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면 가장 위험한 이야기 - 첨단 과학기술과 편의주의가 인도한 인류세의 풍경
박병상 지음 / 이상북스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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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제에 나오는 ‘인류세’라는 단어가 낯설다. 이 단어는 2001년 네덜란드 화학자 파울 크루첸이 처음 제안했다. 물론 공식적인 지질시대는 아니다. “인간의 힘이 너무 강력해져서 지구 시스템 전체의 기능을 교란할 정도가 되어 급기야 새로운 지질학적 시대인 ‘인류세’를 초래했다”는 글에서 유래했다. 실제 이런 상태에 도달하려면 상당한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하지만 화석연료를 기반으로 하는 문명을 건설한 인류에게 이 시간은 점점 단축되고 있다. 이에 대한 반발 혹은 선동으로 환경운동하는 생물학자가 여기저기 기고한 글을 모아 재편집한 책이다.

 

저자는 나가는 글에서 이 책이 이론보다 선동을 유도하려는 마음으로 글을 모았다고 말한다. 실제 글을 읽다 보면 구체적인 수치나 자료보다 주장과 가정이 더 많다. 어느 순간에는 과학기술 시대 이전으로 돌아가자는 말인가? 하는 의구심이 들 때도 있다. 현대 과학의 허점을 집요하게 파고들어 그것을 문제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과학의 발전으로 인류의 삶이 편해졌지만 동시에 수많은 문제를 만들고 있는데 저자는 이 문제를 과도하게 부풀린다. 어느 부분에서는 나 자신도 생각한 것이고, 동의하는 부분도 많지만 현실과 미래를 무시할 수 없다. 실제 저자 자신도 현실과 미래를 모르지는 않는다. 선동이란 목적에 맞게 더 부풀렸고, 우리 사회의 미래가 더 안전하길 바랐기 때문이다.

 

크게 네 부분으로 나누었다. 1장은 유전자 조작의 문제를 다룬다. 2장은 화석 연료와 발전을 다루고, 3장은 핵발전소 문제를 다룬다. 4장은 우리에게 편의를 강요하는 과학기술 이야기를 한다. 유전자 조작 농산물의 문제가 무엇인지 말할 때 내가 관심을 덜 둔 부분이 드러났다. 단일품종의 위험을 알려주고, 과연 유전자가 교정의 대상인지 질문을 던진다. 과학 기사를 읽으면서 당연하게 생각했던 부분들을 새롭게 인식하게 만들었다. 이 부분에 대한 공부가 더 필요하다. 구체적이고 더 깊이 있는 내용을 다루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

 

사실 2장과 3장은 같은 연장선상에 있다. 발전소가 없다면, 아니 전기가 없다면 우리 삶은 어떨까? 저자는 환경과 안정성에 중점을 둔 채 이야기를 풀어간다. 독일의 사례를 많이 드는데 생산과 소비를 같은 지역에서 하는 것이 좋다는 의미다. 동의한다. 원자력발전소가 그렇게 안정적이고 효율적이라면 서울 한강 부지에 핵발전소를 세워야 하지 않겠는가. 태양광 이야기에서 사용 시한이 지난 패널 문제가 핵폐기물보다는 안정하고 비용도 싸다는 부분은 더 강조할 필요가 있다. 후쿠시마 핵발전소에서 오염수를 무단으로 방류하겠다는 이야기가 얼마 전 이슈화되었는데 왜 이것이 문제인지도 정확하게 짚어준다. 몰랐던 이야기 중 충격적인 것은 한국 분유업체들이 체르노빌 사건 이후 처치 곤란했던 분유를 몽땅 수입해 시중에 풀었다는 것이다. 일관되게 나오는 자본의 거대한 욕망을 보여주는 좋은 사례다.

