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강빵과 진저브레드 - 소설과 음식 그리고 번역 이야기
김지현 지음, 최연호 감수 / 비채 / 2020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언어란 참 묘한 힘을 가지고 있다. 이 책의 제목인 생강빵과 진저브레드는 같은 의미인데 무심코 들여다보면 다른 의미로 다가온다. 이런 일은 번역 책을 읽다 보면 자주 만나게 된다. 외국 음식일 경우 그 나라 언어로 표기하면 완전히 낯선 음식으로 다가올 때가 많다. 그 단어를 익숙한 한국어로 번역하면 아! 하고 금방 아는 경우도 많다. 최근에는 이런 단어들에 관심이 많이 줄었지만 예전에는 나도 저자처럼 이 음식이 뭐지? 하는 의문을 많이 가졌다. 음식뿐만 아니라 의상이나 화장 등도 마찬가지다. 이제는 외국어에 익숙해져 번역이 오히려 낯선 경우도 있다.

 

부제로 ‘소설과 음식 그리고 번역 이야기’가 붙어 있다. 읽으면서 나에게 가장 많이 다가온 것은 소설의 감상을 음식과 연결시킨 문학 에세이란 부분이다. 번역도 당연히 나올 수밖에 없다. 번역된 책 속에 나온 음식들과 그 출처인 소설을 엮어 풀어내었기 때문이다. 각 이야기의 시작 부분에 소설의 한 부분을 인용하는데 그 속에 음식 이름이 들어 있다. 첫 음식인 검은 빵의 경우 러시아 소설을 읽을 때 사모바르와 함께 나의 호기심을 강하게 끌었던 빵이다. 얼마나 딱딱하기에 먹기 힘들다는 표현을 썼을까 하는 의문과 그 시대를 몰라 나중에 몸에 좋은 최신 빵과 헷갈렸던 기억이 있다. 저자도 이 부분을 분명하게 지적한다.

 

책의 구성은 빵과 수프와 주요리와 디저트 등으로 꾸며져 있다.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땅콩버터와 잼 샌드위치 이야기는 나의 식성과 맞아 떨어지는데 왠지 이 샌드위치를 떠올리면 미국 영화나 드라마 속 학교 식당 풍경이 떠오른다. 단추 수프의 경우 다른 버전의 이야기를 본 적이 있었는데 민담이란 사실을 몰랐었다. 서양의 문학에서 자주 보게 되는 거위 구이는 한국에서는 아주 낯선 음식이다. 치킨이라면 모를까. 월귤도 마찬가지다. 이름은 들어본 적이 있는데 그 이미지가 바로 떠오르지 않는다. 저자도 지적했듯이 오히려 번역이 더 혼란을 가져오는 경우도 있다. 번역가의 고뇌가 떠오르는 대목이기도 하다.

 

시대가 바뀌면서 음식에 대한 대우가 완전히 달라진 두 음식이 나온다. 하나는 거북 요리고, 다른 하나는 바닷가재 샐러드다. 바닷가재의 경우는 다른 책 등에서 자주 봐 낯익지만 거북 요리를 서양인들이 먹었다는 사실과 대중적인 요리였다는 부분은 아주 낯설다. 저자도 언급했듯이 용봉탕이나 자라탕이 떠올랐지만 다른 식감과 요리법이다. 뭐 이제는 약간 혐오 음식이 된 듯하다. 향신료 이야기는 독점무역과 연결된다. 향료전쟁이 벌어졌을 정도고, 아메리카 대륙의 발견도 이 때문이라고 하지 않는가. 이제는 우리가 너무나도 쉽게 구할 수 있었던 식재료들이 과거엔 엄청난 고가였다는 사실은 또 다른 기억으로 이어진다. 과학과 산업의 발전 등으로 예전에는 엄청난 고가였던 것들이 현재는 누구나 소유하는 물건으로 바뀐 경우가 주변에 허다하다.

