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리코를 위해
노리즈키 린타로 지음, 이기웅 옮김 / 모모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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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노리즈키 린타로 시리즈 3부작 중 첫 번째 작품이다. 뒤의 두 작품은 오래 전에 읽었다. 재밌게 읽은 기억이 뚜렷하다. 첫 작품을 읽어야지 생각만 하다가 이번에 읽게 되었다. 출판사는 바뀌었다. 번역자는 그대로다. 구판의 표지가 요리코의 자전거를 의미한다면 이번에는 좀 더 추상적이다. 스물다섯 살에 이 작품을 썼다고 하는데 대단하다. 3부작 다른 이야기를 읽으면서 요리코에 대한 이야기가 궁금했는데 이번에 완전히 풀렸다. 읽으면서 히가시노 게이고의 <악의>가 떠올랐다. 아마도 앞부분에 수기가 나온 것과 수기를 둘러싼 트릭 때문일 것이다.

 

사랑했던 딸의 죽음에 절규한 아버지 니시무라 유지의 복수를 담은 수기로 시작한다. 열일곱 살 딸이 목이 졸린 채 죽었다. 경찰은 성범죄자의 소행이라고 생각한다. 이미 이 동네에서 미수 포함 두 번의 사건이 있었다. 그런데 해부 결과 요리코가 임신 4개월이란 충격적인 사실을 나중에 알게 된다. 누가 아버지일까? 그가 범인일까? 니시무라는 복수를 꿈꾼다. 이미 14년 전 불행했던 교통사고로 아내가 반신불구가 되었고, 임신하고 있던 뱃속 아들은 죽었다. 아내에겐 요리코의 임신 사실을 숨긴 채 은밀히 조사한다. 경찰이 숨긴 몇 가지 사실 때문에 경찰도 믿지 못한다. 반 친구들의 말을 통해 학교 선생 중 한 명이 용의자로 떠오른다. 단순 혈액형으로 비교하면 그일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만약 그가 아니라면 무고한 사람을 죽이는 게 된다. 이것을 피하기 위해 열심히 조사한다. 확신이 든 순간 살인하고, 자살을 기도한다.

 

딸의 죽음과 아버지의 수기는 두 살인 사건을 하나로 묶고, 자살은 수기에 사실이란 확신을 불어넣어준다. 이 수기 때문에 피해를 본 요리코의 학교에서 노리즈키 린타로의 명성을 이용해 이 소문을 잠재우려고 한다. 가해자였다가 피해자로 바뀐 선생 히이라기가 요리코와 성교를 나누지 않았다고 주장하려는 것이다. 만약 교사가 학생을 범했다면 학원에 문제가 생기고, 오빠의 선거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은연중에 경찰에 압력을 행사한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노리즈키는 이 재조사를 의뢰인의 바람대로 할 마음이 없다. 그는 진실을 밝히려고 한다.

 

재조사의 시작은 수기의 허점을 파악하는 것부터다. 그가 읽으면서 느낀 이상함은 관계자들을 만나면서 조금씩 커진다. 자살자가 남긴 기록이 거짓일리 없다는 맹신을 그는 거부한다. 그의 조사가 진행됨에 따라 불편함을 느낀 사람들이 늘어나고, 조사를 방해하려는 시도도 생긴다. 수기 속에 나온 사람들을 만나고, 그들의 이야기 속에서 수기의 진실 여부를 다시 묻는다. 수기 속 문장 하나에 의혹을 품고, 수기에 기록되지 않은 이야기를 찾아낸다. 진실은 보여주는 수기 너머의 어둠 속에 자리잡고 있다. 읽으면서 ‘혹시’했던 가정은 ‘역시’로 바뀌었고, 이것은 또 다른 반전으로 이어진다.

