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불 속에서 잃어버린 것들
마리아나 엔리케스 지음, 엄지영 옮김 / 현대문학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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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아르헨티나를 배경으로 하는 12편의 단편 소설을 실고 있다. 아르헨티나 소설하면 그 유명한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가 먼저 떠오른다. 그 외 작가는 솔직히 잘 모른다. 검색하면 몇 권의 책과 작가가 나오지만 제목만 겨우 알거나 오다가다 본 작품이나 작가들 일뿐이다. 자세하게 들어가면 몇 권은 아! 하고 감탄할지 모르지만 그 정도로 낯설다. 이 낯섦을 뚫고 라틴 아메리카 고딕 호러라는 독특한 분위기가 가졌다는 말이 나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고딕 호러가 남미라면 어떤 느낌일까? 호기심과 기대가 교차했다.

 

이 소설집의 첫 작품 <더러운 아이>는 내가 알고 있던 부에노스아이레스 환상을 단숨에 깨트린다. 탱고와 멋진 관광지의 이미지가 이 작품으로 산산조각났다. 물론 큰 도시의 이면에 이런 곳이 있다는 것은 알지만 작가가 묘사하고 설명한 동네의 모습은 그만큼 강렬하다. 남미의 미신이나 주술 등과 결합해 경제적 퇴락과 부패 등이 만들어낸 풍경이 강한 인상을 남긴다. <오스테리아 호텔>은 스티븐 킹의 단편 소설을 읽는 느낌을 준다. 과거 군사 독재 시절 경찰학교가 호텔로 바뀌었다는 사실과 이것을 말했다고 해고된 아버지와 이에 대한 작은 복수가 두 소녀가 본 무시무시한 환상으로 완전히 이미지가 바뀐다. 아르헨티나 군사 독재 시절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마약에 취한 세월>은 1989년부터 1994년까지 연도별 기록을 담고 있다. 무능한 부모를 비웃고 마약과 음악에 취한 청춘들의 모습은 그렇게 낯설지 않다. 마약 대신 술을 넣고 보수적인 부모에게 대항하던 우리를 대입하면 어떨까? <아델라의 집>은 가장 호러적인 작품이다. 왼팔 없이 태어난 소녀 아델라, 파블로 오빠는 공포영화를 같이 보러간다. 화자는 부모가 반대한다. 영화 내용 등을 화자에게 말하는 것을 막지는 않는다. 아델라와 오빠는 마을 폐가에 끌린다. 폐가 앞을 서성이다 결국 들어간다. 그리고 집안에서 아델라가 사라진다. 화자가 본 환상은 또 무엇일까?

 

<파블리토가 못을 박았다 : 페티소 오레후도를 떠올리며>란 긴 제목의 단편은 다크 투어리즘을 다룬다. ‘범죄 및 범죄자 투어’의 가이드인 파블로 앞에 어느 날부터 어린이 연쇄살인마 페티소 오레후도의 환영이 나타난다. 이 연쇄살인마의 기록을 보면서 섬뜩함을 느끼고, 아이의 탄생이 만들어낸 부부의 갈등이 눈길을 끈다. <거미줄>은 권태로운 결혼 생활과 파라과이의 폭력적인 무질서가 처음에 시선을 끌었다. 정의로운 몸부림이 만들어낼 가혹한 현실에 대한 두려움이다. 이후 어떤 숲에 차가 멈추면서 생긴 이야기는 으스스한 분위기를 연출하다 로맨스로 넘어간다. 마지막 장면을 어떻게 이해해야할까?

 

<학기말>은 환상과 자해를 다룬다. 자해를 해야만 하는 병이 있다는 것을 아는데 이 병에 소녀 마르셀라가 걸린 것일까? 마르셀라가 화자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줄 때 숨을 죽이고 이것을 듣고 있던 다른 소녀들이 더 인상적이다. 마지막 장면은 역시 여운을 남긴다. <우리에게는 한 점의 육신도 없다>은 두개골 하나를 주워 온 후 칼라베라란 이름을 붙이고 장식하는 화자 이야기다. 화자는 뚱뚱한 남자 친구보다 베라에게 더 신경을 쓴다. 이 과도한 몰입과 애정이 의미하는 바를 열심히 생각해보는데 쉽게 떠오르는 이미지는 거식증이다. 하지만 다른 이야기가 더 있을 것 같다.

