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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왕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65
미셸 투르니에 지음, 이원복 옮김 / 민음사 / 2020년 1월
평점 :
두툼한 분량에 결코 쉽지 않은 내용을 담고 있다. 천천히 읽으면서 많은 것을 생각해야만 그 재미를 충분히 누릴 수 있는 작품이다. 그런데 나의 독서법은 이런 완독과 숙독에 익숙하지 않다. 그리고 언제부터 생긴 것인지 잘 모를 미셸 투르니에에 대한 거부감은 솔직히 말해 진입 장벽을 높여놓았다. 아마 나 자신이 작은 욕심을 내지 않았다면 다른 책들처럼 오랫동안 책장에 묻혀 있었을 것이다. 그렇게 책더미 속에 묻힌 책들을 최근 한 권씩 꺼내고 있지만 쌓이는 속도를 뛰어넘을 정도는 아니다. 이 작품을 완독한 후 이전 같은 미셸 투르니에에 대한 거부감은 많이 사라졌다. 사놓고 묵혀둔 그의 책들이 다른 느낌으로 다가온다.
마왕. 슈베르트의 가곡이 먼저 생각난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판타지 소설 속 마왕이 먼저다. 이 소설은 판타지가 아니니 괴테의 시를 기반으로 쓴 가곡이 먼저다. 어딘가에서 한 번은 들어봤을 테지만 클래식은 잘 모른다. 읽다 보면 아벨 티포주의 일기가 나를 혼란스럽게 한다. 지독한 근시에 거구지만 음경왜소증에 걸려 있고, 아이들에 집착한다. 자신이 경험한 학창 시절 이야기는 세계를 상징으로 이해하게 만드는 계기가 되지만 현실에서 그는 자동차 정비소 사장이다. 시간대는 1939년, 2차 대전을 바로 코앞에 둔 시기다. 전쟁과 마왕, 잘 어울리는 조합이다. 그런데 한 소녀를 강간했다는 명목으로 잡힌다. 이때 독일이 침공해 징집되면서 풀려난다. 머릿속에 ‘뭐지?’하는 물음표가 하나 생긴다.
징집된 그는 통신병으로 일하다 포로로 잡힌다. 포로가 된 후 독일의 동프로이센으로 보내진다. 이곳에서 티포주가 보여주는 생활은 우리가 아는 포로병의 생활이 아니다. 밤에 포로수용소를 나가 산림감시관의 집에서 머무는 날이 있을 정도다. 이런 그가 로민텐으로 보내진 후 마주하는 사건들은 잊고 있던 첫문장의 ‘식인귀’를 떠올리기 충분하다. 괴링이 사냥터에 와서 보여주는 행동은 가장 원시적인 욕망의 표출이다. 권력은 가장 순수한 형태로 자신의 욕망을 드러낸다. 불편한 장면들이다. 이곳에서 티포주는 관찰자일 뿐이다. 전쟁포로인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제한적이다.
전쟁은 상황을 비현실적으로 만든다. 히틀러에게 그의 생일날 매년 바쳐진 50만 명의 소년, 소녀들의 모습을 보라. 칼텐보른은 10대 소년들을 징집해 소년병으로 훈련시킨다. 전쟁은 평범한 전쟁포로였던 티포주를 칼텐보른의 식인귀로 만든다. 물론 그는 작은 대리인일 뿐이다. 이 책 전체를 통해 계속 표현되는 티포주의 아이에 대한 관심과 집착은 징집으로 거대하게 부화한다. 말 탄 거인이 나타나면 끌려갈 수밖에 없다. 이때 그에게 공책 등이 주어지면서 이 일과 시간들을 다시 기록한다. 인종주의가 곳곳에서 살아 움직이고, 아이들은 제물처럼 다루어진다.
동프로이센 지역의 역사가 일부 나오고, 기사단들이 어떤 의미인지 말한다. 이것은 소년병들과 겹쳐진다. 중세의 기사단처럼 이 아이들도 전쟁에 동원되기 때문이다. 전쟁 상황이 점점 독일에게 불리하게 흐를수록 보급이 나빠진다. 티포주가 아이들의 머리카락으로 뭔가를 만들려고 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것이 나중에 아우슈비츠의 현실과 겹친다. 자신의 욕망이 거대한 악과 잠시 연결되었던 순간이다. 쌍둥이에게 끌렸던 그의 모습은 멩겔러와도 겹친다. 티포주의 관심은 작은 욕망에 머물지만 이것이 거대한 광기와 권력으로 이어지면 아주 참혹한 장면을 만들어낸다. 그 대표적인 공간이 아우슈비츠다. 티푸주가 구한 에프라임을 통해 이 사실이 드러난다.
이 소설은 무겁고 어둡다. 거대한 자연의 아름다움이나 아이들의 순수함이 잠시 빛을 발하지만 전쟁의 광기는 이것을 모두 삼켜버린다. 티포주를 닮았던 살인자를 단두대에 올렸을 때 보여준 프랑스 시민들의 모습은 또 다른 광기이자 식인이다. 이 광기가 더욱 확대된 곳이 독일제국이다. 소년병들을 전쟁에 투입하기 위해 훈련하는 과정에서 생긴 사고는 실제 전투에서 일어난 비극에 비할 바가 아니다. 악은 전면에 나와 싸우지 않고, 뒤에서 제물들을 조종할 뿐이다. 성 크리스토프 신화를 차용해 풀어낸 마지막 장면은 참혹한 자살 장면과 대비되면서 진한 여운을 남긴다. 잠시 나의 지나온 삶을 돌아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