 

마지막 장에서 과학기술의 한계와 문제점을 파고든다. 언론에 나오는 수많은 장밋빛 기사들이 바라는 것이 연구비를 얻기 위해서란 지적은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편의, 최첨단, 가상공간, 스마트, 우주여행, 자율주행 등에 대한 문제 지적은 부분적으로 맞는 말이다. 시대의 발전과 변화를 거스르려고 하는 듯한 모습을 보여주는데 이 부분에는 완전히 동의할 수 없다. 이미 진행되고 있는 변화와 편의를 되돌리자고 한다면 누구나 반발할 것이다. 하지만 조금만 덜 사용하고, 덜 편리해지는 것이 모두의 삶에 도움이 된다면 동의한다. 생태주의에 물들어 과학기술을 비판적으로 보고 있다고 했는데 이 부분을 감안하고 읽을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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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와 함께라면 인생도 여행이다 - 나태주 시집
나태주 지음 / 열림원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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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가장 많이 읽게 되는 시집의 시인이 나태주다. 의도했거나 특별히 그의 시들을 찾아서 읽게 된 것은 아니다. 최근 출간된 책들 중 몇 권이 운 좋게 손에 들어와 읽게 되었다. 어쩌면 시보다 산문으로 먼저 만났다고 해야 한다. 시인의 산문집에 관심을 둔 덕분이다. 이렇게 인연이 되어 편집된 시들을 읽고, 그의 글들을 보면서 조금씩 마음을 빼앗겼다. 시집을 자주 읽지 않는 나에게 그의 평범한 듯 간결하고 감상적이고 관찰들로 가득한 시들은 재밌다. 대표작 봐도 알 수 있지 않은가. 단 세 구절의 <풀꽃 1>을 보라. 이 시집에 그 보다 더 짧은 시도 있다. 무뎌가는 감성을 녹이는데 딱 맞는 선택이다.

 

읽을 때는 몰랐는데 이 시집은 3부로 편집되어 있다. 1부는 신작 시 100편이고, 2부는 독자 애송시 49편, 3부는 나태주 시인이 사랑하는 시 65편이 실려 있다. 2부의 시들 중 대표작인 <풀꽃>이 있지만 가장 먼저 나오는 시는 <좋다>다. “좋아요 / 좋다고 하니까 나도 좋다.”가 전문이다. 얼마나 간결하고 감성적인가. 옛 드라마 속 명대사 “아프냐? 나도 아프다”가 연상된다. 풀꽃 시인이란 명성 때문인지 꽃들이나 우리 주변에 널려 있는 사물과 일들에 대한 시들이 많다. 그냥 읽어도 느낌이 오지만 한 번 더 읽으면 그 의미가 더 깊이 다가온다. “아직도 너를 사랑해서 / 슬프다.”(<이 가을에> 전문) 이 시를 읽고 나의 머릿속은 여러 가지가 떠올랐다. 잊지 못하는 연인 이야기인가, 또 어떤 의미가 담겨 있을까 하고.

 

표제작 <너와 함께라면 인생도 여행이다>에서 그는 ‘인생은 고행이다’에서 ‘고행’을 ‘여행’으로 바꾸자고 한다. 읽고 난 뒤 내 옆에 있는 사람을 가장 먼저 떠올렸고, 고된 인생 여행이란 인식으로 이어졌다. 이 신작 시에서 사랑과 고마움과 그리움을 많이 느낀다. 해학적인 시도 있다. <인도>란 시에서 인도에 너무 많은 것이 있다고 말한 후 “그러나 나는 인도에 / 한 번도 가보지 못했다.”라고 말한다. 이 시를 읽고 풋~ 하고 웃었다. <서가의 책들>이란 시를 읽으면서 나의 책장을 떠올렸다. 그가 생각한 것과 다르지만 나의 욕심이 먼저 보였다.

 

3부의 시들 중 연인에게 써먹기 좋은 시가 있다. 바로 <풍경>이다. “이 그림에서 / 당신을 빼낸다면 / 그것이 내 최악의 인생입니다.” (전문) 약간 오글거리는 표현이지만 왠지 공감하게 된다. <마지막 기도>에서 “어떤 경우에도 그를 / 미워하지 않게 해주십시오 / 그를 사랑했던 마음 / 오래오래 후회될까 봐 걱정입니다.”라고 할 때 사랑과 미움보다 후회란 감정이 더 눈에 들어왔다. 그 전에 사랑이 미움으로 변할까 걱정하는 마음이 담겨 있는데 어떤 경험이나 상황에서 나왔을까 하는 의문이 생긴다. 이런 시들과 다른 반전을 담고 있는 시도 있다. <대화>다. 볏가리에 농약을 치는 농부에게 그 이유를 물었는데 돌아온 대답이 예상 밖이다. 자신은 먹지 않기 때문이란다. 다른 시들과 달라 더 흥미롭다.