 

모든 비극은 과거 속에서 일어났다. 요리코의 죽음은 현실이다. 요리코를 위해서란 이름으로 살인을 저지른 아버지의 수기와 그 이면의 진실은 ‘사랑’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수기의 진실을 알기 위해서는 수기를 기록한 니시무라가 정신을 차려야 한다. 자살 소동의 가능성도 검토하지만 의사들은 부정한다. 사건을 조사하다보니 점점 더 과거 속으로 들어가게 된다. 진실의 단서는 과거 속에 있다. 노리즈키 린타로의 가설은 대담하고 위험하고 불편하다. 그래서 ‘혹시’라고 생각한 나의 추측에 반감이 있었다. 하지만 그 무엇보다 섬뜩한 것은 이 살인 사건의 이면을 조용히 들여다보고 있다고 생각하는 마지막 장면이다. 3부작의 다른 작품에 비해 조금 거친 맛이 있지만 가독성은 여전히 좋고, 재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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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들의 봉우리
유메마쿠라 바쿠 지음, 이기웅 옮김, 김동수 감수 / 리리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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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 번역본이 절판된 후 높은 중고가를 자랑했던 소설이다. 다니구치 지로의 만화로도 나왔다. 사실 이 만화 <신들의 봉우리>를 2권까지 읽었다. 그 당시 쓴 글을 보면 상당히 재밌게 읽었고, 원작을 읽으면 만화의 이미지가 살아 있을 것 같다고 했는데 너무 오랜 시간이 흘러서인지 기억이 희미해졌다. 만화도 5권까지 사놓았지만 왠지 손이 나가지 않았다. 후기를 보면 원작자와 만화가가 함께 네팔로 가서 조사를 했다는 글이 나온다. 아마 내가 기억하고 있는 만화의 이미지는 이 부분일 것이다. 언젠가 만화를 다시 읽게 되면 또 다른 느낌이지 않을까 생각한다.

 

압도적인 힘이 있는 소설이다. 참 오랜만에 이런 감정을 느낀다. 마지막으로 넘어가면 한계상황에 도달한 사람의 모습이 진한 감동을 준다. 산소가 부족해 정상적인 사고를 할 수 없고, 체력은 바닥으로 떨어지고, 식량도 충분하지 않다. 여기에 강한 바람과 엄청난 추위는 죽음과 바로 연결될 수 있다. 이런 극한 상황에서 보통의 사람이라면 생각조차 할 수 없는 도전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 소설은 바로 그들에 대한 이야기다. 시작은 1924년 에베레스트를 등반한 조지 맬러리의 미스터리부터다. 그가 가지고 등반했던 것으로 추정되는 코닥 카메라를 얻게 되면서 산에 자신의 영혼을 빼앗긴 사람들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이야기를 끌고 가는 인물은 후카마치 마코토란 사진작가다. 일본 에베레스트 원정대에 참가했다가 하강하던 대원 둘이 추락하는 사진을 찍었고, 그 후 카트만두에 머문다. 이때 한 등산용품점에서 오래된 카메라를 발견한다. 깨져 있지만 맬러리가 살던 시절 카메라다. 그의 머릿속에서 만약 이것이 맬러리의 카메라라면 에베레스트 등반역사를 바꿀 자료가 될 수 있다. 맬러리의 자료를 조사하던 중 이 카메라는 도난당한다. 이 도난 사고가 다사 한 사람과 이어준다. 바로 현지에서 비카르산, 독사로 불리는 하부 조지다. 한때 일본 산악계의 전설이라 불렸고, 어느 날 갑자기 사라진 인물이다.

 

이야기는 맬러리 미스터리에서 하부 조지란 인물로 넘어간다. 후카마치는 하부에 대한 모든 것을 조사한다. 그가 어떻게 산악회에 들어갔고, 그가 어떤 기록을 세웠는지, 그 과정에서 산악회 동료들과 어떤 문제가 있었는지. 그리고 또 한 명의 천재 등반가 하세 츠네오가 등장한다. 하부가 동료와 함께 처음 등반한 암벽을 그는 혼자 올라간다. 처음이란 타이틀을 하세가 바꿔 가져간다. 하부는 산에 모든 것을 바치고, 산에 머문 사나이다. 그에게 에베레스트는 꼭 가야할 장소다. 산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누군들 그렇지 않겠는가. 그가 ‘처음’이란 타이틀에 집착한 것도 에베레스트에 갈 돈을 지원받기 위해서다. 하지만 하세의 등장은 그를 어둠 속으로 밀어넣는다.

