지 나의 저질 기억력을 탓하면서 이번 소설 속 과거 에피소드를 앍고 지나갔다. 물론 이것도 저질 기억력의 탓이지만. 전작을 의식하면서 읽은 것은 전적으로 나의 실수다.


경성 탐정 이상 시리즈가 5권까지 나왔다는 소식은 반가운 일이다. 각각의 작품들을 제대로 읽지 않았기에 전체적인 평가를 할 수는 없다. 5권만 놓고 보면 전작에 등장한 인물들이 상당히 나온다. 나처럼 5권부터 읽는 독자들은 나중에 앞 권을 읽을 때 작은 재미를 누릴 수 있을 것 같다. 이것과 별개로 전체적인 재미는 예상보다 조금 떨어진다. 기대가 큰 탓이었을까? 실제 완성도 면에서 조금 허술한 부분이 있다. 구성도 치밀하지 않고, 시리즈를 처음 읽는 독자가 캐릭터를 파악하는데 약간의 어려움이 있다. 또 하나 액션 장면을 보면서 긴장감을 느끼거나 이미지를 바로 떠올리는 것이 쉽지 않았다.


첫 장면에서 한 소년이 바다를 표류하면서 동생과 헤어진다. 이 장면이 뭔가 결정적인 역할을 할 것 같은데 실제 이상이 발견한 소년들과 교동도의 슈하트 학교의 음모를 연결하는 작은 단서에 불과해 첫 장면의 의미가 많이 퇴색한다. 그리고 이번 장편 소설은 부제인 ‘거울방 환시기’처럼 슈하트 학교의 벌칙방 거울방이 중요한 트릭의 장소로 활용된다. 작가는 이 부분을 이상의 시와 연결하고, 환상과 현실을 교차하면서 어지럽게 만드는데 이 부분의 묘사도 그렇게 강렬하게 느껴지지 않아 아쉽다.


이상과 구보가 교통도의 슈하트 학원으로 가게 된 이유는 학원에서 한 여학생이 실종되었기 때문이다. 탐정 이상이 이 실종된 여성을 찾아달라는 부탁을 받고 교통도로 간다. 구보와 동행하는 와중에 이상은 자신의 후배를 자처하는 인물을 만나고, 기차 안에서는 살인사건이 발생한다. 경찰이 승객 명부를 조사했지만 이상의 후배란 인물은 없다. 전작에 등장한 여성이 주안나란 여성의 보디가드로 나와 인사를 한다. 주안나도 슈하트 학원에 가는 중이다. 이렇게 도입부를 지난 후 마주한 학원은 음모를 품고 있는 것과는 달리 너무 감정적인 교장의 행동 때문에 긴장감이 떨어진다. 하지만 이 학원에 무언가 있다는 느낌을 전해준다.


셜록 홈즈 시리즈의 조선판인 이 시리즈는 홈즈의 숙적처럼 이상의 숙적을 한 명 만들어 놓았다. 한일 두 왕조의 피를 이어받은 류 다마치가 바로 그다. 사라진 학생을 찾고, 슈하트 학원의 비밀을 파헤치는 과정은 왠지 치밀한 느낌이 없다. 적들에게 쫓기는 그들이 큰 무리 없이 탈출하는 장면에서 긴장감보다 의아함이 먼저 든 것은 나만의 착각일까? 이상이 건축 기사였다는 사실을 이용한 트릭이나 낱말풀이를 이용한 암호 해석 등은 작은 재미를 주지만 전체적인 긴장감은 떨어진다. 그리고 소설 중에 윤동주의 시집을 주문했다고 했는데 이때는 내가 알기로는 윤동주의 시집이 출간되지 않았다. 독일 나치 수용소의 만행이 대중에게 알려진 것도 2차 대전 패망 이후란 것을 생각하면 작가의 착각이거나 괴담을 강화하기 위한 장치일 것이다. 거칠지만 잘 읽히는데 뭔가 강렬함이나 구성 등이 부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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