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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오게네스 변주곡
찬호께이 지음, 강초아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20년 2월
평점 :
절판
아직 찬호께이의 대표작인 <13·67>을 읽지 않았다. 구해 놓고 두껍다는 이유로 뒤로 미루고 있다. 그 사이 다른 작품들을 읽었는데 <풍선인간>을 읽은 후 단편에 더 뛰어난 재능을 가진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이 생각은 이번 작품을 읽으면서 더 강해졌는데 대표작을 읽은 후 다시 바뀔지는 모르겠다. 뭐 이번 단편집이 작품활동 10주년을 맞아 작가가 엄선한 작품들이라고 하니 더 그럴 수도 있다. 실제 작가 후기를 보면 각각의 작품에 대한 설명이 자세하게 나와 작가의 의도를 알 수 있다. 가끔 이런 후기를 보는데 반갑고 재밌다.
습작이란 제목이 붙은 것을 포함해 총 열일곱 편이 실려 있다. 습작을 뺀 열네 편에는 ‘매 단편마다 클래식 음악처럼 순서를 정리하고 표제를 붙였으며 함께 들으면 좋은 배경음악’까지 골랐다. 솔직히 클래식 음악을 잘 몰라 한 번 들어봤는데 쉽게 이해되지는 않았다. 작가의 골수팬이고 더 깊은 재미를 알고 싶다면 한 번 전체를 듣고 비교하면 또 다른 재미를 발견할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이 열일곱 편은 장르와 분량이 모두 제각각이다. 하지만 한 가지 공통점은 있다. 이야기의 끝에 반전을 담고 있다는 것이다. 읽다보면 자연스럽게 그 반전이 눈에 들어오는 경우도 있고, 전혀 예상하지 못한 장면도 있다.
단편집을 읽으면 늘 그렇듯이 좋아하는 작품들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개인적 취향의 문제일수 있는데 <파랑을 엿보는 파랑>, <습작 1>, <올해 제야는 참 춥다>, <내 사랑, 엘리>. <습작 2>, <자매> 등이 더 재밌었다. <습작 1,2>는 각 두 쪽 분량이고, 키워드 다섯 개를 중심으로 쓴 엽편 소설인데 예상하지 못한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여기에 살을 조금만 더 붙이면 재밌는 단편 소설로 나올 것 같다. <올해 제야는 참 춥다>도 짧지만 가장 중요한 단서에 대한 부분이 눈길을 끌었다. 살짝 앞으로 가면 무심코 읽었던 대목이 새롭게 다가온다. <자매>는 어떻게 보면 빤한 내용일 수 있지만 꼬인 상황이 재밌었다.
첫 작품 <파랑을 엿보는 파랑>은 읽으면서 몇 번이나 바뀌는 분위기 때문에 쉽게 결말을 예상할 수 없었다. 교묘하게 상황을 편집해 놓고, 독자의 시선을 다른 쪽으로 유도한다. 서술트릭으로 풀어내면서 예상하지 못한 반전들을 단계적으로 풀어낸다. 가장 취향에 맞는 작품이다. 특히 마지막 문장이 강한 인상과 여운을 남겼다. <내 사랑, 엘리>도 중간에 바뀐 상황이 나를 재밌게 만들었다. 살인자였다고 생각한 인물이 바뀌고 숨겨져 있던 이야기가 드러나는 전형적인 구조지만 말이다. 찬호께이 단편을 읽으면서 이런 트릭들을 자주 만나는데 이런 설정을 아주 잘 마무리한다.
<추리소설가의 등단 살인>이나 <숨어 있는 X>는 분량이 좀 되는데 전편은 대담한 설정이지만 읽으면서 예상이 가능한 마무리였고, 뒤편은 집중해서 읽고 그 상황을 이해해야 그 과정을 따라갈 수 있는데 중간에 집중력이 조금 흐트러졌다. 아마 시간이 지나 다시 읽게 된다면 <숨어 있는 X>는 다른 재미를 발견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시간이 곧 금>도 예상된 반전이란 점과 판매한 시간에 대한 자세한 설명이 없는 것은 아쉽다. 철학적으로 읽는다면 좀더 다른 해석과 재미가 있긴 하다. <정수리>의 마지막 장면도 우리 삶을 돌아보게 한다. 주인공이 본 것이 우리 사회의 부정, 부패 등이라면 또 다른 해석도 가능하다.
<산타클로스 살인사건>은 흥미로운 이야기를 훈훈하게 마무리한다. <필요한 침묵>은 갑작스러운 마무리를 어떻게 해석해야할지 모르겠다. <가라 행성 제9호 사건>은 이야기를 꼬아놓았는데 취향을 조금 탔다. <커피와 담배>는 담배의 위험성을 잘 보여준다. <영혼을 보는 눈>은 영매가 보는 것의 이면을 다루는데 재밌지만 그 다음이 쉽게 눈에 들어온다. 이 단편집이 아니었다면 다른 느낌이었을 것 같다. <악마당 괴인 살해 사건>은 B급 감성이 가득하다. 일본 특촬물 느낌에 영웅은 악당이 필요하다는 부분을 잘 녹여내었다. 코믹한 발상과 현실적 문제가 잘 뒤섞여 있지만 왠지 작위적인 마무리란 느낌이 든다. <습작 3>은 다른 습작처럼 머릿속을 울리지 못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