칵테일, 러브, 좀비 안전가옥 쇼-트 2
조예은 지음 / 안전가옥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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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전가옥 쇼-트 시리즈의 두 번째 책이다. 작가의 수상이력 등이 눈길을 끌어 선택했다. 이전에 안전가옥의 앤솔로지를 재밌게 읽은 기억이 있다. 실물을 받았을 때 예전 작은 문고판이 떠올랐다. 시집보다 작고 분량도 많지 않아 휴대하기 딱 좋다. 표지의 심플함은 또 어떤가. 이런 외형적 모습을 뒤로 하고 책속으로 들어가면 예상하지 못한 설정의 이야기들이 튀어나온다. 잔혹하고, 애잔하고, 기발하고, 운명적인 이야기들 말이다.

 

<초대>는 흔한 남녀의 애정 싸움 같은데 후반부로 가면서 분위기가 완전히 바뀐다. 기묘한 초대와 초대한 장소에서 벌어지는 행위는 서늘하고 잔혹하다. 어떻게 보면 잔혹에 대한 각성이고, 기존 남성에 대한 반발이다. 이 소설 속 두 여인을 중심으로 다른 이야기도 만들어 주었으면 좋겠다. <습지의 사랑>은 물귀신과 숲 귀신 이야기다. 물과 숲은 곁에 있지만 직접 만날 수 없다. 하지만 비가 많이 오고 습지가 범람하면 다르다. 널 서로 보기만 하던 두 귀신은 이렇게 만난다. 이름이 없던 물귀신에게 여울이란 이름까지 붙여준다. 이들에게 아주 큰 위험이 닥친다. 바로 개발이란 폭력이다. 그리고 개발의 폭력 속에 드러나는 사실 하나는 강한 인상과 여운을 남긴다.

 

표제작 <칵테일, 러브, 좀비>는 제목에 나오듯이 좀비물이다. 그런데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그런 좀비가 아니다. 제약회사 영업사원이었던 아빠가 좀비가 되었는데 그 진행단계가 아주 더디다. 엄마가 차려주는 밥상에 앉아 먹으려는 행동을 반복한다. 먹지는 못한다. 보통의 좀비 소설이라면 가족들이 모두 좀비화되고, 살기 위해 발악을 해야겠지만 이 소설에는 그런 장면이 없다. 좀비가 된 아빠를 숨기고, 자신의 일상의 되풀이할 뿐이다. 마지막에 좀비가 된 아빠를 처리하는 행동으로 옮긴 이는 엄마다. 좀비가 생긴 원인과 좀비에게 물린 사람을 다시 되돌리는 방식이 코믹하다.

 

제2회 황금가지 타임리프 공모전에서 우수상 수상작인 <오버랩 나이프, 나이프>는 운명을 생각하게 만든다. 아버지가 사업에 실패한 후 술로 지내다 어머니를 과도로 죽인다. 아들이 그 과도로 아버지를 죽인다. 그리고 자신은 자살하려고 한다. 이때 누군가 말한다. “시간을 되돌려 줄까?” 나 여성이 수개월째 스토킹을 당한다. 한 남학생 덕분에 스토커에게서 벗어난다. 그와 연인이 된다. 그런데 그가 스토커에게 죽는다. 그때 누군가가 말한다. “시간을 되돌려 줄까?” 이 둘은 세 번의 기회를 가진다. 시간을 되돌리지만 실패한다. 남은 기회 안에 성공할까? 잔혹하고 비정하고 슬픈 이야기가 운명의 고리를 끊으려는 노력을 비웃는다.