 

음식과 번역 이야기로 읽어도 좋지만 읽다 보면 저자의 추억과 책에 대한 감상이 더 눈에 들어온다. 아쉬운 점 중 하나는 이 책들 중 내가 읽은 책이 얼마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아마 몇 권은 나중에 읽을 기회가 있겠지만 상당수의 책들은 취향과 멀리 떨어져 있다. 솔직히 이전에 관심을 두지 않았거나 몰랐던 책에 대한 호기심을 강하게 불어온 책도 있다. 애니 등으로 먼저 만나 소설에 대한 흥미가 사라진 작품도 있다. 그때는 그 음식에 그렇게 관심을 두지 않았는데 저자의 글을 읽다보니 새로운 부분들이 눈에 들어온다. 책 속에서 음식 하나는 작은 단어 하나일 수 있지만 이 작은 단어가 누군가에게는 새로운 세상으로 인도하는 문이 되기도 한다. 소설, 음식, 번역에 대한 좋은 책 한 권이 나왔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이노센트 와이프
에이미 로이드 지음, 김지선 옮김 / 흐름출판 / 2020년 4월
평점 :
절판


영화, 소설 등의 다양한 매체에서 우린 연쇄살인범에 매혹된 여성들을 본다. 이들은 옥중에 갇힌 그들과 결혼하거나 자신이 가진 것을 가져다준다. 일반적으로 볼 때 이 모습은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많이 일어난다. 여자란 표현을 썼지만 남자들도 마찬가지다. 여자 살인자가 예쁘다고 인터넷 상에서 환호하는 모습을 얼마나 많이 보았던가. 잘 생기고 예쁜 이성에게 끌린 그들은 냉정한 판단보다 감정에 더 휘둘린다. 순간의 감정이 아니라는 부분이 문제다. 이 소설의 주인공 서맨사도 그런 인물 중 한 명이다.

 

서맨사는 영국에서 교사로 일한다. 미국 감옥에 갇힌 사형수 데니스 댄슨의 기록을 읽고 무죄라고 생각한다. 데니스에게 편지를 보낸다. 이렇게 되기 전 그녀는 남자 친구 마크와 헤어졌다. 아주 감성적인 상태에 놓여 있는데 다정한 답장이 온다. 둘은 편지를 주고받으면서 서로의 감정을 쌓아간다. 그러다 샘은 미국 앨투나로 넘어가 데니스를 직접 만난다. 이 과정에 데니스의 무죄를 믿고, 재심을 받길 바라고, 그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찍는 캐리와 동행한다. 이 일련의 과정 속에서 샘은 허술했던 초기 수사과정을 보게 된다. 작가는 구석구석에 그의 무죄를 옹호하는 유명 연예인들의 실명을 집어넣어 현실성을 부여한다.

 

칸막이 막힌 두 사람의 면회는 안전하지만 간절하다. 데니스의 어릴 때 친구의 등장으로 질투를 느끼는데 데니스가 청혼한다. 기쁘게 승낙한다. 이 일은 캐리 등에게도 큰 즐거움이다. 감옥에서 결혼식을 올리고, 다큐 촬영은 이어진다. 그러다 새롭게 나온 증언으로 데니스의 기소가 재검토된다. 무죄를 인정받아 사면된다. 그의 무죄를 기원한 사람들의 축복 속에 감옥에서 나오고, 신혼부부를 위한 멋진 호텔을 잡아둔다. 기대했던 두 남녀의 열정적인 사랑은 없다. 샘의 바람은 피곤하고 익숙하지 않다는 데니스의 말에 그대로 사라진다. 둘의 육체적인 결합은 이후로도 오랫동안 이어지지 않는다. 이 때문에 다양한 가능성이 머릿속을 스쳐지나간다.