 

<이웃집 마당>은 운 좋게 좋은 집을 구해 이사 온 후 이야기다. 화자는 이웃집 마당에서 발목에 쇠사슬이 묶여 감금된 남자 아이를 발견한다. 환상일까? 사회복지사였다가 해고된 후 정신과 치료를 받는데 해고 사유가 나온다. 이것과 관계 있을까? 실제 그 집안으로 들어간 후 일어나는 일들은 스산한 느낌을 준다. <검은 물속>은 부패 경찰관들이 소년 두 명을 강물에 빠트려 죽인 사건으로 시작한다. 오염된 강물에서 소년 한 명은 발견되지 않았다. 이 사실이 알려진 것도. 기소 준비를 하게 된 것도 이 경찰관들이 동료들에게 자랑했기 때문이다. 이런 부패한 경찰관들이 있다니 놀랍다. 그러다 그 소년이 돌아왔다는 소식을 듣고 빈민가로 들어간다. 그곳이 얼마나 부패하고 무서운 곳인지 그곳에 거주하는 신부님의 행동으로 보여준다.

 

<초록색 빨간색 오렌지색>은 아르헨티나 히키코모리 이야기다. 남자 친구 마르코가 방안으로 들어간 후 유일한 대화 공간은 인터넷 채팅창이다. 마르코가 들려주는 일본 귀신과 히키코모리 이야기가 왠지 낯익다. 표제작 <우리가 불 속에서 잃어버린 것들>은 실제 일어난 방화 살인 사건을 모티브로 하고 있다고 한다. 작가는 이 현실을 좀더 극단으로 몰고 가 하나의 현상처럼 만들고, 이에 저항하는 여성들의 모습을 보여준다. 하지만 이 저항은 스스로 분신 의식을 거행하는 것이다. 이 의식마저 공권력은 못하게 막는다. 소설 자체만으로도 끔찍하다. 아르헨티나 사회나 문화를 좀더 안다면 더 이해가 깊어질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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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수 - 리스트 컨선 안전가옥 오리지널 5
이산화 지음 / 안전가옥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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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품을 읽기 전 이산화의 소설을 한 편도 읽지 않았다. 여러 곳에서 앤솔로지나 단편선에 참여했는데 내가 읽은 책은 없었다. 하지만 카페나 게시판 등을 통해 그의 작품에 대한 좋은 평을 봤고, 언젠가 읽어야지 생각하다 인터넷 서점을 검색하다 ‘안전가옥’에서 장편으로 나온 것을 보고 선택했다. 그런데 이 책을 선택할 때 왠지 모르지만 선입견의 작용으로 이 소설을 SF로 분류했다. 책을 펼쳐 읽으면서 언제 SF적인 전개가 펼쳐질까 기다렸다. 이 기대는 중반부터 완전히 접게 되었고, 빠르게 전개되는 범죄 액션 스릴러 속으로 빠져들었다.


이 소설을 이끌어가는 인물은 두 명의 여성이다. 한 명은 조도화이고, 다른 한 명은 리 펭란이다. 조도화는 홍콩 동물원 선배였던 누리 언니가 맡긴 파충류를 이구아나라고 생각하고, 3년을 돌봤다. 3년이 지나 더 이상 돌보기 힘들어 새로운 사람에게 입양시키려고 한다. 그 사람을 만나러 갔다 갑자기 꿈틀이를 데리고 나온다. 이때 만난 인물이 리 펭란이다. 리 펭란은 센티넬라 신디케이트 소속 야생동물 밀수업자다. 그냥 도화를 죽이고, 이구아나로 잘못 알고 있는 전 세계에 단 한 마리 남은 무지개꼬리 포카이카하를 가지고 오면 끝이다. 하지만 3년 전 그녀가 이 포카이카하를 잃었을 때 배송팀들의 죽음을 생각하면 그냥 지나갈 수 없다. 도화의 정체와 어떻게 이 포카이카하를 얻게 되었는지 알게 되면서 함께 동행한다. 여기서부터 본격적인 이야기가 시작된다.


희귀종, 멸종 위기 같은 단어는 수집가들의 수집욕에 불을 지른다. 이전에 희귀한 새 깃털을 둘러싼 엄청난 불법과 거래를 다룬 책을 읽은 적 있기에 쉽게 이해가 된다. 펭란 일행은 방콕으로 가 3년 전 배송했던 업자 제러미를 만난다. 그는 새로운 희귀종을 거래하려고 한다. 펭란 일행에게 사건 현장 사진들을 보여주고, 이 살인자를 찾는데 돕겠다고 말한다. 그리고는 3년 전 그 살인자에게 죽는다. 이전과 같이 현장에는 L과 C라는 알파벳 철자가 적혀 있다. 제러미의 수하들을 닦달하니 3년 전부터 지속적으로 이런 흔적을 남긴 살인자가 있었다고 한다. 제러미가 신디케이트에게 이 사실을 숨기고 있었다. 물론 이 상징을 가장 먼저 알아챈 인물은 도화이고, 살인자의 이름을 알아채고 뒤좇는다. 결국 만나지만 죽기 직전에 다른 사람들 덕분에 산다.


