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랙 아이드 수잔
줄리아 히벌린 지음, 유소영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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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작가 스릴러 시리즈 첫 권이다. 개인적으로 시리즈 첫 권에는 늘 끌린다. 충격적인 반전 결말의 심리 스릴러라고 하니 더욱 끌릴 수밖에 없다. 과거와 현재가 교차하는 구성으로 연쇄 살인 사건의 생존자인 테사 카트라이트를 중심으로 흘러간다. 1995년 사건 이후의 테시와 현재의 테사로 구분했는데 같은 인물이다. 호칭의 변화 때문에 목차를 보고 다른 인물이란 생각을 했는데 같은 인물이었다. 과거는 사건 이후 테시를 진찰한 심리학자와의 대화가 주를 이루고, 현재는 사형 선고를 받은 연쇄살인자 테렐이 무죄라는 생각과 그녀 주변에 감도는 불안과 공포를 다룬다.


16살의 소녀 테사가 살아난 것은 그녀의 선천적인 심장의 느림 때문이다. 그녀가 발견된 곳에서 이미 죽은 몇 명의 여성 시체도 같이 있었다. 이 이미지는 평생 그녀를 따라 다닌다. 수잔들이라고 부르는 그녀들의 몇 명의 신원조차 알 수 없었다. 만약 그때 그녀가 자신을 강간하고 죽이려고 한 연쇄살인범의 얼굴을 기억했다면 간단했겠지만 그녀는 기억하지 못한다. 살아났다고 하지만 그녀의 몸은 수많은 상처를 입었다. 그리고 병원에서 갑자기 시력을 잃었고, 어느 날 시력이 회복되었다. 심리학자와의 대화는 그 당시 그녀의 심리를 잘 보여준다.


한 아이의 엄마가 된 테사는 자신의 집 주변에 심어진 블랙 아이드 수잔을 보면 불안과 공포에 시달린다. 그녀가 테렐이 무고할 수도 있다고 생각한 이유도 바로 이 꽃들 때문이다. 책 표지에 이 꽃들이 나온다. 불안은 그녀가 사는 집에 보안 장치를 하고, 딸 찰리에게 철저하게 주의를 준다. 불안감은 그녀가 딸에게 연락이 되지 않을 때 폭발한다. 자신에게 일어난 일이 또 열네 살 딸에게 일어날 수도 있다는 불안과 공포 때문이다. 실탄을 장착한 총까지 가지고 있을 정도다. 집 주변에 심어진 블랙 아이드 수잔과 테렐의 사형집행일 확정 등으로 다시 관심을 받으면서 생긴 일들은 이 불안감을 고조시킨다.


연쇄살인의 피해자가 안심하면서 살기는 힘들다. 언제 또 그런 피해를 입을지 모르기 때문이다. 연쇄살인범이라고 잡힌 인물이 진짜가 아니고 진짜가 밖에서 그녀를 관찰하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이 집착은 더 심할 것이다. 작가는 이런 심리를 잘 다룬다. 교차하는 이야기 속에서. 과거의 기록 속에서, 싸운 것에 화가 나 무시하고 있던 기억 속에서 불쑥 과거가 되살아난다. 연쇄살인범이 보낸 협박장은 결정적으로 이 생각을 강화시킨다. 재판 증언 이후 싸운 후 사라진 단짝 리디아도 그녀에게는 하나의 공포다. 혹시 하는 감정 때문이다.


이 소설에서는 범의학의 진보를 아주 잘 사용하고 있다. 한참 CSI 시리즈를 볼 때 새로운 과학 기술이 새로운 사실을 밝혀낸다는 것을 알았는데 이 소설도 그런 상황을 잘 그려낸다. 당시 기술로는 유전자 분석을 할 수 없었던 신원 미상의 여성들 정체를 밝혀내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범인을 밝혀내진 못하지만 피해자 가족들이 가진 불안과 의심을 지우기엔 충분하다. 물론 하나의 가능성도 지운다. 테사가 자신의 불완전한 기억과 공포를 담아 몇 가지 물건들을 찾아낸다. 이것들을 검사해 안도감을 심어준 것도 과학 기술이다. 테렐의 사형이 집행 정지되기 위해서는 더 분명한 증거 자료가 필요하다.