 

두 천재 산악인의 대결이 한 동안 이어지면서 에베레스트 등반이 지닌 의미와 어려움을 작가는 계속해서 풀어놓는다. 그냥 평범하게 생각했던 고산병, 산호가 희박해지는 곳에서의 움직임, 수시로 바뀌는 날씨 등 어느 하나 쉬운 것이 없다. 높이에 적응하는데 걸리는 시간이 왜 이 에베레스트 등반을 힘들게 하는지, 이 등반을 위해 필요한 금전적인 문제 등의 현실적 부분들을 알려준다. 고산병, 그냥 약을 먹으면, 어느 정도 시간이 되면 적응하는 병이 아니다. 한 발을 내딛기 위해 몇 번의 호흡을 내뱉어야 하는가. 희박한 산소는 또 어떤 환각 증상을 보여주는가. 환각은 자신의 가장 약한 부분을 건드린다. 읽다보면 이 등반 자체가 인간 의지와 체력의 한계에 대한 끝없는 도전이다.

 

어느 순간부터인가 맬러리의 미스터리는 하부 조지에 대한 이야기로 바뀐다. 그를 둘러싼 이야기는 강한 집착처럼 다가온다. 하지만 이야기가 진행되면 이 집착은 욕망 너머의 세상을 펼쳐 보여준다.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한 혼신의 도전이다. 이 인간의 한계를 넘어선 장면을 작가는 짧고 간결하면서 힘찬 문장으로 빠르게 묘사한다. 압도적인 힘이 느껴지는 순간이다. 그리고 보통 끝났다고 생각할 수 있는 장면이 나온 후 이야기는 다시 앞으로 돌아간다. 후카마치의 상황을 되돌아보게 한다. 머릿속으로만 생각하게 되는 장면들이 얼마나 피상적이고 비현실적인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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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드 창 지음, 김상훈 옮김 / 엘리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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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드 창의 SF 관련 문학상 수상 이력은 경이적이다. 전작 <당신 인생의 이야기>가 나왔을 때 화려한 수상 이력이 나의 시선을 먼저 끌었다. 그 후 책을 사놓고 고이 모셔두다가 오랜 시간이 흐른 후 읽었을 때 나의 취향과 다른 부분이 많았다. 물론 그 여덟 편의 중단편 속에서 취향에 맞는 소설도 있었다. 하지만 그의 작품을 이해하는 것이 결코 쉽지 않았다. 과학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거나 좀더 정밀하게 천천히 읽어야 하는데 빨리 읽으면서 많은 것을 놓쳐 그런 작품도 있다. 이것은 이번 작품집을 읽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모두 아홉 편의 중단편이 실려 있다. 가장 재밌게 읽은 작품은 <상인과 연금술사의 문>이다. 읽으면서 <아라비안 나이트>를 떠올렸다. 이것은 이야기를 진행하는 방식과 분위기 때문이다. 무대도 당연히 바그다드 등의 아랍이다. 20년 뒤의 과거나 미래로 통하는 세월의 문을 통과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려주는데 운명과 인간의 욕망을 잘 엮어 풀어내었다. 어려운 과학 이야기가 아닌 사람들의 삶 이야기라 쉽게 읽을 수 있었고 예상하지 못한 결말이라 더 재밌었다. 시간 여행을 이렇게 풀어내는 것도 색다른 경험이다.

 

표제작 <숨>은 정밀한 기계 장치를 하나씩 해체하는 느낌을 준다. 기계 생명체가 공기의 비밀을 파헤치기 위해 자신의 머리를 해체하고, 관찰하고, 기록하고, 탐구하는 과정이 인상적이다. 자신들의 세계가 멈출 때 자신의 기록이 이 문명의 발견자에게 큰 도움이 되길 바란다. 그 문명이 이 문자를 해독할 의지나 능력이 있을까 하는 뒤틀린 생각이 스쳐지나간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한 편의 소고인데 예측기란 기계를 가지고 인간의 자유의지를 실증하고자 한다. 인간의 선택이 결정되어 있다는 논리로 빠지는데 결정론을 다시 생각하게 만든다.

