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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 개의 파랑 - 2019년 제4회 한국과학문학상 장편 대상
천선란 지음 / 허블 / 2020년 8월
평점 :
2019년 제4회 한국과학문학상 장편소설 부문 대상 수상작이다. 내가 한국과학문학상에 관심을 가지게 된 데는 김초엽의 공이 크다. 그녀의 단편집이 베스트셀러가 되고, 그 단편 중 한 편을 읽게 되면서 이 문학상에 대한 관심이 부쩍 늘어났다. 그리고 자주 가는 서점에서 이 책이 진열되어 있어 자꾸 눈길이 갔다. 이런 배경만 가지고 있었지 책 내용은 잘 모른 채 선택했다. 예상과 다른 전개에 조금 놀랐지만 예상한대로 가독성은 좋았다. 어느 부분에서는 이게 SF인가 하는 의문이 들기도 했지만 어느 순간 납득하게 되었다.
2035년 경마 경기 기수를 사람이 아닌 휴머노이드로 대체한다. 휴머노이드로 대체하면서 무게가 가벼워진다. 가벼워진 무게는 말의 속도를 높이는 계기가 된다. 시속 100킬로미터를 돌파하는 말이 등장한다. 이 때문에 말의 관절에 무리가 생기게 되고, 경주마의 교체 주기는 짧아진다. 이런 현실 속에서 작가는 휴머노이드 콜리와 부서진 콜리를 산 연재와 콜리와 호흡을 맞춘 투데이를 애처로워하는 연재 언니 은혜와 그들의 엄마 보경의 시선으로 이야기를 풀어간다. 이들의 시선은 잔잔한 듯하지만 각자의 아픔을 품고 있다. 이 아픔을 어루만지면서 앞으로 나아가는 사람들 이야기다.
콜리는 우연의 산물이다. 보통의 휴머노이드 기수는 자의식이 없다. 하지만 콜리는 우연의 연속으로 천 개의 단어를 알고, 자신이 보는 것에 대한 의문을 품게 된다. 여기에 좋은 마사관리사 민주를 만나면서 조금씩 성장한다. 이런 콜리가 스스로 낙마해 부서진 것은 바로 그가 탄 말 투데이의 관절이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 도입부는 마지막을 읽고 난 후 그 의미가 더욱 분명해진다. 무심코 읽는 나는 다시 읽으면서 두 부분을 연결할 수 있었다. 연재를 만나기 전 콜리란 이름 대신 C-27로 불리었던 그의 과거가 담담하게 흘러나온다.
연재는 고등학생이다. 편의점 알바를 하는데 편의점 상황이 좋지 않아 잘린다. 그 자리를 안드로이드가 차지한다. 초기 비용은 높지만 시간이 지나면 알바보다 저렴해진다. 수익이 나지 않는 편의점주 입장에서는 어쩔 수 없다. 이 알바비를 모두 쏟아부어 산 것이 콜리다. 콜리는 브로콜리의 애칭이다. 콜리를 사기 전 그녀에게 있었던 일들을 가볍게 풀어낸다. 과학경시대회에서 떨어진 일, 알바 잘린 일 등. 집 근처 경마장이 있어 자주, 몰래 안에 들어가는데 그녀의 눈에 이 부서진 휴머노이드가 들어왔다. 이 휴머노이드 매매는 불법이지만 부수입을 올릴 기회를 마장에서 놓치지 않는다.
보경은 한때 영화 배우였다. 불의의 사고로 얼굴에 흉터가 생기면서 배우의 길에서 멀어진다. 대신 그녀를 구한 소방관을 남편으로 얻는다. 하지만 남편은 사고로 죽는다. 두 딸과 함께 살게 되는데 경마공원 근처에서 식당을 하면서 생계를 유지한다. 먹고 살기에는 부족함이 없지만 큰딸 은혜의 인공 다리를 달아주거나 연재가 바라는 교육을 해 줄 정도는 아니다. 과학이 발전했다고 그 혜택을 모두가 누리는 것이 아님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그리고 재밌는 부분은 남편의 이름이 한 번도 나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계속해서 소방관으로 나온다. 다만 우 씨라는 것만 알려준다.
부모가 부자였다면 은혜는 두 다리로 걸을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부족한 돈은 그녀에게 다리뿐만 아니라 많은 것을 빼앗아갔다. 그녀와 함께 불편함을 감수했던 친구는 보험 적용이 되지 않지만 시력 교정 수술을 받기 위해 미국으로 갔다. 이 일이 그녀에게 아주 큰 타격을 줬다. 휠체어를 밀며 다니는 그녀가 마주한 수많은 장애와 불편한 시선과 작은 도움들에 대한 글들은 다시 우리의 현실을 돌아보게 한다. 이런 그녀가 유일하게 관심을 붙이는 곳이 경마장 마사의 말들이다. 그 중에서 안락사가 예정되어 있는 투데이는 특히 그렇다. 이 투데이가 후반부로 가면서 하나의 중요한 프로젝트가 된다.
과학의 발전이 곳곳에서 나오지만 그 혜택이 모두에게 베풀어지는 것은 아니다. 아마 100년 전 선조가 지금 시대에 오면 그 놀라운 과학 발전에 두 눈이 휘둥그래지겠지만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이 소설 속 현실처럼 느끼지 않을까 생각한다. 작가는 화려한 SF소설보다 현실에 뿌리를 굳건하게 내린 우리들의 이야기를 조용히 풀어내었다. 한 가족의 삶을 조용히 들여다보고, 그들의 삶에 공감하고, 이런 그들을 다른 시각에서 보는 콜리를 등장시켜 주변을 환기시킨다. 그리고 그 시선은 따뜻하다. 큰 이벤트도 화려한 장면도 없지만 조용히 조금씩 가슴 속으로 스며드는 이야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