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리된 기억의 세계
고바야시 야스미 지음, 민경욱 옮김 / 하빌리스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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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을 뒤지면 고바야시 야스미의 책이 한두 권 정도 있을 것이다. 죽이기 시리즈 이전에 사 놓은 책들 말이다. 물론 다른 소설처럼 묵혀만 두고 있다. 뭐 이런 책들이 한두 권이 아니니 더 말할 필요는 없다. <앨리스 죽이기>가 갑자기 인기를 얻었을 때 사려고 했다가 쌓인 책들 때문에 포기한 적이 있다. 뭐 전자책도 하나의 방법이니 나중에 생각해도 된다. 이 작가의 다른 작품을 읽지 않았지만 좋은 평을 얻고 있고, SF 미스터리라고 하기에 선택했다. 그리고 황당하고 놀랍고 재밌는 이야기 속으로 순식간에 빨려 들어갔다.

 

갑자기 사람들의 기억에 이상이 생긴다. 개인적인 편차는 조금 있지만 10분마다 기억이 사라진다. 10분 전에 있었던 일을 기억하지 못한다. 10분만 기억력이 유지되는 장기 기억 장애가 정말 갑자기 생긴다. 이 사실을 처음 발견한 인물은 여고생 리노다. 컴퓨터에 메모를 해놓았기에 이 사실을 알게 된다. 자신이 10분 전에 기록한 것도 믿지 못하다 손으로 쓴 후 자신의 글씨임을 깨닫는다. 리노의 엄마는 자신이 치매에 걸렸다고 생각한다. 이 심각한 상황에서 웃음이 나온다. 리노는 자신이 발견한 몇 가지 사실을 SNS에 올린다.

 

리노의 이야기 다음에 핵발전소가 나온다. 인류가 저지를 수 있는 최악의 재앙 중 하나가 핵발전소의 붕괴 등이다. 이 발전소에서 일하는 사람들도 10분이 지나면 10분 전 기억을 잊는다.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조작에 실수가 있으면 핵발전소에 문제가 생길 수 있다. 반복되는 상황, 약간의 진전, 악화되는 현실 등이 뒤섞인다. 이 상황의 한 장면은 코미디나 다름없다. 위급한 상황이란 것을 제외하면. 이 10분의 단기 기억을 어떻게 사용하는냐에 따라 상황이 달라진다. 리노가 메모를 통해 자신의 기억을 잃고 있다는 사실을 안 것과 달리 핵발전소는 컴퓨터 기록으로 문제를 해결한다. 그리고 교대인원들이 돌아오면서 안정을 조금씩 찾아간다.

 

이후 펼쳐지는 이야기들은 이런 장기 기억 장애가 발생했을 때 일어날 수 있는 각각의 에피소드들이다. 작가의 설정 중 재밌는 부분은 기존 인류는 이 사건이 발생하기 전 기억을 가지고 있고, 이후 태어난 사람들은 이런 기억이 없다는 점이다. 그리고 인류는 이 기억을 잃지 않기 위해 뇌와 접속 가능한 메모리칩을 만들어 삽입한다. 이 칩에 자신의 기억이 모두 저장되어 있다. 읽으면서 이런 기억을 모두 저장하려면 얼마나 큰 용량이 필요할까 하는 생각이 들었는데 이 부분의 설명은 없다. 다만 이 칩이 아주 강하고 범용이란 것만 알려줄 뿐이다. 특히 범용이란 부분은 누구나 자신의 몸에 다른 사람의 칩을 꽂을 수 있다는 의미다.