천천히 소설을 읽으면서 피해 여성이 느끼는 감정에 조금씩 공감했다. 일상을 살아가야 하기에, 자신의 실수를 바로 잡으려고 노력하는 모습에, 새롭게 끌리는 감정에 조금씩 눈길이 옮겨갔다. 그런데 갑자기 예상하지 못한 반전이 펼쳐진다. 뭐지? 내가 읽으면서 무엇을 놓친 것이지? 늘 많은 것을 놓치지만 이런 반전은 예상 밖이다. 개인적 취향과는 조금 맞지 않다. 누군가의 말처럼 다시 읽으면 그 단서들을 찾아낼 수 있을까? 그리고 새로운 사실이 풀리면서 수많은 이야기는 요약되어 흘러나온다. 이 간단한 이야기가 상당히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사건 해결 이후의 또 다른 삶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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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을 수 있는 여자
마거릿 애트우드 지음, 이은선 옮김 / 은행나무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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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거릿 애트우드의 첫 장편소설이다. 1993년에 <케익을 굽는 여자>라는 제목으로 출간된 적이 있다고 한다. 첫 번역이라고 생각했는데 잘못 알고 있었다. 이 소설은 탈고한 지 4년 만에 출간되었다. 가끔 유명작가의 첫 소설들이 어떤 경로를 통해 출간되었는지 볼 때마다 놀란다. 그리고 이 작가가 얼마나 왕성한 작품 활동을 하고 있는지 떠올리면 더욱 놀라운 일이다. 출간될 당시 페미니즘이 정치적 쟁점으로 부상하던 시기였다고 하는데 이 때문에 페미니즘 운동의 소산으로 간주한 사람이 있다고 한다. 작가는 이 작품을 ‘프로토페미니즘 문학’이라고 말하고 싶어 한다.


개인적으로 마거릿 애트우드의 소설들을 좋아한다. 생각하지 못한 재미를 누린 작품들 때문이다. 대표작 중 몇 편은 사놓고 묵혀두고 있고, 몇 작품은 위시리스트에 올려놓았다. 시간적 여유가 있을 당시 두툼했던 작가의 소설을 재밌게 읽었던 기억은 어떤 책이라도 읽을 수 있다는 자신감을 불어넣었다. 그런데 이 소설은 처음에 적응하는데 시간이 좀 걸렸고, 기묘한 관계들을 어떻게 해석하고 받아들여야 할 지 의문이었다. 지금 기준으로 보면 문제가 될 인물이나 상황들이 자연스럽게 묘사되어 있다. 미성년자에 끌리거나, 임신했는데 술을 마시고 담배를 피우는 등의 행동 말이다. 뭐 노땅인 나에겐 예전에 늘 봤던 일이지만.


메리언 매캘핀은 설문조사 회사에서 설문지 만드는 일을 한다. 까다로운 집주인과 변덕이 심한 룸메이트 에인슬리를 두고 있다. 대학 동창 클래라는 학업 중 결혼을 해서 두 아이를 낳았고, 셋째를 임신 중이다. 그녀 자신은 변호사인 피터와 사귀고 있다. 밖에서 볼 때 아무 문제없는 상황 속에서 살아간다. 평범한 일상이다. 그러다 맥주 관련 설문 조사를 하게 되는데 이때 조금 이상한 남자를 만난다. 대학원생 덩컨이다. 첫 인상은 열여섯 소년 같았는데 실제는 나이가 있다. 하지만 이 나이보다 그의 기이한 행동과 표현이 눈길을 끈다. 메리언이 심리적 갈등을 겪을 때 그는 ‘그 문제는 당신의 것’이라고 선을 긋는다. 자신의 문제만 생각하는 인물이다. 그런데 그녀는 우연히 만나는 순간이 늘면서 그에게 이상하게 끌린다.


남자 친구 피터는 잘 생겼고, 직업도 좋다. 소설 속에서도 말했듯이 남에게 보여주기 좋은 남자 친구다. 문제는 그가 메리언을 이해하려고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자기중심적이고 가부장적인 인물인데 이상하게도 메리언이 작은 일탈을 벌인 후 그녀에게 청혼한다. 결혼을 준비하면서도 메리언은 덩컨을 계속 만난다. 그가 그녀를 잘 배려해주고, 이해하는 행동을 한다면 납득할 수 있지만 그는 그의 감정에 더 충실하다. 그것도 아주 노골적으로. 어쩌면 이런 솔직함이 그녀는 부러웠는지도 모른다. 그와의 가벼운 입맞춤과 터치는 부도덕한 일인데 그녀는 멈추지 않는다. 피터와 불편해지면 오히려 그를 찾는다. 이것은 피터와 결혼을 원하지 않는다는 무의식의 발로인지도 모르겠다.


