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살인은 여자의 일
고이즈미 기미코 지음, 김도일 옮김 / 허클베리북스 / 2020년 8월
평점 :
<변호 측 증인>이란 소설을 사 놓고 상당히 오랫동안 묵혀두고 있다. 좋은 평가를 받은 작품을 호기심에 구매하고 묵혀두는 일은 나에게 아주 흔한 일이다. 그런데 이 소설을 읽으면서 이 책을 다시 앞으로 내놓았다. 시간이 된다면 빠른 시간 안에 읽고 싶은 마음 때문이다. 이런 마음이 들게 한 것은 바로 <살인은 여자의 일>이란 단편이었다. 그리고 나머지 단편들도 읽으면서 이 작가의 다른 단편들에 관심이 생겼다. 인터넷 서점 검색하니 나오는 작품은 다른 작가들과 함께 한 단편집 밖에 없다. 물론 이 단편집도 구판으로 집 어딘가에 있을 것이다.
모두 여덟 편의 단편이 실려 있다. 개인적으로 모두 마음에 드는 작품들이다. 일상에서 시작해 뒤틀린 심리를 표현하고 예상하지 못한 상황과 반전을 보여준다. 시대와 상황 등에서 약간 어색하게 느껴지는 부분이 있는 소설도 있지만 그 욕망과 오해와 반전 등은 읽고 난 후 만족감을 높여준다. 그리고 이 작품집은 한 작품 반을 제외하면 모두 여성들의 심리 묘사에 집중하고 있다. <여도둑의 세레나데>란 작품의 경우 남녀가 번갈아 나와 ‘반’을 덧붙였다. <털>과 더불어 살인이 없는, 혹은 발생 가능성이 없는 작품이기도 하다.
표제작 <살인은 여자의 일>은 여성 문학 편집자의 심리를 따라간다. 잘 생긴 남성 작가의 아내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 자리에 자신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 작가는 미스터리 작가를 꿈꾸지만 그녀는 이런 작품에 관심이 없고, 낮추어본다. 아이라 레빈의 <죽음의 키스> 같은 작품을 쓰고 싶다고 했을 때 그 작품이 무엇인지도 모른다. 다만 이 남자를 유혹하고, 그 아내에게 살의를 느낄 뿐이다. 이런 뒤틀린 심리 속에 자신의 욕망이 투여되고, 마지막 장면에서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반전이 펼쳐진다. 어쩌면 작가는 이야기 속에 힌트를 숨겨 놓았는지도 모르겠다.
<수사선상의 아리아>는 느와르를 꿈꾸는 소년이 나온다. 그는 이런 분위기에 빠져 그 세계를 동경한다. 그의 이런 마음을 친구들은 모른다. 그러다 우연히 한 음악에 끌려 같은 아파트 다른 방을 기웃거린다. 이 방은 오랜 세월 접대부로 일해 온 여자가 잠시 나갔다 온다고 열어놓은 상태다. 과거를 회상하는 그녀와 소년과 늦은 밤. 그리고 그녀를 찾아온 금장 출소한 전직 살인자. 동경하는 세상을 현실에서 마주한 소년의 공포와 불안감이 그대로 느껴지고, 마지막엔 예상한 결말로 이어진다. 그런데 이 과정이 재밌다.
<살의를 품고 어둠 속으로>는 남편과 불륜을 저지르고, 매일 자신에게 전화해서 스트레스를 주는 여자를 죽이려는 살의를 다룬다. 읽으면서 이 시대 일본의 남자들은 이렇게까지 뻔뻔했는가 하는 생각이 들고, 여자의 놀라운 행동에는 깜짝 놀란다. 이 시절 한국에도 이런 남자들이 있었겠지만. 살의가 점점 자라는 과정을 보여주고, 이 살의를 실천으로 옮기려는 장면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예상하지 못한 상황이 펼쳐지는데 어딘가에서 본 듯한 설정이다. 이 설정이 누가 먼저인지는 모르겠지만 마지막 문장과 살의의 증가 과정이 매력적이다.
<두 번 죽은 여자>은 전직 유명 재즈 가수 이야기다. 두 번 죽었다는 말은 실제 죽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한 번은 병으로 죽을 뻔 한 것이고, 나머지 한 번은 상상 속 죽음이다. 이 단편의 매력은 이 가수가 병을 앓고 난 후 컴백해 작은 무대에 서고, 그녀를 아는 사람들이 없는 현실에 대한 심리 묘사와 두 번째 죽음이 일어나는 상황이다. 복귀 첫 무대에서 절도 사건일 일어나고, 그 사건을 형사가 해결하고, 늙은 형사가 그녀를 알아본다. 이 노형사와 바에서 이야기를 나누면서 일어나는 일들은 그녀에게 두 번째 죽음을 선사한다. 섬세한 심리 묘사와 감정 표현이 재밌다.
<털>은 전형적인 일본 부부의 일상으로 시작해서 일 년에 한두 번 일탈하는 아내의 이야기와 반전으로 마무리한다. 이 단편을 읽으면서 아이가 밤에 깨지 않고 계속 잔다는 부분에 놀랐다. 우리 애만 그렇게 밤에 깬 것일까? <안방 오페라>는 읽으면서 역지사지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서부극과 SF 등의 장르 소설을 얕보는 늙은 여성 소설가가 자신의 딸 일에 흥분하는 모습을 보고, 같이 사는 며느리의 생각을 추론하게 된다. 그리고 마지막 장면이 암시하는 것은 무얼까? 과거 일본이라고만 하기에는 현실 한국에서도 결코 낯설지 않은 모습이다.
<아름다운 추억>은 충격적인 장면으로 시작한다. 손녀가 할머니에게 폭력을 가하고, 넘어지면서 모서리에 머리가 부딪혀 죽는다. 그 후 경찰에 자신이 자유롭고 싶어서 죽였다고 말한다. 작가는 이 소녀의 분노에 집중하기보다 할머니의 과거와 심리 묘사에 집중한다. 손녀가 되고 싶어 하는 배우를 찾아가 학교로 돌아가게 해 달라고 부탁하려고 하는데 그곳에서 자신이 딸이 동경했던 배우를 만난다. 이 만남이 오해와 착각으로 대화가 이어지는데 이 부분을 아주 잘 다루었다.
<여도둑의 세레나데>은 전직 형사 출신의 백화점 보안요원과 절도단 소속 여도둑의 이야기다. 이 둘의 심리를 따라가면 멋진 한쌍의 커플이 되지만 현실은 도둑과 보안요원이다. 자신의 일을 하면서 절도단의 의도를 간파하는 보안요원과 그에게 반한 여도둑의 행동과 심리 묘사는 이 단편집에서 유일하게 유쾌한 결론으로 이어진다. 일상 속 심리의 이면을 다루면서 반전을 멋지게 이끌어내는 작품들과는 다른 전개다. 어떻게 보면 한 편의 코믹한 연극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