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 오랜만에 김영하의 소설을 읽었다. 매일 긴 시간을 운전해야 했을 때는 그의 팟캐스트도 자주 들었다. 소설 등을 다른 시선에 볼 수 있어 좋았던 기억이 있다. 우연히 잡아 읽게 된 <아랑은 왜>는 나를 김영하의 소설 세계로 이끌었다. 한참 사 모았다. 그리고 그 중 겨우 한 권을 읽고 멈추었다. 고질병이 도진 것이다. 몇 번 쓴 대로 좋아하는 작가들의 책을 사놓고 묵혀두는 나쁜 병 말이다. 그렇게 언젠가 읽어야지 하다 보니 시간이 상당히 흘렀고, 방송 때문에 그의 인지도가 엄청나게 올라갔다. 신작들을 위시리스트에 올려놓았다. 그냥 출간된 책들에 관심만 두었다. 그러다 기회가 되어 7년 만의 장편을 읽게 되었다.

 

솔직히 말해 이 소설을 장편으로 분류해야 할지 의문이다. 편당 활자가 촘촘한 책의 기준으로 편집하면 겨우 100~120쪽 정도면 충분할 것 같기 때문이다. 아마 중편 소설 정도로 분류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리고 이 책은 아직 인터넷 서점에는 정보가 올라와 있지 않다. 전자책 플랫폼 밀리의 서재에서 낸 종이책이기 때문인 듯하다. 한참 동안 인터넷 서점에서 책 정보를 검색했다. 언젠가는 되겠지만 지금은 아니다. 이 소설을 빠르게 읽고 싶은 독자들은 밀리의 서재로 달려가야 할 것 같다. 영리한 마케팅이다. 어쩌면 새로운 방식의 출판과 마케팅인지도 모르겠다.

 

김영하가 풀어낸 SF소설이다. 결론을 말하자면 조금 실망이다. 미래와 인공지능에 대한 이야기를 펼쳐놓는데 분량 탓인지 깊은 이야기가 빠진 채 요약만 넘실거린다. 이런 생각을 하게 된 데는 내가 SF팬이기 때문일 것이다. 이 소설 속 주인공인 철이가 인간이 아닌 휴머노이드라는 이유로 체포되어 겪게 되는 이야기도 확장되지 않고 간략하게 다루어진다. 자신이 인간이라고 생각하고 살아가는 안드로이드의 이야기이지만 구체적인 설명이 상당히 빠져 있다. 내가 아쉬움을 느끼는 대목 중 하나가 바로 이 부분이다. 빠른 전개로 재밌게 빠르게 읽을 수 있지만 말이다.

 

첫 이야기에서 천자문의 몇 글자를 뜻풀이한다. 현학적 시작이지만 다시 한 번 천자문을 생각하는 시간이 되었다. 미래의 한국을 배경으로 인공지능을 다루는 회사에 근무하는 아버지와 함께 사는 철의 이야기가 흘러나온다. 평범한 가정의 일상을 보여주다가 철이 등록되지 않은 안드로이드란 이유로 체포되면서 분위기가 바뀐다. 그리고 현실에 대한 설명들이 나온다. 휴머노이드 등록법이 생겼고, 등록되지 않은 안드로이드 모두 한 곳으로 모은다. 이곳에서도 철은 자신이 인간이란 생각을 버리지 못한다. 살아남기 위해 안드로이드인 척만 한다. 선이와 민이를 만난 곳도 이곳이다.

 

통일 후 한국을 그려낸 부분 중 눈길을 끄는 부분은 있다. 대도시를 제외한 중소도시의 몰락이다. 왜 이런 일이 생겼는지 자세한 설명은 생략하고 있다. 과학의 발전은 인간형 안드로이드를 만들어내고, 곳곳에서 이들을 이용한다. 인간이라고 생각하는 안드로이드는 자는 동안 리셋이 되어 자신이 안드로이드란 사실을 잊는다고 한다. 전투형 안드로이드가 이 장소에서 싸움을 벌이고, 자신들의 파괴된 신체 부위를 교환하거나 약탈한다. 인간이라고 생각하는 안드로이드의 팔을 잡아빼는 장면은 아주 강렬하고 섬뜩하다. 인간이란 착각을 깨트리려면 실체를 바로 봐야 한다. 폭력적이지만 가장 빠른 방식이다.