덩컨이 괴상한 남성이라면 룸메이트 에인슬리로 마찬가지다. 자유분방한 연애를 하고, 남편 없이 애를 낳으려고 한다. 유전적으로 문제 없는 남자를 선택해 임신하려고 계획한다. 이 계획이 잘 진행되는데 나중에 이것이 또 다른 문제를 낳는다. 자신의 욕망에 충실하기 위해 타인에 대한 생각을 하지 않은 것이다. 그리고 메리언은 피터가 청혼한 다음부터 육식에 대한 거부감이 생긴다. 점점 이 범위는 넓어진다. 살이 빠져 마를 것 같은데 면을 많이 먹어서 원래 체형을 유지하고 있다고 할 때 내 몸매를 돌아보게 되었다. 먹을 수 있는 음식이 점점 줄어들지만 피터는 크게 신경을 쓰지 않는다. 덩컨의 말처럼 그녀만의 걱정이다. 이 걱정의 원인은 예상한대로 였지만 그 해결 과정은 예상하지 못한 일탈과 행동으로 이루어진다. 마지막 장면은 아주 인상적이다. 해설을 보면 많은 상징들이 들어있다고 하는데 그 시대의 현실을 잘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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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정한 매일매일 - 빵과 책을 굽는 마음
백수린 지음 / 작가정신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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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새로운 한국 소설가들의 이름이 눈에 많이 들어온다. 이 중에서 제대로 작품을 읽은 작가는 그렇게 많지 않다. 틈틈이 한국 작가의 소설을 읽지만 장르 문학에 더 집중하고, 낯익은 외국 작가의 소설을 더 읽다 보니 겨우 이름만 기억하고 있는 경우가 태반이다. 낯익은 작가조차 사놓고 묵혀두고 있으니 새로운 작가에게 손이 나가는 것은 더 힘들다. 백수린은 이전에 짧은 단편 한 편 정도를 읽은 적이 있지만 그 단편집에 실린 수많은 작가들 중에서 나의 기억에 남을 정도는 아니었다. 실제 그 단편집은 작가들이 너무 많아 낯익은 작가조차 지금은 기억 못한다. 이것도 인터넷 서점 검색을 통해 겨우 알았다.


한때 김영하의 팟캐스트를 들으면서 시인의 산문집에 관심을 가졌고, 이것이 소설가의 산문집으로 다시 이어졌다. 가끔 번역 소설들이 주는 문장의 피로함을 푸는 데는 한국 소설가의 작품이 딱 맞다. 모국어란 것이 주는 익숙함 때문인 듯하다. 잘 된 번역의 경우라면 이런 피로함이 없겠지만 문장이 어색한 번역투의 소설 등을 자주 읽다 보면 나도 모르게 피로감이 쌓인다. 그런데 이 책에서 외국어로 말하고 쓰는 일에 대해 이야기하는 부분이 나와 나의 시선을 끌었다. 물론 번역과는 다른 문제다. “외국어로 말하는 일이 이전까지 가지고 있던 모국어 중심의 인식 틀을 넘어설 수 있게 해준다”는 부분은 그래서 더 인상적이다.


작가의 이력은 화려하다. 내가 알고 있는 문학상만 두 개 수상했다. 한때 이런 문학상을 좇아다니며 찾아 읽던 시절도 있었지만 지금은 밀린 책들만으로도 벅차다. 그래도 이런 문학상 수상작에는 늘 눈길이 간다. 이 책을 선택한 것은 앞에서 말한 소설가의 첫 산문집이란 이유가 가장 크고, 내가 좋아하는 ‘빵’과 ‘책’을 매개로 글을 풀어놓았기 때문이다. 목차에 나오는 빵들 중 내가 좋아하는 것들이 상당히 많은데 낯설고 호기심을 자극하는 빵도 상당히 많다. 하지만 그보다 더 눈길을 끄는 것은 낯설고 낯익은 작가와 책 제목들이었다. 집에 있는 책들이 상당히 많지만 읽은 책은 그렇게 많지 않다는 것이 함정이지만.