 

<소프트웨어 객체의 생애 주기>는 이전에 단행본으로 나온 적이 있고, 이 단행본이 집에도 있다. 가장 분량이 많은데 조금 심심하다. 디지언트란 디지털 유기체를 디지털 세계에서 키우는데 처음에는 동물 훈련과 비슷하다. 디지언트의 인공지능을 발전시키는 과정이 한 명의 인간의 성장하는 것과 비슷한, 혹은 느린 속도로 진행된다. 디지언트와 정서적으로 연결된 사람들과 단순히 애완동물처럼 생각한 사람들이 차이를 보여주고, 이들의 성장과 독립을 천천히 풀어낸다. 거대 담론보다 작은 현실에서 진행되는 철학적 물음은 흥미롭지만 재미는 조금 부족하다.

 

<데이시의 기계식 자동 보모>는 육아 문제를 다시 돌아보는 시간이었다. 인간 보모에게 학대당하는 아들을 돌보기 위해 기계식 자동 보모를 만들었는데 이것이 또 문제를 일으킨다. 인간의 감정과 기계의 논리과 충동하는데 완전히 한쪽의 손만 들어주기 힘들다. <사실적 진실, 감정적 진실>은 기록과 기억에 대한 이야기다. 모든 것을 저장할 수 있는 미래의 기자와 문자 기록을 배우는 티브족 소년의 두 이야기가 교차하면서 진행된다. 기억의 문제와 기록의 한계를 동시에 풀어나가는데 두 상황이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든다. 그리고 모든 것을 저장하려면 그 저장 공간은 얼마나 필요할까?

 

<거대한 침묵>은 멸종 직전의 푸에르토리코 앵무새가 들려주는 인간 지성에 대한 새로운 의문이다. 앵무새의 소리도 이해하지 못하는 인간이 외계 지성을 알아볼 수 있을까 하고 묻는다. <옴팔로스>는 창조론에서 시작해 천문학적 발견으로 의혹을 가지게 되는 과정을 보여준다. 이 작품을 읽으면서 과학은 발견이 아니라 가설을 확인하는 과정과 그 부산물이란 생각이 들었다. <불안은 자유의 현기증>은 양자역학과 평행우주를 다룬다. 하나의 선택에서 갈라진 평행우주와 연락할 수 있는 프리즘이란 도구가 풀어내는 이야기들은 놀랍다. 이 작품집에 흐르고 있는 개인의 선택과 성격 문제는 결국 앞에서 다루었던 결정론과 맞닿아 있다. 마지막에 데이나에게 온 프리즘들은 이것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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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달의 교토 - 디지털 노마드 번역가의 교토 한 달 살기 일본에서 한 달 살기 시리즈 2
박현아 지음 / 세나북스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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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 한 도시에서 한 달 살기가 몇 년 전부터 유행이다. 해외여행을 하다 보면 어떤 도시에서 길게 살고 싶다는 마음이 생긴다. 며칠 휴가 내어 간 도시에 서양인이 허름한 옷을 입고 동네 식당에서 밥을 먹는 것을 볼 때면 괜히 부러웠다. 같은 도시를 몇 번 가면서 더 많은 곳을 돌아보고, 그때 신기하고 이상하게 생각했던 곳이 그냥 낯설어서 그렇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내가 살고 있는 도시도 무심코 지나가던 곳이 어느 날 갑자기 낯선 모습으로 다가오지 않았던가. 숙소를 정해놓고 며칠 동안 오고 가다 보면 그 익숙한 풍경이 외국이란 사실을 잊게 만들기도 한다. 이 낯설고 익숙한 경험이 한 달 살기로 나를 유혹한다. 그러다 한 번은 가보고 싶은 일본 고도 교토 한 달 살기 책이 나왔다.

 

교토 한 달 살기의 저자는 일본어 번역가다. 한 달 살기를 하는데 그 나라의 언어를 잘 안다는 것은 큰 힘이 된다. 번역가이다 보니 특정 장소에서 일할 필요도 없다. 디지털 노마드 번역가란 부제가 붙은 것도 이 때문이다. 네이버 포스트에 연재한 글을 정리해서 책으로 내었는데 가기 전부터 계획한 일이다. 그녀가 교토에 간 시기는 4월이다. 일본 벚꽃이 만발할 때, 소위 말하는 최고의 시즌에 갔다. 문제라면 갓 결혼한 신혼이란 점 정도랄까. 일기 형식으로 하루 하루 일상을 적었다. 이 책을 읽으면서 예전에 오사카, 교토 여행을 생각할 때 예상한 2~3일 일정은 역시 무리임을 깨닫는다.