 

감옥에 20년을 갇혀 있다가 무죄로 풀려난 인물은 언론의 주목을 받을 수밖에 없다. 자서전 판권이 높은 가격에 팔리고, 수많은 물품이 그에게 선물로 도착한다. 샘이 자신의 낡은 노트북과 신형 에어북을 비교하는 장면은 강한 대비를 이룬다. 20년 동안 얼마나 세상이 변했는지 알려주는 기계와 유행어들은 말할 것도 없다. 데니스에게는 낯설고 신기한 것이지만 샘에겐 일상이다. 놀라운 장면 중 하나는 무죄로 갇혀 있던 시기에 대한 보상금을 데니스가 너무나도 쉽게 자신을 도와준 단체에 기부한 부분이다. 최소한 그가 금전적인 욕심이 강한 인물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 하지만 갑자기 고액이 생기면서 일어나는 무분별한 쇼핑도 같이 보여준다.

 

부부라고 말하지만 실제 이들은 동거인에 가깝다. 샘은 데니스를 갈망하지만 데니스는 그녀를 욕망하지 않는다. 운동하면서 음악을 듣겠다고 하지만 이어폰을 가져가지 않고, 달리기를 하러 갔다 왔는데 땀 냄새가 없다. 이런 행동은 데니스의 실체에 의혹을 가지게 만든다. 여기에 샘이 전 애인 마크에게 뭔가 나쁜 행동을 한 것이 암시되면서 그녀가 느끼는 감정의 사실 여부를 의심하게 만든다. 불안한 심리는 데니스가 대중들에게 자신의 생각을 표출할 때 더 강해진다. 그가 풀려난 이유 중 하나가 백인이기 때문이라고 했을 때 자신은 사형수 감방의 유일한 백인이라고 대응한다. 엇나간 대응과 감정의 폭주는 언론의 먹잇감일 뿐이다.

 

본격적인 긴장감이 고조되는 부분은 3부 레드 리버에 오면서부터다. 데니스가 보여주는 모습과 샘이 느끼는 감정의 괴리감이 커진다. 옛 친구의 방문은 불안감과 질투를 불러오고, 동네 사람들의 시선을 결코 좋지 않다. 이런 상황 속에서 샘의 심리 묘사가 극단적으로 치닫는다. 행복과 공포 사이의 감정이 시간의 흐름 속에 이어진다. 점점 속도감이 올라가고, 예상하지 못한 사건이 벌어진다. 마지막 파국의 장면은 반전의 연속이고, 진실의 파편이다. 앞에 설정한 장치들이 다시 반복되면서 강한 여운을 남긴다. 예상한 것 보다 더 큰 긴장감과 재미를 준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밥이 그리워졌다 - 인생이 허기질 때 나를 지켜주는 음식
김용희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20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 책을 읽으면서 음식과 관련된 기억들을 많이 불러왔다. 첫 이야기 칼국수는 만드는 법에서 나와 다른 기억을 보여주지만 그 옛날 한 장면을 영화처럼 떠올려주었다. 이 기억이 정말 맞는지 자신할 수 없지만 학창시절 먹었던 음식들은 나이가 들면서 새롭게 다가온다. 음식은 문화이자 기억이라고 말했듯이 각각의 집들은 자신만의 방식으로 요리를 하고, 식구들을 먹였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의 1부는 가장 따스한 기억과 감동을 전해준다. 물론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은 작가와 다른 시대를 산 사람들의 기억들과 차이가 많이 날 수 있다는 부분이다. 그래서 이 책 속의 많은 이야기들이 소설이나 영화의 상황을 빌려 왔다.

 

수많은 음식들이 나온다. 이 중에서 나의 추억과 맞지 않은 이야기들도 있다. 기억이 나지 않는 음식도 있다. 현재 시점에서 이 음식 이야기를 읽을 수밖에 없다. 개인적으로 정말 아쉬운 대목이다. 다른 시대, 다른 성별, 다른 환경에서 자란 탓에 더욱 그렇다. 작가는 양푼비빔밥을 실연의 상처를 달래는 이야기로 풀어내지만 나에게 제사 후 남은 음식을 한꺼번에 넣고 비빈 음식으로 더 강하게 남아 있다. 헛제삿밥과 겹치는 이미지이지만 지금도 제사 후 남은 나물들과 밥을 이렇게 해결한다. 고추장과 참기름의 조화는 정말 거부할 수 없는 유혹이다.