펭란은 이 살인자를 잡기 위해 잘 만들어진 함정을 판다. 누리 언니를 만나려는 도화는 그녀를 돕는다. 도화는 유일하게 그 살인자를 만난 인물이다. 이 함정은 수집가들을 이용해 덫을 놓는 것이다. 성공한다면 이야기는 다른 곳으로 흘러가고, 실패한다면 또 다른 사건이 벌어진다. 이야기는 빠르게 진행되고, 서로의 이익과 이해가 교차하면서 전혀 예상하지 못한 방향으로 흘러간다. 이때 이 함정의 중심에 있는 인물은 도화다. 도화의 선택이 전체적인 흐름을 바꾼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선택이다. 이 모습을 보면서 나의 머릿속에서는 ‘셰인 콤플렉스’가 작동한다. 혹시 누리 언니가 실제는 도화가 아닐까? 도화가 엄청난 능력을 숨기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고.


이 소설을 읽다보면 수많은 멸종 위기종을 만나게 된다. 그런데 과연 이 동물이나 파충류 중 몇 종이나 실제 존재할까? 최소한 포카이카하는 실존하지 않는다. 이런 가상의 생물체가 나온다는 사실을 힐끗 본 것이 이 작품을 SF로 착각하게 된 이유 중 하나다. 그리고 밀수업자를 죽이는 살인자가 남긴 LC는 최소 관심 등급에 해당하는 동물을 의미하는데 인간이 여기에 포함된다. 이 살인자의 논리는 비정상적이지만 인간이 동물 등에게 저지른 만행 등을 생각하면 잠시 주춤하게 된다. 처음 만난 작가 이산화는 이 작품으로 나에게 강한 인상을 남겼다. 속도감, 구성, 캐릭터 등이 아주 마음에 든다. 그의 본래 영역인 SF는 어떨지 궁금하다. 올해가 가기 전 이 작가의 작품을 한 권 더 읽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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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에 흐르는 꽃 - Novel Engine POP
온다 리쿠 지음, RYO 그림, 이선희 옮김 / 데이즈엔터(주)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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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오랜만에 온다 리쿠의 소설을 읽었다. 처음 읽은 <밤의 피크닉>으로 열렬한 환호를 보냈는데 그 다음 작품인 <삼월은 붉은 구렁을>을 읽고 ‘뭐지?’하는 의문이 생겼다. 나의 기대와 너무 다른 작품이었기 때문이다. 그 후 읽은 몇 편의 소설은 취향 저격이었다. 그래서 열심히 책을 사 모았다. 도코노 이야기니, 간바라 메구미 시리즈 등이 먼저 눈길을 끌었다. 늘 그렇듯이 책들을 사놓고 묵혀두었다. 책장 정리 도중 한 곳으로 정리한 듯한데 몇 권은 얼마 전 찾아보니 보이지 않는다. 이 책을 읽은 기념으로 한두 권 정도 더 읽고 싶은데.


처음 이 책을 받았을 때 나의 예상과 너무 달랐다. 라이트노벨로 분류되었다고 해도 분량이 좀더 있을 줄 알았다. 이 부분은 제대로 확인하지 않은 나의 잘못이다. 그리고 실제 온다 리쿠의 작품에 분량이 큰 의미가 있을 리 없다. 그렇게 펼쳐든 이야기는 녹색남자와 여름성의 비밀을 차분하게 풀어낸다. 학원물로 분류 가능한지 생각하면서 읽는데 한 가지 사건이 발생하고, 알 수 없는 비밀이 발견되면서 분위기가 바뀐다. 결국 마지막에 와서 알게 되는 진실은 작가가 꼭꼭 숨겨둔 설정을 하나씩 터트리는 시간이다. 약간 스포를 감수한다면 코로나 19와 비슷한 상황이다.


