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의 이름은 유괴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권일영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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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보다 영화를 먼저 봤다. 한참 일본 드라마에 빠져 있을 때 이 영화를 봤다. 정확하게 기억나지 않지만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두 배우가 주연이라 재밌게 봤던 것 같다. 하지만 기억 속 영화는 조금 가벼운 느낌이었던 것 같은데 이것은 아마 여주인공 나카마 유키에의 이미지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이번에 이 소설을 읽으면서 느낀 점과 검색해 찾은 이 영화에 대한 후기를 보면서 기억에 오류가 있음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원작 소설과 영화는 결말 부분이 다르다. 이 다른 결말이 기억에 다른 이미지를 남겼을지도 모른다.


광고기획사에 다니는 사쿠마의 기획은 광고주인 닛세이자동차의 새로운 부사장 가쓰라기에 의해 중단된다. 이 일에 열 받아 가쓰라기 집을 찾아갔다가 집밖으로 도망쳐 나오는 한 여자를 본다. 그녀를 뒤쫓는다. 시내 호텔에서 숙박이 거절되던 그녀에게 다가가 정체를 확인한다. 가쓰라기의 딸 주리라고 한다. 주리는 혼외자의 딸이다. 배 다른 동생과 싸운 후 홧김에 가출한 것이다. 하루 이틀 정도 재워주고 집에 보내면 되는데 그녀가 한 가지 제안을 한다. 바로 유괴다. 가쓰라기에게 나쁜 감정이 있던 사쿠마는 주리의 제안을 받아들인다. 그는 이 유괴를 하나의 게임으로 생각하고 이길 계획을 세운다.


유괴는 쉬운 일이 아니다. 단순히 납치만 한다면 상대적으로 쉬울지 모른다. 돈을 받아야 한다면 상당히 어려워진다. 경찰의 개입이 없다면 사람과 돈의 교환이 상대적으로 쉽겠지만 경찰이 개입하면 어떤 일이 생길지 모른다. 흔히 일어나는 인질의 죽음이나 납치범의 체포 등이 생길 수 있다. 작가는 이 유괴를 성공하기 위해 기존의 소설이나 영화 등에 나온 방식을 참고한다. 물론 그대로 따라하지는 않는다. 가장 먼저 유괴했다는 사실을 알리고, 인질의 안전을 알려주고, 지속적인 연락을 위한 방법을 강구해야 한다. 돈을 받기 위해서는 돈 가방 등에 붙어올지 모르는 위치 추적기나 표시 등을 주의해야 하고, 몸값을 받은 후 혹시 있을지 모를 추적자를 따돌려야 한다. 주의하고, 긴장하고, 대범해야 성공이 가능하다.


이 유괴를 게임으로 생각하면서 계획을 세우는 사쿠마는 주리에게조차 자신의 완전한 계획을 말해주지 않는다. 호텔에서 집으로 데리고 와 숨게 한다. 당연히 누구와도 연락하지 말고, 집 전화도 받지 말라고 한다. 그런데 주리가 친구에게 전화를 한 통 했다고 한다. 미국에 가 있어 자동응답기 녹음을 지우면 된다고 말한다. 그 동네를 찾아간다. 여자들만 머무는 집이라고 말하며 사쿠마를 밖에 머물게 한다. 녹음을 지운 후 사쿠마는 그녀가 안전하다는 사실을 알리기 위해 모텔에 들어간다. 전화 도중에 뱃고동 소리가 들어가게 만든다. 당연히 이 일은 경찰 수사에 혼란을 끼치기 위해서다. 이 전화 한 통이 두 사람을 돌이킬 수 없는 상황으로 이끈다. 산 속 차 안에서 정사를 나눈다.


사쿠마는 일상 업무를 진행하면서 닛세이자동차 신차 기획에 잠깐씩 참석한다. 가쓰라기의 반응을 그때마다 본다. 차분한 듯하다. 딸이 유괴된 아버지처럼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인터넷 게시판을 통한 연락과 몸값 지불일 등이 갑자기 확정되면서 바빠진다. 사쿠마는 돈을 받기 전 경찰의 미행이 있는지 확인한다. 당연히 가쓰라기는 경찰에 연락하지 않았다고 말한다. 이런 게임이 진행되는 동안 주리는 사쿠마의 집에 머문다. 어느 날 사쿠마는 주리의 사진을 한 장 몰래 찍는다. 그때 카메라가 그의 손에 있었기 때문이다. 어느 순간 둘은 연인 아닌 연인의 모습을 보여준다. 당연히 한시적이다.