 

이후 이어지는 에피소드들은 칩을 잘못 끼운 사건이나 칩에 에러가 생긴 일이나 자식의 육체를 살리기 위해 자신의 칩을 넣는 등의 사건들을 다룬다. 여기서 철학적 질문들이 튀어나온다. 삶과 죽음, 영혼과 기억 등. 칩이 망가진 사람에 자신의 칩을 넣거나 죽은 사람의 칩을 살아있는 사람의 몸에 넣는 등의 일이 생긴다. 개인의 정체성 문제가 생긴다. 육체를 빼앗은 칩의 기억의 주인은 과연 살아 있는 것일까? 그럼 그 몸을 빼앗긴 사람은 죽은 것일까? 그의 칩이 파괴되지 않고 보관된 상태라면? 다양한 가능성이 사고 실험으로 펼쳐진다. 독립된 이야기처럼 진행되던 것이 조금씩 하나로 이어진다.

 

이 소설의 읽으면서 몇 가지 설정들이 머릿속을 스쳐지나갔다. 하나는 판타지에서 자주 나오는 이혼대법이나 환생하여 다른 사람 몸에 들어가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공각기동대>의 전뇌 같이 데이터의 이전이다. 이 소설 속 설정은 후자에 더 가깝다. 전자의 경우 여러 번 몸을 옮겨다니면서 생기는 부작용 등을 말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 소설도 여러 칩을 넣으면서 생긴 기억들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마지막에 가면 <메트릭스>가 생각나는 장면도 나온다. 이렇게 적고 보면 짜깁기처럼 보이지만 작가는 인류 전체의 기억이 10분 정도만 유지되는 사건이 일어나면 무슨 일이 벌어질까? 란 부분에 더 집중하고 있다. 가독성 좋은 문장과 흥미롭고 의미심장한 설정 등은 당연히 이 작가의 다른 작품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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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니어스 게임 미래인 청소년 걸작선 64
레오폴도 가우트 지음, 박우정 옮김 / 미래인(미래M&B,미래엠앤비)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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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선택한 이유는 단 하나다. 이 작가의 <고스트 라디오>를 재밌게 읽었기 때문이다. 다 읽고 난 후 이 책이 시리즈로 나온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현재 3권까지 나왔다. 아마 이 사실을 알았다고 해도 선택했을 것이다. 다음 이야기를 기다리면 되니까. 지니어스 게임 뒤에 숨겨진 거대한 음모를 다룬 SF 스릴러라니 더욱 관심을 끌었다. 내가 좋아는 장르들이니까. 실제 이 소설은 재밌다. 천재들이 보여주는 멋진 장면들은 정말 그 정도일까 하는 의문이 들지만 영화로 만들어진다면 화려한 연출이 가능할 것이다.

 

전세계 18세 이하 컴퓨터, 공학 천재들 200명에게 지니어스 게임 초대장이 날아온다. 이 게임은 제2의 스티브 잡스로 불리는 온드스캔 CEO 키란 비스와스가 주체한 것이다. 키란은 인도 청년으로 엄청난 부를 가지고 있고, 세계적인 유명인사다. 이 게임은 초대장을 받아야만 참석할 수 있다. 그런데 이 소설의 주인공 중 한 명인 렉스에겐 오지 않는다. 렉스, 카이, 툰데 등은 인터넷 친구이자 하나의 모임을 이끌고 있다. 카이는 중국 소녀로 페인티드 울프란 닉네임으로 중국 권력자들의 부정부패를 추적해 폭록한다. 툰데는 14세 나이지리아 소년인데 공학 천재다. 고물로 작은 태양광 발전기를 만든다. 렉스는 멕시코계 미국인이고 천부적인 컴퓨터 프로그래머이자 해커다. 초대장을 받지 못한 렉스가 첨석하는 방법은 해킹으로 정보를 조작한 것이다.

 

렉스가 이 게임에 참석하고 싶은 것은 어느 날 갑자기 사라진 형을 찾을 프로그램을 돌리기 위해서다. 이 프로그램을 돌리기 위해서는 양자컴퓨터가 필요하다. 툰데는 나이지리아 실권자 이야보 장군이 요구한 전파 차단기 장치를 만들어야 한다. 실패하면 부모와 마을 사람들의 생명이 위험하다. 카이는 키란이 중국에서 직접 자가용 비행기로 태워서 온다. 왠지 그녀의 정체를 알고 있는 듯한 분위기다. 그녀가 폭로한 정보들은 부패한 정치가와 공무원에게 큰 위협이다. 실제 키란은 페인티드 울프를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상당히 공을 들인다.

