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의 귓속말
이승우 지음 / 은행나무 / 2020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개인적으로 이승우의 소설을 많이 읽지 않았다. 나의 독서법과 거리가 조금 있는 작가고, 취향도 달랐기 때문이다. 이런 이승우를 강하게 인식하는 순간이 두 번 있었다. 하나는 한 영화평론가의 추천작으로 <생의 이면>이 올라왔을 때고, 나머지 한 번은 최근 로쟈의 현대 한국문학에 대한 글 속에서였다. 그때부터 책장에 몇 년째 꽂혀 있는 <생의 이면>이 눈에 들어왔다. 읽었는지 잘 기억나지 않는 작품이었다. 언제 시간 나면 읽어야지 생각하는 수많은 책 중 한 권이다. 그런데 문학에세이가 나왔다. 분량도 많지 않아 금방 읽을 수 있을 것이란 섣부른 추측을 했다. 선택은 이렇게 되었다. 이 선택은 정말 착각이었다.

 

에세이와 적은 분량은 보통 때라면 하루면 충분하다. 하지만 이승우의 글은 그렇게 읽을 수 있는 문장이 아니다. 다듬고 다듬은 문장들이, 꼬인 듯 보이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미세한 차이를 보여주는 글들이다. 그러니 대충 읽으면 그 내용을 완전히 오독하거나 ‘뭐 이런 비슷한 말장난 같은 글을 썼는가’ 하고 말할지도 모른다. 여기서 솔직히 고백 하나하면 나 자신도 이 에세이를 완전히 집중해서 읽지 못했다는 것이다. 어느 순간 집중력이 깨어져 단어만 따라간 곳도 적지 않다. 그래도 읽으면서 그 의미를 곱씹고, 그 차이를 생각하면서 색다른 재미를 누린 부분도 많다.

 

읽으면서 해외문학과 한국문학에 대한 감상문이란 느낌을 받은 부분이 많다. 외국 작가야 모두 유명한 작가들이지만 한국 작가 중 조금 낯선 이름도 있었다. 최근 나의 독서가 한쪽으로 기울면서 생긴 문제이긴 하다. 상대적으로 많이 다루어진 작가가 카프카인 것은 그의 글과 어떤 연관성이 있을까 궁금해지고, 글이 잘 써지지 않을 때 이청준의 소설을 읽고 앞으로 나아갔다는 부분은 나의 기억 속 이청준과 이승우의 문장과 내용을 생각하면 쉽게 연결되지 않는다. 이 부분은 평론가들이 연구할 부분이 아닐까. 에밀 아자르와 로맹 가리가 같은 작가였다는 사실을 몰랐다는 것을 비판하는 글을 보고 살짝 반감이 생겼다. 물론 그 당시에도 이 둘은 같은 인물이라고 의심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이런 경지는 어떤 것인지.

 

이 에세이를 읽으면서 오에 겐자부로의 소설에서 재미를 발견했던 순간이 떠올랐다. 그가 처음 노벨문학상을 받았을 때 산 책을 읽고 재미없다고 외쳤던 순간과 지금은 엄청난 차이가 있다. 오에 겐바부로의 책 중 한 권이 SF로 분류되어 있어 기대하고 읽었는데 크게 실망했던 순간도 있었다. 아마 이런 경험들이 이 에세이를 읽는데 도움을 준 것 같다. 천천히 그 문장을 들여다보고 말장난 같은 글 속에서 미세한 차이를 발견하고 그 차이가 지닌 의미를 깨닫는 재미를 알게 되었다. 그렇다고 해서 이런 책을 더 읽을 테냐고 묻는다면 일단은 ‘다음에’라고 답하고 싶다. 아직은 좀더 쉽게 읽을 수 있는 책이 좋기 때문이다.

 

“독자의 처지나 환경에 따라 다르게 읽힌다는 것, 그것이 문자 텍스트의 숙명이다.” 이 문장을 읽고 내가 상당수의 작품들 힘들게 읽은 이유를 발견한 느낌이었다. 시간, 장소, 기분, 분위기, 나이, 의자의 경도 등이 미세하게 영향을 미친다고 하지 않는가. 늦은 밤 책을 많이 읽는 나에게 이런 체력적 환경적 요인들은 그 작품을 이해하는데 미세하거나 거대한 차이를 만든다. 여기에 나의 경험도 무시할 수 없다. 앞에서 말한 오에 겐자부로의 경우가 대표적이다. 특정 장르에 익숙해진 독법도 이런 차이를 크게 만든다. 이렇게 이 책은 나의 사유를 확장시킨다.

