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화 : 더 높은 차원의 삶을 위하여 배철현 인문에세이
배철현 지음 / 21세기북스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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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개인의 발견과 완성을 위한 인문 에세이 시리즈 4권 중 마지막 편이다. 심연, 수련, 정적, 승화 등으로 이어지는 작업이다. 이전 세 편도 읽었는데 실용적인 수련법보다는 학구적인 내용으로 가득하다. 전작들처럼 자신의 전공 분야를 잘 활용해 4부, 28개 키워드로 이야기를 풀어낸다. 4부는 응시, 엄격, 명료, 승화 등이다. 저자는 승화가 끝이 아니라고 말한다. 승화를 지금의 삶보다 더 높은 차원의 삶을 추구하려는 마음이라고 했는데 읽다 보니 일본 만화 <드래곤 볼>이 자연스레 떠올랐다. 한 단계를 넘어가면 또 다음 단계의 적이 나타나는 설정 덕분이다. 저자는 동네 야산과 그 산보다 높은 산의 존재를 예로 들었지만.


많은 키워드가 마음속에서 많은 생각으로 움직였지만 1부의 ‘양심’과 ‘전정’은 나의 삶을 돌아보게 만들었다. 과연 내가 양심적인 삶을 살았는가 하는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었고, 내 삶의 가지치기는 제대로 했는가 하는 의문이 들었다. 결론을 먼저 말하면 실패했다. 외부 조건 등에 흔들린 마음과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나아가는 마음에 다른 욕심들이 덕지덕지 붙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더 많은 욕심을 내려놓고 버려야 하는데 탐욕이 이성을 삼켜버린다. 만족이란 감정에 휩싸여 더 나아가지 않고 머문 경우는 얼마나 많은가.


‘걸음’ 이 단어를 한때 현실이 아닌 과거로 만든 적이 있다. 자동차로 출퇴근하면서 걷기는 아주 특별한 일이 되었다. 걷지 않으면서 생긴 수많은 육체적 질병 등은 가끔 나태한 나 자신으로 이어졌다. 건강한 신체와 건강한 정신은 언제 강조해도 부족함이 없지 않은가. 나를 알려주는 것 중 하나가 ‘취미’다. 내가 활용할 수 있는 시간이 부족해지면서 취미는 점점 폭이 좁아진다. 깊이라도 있으면 좋겠지만 한 번 나태해진 나는 가볍게 취미를 즐길 뿐이다. 어떨 때는 즐긴다고 착각하기도 한다. 신중하지 못한 행동과 말 때문에 얼마나 많은 실수를 했는지는 말할 수조차 없다.


간절하게 갈구하는 마음은 집중력을 높인다. 간절함이 사라지고 그 자리를 여유가 차지하면 좋겠지만 반복되는 일상이 그곳에 놓인다. 탐구하고 모험하고 자신의 잠재력의 한계를 뛰어넘으려고 할 때 우린 동물적 인간에서 신적 인간으로 승화한다. ‘내재’는 내 속에 있는 것을 통찰하는 것이다. 우린 점점 더 즉각적이고 즉흥적으로 변하고 있다. 스마트폰은 내 기억을 뒤지기보다 검색으로 넘어가게 만들었다. 새로운 시대에서 바라는 인간상일지 모르지만 그 도구가 없을 때 우린 아무 것도 할 수 없게 된다. 어느 순간 나의 내면으로 들어가려는 노력이 사라지고 있다. 이 시리즈를 읽을 때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위대한 변화의 시작으로 ‘승화’를 꼽는다. ‘각성’도 ‘모험’도 ‘변모’도 일상의 우리 존재를 깨어나게 하고 경계를 초월하게 한다. 저자는 승화를 완성된 상태가 아니라고 분명히 말한다. “승화는 어제와 달라질 오늘의 자기 자신에 대한 신뢰이자, 지속적으로 자신을 혁신하려는 용기 있는 도전”이라고 정의한다. 신뢰와 지속과 혁신과 용기와 도전이 중요 키워드다. 하나만 빠져도 승화는 이루어질 수 없다. 당연히 쉬운 일이 아니다. 등산, 산책, 자연 등을 이 글 속에 계속해서 노출한 것도 변화와 그 변화를 인식하고 관찰하는 노력을 강조하기 위해서다. 그리고 이번에도 그의 글을 읽으면서 풍부한 지식에 부러움을 느낀다. 잠시 긴 숨을 내쉬며 잠깐 눈을 감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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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모나 에프 그래픽 컬렉션
노엘 스티븐슨 지음, 원지인 옮김 / F(에프)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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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재밌고 읽고 있는 f(에프)의 그래픽노블이다. 작가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 에프에서 나왔다는 것과 멋진 악당이 되고 싶은 변신 소녀의 이야기란 부분에 끌려 읽었다. 그림체는 상당히 각이 져 있는데 주인공 니모나만 둥근 얼굴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일상을 다룬 그래픽노블들이 단순한 그림체와 배경 색을 가진 것에 비해 배경이나 여백 등이 많이 채워져 있다. 판타지를 다루고 있는 점을 감안하면 강한 액션의 생동감은 조금 떨어진다. 하지만 단순히 직선적인 구조가 아니고, 엮이고 꼬인 관계와 위트 넘치는 대사와 장면으로 끝까지 재밌게 읽게 한다.


