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몽전파사 소설Q
신해욱 지음 / 창비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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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을 잘 읽지 않는 나에게 신해욱이란 이름은 낯설다. 하지만 시인이 쓴 소설이라면 관심이 간다. 이 소설을 선택한 두 가지 이유 중 하나다. 또 다른 하나는 제목이다. 요즘은 보기 힘든 전파사란 단어가 나의 관심을 끌었다. 예전에는 무슨무슨 전파사란 상호를 단 가게가 참 많았다. 이제는 이런 가게를 찾기가 힘들다. 소설 속에 나오는 전업사란 단어는 더욱 희귀하다. 제목에서 약간 아련한 과거의 기억을 떠올려본다.

 

화자가 꾸거나 사거나 얻은 꿈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 마흔여섯 개의 꿈 이야기는 현실 속 진행만큼이나 많은 분량을 차지한다. 이 꿈 이야기를 읽다보면 어떤 순간에는 시를 읽는 듯한 느낌을 받을 때가 있다. 좀 더 차분하게 음미한다면 비현실적인 꿈 이야기를 다르게 볼 수도 있을 것 같다. 정신분석에서 다루는 꿈 이야기와 다른 각도에서, 전통적인 해몽과도 다른 방법으로. 아니면 꿈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방식으로 말이다. 이 꿈 이야기를 읽다가 어릴 때 꾸었던 수많은 꿈들이 잠시 머릿속을 스쳐지나갔다. 황당한 꿈부터 공포에 짓눌리거나 꿈속 주인공이 된 나의 모습 등.

 

화자는 우연히 해몽전파사에 간다. 고장난 드라이기를 고치려고 갔다가 꿈을 사거나 교환한다는 전단지를 본다. 그녀는 자신의 꿈을 들려주고 돈을 받는다. 이를 계기로 해몽전파사에서 열리는 갖가지 꿈 모임에 참석한다. 어느 순간에 그곳에서 일하는 사람이 된다. 자신의 꿈속 등장인물 같고, 자신이 진주씨라고 부르는 주인이 유방암에 걸리면서 한 가지 제안을 한다. 꿈을 천 개 모으면 해몽전파사를 넘겨주겠다는 말이다. 솔깃하지만 이 일을 성공하는데 얼마나 시간이 걸릴지 모른다. 불안정한 삶을 사는 그녀에게 매력적인 제안이기도 하다.

 

꿈 이야기는 나에서, 진주씨로, 설아씨로, 삼월씨로 이어진다. 해몽전파사가 의도한 바가 바로 이런 꿈을 공유하는 것이다. 꿈 이야기 사이에 현실이 비현실적으로 들어와 그들의 이야기를 한다. 대표적인 것인 삼월씨의 해월전업사 이야기다. 한 장의 사진과 주소, 존재하지 않는 가게와 기묘하게 느껴지는 꿈은숲 모임 하나. ‘꿈은숲’이란 이름은 화자가 등록한 1인출판사 이름이다. 작가는 등장인물들이 삶에 깊숙이 개입하기보다 간략하게 다루면서 어느 정도 거리를 둔다. 오히려 꿈 이야기가 더 앞으로 나온다. 하지만 이 꿈 이야기를 교환하면서 이들은 점점 가까워진다.

 

