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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의 현관
요코야마 히데오 지음, 최고은 옮김 / 검은숲 / 2020년 10월
평점 :
정말 오랜만에 요코야마 히데오의 소설을 읽었다. 작가 이름을 인터넷 서점에서 검색하니 낯익은 작품들이 나온다. 대부분 가지고 있는 책들이다. 그리고 이번 소설을 읽고 <64>에 관심이 생겨 집안을 뒤져보았지만 찾지 못했다. <종신 검시관>이 책장에 꽂혀 있는 것이 눈에 들어올 뿐이다. 읽은 것 같은데 하고 검색하니 서평이 보인다. 한때 이 작가의 책이 한꺼번에 나와 열심히 모은 기억이 난다. 그 다음은 늘 그렇듯이 책의 무더기 속으로 쏙 들어갔다. 한없이 읽기가 뒤로 밀린 책들 중 이 작가도 포함되어 있다. 그런데 신간이 나오면 눈길이 간다. 이 놈의 책 욕심은 언제 사라지려나.
오랜만에 읽은 작가의 신작은 잡지 연재한 것을 거의 대부분 개작한 후 내놓았다고 한다. 처음 쓴 문장의 10퍼센트만 남았다고 하니 실제 다시 쓴 것이나 마찬가지다. 이런 이야기를 읽다 보면 괜히 잡지 연재한 원본(?)을 읽고 싶어진다. 어떤 차이가 있는지 알고 싶다. 이런 관심을 뒤로 하고, 소설 속으로 들어가면 묵직한 문장과 강한 흡입력을 발휘하는 이야기 속에 빨려 들어간다. 미스터리라고 하지만 살인은 없고, 자신이 지은 집 주인 일가가 사라진 흔적을 쫓으면서 자신을 삶을 돌아보고, 건축이란 것을 생각하게 된다. 작가가 이야기 속에 풀어놓은 근대 건축의 거장 브루노 타우트 부분은 읽으면서 엄청나게 공부했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참고자료를 보니 고개가 끄덕여진다.
건축사 아오세 미노루는 거품 경제 붕괴 후 여러 일을 전전하다 동기 오키지마의 설계사무소에서 일을 시작한다. 그러다 요시노라는 의뢰인이 ‘당신이 살고 싶은 집을 지어달라’고 의뢰한다. Y주택으로 불리는 이 집은 북향 목조 가옥이다. 나 자신도 남향의 신화에 빠져 있는데 이 소설을 읽으면서 다시 한 번 더 집의 방향을 생각하게 되었다. 어쩌면 남향은 과거 빛이 귀한 시절의 최선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이어졌다. 이렇게 지은 집은 좋은 평가를 받았고, 건축 200선에도 뽑힌다. 이런 집을 지어달라는 요청이 또 온다. 그런데 Y주택에 사람이 살지 않는 것 같다는 이야기가 들린다. 여기서부터 미스터리는 시작한다.
오키지마와 함께 Y주택에 간다. 사람의 흔적은 없다. 2층에 의자 하나가 놓여 있다. 이 의자에 앉으니 평온하다. 오키지마가 이 의자가 타우트의 의자 같다고 말한다. 만약 진품이라면 희귀한 유물이다. 아오세는 요시노의 이전 집을 찾아간다. 조금이나마 흔적을 발견하기 위해서다. 그러다 한 남자가 그를 찾아왔다는 소식을 들었다. 혹시 사채를 빌린 것일까? 하지만 건축 비용은 완납했다, 타우트의 의자는 또 뭐지? 완공 후 메밀집에 함께 왔다는 아내는 자신의 기억과 다르다. 작가는 의자부터 시작하여 타우트의 건축과 가구에 대한 이야기를 연결시키고, 이 미스터리를 그 속에 녹여낸다.
설계사무소가 하나의 공간이다 보니 사라진 의뢰인 찾기만 할 수 없다. 오키지마는 공공건물 입찰을 따내기 위해 열심히 영업한다. 또 다른 이야기의 한 축이다. 사라진 의뢰인과 새로운 건축설계가 연결되고, 은연중에 타우트가 점점 지분을 넓혀간다. 그가 지은 휴가장이란 곳에 가고, 새로운 단서를 얻고, 이전엔 몰랐던 타우트를 알게 된다. 의자는 아주 중요한 단서다. 읽다 보면 약간 의뢰인이 이렇게 한 이유가 짐작되지만 그것은 거의 끝에 도달했을 때다. 그리고 이 일은 아오세의 과거와 연결된다. 화려했던 시절에 취해 자만했고, 아내와도 헤어졌던 그 시간들. 묵직하지만 부드럽게 이어지는 이야기 속에 정신없이 빠져든다.
이 소설을 읽으면 두 죽음이 나온다. 하나는 아오세의 아버지고, 다른 하나는 설계사무소 소장 오키지마다. 아오세의 아버지는 사라진 구관조를 찾으러 갔다가 떨어져 죽었고, 오키지마는 뇌물수수 문제로 스트레스를 받은 후 병원에 입원했다 추락해 죽었다. 실제 오키지마가 제공한 뇌물은 택시비 정도 밖에 없다. 하지만 정치와 언론이 결탁해 그를 극단으로 몰고 갔다. 그의 죽음을 둘러싸고 자살과 실수로 나누어진다. 경찰은 자살로, 아오세는 실수로 추락했다고 본다. 이 두 아버지는 모두 아들을 아주 사랑했다. 실수는 있을 수 있지만 둘 다 자실은 아니다. 오키지마 이야기는 더 복잡한 사연이 엮여 있는데 읽으면서 아버지란 존재를 돌아보게 한다. 기념관 설계를 위해 전력을 다하는 마지막 몇 십 쪽은 숨 막힐 정도로 멋지고 열정적이다. 빨리 <64>를 찾아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