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의점 안전가옥 앤솔로지 4
유기농볼셰비키 외 지음 / 안전가옥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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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전가옥 앤솔로지 4번째 작품집이다. 여러 번 말했듯이 이 앤솔로지를 대단히 좋아한다. 5번째 앤솔로지 <대스타>까지 나왔는데 어디까지 나올지 기대된다. 이 앤솔로지의 특징은 장르 복합적이고 재미를 우선으로 했다는 점이다. 판타지, sf 장르를 좋아하는 나에겐 딱 맞는 선택이다. 이 앤솔로지 속 작가들 작품을 먼저 읽고 장편이나 그들의 단편집으로 넘어간 경우도 있다. 이번에도 낯익은 이름이 보인다. 다른 앤솔로지처럼 다섯 명의 작품이 실려 있다. 판형도 변함없이 작다. 들고 다니면서 읽기엔 좋지만 고정시켜 놓고 읽기는 힘들다.


유기농볼셰비키의 <창조와 비밀>은 인간의 불완전성이 어디에서 기원했는가에 대한 발칙한 상상이다. 외계인 미대생의 조별 과제 부산물이란 설정은 독창적이다. 종교와 진화론, 인간의 지구 파괴 등을 아주 유쾌한 문장으로 풀어낸다. 교리문답의 방식이지만 인간과 종교를 돌아보게 만든다. 창조주를 닮은 형태가 물개나 물범이란 것도 재밌다. 인간이 지구상에서 가장 위대한 창조물이란 주장을 그냥 무시한다. 여기에 살짝 종말론을 암시하는 부분도 넣었다. 이 단편에서 편의점은 맛있는 음식들을 제공하는 공간으로 작용한다.


류연웅의 <카라마조프 헤븐>은 읽으면서 프로듀스 101을 떠올랐다. 응모작에서 실제 있는 업체명을 사용했다고 하는데 대충 예상 가능하다. 밤을 헤매다 우연히 깬 곳이 카마라조프 매장 이벤트 대기줄 1번이 되었다는 설정은 황당하다. 그리고 이 줄이 의미하는 바와 마케팅을 엮는다. 동시에 주인공의 아들이 사라졌다는 소식과 그의 캐리어가 연결된다. 편의점에 들어간다는 것이 누군가에겐 아주 행복한 공간으로의 진입일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작가의 후기처럼 마지막 장면은 열린 결말이다.


이아람의 <여자의 얼굴을 한 방문자>는 편의점 알바 선이 주인공이다. 어느 날 한라산에 외계물체가 떨어졌고, 이것이 여자의 모습으로 변한다. 이 물체의 일부가 여성의 모습으로 선을 찾아온다. 이 환상적인 상황과 그녀의 과거 기억들이 교차한다. 그녀가 제주도로 내려 온 것은 이 아픈 과거를 잊기 위해서다. 약속된 일자리는 사라지고, 편의점 알바를 할 수밖에 없다. 외계 생명체와의 교류가 이어지다가 마지막에 한 편의 스릴러처럼 변하는데 개인적으로 아쉬운 전개다. 하지만 인간의 공포와 욕망 너머의 존재를 암시하는 마지막 장면은 여운은 남긴다.


정세호의 <마지막 퇴근은 손님들과 함께>는 편의점 점주가 주인공이다. 매출이 나오지 않아 폐점하려고 해도 위약금 문제로 닫을 수 없다. 불공정 계약의 대표적인 형태다. 이런 그에게 어느 날 늦은 밤 낯선 존재가 찾아온다. 그와 계약을 맺는데 이때부터 매출이 늘어난다. 하지만 그는 이들이 두려워 편의점을 닫으려고 한다. 당연히 본사 담당은 협박하고 달래면서 말린다. 다른 두 입장이 충돌한다. 실제 작가가 3년 동안 편의점을 운영했다고 하는데 그 경험이 녹아 있는 것 같다. 이 존재들의 정체가 밝혀지고 함께 퇴근하는 그를 보면서 두 계약의 차이가 눈에 들어온다.