작가는 꿈 이야기만 엮으려고 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런 시도가 성공할 가능성은 아주 낮다. 책 속에서 나쓰메 소세키의 <몽십야>을 말하고, 실제 모임에서 이 책을 읽으려고 했다고 한다. 괜히 이 책에 관심이 간다. 페데리코 펠리니의 꿈 모음집이 있다고 하는데 어떤 내용일지도 궁금하다. 가볍게 읽을 수 있을 것이란 기대는 읽으면서 사라졌지만 읽기 힘든 책은 아니다. 다만 이해하는 것은 다른 영역이다. 읽을 때보다 지금 전체적인 이미지가 더 많이 내게 말을 건낸다. 소설 속 꿈이 아니라 나의 꿈들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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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왕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65
미셸 투르니에 지음, 이원복 옮김 / 민음사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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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툼한 분량에 결코 쉽지 않은 내용을 담고 있다. 천천히 읽으면서 많은 것을 생각해야만 그 재미를 충분히 누릴 수 있는 작품이다. 그런데 나의 독서법은 이런 완독과 숙독에 익숙하지 않다. 그리고 언제부터 생긴 것인지 잘 모를 미셸 투르니에에 대한 거부감은 솔직히 말해 진입 장벽을 높여놓았다. 아마 나 자신이 작은 욕심을 내지 않았다면 다른 책들처럼 오랫동안 책장에 묻혀 있었을 것이다. 그렇게 책더미 속에 묻힌 책들을 최근 한 권씩 꺼내고 있지만 쌓이는 속도를 뛰어넘을 정도는 아니다. 이 작품을 완독한 후 이전 같은 미셸 투르니에에 대한 거부감은 많이 사라졌다. 사놓고 묵혀둔 그의 책들이 다른 느낌으로 다가온다.

 

마왕. 슈베르트의 가곡이 먼저 생각난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판타지 소설 속 마왕이 먼저다. 이 소설은 판타지가 아니니 괴테의 시를 기반으로 쓴 가곡이 먼저다. 어딘가에서 한 번은 들어봤을 테지만 클래식은 잘 모른다. 읽다 보면 아벨 티포주의 일기가 나를 혼란스럽게 한다. 지독한 근시에 거구지만 음경왜소증에 걸려 있고, 아이들에 집착한다. 자신이 경험한 학창 시절 이야기는 세계를 상징으로 이해하게 만드는 계기가 되지만 현실에서 그는 자동차 정비소 사장이다. 시간대는 1939년, 2차 대전을 바로 코앞에 둔 시기다. 전쟁과 마왕, 잘 어울리는 조합이다. 그런데 한 소녀를 강간했다는 명목으로 잡힌다. 이때 독일이 침공해 징집되면서 풀려난다. 머릿속에 ‘뭐지?’하는 물음표가 하나 생긴다.

 

징집된 그는 통신병으로 일하다 포로로 잡힌다. 포로가 된 후 독일의 동프로이센으로 보내진다. 이곳에서 티포주가 보여주는 생활은 우리가 아는 포로병의 생활이 아니다. 밤에 포로수용소를 나가 산림감시관의 집에서 머무는 날이 있을 정도다. 이런 그가 로민텐으로 보내진 후 마주하는 사건들은 잊고 있던 첫문장의 ‘식인귀’를 떠올리기 충분하다. 괴링이 사냥터에 와서 보여주는 행동은 가장 원시적인 욕망의 표출이다. 권력은 가장 순수한 형태로 자신의 욕망을 드러낸다. 불편한 장면들이다. 이곳에서 티포주는 관찰자일 뿐이다. 전쟁포로인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제한적이다.

 

전쟁은 상황을 비현실적으로 만든다. 히틀러에게 그의 생일날 매년 바쳐진 50만 명의 소년, 소녀들의 모습을 보라. 칼텐보른은 10대 소년들을 징집해 소년병으로 훈련시킨다. 전쟁은 평범한 전쟁포로였던 티포주를 칼텐보른의 식인귀로 만든다. 물론 그는 작은 대리인일 뿐이다. 이 책 전체를 통해 계속 표현되는 티포주의 아이에 대한 관심과 집착은 징집으로 거대하게 부화한다. 말 탄 거인이 나타나면 끌려갈 수밖에 없다. 이때 그에게 공책 등이 주어지면서 이 일과 시간들을 다시 기록한다. 인종주의가 곳곳에서 살아 움직이고, 아이들은 제물처럼 다루어진다.