니모나가 악당 발리스터 블랙하트를 찾아오면서 시작한다. 에이전트를 통해 조수가 되려고 왔다고 하는데 거짓말이다. 니모나는 자신의 변신 능력을 보여주면서 무시무시한 악당이 되려고 한다. 그런데 발리스터가 파괴와 살인을 엄청나게 자제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 악당은 뭐지? 악당이 있다면 영웅이 있다. 영웅은 발리스터의 친구였던 암브로시우스 골든로인이다. 암브로시우스는 영웅 협회의 지휘 아래 움직이는데 이것도 상당히 특이하다. 발리스터와 암브로시우스의 관계는 마상 시합에서 암브로시우스가 패한 후 분노 때문에 발리스터를 공격해 그의 오른팔을 부수면서 틀어졌다. 어떻게 보면 전형적인 악당과 영웅 관계처럼 보이는데 이야기가 진행하면서 이 전형성은 조금씩 사라진다.


이 판타지 세계는 서양 중세 시대를 떠올리지만 무기나 방송 등을 보면 아주 현대적이다. 몇몇 장면은 중세라고 해도 무리가 없다. 이 그래픽노블에서 재밌는 설정 중 하나는 협회가 악당과 영웅의 관계를 만들고, 협회가 어둠의 세력이란 점이다. 누구나 인지하는 악당 발리스터가 협회가 몰래 만드는 화학 무기를 대중에게 알리고, 자신이 퍼트린 병으로 음모를 꾸미지만 결국 치료제를 투입하는 등의 모습은 흔히 생각하는 악당이 전혀 아니다. 그는 강요된 악당이다. 니모나의 악당스러운 계획을 반대하는 인물도 역시 그다. 폭주하는 니모나를 억제하는 역할도 한다.


과학과 마법이 공존하고, 중세 설정과 현대의 과학기술이 같이 다루어진다. 니모나의 변신 능력은 물리적 법칙을 무시한다. 동물로도, 사람으로도, 공룡으로도 변신이 가능하다. 다만 생명이 없는 물체는 불가능하다. 소녀가 엄청난 힘을 발휘하는 장면은 마법이기 때문에 가능하다. 중반 이후가 되면 니모나의 정체성과 과거가 하나의 중요한 단서가 된다. 왜 그렇게 악당이 되어 나쁜 짓을 하려고 하는지도 조금은 예측이 가능하다. 이 예측이 맞다고 그 무거움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특별한 능력을 탐내는 사람들이 보여주는 잔혹함은 어떻게 보면 아주 전형적이다. 언제나 비극은 바로 그 부분에서 생긴다.


니모나가 처음에 보여준 유쾌함은 뒤로 가면서 점점 무거워지고 어두워진다. 발리스터와 투닥거리고, 입장 차이가 있지만 둘은 어느 순간 좋은 악당 동료가 된다. 둘 중 하나가 위험해지면 자신의 위험을 생각하지 않고 구하려고 한다. 물론 진짜 악당은 이것을 노린다. 함정을 판다. 협회에 위협이 되는 대외적인 악당들을 처리하려고 한다. 영웅 암브로시우스가 선두에 서야 하지만 그는 발리스터의 친구다. 이 둘의 갈등과 친분은 새로운 사실과 함께 또 한 번 바뀐다. 예상하지 못한 상황과 전개 등은 뒤로 가면서도 재미를 놓치지 않는다. D.C나 마블과는 또 다른 재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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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의점 안전가옥 앤솔로지 4
유기농볼셰비키 외 지음 / 안전가옥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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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전가옥 앤솔로지 4번째 작품집이다. 여러 번 말했듯이 이 앤솔로지를 대단히 좋아한다. 5번째 앤솔로지 <대스타>까지 나왔는데 어디까지 나올지 기대된다. 이 앤솔로지의 특징은 장르 복합적이고 재미를 우선으로 했다는 점이다. 판타지, sf 장르를 좋아하는 나에겐 딱 맞는 선택이다. 이 앤솔로지 속 작가들 작품을 먼저 읽고 장편이나 그들의 단편집으로 넘어간 경우도 있다. 이번에도 낯익은 이름이 보인다. 다른 앤솔로지처럼 다섯 명의 작품이 실려 있다. 판형도 변함없이 작다. 들고 다니면서 읽기엔 좋지만 고정시켜 놓고 읽기는 힘들다.


