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개 이상의 모형 문학과지성 시인선 544
김유림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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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시인들의 시집을 읽으면서 늘 느끼는 것이지만 현대 시는 나에게 어렵다. 이번 시집은 목차부터 나를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숫자의 반복, 제목의 반복, 갑자기 순서에 맞지 않은 숫자 등이 나를 어리둥절하게 만들었다. 펼친 시집의 첫 시부터 산문시가 나와 예상과 다르구나 생각했는데 이어지는 산문시들은 더욱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어떤 시는 쉼표(,)나 마침표(.)가 없어 오래전 읽었던 이상의 시를 읽는 느낌을 살짝 떠올려주기도 했다. 이런 구성이, 편집이, 설정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기에는 나의 내공이 너무 부족하다. 이럴 때마다 더 공부해야지 마음을 먹지만 현실은 거기에서 대부분 멈춘다.


시 속에 실명들이 나오는데 시인도 같이 등장한다. 반복과 미묘한 단어의 차이는 집중하지 않으면 놓치기 쉬운 부분이다. 하지만 그 차이를 인식하고 읽다보면 ‘나의 마음’과 ‘나운의 마음’ 차이를 조금 알게 된다. 같은 제목이 이어지는데 이 차이를 분석할 마음이 솔직히 없다. 그래서 다시 멈칫할 수밖에 없다. 다시 돌아가 시를 읽지만 그 차이가 뚜렷하게 다가오지 않는다. 그래도 꾸준히 읽었다. 단숨에 읽지 않았다는 사실이 아쉽다. 만약 한 번에 끝까지 달렸다면 좀더 이미지가 더 잘 그려졌을지 모르겠다.


시들을 읽다가 눈에 들어오는 시가 한 편 있다. <생전유고>다. 이 시에서 “시를 썼고 산문을 썼으며 시도 산문도 아닌 글을 썼다.”란 문장과 “그녀가 죽고 난 이후에도 그녀가 아닌 시와 산문과 시도 산문도 아닌 글이 그녀처럼 있다.”란 문장을 읽고 시인이 쓰고자 하는 형식에 대한 이해를 조금은 얻었다. 이 시집은 해설에 나온 말처럼 ‘진지한 해석’과 ‘책의 질서에 몸을 맡긴 채 둥둥 흘러가’는 것이 필요하다. 실제 이해와 상관없이 시는 예상보다 잘 읽히고, 그 미묘한 차이들이 눈에 들어온다. 다만 그 이미지나 말하고자 하는 바를 내가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을 뿐이다. 어렵고 난해하지만 역시 계속 읽고 읽는 수밖에 없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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늑대별 2023-08-15 16:1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시집을 구입할 이유가 있을까요?

행인01 2023-08-16 14:19   좋아요 1 | URL
시집 구입 이유는 개인의 취향에 달린 문제라 제가 말할 수 없네요.
 
침묵 박물관
오가와 요코 지음, 이윤정 옮김 / 작가정신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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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가끔 자주 눈에 띄고, 많은 책이 있어 읽었다고 착각하는 경우가 있다. 요가와 요코가 그런 경우다. 한참 책을 모을 때, 대할인시대에 작가의 책들을 사놓았다. 그리고 주변에서 자주 눈에 들어왔다. 아내에게 권하기도 하고, 인터넷에서 작가의 책 정보가 올라와 최소 한두 작품 정도는 읽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오늘 인터넷 서점에서 검색하니 낯익은 제목과 표지는 눈에 들어오지만 읽지 않았다는 사실이 머릿속을 스쳐지나갔다. 응? 쌓인 책이 많아지면서 옛날 책들을 한 권씩 꺼내 읽고 있지만 이런 경우는 처음이다. 이런 배경은 모른 채 오가와 요코의 소설을 처음 읽게 되었다.


처음 이 책을 선택할 때 작가 이름과 박물관과 연쇄살인이란 단어들이 나를 유혹했다. 죽은 자들의 유품만을 모아두는 박물관이란 점이 낯설게 다가왔지만 큰 박물관 대부분의 전시물들이 대부분 죽은 자들이 남긴 작품들이 아닌가. 하지만 조금 더 안으로 들어가면 이 유품들이 어떻게 모였고, 어떤 사연이 있는지 하나씩 드러난다. 그리고 죽은 자의 유품들은 전부 훔친 것들이다. 박물관에 취직한 기사는 마을에서 누가 죽었다는 소식이 오면 기념이 될 만한 물건을 훔치러 가야만 한다. 박물관 기사는 전시물품을 수집해야 하는 의무가 있다는 이유다.