 

동프로이센 지역의 역사가 일부 나오고, 기사단들이 어떤 의미인지 말한다. 이것은 소년병들과 겹쳐진다. 중세의 기사단처럼 이 아이들도 전쟁에 동원되기 때문이다. 전쟁 상황이 점점 독일에게 불리하게 흐를수록 보급이 나빠진다. 티포주가 아이들의 머리카락으로 뭔가를 만들려고 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것이 나중에 아우슈비츠의 현실과 겹친다. 자신의 욕망이 거대한 악과 잠시 연결되었던 순간이다. 쌍둥이에게 끌렸던 그의 모습은 멩겔러와도 겹친다. 티포주의 관심은 작은 욕망에 머물지만 이것이 거대한 광기와 권력으로 이어지면 아주 참혹한 장면을 만들어낸다. 그 대표적인 공간이 아우슈비츠다. 티푸주가 구한 에프라임을 통해 이 사실이 드러난다.

 

이 소설은 무겁고 어둡다. 거대한 자연의 아름다움이나 아이들의 순수함이 잠시 빛을 발하지만 전쟁의 광기는 이것을 모두 삼켜버린다. 티포주를 닮았던 살인자를 단두대에 올렸을 때 보여준 프랑스 시민들의 모습은 또 다른 광기이자 식인이다. 이 광기가 더욱 확대된 곳이 독일제국이다. 소년병들을 전쟁에 투입하기 위해 훈련하는 과정에서 생긴 사고는 실제 전투에서 일어난 비극에 비할 바가 아니다. 악은 전면에 나와 싸우지 않고, 뒤에서 제물들을 조종할 뿐이다. 성 크리스토프 신화를 차용해 풀어낸 마지막 장면은 참혹한 자살 장면과 대비되면서 진한 여운을 남긴다. 잠시 나의 지나온 삶을 돌아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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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스 형사 베르호벤 추리 시리즈
피에르 르메트르 지음, 서준환 옮김 / 다산책방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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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사 베르호벤 시리즈 두 번째 작품이다. 첫 번째 작품인 <능숙한 솜씨>를 오래전에 읽었던 기억이 있다. 현재 <능숙한 솜씨>는 <이렌>이란 제목으로 개정판이 나왔다. 아마 시리즈를 이름으로 연결하려고 하는 모양이다. 이 작가의 특징 중 하나가 반전인데 이번에도 변함없이 당했다. 처음 한 여성이 납치될 때만 해도 납치범을 잡는 것으로 끝나나 했는데 새로운 살인과 사실들이 드러나면서 ‘뭐지?’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마지막 장을 덮는 순간까지 새롭게 밝혀지는 사실로 인해 이 거대하고 참혹한 연쇄살인을 다시 시각으로 보게 되었다.

 

한 여성이 있다. 그녀 이름은 알렉스다. 알렉스는 가발 가게를 좋아한다. 빨강머리 가발을 충동적으로 산다. 이 가발을 쓴 후 일상의 소소한 즐거움을 누리고 싶어 보지라르 거리의 레스토랑을 예약한다. 맛있게 먹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막차 운전수가 탈지 묻는다. 잠시 더 걷고 싶어 거절한다. 그리고 한 남자가 그녀에게 폭력을 가하고 납치한다. 그녀에게 집착하는 스토커인가 하는 생각이 먼저 든다. 아니다. 그녀는 어떤 지역의 창고 속에 갇힌다. 한 번 도망치려고 했지만 막다른 골목이다. 결국 그녀는 새장 같은 곳에 갇힌다. 몸의 움직임이 제한된다. 당연히 먹을 것도 없다. 새장에 가둔 후 말라 죽어가는 것을 보려는 목적이다.