유기농볼셰비키의 <창조와 비밀>은 인간의 불완전성이 어디에서 기원했는가에 대한 발칙한 상상이다. 외계인 미대생의 조별 과제 부산물이란 설정은 독창적이다. 종교와 진화론, 인간의 지구 파괴 등을 아주 유쾌한 문장으로 풀어낸다. 교리문답의 방식이지만 인간과 종교를 돌아보게 만든다. 창조주를 닮은 형태가 물개나 물범이란 것도 재밌다. 인간이 지구상에서 가장 위대한 창조물이란 주장을 그냥 무시한다. 여기에 살짝 종말론을 암시하는 부분도 넣었다. 이 단편에서 편의점은 맛있는 음식들을 제공하는 공간으로 작용한다.


류연웅의 <카라마조프 헤븐>은 읽으면서 프로듀스 101을 떠올랐다. 응모작에서 실제 있는 업체명을 사용했다고 하는데 대충 예상 가능하다. 밤을 헤매다 우연히 깬 곳이 카마라조프 매장 이벤트 대기줄 1번이 되었다는 설정은 황당하다. 그리고 이 줄이 의미하는 바와 마케팅을 엮는다. 동시에 주인공의 아들이 사라졌다는 소식과 그의 캐리어가 연결된다. 편의점에 들어간다는 것이 누군가에겐 아주 행복한 공간으로의 진입일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작가의 후기처럼 마지막 장면은 열린 결말이다.


이아람의 <여자의 얼굴을 한 방문자>는 편의점 알바 선이 주인공이다. 어느 날 한라산에 외계물체가 떨어졌고, 이것이 여자의 모습으로 변한다. 이 물체의 일부가 여성의 모습으로 선을 찾아온다. 이 환상적인 상황과 그녀의 과거 기억들이 교차한다. 그녀가 제주도로 내려 온 것은 이 아픈 과거를 잊기 위해서다. 약속된 일자리는 사라지고, 편의점 알바를 할 수밖에 없다. 외계 생명체와의 교류가 이어지다가 마지막에 한 편의 스릴러처럼 변하는데 개인적으로 아쉬운 전개다. 하지만 인간의 공포와 욕망 너머의 존재를 암시하는 마지막 장면은 여운은 남긴다.


정세호의 <마지막 퇴근은 손님들과 함께>는 편의점 점주가 주인공이다. 매출이 나오지 않아 폐점하려고 해도 위약금 문제로 닫을 수 없다. 불공정 계약의 대표적인 형태다. 이런 그에게 어느 날 늦은 밤 낯선 존재가 찾아온다. 그와 계약을 맺는데 이때부터 매출이 늘어난다. 하지만 그는 이들이 두려워 편의점을 닫으려고 한다. 당연히 본사 담당은 협박하고 달래면서 말린다. 다른 두 입장이 충돌한다. 실제 작가가 3년 동안 편의점을 운영했다고 하는데 그 경험이 녹아 있는 것 같다. 이 존재들의 정체가 밝혀지고 함께 퇴근하는 그를 보면서 두 계약의 차이가 눈에 들어온다.


