켄 리우의 소설은 이번이 처음이다. <종이 동물원>에 대한 엄청난 호평을 기억하기에 이 작가에 관심이 많았다. 그런데 이 단편집 홍보를 보면 한국판 오리지널 SF단편집이란 문구가 나온다. 뭐지? 하는 생각이 들었는데 알고 보니 그의 미출간 단편 중 12편을 추려서 한국 판본으로 엮었다. 부정확한 내 기억에 의하면 이런 경우는 처음 본다. 유명 작가의 미출간 단편들을 한국에서 먼저 엮어 내다니 대단하다. 그것도 한국에서 상대적으로 열약한 SF 장르라는 사실을 감안한다면 아주 놀라운 시도다. 이런 용감한 기획에 먼저 박수를 보내고 싶다.
열두 편의 단편들은 제각각 분량이 다르다. 목차를 보면 동양적인 느낌을 주는 제목들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무협의 팬이기에 오독한 부분도 있고, 섣부른 예측을 한 경우도 있다. 어쩔 수 없이 읽다 보면 다른 중국계 SF작가 테드 창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괜히 이런 작가들을 보게 되면 부럽다. 몇 년 전 이윤하 작가가 휴고상을 수상해 아쉬움을 조금 달랠 수 있었지만 아직 상대적으로 부족한 것은 사실이다. 한국에서 꾸준히 SF작품을 내는 작가들이 많아 최근에 이런 아쉬움을 많이 달랠 수 있다. 하지만 좋은 번역가를 만나 한강처럼 SF문학상을 받았으면 한다.
첫 단편 <호(弧)>는 한자를 오독했다. 여우 호라고 생각했는데 곡선을 의미한다. 열여섯에 싱글맘이 된 레나가 갓난아기 찰리를 버리고 자신의 삶을 찾아 떠난다. 결국 이 도피행은 끝나고, 그녀 앞에 새로운 직업이 나타난다. 시신을 놀랍도록 정밀하게 가공하는 직업이다. 예술의 경지까지 올라간다. 그리고 늙지 않는 몸을 만드는 작업도 성공한다. 노화와 시간을 다루는데 마지막 단편 <내 어머니의 기억>과 연결되는 부분이 있다. 이 단편은 시간의 상대성을 이용해 두 모녀의 삶과 외모 등을 간단하면서도 강렬하게 보여준다. 영화 <인터스텔라>의 마지막 장면이 떠오른다.
<심신오행>은 동양의 오행철학과 기를 엮었다. 우주에서 난파한 타이라가 미개척 행성에 도착했다. 이 행성은 중국계들이 사는데 오행의 기를 실 생활에 활용하는 곳이다. 페이젠은 불시착한 그녀를 구한 후 그녀의 단전이 빈 것을 보고, 그곳을 채우는 작업을 한다. 여기에 재밌는 설정 하나를 집어넣는데 그것은 미생물과 감정에 대한 것이다. 다른 작품에서 읽었던 것이지만 이 소설은 바이러스가 사라진 인류를 다루면서 다른 시각을 제공한다. 새로운 문화의 접촉과 그 속에서 피어나는 사랑의 감정은 전형적이지만 흥미로운 가정들이다.
<매듭 묶기>는 매듭문자와 유전자 공학을 엮었다. 한글도 나오는데 개인적으로 연관성은 모르겠다. 유전자 공학에 난족의 족장이 도와주지만 그 결과는 참담하다. 그들의 환경에서 잘 자라는 볍씨와 종자의 특허가 묶이면서 그들은 어쩔 수 없이 자본에 종속된다. <사랑의 알고리즘>은 인형을 위해 개발한 인공지능 알고리즘에 대한 것인데 그렇게 강한 인상을 남기진 못했다. <곁>은 원격 접속으로 임종을 기다리는 어머니를 간병하는 남자 이야기다. 인터넷 전화 초창기 외국에 나간 자식들과 상대적으로 쉽고 저렵하게 통화했던 사실들이 떠오른다. 어쩌면 미래의 간병 방법일지도 모르겠다.
싱귤래리티 3부작은 다시 <공각기동대>의 전뇌를 떠올리게 만든다. 자신의 정신을 디지털 세계로 보내는 이야기인데 단계적이지만 독립적으로 이어진다. <카르타고의 장미>는 정신의 디지털화 초기 이야기다. 여동생 리즈의 평온하고 행운 가듯한 일상을 말하는데 나중에 반전이 펼쳐진다. <뒤에 남은 사람들>은 정신을 디지털화 하는 것을 반대하는 사람들 이야기다. 세상이 황폐화되고 있고, 문명은 퇴보했다. 이전 세대의 풍요로움이 사라진 후 인류의 삶이 어떨지 그려진다. 과학, 생존, 퇴화가 엮이고 꼬였다. <어딘가 상상도 못 할 곳에, 수많은 순록 떼가>는 디지털 세계 속 인류의 미래를 그려낸다. 육신이 사라진 시대 속에 인류는 디지털화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새로운 아이를 만들다니. 45년 동안의 짧은 시간이란 표현이 인상적이다. 인간이 물리적 한계를 벗어났을 때 시간은 무한해진다. 물론 이 디지털 세계를 유지하는 물리적 에너지는 절대적이다.
<만조>는 달이 지구에 점점 가까워지면서 생기는 일을 다룬다. 엄청난 조수 간만 차이와 그 속에서 자연과 싸우는 가족 이야기다. <뒤에 남은 사람들> 속 사람들이 연상된다. <달을 향해서>는 달 이민을 신청한 사십대 중국 남자 이야기다. 완고하고 원칙적인 샐리를 등장시켜 진실보다 사람들이 선호하는 이야기를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잘 보여준다. <모든 맛을 한 그릇에―군신 관우의 아메리카 정착기>는 이 단편집에 가장 분량이 많다. 오하이오에 중국인들이 나타나면서 일어나는 일들과 관우의 이야기가 엮여 펼쳐진다. 중국인들이 백인들 속에 자리잡으려는 노력과 관우인 듯한 로건의 행동과 이야기는 고대 관우를 자연스럽게 떠올린다. 관우가 타임슬립을 했다고 가정하는 것도 재밌을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