이 산문집에 신춘문예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지금도 수많은 소설가 지망생(?)이 여기에 목을 매고 있다. 이 문제에 대한 수많은 질타가 있지만 현실적으로 소설가란 타이틀과 문단으로의 진입을 감안하면 가장 확실한 방법이다. 현실에서 이런 소설가들보다 웹 소설가들이 더 많은 돈을 벌고, 더 많은 독자들의 관심을 받지만 그들의 눈은 여기에 머물고 있다. 몇 년 전 이런 부분을 다룬 소설을 한 권 읽었는데 이때도 이런 그들의 집착(?)이 계속 가슴에 남았다. 물론 나 자신도 한때 문학청년을 꿈꾸지 않았던가. 뭐 장르소설도 쓸 집중력이나 노력도 없었지만 말이다.


소설가들이 소설을 이야기하는 것을 보면 나와 다른 시각을 발견한다. 이 때문에 이런 책들을 계속 읽게 된다. 사놓고 묵혀두거나 관심을 두지 않은 작품에 눈길을 주는 것도 이런 해석 덕분이다. 읽었던 책에서 내가 놓친 부분을 다시 떠올려줄 때, 작가가 다시 읽으면서 바뀐 감상을 말할 때 속된 말로 혹한다. 그리고 작가의 소소한 일상과 소설가로써의 삶을 말할 때 나와 다른, 혹은 내가 누릴 수도 있는 삶의 순간을 생각한다. 이런 책을 읽으면 늘 사고 싶은 책이 늘고, 꼭 읽어야지 하는 다짐을 하게 되지만 나의 욕심은 다른 방향으로 나아간다. 단편집에서 인상적인 단편 하나만 다루면서 이야기를 풀어내는 것을 보면 나의 글쓰기 방법을 다시 검토한다. 다정한 매일매일, 내가 자주 놓치는 하루하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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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신도들 버티고 시리즈
오스틴 라이트 지음, 김미정 옮김 / 오픈하우스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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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니와 수잔>을 흥미 있게 읽었기에 선택했다. 개인적으로 광신도들에 대한 관심도 있다. 원제인 “DISCIPLES”는 제자들 혹은 예수의 제자들이란 사전적 의미를 가진다. 그런데 이 단어를 광신도들로 번역하게 되면 나 같은 사람에게는 선입견을 심어줄 수밖에 없다. 이야기 전체를 읽게 되면 광신도가 틀림없다는 생각이 들지만 말이다. 실제 밀러 교회의 신도들이 보여주는 행동은 우리가 흔히 아는 광신도와 조금 다르다. 물론 이 교회의 신자 중 한 명이 보여준 행동은 여타 종교의 광신도들과 비슷하다. 하지만 이런 행동을 한 종교는 역사 속에서 수없이 많이 찾아볼 수 있다.


소설은 5부 31장에 8명의 화자가 등장한다. 가장 중요한 인물은 은퇴한 과학사 교수 해리 필드이지만 이 소설을 정말 풍성하게 만드는 것은 데이비드 레오와 닉 포스터 등이다. 해리 필드가 가짜 과학, 사이비 과학, 유사 과학을 주제로 강연할 원고를 쓰는 중 손녀의 친부인 올리버 퀸이 찾아오면서 이야기가 시작한다. 올리버는 해리의 딸 주디를 임신시킨 후 도망간 인물이다. 출산 당시 나타났다가 다시 사라졌는데 자신의 딸 헤이즐을 밀러 교회에 데리고 가려고 왔다. 첫 문장이 “외손녀가 납치당하기 두 시간 전”이다. 친부지만 납치란 사실을 분명하게 알린다. 친부였기에 해리는 외손녀를 맡겼다.


다음 화자가 닉 포스터다. 닉은 정신지체아다. 누군가에게 의존적인 인물인데 올리버 퀸이 그를 데리고 밀러 교회에 간다. 헤이즐 납치 당시 차에서 기다리고 있었고, 장시간 이동 속에서 헤이즐을 돌보는 인물이다. 닉은 각 부마다 등장하는데 그때마다 중요한 사건과 이어져 있다. 헤이즐의 납치, 올리버 퀸의 죽음, 데이비드 레오의 납치, 그리고 살의 등. 자신만의 생각을 하지 못하는 그가 알 수 없는 목소리에 의해 폭주하는 마지막 장면은 해리의 교육과 연결되는데 자신의 정체성을 완전히 세우지 못한 아이에게 누군가의 영향력은 예상하지 못한 상황을 만든다. 닉의 시각은 현실을 그대로 보여주는 역할을 한다.