이산화의 <잃어버린 삼각김밥을 찾아서>는 초대작이다. 문화체육관광부 산하 기이현상청 소속 공무원 우모린이 주인공인데 이 놈이 상당히 특이하다. 그의 과거와 현재 애인들을 보면 결코 평범하지 않다. 현 애인 비희는 일루미나티가 운영하는 제3광명신제품연구소 직원인데 변신 파충류 인간이다. 이 연구소에서는 인류가 먹을 수도 있는 식품을 만들어 편의점 등에 공급한다. 그런데 배송 실수로 가지 말아야 하는 제품이 편의점에 들어간다. 환각 작용을 하는 앙버터 삼각김밥을 기이현상청에서 모르게 수거해야 하는데 이 과정에 그의 이전 애인들(역시 인간이 아니다) 도움을 받는다. 유쾌한 활극이 벌어지고, 예상한 결말로 이어지는데 재밌다. 우모린을 주인공으로 한 장편이 나오면 어떨까 하는 기대가 생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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멸망의 정원
쓰네카와 고타로 지음, 이규원 옮김 / 고요한숨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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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쓰네카와 고타로의 소설을 읽었다. 이제는 대부분 절판되었지만 한때는 ‘노블마인’에서 이 작가의 작품이 몇 권 나왔었다. 개인적으로 재밌게 읽은 기억이 있다. 이 작가의 작품은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잘 다룬다. 이번 작품도 마찬가지다. 환상의 공간으로 들어간 스즈가미 세이치와 현실 속 사람들의 이야기가 교차한다, 첫 도입부가 약간 밋밋하다는 느낌이 들었는데 착각이었다. 현실에서 비현실의 세계로 넘어가는 과정도 단숨에 이루어지고, 이후 이어지는 이야기도 처음에는 밋밋해 보인다. 그러다 그에게 전달되는 편지를 통해 현실의 정보가 조금씩 전달된다. 본격적인 이야기는 이때부터다.


세이치는 마음에 든 여자를 따라 전철에 내렸고, 그곳은 현실의 세계가 아니다. 그는 평범한 회사원이었다. 그의 직장은 좋은 회사가 아니었고, 아내도 마찬가지도 좋은 배우자가 아니었다. 회사는 폭력과 폭언과 야근이 이어졌고, 아내는 호스트바를 들락거린다. 일상의 힘겨움과 잠깐의 끌림과 전철에 놓고 내린 가방 등이 엮이면서 그는 낯선 곳에 도착한다. 이 마을 사람들은 친절하고 상냥하다. 잘 곳 없는 그를 재워주고, 먹을 것도 공짜로 준다. 마녀가 살던 집에서 살라고 하고, 닭산에 가서 주은 것을 가져오면 돈을 준다고 한다. 그곳에서 그는 금덩이 등의 보석과 돈이 되는 광물을 가지고 온다. 돈이 쌓인다. 이 마을에서 그는 도쿄로 가려고 하지만 누구도 그곳을 모른다. 어느 순간부터 놀라운 정보를 가진 편지가 오고, 나중에는 사람까지 찾아온다.


편지는 그가 현실에서 어떤 상황인지 알려준다. 지구를 덮은 거대한 해파리 같은 물체의 한가운데 그가 있다고. 지구는 푸니라고 불리는 물체로 수많은 사람들이 죽고 있다고. 믿기 힘든 이야기들이다. 실제 지구에서 그의 영역으로 들어온 사람이 이 사실을 확인해주고, 핵을 파괴하자고 말한다. 어느 순간 이 마을이 편해지고, 결혼하고 애까지 낳은 그에게 이런 말은 거짓말처럼 다가온다. 그를 죽인다. 이 마을을 찾아오는 마물로 생각한다. 이 마물 퇴치는 그렇게 어렵지 않다. 마을 사람들이 힘을 합쳐 마물을 물리치는 장면도 나온다. 특별히 긴장감을 고조시키지 않는다. 하지만 다음 장으로 넘어가면 현실이 드러난다.


세이치가 평온한 일상을 누릴 때 지구는 푸니 때문에 수많은 사람들이 죽는다. 푸니에 대한 내성은 등급별로 나누어지는데 낮은 등급은 근처만 가도 죽는다. 이 푸니를 죽이는 방법은 하나밖에 없다. 불이다. 그런데 불 붙은 푸니가 움직이면서 화재를 발생시킨다. 한 도시의 삼분의 일이 탈 정도다. 이후 두 명의 새로운 등장인물을 등장시켜 이 푸니를 둘러싼 이야기를 펼친다. 한 명은 푸니가 나타나기 전 출생자고, 다른 한 명은 그 이후 출생자다. 이 둘의 푸니 내성치는 최고 수준이다. 푸니를 먹거나 먹힌 사람들이나 동물들은 일주일 정도 지나면 푸니화된다. 푸니의 이동 등으로 고립된 사람들을 구하기 위한 조직도 생기고, 푸니를 조정할 수 있는 능력자도 등장한다. 멸망의 세계는 새로운 인물과 조직을 필요로 한다.