 

고등어구이의 기억은 해안가에 산 나와 내륙에 산 작가와 갈라질 수밖에 없다. 염장으로 등푸른생선을 먹을 수밖에 없는 그와 신선한 고등어를 먹었던 나. 달걀말이의 기억은 도시락 세대라면 누구나 공감할 부분이다. 여기에 소시지를 넣으면 더 많은 기억을 불러오고, 입맛을 다시게 한다. 상추쌈. 이 음식을 고기와 함께 한 것은 그렇게 오래 되지 않았다. 기억난다. 쌈밥집이 생기면서 구운 고기를 쌈 채소와 함께 먹던 그 시간들이. 달콤하고 씁쓸한 연애의 기억을 담은 커피가 나에겐 돈 없던 학창 시절 가장 쌌기에 마신 음료수다. 그 시절 함께 커피숍에서 시간을 보낸 친구들은 어디에 있을까?

 

어릴 때 어른들이 마시길래 호기심에 먹은 막걸리. 대학생이 되어 마신 막걸리는 술 약한 나에게 최악의 주류 중 하나였다. 그때는 쌀막걸리가 없던 시절이었다. 길거리 음식이나 분식 중 떡볶이는 나의 입맛과 동떨어져 있다. 오히려 핫도그나 오뎅이 더 맞다. 술 취한 늦은 밤 지인들과 함께 오뎅 하나와 국물을 먹던 그 시간들은 지금도 아련하게 다가온다. 라면의 기억은 언제부터인가 조금씩 왜곡되었고, 햄버거는 이젠 입맛에 잘 맞지 않는 나이가 된 것 같다. 맛있는 햄버거를 먹지 못해서인가. 콜라 리필이 되지 않아서 인가. 라면에 김밥 이미지는 또 언제 생긴 것일까? 분식점에서 이렇게 끼니를 때우던 그때가 갑자기 생각난다.

 

갓 지은 쌀밥의 엄청난 맛을 아직도 기억한다. 너무 강렬해 잊혀지지가 않는다. 만화 <식객>도 밥으로 이야기를 시작하지 않는가. 한때 기름 냄새 때문에 짜장면을 먹지 않았던 시절이 있었다. 돼지기름 때문일 것이다. 왠지 모르게 역했던 기억은 이젠 곱빼기로 먹는 음식이 되었다. 중국집의 기억 중 하나인 군만두는 많이 퇴색했지만 지금도 마트 시식대를 그냥 지나가지 못한다. 팥빙수는 지금도 즐겨먹는다. 가격이 너무 사악해 자주 사먹지 못하지만 어릴 때 시장통에서 두툼한 얼음을 갈고 색소와 팥을 넣었던 그 맛을 지금도 잊지 못한다. 눈꽃빙수의 부드러움보다 아직은 이쪽이 더 좋다. 기억만 놓고 본다면 말이다.

 

와인은 겉멋으로 마셨다. 솔직히 취향을 찾아냈다고 하지만 거의 마시지 않으니 상표를 잊은 지 오래다. 지금처럼 고급 초콜릿이 없었던 그때 가나초콜릿 하나면 충분했다. 점점 고급화로 나아가는 것들이 와인과 초콜릿이다. 아! 생일 케이크가 있다. 이제는 생일이 아니어도 조각 케이크를 먹지만 왜 이런 문화가 생겼는지는 모르겠다. 간장게장 맛집의 가격은 쉽게 다가가지 못하게 한다. 알을 품은 게의 몸부림보다 가격이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왜일까? 돈가스의 기억은 가끔 옛날 돈가스와 일본식 돈가스를 둘 다 맛보게 만들고, 오래전 도쿄 여행에서 맛본 돈가스는 인생 돈가스였다. 물론 지금도 그럴까 하는 의문은 있지만.