 

네 편의 단편 소설이 이 작가에 대한 관심을 불러온다. 장편 소설도 있는데 언젠가 시간 나면 한 번 읽어봐야겠다. 스릴러나 공포 쪽에 상당히 재능이 있는 것 같다. 작가의 첫 작품이 문학상 수상을 했다는 점에서 이 기발함을 계속 유지했으면 한다. 잔혹함이 곳곳에 스며있지만 그 아래에 깔린 애잔함과 일상의 무거움은 조용히 가슴속으로 파고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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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관을 떠나는 책들을 위하여 - 2020년 제16회 세계문학상 수상작
오수완 지음 / 나무옆의자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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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전 <책 사냥꾼을 위한 안내서>란 소설을 읽었었다. 그 당시 한창 책들을 모으던 시기라 제목부터 끌렸던 기억이 난다. 그 당시 서평을 찾아 다시 읽어보니 책에 대한 풍부한 이야기에 빠졌던 것이 눈에 들어온다. 그런데 이번 소설은 아예 가상의 도서관에 소장된 가상의 책들을 나열하는 방식으로 이야기를 풀어낸다. 책을 읽으면서 몇 편은 혹시 하는 심정으로 검색을 하기도 했다. 당연히 검색 결과는 나오지 않았다. 나의 시선을 가장 끈 부분은 다양한 책들의 표지와 각 책들의 소개문 혹은 감상문이다. 혹시 책 표지라도 다른 사람이 그렸나 하고 찾아봤지만 보이지 않았다. 32권의 책들을 작가가 직접 만들어낸 것이다.

 

미국 호펜타운이란 도시에 반디멘 재단 도서관이 있다. 물론 가상의 도시와 도서관이다. 이 도서관은 어디에도 없는 책들을 위한 도서관이다. 이 도서관에는 사람들이 직접 쓴 원고로 책을 만들어 기증했다. 사가본이라고 하는데 도서관이 재정난과 장서 부족으로 문을 닫게 되면서 이 사가본을 기증자들에게 다시 돌려주었다. 일부는 받을 사람이 연락되지 않아 돌려주지 못한다. 이 소설 속에 나오는 책들은 빈센트 쿠프만(VK)란 인물이 기증한 책들이다. 사서인 머레이와 잠시 나눈 대화 속에 그가 책도둑이었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이 소설은 VK가 제공한 책들의 카탈로그이자 존재하지 않는 책에 대한 환상을 담고 있다. 그리고 다양한 장르와 제본 등으로 멋진 각각의 책 이야기를 풀어낸다.

 

‘당신이 읽을 수 없는 100권의 책’이란 책이 나온다. 이 100권의 목록이 순전히 가짜라는 사실을 말하는데 이것은 이 소설 속 32권의 목록에도 적용된다. “아마 그는 자신이 상상한 책들을 함께 상상하고 그 책의 내용을 떠올리며 즐거워할 누군가가 한 한 명이라도 있다면 그걸로 족하다고 여겼을 것이다.” 라고 말하고 한 발 더 나아가 “독자가 자신만의 환상적이며 사실적인 책들의 목록을 만들기를, 그리고 그 책들을 찾아 나서기를, 즉 그것을 직접 쓰기를 바랐을 지도 모른다.”고 강조한다. 이런 점에서 이 소설은 작가가 목록을 만들고, 책을 찾아 나선 끝에 직접 쓴 책이다. 어느 특정한 한 장르에 매몰되지 않고 다양한 장르와 형식을 실험적으로 상상해내면서 말이다.

 

32권의 책 카탈로그 사이에 이 도서관과 관련된 사람들의 사연이 간단하게 삽입되어 있다. 카탈로그의 그림을 담당한 레나나 자신의 아이를 도서관에 두고 가는 요코나 요리사나 마약 판매인으로 오해를 하는 인물 등이 바로 그들이다. 가끔 이들을 오해하면서 생긴 에피소드가 책 이야기 너머의 사람 이야기를 들려주고, 사람의 향기를 풍기게 만든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는 것은 역시 32권 책 이야기다. 표지, 저자, 역자, 출판사, 출간연도 등의 정보는 왠지 모르게 있을 것 같은 착각을 하게 만들고, 책 감상문 등은 존재하지 않는 책에 대한 호기심을 불러온다.