이산화의 <잃어버린 삼각김밥을 찾아서>는 초대작이다. 문화체육관광부 산하 기이현상청 소속 공무원 우모린이 주인공인데 이 놈이 상당히 특이하다. 그의 과거와 현재 애인들을 보면 결코 평범하지 않다. 현 애인 비희는 일루미나티가 운영하는 제3광명신제품연구소 직원인데 변신 파충류 인간이다. 이 연구소에서는 인류가 먹을 수도 있는 식품을 만들어 편의점 등에 공급한다. 그런데 배송 실수로 가지 말아야 하는 제품이 편의점에 들어간다. 환각 작용을 하는 앙버터 삼각김밥을 기이현상청에서 모르게 수거해야 하는데 이 과정에 그의 이전 애인들(역시 인간이 아니다) 도움을 받는다. 유쾌한 활극이 벌어지고, 예상한 결말로 이어지는데 재밌다. 우모린을 주인공으로 한 장편이 나오면 어떨까 하는 기대가 생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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멸망의 정원
쓰네카와 고타로 지음, 이규원 옮김 / 고요한숨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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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오랜만에 쓰네카와 고타로의 소설을 읽었다. 이제는 대부분 절판되었지만 한때는 ‘노블마인’에서 이 작가의 작품이 몇 권 나왔었다. 개인적으로 재밌게 읽은 기억이 있다. 이 작가의 작품은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잘 다룬다. 이번 작품도 마찬가지다. 환상의 공간으로 들어간 스즈가미 세이치와 현실 속 사람들의 이야기가 교차한다, 첫 도입부가 약간 밋밋하다는 느낌이 들었는데 착각이었다. 현실에서 비현실의 세계로 넘어가는 과정도 단숨에 이루어지고, 이후 이어지는 이야기도 처음에는 밋밋해 보인다. 그러다 그에게 전달되는 편지를 통해 현실의 정보가 조금씩 전달된다. 본격적인 이야기는 이때부터다.


세이치는 마음에 든 여자를 따라 전철에 내렸고, 그곳은 현실의 세계가 아니다. 그는 평범한 회사원이었다. 그의 직장은 좋은 회사가 아니었고, 아내도 마찬가지도 좋은 배우자가 아니었다. 회사는 폭력과 폭언과 야근이 이어졌고, 아내는 호스트바를 들락거린다. 일상의 힘겨움과 잠깐의 끌림과 전철에 놓고 내린 가방 등이 엮이면서 그는 낯선 곳에 도착한다. 이 마을 사람들은 친절하고 상냥하다. 잘 곳 없는 그를 재워주고, 먹을 것도 공짜로 준다. 마녀가 살던 집에서 살라고 하고, 닭산에 가서 주은 것을 가져오면 돈을 준다고 한다. 그곳에서 그는 금덩이 등의 보석과 돈이 되는 광물을 가지고 온다. 돈이 쌓인다. 이 마을에서 그는 도쿄로 가려고 하지만 누구도 그곳을 모른다. 어느 순간부터 놀라운 정보를 가진 편지가 오고, 나중에는 사람까지 찾아온다.


편지는 그가 현실에서 어떤 상황인지 알려준다. 지구를 덮은 거대한 해파리 같은 물체의 한가운데 그가 있다고. 지구는 푸니라고 불리는 물체로 수많은 사람들이 죽고 있다고. 믿기 힘든 이야기들이다. 실제 지구에서 그의 영역으로 들어온 사람이 이 사실을 확인해주고, 핵을 파괴하자고 말한다. 어느 순간 이 마을이 편해지고, 결혼하고 애까지 낳은 그에게 이런 말은 거짓말처럼 다가온다. 그를 죽인다. 이 마을을 찾아오는 마물로 생각한다. 이 마물 퇴치는 그렇게 어렵지 않다. 마을 사람들이 힘을 합쳐 마물을 물리치는 장면도 나온다. 특별히 긴장감을 고조시키지 않는다. 하지만 다음 장으로 넘어가면 현실이 드러난다.