 

그녀가 납치된 사건을 카미유에게 배당된다. 몇 년 전 아내 이렌이 죽은 후 깊은 절망에 빠져 있다. 이번 사건도 납치사건이다. 자신은 맡고 싶지 않지만 서장이 휴가 중인 다른 팀장 대신하라고 말한다. 유명 화가인 엄마의 임신 중 흡연 등으로 그의 키는 145센티미터다. 이 독특한 외양이 늘 시선을 끈다. 사건 현장에서 예전에 자기 팀원이었던 루이를 만난다. 현장을 둘러보지만 단서가 부족하다. 납치한 차량 번호도 모른다. 현장을 둘러보다 약국의 CCTV가 작은 단서를 보여주지만 부족하다. 납치된 사람의 신원도, 납치범의 정보도 없다. 막막한 수사가 시작된다.

 

알렉스와 카미유의 시점이 교차하면서 진행된다. 생존을 위해 몸부림치는 알렉스와 그녀를 찾고자 하는 카미유 팀원들의 수사다. 새장에 갇혀 꼼짝도 못하는 그녀에게 최악의 상황은 쥐들이 그녀를 먹이로 생각하고 접근하는 것이다. 잔혹한 장면을 상상하게 만든다. 먹을 것도 충분하지 않다. 죽지 않기 위해 그녀는 최선을 다한다. 쥐들과 싸우고, 기발한 아이디어를 생각해낸다. 납치범은 일정 시간이 되면 그녀를 찾아오고, 그녀의 망가진 몸을 찍는다. 자신이 생각한대로 된다고 해도 납치범이 찾아오면 아무 소용이 없다. 이 불안감과 긴장감이 점점 다가오는 쥐떼와 엮인다.

 

카미유 팀은 아무 것도 없을 것 같은 납치 사건에서 단서를 하나씩 찾아낸다. 카미유에게 이 사건은 과거 이렌 사건을 떠올리게 한다. 시간과 노력과 열정은 작은 단서로 용의자를 찾게 한다. 사건이 금방 해결될 것 같은데 아직 분량이 반이나 남았다. 그를 잡으려고 하는 순간 달아나더니 다리 난간에 뛰어내려 죽는다. 집 등을 조사하면서 실종된 아들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알렉스가 있는 곳을 빨리 발견하지 못하면 굶어죽을 수 있다. 조바심이 난다. 납치범의 정보를 조사하면서 그녀가 갇힌 곳의 단서를 발견한다.

 

알렉스는 용감하고 기발한 아이디어로 탈출한다. 형사들은 좀 늦게 도착했다. 이 엇갈림이 의미하는 바는 다음에 펼쳐지는 이야기에서 본격적으로 드러난다. 왜 그 남자가 알렉스를 납치하고 잔혹하게 말려죽이려고 했는지도. 또 그렇게 되기까지 어떤 일이 있었는지도. 엽기적인 살인의 흔적을 찾아낸 카미유가 연쇄살인이라고 생각하고 그 증거를 모을 때도 새로운 살인은 같은 방식으로 일어난다. 이렇게 잔인하게 사람들을 죽일 때는 분명 이유가 있다. 이 소설의 진정한 가치가 드러나는 대목이 바로 이 부분이다. 왜 이런 납치와 연쇄살인이 일어나게 되었는지, 그 이유를 과거 속으로 들어가 찾아낸다. 그리고 다시 이 글을 쓰면서 간단하게 훑어본 몇몇 장면에서 작가가 무심하게 적은 듯한 글에서 아픔과 슬픔을 느낀다. 이번에도 이 작가의 능숙한 솜씨에 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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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텍 이삭줍기 환상문학 2
윌리엄 벡퍼드 지음, 정영목 옮김 / 열림원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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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딕 환상소설이란 말에 혹했다. 영국인에 의해 불어로 쓰인 아라비아 이야기다. 많지 않은 분량이라 읽는데 그렇게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하지만 왠지 모르게 서평을 쓰려고 하니 쉽게 이야기의 이미지가 떠오르지 않는다. 개인적으로 재밌게 읽었고, 가독성도 좋은데 말이다. 기억을 더듬으면 몇 가지 이미지가 머릿속을 스쳐지나간다. 오감의 궁전이나 지적 욕망에 의해 등장한 악마를 공처럼 차는 장면이나 천오백 계단을 가진 탑 등의 이미지다.