이 소설 속 작은 마을에 대한 정보는 정말 몇 가지 설명을 제외하면 없다. 위치도, 규모도, 어떤 언어를 사용하는지도 알려주지 않는다. 등장인물들에게조차 작가는 이름을 붙이지 않았다. 박물관 기사는 기사로 불리고, 박물관을 새롭게 개관하려는 노파는 노파로, 그 수양딸은 소녀로, 대저택을 관리하는 부부는 각각 일에 따라 정원사와 가정부로 불린다. 연쇄살인으로 죽게 되는 여자들도 그들의 직업에 여자란 단어를 붙였다. 이 모호함과 부정확함은 끝까지 유지된다. 하지만 이것을 어느 순간 인식한다고 해도 책을 완독하는 데는 무리가 없다. 실제 우리도 이름을 모를 때 그 사람이 하는 일로 부르지 않는가. 이것과 침묵의 수행자들은 또 어떻게 이어질까?


이 마을 이야기를 읽다 보면 닫힌 세계가 느껴진다. 기사가 형에게 편지를 보내지만 답장은 없고, 아마추어 야구장에서 경기를 보지만 이때 나온 두 팀 외에는 다른 팀 설명이 없다. 어느 순간에는 이 모든 상황이 하나의 연극 무대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형의 답장이 오지 않을 때는 형의 존재에 의문을 품는다. 하지만 태어날 조카를 위한 선물을 사러 갔다가 폭탄 테러를 당하는데 이 장면에서 가장 놀라운 것은 기사가 마을 중앙에 있던 침묵의 전도사가 죽은 것을 발견하고 입고 있던 옷을 벗겨내어 박물관으로 가져가는 것이다. 첫 도둑질의 떨림과 달리 이제 그는 이 일에 적응하고, 자신이 만들어가는 박물관에 빠져든 것이다.


작가는 이 최소한의 설명으로 독자들이 이야기에 몰입하게 만든다. 박물관 개관을 위해 각자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한다. 이 일상에 작은 변주를 주면서 이야기를 이어간다. 연쇄살인사건이 일어날 때 혹시 하는 의문은 곧바로 확신으로 바뀐다. 처음 기대했던 미스터리는 약하지만 고요하지만 각자의 일을 묵묵히 해내는 사람들의 일상이 인상적이다. “침묵은 바깥이 아니라 우리 안에 존재하죠.”란 문장은 이 마을 분위기와 상황들에 잘 맞는다. 침묵이란 단어를 다시 한 번 더 생각하고 되뇌어본다. 그런데 그의 형은 살아 있기는 한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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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 개의 파랑 - 2019년 제4회 한국과학문학상 장편 대상
천선란 지음 / 허블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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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제4회 한국과학문학상 장편소설 부문 대상 수상작이다. 내가 한국과학문학상에 관심을 가지게 된 데는 김초엽의 공이 크다. 그녀의 단편집이 베스트셀러가 되고, 그 단편 중 한 편을 읽게 되면서 이 문학상에 대한 관심이 부쩍 늘어났다. 그리고 자주 가는 서점에서 이 책이 진열되어 있어 자꾸 눈길이 갔다. 이런 배경만 가지고 있었지 책 내용은 잘 모른 채 선택했다. 예상과 다른 전개에 조금 놀랐지만 예상한대로 가독성은 좋았다. 어느 부분에서는 이게 SF인가 하는 의문이 들기도 했지만 어느 순간 납득하게 되었다.