세이치가 평온한 일상을 누릴 때 지구는 푸니 때문에 수많은 사람들이 죽는다. 푸니에 대한 내성은 등급별로 나누어지는데 낮은 등급은 근처만 가도 죽는다. 이 푸니를 죽이는 방법은 하나밖에 없다. 불이다. 그런데 불 붙은 푸니가 움직이면서 화재를 발생시킨다. 한 도시의 삼분의 일이 탈 정도다. 이후 두 명의 새로운 등장인물을 등장시켜 이 푸니를 둘러싼 이야기를 펼친다. 한 명은 푸니가 나타나기 전 출생자고, 다른 한 명은 그 이후 출생자다. 이 둘의 푸니 내성치는 최고 수준이다. 푸니를 먹거나 먹힌 사람들이나 동물들은 일주일 정도 지나면 푸니화된다. 푸니의 이동 등으로 고립된 사람들을 구하기 위한 조직도 생기고, 푸니를 조정할 수 있는 능력자도 등장한다. 멸망의 세계는 새로운 인물과 조직을 필요로 한다.


현실의 위험성을 보여주면서 세이치의 세계에 대한 설명은 줄어든다. 푸니를 관리하기 위한 기구나 법 등이 생기지만 악의는 이것을 이용한다. 푸니를 먹이면 죽으니 이보다 좋은 독약이 없다. 사회 곳곳에서 이런 일이 생기지만 법이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없다. 악의적인 장난으로 동창에게 푸니를 먹이는 일까지 벌어진다. 이 일이 역효과를 불러오긴 하지만 인간의 악의와 뒤틀린 감성 등은 이런 상황에서도 사라지지 않는다. 하지만 이 지구를 구하기 위한 사람들도 있다. 바로 돌입자들이다. 세이치가 만난 사람도 돌입자였다. 마을에 나타난 마물도 돌입자였다. 다른 두 세계, 다른 두 현실이 묘한 느낌을 전달한다. 실제 현실에서 이런 모습을 찾아보는 것도 가능할 것이다. 인종 문제 같은 것들 말이다.


가독성이 역시 좋다. 판타지이지만 현실에 대한 은유와 비판이 곳곳에 심어져 있다. 지구가 멸망으로 옮겨가는 과정에 있고, 이것을 타개하기 위해 세이치의 공간 속으로 돌입한다. 이 설정은 공존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다른 환경을 경험한 두 사람의 기억이 어떻게 세상을 인식하는지 보여주는 장면은 인상적이다. 공존이 불가능하다면 끝까지 갈 수밖에 없다. 이것을 수행하기 위한 돌입대의 대장으로 인간이 아닌 인공지능로봇을 설정한 것도 의미심장하다. 멸망과 절망, 삶의 의지와 생존의 어려움, 새로운 환경에 대한 적응 등이 엮이고 꼬이면서 생각할 거리를 만든다. 그리고 재밌다. 아직 읽지 않은 그의 작품이 있다는 사실이 즐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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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은 여자의 일
고이즈미 기미코 지음, 김도일 옮김 / 허클베리북스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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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호 측 증인>이란 소설을 사 놓고 상당히 오랫동안 묵혀두고 있다. 좋은 평가를 받은 작품을 호기심에 구매하고 묵혀두는 일은 나에게 아주 흔한 일이다. 그런데 이 소설을 읽으면서 이 책을 다시 앞으로 내놓았다. 시간이 된다면 빠른 시간 안에 읽고 싶은 마음 때문이다. 이런 마음이 들게 한 것은 바로 <살인은 여자의 일>이란 단편이었다. 그리고 나머지 단편들도 읽으면서 이 작가의 다른 단편들에 관심이 생겼다. 인터넷 서점 검색하니 나오는 작품은 다른 작가들과 함께 한 단편집 밖에 없다. 물론 이 단편집도 구판으로 집 어딘가에 있을 것이다.