6월이라는 어중간한 시기에 전학 온 미치루는 이 마을 사람들이 말을 삼가는 존재가 자신을 따르는 것을 발견한다. 그리고 한 장의 초대장을 받는다. 여름성 여름 캠프 초대장이다. 이 초대장을 받은 사람은 누구든지 여름성에 가야 한다. 기차를 타고 가는데 반 친구 스오가 내리는 모습을 본다. 다섯 명의 소녀들이 기차에서 내린다. 녹색에 총안마저 없는 여름성에 이들은 들어간다. 여름 캠프라고 하지만 이 소녀들을 제외하면 어른은 없다. 무더운 여름 다섯 소녀의 기묘한 동거 생활이 시작된다. 은연중에 이 소녀들 중에서 스오가 리더가 된다. 몇 가지 간단한 규칙만 지키면 상당히 자유로운 캠프 생활이다. 소녀들은 시간이 지나면서 서로의 정보를 교환하고 조금씩 친해진다.


이 평온한 캠프에서 꼭 지켜야 하는 규칙이 있다. 종소리가 한 번 울리면 식당에 모이고, 세 번 울리면 지장보살 앞에 모여 합장해야 한다. 또 수로에 흘러내리는 꽃잎을 기록한다. 테니스 코트가 있어 짝이 맞으면 테니스를 치고, 방학 숙제도 한다. 규칙만 지키면 자유롭고 평화로운 생활이다. 이런 생활에 파문이 생기는 것은 미치루가 불분명하게 들은 대화의 일부와 갑자기 사라진 학생 한 명 때문이다. 여름성이란 갇힌 공간과 사라진 소녀와 알 수 없는 대화의 일부는 조금씩 긴장감을 고조시킨다. 하지만 작가는 결코 자극적인 설명이나 대사를 내놓지 않는다. 그리고 녹색남자의 진실이 드러난다. 솔직히 말해 이 부분을 읽으면서 뜬금없는 이야기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작은 소품으로는 나쁘지 않지만 온다 리쿠란 이름을 생각하면 아쉬움이 남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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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의 이름은 유괴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권일영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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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보다 영화를 먼저 봤다. 한참 일본 드라마에 빠져 있을 때 이 영화를 봤다. 정확하게 기억나지 않지만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두 배우가 주연이라 재밌게 봤던 것 같다. 하지만 기억 속 영화는 조금 가벼운 느낌이었던 것 같은데 이것은 아마 여주인공 나카마 유키에의 이미지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이번에 이 소설을 읽으면서 느낀 점과 검색해 찾은 이 영화에 대한 후기를 보면서 기억에 오류가 있음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원작 소설과 영화는 결말 부분이 다르다. 이 다른 결말이 기억에 다른 이미지를 남겼을지도 모른다.


광고기획사에 다니는 사쿠마의 기획은 광고주인 닛세이자동차의 새로운 부사장 가쓰라기에 의해 중단된다. 이 일에 열 받아 가쓰라기 집을 찾아갔다가 집밖으로 도망쳐 나오는 한 여자를 본다. 그녀를 뒤쫓는다. 시내 호텔에서 숙박이 거절되던 그녀에게 다가가 정체를 확인한다. 가쓰라기의 딸 주리라고 한다. 주리는 혼외자의 딸이다. 배 다른 동생과 싸운 후 홧김에 가출한 것이다. 하루 이틀 정도 재워주고 집에 보내면 되는데 그녀가 한 가지 제안을 한다. 바로 유괴다. 가쓰라기에게 나쁜 감정이 있던 사쿠마는 주리의 제안을 받아들인다. 그는 이 유괴를 하나의 게임으로 생각하고 이길 계획을 세운다.


유괴는 쉬운 일이 아니다. 단순히 납치만 한다면 상대적으로 쉬울지 모른다. 돈을 받아야 한다면 상당히 어려워진다. 경찰의 개입이 없다면 사람과 돈의 교환이 상대적으로 쉽겠지만 경찰이 개입하면 어떤 일이 생길지 모른다. 흔히 일어나는 인질의 죽음이나 납치범의 체포 등이 생길 수 있다. 작가는 이 유괴를 성공하기 위해 기존의 소설이나 영화 등에 나온 방식을 참고한다. 물론 그대로 따라하지는 않는다. 가장 먼저 유괴했다는 사실을 알리고, 인질의 안전을 알려주고, 지속적인 연락을 위한 방법을 강구해야 한다. 돈을 받기 위해서는 돈 가방 등에 붙어올지 모르는 위치 추적기나 표시 등을 주의해야 하고, 몸값을 받은 후 혹시 있을지 모를 추적자를 따돌려야 한다. 주의하고, 긴장하고, 대범해야 성공이 가능하다.