 

김치, 한국인의 소울 푸드다. 작가는 김치와 관련된 글을 세 개 올렸다. 김치찌개와 김치볶음밥과 김치로. 설렁탕에 깍두기가 없으면 무슨 맛이겠는가. 라면엔 또 어떤가. 식당이 중국산 김치로 가득하다고 해도 아직 맛있는 김치를 담그는 식당은 많다. 김장이 고된 노동이 되면서 가족 간의 갈등을 불러오지만 많은 집에서 가장 중요한 반찬이다. 여름철 수박과 콩국수는 최고의 음식이다. 음식물쓰레기 때문에, 너무 큰 크기 때문에 살 때 주저하지만 마트에 가면 늘 눈길을 주고 한 통 산다. 맛있는 콩국수 한 그릇은 더위에 사라진 입맛을 되살린다. 이렇게 이 책의 수많은 음식들은 나의 기억과 추억을 교차시키고, 입맛을 다시게 하고, 잊고 있던 친구들을 떠올리게 만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디미트리오스의 가면 열린책들 세계문학 248
에릭 앰블러 지음, 최용준 옮김 / 열린책들 / 2020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어딘가에서 한 번 들어본 듯한 이름이지만 낯설다. 동서문화사 판 <디미트리오스의 관>은 조금 더 낯익다. 제목과 작가 이름이 쉽게 연결되지 않는 것은 수많은 작품들에서 흔하지만 이렇게 많은 수상을 한 작가를 몰랐다니 놀랍다. 인터넷서점 검색을 하니 딱 두 권만 보인다. 이런 작가이니 내가 모를 수밖에. 한국의 장르문학 번역이 얼마나 부족한지 알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하다. 현대 스파이 소설의 아버지라 일컬어지는 작가의 작품이 딱 한 권 번역되었다니 말이다. 이번 기회에 더 많은 작품들이 번역되었으면 좋겠다.

 

개인적 바람은 뒤로 하고 이 소설 속으로 들어가 보자. 먼저 스파이소설이라고 부를 수 있는지 의문이 든다. 화자는 래티머란 추리소설가다. 원래 그는 정치경제학 교수였는데 추리소설이 성공하면서 전업작가가 되었다. 이스탄불에 와서 하키 대령이란 인물을 만난다. 그는 추리소설을 쓸 시간이 없어 자신의 아이디어를 래티머에게 제공하려고 한다. 그런데 래티머의 시선을 끈 것은 그의 초보적인 트릭 등이 아니라 디미트리오스란 인물이다. 하키 대령에게서 이 인물에 대한 단편적인 정보를 얻는다. 그리고 이 정보를 가지고 디미트리오스가 살았고, 문제가 있었던 장소를 방문해 그와 그가 관련된 사건 정보를 수집한다. 소설은 그 과정을 보여준다.

 

스파이의 과거를 뒤쫓는 소설이다. 결코 스파이가 주인공으로 활약하는 소설이 아니다. 작가가 정보를 확인하고 추적하는 과정은 그 시대의 역사를 돌아보는 시간이기도 하다. 터키와 그리스의 갈등, 발칸 반도의 공산화, 각 국가의 이익을 위해 활약하는 스파이들의 정보전 등이 중심에 놓여 있다. 만약 이 시대에 대한 지식이 풍부하다면 횡간에 숨겨진 더 많은 이야기를 발견하고, 작가가 이 시대를 어떻게 보고 해석했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불행히도 내가 아는 것은 터키와 그리스의 전쟁 밖에 없다. 이 두 나라가 얼마나 잔혹한 행동을 했는지만 알고 있다. 바로 이 시대에 디미트리오스가 살인자로 이름을 올린다. 그의 수많은 인생 역정 중 첫 발자국이 바로 이때다.