영문과 교수이자 허영심과 욕망으로 가득한 인물이 데이비드 레오다. 그는 흑인이다. 피부색은 검은색보다는 갈색에 가깝다. 닉의 시선은 이 색 구분을 잘 보여준다. 주디에게 관심이 있고, 해리의 영향을 많이 받는다. 주디의 딸이 납치된 후 밀러 교회로 직접 찾아간 인물이 그다. 영웅심이란 표현이 나오고, 아이를 찾으러 가면서 나타나는 심리 묘사는 너무 솔직해 어색할 정도다. 그가 자신의 욕망을 깨닫는 순간은 늦게 나타나는데 이것은 그가 백인이 아니라는 정체성과도 관계있다. 그는 위험하지만 스릴 넘치는 모험을 겪는데 이 속에서 자신의 솔직한 감정을 깨닫는다.


가장 예상외의 퇴장은 올리버 퀸이다. 솔직히 목차를 유심하게 읽지 않아 그가 죽을 것이란 생각을 못했다. 그는 밀러는 만나지 못하고, 밀러의 제자인 루머의 말에 혹해 딸을 데리고 밀러의 농장에 갔다. 흑인인 데이비드를 죽이려고 하다 오히려 자신이 죽는다. 이 죽음은 납치 사건과 FBI의 개입이 불러올 파국을 염려한 루머의 결단이다. 소설 속에 루머가 화자로 등장하는 것은 딱 한 번인데 다른 사람의 시선을 통해 본 상황과 완전히 다른 사실이 드러난다. 이때 내가 루머를 완전히 잘못 이해하고 있었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리고 의아했던 상황 몇 가지도 바로 이해되었다.


해리가 밀러와 인터뷰하는 장면은 과학사 교수의 욕심에서 비롯했다. 그가 밀러 농장까지 올 필요는 솔직히 없었다. 하지만 문답식으로 표현된 밀러의 논리는 흥미롭고, 솔깃한 부분들이 많다. ‘사후’에 대한 질문은 종교의 핵심인데 그는 시간이란 개념을 이용해 아주 능수능란하게 피해간다. 민감하고 자신에게 불리한 부분은 살짝 피하면서 이어간다. 그리고 밀러가 화자로 등장하는 것도 딱 한 번인데 그의 각성과 듣는 소리를 닉이 듣는 소리와 연결하면 종교적 체험의 실체를 이해하게 된다. 광신도들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조금은 이해된다. 대화를 구분해 표현하지 않고 묵직하고 심리묘사가 대부분이라 가독성은 조금 떨어진다. 그러나 각 인물들의 내면과 시각을 따라가다 보면 곳곳에서 우리의 내면을 만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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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남자
히라노 게이치로 지음, 양윤옥 옮김 / 현대문학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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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라노 게이치로를 처음 만난 것은 아쿠타가와상 수상작 <일식>이었다. 솔직히 말해 그때는 정말 이해도 못했고, 재미도 없었다. 그때는 지금보다 문학상에 더 약했던 시절이라 그 다음 책도 샀다. 몰론 재미는 없었다. 이후 몇 권의 책을 더 샀지만 그냥 묵혀만 두었다. 그러다 읽은 <결괴>는 이전까지 알던 히라노 게이치로가 아니었다. 아주 재밌게 읽었고, 그 묵직함에 놀랐다. 아마 이 책이 분기점이 되어 작가를 새롭게 인식하게 된 것이다. 머릿속은 언젠가 첫 작품을 다시 읽어봐야지 하는 생각으로 가득 찼다. 먼 훗날의 가능성이 아주 낮은 생각일지라도 이 생각은 그의 신작에 늘 관심을 두게 만들었다. 그 연장선에 있는 책 중 한 권이 이 <한 남자>다.


이 소설을 이끌어가는 주인공은 재일조선인 3세 기도 아키라다. 조선인 이름을 사용하다 해외 여행할 때 여권의 국가가 문제될 것 같다는 이유로 국적을 바꿨다. 그의 의지보다 부모님의 의지다. 어릴 때 조선인들이 많이 사는 곳에 살지 않아 특별히 국적에 대한 인식을 크게 하지 못한 그이지만 일본인 아내와의 결혼은 또 다른 문제였다. 장모님이 한류 팬이라 그에게 한국에 대해 물었을 때 그가 한글조차 모르는 재일조선인이었다는 설명은 많은 것을 함축적으로 설명한다. 하지만 혐한, 혐중이 강해지는 시대 분위기는 알게 모르게 그가 재일조선인이라는 사실을 인식하게 만든다.