현실의 위험성을 보여주면서 세이치의 세계에 대한 설명은 줄어든다. 푸니를 관리하기 위한 기구나 법 등이 생기지만 악의는 이것을 이용한다. 푸니를 먹이면 죽으니 이보다 좋은 독약이 없다. 사회 곳곳에서 이런 일이 생기지만 법이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없다. 악의적인 장난으로 동창에게 푸니를 먹이는 일까지 벌어진다. 이 일이 역효과를 불러오긴 하지만 인간의 악의와 뒤틀린 감성 등은 이런 상황에서도 사라지지 않는다. 하지만 이 지구를 구하기 위한 사람들도 있다. 바로 돌입자들이다. 세이치가 만난 사람도 돌입자였다. 마을에 나타난 마물도 돌입자였다. 다른 두 세계, 다른 두 현실이 묘한 느낌을 전달한다. 실제 현실에서 이런 모습을 찾아보는 것도 가능할 것이다. 인종 문제 같은 것들 말이다.


가독성이 역시 좋다. 판타지이지만 현실에 대한 은유와 비판이 곳곳에 심어져 있다. 지구가 멸망으로 옮겨가는 과정에 있고, 이것을 타개하기 위해 세이치의 공간 속으로 돌입한다. 이 설정은 공존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다른 환경을 경험한 두 사람의 기억이 어떻게 세상을 인식하는지 보여주는 장면은 인상적이다. 공존이 불가능하다면 끝까지 갈 수밖에 없다. 이것을 수행하기 위한 돌입대의 대장으로 인간이 아닌 인공지능로봇을 설정한 것도 의미심장하다. 멸망과 절망, 삶의 의지와 생존의 어려움, 새로운 환경에 대한 적응 등이 엮이고 꼬이면서 생각할 거리를 만든다. 그리고 재밌다. 아직 읽지 않은 그의 작품이 있다는 사실이 즐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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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은 여자의 일
고이즈미 기미코 지음, 김도일 옮김 / 허클베리북스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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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호 측 증인>이란 소설을 사 놓고 상당히 오랫동안 묵혀두고 있다. 좋은 평가를 받은 작품을 호기심에 구매하고 묵혀두는 일은 나에게 아주 흔한 일이다. 그런데 이 소설을 읽으면서 이 책을 다시 앞으로 내놓았다. 시간이 된다면 빠른 시간 안에 읽고 싶은 마음 때문이다. 이런 마음이 들게 한 것은 바로 <살인은 여자의 일>이란 단편이었다. 그리고 나머지 단편들도 읽으면서 이 작가의 다른 단편들에 관심이 생겼다. 인터넷 서점 검색하니 나오는 작품은 다른 작가들과 함께 한 단편집 밖에 없다. 물론 이 단편집도 구판으로 집 어딘가에 있을 것이다.

 

모두 여덟 편의 단편이 실려 있다. 개인적으로 모두 마음에 드는 작품들이다. 일상에서 시작해 뒤틀린 심리를 표현하고 예상하지 못한 상황과 반전을 보여준다. 시대와 상황 등에서 약간 어색하게 느껴지는 부분이 있는 소설도 있지만 그 욕망과 오해와 반전 등은 읽고 난 후 만족감을 높여준다. 그리고 이 작품집은 한 작품 반을 제외하면 모두 여성들의 심리 묘사에 집중하고 있다. <여도둑의 세레나데>란 작품의 경우 남녀가 번갈아 나와 ‘반’을 덧붙였다. <털>과 더불어 살인이 없는, 혹은 발생 가능성이 없는 작품이기도 하다.

 

표제작 <살인은 여자의 일>은 여성 문학 편집자의 심리를 따라간다. 잘 생긴 남성 작가의 아내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 자리에 자신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 작가는 미스터리 작가를 꿈꾸지만 그녀는 이런 작품에 관심이 없고, 낮추어본다. 아이라 레빈의 <죽음의 키스> 같은 작품을 쓰고 싶다고 했을 때 그 작품이 무엇인지도 모른다. 다만 이 남자를 유혹하고, 그 아내에게 살의를 느낄 뿐이다. 이런 뒤틀린 심리 속에 자신의 욕망이 투여되고, 마지막 장면에서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반전이 펼쳐진다. 어쩌면 작가는 이야기 속에 힌트를 숨겨 놓았는지도 모르겠다.