 

나태주 시인의 성공을 단순히 드라마나 광화문의 걸개만 가지고 말하기는 힘들다. 어렵고 힘든 시가 아니라 우리의 삶을 살포시 보듬고, 어딘가에서 보고 들은 듯한 감성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시어가 난해하지 않다는 것도 장점이다. 이 글을 쓰면서 다시 시들을 한 번씩 가볍게 훑어보는데 역시 눈이 먼저 가는 시들은 간결한 시다. 이전에는 이런 시들을 낮게 봤는데 지금은 그 간결함 속에 담긴 감정들이 좋다. 내가 이해하지 못하는 단어들의 연결보다 평이한 단어 속에서 나의 삶을 돌아볼 수 있는 시가 좋다. 물론 나의 시 독법에 문제가 있어 좋은 시들을 놓치는 지도 모르겠다. 얼마 전 자신의 삶을 나태주 시인의 시와 엮은 책을 읽었는데 아주 인상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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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포
제바스티안 피체크 지음, 배명자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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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아이가 부모에 방에 들어갔다가 아버지에게 혼이 난다. 피곤한데 자신의 잠을 방해했다는 이유다. 아이는 자신의 방 옷장에서 헬멜을 쓴 한 아저씨 아르투어를 만난다. 이 장면을 보고 나의 머릿속은 공포소설의 한 부분이 떠올랐다. 그런데 장면이 바뀌어 엠마 슈타인이란 정신과 전문의가 사람들 앞에서 강의를 한다. 자신이 로한젠실험의 대상자였다고 말하면서. 엠마는 강의를 마치고 자신의 방으로 온다. 샤워를 하려는데 증기 때문에 유리에 써져 있는 글씨를 보게 된다. “도망쳐. 당장!” 자신도 모르게 비명을 지른다.

 

베를린은 한 연쇄살인범 때문에 난리다. 그 살인범은 여자를 죽인 후 머리를 깎는다. 나중에 ‘이발사’란 별명을 얻는다. 엠마는 이 글을 보고 놀랐지만 호텔 안에는 어떤 사람도 보이지 않는다. 잠들었다가 어떤 소리를 듣는다. 약물에 의해 기절하고, 강간당하고, 머리가 깎인다. 언론에 알려진 이발사의 행동과 닮았다. 하지만 다른 곳에서 그녀를 발견한 경찰은 이 성폭행 등이 이발사가 한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그녀가 머물렀다는 로젠호텔의 방 호수도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럼 그녀가 당한 것은 무엇인가? 그녀의 환상일까?

 

이 사건으로 그녀는 임신했던 아기를 잃고, 집밖으로 나가질 못한다. 집안에만 머물 뿐이다. 이 당시의 하루를 그녀는 가장 친한 변호사이자 아버지의 친구인 콘라트와 만나 이야기한다. 이때부터 시간은 과거와 인터뷰하는 순간으로 나누어진다. 엠마는 소포 하나를 받았던 그날의 이야기를 풀어낸다. 참혹하고 잔혹했던 그날의 기억들을 말이다. 그리고 이 소포 하나가 얼마나 큰 문제를 불러일으켰는지 말한다. 그 이야기를 읽으면서 나의 머릿속은 아주 복잡하게 돌아갔다. 혹시 이 모든 것이 그녀의 상상에 의한 허구가 아닌가부터 시작해서 말이다. 당연히 이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모두가 이발사 용의자가 되었다.

 

내가 처음 예상한 설정과 다른 방식으로 이야기가 이어진다. 소포는 처음에 문제가 아니었다. 오히려 배달부가 의심스럽다. 집에서 이상한 소리를 듣고 세미나를 위해 떠난 남편 필리프에게 연락한다. 누군가 집에 있는 것 같다. 남편과 동료가 와서 확인하지만 아무도 없다. 기계 고장으로 난 소리다. 그런데 키우던 삼손이 갑자기 아프다. 집밖으로 나가길 겁내는 그녀가 아주 어렵게 집앞 동물병원을 찾아간다. 무엇을 먹어 삼손이 아픈지 모른다. 검사를 의뢰한다. 그리고 우체부가 맡긴 소포의 주인이 살고 있는 앞집에 간다. 실재한다. 집안으로 들어간다. 가발이 보이고, 이상한 일들이 일어난다. 남편에게 연락하고 싶지만 쉽지 않다. 이상하게 상황들이 꼬인다. 어떻게 보면 이 상황들이 비현실적으로도 보인다.