소설은 사쿠마가 어떤 계획으로 몸값을 받을지, 그 과정은 어떨지, 이후 사쿠마와 주리의 관계는 어떻게 될지 등으로 호기심을 자극한다. 다른 작품들처럼 군더더기 없이 진행된다. 이 소설 속 사쿠마도 주리도 가쓰라기도 모두 게임에 참석한 플레이어들이다. 이 게임에 맞는 가면을 쓰고 그 역할을 충실하게 이행한다. 사쿠마는 단순히 몸값을 받는 것에만 머물지 않고 경찰 조사까지 머릿속에 담고 있다. 주리에게 납치부터 풀려난 순간까지 상황을 되풀이해서 주입한다. 꼼꼼하고 철저하다. 하지만 진짜 게임은 이 유괴 너머에 있다. 반전과 진짜 게임은 새로운 사실이 드러나는 순간부터 시작이다. 언제 시간나면 영화를 다시 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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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원
존 마스 지음, 강동혁 옮김 / 다산책방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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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NA매치란 방식으로 운명의 상대를 알려주는 서비스가 있다, 이 서비스를 이용하면 내 평생의 연인을 유전자 정보 바탕으로 손쉽게 찾아준다. 비용도 우리가 이용하는 결혼 정보회사보다 저렴하고, 필요 이상으로 만날 필요도 없다. 물론 상대방도 이 서비스를 신청해야 한다. 이 서비스가 상용화된 지 10년이 지났고, 초창기에는 수많은 문제를 만들기도 했다. 이 매칭 시스템으로 상대방을 만나고, 결혼하는 사람들도 늘어났다. 결혼을 약속한 커플이 자신들의 사랑을 실험하기 위해 이 서비스를 이용하기도 한다. 이 매칭은 당사자가 상상도 하지 못한 사람을 이어줄 때도 있다. 이 소설은 이런 현실 속에서 다섯 명의 인물을 통해 DNA매치와 사랑 등의 이야기를 보여준다.


아이를 낳고 싶은 이혼녀 맨디, 런던 전역을 공포로 몰아놓고 있는 연쇄살인범 크리스토퍼, 결혼식을 앞둔 닉, 지구 반대편 호주에 연인이 있는 제이드, 대기업 CEO 엘리 등이 이야기를 이끌어 나간다. 이들은 DNA매치를 통해 상대방을 소개받는다. 그런데 이 매칭이 결코 평범하지 않다. 맨디가 매칭된 남자 리처드는 교통사고로 죽었고, 연쇄살인범 크리스토퍼의 연인은 경찰이다. 닉은 동성애자도 아닌데 남자가 매칭되었다. 제이드는 지구 반대편에 살고 있다. 엘리는 평범한 연애가 힘든 대기업 CEO이다. 여기에 또 하나의 비밀이 숨겨져 있다.


작가는 이 다섯 명의 등장인물들이 DNA매치로 운명의 상대를 소개받고, 이 매칭이 얼마나 강력한 끌림이자 유혹인지 차근차근 이야기를 쌓아가면서 보여준다. 맨디는 직접 만나지도 못한 남자를 사랑하게 되고, 그의 엄마와 누나를 만나 친분을 쌓고, 결국 리처드의 냉동 정자로 인공수정한다. 닉은 또 어떤가. 결혼식 날짜를 잡아놓고 자신들의 결혼이 운명인지 확인하려고 한다. 결과는 닉의 상대방이 남자라고 알려준다. 닉은 단 한 번도 남자에게 끌린 적이 없는데. 실제 그를 만나러 가서 자신의 변화를 확인해보려고 한다. 첫인상과 달리 어느 순간 자신도 알 수 없는 감정을 느낀다. 이 정도만 해도 이 매칭이 얼마나 위력적인지 알 수 있다.