이 유괴를 게임으로 생각하면서 계획을 세우는 사쿠마는 주리에게조차 자신의 완전한 계획을 말해주지 않는다. 호텔에서 집으로 데리고 와 숨게 한다. 당연히 누구와도 연락하지 말고, 집 전화도 받지 말라고 한다. 그런데 주리가 친구에게 전화를 한 통 했다고 한다. 미국에 가 있어 자동응답기 녹음을 지우면 된다고 말한다. 그 동네를 찾아간다. 여자들만 머무는 집이라고 말하며 사쿠마를 밖에 머물게 한다. 녹음을 지운 후 사쿠마는 그녀가 안전하다는 사실을 알리기 위해 모텔에 들어간다. 전화 도중에 뱃고동 소리가 들어가게 만든다. 당연히 이 일은 경찰 수사에 혼란을 끼치기 위해서다. 이 전화 한 통이 두 사람을 돌이킬 수 없는 상황으로 이끈다. 산 속 차 안에서 정사를 나눈다.


사쿠마는 일상 업무를 진행하면서 닛세이자동차 신차 기획에 잠깐씩 참석한다. 가쓰라기의 반응을 그때마다 본다. 차분한 듯하다. 딸이 유괴된 아버지처럼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인터넷 게시판을 통한 연락과 몸값 지불일 등이 갑자기 확정되면서 바빠진다. 사쿠마는 돈을 받기 전 경찰의 미행이 있는지 확인한다. 당연히 가쓰라기는 경찰에 연락하지 않았다고 말한다. 이런 게임이 진행되는 동안 주리는 사쿠마의 집에 머문다. 어느 날 사쿠마는 주리의 사진을 한 장 몰래 찍는다. 그때 카메라가 그의 손에 있었기 때문이다. 어느 순간 둘은 연인 아닌 연인의 모습을 보여준다. 당연히 한시적이다.


소설은 사쿠마가 어떤 계획으로 몸값을 받을지, 그 과정은 어떨지, 이후 사쿠마와 주리의 관계는 어떻게 될지 등으로 호기심을 자극한다. 다른 작품들처럼 군더더기 없이 진행된다. 이 소설 속 사쿠마도 주리도 가쓰라기도 모두 게임에 참석한 플레이어들이다. 이 게임에 맞는 가면을 쓰고 그 역할을 충실하게 이행한다. 사쿠마는 단순히 몸값을 받는 것에만 머물지 않고 경찰 조사까지 머릿속에 담고 있다. 주리에게 납치부터 풀려난 순간까지 상황을 되풀이해서 주입한다. 꼼꼼하고 철저하다. 하지만 진짜 게임은 이 유괴 너머에 있다. 반전과 진짜 게임은 새로운 사실이 드러나는 순간부터 시작이다. 언제 시간나면 영화를 다시 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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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원
존 마스 지음, 강동혁 옮김 / 다산책방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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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NA매치란 방식으로 운명의 상대를 알려주는 서비스가 있다, 이 서비스를 이용하면 내 평생의 연인을 유전자 정보 바탕으로 손쉽게 찾아준다. 비용도 우리가 이용하는 결혼 정보회사보다 저렴하고, 필요 이상으로 만날 필요도 없다. 물론 상대방도 이 서비스를 신청해야 한다. 이 서비스가 상용화된 지 10년이 지났고, 초창기에는 수많은 문제를 만들기도 했다. 이 매칭 시스템으로 상대방을 만나고, 결혼하는 사람들도 늘어났다. 결혼을 약속한 커플이 자신들의 사랑을 실험하기 위해 이 서비스를 이용하기도 한다. 이 매칭은 당사자가 상상도 하지 못한 사람을 이어줄 때도 있다. 이 소설은 이런 현실 속에서 다섯 명의 인물을 통해 DNA매치와 사랑 등의 이야기를 보여준다.


아이를 낳고 싶은 이혼녀 맨디, 런던 전역을 공포로 몰아놓고 있는 연쇄살인범 크리스토퍼, 결혼식을 앞둔 닉, 지구 반대편 호주에 연인이 있는 제이드, 대기업 CEO 엘리 등이 이야기를 이끌어 나간다. 이들은 DNA매치를 통해 상대방을 소개받는다. 그런데 이 매칭이 결코 평범하지 않다. 맨디가 매칭된 남자 리처드는 교통사고로 죽었고, 연쇄살인범 크리스토퍼의 연인은 경찰이다. 닉은 동성애자도 아닌데 남자가 매칭되었다. 제이드는 지구 반대편에 살고 있다. 엘리는 평범한 연애가 힘든 대기업 CEO이다. 여기에 또 하나의 비밀이 숨겨져 있다.