 

사마르의 칼리프 바텍은 백성들의 사랑을 받는 지배자다. 그의 눈을 정면에서 본 사람은 죽는다고 한다. 자신의 분노를 조절하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오감의 궁전을 지어놓고 감각의 욕망을 채웠지만 지적호기심은 아직 부족하다. 어느 날 그에게 전달된 칼에 쓰인 글자의 뜻을 알고 싶어 학자들을 불러 모은다. 아무도 이해하지 못하고 수염만 태운다. 한 나그네가 이 칼에 적힌 문자를 해독한다. 왕은 더 많은 것을 알고 싶어 한다. 그런데 이 나그네의 정체가 평범하지 않다. 이 소설에서 가장 역동적이고 화려한 장면인 공처럼 변한 나그네를 칼리프와 백성들이 차는 장면이 이때 나온다. 이 비현실적인 장면이 비교적 쉽게 받아들여지는 것은 아라비안나이트의 효과 때문일 것이다.

 

왕의 욕망은 한 번 타오르자 멈추질 않는다. 잠시 이성을 찾아도 그의 어머니인 왕모 카르티스가 다시 부채질한다. 율법을 지키기보다 점성술과 흑마법 등으로 더 많은 욕망을 채우려고 한다. 악마의 유혹에 넘어가 지하 화염의 궁을 찾아가다 에미르인 파크레딘의 딸 누로니하르와 사랑에 빠졌을 때 현실에 만족하며 더 나아가질 않는다. 이 소식을 들은 카르티스는 다시 바텍의 욕망을 부채질한다. 아니 함께 떠난다. 이런 장면들 속에 선한 지니들이 나타나 다시 발길을 돌릴 수 있는 기회를 준다. 하지만 누로니하르의 욕망까지 합쳐지면서 끝없는 나락으로 빠진다.

 

이런 과정을 작가는 아라비안나이트 풍으로 풀어낸다. 카라티스가 흑마법을 부리는 탑은 고딕소설의 한 장면을 떠올리게 만든다. 마녀와 독과 주물들로 가득한 공간이다. 저주와 악독한 욕망과 죽음으로 가득하다. 위험한 왕을 구하기 위해 온 용감한 시민들을 어떻게 처리했는지 보면 얼마나 무서운 곳인지 알 수 있다. 바텍이 호기심을 채우기 위해 아이들 50명을 제물로 바치는데 왜 악마가 화를 내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이 이유는 다른 이야기와 엮이면서 해결된다. 더 많은 권능에 대한 욕심을 가득한 바텍 일행과 성장을 포기한 채 현실에 만족하는 아이들의 모습은 좋은 대비를 이룬다.

 

이야기는 마지막에 예상하지 못한 장면들을 보여준다. 바텍 등이 갈구했던 욕망을 먼저 얻은 선대가 어떤 고통과 괴로움 속에서 존재하는지 보여준다. 욕망의 충족이 형벌로 바뀌는 순간이다. 이 형벌은 끝없이 이어진다. 신들의 사자들이 바텍에게 몇 번의 기회를 주었지만 무시한 대가다. 우리 삶에서도 이런 경우가 적지 않다, 욕망에 무작정 휘둘릴 때, 참회하고 잘못을 되돌릴 마지막 기회를 차버릴 때 등이다. 이야기가 거칠게 진행되지만 섬세한 상상력은 읽는 재미를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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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신들의 요양보호사입니다 - 어느 요양보호사의 눈물콧물의 하루
이은주 지음 / 헤르츠나인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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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문학 번역가 이은주의 요양보호사 이야기다. 저자의 이력을 읽다보면 번역가의 삶이 결코 녹녹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다양한 일을 경험했는데 그 중 하나가 요양보호사다. 저자 자신도 요양보호사를 하게 된 계기가 봉사활동에서 시작했다는 사실을 적어놓았다. 자신은 이 일을 하게 된 이유로 사명감 때문이 아니라고 분명하게 말한다. 실제 이 사명감이란 단어는 많은 곳에서 사용되는데 그 노동에 종사하는 사람들을 억압하고 압박하고 피곤하게 만든다. 실제 이 일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책과 방송을 통해 조금은 알고 있다. 육체적인 문제 외에도 다른 문제가 있음을 조금씩 이 에세이 속에 녹여내었다.