리에의 인생에 대한 설명으로 작은 문을 연다. 물론 서에서 기도를 말하지만 그 의미를 제대로 알게 되는 것은 책을 다 읽을 때 즈음이다. 리에는 두 번 결혼을 했다. 한 번은 이혼을, 한 번은 사고로 남편을 잃었다. 이혼 전에 아들을 병으로 먼저 보냈는데 이 일이 이혼 원인이다. 그 사유에 대한 간결한 설명은 함축적이지만 충분히 납득할 수 있을 정도다. 두 번째 남편 다니구치 다이스케를 어떻게 만났고, 어떤 가정을 꾸몄는지 알려주는데 불행은 이 집을 비켜가지 않았다. 임업에 종사하는 남편이 쓰러지는 나무에 깔려 죽은 것이다. 본가와 연락을 하지 않고 지낸 그이지만 죽음까지 숨길 수 없어 부음을 전했다. 그런데 그의 형이라고 생각했던 이가 영정 사진을 보고 자신의 동생이 아니라고 말한다. 그럼 그는 누구?


기도는 이런 과정 속에서 등장한다. 그의 이력을 간단하게 설명하고, 어떻게 리에와 알게 되었는지 알려준다. 그는 이혼 당시 담당 변호사였다. 리에 이야기에서도 동일본 대지진을 말하는데 기도는 관동대지진을 떠올리며 한 시대의 비극과 불안감을 조금씩 연결시킨다. 관동대지진 당시 어떻게 조선인 등을 학살했는지 제대로 교육하지 않는 현실을 살짝 보여준다. 이런 현실과 혐한 분위기가 엮이고, 기도는 이전까지 그렇게 인식하지 못한 정체성을 생각하게 된다. 이것은 리에의 남편이었던 다니구치 다이스케의 정체에 대한 의문과 이어진다. 리에의 요청에 따라 그는 다니구치 다이스케라고 말한 존재 X를 조사한다. 이 조사만 놓고 보면 탐정물이지만 그에겐 이 일은 부업일 뿐이다.


부업이라고 하지만 찾기를 멈추지 않는다. 관련된 인물을 만나고, 실제 다니구치 다이스케가 어떤 인물이었는지 알게 된다. 그러다 신분을 바꿔주는 사기꾼 오미우라에 대한 정보를 얻고, 새로운 단서를 발견한다. 오미무라는 진실을 알지만 그에게 쉽게 알려주지 않는다. 이 조사 과정에서 그는 서로 신분을 교환하는 일이 적지 않음을 알게 된다. 오미무라가 던져준 단서를 따라가다 발견한 내용은 아주 불편한 현실이다. 자신의 호적을 서로 교환하는 것이 가능하다니, 어떤 사연 때문에 교환까지 하게 되었는지 호기심을 자극한다. 그리고 이런 일이 가능한 것은 한국처럼 주민등록증 발급 당시 지문을 날인하지 않았기 때문이란 사실로 이어진다. 한국이라면 지문만으로 그의 정체를 쉽게 알았을 것이다. 왠지 씁쓸한 느낌이다.


결국 기도는 X의 정체를 알게 된다. 그가 어떤 인물이었는지, 어떤 삶을 살았는지, 왜 호적을 바꾸려고 했는지, 리에와의 결혼 생활 3년 반이 그에게 얼마나 행복한 일이었는지 보여준다. 이 과정 속에 신분을 바꾼 남자와 그를 조사하는 기도의 삶이 교차하면서 많은 것을 보여준다. 섹스리스 부부의 불안한 삶과 자신의 정체성 문제 등이 엮이고, 꼬인다. 그리고 리에의 이혼과 결혼으로 성을 세 번이나 바꾼 아들 유토의 문제까지. 정적인 사회에서는 크게 문제가 되지 않았던 것들이 동적이고 변화가 심한 사회 속에서는 다른 문제들을 만들어낸다. 쉽고 빠르게 읽히는 책은 아니지만 다음 이야기가 궁금하고,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든다. 제목인 ‘한 남자’는 이 소설 속 등장인물들 모두에게 해당한다. X, 다니구치 다이스케, 기도 아키라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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