 

한국보다 프랑스에서 더 높은 평가를 받는다는 작가. 그의 에세이는 철학적이고 깊은 사유를 담고 있다. 종교의 인용은 기독교의 글들이지만 내용은 인간과 인간의 관계, 소설쓰기, 실존, 소설의 고유성 등이다. 에세이 후반으로 가면 독자, 세계화, 소설가 등을 이야기한다. 노벨문학상도 하나의 문학상이란 그의 평가에 공감하면서 하나의 작품에 대한 감상을 이런 식으로 쓸 수도 있다는 사실에 새로운 시선 하나를 배운다. 나의 의지와 조직의 지시를 제대로 구분하지 못하는 우리의 삶을 돌아본다. 언젠가 그의 소설들을 읽고 젊은 시절 내가 놓친 재미를 누리고 싶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인형
대프니 듀 모리에 지음, 변용란 옮김 / 현대문학 / 2020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레베카>의 작가 대프니 듀 모리에의 초기 단편들을 연대순으로 실은 작품집이다. 이때 말하는 연대순은 발표가 아니라 창작한 순서다. 마지막 작품 일러두기에 이 부분에 대한 설명이 간단하게 요약되어 있다. 처음 이 단편집을 선택할 때 집에 고이 모셔두고 있는 단편집 <새>의 작품들과 겹치는 부분이 있지 않을까 하는 것이었다. 목차를 보니 다행이 아니다. 솔직히 말해 이 작가의 작품을 두 번째 읽는다. 첫 번째는 당연히 <레베카>다. 오래전 영화로 보고 소설을 다시 읽었는데 취향을 조금 타는 작품이었다. 히치콕의 영화를 다시 보고 싶다는 느낌이 더 강했다고 할까. 단편은 어떤 느낌일까? 이 호기심에, 작가의 명성에 선택했다.

 

작가가 10대 후반부터 20대 중반에 걸쳐 쓴 열세 편의 초기 걸작 단편을 모아 낸 선집이라고 한다. 이미 현대문학 출판사에서 <대프니 듀 모리에> 세계문학단편선을 내놓았는데 뭐지? 하는 느낌도 있었다. 오늘 목차를 찾아보니 이 작품집에 <새>가 실려 있다. 당연히 내 머릿속은 히치콕의 영화가 먼저 떠오른다. 영화 이미지와 단편의 이미지를 비교하고 싶은 작은 욕망이 꿈틀거린다고 할까. 개인적으로 현대문학의 세계문학단편선을 재밌고 읽었고 좋아하기에 언젠가 다른 출판사 <새>와 비교하고 싶은 마음도 있다. 물론 자신할 수는 없지만.

 

초기작이라 섬세하지 못한 부분이 분명히 있다. 하지만 뭐지? 하는 느낌과 함께 강한 인상을 남기고, 어떤 작품에서는 가볍게 웃게 만든다. 형식도 장르도 하나로 고정되어 있지 않다. <점점 차가워지는 그의 편지>는 제목대로 편지들로 구성되어 있다. 욕망에 불타는 남자가 그 욕망을 채운 후 일어나는 일을 간결한 편지 등으로 잘 표현하고 있다. 형식도 심리적 표현도 멋지다. <주말>의 이야기는 또 어떤가. 행복한 연인이 난파되면서 마주하는 현실은 지독하게 이기적이다. <성격 차이>의 부부가 보여주는 심리 묘사에 대한 결혼 전 버전이라고 해야 할까. 차갑고 냉혹한 현실을 극단적으로 잘 보여준다.

 

표제작 <인형>은 섬뜩하다. 우연히 바닷가에서 발견한 수첩의 기록이란 설정으로 여운을 남긴다. 하지만 내용은 해설의 섹스돌과 관련 있다. 화자를 매혹시킨 그녀 리베카의 키스가 어디에서 유래했는지 보여주는 장면은 기괴하다. 첫 발표작인 <그러므로 이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께>는 위선적인 신부 이야기다. 계급과 신분상승의 욕망을 뒤섞었는데 예상하지 못한 결말과 신부의 심리 묘사가 인상적이다. 이것은 첫 작품 <동풍>에서도 그랬다. 거칠고 황당하고 매력적인 이야기를 보여준다. 읽으면서 에스키모인들의 이야기가 떠올랐다.