 

철의 아버지는 인공지능이 계속해서 자기학습하는 것을 반대한다. 인간과 대립할 것이란 생각 때문이다. 종말을 다룬 영화 등에서 자주 본 설정이다. 하지만 이 소설은 그런 식으로 나아가지 않는다. 인간의 멸종은 인간에게서 비롯한 것임을 보여준다. 재미난 표현 중 하나가 나오는데 ‘플라스틱과 닭뼈’를 남겼다는 문장이다. 이야기는 다시 기억과 육체의 문제로 넘어간다. 인간들이 자신의 뇌를 업로드하는 일이 벌어진다. 철이가 네트워크에서 안드로이드 신체로 내려가는데 가장 먼저 느끼는 것은 감각이다. 사실 이 감각도 뇌의 영역이다. 이 이야기를 읽으면서 든 생각 중 하나는 이 거대한 데이터를 저장할 공간이나 에너지는 어디에서 조달하는 것일까 하는 의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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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제7회 교보문고 스토리공모전 단편 수상작품집
엄성용 외 지음 / 마카롱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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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보문고 스토리공모전 중 단편 수상작품집은 처음 읽었다. 장편 부분 작품들은 몇 편 재밌게 읽었다. 사실 단편 수상집이라 잠시 주저한 부분이 있는데 예상외의 완성도와 재미를 주었다. 모두 다섯 편으로 약간 취향을 타는 부분이 있지만 즐겁고 재밌게 읽었다. 다섯 편이 다루고 있는 장르는 다양하다. 한가지 공통점이라면 반전이 있다는 점이라고 할까. 올해 수상작품집 때문에 이전 수상작들도 궁금해졌다. 앞으로 기대해도 좋을 공모전이 아닌가 생각한다.

 

<롸이 롸이>라는 제목을 보고 중국어 래(來)가 떠올랐다. 중국과 관련된 이야기인가? 미세먼지를 다룬다는 점을 감안하면 은연중에 이 제목을 사용했을지도 모르겠다. 미세먼지가 심해져 마스크 없이 밖으로 나가는 것이 힘든 가까운 미래 이야기다. 이 시대에 담배는 마약처럼 취급된다. 이런 담배를 몰래 제공하는 인물이 있다. 그녀는 오컬트 동아리 회원이다. 그녀는 자신의 마을로 동아리 회원들을 초대한다. 담배도 일정의 금액도 지급하겠다고 말한다. 미세먼지 가득한 세상에서 그 마을은 청정한 공기를 유지하고 있다. 하지만 마을 사람들이 요구한 조건을 따르지 않고 살짝 엿보면서 상황이 급반전한다. 이후 펼쳐지는 장면들은 코믹하면서도 섬뜩하다. 금연의 중요성이 이렇게 드러나는 작품이 있을까? 간접흡연도 역시 위험하다.

 

<휴먼 콤플렉스 임상 사례>는 SF와 일기의 형식을 지닌다. 인류가 보호종으로 지정될 정도의 먼 미래다. 주인공은 심리상담사이고 그가 담당했던 상담자 K에 대한 이야기다. 휴먼 콤플렉스란 단어에서 알려주듯이 이 시대는 인류가 네오테니언, 합성 유전자인, 케미컬 클론, 방사능 돌연변이 등보다 못한 존재다. 배설행위, 교미에 비유되는 성교, 나노봇에 의한 치료 불능 등이 콤플렉스다. 임상 사례란 단어가 K의 상담임을 알려준다. 평범한 SF 단편처럼 읽히던 내용이 마지막으로 달려가면서 분위기가 바뀐다. 콤플렉스에 대처하는 최악의 모습이다.

