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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밤마다 수다를 떨었고, 나는 매일 일기를 썼다 - 어느 페미니스트의 우한 생존기
궈징 지음, 우디 옮김, 정희진 해제 / 원더박스 / 2020년 11월
평점 :
절판
책 제목을 보고 밤마다 수다를 떨었다는 부분에서 나는 아날로그적 생각을 했다. 그것은 한 장소에 직접 모여 수다를 떤 것으로 상상한 것이다. 하지만 요즘처럼 디지털 시대에는 이런 수다를 온라인에서도 가능하다. 노땅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오프라인에서는 만날 수 없지만 온라인에서는 저자와 친구들은 연결되었고, 이 고립된 생활 속에서 자신들의 삶과 고민과 생각들을 서로 나누었다. 단순히 이 수다만 적었다면 이 일기의 가치는 많이 떨어질 것이다. 저자는 봉쇄된 우한의 일상을 직접 보고 들은 것을 기록하면서 그 가치를 더 높였다.
부제가 ‘어느 페미니스트의 우한 생존기’이다. 저자가 살면서 어떤 길을 걸었는지 알려주는 부분도 나오지만 눈길을 끄는 부분은 그런 내용들이 아니다. 2020년 1월 23일부터 3월 1일까지 SNS에 올린 일기들은 외출할 수 있을 때는 산책 등을 하면서 보고, 대화하고, 물건을 산 내용을 사실적으로 기록했고, 외출이 힘들어졌을 때는 단지 내에서 어떻게 식량을 조달했는지, 자신이 사는 단지의 소소한 일상 등을 알려준다. 1년도 되지 않은 일인데 왠지 모르게 아주 오래전처럼 다가오고, 몇몇 기억은 이 책 속 사실과 다른 기억으로 나에게 남아 있음을 깨닫고 놀랐다.
우한과 코로나 19를 연상하면 폐쇄된 철도역과 텅 빈 도로, 막힌 외부로의 출구 등이 먼저 떠오른다. 방송에서 보여주는 자극적인 영상 이미지가 개개인의 삶을 삭제하고, 먼 거리에서 본 이미지만 내보낸다. 각자의 집에서 고립된 채 불안에 떨면서 살아가는 사람도 있겠지만 이런 현실 속에서도 나와 일을 하거나 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 있음을 이 책은 잘 보여준다. 그중에서 환경미화원들과 대화를 나누면서 정보를 수집하려는 초반부는 사회주의를 지향하지만 제대로 된 사회안전망이 없는 중국의 현실을 그대로 보여준다. 하루 일당보다 하루 나오지 않으면 내는 비용이 더 큰 현실과 노인들이 일해야만 하는 현실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봉쇄된 도시를 산책하면서 본 것들과 나눈 대화들은 쉽게 떠올리는 이미지와 다르다. 하지만 봉쇄가 길어지고, 집안에 머무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생기는 문제들에 대한 지적은 생각할 거리들이 많다. 특히 가정폭력 피해자 부분은 정말 막다른 골목에 몰린 기분을 느끼게 만든다. 그리고 읽다 보면 중국 남자들이 집에서 가사 일을 한다고 흔히 알고 있는 정보가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 느끼게 만드는 이야기가 계속 나온다. 가부장적인 문화가 아직도 많이 남아 있음을 그대로 보여준다. 어쩌면 우린 일부의 현상을 전체로 이해하는 잘못을 여기서도 저지른 것인지도 모른다.
중국이 얼마나 통제가 심한지 알려주는 대목들이 가끔 나온다. 리원량 추모나 코로나 19 관련 정보 등에 특정 단어를 검색해서 삭제, 차단하는 일이 벌어지고 있음을 알려준다. 저자 자신도 자신의 일기를 이미지 파일로 만들어 올렸다고 한다. 금지어를 피하기 위한 하나의 방편이다. 그리고 이 일기의 기록에는 봉쇄된 도시의 코로나 확진자 기록이 거의 나오지 않는다. 숫자가 나온다면 그 현실이 좀더 현실적으로 다가올 텐데 하는 아쉬움이 있다. 물론 그 기록이 제대로 되어야 한다는 전제조건이 있다. 하지만 한 사람의 관찰기, 생존기로써의 가치는 충분하다.
“희망이 있어서 행동하는 게 아니다. 행동하니까 희망이 생기는 거다.” 이 문장은 희망의 필요충분조건을 잘 보여준다. 행동하지 않으면 희망은 없다. 기도만으로 희망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밤마다 수다를 떠는 이들이 희망을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은 작은 실천이나마 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갈 수 있을 때는 남을 도우려고 하고, 집에서는 운동을 하면서 봉쇄가 풀린 후 할 일들을 토론한다. 좀비 아포칼립스 같은 판타지 세계가 아니라 현실을 그려내었다는 부분은 앞으로 이런 현상이 또 일어날 수 있다는 점에서 많은 부분을 생각하게 만든다. 그리고 이 책은 2020년 3월 1일까지 기록만 출간되었다. 봉쇄가 풀린 날까지 일기도 있다고 한다. 중국어를 모르는 내가 이후 기록을 찾아 읽기는 불가능하다. 언젠가 이후 일기도 포함된 완전판이 나오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