 

처음에는 설마 책 정보로 가득할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어느 순간 이 책 감상문이 호기심과 재미를 불러왔다. 기발함과 풍부한 정보들은 어딘가에서 본 듯한 느낌을 주고, 존재하지 않는 책들은 현실과 이어져 새로운 이야기를 만든다. 책 이야기 다음에 이 책을 읽거나 훔치려는 사람이 나오는 것도 그 때문이다. 이것은 나중에 가상의 경매를 통해 새로운 주인을 만나게 만드는데 이 또한 가상의 주인이다. 읽으면서 무심코 지나간 몇 가지 사실들은 나중에 책을 복기하면서 새롭게 다가온다. 32권의 책 표지 일러스트를 보면서 작가의 전공이 무엇인지 궁금했는데 한의사라고 한다. 어딘가에서 본 듯한 몇 편의 설정들은 나중에 한 번 원 이야기를 찾아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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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척도
마르코 말발디 지음, 김지원 옮김 / 그린하우스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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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려한 광고 문구를 내놓은 책이다. 다 빈치 사후 500주년 기념작이란 광고다. 사실 이런 광고 문구는 누구나 사용이 가능하다. 다 빈치에 대한 소설을 쓴 작가라면 누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광고에 혹하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역사소설과 미스터리의 완벽한 결합이란 문구는 팩션으로 간단히 치환가능하다. 하지만 매혹적인 르네상스 인물 레오나르도 다 빈치라면 더 호기심이 생길 수밖에 없다. 몇 년 전에는 <다 빈치 코드>란 소설이 세계적으로 큰 흥행을 했던가. 그가 남긴 노트가 얼마나 높은 가격에 경매를 통해 판매되었던가. 그에게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다면 그냥 지나갈 수 없는 문구다.

 

처음에는 <다 빈치 코드> 같은 빠른 전개와 미스터리로 가득할 줄 알았다. 이 기대는 몇 쪽을 읽지 않아 사라졌다. 다른 서평에서 본 것처럼 20쪽까지 등장인물 소개가 나온다. 이런 친절한 소개가 예전에는 책을 읽으면서 찾아보며 누군지 확인했지만 언제부터인가 게을러졌다. 만약 한두 쪽이었다면 그랬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몇 쪽에 걸친 소개라니. 낯선 이름과 역할 등은 솔직히 쉽게 머릿속에 들어오지 않는다. 이 당시 역사를 좀 안다면 이 소개가 소설을 이해하는데 더 쉽고 더 많은 도움을 줬을 것이다. 단편적으로 이 시대와 인물을 기억하고 있기에 이 등장인물이나 상황이 체계적으로 다가오지는 않았다.

 

1493년 가을 루도비코 일 모로의 궁중에서 시체가 발견된다. 외상이나 독물 중독의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 전염병을 의심한다. 이 시대에 가장 무서운 것은 전염병이다. 과학이 현재처럼 발전하기 전이다 보니 점성술에 의지하는 바가 크다. 20세기 초까지 의사들의 주 치료 방법이 사혈법이었던 것을 떠올리면 이 시대를 더 이해하기 쉬울 것이다. 다행이라면 해부를 해본 레오나르도가 그 곳에 있었다는 것 정도다. 그는 시체가 어떻게 죽었는지 해부를 통해 안다. 시체의 정체도. 나중에 이것이 잠깐 그에게 의심을 불러온다.

 

그 당시 경제, 정치에 대한 설명과 묘사가 많은 부분을 차지한다. 밀라노 공국은 경제 호황과 정치적 번영기를 거치고 있고, 다른 국가들로부터 시기와 질투를 불러온다. 재밌는 것은 레오나르도가 발명한 장치가 와전되어 상대국에 공포로 자리잡았다는 설정이다. 다 빈치의 공책을 노리는 무리가 등장한다. 그의 아이디어가 담긴 공책이다. 이것을 얻으면 밀라노 공국을 쉽게 공격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다른 한 편으로 밀라노의 경제를 파탄 내려는 세력이 있다. 가짜 신용장을 바탕으로 하는 작전이다. 이 부분은 경제학의 가장 기본을 잘 보여준다. 화폐란 상호신뢰를 바탕으로 한 교환가치란 사실을 말이다.