 

<용옹기이>는 이 수상단편집에서 가장 재밌게 읽은 작품이다. 긴박한 상황을 앞에 놓고, 왜 이런 상황이 벌어졌는지 보여주면서 3대의 숙원을 다룬다. 처음에 예상한 <용옹기이>의 가치가 내 예상을 빗나갔고, 혹시 다른 책이 더 중요한 것이 아닐까 하는 기대도 마찬가지다. 백수 용수산이 수상한 그림자를 피해 다니면서 느낀 압박감이 긴장감을 불러오고, 하루라는 시간은 속도감을 불어넣었다. 군더더기 없이 진행되는 와중에 예상하지 못한 장면들이 나오고, 코믹함도 잊지 않았다. 인간의 탐욕이 상황을 어떻게 인지하는지 잘 보여준다.

 

<구독하시겠습니까>는 유튜브와 몰카 문제를 다룬다. 평범한 직장인 미이의 삶을 뒤흔들고 위협하는 일이 인터넷을 통해 알려진다. 미이는 자신의 삶이 인터넷에 나온다는 사실을 몰랐다. 이 영상을 본 직원이 은밀히 다가와 성희롱을 하면서 알게 된다. 이 계정을 알고 그녀가 할 수 있는 기본적인 조치는 다 취하지만 해결되지는 않는다. 직장 동료들은 많은 구독자들 때문에 부러워할 뿐이고 그녀가 몰카 희생자란 사실을 믿지 않는다. 자신들이 몰카의 희생자가 되었을 때 분노하지만 정작 가장 큰 피해자는 무시한다. 마지막 장면에서 보여주는 수많은 카메라는 씁쓸하고 섬뜩하다.

 

<페이스트리>는 깨어진 가족이 합창을 통해 뭉쳤다가 다시 해체된 이야기다. 한강 다리 밑 포장마차 천막에서 그들은 사람들의 욕을 합창으로 따라한다. 이 천막은 그들의 주거지이자 영업장소다. 사람들은 이들을 찾아와 욕을 내뱉으면서 쌓인 불만과 걱정을 털어낸다. 직장 상사, 시어머니, 애인, 친구 등에게 욕을 쏟아내는데 어딘가에서 한 번 이상은 본 모습이다. 이 합창단은 유명해지고, 방송출연까지 요청 받는다. 방송작가마저도 자신의 불만사항을 토해내는 장면은 우리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집을 떠날 때 사먹고, 딸이 잘 만드는 페이스트리는 가난과 희망의 상징이다. 마지막 방송사고와 그 뒷 이야기는 현실적이면서도 낭만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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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느낌의 시간 / 우리가 서로 알지 못했던 시간 이상의 문학
페터 한트케 지음, 김원익 옮김 / 이상북스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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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터 한트케의 책은 처음 읽었다. 집에 몇 권은 더 있을 것 같지만 내 기억이 맞다면 처음이다. 인터넷서점에서 작가 이름으로 검색하고 출간된 책들의 표지를 보고 다시 한 번 더 확인했다. 이제 내가 한 번도 읽지 않은 작가들이 노벨문학상을 수상하고 있다. 노벨문학상 수상 전 거의 출간되지 않은 작가들이야 그렇다고 하지만 페터 한터케는 상당한 작품이 출간되었다. 나의 독서가 한쪽으로 편향되면서 이런 작가들의 작품을 점점 덜 읽게 된다. 문학상이라고 받으면 관심을 두지만 재미 위주의 책들로 가득하다. 그래서인지 이 책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소설 한 편과 희곡 하나로 구성되어 있다. <진정한 느낌의 시간>이라는 중편소설과 <우리가 서로 알지 못했던 시간>이라는 무언극 희곡이다. 공통적으로 시간이란 단어가 제목에 들어가 있다. 원제가 그런 것인지 아니면 편집하면서 바뀌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이런 구성의 책을 오랜만에 본다. 개인적으로 더 흥미로운 작품은 무언극 희곡이다. 광장과 그곳을 지나가는 사람들을 보여주는데 특별한 주인공이 없다. 수없이 많은 인물들이 지나가고 작은 몸짓만 있을 뿐이다. 길을 가는 방식도 다르다. 빠르게 느리게 사선으로. 갑자기 커피숍 창밖으로 오거리를 걸어서 지나가던 사람들을 멍하니 보던 때가 떠오른다. 그리고 이들이 스쳐지나간 순간들은 나중에 서로가 알게 될 때 그 시간과 공간으로 의미를 지니게 될 것이다.