 

초반부는 이 세 아이들의 현실을 보여주는데 집중한다. 그들의 일상과 도전이 풀려나온다. 게임 장소로 오면 새로운 천재들이 등장한다. 다양한 분야의 천재들이 이 게임에 초대받았고, 그들은 키란이 제시한 문제를 풀어야 한다. 카이의 팀이 가장 앞서 나가는 데는 카이의 카리스마가 큰 힘을 발휘한다. 상황 전체를 보고 기억력의 한계를 영상으로 채운다. 분장과 상황 파악에 탁월한 능력을 보여준다. 아직 그녀의 재능이 모두 드러나지 않은 것 같다. 단순히 이런 능력만으로 세계적인 거부가 그녀를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이기에는 부족한 듯하다. 이야기가 더 진행되면 그 이유가 나오지 않을까 생각한다.

 

후반부에 문제를 풀어가는 과정과 각 단계에서 그들이 보여주는 창의성과 깊은 지식은 보는 내내 놀랍고 즐겁다. 천재에 약간 부정적인 나도 과연! 이란 감탄사를 자아낸다. 그리고 다시 코딩을 생각하게 된다. 내가 전혀 하지 못하는 분야 중 하나가 코딩이다. 렉스를 비롯한 수많은 프로그래머들은 코딩으로 자신이 생각한 바를 프로그램으로 구현해낸다. 사라진 형을 찾는 프로그램도 마찬가지다. 주인공들이 청소년이라 그런지 자극적인 장면들은 거의 없다. 각 페이지에 들어 있는 그림들은 어떻게 보면 정신없다. 자세히 보면 다른 것이 보이지만. 이 대회에 참석한 세 명의 주인공들은 각자 자신들에게 주어진 일을 마무리해야 한다. 렉스는 형을 찾는 프로그램을 돌려야 하고, 툰데는 이야보 장관의 위협을 넘어서야 하고, 카이는 키란의 숨겨진 의도를 폭로하거나 멈춰야 한다. 이들은 서로 협력하고, 도와주면서 앞으로 나아간다. 1권의 마지막을 보면서 다음 권에서는 어떤 이야기가 화려하게 펼쳐질지 궁금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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칵테일, 러브, 좀비 안전가옥 쇼-트 2
조예은 지음 / 안전가옥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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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전가옥 쇼-트 시리즈의 두 번째 책이다. 작가의 수상이력 등이 눈길을 끌어 선택했다. 이전에 안전가옥의 앤솔로지를 재밌게 읽은 기억이 있다. 실물을 받았을 때 예전 작은 문고판이 떠올랐다. 시집보다 작고 분량도 많지 않아 휴대하기 딱 좋다. 표지의 심플함은 또 어떤가. 이런 외형적 모습을 뒤로 하고 책속으로 들어가면 예상하지 못한 설정의 이야기들이 튀어나온다. 잔혹하고, 애잔하고, 기발하고, 운명적인 이야기들 말이다.

 

<초대>는 흔한 남녀의 애정 싸움 같은데 후반부로 가면서 분위기가 완전히 바뀐다. 기묘한 초대와 초대한 장소에서 벌어지는 행위는 서늘하고 잔혹하다. 어떻게 보면 잔혹에 대한 각성이고, 기존 남성에 대한 반발이다. 이 소설 속 두 여인을 중심으로 다른 이야기도 만들어 주었으면 좋겠다. <습지의 사랑>은 물귀신과 숲 귀신 이야기다. 물과 숲은 곁에 있지만 직접 만날 수 없다. 하지만 비가 많이 오고 습지가 범람하면 다르다. 널 서로 보기만 하던 두 귀신은 이렇게 만난다. 이름이 없던 물귀신에게 여울이란 이름까지 붙여준다. 이들에게 아주 큰 위험이 닥친다. 바로 개발이란 폭력이다. 그리고 개발의 폭력 속에 드러나는 사실 하나는 강한 인상과 여운을 남긴다.