 

모두 여덟 편의 단편이 실려 있다. 개인적으로 모두 마음에 드는 작품들이다. 일상에서 시작해 뒤틀린 심리를 표현하고 예상하지 못한 상황과 반전을 보여준다. 시대와 상황 등에서 약간 어색하게 느껴지는 부분이 있는 소설도 있지만 그 욕망과 오해와 반전 등은 읽고 난 후 만족감을 높여준다. 그리고 이 작품집은 한 작품 반을 제외하면 모두 여성들의 심리 묘사에 집중하고 있다. <여도둑의 세레나데>란 작품의 경우 남녀가 번갈아 나와 ‘반’을 덧붙였다. <털>과 더불어 살인이 없는, 혹은 발생 가능성이 없는 작품이기도 하다.

 

표제작 <살인은 여자의 일>은 여성 문학 편집자의 심리를 따라간다. 잘 생긴 남성 작가의 아내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 자리에 자신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 작가는 미스터리 작가를 꿈꾸지만 그녀는 이런 작품에 관심이 없고, 낮추어본다. 아이라 레빈의 <죽음의 키스> 같은 작품을 쓰고 싶다고 했을 때 그 작품이 무엇인지도 모른다. 다만 이 남자를 유혹하고, 그 아내에게 살의를 느낄 뿐이다. 이런 뒤틀린 심리 속에 자신의 욕망이 투여되고, 마지막 장면에서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반전이 펼쳐진다. 어쩌면 작가는 이야기 속에 힌트를 숨겨 놓았는지도 모르겠다.

 

<수사선상의 아리아>는 느와르를 꿈꾸는 소년이 나온다. 그는 이런 분위기에 빠져 그 세계를 동경한다. 그의 이런 마음을 친구들은 모른다. 그러다 우연히 한 음악에 끌려 같은 아파트 다른 방을 기웃거린다. 이 방은 오랜 세월 접대부로 일해 온 여자가 잠시 나갔다 온다고 열어놓은 상태다. 과거를 회상하는 그녀와 소년과 늦은 밤. 그리고 그녀를 찾아온 금장 출소한 전직 살인자. 동경하는 세상을 현실에서 마주한 소년의 공포와 불안감이 그대로 느껴지고, 마지막엔 예상한 결말로 이어진다. 그런데 이 과정이 재밌다.

 

<살의를 품고 어둠 속으로>는 남편과 불륜을 저지르고, 매일 자신에게 전화해서 스트레스를 주는 여자를 죽이려는 살의를 다룬다. 읽으면서 이 시대 일본의 남자들은 이렇게까지 뻔뻔했는가 하는 생각이 들고, 여자의 놀라운 행동에는 깜짝 놀란다. 이 시절 한국에도 이런 남자들이 있었겠지만. 살의가 점점 자라는 과정을 보여주고, 이 살의를 실천으로 옮기려는 장면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예상하지 못한 상황이 펼쳐지는데 어딘가에서 본 듯한 설정이다. 이 설정이 누가 먼저인지는 모르겠지만 마지막 문장과 살의의 증가 과정이 매력적이다.

 

<두 번 죽은 여자>은 전직 유명 재즈 가수 이야기다. 두 번 죽었다는 말은 실제 죽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한 번은 병으로 죽을 뻔 한 것이고, 나머지 한 번은 상상 속 죽음이다. 이 단편의 매력은 이 가수가 병을 앓고 난 후 컴백해 작은 무대에 서고, 그녀를 아는 사람들이 없는 현실에 대한 심리 묘사와 두 번째 죽음이 일어나는 상황이다. 복귀 첫 무대에서 절도 사건일 일어나고, 그 사건을 형사가 해결하고, 늙은 형사가 그녀를 알아본다. 이 노형사와 바에서 이야기를 나누면서 일어나는 일들은 그녀에게 두 번째 죽음을 선사한다. 섬세한 심리 묘사와 감정 표현이 재밌다.