 

<진정한 느낌의 시간>의 주인공은 파리 주재 오스트리아 대사관 언론 담당관이다. 그레고르 코위쉬니히가 이름이다. 입에 잘 붙지 않는 이름이다. 코위쉬니히의 일상과 그가 느끼는 감정들을 풀어내는데 쉽게 몰입하지 못했다. 그가 돌아다닌 거리와 만난 사람들과 업무들이 다양한 느낌으로 드러난다. 이 느낌은 둘쑥날쑥하는데 이것을 어디까지 현실로 받아들여야 할지 모르겠다. 애인과의 만남과 의미없는 몸짓이 이어지고, 죽음의 충동을 느끼고, 처음 보는 낯선 여자와 섹스를 한다. 누군가를 살해하는 긴 꿈을 꾸기도 한다. 보고 느끼는 시간들이 계속 이어진다. <우리가 서로 알지 못했던 시간>이 한 공간에서 오고 가는 사람들을 보여준다면 이 소설은 코위쉬니히의 시선을 따라간다. 그의 시선은 느낌의 변주로 이어진다.

 

진정한 느낌이란 과연 가능할까? 이 느낌이 일시적이지 않고 지속적일 수 있을까? 본다는 것과 움직이는 것과 만난다는 것이 결합하면서 느끼는 감정은 유동적이다. 죽음을 생각한 그가 달려오는 차를 피하는 것이 단순히 본능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진정한 느낌이라고 생각했지만 그 느낌은 순간의 느낌이다. 다르게 생각하면 이런 느낌들이 모여 진정한 느낌이 될 수도 있다. 말하고자 한 말을 다르게 내뱉은 것은 또 어떤 느낌일까? 다른 소설도 읽고 이 작가의 세계를 좀 더 알아봐야겠다. 그가 이전에 주장한 것 때문에 많은 비판을 받았는데 이 부분도 좀 더 생각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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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몽전파사 소설Q
신해욱 지음 / 창비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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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을 잘 읽지 않는 나에게 신해욱이란 이름은 낯설다. 하지만 시인이 쓴 소설이라면 관심이 간다. 이 소설을 선택한 두 가지 이유 중 하나다. 또 다른 하나는 제목이다. 요즘은 보기 힘든 전파사란 단어가 나의 관심을 끌었다. 예전에는 무슨무슨 전파사란 상호를 단 가게가 참 많았다. 이제는 이런 가게를 찾기가 힘들다. 소설 속에 나오는 전업사란 단어는 더욱 희귀하다. 제목에서 약간 아련한 과거의 기억을 떠올려본다.

 

화자가 꾸거나 사거나 얻은 꿈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 마흔여섯 개의 꿈 이야기는 현실 속 진행만큼이나 많은 분량을 차지한다. 이 꿈 이야기를 읽다보면 어떤 순간에는 시를 읽는 듯한 느낌을 받을 때가 있다. 좀 더 차분하게 음미한다면 비현실적인 꿈 이야기를 다르게 볼 수도 있을 것 같다. 정신분석에서 다루는 꿈 이야기와 다른 각도에서, 전통적인 해몽과도 다른 방법으로. 아니면 꿈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방식으로 말이다. 이 꿈 이야기를 읽다가 어릴 때 꾸었던 수많은 꿈들이 잠시 머릿속을 스쳐지나갔다. 황당한 꿈부터 공포에 짓눌리거나 꿈속 주인공이 된 나의 모습 등.