 

표제작 <칵테일, 러브, 좀비>는 제목에 나오듯이 좀비물이다. 그런데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그런 좀비가 아니다. 제약회사 영업사원이었던 아빠가 좀비가 되었는데 그 진행단계가 아주 더디다. 엄마가 차려주는 밥상에 앉아 먹으려는 행동을 반복한다. 먹지는 못한다. 보통의 좀비 소설이라면 가족들이 모두 좀비화되고, 살기 위해 발악을 해야겠지만 이 소설에는 그런 장면이 없다. 좀비가 된 아빠를 숨기고, 자신의 일상의 되풀이할 뿐이다. 마지막에 좀비가 된 아빠를 처리하는 행동으로 옮긴 이는 엄마다. 좀비가 생긴 원인과 좀비에게 물린 사람을 다시 되돌리는 방식이 코믹하다.

 

제2회 황금가지 타임리프 공모전에서 우수상 수상작인 <오버랩 나이프, 나이프>는 운명을 생각하게 만든다. 아버지가 사업에 실패한 후 술로 지내다 어머니를 과도로 죽인다. 아들이 그 과도로 아버지를 죽인다. 그리고 자신은 자살하려고 한다. 이때 누군가 말한다. “시간을 되돌려 줄까?” 나 여성이 수개월째 스토킹을 당한다. 한 남학생 덕분에 스토커에게서 벗어난다. 그와 연인이 된다. 그런데 그가 스토커에게 죽는다. 그때 누군가가 말한다. “시간을 되돌려 줄까?” 이 둘은 세 번의 기회를 가진다. 시간을 되돌리지만 실패한다. 남은 기회 안에 성공할까? 잔혹하고 비정하고 슬픈 이야기가 운명의 고리를 끊으려는 노력을 비웃는다.

 

네 편의 단편 소설이 이 작가에 대한 관심을 불러온다. 장편 소설도 있는데 언젠가 시간 나면 한 번 읽어봐야겠다. 스릴러나 공포 쪽에 상당히 재능이 있는 것 같다. 작가의 첫 작품이 문학상 수상을 했다는 점에서 이 기발함을 계속 유지했으면 한다. 잔혹함이 곳곳에 스며있지만 그 아래에 깔린 애잔함과 일상의 무거움은 조용히 가슴속으로 파고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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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관을 떠나는 책들을 위하여 - 2020년 제16회 세계문학상 수상작
오수완 지음 / 나무옆의자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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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전 <책 사냥꾼을 위한 안내서>란 소설을 읽었었다. 그 당시 한창 책들을 모으던 시기라 제목부터 끌렸던 기억이 난다. 그 당시 서평을 찾아 다시 읽어보니 책에 대한 풍부한 이야기에 빠졌던 것이 눈에 들어온다. 그런데 이번 소설은 아예 가상의 도서관에 소장된 가상의 책들을 나열하는 방식으로 이야기를 풀어낸다. 책을 읽으면서 몇 편은 혹시 하는 심정으로 검색을 하기도 했다. 당연히 검색 결과는 나오지 않았다. 나의 시선을 가장 끈 부분은 다양한 책들의 표지와 각 책들의 소개문 혹은 감상문이다. 혹시 책 표지라도 다른 사람이 그렸나 하고 찾아봤지만 보이지 않았다. 32권의 책들을 작가가 직접 만들어낸 것이다.

 

미국 호펜타운이란 도시에 반디멘 재단 도서관이 있다. 물론 가상의 도시와 도서관이다. 이 도서관은 어디에도 없는 책들을 위한 도서관이다. 이 도서관에는 사람들이 직접 쓴 원고로 책을 만들어 기증했다. 사가본이라고 하는데 도서관이 재정난과 장서 부족으로 문을 닫게 되면서 이 사가본을 기증자들에게 다시 돌려주었다. 일부는 받을 사람이 연락되지 않아 돌려주지 못한다. 이 소설 속에 나오는 책들은 빈센트 쿠프만(VK)란 인물이 기증한 책들이다. 사서인 머레이와 잠시 나눈 대화 속에 그가 책도둑이었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이 소설은 VK가 제공한 책들의 카탈로그이자 존재하지 않는 책에 대한 환상을 담고 있다. 그리고 다양한 장르와 제본 등으로 멋진 각각의 책 이야기를 풀어낸다.