 

이런 과거의 시간과 더불어 그날 있었던 어떤 사건의 변호를 위해 콘라트가 질문을 한다. 이 장면들은 교차하지만 분량은 절대적으로 과거가 많다. 엠마가 살인을 저지른 것은 분명하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알려주는 것이 엠마의 이야기다. 엠마가 가진 정신의 불균형과 상황들이 엮이고 꼬이면서 더 복잡해진다. 이발사로 추정되는 인물이 나타나고, 다른 시체가 발견된다. 하지만 이발사는 아니다. 절친했던 이웃도 그녀를 비난했고, 그녀의 전화가 또 다른 상황을 만든다. 다시 오해할 수밖에 없는 장면을 보고 트라우마는 폭발한다. 이 이야기를 읽으면서 가장 먼저 든 생각은 ‘뭐지?’였다. 그리고 진짜 반전이 펼쳐진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설정이다.

 

등장하는 인물들을 용의자를 만들어놓고 뒤통수를 강하게 때린다. 이 반전에 호불호가 생길 수 있다. 개인적으로 그렇게 호의적이지만은 않다. 어쩌면 읽는 동안 내가 단서들을 거의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심리 스릴러란 부분만 놓고 보면 엠마의 혼란과 공포 등이 강하게 와 닿는다. 순간적으로 긴장을 고조시키고, 폭발시키는 능력은 정말 탁월하다. 당연히 흡입력이 좋다. 본편이 끝난 후 작가 10주년을 기념해 독자들의 메일을 선별해 실었는데 사놓고 묵혀두고 있는 책들에 대한 강한 독서 욕망이 일어났다. 뭐 이 욕망이 다른 작가 작품에서도 늘 있는 일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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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쟈의 한국 현대문학 수업 - 세계문학의 흐름으로 읽는
이현우 지음 / 추수밭(청림출판)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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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쟈란 이름을 알게 된 것은 인터넷 서점의 블로그를 통해서다. 그가 새롭게 출간된 책에 대한 간단한 평을 단 것을 보고 관심을 두었다. 그러다 그가 쓴 책을 읽으면서 그가 보여주는 글의 깊이에 반했다. 내가 전혀 생각하지 못한 부분을 상당히 명쾌하게 지적하면서 풀어낸 것이다. 이전까지 그냥 무턱대고 읽었던 작품을 이렇게 해석해주니 새롭게 읽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물론 바로 읽지는 않았다. 그러기에는 쌓인 책들과 쌓이는 책들이 너무 많았다. 그래도 그가 쓴 글의 영향은 이후 책을 선택하고, 사는데 조금씩 영향력을 행사했다. 러시아 문학과 유럽 문학 전문으로 알고 있던 그가 한국 현대 문학에 대한 글을 썼다고 하니 어찌 그냥 지나가겠는가.

 

저자는 1950년대부터 1990년대까지 시대별로 남성 작가 10명과 그들의 작품을 분석한다. 이 열 명의 작가들이 왜 선택되었는지 보여주는데 솔직히 납득되지 않는 작가도 있다. 아마 이름은 알지만 낯설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대부분의 작품들을 읽었는데 읽었는지 헷갈리는 작품도 있다. 체계적으로 읽지 않고 남독한 결과다. 확실히 읽지 않았다는 사실을 아는 작가도 있다. 집을 뒤지면 한 권 정도는 있는 것으로 알고 있는 이인성이다. 이런 기억을 가지고 로쟈가 선택한 작가와 작품 속으로 들어갔다. 내가 생각한 부분과 다른 해석들이 하나씩 드러났다.