 

<수사선상의 아리아>는 느와르를 꿈꾸는 소년이 나온다. 그는 이런 분위기에 빠져 그 세계를 동경한다. 그의 이런 마음을 친구들은 모른다. 그러다 우연히 한 음악에 끌려 같은 아파트 다른 방을 기웃거린다. 이 방은 오랜 세월 접대부로 일해 온 여자가 잠시 나갔다 온다고 열어놓은 상태다. 과거를 회상하는 그녀와 소년과 늦은 밤. 그리고 그녀를 찾아온 금장 출소한 전직 살인자. 동경하는 세상을 현실에서 마주한 소년의 공포와 불안감이 그대로 느껴지고, 마지막엔 예상한 결말로 이어진다. 그런데 이 과정이 재밌다.

 

<살의를 품고 어둠 속으로>는 남편과 불륜을 저지르고, 매일 자신에게 전화해서 스트레스를 주는 여자를 죽이려는 살의를 다룬다. 읽으면서 이 시대 일본의 남자들은 이렇게까지 뻔뻔했는가 하는 생각이 들고, 여자의 놀라운 행동에는 깜짝 놀란다. 이 시절 한국에도 이런 남자들이 있었겠지만. 살의가 점점 자라는 과정을 보여주고, 이 살의를 실천으로 옮기려는 장면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예상하지 못한 상황이 펼쳐지는데 어딘가에서 본 듯한 설정이다. 이 설정이 누가 먼저인지는 모르겠지만 마지막 문장과 살의의 증가 과정이 매력적이다.

 

<두 번 죽은 여자>은 전직 유명 재즈 가수 이야기다. 두 번 죽었다는 말은 실제 죽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한 번은 병으로 죽을 뻔 한 것이고, 나머지 한 번은 상상 속 죽음이다. 이 단편의 매력은 이 가수가 병을 앓고 난 후 컴백해 작은 무대에 서고, 그녀를 아는 사람들이 없는 현실에 대한 심리 묘사와 두 번째 죽음이 일어나는 상황이다. 복귀 첫 무대에서 절도 사건일 일어나고, 그 사건을 형사가 해결하고, 늙은 형사가 그녀를 알아본다. 이 노형사와 바에서 이야기를 나누면서 일어나는 일들은 그녀에게 두 번째 죽음을 선사한다. 섬세한 심리 묘사와 감정 표현이 재밌다.

 

<털>은 전형적인 일본 부부의 일상으로 시작해서 일 년에 한두 번 일탈하는 아내의 이야기와 반전으로 마무리한다. 이 단편을 읽으면서 아이가 밤에 깨지 않고 계속 잔다는 부분에 놀랐다. 우리 애만 그렇게 밤에 깬 것일까? <안방 오페라>는 읽으면서 역지사지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서부극과 SF 등의 장르 소설을 얕보는 늙은 여성 소설가가 자신의 딸 일에 흥분하는 모습을 보고, 같이 사는 며느리의 생각을 추론하게 된다. 그리고 마지막 장면이 암시하는 것은 무얼까? 과거 일본이라고만 하기에는 현실 한국에서도 결코 낯설지 않은 모습이다.

 

<아름다운 추억>은 충격적인 장면으로 시작한다. 손녀가 할머니에게 폭력을 가하고, 넘어지면서 모서리에 머리가 부딪혀 죽는다. 그 후 경찰에 자신이 자유롭고 싶어서 죽였다고 말한다. 작가는 이 소녀의 분노에 집중하기보다 할머니의 과거와 심리 묘사에 집중한다. 손녀가 되고 싶어 하는 배우를 찾아가 학교로 돌아가게 해 달라고 부탁하려고 하는데 그곳에서 자신이 딸이 동경했던 배우를 만난다. 이 만남이 오해와 착각으로 대화가 이어지는데 이 부분을 아주 잘 다루었다.

 

<여도둑의 세레나데>은 전직 형사 출신의 백화점 보안요원과 절도단 소속 여도둑의 이야기다. 이 둘의 심리를 따라가면 멋진 한쌍의 커플이 되지만 현실은 도둑과 보안요원이다. 자신의 일을 하면서 절도단의 의도를 간파하는 보안요원과 그에게 반한 여도둑의 행동과 심리 묘사는 이 단편집에서 유일하게 유쾌한 결론으로 이어진다. 일상 속 심리의 이면을 다루면서 반전을 멋지게 이끌어내는 작품들과는 다른 전개다. 어떻게 보면 한 편의 코믹한 연극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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