 

‘당신이 읽을 수 없는 100권의 책’이란 책이 나온다. 이 100권의 목록이 순전히 가짜라는 사실을 말하는데 이것은 이 소설 속 32권의 목록에도 적용된다. “아마 그는 자신이 상상한 책들을 함께 상상하고 그 책의 내용을 떠올리며 즐거워할 누군가가 한 한 명이라도 있다면 그걸로 족하다고 여겼을 것이다.” 라고 말하고 한 발 더 나아가 “독자가 자신만의 환상적이며 사실적인 책들의 목록을 만들기를, 그리고 그 책들을 찾아 나서기를, 즉 그것을 직접 쓰기를 바랐을 지도 모른다.”고 강조한다. 이런 점에서 이 소설은 작가가 목록을 만들고, 책을 찾아 나선 끝에 직접 쓴 책이다. 어느 특정한 한 장르에 매몰되지 않고 다양한 장르와 형식을 실험적으로 상상해내면서 말이다.

 

32권의 책 카탈로그 사이에 이 도서관과 관련된 사람들의 사연이 간단하게 삽입되어 있다. 카탈로그의 그림을 담당한 레나나 자신의 아이를 도서관에 두고 가는 요코나 요리사나 마약 판매인으로 오해를 하는 인물 등이 바로 그들이다. 가끔 이들을 오해하면서 생긴 에피소드가 책 이야기 너머의 사람 이야기를 들려주고, 사람의 향기를 풍기게 만든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는 것은 역시 32권 책 이야기다. 표지, 저자, 역자, 출판사, 출간연도 등의 정보는 왠지 모르게 있을 것 같은 착각을 하게 만들고, 책 감상문 등은 존재하지 않는 책에 대한 호기심을 불러온다.

 

처음에는 설마 책 정보로 가득할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어느 순간 이 책 감상문이 호기심과 재미를 불러왔다. 기발함과 풍부한 정보들은 어딘가에서 본 듯한 느낌을 주고, 존재하지 않는 책들은 현실과 이어져 새로운 이야기를 만든다. 책 이야기 다음에 이 책을 읽거나 훔치려는 사람이 나오는 것도 그 때문이다. 이것은 나중에 가상의 경매를 통해 새로운 주인을 만나게 만드는데 이 또한 가상의 주인이다. 읽으면서 무심코 지나간 몇 가지 사실들은 나중에 책을 복기하면서 새롭게 다가온다. 32권의 책 표지 일러스트를 보면서 작가의 전공이 무엇인지 궁금했는데 한의사라고 한다. 어딘가에서 본 듯한 몇 편의 설정들은 나중에 한 번 원 이야기를 찾아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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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척도
마르코 말발디 지음, 김지원 옮김 / 그린하우스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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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려한 광고 문구를 내놓은 책이다. 다 빈치 사후 500주년 기념작이란 광고다. 사실 이런 광고 문구는 누구나 사용이 가능하다. 다 빈치에 대한 소설을 쓴 작가라면 누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광고에 혹하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역사소설과 미스터리의 완벽한 결합이란 문구는 팩션으로 간단히 치환가능하다. 하지만 매혹적인 르네상스 인물 레오나르도 다 빈치라면 더 호기심이 생길 수밖에 없다. 몇 년 전에는 <다 빈치 코드>란 소설이 세계적으로 큰 흥행을 했던가. 그가 남긴 노트가 얼마나 높은 가격에 경매를 통해 판매되었던가. 그에게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다면 그냥 지나갈 수 없는 문구다.