이 매칭의 실수처럼 보이는 커플도 있다. 바로 제이드다. 제이드는 오랜 인터넷 만남을 끝내고자 호주로 직접 가서 매칭 상대방을 만난다. 실제 마주한 그는 생명이 얼마 남지 않은 중환자다. 왠지 모르게 그에게 끌리지 않는다. DNA매치로 만났다고 해도 바로 운명의 상대임을 아는 사람이 있고, 어느 정도 시간이 필요한 사람도 있다. 제이드는 자신이 후자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아니다. 그녀가 끌리는 사람은 딴 사람이다. 이 부분을 읽으면서 하나의 가설을 세운다. 나중에 이 가설이 맞음을 확인했다. 동시에 DNA매치가 얼마나 강렬하고 유효한지 다시 확인시켜준다.


엘리는 DNA매치 유전자를 발견하고, 이것을 하나의 사업으로 키운 인물이다. 중반에 그녀의 정체가 드러난다. 일반적인 연애가 불가능했던 것은 그녀의 성공 이후 다가온 남자들 때문이다. DNA매치를 통해 데이트 상대를 찾는다. 한 남자가 나타난다. 이 남자의 신원을 조사하고, 한 번 만난다. 두 번 만난다. 이 남자에게 끌리고 빠져든다. 그런데 예상하지 못한 몇 가지 사실들이 드러나면서 긴장감을 불러온다. 그녀가 이 사업을 크게 만들기 위해 어떤 일을 했는지, 이 과정에서 생긴 문제점은 무엇인지 등이 나오고, 전혀 예상하지 못한 사건이 일어난다. 어떻게 보면 SF 로맨스에 가까운 이야기를 스릴러로 끌고 가는 두 이야기 중 하나다.


스릴러에 가장 적합한 인물은 크리스토퍼다. 그는 사이코패스이자 연쇄살인범이다. 그의 분량이 늘어나면 스릴러에 더 가깝게 다가가지만 작가는 그의 살인 행각을 자세하게, 자주 보여주지 않는다. 왜 그가 이런 연쇄살인을 저지르는지 알려줄 때 놀라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DNA매치로 만난 연인으로 인해 자신의 감점이 흔들리고 변하는 모습을 보여주면서 이 소설의 기본 설정이 얼마나 정확한지 알려주는 역할을 한다. 재밌는 점은 크리스토퍼의 연쇄살인이 엄청난 공포를 몰고 왔을 텐데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에서 한 번도 다루어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작가는 각 인물들이 등장해 이야기를 펼치는 순간의 시간 속도와 흐름을 제각각으로 다루면서 인물들의 연관성을 지운다. 이 편집과 구성은 이야기의 몰입도를 높여주고, 빠른 장면 전환은 지루할 틈을 주지 않는다. 여기에 연쇄살인범과 DNA매치를 둘러싼 비밀 등이 나오면서 긴장감을 고조시킨다. 몇몇 뻔한 장면으로 이어지기도 하지만 이 뻔함이 DNA매치의 과학성을 높여준다. 그리고 각 단계나 사건마다 스스로에게 질물은 던진다. 과연 나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 이 매칭의 허점은 무엇일까? 혹시 다른 반전이 나오지 않을까? 등등. 세부적인 부분에서 트집 잡을 부분들이 있지만 속도감에 열심히 책장을 넘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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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절대 저렇게 추하게 늙지 말아야지
심너울 지음 / 아작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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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심너울의 SF 단편들을 열심히 찾아서 읽고 있다. 앤솔로지나 여러 작가의 단편모음집을 제외하면 거의 다 읽은 것 같다. 이렇게 적고 보니 많은 작품을 출간한 것 같은데 단편집은 딱 두 권이다. 장편이 한 편 있는데 올해 안에 시간내어 읽어보고 싶다. 심너울이란 작가를 처음 발견한 것도 안전가옥 앤솔로지 중 한 권인 <대멸종>이었고, 그의 단편집을 처음 읽은 것도 역시 안전가옥이었다. 그런데 이제 SF전문 출판사인 아작에서 단편집이 나왔다. SF 분야만 한정하면 배명훈, 김보영 이후 처음으로 깊은 관심을 가진 작가다.


이 작품집에 관심을 가지게 된 데는 <SF 클럽의 우리 부회장님>에 나오는 설정 한 가지 때문이다. 작가의 후기에 의하면 한국의 어느 회사와도 관련이 없다고 선을 긋는데 이 부분이 옛날 영화 <투캅스>의 오프닝을 떠올리게 만든다. 한 연구소의 직원들이 인센티브 대신 동호회를 만들어 활동하게 만들고, 이들 중 몇 명이 SF 모임을 만들면서 생긴 이야기다. 이 모임 속에 한 명이 작가고, 이 작가가 클럽 사람들을 SF 덕후로 만든다. 그러다 쓰러진 채 죽지 않고 10년을 버틴 회장님과 상속세 등의 문제가 있는 부회장님 이야기가 겹친다. 누가 금방 떠오르지 않는가. 작가가 관계없다고 하니 우연으로 치부하자.