 

<털>은 전형적인 일본 부부의 일상으로 시작해서 일 년에 한두 번 일탈하는 아내의 이야기와 반전으로 마무리한다. 이 단편을 읽으면서 아이가 밤에 깨지 않고 계속 잔다는 부분에 놀랐다. 우리 애만 그렇게 밤에 깬 것일까? <안방 오페라>는 읽으면서 역지사지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서부극과 SF 등의 장르 소설을 얕보는 늙은 여성 소설가가 자신의 딸 일에 흥분하는 모습을 보고, 같이 사는 며느리의 생각을 추론하게 된다. 그리고 마지막 장면이 암시하는 것은 무얼까? 과거 일본이라고만 하기에는 현실 한국에서도 결코 낯설지 않은 모습이다.

 

<아름다운 추억>은 충격적인 장면으로 시작한다. 손녀가 할머니에게 폭력을 가하고, 넘어지면서 모서리에 머리가 부딪혀 죽는다. 그 후 경찰에 자신이 자유롭고 싶어서 죽였다고 말한다. 작가는 이 소녀의 분노에 집중하기보다 할머니의 과거와 심리 묘사에 집중한다. 손녀가 되고 싶어 하는 배우를 찾아가 학교로 돌아가게 해 달라고 부탁하려고 하는데 그곳에서 자신이 딸이 동경했던 배우를 만난다. 이 만남이 오해와 착각으로 대화가 이어지는데 이 부분을 아주 잘 다루었다.

 

<여도둑의 세레나데>은 전직 형사 출신의 백화점 보안요원과 절도단 소속 여도둑의 이야기다. 이 둘의 심리를 따라가면 멋진 한쌍의 커플이 되지만 현실은 도둑과 보안요원이다. 자신의 일을 하면서 절도단의 의도를 간파하는 보안요원과 그에게 반한 여도둑의 행동과 심리 묘사는 이 단편집에서 유일하게 유쾌한 결론으로 이어진다. 일상 속 심리의 이면을 다루면서 반전을 멋지게 이끌어내는 작품들과는 다른 전개다. 어떻게 보면 한 편의 코믹한 연극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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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간직한 비밀
라라 프레스콧 지음, 오숙은 옮김 / 현암사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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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오래전 보리스 파스테르나크의 <닥터 지바고>를 재밌게 읽은 적이 있다. 한참 러시아 소설을 읽을 때가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영화도 본 것 같은데 정확하지 않다. TV에 나오는 영화를 처음부터 끝까지 본 기억이 없기 때문이다. 물론 이 소설을 두고 벌어졌던 몇 가지 에피소드들도 알고 있었다. 이런 가십을 한때는 무척 좋아했었다. 지금 다시 읽으라고 한다면 그 분량 때문에 쉽게 손이 나갈 것 같지는 않다. 20대의 시간은 사실 이런 소설들을 읽기는 최적이다. 물론 작품에 대한 이해의 폭이나 깊이는 지금이 더 낫겠지만 일상에서 이런 여유 시간을 내기는 그 시절이 더 좋다. 이 작품이 회상으로 구성된 것처럼 잠시 나의 과거를 회상해봤다.


소설은 모두 1인칭 화자의 시점으로 진행된다. 처음에 이 사실을 몰랐을 때는 화자가 바뀐 것이 조금 어색했다. 정보국 소속 타자수의 시점에서, <닥터 지바고>의 여주인공 라라의 모델로 알려진 올가 이빈스카야의 시점으로, 정보국 신입 타자수로 입사한 이리나로, 여자 스파이 샐리 등으로 바뀐다. 이 시점의 변화는 처음에는 낯설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들이 처한 상황과 심리 묘사에 최적임을 깨닫는다. 자신의 행동과 심리를 이렇게 표현해주니 다른 사람들의 관점이 새롭게 다가와 흥미로웠다. 어떤 장면은 예상하지 못한 상황과 전개로 놀라웠다.