 

손창섭이란 이름보다 <잉여인간>이란 작품이 더 낯익다. 1950년대는 한국전쟁 바로 직후다. 폐허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 군상의 모습을 보여준다. 놀라운 것은 어머니와의 관계를 지적한 부분이다. 이 원체험이 작품 속에 녹아 있다. 자신의 실명을 작품 속에 그대로 쓴 작품도 있다고 한다. 어릴 때 이런 작품을 보면 실제 이야기로 착각했던 기억이 있다. 낯선 제목이지만 아마 책장 어딘가를 뒤지면 한국문학 전집 중에서 손창섭의 소설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최인훈의 <광장>은 거의 필독서처럼 다루어진다. 유명하니 읽었다. 사실 나에게 와 닿지는 않았다. 다른 시대와 상황이, 그의 선택이 공감을 불러오지 못한 것이다. 여러 번 개작이 있었다는 이야기를 들은 것 같은데 일곱 번이란 이야기를 보면서 왜? 라는 물음을 던지지 않을 수 없었다. 한때 열심히 읽은 작가 중 한 명이 이병주다. <관부연락선>도 대학 도서관에서 빌려 읽었다. 너무 오래 전이라 그런지 사실 내용이 기억나지 않는다. 한국의 발자크가 되려고 했다는 사실도 조금 낯설다. <지리산>을 읽으면 이태의 <남부군>과 너무 닮은 장면들에 놀랐던 기억이 난다. 단순 대중 소설가로 인식하고 있던 그를 재평가해야 한다고 한 대목은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무진기행>은 김승옥의 대표작이다. 이 작품을 읽고 그 수려한 문장에 놀랐다. 김훈의 에세이에서도 김승옥에 대한 글이 나오는데 저자는 문장보다 내용에 더 신경을 쓴다. 이 신화적인 작품을 제외하면 솔직히 강한 인상을 받은 작품은 없다. 솔직히 <무진기행>의 내용도 생각나지 않는다. 이번에 기억을 새롭게 했다. 다시 읽으면 어떤 느낌일지 궁금하다. 저자의 지적 중 장편소설로 나아가지 못한 것을 아쉬워하는 대목이 나온다. 윤희중이 현대인의 전형이라고 한 부분에서 고개를 끄덕인다.

 

황석영의 초기 단편을 읽고 난 후 만난 <장길산>은 솔직히 지겨워 중단했다. 어린 시절 도덕관의 한계 탓도 있다. 지금도 가끔 황석영의 소설을 읽지만 현실을 다룰 때 그의 작품은 가장 재밌다. 신문 연재가 한국 작가의 재능을 깎아먹었다는 대목은 인상적이다. 이청준을 좋아하게 된 작품이 <당신들의 천국>이다. 지금도 그의 최고 작품으로 친다. 한국소설에서 나의 이십 대는 이청준과 이문열로 대변된다. 이문열의 <젊은 날의 초상>은 솔직히 공감할 수 없는 내용이었다. 그 당시 나의 관심을 다른 작품이었다. 이문열의 교양주의란 대목은 내가 즐겨 읽었던 작품들의 현학적인 부분을 떠올리게 만든다.

 

어쩌면 가장 낯선 작가가 이인성이다. 평론가 김현의 문학그룹에 속해 있었다는 부분이 눈길을 끈다. 난삽하고 난해한 소설이란 평을 보고는 도전하고 싶은 욕구가 사라졌다. 그래도 찾아내면 한 번 눈길을 줄 것 같다. 유명한 가족을 둔 사람이 명성에 짓눌렸다는 표현은 그렇게 낯설지 않다. 주변에서 가끔 마주하기 때문이다. 이승우의 <생의 이면>은 한 평론가의 추천으로 다시 관심을 가졌었다. 책장에 꽂혀 있는 이승우의 소설들을 생각하면 읽고 싶은 마음은 늘 있다. 프랑스에서 사랑받는 한국 작가란 표현을 보고 영화감독 홍상수가 떠올랐다. 최근 몇 년 동안 무거운 소설을 잘 읽지 못하고 있는데 이 작품은 한 번 읽어보고 싶다. 물론 기약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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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캐너 다클리 필립 K. 딕 걸작선 13
필립 K.딕 지음, 조호근 옮김 / 폴라북스(현대문학)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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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오랜만에 필립 K. 딕의 소설을 읽었다. 한때 그의 작품들이 영화로 만들어지고, 단편집들이 출간되었을 때 열심히 사 모으고, 읽고 했지만 어느 순간 멈추었던 기억이 있다. 현대문학에서 필립 K. 딕 걸작선을 출간했을 때도 한 권씩 모으다 중복되는 책들 때문에 중단했었다. 책 정리하면서 이 책들이 여기저기 꽂히면서 어떤 책이 빠졌는지 기억이 희미하다. 확실한 것은 이번 출간 작품은 이전에 본 적도 산 적도 없다는 것이다. 여기에 작가 이름이 더해지면 당연히 모아야 하는 책이 된다. 사실 이렇게 해서 사놓고 쌓아둔 책이 너무 많다는 함정은 그냥 두자.