2035년 경마 경기 기수를 사람이 아닌 휴머노이드로 대체한다. 휴머노이드로 대체하면서 무게가 가벼워진다. 가벼워진 무게는 말의 속도를 높이는 계기가 된다. 시속 100킬로미터를 돌파하는 말이 등장한다. 이 때문에 말의 관절에 무리가 생기게 되고, 경주마의 교체 주기는 짧아진다. 이런 현실 속에서 작가는 휴머노이드 콜리와 부서진 콜리를 산 연재와 콜리와 호흡을 맞춘 투데이를 애처로워하는 연재 언니 은혜와 그들의 엄마 보경의 시선으로 이야기를 풀어간다. 이들의 시선은 잔잔한 듯하지만 각자의 아픔을 품고 있다. 이 아픔을 어루만지면서 앞으로 나아가는 사람들 이야기다.


콜리는 우연의 산물이다. 보통의 휴머노이드 기수는 자의식이 없다. 하지만 콜리는 우연의 연속으로 천 개의 단어를 알고, 자신이 보는 것에 대한 의문을 품게 된다. 여기에 좋은 마사관리사 민주를 만나면서 조금씩 성장한다. 이런 콜리가 스스로 낙마해 부서진 것은 바로 그가 탄 말 투데이의 관절이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 도입부는 마지막을 읽고 난 후 그 의미가 더욱 분명해진다. 무심코 읽는 나는 다시 읽으면서 두 부분을 연결할 수 있었다. 연재를 만나기 전 콜리란 이름 대신 C-27로 불리었던 그의 과거가 담담하게 흘러나온다.


연재는 고등학생이다. 편의점 알바를 하는데 편의점 상황이 좋지 않아 잘린다. 그 자리를 안드로이드가 차지한다. 초기 비용은 높지만 시간이 지나면 알바보다 저렴해진다. 수익이 나지 않는 편의점주 입장에서는 어쩔 수 없다. 이 알바비를 모두 쏟아부어 산 것이 콜리다. 콜리는 브로콜리의 애칭이다. 콜리를 사기 전 그녀에게 있었던 일들을 가볍게 풀어낸다. 과학경시대회에서 떨어진 일, 알바 잘린 일 등. 집 근처 경마장이 있어 자주, 몰래 안에 들어가는데 그녀의 눈에 이 부서진 휴머노이드가 들어왔다. 이 휴머노이드 매매는 불법이지만 부수입을 올릴 기회를 마장에서 놓치지 않는다.


보경은 한때 영화 배우였다. 불의의 사고로 얼굴에 흉터가 생기면서 배우의 길에서 멀어진다. 대신 그녀를 구한 소방관을 남편으로 얻는다. 하지만 남편은 사고로 죽는다. 두 딸과 함께 살게 되는데 경마공원 근처에서 식당을 하면서 생계를 유지한다. 먹고 살기에는 부족함이 없지만 큰딸 은혜의 인공 다리를 달아주거나 연재가 바라는 교육을 해 줄 정도는 아니다. 과학이 발전했다고 그 혜택을 모두가 누리는 것이 아님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그리고 재밌는 부분은 남편의 이름이 한 번도 나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계속해서 소방관으로 나온다. 다만 우 씨라는 것만 알려준다.


부모가 부자였다면 은혜는 두 다리로 걸을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부족한 돈은 그녀에게 다리뿐만 아니라 많은 것을 빼앗아갔다. 그녀와 함께 불편함을 감수했던 친구는 보험 적용이 되지 않지만 시력 교정 수술을 받기 위해 미국으로 갔다. 이 일이 그녀에게 아주 큰 타격을 줬다. 휠체어를 밀며 다니는 그녀가 마주한 수많은 장애와 불편한 시선과 작은 도움들에 대한 글들은 다시 우리의 현실을 돌아보게 한다. 이런 그녀가 유일하게 관심을 붙이는 곳이 경마장 마사의 말들이다. 그 중에서 안락사가 예정되어 있는 투데이는 특히 그렇다. 이 투데이가 후반부로 가면서 하나의 중요한 프로젝트가 된다.