 

<피카딜리>는 하층민 여성의 추락한 현실을 그대로 보여준다. 사기꾼 남자에게 빠진 그녀가 잘못된 선택과 그 후의 삶이 여운을 남긴다. 이 단편은 <메이지>의 일상과 이어진다. 자신의 현실과 동떨어진 결혼식을 응원하는 매춘부의 모습이 씁쓸하다. 욕망에 불탄 24살 신랑의 황당한 첫날밤 도전기가 황당하고 놀랍도록 웃음을 짓게 하는 <절망>은 마지막 문장에서 빵 터진다. <해피밸리>의 사랑스러운 연인들의 모습과 대조적이다. <오래가는 아픔은 없다>는 자신의 감정을 어떻게 스스로 속이고 왜곡하는지 잘 보여준다. 이 탁월한 심리 묘사는 읽으면서 감탄하게 만든다.

 

<집고양이>는 한 남자를 둘러싼 두 여성의 긴장과 엇갈린 갈등을 잘 보여준다. 자신이 생각과 다른 두 어른의 반응은 은밀하거나 노골적이다. 은밀한 것은 남자의 유혹이고, 노골적인 것은 엄마의 감정이다. 마지막 작품인 <인생의 훼방꾼>은 지나온 자신의 삶을 들려주는 방식이다. 제목과 화자의 이미지가 겹치지 않는데 내가 잘못 읽은 것일까? 전체적으로 열세 편의 단편들은 놀라운 심리 묘사와 인간관계를 보여준다. 이렇게 어린 나이에 이런 통찰력을 보여줬다는 사실에 놀란다. 다른 단편들에도 다시 한 번 더 관심이 강해진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독서의 역사 - 책과 독서, 인류의 끝없는 갈망과 독서 편력의 서사시
알베르토 망구엘 지음, 정명진 옮김 / 세종(세종서적) / 2020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알브레토 망구엘의 책을 몇 권 읽지 않았지만 상대적으로 가장 편안하게 읽었다. 이전 책보다 좀더 여유롭게 읽은 것도 하나의 이유지만 다루고 있는 내용들이 흥미로웠기 때문이다.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에게 책을 읽어주게 된 사연도, 그를 통해 배우게 된 내용도 이전까지 피상적으로 알고 있던 정보를 새롭게 만들어주었다. 자신의 경험들이 곳곳에 스며들어 있지만 가장 중심에 놓여 읽는 것은 제목처럼 ‘독서의 역사’다. 구술과 기록에 대한 부분은 얼마 전 읽었던 테드 창의 소설이 떠오르기도 했다. 책과 독서에 대한 나의 지식을 다시 돌아보고, 많은 것을 배우는 시간이었다. 뭐 많은 것을 그냥 놓치기도 했지만.

 

책이란 것이 지금의 형태로 나오게 된 과정도 나온다. 이 책이 나올 당시만 해도 지금 같은 전자책은 없었다. 시디롬에 담은 책이나 인터넷으로 텍스트를 읽을 수 있었지만 말이다. 읽기 위해서는 쓰는 행위가 선행되어야 하고, 그 앞에는 문자가 있어야 한다. 가볍게 쐐기문자와 그림 등에 대해 말한다. 문자의 탄생으로 이야기를 넘기지 않은 것은 조금 아쉬운 대목이다. 쓴다는 것은 그 대상이 있어야 한다. 파피루스, 양피지, 목판, 석판, 진흙 조각 등의 이야기는 새롭지 않지만 나의 지식에서 조금 더 들어갔다. 양피지가 파피루스보다 저렴했다니 예상외다.