이 소설의 시점들은 대부분 여성들이다. 보리스 파스테르나크와 테디가 한두 번씩 나오지만 이것은 그들의 상대방을 더 잘 이해하게 만들어주는 역할을 할 뿐이다. 보리스가 나온 경우는 그의 연인이 굴라트로 유배를 간 후 돌아오면서 생긴 순간을 다루고, 테디는 보리스의 소설이 이탈리아에서 출간된 후 러시아 원본을 빼내려고 할 때 나온다. 처음에는 등장인물들이 처한 상황 이야기가 주류였지만 책이 출간된 후에는 이 소설을 둘러싼 음모와 배신 등이 조용히 전면에 나온다. 그리고 내가 책을 선택할 때 오해한 부분이 바로 잡힌다. 그 오해는 <닥터 지바고>의 출간이 아주 은밀하고, 출간을 둘러싼 음모가 핵심일 것이란 내용이다. 하지만 진짜 작전은 이 소설의 러시아 판본을 러시아 내부로 보내는 것이다. 지금의 나는 쉽게 납득할 만한 내용이 아니다.


동과 서로 책은 구성되어 있다. 동은 러시아에서 벌어진 이야기를, 서는 미국 중심으로 유럽으로 공간이 움직인다. 유명 시인 보리스가 소설을 쓴다는 소식과 그가 읽어준 작품만 가지고 올가는 보리스의 아이를 유산하고 굴라트에 갇힌다. 스탈린의 죽음으로 풀려나 보리스를 도와 작품을 완성한다. 작품이 완성되어도 국내에서는 출판을 할 수가 없다. 그러다 몰래 접근한 이탈리아 출판업자에게 원고를 넘긴다. 당연히 문제가 되지만 쉽게 그를 굴라트로 보내지 못한다. 그가 노벨상을 수상하게 되면서 벌어지는 국내외 반응은 아주 흥미롭다. 너무나도 유명하기에 직접 그를 공격하지 못하고 올가가 그 대상이 된다.


이리나와 샐리는 평범한 정보국 여직원이 아니다. 다른 타자수가 회상한 것처럼 이 시절은 남녀 차별이 아주 심했다. 똑같은 학교를 나와도 여성은 기껏 타자수가 되고, 남자는 더 좋은 자리로 옮겨간다. 이렇게 작가는 이 시절의 불평등을 하나씩 이야기 속에 녹여낸다. 샐리가 2차 대전에서 훌륭한 일을 해내어도 정보국에서 한 자리 차지 할 수 없다. 동성애자란 것이 밝혀지면 공무원 자리마저 잘린다. 시대의 한계와 불평등이 이 소설에는 잘 녹아 있다. 그리고 이리나가 배달원이 되는데 이 일이 어떤 것인지, <닥터 지바고> 러시아 판본과 어떻게 연결되는지 보여준다. 금서에 대한 사람들의 열망과 욕망이 잘 드러난다.