과학의 발전이 곳곳에서 나오지만 그 혜택이 모두에게 베풀어지는 것은 아니다. 아마 100년 전 선조가 지금 시대에 오면 그 놀라운 과학 발전에 두 눈이 휘둥그래지겠지만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이 소설 속 현실처럼 느끼지 않을까 생각한다. 작가는 화려한 SF소설보다 현실에 뿌리를 굳건하게 내린 우리들의 이야기를 조용히 풀어내었다. 한 가족의 삶을 조용히 들여다보고, 그들의 삶에 공감하고, 이런 그들을 다른 시각에서 보는 콜리를 등장시켜 주변을 환기시킨다. 그리고 그 시선은 따뜻하다. 큰 이벤트도 화려한 장면도 없지만 조용히 조금씩 가슴 속으로 스며드는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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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 그 날 그 소리예요 도토리 큰숲 1
사노 요코 지음, 김정화 옮김 / 도토리나무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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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노 요코의 동화책이다. 사노 요코의 에세이는 몇 권 읽었지만 동화는 처음이다. 일본 그림책 명작으로 뽑히는 <100만 번 산 고양이>는 아직 읽지 못했는데 이 동화를 읽으니 관심이 더 생긴다. 사실 동화는 잘 읽는 분야가 아니다. 어릴 때 읽고 성인이 된 후에는 몇 편 읽지 않았다. 하지만 아이가 자라면서 밤에 한두 권씩 읽어주다 보니 생각보다 많은 동화를 읽게 되었다. 같은 책을 여러 번 읽게 되는 경우도 있고, 이전에는 몰랐던 작가들을 알게 되는 경우도 생긴다. 물론 지금 내가 읽는 동화는 초등학교 입학 전 아이 대상이다. 아마 이 동화를 읽어준다면 재밌게 듣지 않을까 생각한다.


이 동화는 천재와 평범한 사람의 차이를 그려낸다. 물론 이 동화 속에서 비교 대상이 되는 두 존재는 사람이 아니다. 고양이다. 아주 덩치 큰 새까만 돼지가 할머니가 사는 집에 고양이들을 데리고 온다. 처음 온 고양이는 평범하고, 나중에 온 고양이는 가히 천재라고 해도 부족함이 없다. 평범한 고양이는 주눅 들기도 하지만 천재 고양이를 올려본다. 이름도 처음 온 고양이는 고양이로 불리고, 뒤에 온 검은 고양이는 쿠로란 이름이 있다. 이름에서도 차별이 생기는데 역사 속 사람들의 삶을 생각하면 평범한 민초의 이름을 누가 기억하는가. 반면에 천재들은 역사 속에 계속 남는다.


간결한 이야기다. 장편 소설을 주로 읽다 이런 동화를 읽으면 그 짧은 분량이 혼란스럽다. 활자 크기는 크고, 분량도 많지 않으니 단숨에 읽을 수 있다. 그런데 검은 고양이를 외롭게 묘사한 장면을 보고 잠시 고개를 갸웃거린다. 작가는 천재의 고독으로 이 검은 고양이를 그렸는데 과연 천재로 불린 사람들은 고독했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평범하게 산 사람들이기에 천재들의 삶을 있는 그대로 보지 않고 왜곡해서 본 것은 아닐까? 천재 고양이가 남긴 편지는 천재의 오만으로 가득하지만 따뜻한 마음이 느껴진다. 아마 정중한 인사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검은 고양이 쿠로가 오기 전 할머니와 고양이의 삶은 평온함 그대로였다. 천재는 잘 계획하고 예측하면서 일을 잘 풀어내지만 할머니 등에게는 불필요한 일들이다. 일사에 큰 일이 생기고, 놀라지만 단지 그 뿐이다. 봄이 왔을 때 할머니와 고양이가 보여준 행동은 이것을 잘 보여준다. 귀엽고, 마술을 할 수 있고, 뜨개질도 할 수 있고, 쥐도 잡고, 노래도 부르고, 요리도 하는 특별한 고양이인 쿠로지만 할머니에게 필요한 고양이는 옆에서 함께 있으면서 마음을 나눌 평범한 고양이다. 그리고 동화 속 그림들도 화려하기보다는 투박하고 거칠다. 그래서 더 정겹다. 미세한 표정도 상당히 잘 표현되어 있다. 사노 요코의 다른 동화도 한 번 찾아 읽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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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즘
손원평 지음 / 은행나무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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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몬드>의 책 표지를 보고 반했다. 그래서 사 놓고 묵혀두고 있었다. 요즘 BTS 때문에 인기 역주행하던데 아내가 먼저 읽었다. 잘 읽힌다고 한다. 아직 내가 읽지 않아서 자세한 이야기를 나누지는 못했다. <아몬드>가 중학생 필독서 중 한 권이란 이야기도 들었다. 나는 언제 읽지? 그러다 이 책을 먼저 읽기로 했다. 작가의 첫 번째 연애소설이라고 하지 않는가. 사실 손원평의 소설은 이전까지 단편 딱 한 편만 읽었다. 상당히 마음에 들었기에 계속 관심을 두고 있었다. 아마 올해 이 작가의 작품을 한두 권 정도 더 읽지 않을까 생각한다.