 

이 책은 시간 순으로 전개되지 않는다. 요양보호사로 요양원에 있었던 이야기를 먼저하고, 봉사자에서 요양보호사로 되기까지 보여준다. 그 후 데이케어센터와 재가방문의 경험을 보여고, 자신의 생각들을 하나씩 풀어놓는다. 이 과정을 자신의 블로그에 기록해 놓았고, 출간을 생각하고 있었다고 말한다. 아마 그녀의 블로그에 실명 노출 등을 이유로 비방하는 글도 있었던 모양인데 이 책을 끝까지 읽은 나는 솔직히 실명 하나도 찾지 못했다. 19살 학생이 요양보호사가 되고 싶다고 단 댓글은 우리 사회가 요양보호사를 보는 시선이 그대로 담겨 있다. 결코 쉽지 않은 일임을 감안하면 그 학생을 나도 응원하고 싶다.

 

오래 전 큰아버지가 요양원인지 요양병원인지 정확히 알 수 없는 곳에 머문 것을 본 적이 있다. 마지막 임종 전에 본 모습과 열약한 환경에 깜짝 놀랐던 기억이 있다. 과연 이런 곳에 내 부모를 모실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현실은 그런 곳이라도 모실 수 있다면 다행이라는 분위기다. 직장 상사가 약한 치매가 있는 어머니를 모시면서 경험하는 일을 들려주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불만이 쌓여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현재 데이케어센터에 보내지만 집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작은 갈등들을 만드는 모양이다. 처음 예상한 것과 다른 환경에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 모양이다.

 

요양원에 부모를 보낸 사람들 중 상당수가 부모를 버렸다는 죄책감에 시달린다는 표현은 아직 우리 사회가 가진 한계일 것이다. 급속하게 늘어나는 노인 인구는 앞으로 더 많은 요양원 등을 필요로 할 것이다. 각박한 삶 속에 병든 부모님을 집에서 수발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재가방문 이야기를 읽다 보면 단순히 환자를 돌보는 것을 넘어 가사도우미 일도 같이 하는 느낌이다. 그리고 읽다 보면 요양원 등에서 요양보호사를 어떤 위치에 놓고 이야기하는지 조금씩 흘러나온다. 나이 많은 요양보호사가 대부분인 현실 속에서 전산입력 문제까지 있는데 이것은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해결되겠지만 과도기적인 조치가 필요할 것 같다.

 

“왜 요양보호사의 책임만 교육되고 보호자로서의 책임과 의무는 교육되지 않는가.” 이 문장은 우리 사회 곳곳에 뿌리내리고 있는 책임 전가 문제를 보여준다. 한쪽으로 책임을 넘기면 넘긴 쪽은 다른 한쪽을 비난하고 자신은 질책자로 남는다. 앞에서 말한 사명감 같은 것도 이 연장선에 있다. 강요된 사명감이 얼마나 큰 스트레스를 유발하는지 잘 안다. 요양원에 부모를 맡긴 다음에 제대로 찾아오지도 않는 보호자들을 떠올리면 이해가 쉽다. 저자는 요양인을 제우스와 뮤즈 등으로 부르면서 익명성을 띄우고, 그들의 삶을 공경한다. 비교적 젊은 나이에 조카손자까지 돌봐야 하는 저자의 삶이 좀 더 즐겁고 가벼웠으면 한다. 신에게 “사람은 왜 늙고, 병들어서 죽어야하는지 묻고 싶어진다.”고 한 말 속에 그녀가 마주한 수많은 요양인들의 아픔과 고통과 힘겨움 등이 묻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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