 

한 달이란 시간 동안 관광과 휴양과 일을 동시에 진행하려는 욕심이 담겨 있다. 읽다 보면 욕심이 과하다는 느낌이 든다. 단순히 관광 목적으로 빡세게 돌아다니면 1주일 정도면 유명한 곳들을 모두 둘러볼 수 있을 것 같다. 넉넉하게 잡으면 2주 정도. 하지만 휴양과 일을 넣으면, 매일 자신의 일정을 포스팅해야 한다면 어떨까? 생각보다 빼앗기는 시간이 많을 것이다. 덕분에 저자의 하루 일정은 그렇게 많지 않다. 여유로워 보이는 일상은 한 달 동안 한 지역에 머물기에 가능한 것이다. 가끔 작은 소도시에 며칠 머물다 보면 이런 현상이 생기기도 하지만 교토는 볼거리가 많은 도시다.

 

이 에세이를 읽으면서 상당히 많은 관광지들이 낯익다는 사실에 놀란다. 금각사, 은각사, 기요미즈데라(청수사), 철학자의길, 덴유지 등은 일본 소설, 영화, 드라마, 애니 등으로 너무 익숙하다. 이 이외에도 볼 곳은 넘쳐난다. 옛 도시와 신 도시가 강 하나를 두고 나누어진다는 말을 듣고, 왠지 시간 여행을 느낌을 받기도 했다. 내가 교토하면 상상하는 이미지는 마을 풍경인데 이것을 잘 충족시켜줄 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 몇몇 카페의 문 닫는 시간이 오후 6시 정도인 것을 보고 깜짝 놀란다. 경제적인 의미에서, 여유라는 면에서 말이다.

 

비교적 긴 시간을 머물게 되어서 인지 저자의 교토 일상은 다양한 경험으로 가득하다. 일본 다도를 체험한다거나 정원의 한적한 분위기를 즐긴다거나. 짧은 일정이라면 하나라도 더 보기 위해 여러 곳을 다니겠지만 오늘 아니면 내일이 있는 여행자란 사실이 새로운 선택을 보여준다. 이 책을 보면서 저자가 일본 버스를 타다가 실수한 이야기가 자주 나오는데 혹시 가게 된다면 꼭 머릿속에 담아둘 필요가 있다. 그리고 번역 마감일이 다가오고, 파일을 보내야하면 택시도 탄다. 아마 일하지 않는 여행자라면 택시 타기는 쉽지 않은 일일 것이다.

 

소소한 에피소드들이 자주 나오는데 그녀가 상당히 타인의 질문에 경계하는 모습을 보여줘 조금 놀랐다. 타인의 선의를 선뜻 받아들이지 못하는 모습은 안타깝지만 현실적인 대응방법이기도 하다. 분리수거 문제로 관리인의 질책을 받는 부분을 보고 잔뜩 화가 난 모습은 또 어떤가. 후기에 한 달 살기를 하려면 호텔에서 하라고 했는데 자신이 살 던 집의 한 달 비용이 얼마인지 알려줬으면 어땠을까 생각한다. 그리고 작년 일본 문제와 최근의 코로나 19 사태로 이번 봄에 일본 여행을 할 수 없는 것을 감안하면 이 책의 이번 출간은 운이 없다고 해야 할 것 같다. 갑자기 벚꽃이 바람에 흩날리는 풍경이 머릿속을 스쳐지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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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의를 담아 애정을 고백하는 법
무라타 사야카 지음, 최고은 옮김 / 살림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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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가장 핫한 일본 소설가 중 한 명이 무라타 사야카다. 아쿠타가와 상을 수상한 후 많이 출간되고 있다. 아쿠타가와 상 수상 후 몇 년이 지났지만 아직 한 권도 그녀의 책을 읽지 않았는데 이번에 읽게 되었다. 이번 책은 <편의점 인간>보다 먼저 출간되었고, 미시마 유키오 상을 수상한 작품이다. 이 작가의 문학상 수상 이력은 상당히 화려하다. 내가 알고 있는 일본 문학상 중 네 가지를 수상했다. 이것도 이 책을 읽으면서 알게 된 사실이다.