 

이 책 이전에는 서양에서도 책을 소리 내어 읽었다는 사실을 몰랐다. 사실 소리 내어 읽다 보면 책 내용에 더 집중하는 경우가 많다. 지금도 눈으로 읽다가 쉽게 그 내용이 눈에 들어오지 않으면 입으로 혹은 속으로 문자들을 읽는다. 과거에 눈으로 읽는 행위가 특별했다는 것과 이런 독서 행위가 상대적으로 오래되지 않았다는 사실은 흥미롭다. 소리 내어 책을 읽던 시절이나 책 읽기가 힘든 사람에게 누군가가 대신 책을 읽어주는 것은 당연하다. 망구엘이 보르헤스에게 해준 책 읽어주기가 떠오른다. 과거 이런 시절의 책 형태는 현재와 많이 달랐다. 자료 그림 등을 보면 몇 명이 들어야 하는 경우도 있다. 금속활자가 만들어낸 출판 혁명은 다양한 형태로 발전했지만 필사자들의 아름다운 서체를 흉내 내려고 했다는 부분에서 서체를 다시 떠올린다.

 

독서가로서의 작가와 번역가가 이야기에서 나의 시선을 끄는 대목들이 나온다. 릴케의 번역 이야기는 번역이 왜 제2의 창작이라고 하는지 잘 보여준다. 직역과 의역에 대한 수많은 논쟁이 있지 않은가. 또 예전에 여성에게 글자를 가르쳐주지 않았다는 사실과 독서가인 여성들이 쓴 글에 대한 부분은 최근으로 넘어오면 노예들에게 글자를 가르쳐주지 않은 역사와 이어진다. 성경을 통해 글자를 배우는 노예들의 노력과 열정은 나태해진 나를 질타하는 듯하다. 책 읽기 금지는 금서 이야기로 넘어갈 수밖에 없는데 그 유명한 진시황의 분서갱유나 나치의 분서 외에도 많이 있어왔다. 놀라운 사실 중 하나는 19세기 말 미국에서 일어난 금서 이야기다. 예전에 금서에 대해 읽었던 부분이 살짝 생각난다.

 

이제는 그런 말을 하지 않겠지만 예전에는 책을 읽기 위해 책을 훔치는 것은 잘못이 아니라는 말이 있었다. 읽고 돌려준다면 문제가 없겠지만 단순히 소유욕이나 판매를 위해 훔친다면 어떨까? 자신이 가진 권력을 이용해 도서관에서 고가의 책을 훔친 인물 이야기는 또 다른 변주가 가능하다. 미술관의 작품처럼 말이다. 책벌레 이미지는 언제부터인가 하나로 굳어져 왔다. 나 자신도 적지 않게 읽지만 책벌레 이미지는 아니다 라고 생각한다. 이 이미지가 한 독서가의 행동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보여주는데 살짝 가슴 아프다. 왜 얼간이 이미지가 되었는지 그 연원을 찾아가는 것도 재밌을 갔기는 하다.

 

마지막 장에서 독서의 역사는 끝나지 않았다고 말한다. 사실이다. 사람들이 책을 읽지 않는다는 이야기는 수십 년 전에도 나왔다. 하지만 출판되는 책 숫자는 더 늘어났다고 한다. 이 책을 읽으면서 읽는 다는 행위에서 문맹률을 다루지 않은 부분은 아쉽다. 문자를 안다는 것이 특권이었던 시절이 있었고, 근대까지도 많은 사람들이 글자를 몰랐다는 사실을 말이다. 물론 독서 행위가 한정된 일이었다는 대목은 있다. 이 독서가 체제에 위협이 된다고 말하는 대목도. 읽지 못하기에 책 읽어주는 사람이 있었고, 그림으로 좀더 알기 쉽게 만들었던 역사도 있었다. 어쩌면 나의 이런 지적이 그의 풍부한 지식과 섬세하고 매혹적인 글에 대한 질투인지도 모르겠다. 천천히 망구엘의 책들을 한 권씩 읽어나가고 싶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마인 소녀를 구하는 자 - Goodbye to Fate
니시노 료 지음, 후지 초코 그림, 정은빈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20년 3월
평점 :
절판


제9회 GA문고대상 우수상 수상작이다. GA문고대상은 일본 라이트노벨 신인 작가 등용문이라고 한다. 라이트노벨을 잘 읽지 않는 나에게 낯선 문학상이지만 이 분야에서 9회까지 왔다는 것은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그리고 이 책의 제목을 잘못 읽어 오해한 순간도 있다. 마인 다음에 쉼표를 붙인 제목이 등록된 곳이 있기에 더욱 그렇다. 이때 제목의 의미는 마인이 소녀를 구하는 자가 된다. 하지만 실제 내용은 마인이 되어가는 소녀를 구하는 자인 이류 용병 위즈의 이야기다.