 

화자는 우연히 해몽전파사에 간다. 고장난 드라이기를 고치려고 갔다가 꿈을 사거나 교환한다는 전단지를 본다. 그녀는 자신의 꿈을 들려주고 돈을 받는다. 이를 계기로 해몽전파사에서 열리는 갖가지 꿈 모임에 참석한다. 어느 순간에 그곳에서 일하는 사람이 된다. 자신의 꿈속 등장인물 같고, 자신이 진주씨라고 부르는 주인이 유방암에 걸리면서 한 가지 제안을 한다. 꿈을 천 개 모으면 해몽전파사를 넘겨주겠다는 말이다. 솔깃하지만 이 일을 성공하는데 얼마나 시간이 걸릴지 모른다. 불안정한 삶을 사는 그녀에게 매력적인 제안이기도 하다.

 

꿈 이야기는 나에서, 진주씨로, 설아씨로, 삼월씨로 이어진다. 해몽전파사가 의도한 바가 바로 이런 꿈을 공유하는 것이다. 꿈 이야기 사이에 현실이 비현실적으로 들어와 그들의 이야기를 한다. 대표적인 것인 삼월씨의 해월전업사 이야기다. 한 장의 사진과 주소, 존재하지 않는 가게와 기묘하게 느껴지는 꿈은숲 모임 하나. ‘꿈은숲’이란 이름은 화자가 등록한 1인출판사 이름이다. 작가는 등장인물들이 삶에 깊숙이 개입하기보다 간략하게 다루면서 어느 정도 거리를 둔다. 오히려 꿈 이야기가 더 앞으로 나온다. 하지만 이 꿈 이야기를 교환하면서 이들은 점점 가까워진다.

 

작가는 꿈 이야기만 엮으려고 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런 시도가 성공할 가능성은 아주 낮다. 책 속에서 나쓰메 소세키의 <몽십야>을 말하고, 실제 모임에서 이 책을 읽으려고 했다고 한다. 괜히 이 책에 관심이 간다. 페데리코 펠리니의 꿈 모음집이 있다고 하는데 어떤 내용일지도 궁금하다. 가볍게 읽을 수 있을 것이란 기대는 읽으면서 사라졌지만 읽기 힘든 책은 아니다. 다만 이해하는 것은 다른 영역이다. 읽을 때보다 지금 전체적인 이미지가 더 많이 내게 말을 건낸다. 소설 속 꿈이 아니라 나의 꿈들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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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왕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65
미셸 투르니에 지음, 이원복 옮김 / 민음사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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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툼한 분량에 결코 쉽지 않은 내용을 담고 있다. 천천히 읽으면서 많은 것을 생각해야만 그 재미를 충분히 누릴 수 있는 작품이다. 그런데 나의 독서법은 이런 완독과 숙독에 익숙하지 않다. 그리고 언제부터 생긴 것인지 잘 모를 미셸 투르니에에 대한 거부감은 솔직히 말해 진입 장벽을 높여놓았다. 아마 나 자신이 작은 욕심을 내지 않았다면 다른 책들처럼 오랫동안 책장에 묻혀 있었을 것이다. 그렇게 책더미 속에 묻힌 책들을 최근 한 권씩 꺼내고 있지만 쌓이는 속도를 뛰어넘을 정도는 아니다. 이 작품을 완독한 후 이전 같은 미셸 투르니에에 대한 거부감은 많이 사라졌다. 사놓고 묵혀둔 그의 책들이 다른 느낌으로 다가온다.

 

마왕. 슈베르트의 가곡이 먼저 생각난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판타지 소설 속 마왕이 먼저다. 이 소설은 판타지가 아니니 괴테의 시를 기반으로 쓴 가곡이 먼저다. 어딘가에서 한 번은 들어봤을 테지만 클래식은 잘 모른다. 읽다 보면 아벨 티포주의 일기가 나를 혼란스럽게 한다. 지독한 근시에 거구지만 음경왜소증에 걸려 있고, 아이들에 집착한다. 자신이 경험한 학창 시절 이야기는 세계를 상징으로 이해하게 만드는 계기가 되지만 현실에서 그는 자동차 정비소 사장이다. 시간대는 1939년, 2차 대전을 바로 코앞에 둔 시기다. 전쟁과 마왕, 잘 어울리는 조합이다. 그런데 한 소녀를 강간했다는 명목으로 잡힌다. 이때 독일이 침공해 징집되면서 풀려난다. 머릿속에 ‘뭐지?’하는 물음표가 하나 생긴다.