<초광속 통신의 발명>은 짧은 단편이다. 퇴근해도 퇴근이 아닌 현대인의 삶을 알 수 없는 과학과 연결시켰는데 솔직히 뭔지 모르겠다. 하지만 ‘퇴근하고 싶은 기분이 시간을 초월해 과거로 흘러간다’는 부분에선 왠지 모르게 공감한다. <저 길고양이들과 함께>란 이야기를 읽으면서 한국의 중년들이 홀로 되었을 때 어떤 삶을 살게 될지 살짝 엿보고, 작은 조직 안에서 자신의 권위를 최대한 누리는 삶을 보여준다. 여기에서 한 놀라운 실험을 다루는데 이전 역사 속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이미 했던 것임을 생각하면 쉽게 동의할 수 없다. 그렇지만 이 흔적을 보고 안도하는 여성들의 모습에는 살짝 고개를 끄덕인다.


<컴퓨터공학과 교육학의 통섭에 대하여>는 한국 교육 현실에 대한 신랄한 비판이자 있을 수 있는 해프닝을 다룬다. 읽으면서 광고로 봤던 수많은 시골의 학교 등이 떠오른다. 표제작 <나는 절대로 저렇게 추하게 늙지 말아야지>는 작가가 제일 좋아하는 글이라고 한다. 우린 젊을 때 이런 말을 자주 하지만 늙으면서 자신도 모르게 젊은이들에게 이런 취급을 받는다. 노년의 발버둥이 어쩌면 더 추한 모습을 보여주는지도 모르겠다. <감정을 감정하기>는 다시 전자뇌 문제로 넘어가고, 안드로이드의 인공지능 등에 대한 문제로 확장시킨다. 인터뷰 마지막에 밝혀지는 놀라운 사실과 여운은 역사를 한 번 가볍게 훑어보게 만든다.


<한 터럭만이라도>는 배양육과 인간의 지능을 가진 앵무새 이야기다. 이 이야기에서 인육을 배양육으로 만들어 판다는 부분을 읽으면서 광우병 문제가 떠올랐다. 아이큐 107인 앵무새가 화자와의 관계에 대해 논의하는 부분은 인간의 시각을 뒤집는 부분이 있다. 배양육을 중심에 놓고 민감한 이야기를 주변에 풀어놓으면서 예상하지 못한 사고를 하게 만든다. <거인의 노래>는 왠지 어딘가에서 본 듯한 느낌을 준다. 과연 그들이 본 것의 정체는 무엇일지 궁금하다. 그리고 우주선에 탄 두 사람의 출신 등도 앞으로 변할 한국의 미래 인구 구조를 한 번 생각하게 만든다.


<시간 위에 붙박인 그대에게>는 불멸에 대한 이야기다. 쌍둥이 역설에 대한 변주라고 작가는 말했지만 인간의 오랜 숙원인 영생에 대한 나름의 고찰을 담고 있다. 늙지 않는 것과 죽지 않은 것을 구분하여 진행하는 이야기 속에서 시간의 유한성은 불멸의 유전자를 가진 사람들에게는 적용되지 않는다. 불멸을 획득한 동생과 유한적일 수밖에 없는 언니의 갈등과 오해와 이해를 가볍고 단순하게 풀어놓았다. 가볍고 단순하다고 했지만 유한성을 가진 사람들의 욕망까지 단순하지는 않다. 광속과 시간의 상대성과 과학의 발전 등을 다시 한 번 더 돌아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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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중년이 된다 (리커버 에디션) - 누군가는 걷고 있고, 누구나 걷게 될 중년을 담아내다
무레 요코 지음, 부윤아 옮김 / 탐나는책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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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레 요코의 팬이 된 것은 두 권의 소설 덕분이다. 한 권은 그 유명한 <카모메 식당>이고, 다른 한 권은 <세 평의 행복, 연꽃 빌라>였다. 이후 소설과 에세이들을 읽었는데 처음과 같은 진한 감동을 주는 작품을 솔직히 만나지 못했다. 하지만 그 강한 인상은 그녀의 책이 나오면 늘 관심을 가지게 만든다. 사실 이런 작가들이 너무 많아져서 이제는 모두 사는 것이 불가능하다. 사 놓고 묵혀두고 있는 책들이 너무 많다. 무레 요코의 글 속에서도 나오듯이 책 쌓이는 속도가 읽는 속도를 넘어간다. 그래도 손길이 닿아 읽게 되는 책들이 생긴다. 이 책이 그렇다.