 

위즈는 영웅 알루클의 고향 친구이자 성 룬의 성검을 받을 당시를 직접 본 인물이다. 실제 둘의 검술 대결에서 더 많이 이긴 것은 위즈다. 알루클의 공격이 너무 직선적이라 쉽게 이길 수 있었다. 자신의 마을이 마물의 공격을 받을 때 냉정한 판단을 보여준 것은 위즈다. 성 룬의 성검으로 마물들을 물리친 후 둘은 함께 검을 수련하고, 함께 모험을 떠난다. 영웅 알루클이 대단한 위명을 떨치고, 훌륭한 실력을 가진 동료들과 함께 성공적인 임무를 달성할 때 위즈는 평범한 검사 역할 밖에 하지 못한다. 이 때문에 다른 동료에서 배척을 받는다. 하지만 알루클에게 위즈는 어린 시절부터 현실을 제대로 직시하면서 위안이 되는 인물이었다.

 

영웅의 동료들이 대단한 능력으로 납치된 공주를 구하고 사람들의 환대를 받을 때 위즈는 조용히 떠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어린 소녀의 비명 소리를 듣는다. 겨우 세 명의 도적들을 물리친다. 이 소녀가 바로 마인이 될 소녀 아론이다. 북쪽 마을 스노웰까지 자신을 데려가 달라고 요청한다. 위즈는 자신의 능력을 알기에 거절한다. 하지만 아론은 능력이 부족하지만 자신을 구하기 위해 최선을 다한 위즈가 좋다. 의뢰금으로 자신이 가진 마검을 말한다. 둘은 함께 떠난다. 그러다 위즈의 동료 용병이 하나의 조사를 부탁한다. 마을사람이 사라진 곳을 찾아가 이유를 알아봐 달라는 것이다. 여기서부터 본격적인 액션과 모험이 펼쳐진다.

 

현재의 이야기가 진행되면서 과거의 두 이야기가 같이 펼쳐진다. 하나는 위즈가 과거에 경험했던 일들이고, 다른 하나는 아론이 마왕에게 납치되어 갇힌 곳 이야기다. 이 과거의 두 이야기는 간결하게 진행되고, 위즈와 아론 둘이 어떤 마음을 가지고 있는지 간단히 보여준다. 현재 이야기에서 알루클의 동료들 이야기도 같이 나온다. 이들은 일곱 대륙에 각각 출연하는 마인들을 물리칠 영웅들이다. 마인이 출연한 대륙의 삼분의 일이 황폐화되었기에 반드시 물리쳐야 한다. 미래의 불안을 제거해야 하는 영웅과 현실 속에서 마주한 마인 소녀를 지키려는 이류 용병의 싸움은 예정된 결말이다. 하지만 이 소설의 결말은 다음을 예고하는 듯한 장면으로 끝난다. 아마 다른 독자들이 예상하듯이 후속편들이 나오지 않을까 생각한다.

 

분명히 잘 짠 소설은 아니다. 가볍게 읽기에 부담없는 소설이다. 전형적인 전개 방식과 작은 반전을 보여준다. 놀라운 것은 중간에 너무 쉽게 등장인물을 죽인다는 것이다. 아론이 왜 자신의 과거 집으로 돌아가려고 하는지 보여주는 장면은 예상을 벗어났다. 그리고 일곱 소녀들이 갇힌 곳의 정체도 궁금하다. 성 룬과 마왕 전설이 어떤 식으로 풀려나갈지도. 읽으면서 한국 판타지와 다른 전개와 설정을 다시 한 번 더 느낀다. 예전에 사놓고 고이 묵혀둔 수많은 라이트노벨들이 갑자기 머릿속을 스쳐지나간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요리코를 위해
노리즈키 린타로 지음, 이기웅 옮김 / 모모 / 2020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노리즈키 린타로 시리즈 3부작 중 첫 번째 작품이다. 뒤의 두 작품은 오래 전에 읽었다. 재밌게 읽은 기억이 뚜렷하다. 첫 작품을 읽어야지 생각만 하다가 이번에 읽게 되었다. 출판사는 바뀌었다. 번역자는 그대로다. 구판의 표지가 요리코의 자전거를 의미한다면 이번에는 좀 더 추상적이다. 스물다섯 살에 이 작품을 썼다고 하는데 대단하다. 3부작 다른 이야기를 읽으면서 요리코에 대한 이야기가 궁금했는데 이번에 완전히 풀렸다. 읽으면서 히가시노 게이고의 <악의>가 떠올랐다. 아마도 앞부분에 수기가 나온 것과 수기를 둘러싼 트릭 때문일 것이다.