 

처음에는 <다 빈치 코드> 같은 빠른 전개와 미스터리로 가득할 줄 알았다. 이 기대는 몇 쪽을 읽지 않아 사라졌다. 다른 서평에서 본 것처럼 20쪽까지 등장인물 소개가 나온다. 이런 친절한 소개가 예전에는 책을 읽으면서 찾아보며 누군지 확인했지만 언제부터인가 게을러졌다. 만약 한두 쪽이었다면 그랬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몇 쪽에 걸친 소개라니. 낯선 이름과 역할 등은 솔직히 쉽게 머릿속에 들어오지 않는다. 이 당시 역사를 좀 안다면 이 소개가 소설을 이해하는데 더 쉽고 더 많은 도움을 줬을 것이다. 단편적으로 이 시대와 인물을 기억하고 있기에 이 등장인물이나 상황이 체계적으로 다가오지는 않았다.

 

1493년 가을 루도비코 일 모로의 궁중에서 시체가 발견된다. 외상이나 독물 중독의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 전염병을 의심한다. 이 시대에 가장 무서운 것은 전염병이다. 과학이 현재처럼 발전하기 전이다 보니 점성술에 의지하는 바가 크다. 20세기 초까지 의사들의 주 치료 방법이 사혈법이었던 것을 떠올리면 이 시대를 더 이해하기 쉬울 것이다. 다행이라면 해부를 해본 레오나르도가 그 곳에 있었다는 것 정도다. 그는 시체가 어떻게 죽었는지 해부를 통해 안다. 시체의 정체도. 나중에 이것이 잠깐 그에게 의심을 불러온다.

 

그 당시 경제, 정치에 대한 설명과 묘사가 많은 부분을 차지한다. 밀라노 공국은 경제 호황과 정치적 번영기를 거치고 있고, 다른 국가들로부터 시기와 질투를 불러온다. 재밌는 것은 레오나르도가 발명한 장치가 와전되어 상대국에 공포로 자리잡았다는 설정이다. 다 빈치의 공책을 노리는 무리가 등장한다. 그의 아이디어가 담긴 공책이다. 이것을 얻으면 밀라노 공국을 쉽게 공격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다른 한 편으로 밀라노의 경제를 파탄 내려는 세력이 있다. 가짜 신용장을 바탕으로 하는 작전이다. 이 부분은 경제학의 가장 기본을 잘 보여준다. 화폐란 상호신뢰를 바탕으로 한 교환가치란 사실을 말이다.

 

소설의 많은 부분에서 레오나르도의 일상을 보여준다. 그의 노트를 훔치기 위해 남색가란 소문을 이용해 남자가 유혹하는 장면은 한 편의 코미디다. 작가의 상상력이 가미된 몇 가지 에피소드는 이렇게 소소한 재미를 준다. 계속해서 나의 관심을 끈 것 중 하나는 그가 일 모로를 위해 만들고 있던 청동기마상이다. 결과부터 말하면 그는 실패했다. 청동의 가치와 계산 착오 때문이다. 이런 역사적 사실을 작가는 상상력을 동원해 하나의 사건으로 만든다. 현대 과학에 너무 익숙한 우리가 가끔 망각하는 몇 가지 일들 중 하나가 이런 기계 장치나 조각상들이다.

 

앞에서 말했듯이 빠른 전개도 장면 전환이 빠르지도 않다. 비슷하고 낯선 이름은 기억하기도 힘들다. 하지만 익숙해지고 느리지만 점차 의도가 드러나는 상황들은 읽는 재미를 조금씩 높여준다. 그 시대에 대한 충실한 설명과 해설은 이런 이해를 높인다. 물론 가끔 작가가 너무 상황을 현대 용어로 해석하면서 생기는 돌출이 아쉽지만 말이다. 화려한 광고 문구에 비해 레오나르도의 위대함은 그렇게 부각되지 않고 인간적인 모습이 더 눈에 들어온다. 인간의 척도란 제목과 다 빈치의 청동기마상 제작 실패는 왠지 이어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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