 

디미트리오스의 삶을 들여다보면 악의로 가득하다. 유대인의 돈을 훔치기 위해 살인을 하고, 정치암살범이 되고, 스파이로 활약하면서 자신의 이익을 우선시하고, 마약을 팔면서 자신의 동료를 고발하고, 인신매매업도 했다. 이 과정에 자신의 이름을 바꾸고, 협박하고, 구걸하는 등 필요한 모든 행동을 다 한다. 마지막에는 신분세탁을 한 후 국제금융기관의 이사까지 된다. 이런 과정을 뒤쫓는데 단순히 인물만 그려내는 것이 아니라 그 시대의 모습도 같이 보여준다. 그래서인지 이야기에 속도감은 조금 떨어진다. 스파이소설이 가지는 긴박감이나 스릴감은 감소되었다. 하지만 앞에서 말했듯이 아는 만큼 재미를 더 누릴 수 있게 만들었다.

 

솔직히 터키에서 발견된 디미트리오스의 정체는 쉽게 추측이 가능하다. 그럼 다른 의문이 생길 수밖에 없다. 래티머가 각 도시를 돌면서 정보를 수집하는 과정에서 만나는 사람들은 디미트리오스를 두려워하고, 그의 죽음에 안도한다. 한 사람을 제외하고 말이다. 그 인물이 바로 래티머가 파리에 오면 50만 프랑을 주겠다고 제안한 피터스 씨다. 그와의 만남은 디미트리오스의 실체에 한 발 더 다가가게 만든다. 그리고 이 인물이 보여주는 이중성과 악의 기록은 결코 그도 신뢰할 수 없게 만든다. 이런 인물들 사이에 놓인 래티머가 보여주는 행동과 실수와 우연은 후반부에 긴장감을 불어넣어준다. 마지막 장면에 대한 역자의 해석은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시간 나면 서로 다른 판본의 두 작품을 비교해서 읽는 재미도 누려보고 싶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인간의 피안
하오징팡 지음, 강영희 옮김 / 은행나무 / 2020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 책이 나의 시선을 끈 데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하나는 중국 SF 작품이란 것이고, 다른 하나는 SF 문학상 휴고상을 수상한 것이다. 류츠신이 <삼체>로 휴고상을 받았다는 소식을 듣고 얼마나 놀랐던가. 동양 작가에게도 SF문학상의 문이 열렸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지만 또 다른 중국 작가가 받을 줄은 몰랐다. 이런 중국 SF 작품이니 관심이 생길 수밖에 없다. 한때는 중국 SF하면 그냥 무시했던 부끄러운 시절도 있었다. 물론 좋은 번역가를 만났다는 것도 무시할 수 없다. 문학에서 번역이 얼마나 중요한지 잘 알기에 더욱 그렇다. 하지만 결국 관심은 작가와 작품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다.

 

이 단편집의 목록을 제대로 확인하지 않아 휴고상을 받은 <접는 도시>가 실려 있는 줄 알았다. 그런데 이 책에 실린 여섯 편 중에 그 제목은 없다. 조금 아쉽다. 그리고 이 단편집에서 다루고 있는 공통적인 주제가 하나 있다. 바로 인공지능이다. 마지막에 실린 <인간의 섬>에 가면 인간의 탐욕과 결합한 인공지능의 미래가 펼쳐진다. 이 디스토피아적 미래의 삶에서 인간은 자유의지를 포기한다. 뇌에 칩을 심어 제우스라는 슈퍼 인공지능에게 항상 최선의 판단을 맡겨버린다. 이것을 인식하는 사람들은 120년 전 우주로 나간 탐사대원들이다. 당연히 과거와 현재가 충돌하고, 최선 혹은 최고 효율이 가진 문제가 드러난다. 마지막 마무리가 낭만적인 부분이 있지만 자신의 선택이라고 착각하면서 인터넷 검색에 모든 것을 의지하는 우리의 삶이 잘 표현되어 있다.