 

사랑했던 딸의 죽음에 절규한 아버지 니시무라 유지의 복수를 담은 수기로 시작한다. 열일곱 살 딸이 목이 졸린 채 죽었다. 경찰은 성범죄자의 소행이라고 생각한다. 이미 이 동네에서 미수 포함 두 번의 사건이 있었다. 그런데 해부 결과 요리코가 임신 4개월이란 충격적인 사실을 나중에 알게 된다. 누가 아버지일까? 그가 범인일까? 니시무라는 복수를 꿈꾼다. 이미 14년 전 불행했던 교통사고로 아내가 반신불구가 되었고, 임신하고 있던 뱃속 아들은 죽었다. 아내에겐 요리코의 임신 사실을 숨긴 채 은밀히 조사한다. 경찰이 숨긴 몇 가지 사실 때문에 경찰도 믿지 못한다. 반 친구들의 말을 통해 학교 선생 중 한 명이 용의자로 떠오른다. 단순 혈액형으로 비교하면 그일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만약 그가 아니라면 무고한 사람을 죽이는 게 된다. 이것을 피하기 위해 열심히 조사한다. 확신이 든 순간 살인하고, 자살을 기도한다.

 

딸의 죽음과 아버지의 수기는 두 살인 사건을 하나로 묶고, 자살은 수기에 사실이란 확신을 불어넣어준다. 이 수기 때문에 피해를 본 요리코의 학교에서 노리즈키 린타로의 명성을 이용해 이 소문을 잠재우려고 한다. 가해자였다가 피해자로 바뀐 선생 히이라기가 요리코와 성교를 나누지 않았다고 주장하려는 것이다. 만약 교사가 학생을 범했다면 학원에 문제가 생기고, 오빠의 선거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은연중에 경찰에 압력을 행사한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노리즈키는 이 재조사를 의뢰인의 바람대로 할 마음이 없다. 그는 진실을 밝히려고 한다.

 

재조사의 시작은 수기의 허점을 파악하는 것부터다. 그가 읽으면서 느낀 이상함은 관계자들을 만나면서 조금씩 커진다. 자살자가 남긴 기록이 거짓일리 없다는 맹신을 그는 거부한다. 그의 조사가 진행됨에 따라 불편함을 느낀 사람들이 늘어나고, 조사를 방해하려는 시도도 생긴다. 수기 속에 나온 사람들을 만나고, 그들의 이야기 속에서 수기의 진실 여부를 다시 묻는다. 수기 속 문장 하나에 의혹을 품고, 수기에 기록되지 않은 이야기를 찾아낸다. 진실은 보여주는 수기 너머의 어둠 속에 자리잡고 있다. 읽으면서 ‘혹시’했던 가정은 ‘역시’로 바뀌었고, 이것은 또 다른 반전으로 이어진다.

 

모든 비극은 과거 속에서 일어났다. 요리코의 죽음은 현실이다. 요리코를 위해서란 이름으로 살인을 저지른 아버지의 수기와 그 이면의 진실은 ‘사랑’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수기의 진실을 알기 위해서는 수기를 기록한 니시무라가 정신을 차려야 한다. 자살 소동의 가능성도 검토하지만 의사들은 부정한다. 사건을 조사하다보니 점점 더 과거 속으로 들어가게 된다. 진실의 단서는 과거 속에 있다. 노리즈키 린타로의 가설은 대담하고 위험하고 불편하다. 그래서 ‘혹시’라고 생각한 나의 추측에 반감이 있었다. 하지만 그 무엇보다 섬뜩한 것은 이 살인 사건의 이면을 조용히 들여다보고 있다고 생각하는 마지막 장면이다. 3부작의 다른 작품에 비해 조금 거친 맛이 있지만 가독성은 여전히 좋고, 재밌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