 

2017년에 나온 책을 리커버해서 다시 내었다. 솔직히 이전 판본은 잘 몰랐다. 이 책을 선택하게 된 데는 두 가지가 겹친 탓이다. 작가 이름과 중년이란 제목이다. 누구도 피할 수 없는 노화의 한 과정을 유명한 작가가 진솔하게 표현했다니 어찌 그냥 넘어가겠는가. 나도 이미 중년 남성이니 어떤 공통점이 있지 않을까? 여성처럼 폐경이 있지는 않지만 예전보다 영화나 책을 읽으면서 울컥하거나 눈물을 흘리는 경우가 훨씬 늘어났다. 뭐 책 속에 나오는 상사의 질타에 눈물을 흘리는 수준은 아니지만 말이다. “이래서 남자는 어쩔 수 없어.”란 문장은 지금까지 남자들이 내뱉은 여성 비하에 대한 조용한 반격이다.

 

갱년기 여성의 문제를 단순히 혼자만의 경험으로 풀어내지 않는다. 뭐 그렇다고 다양한 사례를 찾아서 기록하지도 않는다. 단지 주변에 있는 비슷한 나이의 친구들의 경험을 소소하게 풀어놓는다. 중년에 겪게 되는 일상을 묵묵히 적었을 뿐이다. 그런데 이게 상당히 묵직하게 다가온다. 이 묵직함은 나도 비슷한 경험을 하고 있기에 그렇다. 노안은 이미 왔고, 체중은 어느 순간 증가하여 더 적게 먹어도 요지부동이다. 운동 부족은 근력을 떨어트리고, 체력 저하는 독서의 집중력을 많이 깨트린다. 이 책의 색깔이 다른 주석을 늦은 밤 반사되는 불빛 아래에서 읽을 때 얼마나 고역이었던가. 작은 부분들에서 공감하는 부분이 많아진다.

 

반면에 전혀 다른 문화 때문에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도 많다. 건강검진을 중년이 되도록 한 번도 받지 않았다는 사실이나 친구들이 대체요법으로 갱년기를 넘어가는 장면 등이다. 모공 문제는 남자라서 그런지 아니면 경험하지 못해서 그런지 이야기 자체를 잘 이해하지 못한다. 용어도 마찬가지다. <통통한 영감> 편을 읽으면서 과연 어떤 모습일까 계속 생각했지만 역시 이미지가 잘 떠오르지 않는다. 뒷모습을 보고 여성으로 착각하는 경우는 가끔 여기저기서 보지만 반대의 경우도 분명 있었을 것이다. 이 책 속처럼 남자로 생각했을지 모르지 않는가. 이런 저런 그녀의 이야기를 읽다보면 이전에는 깨닫지 못한 사실들을 발견한다. 어리고, 남자고, 자기중심적이라서 몰랐고, 알려고도 하지 않았던 사실들 말이다.

 

누군가는 걷고 있고, 누구나 걷게 될 중년을 담아내었다는 광고 문구에 공감할 수밖에 없다. 어릴 때 절대 이해하지 못한 노화를 지금 절실하게 경험하고 있고, 그때 왜 그것도 제대로 하지 못할까 생각했던 것을 내가 그대로 반복하고 있기 때문이다. 노안으로 안경을 맞춘 그녀의 글을 읽다보면 나도 빨리 맞춰야 하는데 생각을 하지만 한 번 그런 안경에 적응하면 그냥 눈으로 잘 보지 못할 것이란 두려움이 머릿속에 맴돈다. 어쩌면 쓸데없는 걱정일지 모르지만. 좀더 가벼운 이야기와 쉽게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가 나올 것이란 예상과 조금 달랐지만 겪고 있고 겪게 될 이야기란 점에서, 또 아내가 경험할 일이란 점에서 많은 것을 배우고 생각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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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너였을 때
민카 켄트 지음, 공보경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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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가독성이 좋다. 처음 예상한 것보다 훨씬 잘 읽혔다. 전작도 심리묘사가 뛰어났는데 이번 작품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가스라이팅을 이용한 설정에 완전히 동의하지는 못한다. 강도의 습격으로 크게 다친 후 외부와 접촉을 끊고 은둔하듯 살아가는 브리엔이 이렇게 쉽게 무너지다니 왠지 모르게 납득하기 힘들다. 만약 약물이라도 동원되었다면 더 쉽게 고개를 끄덕였을지 모르겠다. 나이얼이 준비한 계획은 브리엔의 불안한 심리를 뒤흔들어 자신의 정체성에 의문을 갖게 하는 것이다. 이 소설의 1부와 2부는 이 부분을 집중적으로 다룬다. 3부에선 이 두 남녀를 번갈아 등장시켜 긴장감을 고조시킨다.