 

읽으면서 상당히 불편해하면서도 이야기 속에 몰입했다. 이야기는 크게 두 시기로 나누어진다. 하나는 초등학교 3학년의 한때와 중학교 2학년 시기다. 초등학교 시절은 초등학생의 순수함이 묻어나면서도 아주 도발적인 상황이 일어난다. 한창 성장통을 겪는 다니자와 유카보다 키가 작은 이부키가 내뱉은 말에서 이 둘의 만남은 시작된다. 같은 서예학원을 다닌다는 이유로 말을 섞지만 유카의 첫 생리 후 더 가까워진다. 유카의 강제적인 키스 이후 둘의 관계는 조금씩 변한다. 유카는 이부키를 자신만의 장난감으로 삼고 서툰 입맞춤을 계속 한다. 당연히 학교에서는 모른 채 한다.

 

중학생이 된 후 교실의 계급 관계가 전면에 부각된다. 잘 나가는 부류와 중간과 마지막 계급 등이다. 초등학교 시절 친했던 친구들은 이제 각각 다른 계급 속에 머문다. 와카바는 최상위 계급으로, 노부코는 최하위 계급으로. 유카는 평범한 계급이다. 한때 와카바를 중심으로 셋이 모여 다닌 것과 비교되는 현실이다. 와카바도 최상위 계급을 유지하기 위해 발버둥치고 있다. 이 학급의 모습을 보면서 나의 학창 시절을 잠시 떠올리지만 많이 다르다. 이 계급 사회에서 유카는 관찰자를 자처하면서 끊임없이 친구들을 엿본다. 자신의 계급이 노부코처럼 최하위로 떨어지지 않게 긴장을 유지하면서.

 

유카가 성장을 멈춘 사이 이부키는 성장했다. 이제는 키가 비슷하다. 힘은 당연히 이부키가 더 세다. 유카는 아직도 이부키를 자신의 소유물인 장난감처럼 대한다.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자란 이부키는 싫다는 감정을 표현하고 사귀자고 말한다. 계급에 민감한 유카에게 이 일은 공포다. 반 친구들을 스스럼없이 대하는 이부키를 ‘행복이’라고 부른다. 만약 둘이 사귄다면 어떻게 될까 하는 걱정이 먼저다. 반에서 그녀는 언제나 이부키에게 촉각을 잔득 세우고 있다. 제3자가 보기에 그냥 사귀면 될 것 같은데 정체된 세상 속에 머물고 있는 그녀에게 이 일은 아주 힘들다.

 

유카는 자신의 신체에 불만이 많다. 같은 부류들이 내뱉는 일상적인 칭찬에 만족하지 못한다. 학급에서 일어나는 일상의 풍경은 감정을 배제한 채 보면 친구 사이의 조금 심한 농담처럼 보인다. 하지만 한창 사춘기를 지날 소녀들에게는 아주 큰 충격이다. 남들과 거리를 두고, 시선을 의식하면서 살아가는 유카에게 이 교실 속 계급은 그녀가 지닌 불안의 원천이다. 그녀는 자신이 관찰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잘 인식하지 못한다. 마지막에 노부코가 그 사실을 말할 때 그녀의 비겁한 행동이 어떤 아픔을 주었는지 잘 드러난다.

 

“소녀는 망상과 현실을 하나로 뒤섞어, 가슴에 뿌리내린 발정을 처리하지 못한 채 몸속에서 첫사랑이라는 괴물을 키우고 있다.” 이 문장은 유카의 현실과 걱정과 욕망을 그대로 표현한다. 이부키를 향한 마음을 왜곡시킨 것도 이 때문이다. 뒤틀어진 발정과 욕망이 벌이는 충격적인 장면은 아직도 강렬하다. 반의 계급과 놀림에 온몸으로 부딪히는 노부코를 아름답다고 말하고, 자신의 몸을 좀더 알게 되면서 일어나는 자각은 한 소녀를 한 명의 인간으로 성장시킨다. 그리고 이 성장은 멈춰 있던 마을의 개발과 터널의 개통 등과도 이어져 있다. 다른 작품도 시간 내어 한 번 읽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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