 

소설의 많은 부분에서 레오나르도의 일상을 보여준다. 그의 노트를 훔치기 위해 남색가란 소문을 이용해 남자가 유혹하는 장면은 한 편의 코미디다. 작가의 상상력이 가미된 몇 가지 에피소드는 이렇게 소소한 재미를 준다. 계속해서 나의 관심을 끈 것 중 하나는 그가 일 모로를 위해 만들고 있던 청동기마상이다. 결과부터 말하면 그는 실패했다. 청동의 가치와 계산 착오 때문이다. 이런 역사적 사실을 작가는 상상력을 동원해 하나의 사건으로 만든다. 현대 과학에 너무 익숙한 우리가 가끔 망각하는 몇 가지 일들 중 하나가 이런 기계 장치나 조각상들이다.

 

앞에서 말했듯이 빠른 전개도 장면 전환이 빠르지도 않다. 비슷하고 낯선 이름은 기억하기도 힘들다. 하지만 익숙해지고 느리지만 점차 의도가 드러나는 상황들은 읽는 재미를 조금씩 높여준다. 그 시대에 대한 충실한 설명과 해설은 이런 이해를 높인다. 물론 가끔 작가가 너무 상황을 현대 용어로 해석하면서 생기는 돌출이 아쉽지만 말이다. 화려한 광고 문구에 비해 레오나르도의 위대함은 그렇게 부각되지 않고 인간적인 모습이 더 눈에 들어온다. 인간의 척도란 제목과 다 빈치의 청동기마상 제작 실패는 왠지 이어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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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여자들은 침묵하지 않았다
크리스티나 달처 지음, 고유경 옮김 / 다산책방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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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까운 미래를 배경으로 놀라운 설정을 보여주는 소설이다. 민주주의 국가로 포장된 미국이 갑자기 퇴행해 여성들의 목소리를 억압하게 만든다. 여성들에게 허락된 하루의 단어 숫자는 고작 100단어다. 이 숫자를 넘어가면 그들의 팔찌가 전기 충격을 준다. 과연 이런 일이 가능할까 하느니 의문이 들지만 작가는 몇 가지 설정을 통해 가능성을 암시한다. 그 가능성의 첫 번째가 바로 소설 속 주인공 진 매클렐런의 친구 재키의 정치 투쟁이다. 하나의 흐름이, 하나의 세력이 강대해지는 데는 여러 가지 조건이 필요한데 그 중 하나가 사람들의 정치적 무관심이다. 투표의 중요성을 이렇게 극단적으로 표현한 작품이 또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여성들의 목소리를 빼앗았다는 설정을 보았을 때 오래된 뒤틀린 속담인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가 떠올랐다. 여성을 억압하고 왜곡하는 대표적인 속담 중 하나다. 작가가 설정한 이 세계는 이것을 극단으로 몰고 간다. 목소리를 빼앗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직장에서 몰아낸다. 고전적인(?) 여성의 지위로 내려놓는다. 바로 엄마, 아내, 주부 등의 역할이다. 투표권도 물론 없다. 100년 전 세계로의 후퇴란 표현이 소설 속에 나오는데 실제는 더 퇴행한 설정이다. 이런 일이 일어난 것이 불과 몇 년 되지 않았다는 설정은 더욱 놀랍다. 이런 현실을 벗어나기 위한 사람들의 탈출을 막기 위해 거대한 벽을 세웠다는 것은 또 다른 정치 현실에 대한 역설이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 하는 물음에 대한 답 중 하나가 독일 나치다. 불과 수십 년 전 독일이 어떻게 나치화 되었는지 보았지 않은가. 가까운 시기로 오면 아프리카의 인종 대학살이나 보스니아 사태나 광주 민주화 운동이나 중국 천안문 사태까지 여러 곳에서 크고 작은 가능성이 일어났다. 이 소설 속 순수운동이 정치권력을 삼켰을 때 격렬하게 저항하지 않고 그 탄압에 도망치거나 동조하는 모습을 보여준 사람들 모두가 가해자이자 피해자로 변한다. 재키가 방송에 나와 다른 패널들과 싸울 때 상대방이 내민 왜곡된 정보를 믿고 투표한 이들이 어떻게 피해자가 되었는지 보여준 장면은 이것을 잘 보여준다. 민주주의는 피를 먹고 자란다는 말이 떠오르는 대목이다.