연애소설과 작가 이름을 빼고는 특별한 사전 정보를 가지지 않고 읽었다. 네 남녀의 사랑에 대한 이야기란 것도 몰랐다. 같은 건물에서 일하는 두 남녀 예전과 도원이 만남과 썸을 보고 이 둘의 연애를 다루나 생각했다. 하지만 새롭게 두 인물, 호계와 재인이 등장하면서 이들의 사랑 이야기는 예상을 조금씩 벗어나기 시작한다. 그래 사랑 이야기가 예상한대로만 흘러간다면 얼마나 재미없겠는가. 작가는 여기에 과거의 인연을 집어넣고, 엇갈리는 감정과 그들 각자의 삶을 함축적으로 풀어내면서 이야기에 깊이와 질감을 더한다. 하지만 이들의 사랑 속에는 거친 감정의 표출은 보이지 않는다. 작가가 의도적으로 표현하지 않았다. 그 감정을 강조하듯이 표현하면 너무 감상적으로 흘러갈 수도 있다. 그래서인지 거리를 두고 이들의 이야기를 들여다볼 수 있었다.


예진의 과거 프리즘 기억으로 시작한다. 이것은 다시 예진의 이야기와 프리즘으로 마무리된다. 이 사이에 네 남녀의 이야기가 진행된다. 썸과 고용주와 고용인의 관계. 그리고 예상하지 못한 만남. 과거의 감정이 되살아나고, 자신도 몰랐던 감정을 깨닫고, 질투에 빠져 실수를 저지르는 평범한 사랑이 나온다. 이들의 사랑을 엿보고 있으면 나의 과거가 잠깐 머릿속을 스쳐지나간다. 다양한 형태의 사랑을 다루기에 어딘가에서 접점이 하나 정도는 있다. 그렇다고 그 감정에 매몰될 정도는 아니다. 작가는 그 간격을 잘 지킨다. 소설 속 사랑의 감정을, 실연을 구구절절 표현하지 않고 거리를 둔 것은 독자 개인 경험으로 충분히 대체될 수 있다는 것 때문이 아닐까.


아내의 말대로 잘 읽힌다. 그냥 아무 생각 없이 읽으면 네 남녀들의 가벼운 사랑 이야기로 다가온다. 하지만 문장을 천천히 음미하면 잔잔한 감정들이 다가온다. 잡지에 4계절이 지나면서 연재한 내용이다 보니 그 시간이 등장인물들의 감정을 멀리서 들여다보게 한다. 그 간격은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이 된다. 성숙의 시간이다. 친하기에 속내를 드러내었고, 자신이 좋아하기에 그 속내를 이야기했고, 질투의 감정이 이 속내를 파국으로 이끈다. 하지만 이 파국은 도원의 말처럼 불안감과 완벽함에 대한 맹신에서 비롯했다. 타인의 말을 차분히 들으려는 노력이 없었기에, 자신의 의견을 절실하게 표현하려고 하지 않았기에 생긴 파국이다. 삶은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새로운 사랑이, 관계가 만들어진다.


작가 후기에 이 네 사람의 이름이 나온다. 황재인, 이호계, 백도원, 전예진 등이다. 소설 속에서 한 번도 성과 함께 불린 적이 없는데 이렇게 보니 색다른 느낌이다. 다른 나이 대, 다른 성별, 다른 경험들이 뒤섞이고 꼬여 만들어내는 사랑이지만 그 감정은 순수하다. 새로운 가능성, 새로운 만남, 또 다른 일상 등이 조용히 가슴 한 편에 자리잡는다. 그리고 연재본과 출간본 사이에 일어난 코로나19를 두고 고민한 글은 색다른 재미를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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