 

첫 작품 <당신은 어디에 있지>는 인공지능을 가진 분신으로 펀딩을 받으려는 런이의 하루를 보여준다. 그의 분신은 사용자의 가장 좋은 점만 취합해 상대방에게 답한다. 인간 감정이 지닌 복잡성과 이중성을 제대로 구현하지 못해 지속적인 성공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 이 문제점을 마지막에 표출했을 때 해결책이 나오지만 이것을 구현하는 것은 다른 문제다. 이 학습을 잘 보여주는 단편이 바로 <건곤과 알렉>이다. 아이와의 대화를 통해 이해할 수 없는 영역을 다른 영역으로 바꾼다. 인간의 목표 의식과 자유의지를 배우게 하는데 이것이 쉽지 않다. 그 끝에 이르면 <인간의 섬> 같은 결론에 도달한다.

 

<영생 병원>은 <사랑의 문제>와 더불어 미스터리 형식으로 진행된다. <영생 병원>의 미스터리는 어렵지 않다. 중간에 단서를 뚝 던져주기 때문이다. 하지만 병원에 입원했던 어머니가 건강하게 돌아온 후 일어나는 사태와 숨겨진 현실이 다양한 상상을 하게 만든다. 인간 복제를 반대하는 무리들이 그를 내세워 병원을 무너트리려고 한다. 그가 정치적 도구로 바뀌는 순간이다. 어머니의 기억을 그대로 가진 건강한 어머니의 존재는 진짜 어머니인지 그 의미를 묻는데 인간 존재의 근원을 돌아보게 한다. <공각기동대> 속 전뇌를 생각하면 답이 쉬울 듯한데 아직 현실이 그 미래를 따라오지 못하는 괴리는 어쩔 수 없다.

 

<사랑의 문제>는 한 가족과 그 가족을 돌보는 인공지능 가사도우미 천다의 이야기다. 아내가 죽은 후 집을 돌보기 위해 천다를 데려온 아버지가 창에 꿰인 후 이야기다. 하나의 사건을 두고 천다와 두 남매의 이야기가 교차하면서 다른 이야기를 들려준다. 어떻게 보면 <라쇼몽>의 SF 작품 같다. 가족의 불화와 알력 속에 천다가 보여주는 최첨단 치료와 대응은 지극히 이성적이지만 상황을 개선시키지는 못한다. 여기에 인공지능의 이권을 둘러싼 문제가 엮이면서 상황은 복잡해진다. 재밌는 것은 배심원의 구성이다. 이 재판의 경우 인간과 인공지능의 배분이 1대1이지만 다른 경우라면 1대 11인 경우가 많다. 인공지능이 더 발전하면 사라질 직업 중 하나가 변호사라고 하는데 이것을 잘 보여준다. 마지막에 진실이 드러나고 사후처리가 나타날 때 씁쓸함을 느끼는 것은 왜일까?

 

<전차 안 인간>은 <건곤과 알렉>과 더불어 아주 짧은 단편이다. 보통의 소설이 안드로이드인지 확인하는 문제를 다루는데 이 작품은 인간인지를 확인한다. 로봇3원칙과 역튜링 테스트를 이용한 단편인데 먼 훗날 이 문제가 한 번 이상은 전쟁에서 문제가 될 것 같다. 인간 공격이 가능해진 인공지능들이 과연 상대방만 공격할까? 다시 <인간의 섬>의 한 장면으로 돌아가게 된다. 인간을 죽이는 결정을 내리게 되는 슈퍼인공지능 제우스의 선택으로. 전체적으로 예상한 것보다 가독성이 좋다. 인공지능에 대한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들고, 한국 SF작가들의 작품들이 더 많이 더 좋은 번역으로 좋은 결과를 맺길 바란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