 

진은 실어증 치료에 혁신적인 혈청 개발 전문가다. 한때 박사였지만 엄마와 아내로 집에 머문다. 하루에 말할 수 있는 단어의 개수는 100개다. 아이에게 자기 전 동화도 읽어줄 수 없다. 이 정책의 무서움은 성인에게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여자 아이에게도 적용된다는 것이다. 잠을 자다 잠꼬대를 해도 카운트된다. 이 팔찌가 얼마나 무서운 장치인지 보여주는 장면들 중 하나가 바로 이 장치를 이용한 자살 시도다. 엄청난 고통을 견뎌야만 가능한 자살이지만 그 상황을 보면 어느 정도 이해가 된다. 이 소설의 놀라움 중 하나가 이런 극단적 상황을 연결해 이 현실의 무서움을 극대화한 것이다. 이런 정책의 바탕이 되는 것의 이름을 ‘순수운동’이라고 한 부분은 언어와 정치를 잘 엮어 표현한 것이다. 현대 사회에서 수많은 정치 표어나 단체들이 실제 행동과 다른 단어나 이름을 사용하고 있지 않은가.

 

진이 다시 세상으로 나오는 계기가 바로 대통령 형이 실어증에 걸렸기 때문이다. 그녀의 팀이 연구했던 혈청이 필요하다. 베르니케 실어증 연구를 계속하라는 압박이 온다. 이 연구에 참여하기 위해 그녀는 몇 가지 계약을 하지만 이런 독재 국가에서 이런 계약이 과연 의미가 있을까? 그녀의 연구가 이루어지고 성공할 때까지는 가능할 것이다. 이 과정 속에 일어나는 가족의 갈등과 외도와 현실의 문제들은 또 다른 생각으로 이어진다. 이런 정치적 흐름 속에 가장 민감하게 반응하고 열광적으로 호응하는 무리 중 하나는 십대 청소년들이다. 엄마와 고등학생 아들 스티븐의 갈등과 대립은 이것을 잘 보여준다.

 

실제 이런 정치적 억압 시기가 길지 않고 상황도 미국만으로 한정되어 있으면서 전체 구성에 약간의 어색함이 생긴다. 나중에 딸에 대한 부성애가 하나의 돌파구처럼 작용하는 것은 이 전체 설정이 약한 기반 위에 세워져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이 상황을 뒤집기 위한 반전이 내가 예상한 것을 벗어나지 못한 것도 조금 아쉽다. 한 국가의 디스토피아 상황을 멋지게 설정하고 사고 실험을 하게 만들었지만 결국 개인에게 수렴되는 해결방식은 재키의 외침과 동떨어져 있다. 아마도 내가 이 소설의 놀라운 설정과 전개에 감탄하면서도 뭔가 저항에서 아쉬움을 느낀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어 생각할 거리와 역사를 다시 한 번 돌아보게 만든다. 굉장히 지적이고 위험하고 인상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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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입자들
정혁용 지음 / 다산책방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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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형 하드보일드 소설이란 말에 혹했다. 읽으면서 하드보일드 소설이 맞는지 의문이 들었다. 무뚝뚝한 택배기사란 사실을 지우면 택배기사의 고단한 삶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기 때문이다. 빠르게 물건을 배송하기 위해서 노력하는 그의 모습이, 그가 만난 진상들이, 예상하지 못한 몇 가지 행운들이 이 일과 관련되어 일어나기 때문이다. 서울 상경과 동시에 택배기사가 되고, 몸을 놀리기 바빠 딴 생각할 틈도 없는 택배의 고됨이 나열된다. 이전에 본 만화 <까대기>가 연상되었다. 그런데 특이한 인물 몇 명이 나오면서 조금씩 분위기가 바뀐다.