 

징집된 그는 통신병으로 일하다 포로로 잡힌다. 포로가 된 후 독일의 동프로이센으로 보내진다. 이곳에서 티포주가 보여주는 생활은 우리가 아는 포로병의 생활이 아니다. 밤에 포로수용소를 나가 산림감시관의 집에서 머무는 날이 있을 정도다. 이런 그가 로민텐으로 보내진 후 마주하는 사건들은 잊고 있던 첫문장의 ‘식인귀’를 떠올리기 충분하다. 괴링이 사냥터에 와서 보여주는 행동은 가장 원시적인 욕망의 표출이다. 권력은 가장 순수한 형태로 자신의 욕망을 드러낸다. 불편한 장면들이다. 이곳에서 티포주는 관찰자일 뿐이다. 전쟁포로인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제한적이다.

 

전쟁은 상황을 비현실적으로 만든다. 히틀러에게 그의 생일날 매년 바쳐진 50만 명의 소년, 소녀들의 모습을 보라. 칼텐보른은 10대 소년들을 징집해 소년병으로 훈련시킨다. 전쟁은 평범한 전쟁포로였던 티포주를 칼텐보른의 식인귀로 만든다. 물론 그는 작은 대리인일 뿐이다. 이 책 전체를 통해 계속 표현되는 티포주의 아이에 대한 관심과 집착은 징집으로 거대하게 부화한다. 말 탄 거인이 나타나면 끌려갈 수밖에 없다. 이때 그에게 공책 등이 주어지면서 이 일과 시간들을 다시 기록한다. 인종주의가 곳곳에서 살아 움직이고, 아이들은 제물처럼 다루어진다.

 

동프로이센 지역의 역사가 일부 나오고, 기사단들이 어떤 의미인지 말한다. 이것은 소년병들과 겹쳐진다. 중세의 기사단처럼 이 아이들도 전쟁에 동원되기 때문이다. 전쟁 상황이 점점 독일에게 불리하게 흐를수록 보급이 나빠진다. 티포주가 아이들의 머리카락으로 뭔가를 만들려고 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것이 나중에 아우슈비츠의 현실과 겹친다. 자신의 욕망이 거대한 악과 잠시 연결되었던 순간이다. 쌍둥이에게 끌렸던 그의 모습은 멩겔러와도 겹친다. 티포주의 관심은 작은 욕망에 머물지만 이것이 거대한 광기와 권력으로 이어지면 아주 참혹한 장면을 만들어낸다. 그 대표적인 공간이 아우슈비츠다. 티푸주가 구한 에프라임을 통해 이 사실이 드러난다.

 

이 소설은 무겁고 어둡다. 거대한 자연의 아름다움이나 아이들의 순수함이 잠시 빛을 발하지만 전쟁의 광기는 이것을 모두 삼켜버린다. 티포주를 닮았던 살인자를 단두대에 올렸을 때 보여준 프랑스 시민들의 모습은 또 다른 광기이자 식인이다. 이 광기가 더욱 확대된 곳이 독일제국이다. 소년병들을 전쟁에 투입하기 위해 훈련하는 과정에서 생긴 사고는 실제 전투에서 일어난 비극에 비할 바가 아니다. 악은 전면에 나와 싸우지 않고, 뒤에서 제물들을 조종할 뿐이다. 성 크리스토프 신화를 차용해 풀어낸 마지막 장면은 참혹한 자살 장면과 대비되면서 진한 여운을 남긴다. 잠시 나의 지나온 삶을 돌아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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