1인칭 화자 시점으로 이어지는 와중에 한 사람의 역할이 어떻게 바뀌는지 제목의 나열에서 그대로 드러난다. 제비에서 정보원과 변절자로, 뮤즈에서 수용소의 여인과 특사와 어머니 등으로, 지원자에서 배달원과 수녀와 학생으로. 이 변화는 자신들이 의도한 것도 있지만 외부적 요인에 의한 것도 적지 않다. 일반적이 않은 상황이 만들어내는 불안은 그 시대의 현실과 연결된다. 지금 일반적이고 일상적인 것도 그때는 달랐다. 한 작가의 작품을 둘러싼 다양한 사람들의 시선과 그 작품을 둘러싼 정보국의 전략 등은 시점의 변화와 잘 어우러져 가독성을 높인다. 역사적 사실 위에 그 시대의 부조리를 쌓아올려 한 편의 멋진 소설이 탄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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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이 부서지기 전에 에버모어 연대기 1
에밀리 킹 지음, 윤동준 옮김 / 에이치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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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버모어 연대기 1편이다. <백 번째 여왕> 시리즈 작가의 새로운 시리즈다. 전작의 평이 나쁘지 않아 선택했는데 예상과 조금 다른 부분이 있다. 시간여행을 소재로 했다고 하는데 아직 이 부분이 크게 보이지 않는다. 읽으면서 머릿속은 중세 이후 영국이 떠올랐다. 여왕과 죄수들을 보내 새로운 섬을 개척하려는 의지 등이 오스트레일리아의 초기 이민 모습과 겹쳤기 때문이다. 솔직히 말해 이런 부분들과 초반의 진행이 엮이면서 약간 지루한 감이 있었다. 진행 속도가 더딘가 하고 돌아보면 결코 더디지 않다. 애벌 리가 자신의 집안을 몰락시킨 총독 마크햄을 뒤쫓아 가는 과정은 빠르게 이어진다. 아마도 그녀의 성격과 그녀를 둘러싼 환경에 쉽게 빠져들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애벌리의 가문은 남작 가문이었다. 하지만 어머니의 생일날 갑자기 침입한 마크햄 무리에 의해 모두 죽었다. 애벌리도 칼에 찔렸지만 외삼촌이 시계태엽심장을 이식해 살았다. 이 시계태엽심장은 시계처럼 작동한다. 격렬한 감정의 변화나 운동을 하게 되면 센서가 작동해 종소리가 난다. 이 소리를 궁금해 하는 주변인들이 생기는데 그녀의 시계태엽심장은 삼촌만 알고 있는 비밀이다. 그녀가 거리의 여성들과 함께 체포되어 여왕이 개발하고자 하는 비수섬으로 끌려갈 때 시계 수리 장비를 전달한 것도 이 때문이다. 그녀는 죄수들의 섬에 끌려가지 않을 수 있었지만 마크햄이 그곳으로 간다는 사실을 알고 그 일행에 참여하기로 했다. 그녀의 목표는 그를 죽여 가족의 복수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첫 도입부에 삼촌의 시계점에 온 해군 대위 재미슨은 순수하다. 그는 가슴 속에 가족의 비극과 아픔을 품고 살아간다. 그리고 무엇보다 왕국의 해군 장교란 위치를 잊지 않는다. 하지만 그가 애벌리와 함께 배를 타고 가면서 만들어 가는 관계는 이후 펼쳐지는 이야기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자연스럽게 함께 하면서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살아가는 둘에게 작은 로맨스가 피어난다. 죄수의 섬으로 가는 과정에 선원들과 여죄수들이 결혼을 하게 되는데 선택은 더 높은 지위의 남성에게 있다. 재미슨이 애벌리를 선택할 때만 해도 둘은 예상하지 못한 관계일 것이다.


애벌리가 배속에서 친구들에게 엄마에게 들었던 아마다라 공주의 전설을 이야기한다. 시간의 지배자와 공주와 그 공주를 사랑한 왕자에 대한 전설이다. 아름답지만 비극적이고 전형적인 이야기다. 이 전설은 앞으로 펼쳐질 모험의 시작이다. 책 소개에 나오는 ‘모두가 사랑하는 왕자를 죽여라’는 이야기와도 이어진다. 그런데 이 왕자가 마크햄이란 사실이 나중에 밝혀진다. 책 속에 몇 번이나 나온 10년의 세월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외모란 표현이 왜 나왔는지 알려준다. 그리고 죽었던 것으로 알았던 오빠를 만난다. 그는 마크햄의 부관으로 일하고 있다. 그를 통해 그녀의 기억과 다른 이야기를 듣는다. 진실은 무엇일까?


중세 분위기에 동화 같은 전설이 엮이면서 모험 판타지가 펼쳐진다. 시리즈의 도입부라 다음 이야기를 위해 깔아둔 설정들이 많이 있다. 시계태엽심장을 가진 애벌리를 시간 운반자라고 부르면서 시간의 지배자와 연결시킨다. 작가는 시계태엽심장의 작동 원리를 설명하지 않고, 시계처럼 고장날 수 있음을 알려준다. 실제 몇 번 고장나기도 한다. 목숨이 위험해지지만 다른 사람의 도움으로 살아난다. 앞으로 펼쳐질 이야기에서 이 심장이 어떤 역할을 할지 궁금하다. 그리고 마크햄과 함께 시간이 멈춘 곳을 찾아가는 과정 등은 전통 판타지와 닮아 있다. 이때부터 재빠르게 읽힌다. 아마도 다음 이야기에서는 새로운 세계와 모험을 보여줄 것 같은데 어떤 모습일지, 마크햄과는 어떤 대결이 펼쳐질지 호기심을 자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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