오래된 저택에 홀로 사는 브리엔은 자신의 이름으로 빌린 집 열쇠를 받는다. 자기는 신청한 적이 없다. 부동산 회사의 실수이거나 동명이인일 가능성이 있다. 그 주소지에 가서 그 집을 확인하는데 실제 존재한다. 누군가 살고 있다. 누구지? 이 사람의 정체를 알기 위해 SNS 계정을 뒤진다. 하나 발견한다. 자신의 취향과 동일하고, 같은 물건이나 차를 가지고 있다. 누군가 자신의 삶을 훔친다는 느낌을 받는다. 실제 그녀의 삶을 모방하고 살고 있다. 그녀의 기억과 겹치는 것이 많다. 계속해서 이 계정을 몰래 보면서 그녀를 만나 따지고 싶다.


강도 사고를 당한 후 너무 큰집이라 세입자를 한 명 구한다. 종양학자라는 나이얼이 의사 가운을 걸친 채 찾아온다. 간단한 인터뷰 후 이 집에 산다. 처음에는 어느 정도 거리를 두었지만 브리엔은 몰래 나이얼과 좀 더 밀접한 관계를 맺고 싶어 한다. 그러다 나이얼의 아내 일기를 보게 된다. 그가 아내와 이혼을 준비한다는 사실도 알게 된다. 강도 후유증에 시달리는 그녀는 자신이 모르는 누군가가 집 주변을 돌아다니는 것에 공포를 느낀다. 나이얼은 좋은 하숙인이다. 브리엔은 나이얼과 결혼 상태에 더 관심을 두고, 자신의 삶을 훔친 것 같은 여성을 찾아간다. 그런데 이 행동이 놀라운 소식을 그녀에게 가져다준다. 그녀가 브리엔이 아니라는 것이다.


스토킹과 다중인격장애가 있다는 이야기는 나이얼의 아내란 사실과 더불어 그녀를 완전히 무너트린다. 나이얼이 보여주는 증거 자료는 그녀가 브리엔이 아니라고 말한다. 단순히 신분증만 그런 것이 아니라 정신과 치료 서류 등도 그녀의 문제를 지적한다. 그녀의 불안감과 나이얼에 대한 감정 등이 사실을 더 확인하기보다 나이얼에게 의존하게 만든다. 부유한 그녀가 이웃 몰래 치료 받을 수 있는 정신병원에 들어간다. 이때만 해도 이 모든 일들이 그녀의 머릿속에서 만들어낸 환상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그녀가 본 다른 브리엔과 SNS계정 상 사진 등도 그녀 자신의 작업으로 생각한 것이다.


나이얼의 이야기가 펼쳐지면서 이 사건의 전모가 드러난다. 개인적으로 전혀 예상할 수 없었던 것은 브리엔처럼 살아가는 사만다의 심리다. 이 소설 속 설정에서 사만다는 우리가 흔히 예상하는 악역과 다른 역할을 한다. 그리고 브리엔의 재산을 어느 정도 얻은 나이얼이 왜 더 욕심을 부려서 달아나지 않았는가 하는 의문이 있다. 읽으면서 진행과정을 알고 있는 독자의 입장에서는 어느 정도 타협도 가능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하지만 작가가 이렇게 타협한다면 이야기의 긴장감이 떨어져 재미가 없을 것이다. 서로가 속이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다른 속셈을 보여주는 3부는 정말 빠르게 읽힌다. 결말도 예상과 달라 흥미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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