 

가장 이상한 인물은 그에게 담배 한 대를 빌려 피우는 여자다. 이 여자는 자신이 우울증 환자였다고 말한다. 나중에는 자신과 하루 동안 만나면 일당 백만 원을 주겠다고 한다. 거절할 수 없는 유혹이다. 이 만남 속에서 그는 그녀의 과거 사연을 듣고, 예상하지 않은 만남을 만들고, 전혀 생각하지 못한 과거를 떠올리게 된다. 동네 바보도 한 명 등장한다. 그가 마이클이라고 부르는 인물이다. 택배 운송 중 고등학생들에게 구타당하던 그를 구해준다. 이때 그가 보여준 침착함과 과장된 지식은 눈길을 끈다. 어떤 삶을 살았기에 이런 모습을 보여줄까. 하지만 사건해결은 공권력에 맡기는 현실적인 선택이다.

 

같은 구간을 계속 배송하다보면 예상하지 못한 인물을 만난다. 유명한 경제학 교수가 그렇다. 그에게 자신에게 수업을 받으라고 말한다. 나의 눈길이 간 부분은 이 상황이 아니다. 그가 어떻게 그 교수의 정체를 알았을까 하는 것이다. 정치인이었거나 방송에 자주 나오는 교수가 아니면 보통 알기 힘들다. 여기에 특정 시간에 배송해달라는 바의 주인이 있다. 알고 보니 그 바가 게이바다. 이 바를 통해 그가 위스키를 아주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코냑은 싫어하고. 위스키라면 그가 다른 사람을 위해 시간을 내주기 충분하다. 한 택배 기사의 사연도 이 술 때문에 들어주었다.

 

택배기사이다 보니 주변 동료가 없을 수 없다. 택배기사들의 사연 몇 가지가 나오고, 이들의 만남 속에 그의 일상이 드러난다. 일이 끝난 후 책을 읽고 술을 마신다. 그가 읽는 책들이나 인용하는 문구들은 내 취향과 비슷하다. 좋아하는 장르 이야기는 눈길을 끈다. 작가 후기에 켄 브루언의 <런던 대로>가 나왔을 때 고개를 끄덕였다. 소설 속에 그의 실명은 단 한 번도 나오지 않는다. 행운동 담당이라 행운동이라고 불린다. 다른 택배기사도 별명으로 불린다. 택배 배송 중 생긴 몇 가지 에피소드는 읽으면서 통쾌함을 느꼈다. 단돈 몇 천 원에 자신이 왕이 된 것처럼 행세하는 사람들에게 정확한 일침을 가하기 때문이다. 말 한 마디에 바뀌는 그의 행동을 보면 또 다른 그의 모습을 보게 된다.

 

간결한 문체에 군더더기 없는 진행과 까칠한 캐릭터는 재밌고 잘 읽힌다. 몸으로 움직이면서 딴 생각을 할 틈을 주지 않는 노동자인 택배기사를 내세워 우리 주변 인물들을 삶을 보여준다. 다양한 사연들과 욕망으로 가득 찬 사람들이다. 소설 제목의 침입자들은 주인공 행동동의 삶 속으로 침입한 수많은 사람들을 의미한다. 그가 바란 것은 업무 후 술 한 잔과 독서일 뿐인데. 이런 분위가 뒤로 가면서 조금씩 뒤틀리고 현실에서 살짝 벗어난다. 어떻게 보면 과장되었거나 뜬금없는 상황이다. 그런데 숨겨진 과거는 언제나 설레고 기대하게 된다. 영화 <셰인>처럼. 이 작가의 다른 작품이 검색되지 않는데 다음 작품이 기대된다. 행운동이 주인공인 소설이면 더 좋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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