 

마약과 비밀 수사요원을 내세운 작품이다. 읽으면서 왜 SF소설이지 하는 생각이 불쑥 들었지만 몇 가지 설정과 도구 등을 보면서 미래를 다룬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책 후기에 이 작품이 어떻게 써여졌는지 알려주는 글이 나오는데 미래를 다루면서 그 당시 마약 용어나 단어들을 사용한 것을 많이 지적받았다고 한다. 무대의 분위기도 그렇게 미래란 느낌이 없다. 실제 작가 자신이 마약을 한 경험을 담고 있는데 이것도 나중에야 알았다. 개인적으로 이렇게 마약 중독자가 나오고, 그들의 정신이 불안정하고 둘쑥날쑥한 이야기에 약하다. 그래서 앞부분을 읽을 때 조금 고생했다.

 

비밀 요원 프레드는 밥 아크터라는 이름으로 살아간다. 신종 마약 D물질의 공급원을 뒤쫓는다. 문제는 그 자신이 이 마약을 상용하면서 자신의 정체성에 혼란을 겪는다. 비밀 요원이다 보니 자신의 정체를 숨긴 채 업무 보고를 한다. 그런데 누군가가 밥 아크터를 신고하면서 자신의 집에 홀로스캐너란 탐지기를 설치한다. 프레드는 이 영상을 보고 밥을 감시해야 한다. 자신이 자신을 감시해야 하는 상황이다. 이 홀로스캐너 자료 전송을 위해 가서 자신의 감시 영상을 보고, 편집하고, 삭제한다. 그의 상부는 프레드가 어떤 마약 중독자인지 모른다. 이 요상한 상황이 프레드의 인격을 더욱 분열시킨다.

 

비밀 요원이 해야 할 일은 마약 공급자를 찾아내는 것이다. 대량으로 도나에게 매입하고자 한다. 그녀를 통해 공급자에게 다가가겠다는 생각인데 상황이 그렇게 쉽지 않다. 도나도 마약 중독자다. 프레드는 도나에게 관심이 있다. 책 마지막에 도달하면 도나의 역할이 바뀌는데 솔직히 말해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그녀의 나이를 생각하면 그렇다. 이 소설 속에서 프레드 주변 인물들은 모두 중독자들이다. 그들이 보여주는 행동이나 말들은 뒤죽박죽이다. 뇌가 타버린 듯한 모습도 보여준다. 내가 적응하기 힘든 부분도 바로 이 부분이다. 맥락없이 갑자기 툭 튀어나오는 이야기는 순간 당혹스럽다. 그냥 쉽게 읽고 지나갈 수는 없다.

 

마약 복용으로 프레드는 자신의 정체성을 잃어간다. 보고를 하러 와서 정신분석의와 상담하고, 검사를 진행하는데 인지 능력에 문제가 있다. 마약에 중독되지 않아야 하는데 그는 이미 중독자다. 그의 상사가 다른 잠입 수사관들은 마약을 하는 척만 했다고 하면서 마약 중독자인 그에게 벌금을 부과한다. 상당히 기이한 장면이다. 또 프레드가 마약 공급책을 찾기 위해 간 뉴패스란 치료소는 프레드가 치료를 위해 실제 입소한다. 여기서 놀라운 반전 하나가 등장하여 프레드를 장기판의 말처럼 이용한다. 마지막 장면을 보면서 과연 프레드가 자신의 정체성을 잃어버린 것이 사실인가 하는 의심이 들기도 한다. 이 장면의 이해를 위해서라도 영화로 만들어진 작품을 한 번 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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