작가는 이 다섯 명의 등장인물들이 DNA매치로 운명의 상대를 소개받고, 이 매칭이 얼마나 강력한 끌림이자 유혹인지 차근차근 이야기를 쌓아가면서 보여준다. 맨디는 직접 만나지도 못한 남자를 사랑하게 되고, 그의 엄마와 누나를 만나 친분을 쌓고, 결국 리처드의 냉동 정자로 인공수정한다. 닉은 또 어떤가. 결혼식 날짜를 잡아놓고 자신들의 결혼이 운명인지 확인하려고 한다. 결과는 닉의 상대방이 남자라고 알려준다. 닉은 단 한 번도 남자에게 끌린 적이 없는데. 실제 그를 만나러 가서 자신의 변화를 확인해보려고 한다. 첫인상과 달리 어느 순간 자신도 알 수 없는 감정을 느낀다. 이 정도만 해도 이 매칭이 얼마나 위력적인지 알 수 있다.


이 매칭의 실수처럼 보이는 커플도 있다. 바로 제이드다. 제이드는 오랜 인터넷 만남을 끝내고자 호주로 직접 가서 매칭 상대방을 만난다. 실제 마주한 그는 생명이 얼마 남지 않은 중환자다. 왠지 모르게 그에게 끌리지 않는다. DNA매치로 만났다고 해도 바로 운명의 상대임을 아는 사람이 있고, 어느 정도 시간이 필요한 사람도 있다. 제이드는 자신이 후자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아니다. 그녀가 끌리는 사람은 딴 사람이다. 이 부분을 읽으면서 하나의 가설을 세운다. 나중에 이 가설이 맞음을 확인했다. 동시에 DNA매치가 얼마나 강렬하고 유효한지 다시 확인시켜준다.


엘리는 DNA매치 유전자를 발견하고, 이것을 하나의 사업으로 키운 인물이다. 중반에 그녀의 정체가 드러난다. 일반적인 연애가 불가능했던 것은 그녀의 성공 이후 다가온 남자들 때문이다. DNA매치를 통해 데이트 상대를 찾는다. 한 남자가 나타난다. 이 남자의 신원을 조사하고, 한 번 만난다. 두 번 만난다. 이 남자에게 끌리고 빠져든다. 그런데 예상하지 못한 몇 가지 사실들이 드러나면서 긴장감을 불러온다. 그녀가 이 사업을 크게 만들기 위해 어떤 일을 했는지, 이 과정에서 생긴 문제점은 무엇인지 등이 나오고, 전혀 예상하지 못한 사건이 일어난다. 어떻게 보면 SF 로맨스에 가까운 이야기를 스릴러로 끌고 가는 두 이야기 중 하나다.


스릴러에 가장 적합한 인물은 크리스토퍼다. 그는 사이코패스이자 연쇄살인범이다. 그의 분량이 늘어나면 스릴러에 더 가깝게 다가가지만 작가는 그의 살인 행각을 자세하게, 자주 보여주지 않는다. 왜 그가 이런 연쇄살인을 저지르는지 알려줄 때 놀라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DNA매치로 만난 연인으로 인해 자신의 감점이 흔들리고 변하는 모습을 보여주면서 이 소설의 기본 설정이 얼마나 정확한지 알려주는 역할을 한다. 재밌는 점은 크리스토퍼의 연쇄살인이 엄청난 공포를 몰고 왔을 텐데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에서 한 번도 다루어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작가는 각 인물들이 등장해 이야기를 펼치는 순간의 시간 속도와 흐름을 제각각으로 다루면서 인물들의 연관성을 지운다. 이 편집과 구성은 이야기의 몰입도를 높여주고, 빠른 장면 전환은 지루할 틈을 주지 않는다. 여기에 연쇄살인범과 DNA매치를 둘러싼 비밀 등이 나오면서 긴장감을 고조시킨다. 몇몇 뻔한 장면으로 이어지기도 하지만 이 뻔함이 DNA매치의 과학성을 높여준다. 그리고 각 단계나 사건마다 스스로에게 질물은 던진다. 과연 나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 이 매칭의 허점은 무엇일까? 혹시 다른 반전이 나오지 않을까? 등등. 세부적인 부분에서 트집 잡을 부분들이 있지만 속도감에 열심히 책장을 넘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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