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움의 발견 - 나의 특별한 가족, 교육, 그리고 자유의 이야기
타라 웨스트오버 지음, 김희정 옮김 / 열린책들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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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교육을 거부하는 아버지로 인해 16년간 학교에 다니지 못한 저자가 어떻게 케임브리지 박사가 되었는지 알고 싶어 읽었다. 홈스쿨링의 결과인가 하고 생각했지만 이 책은 그런 내용이 아니다. 모르몬교 광신도인 아버지와 그 아버지를 맹신하며 엄마와 그녀와 그녀의 오빠들 이야기다. 세상의 종말을 대비하고, 정부를 믿지 않고, 이 때문에 출생신고조차 하지 않는 부모다. 하나의 사건을 가족들에게 계속 말해 각인시키면서 불안감을 조성하는 사람이 아버지다. 읽으면서 현대에 이런 가족이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지만 우리의 상상력을 초월하는 현실은 언제나 있다. 괜히 평범하게 나를 키워주신 부모님들이 고맙게 느껴진다.

 

타라의 비망록이다. 결코 아름다운 이야기가 아니다. 열여섯에 처음 제대로 공부를 시작한 그녀의 삶을 날 것 그대로 담고 있다. 종말론 때문에 자신만의 방주를 지으려는 아버지의 욕망은 가족을 위험으로 몰아간다. 이 아버지의 독단과 뒤틀린 감정들은 두 번이나 가족 전체를 죽음 앞까지 몰고 갔다. 위험한 길을 엄청난 속도로 달렸고, 쉬지도 못하면서 생긴 교통사고다. 그들은 보험조차 없다. 병원도 믿지 않는다. 정말 위험해지면 병원에 가긴 하지만 어떤 순간에는 그마저도 하지 않는다. 아버지의 조급증은 자식들을 위험 속으로 밀어넣는다. 실제 루크 오빠는 현대 건설 현장 등에서 가장 신경을 쓰는 안전수칙을 하나도 지키지 않으면서 생긴 일이다. 절단기 이야기는 또 어떤가. 읽으면서 불안감을 놓지 못했다.

 

처음부터 이런 환경 속에서 자란 타라는 이것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자신의 세계가 얼마나 좁은지, 무슨 문제가 있는지 알지 못한다. 오빠 중에서 대학에 가는 사람이 생긴 것은 배움에 대한 열정 때문인데 이 오빠마저도 예방접종에 대한 거부감을 보여준다는 대목은 아주 놀라웠다. 타라도 마찬가지다. 그녀는 이 가족을 아주 어렵게 떠난다. 그녀 속에 자리한 공포와 두려움과 외로움 등이 그녀가 새롭게 발견한 삶을 계속 이어가는 것을 방해한다. 대학 생활 중 자신이 발전했다고 과대평가한 것을 반성하는 대목도 나온다. 제대로 돌아가는 부분에 집중하면서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 부분을 신경 쓰지 못한 것을 지적한다. 이런 삶은 대단한 용기와 의지가 필요하다.

 

이 가족들은 언제나 돈에 쪼달린다. 제대로 된 일을 하지 않다 보니, 제대된 장비가 없다 보니, 우연히 생겨도 사고 때문에 더 나아가지 못한다. 병원에 가서 목숨을 구했지만 10년간 갚아야 한 빚이 생긴다. 타라가 대학에 들어가서 적은 돈에 불안해하고, 학업을 포기할지 말지 결정하는 것도 그녀 개인 문제와 가족의 경제 사정이 겹쳐 있다. 치과 치료를 받는데 1,400불이 필요한데 이것도 없다. 이 부분을 읽으면서 한국의 의료보험이 얼마나 대단한지 느꼈다. 그녀는 정부의 교육비 지원을 받을 수 있는데 어릴 때 받아온 음모론 때문에 몇 번 거부한다. 그 돈을 신청해 받았을 때도 자신이 필요로 한 돈보다 많다고 말할 정도다.

 

타라와 갈등을 일으키는 오빠는 숀 오빠다. 아주 폭력적이다. 그에게 여자들이 따르는데 그는 맹목적인 여성을 원한다. 동생에게 폭력을 휘두른다. 여자 친구도 마찬가지다. 물론 숀 오빠와 좋은 시간을 가진 적도 있다. 하지만 그의 폭력성은 자신의 지배력을 강화하기 위한 수단이다. 한 어린 여자가 이 폭력 앞에 무력하게 노출된 상태다. 가족들이 돌봐야 하지만 엄마는 침묵하고, 아빠는 최악의 선택을 한다. 엄마의 오일 사업이 성공하면서 대학을 졸업하지 못한 형제자매들은 부모에게 억매일 수밖에 없다. 타라가 부모의 품안에 들어가길 거부했을 때 일어난 사건들은 경제적인 부분도 무시 못할 것이다.

 

공교육을 받지 않고 대학에 간 그녀가 경험하는 공교육의 현장은 온통 낯설기만 하다. 룸메이트의 복장이나 음식도 눈에 거슬리고 불편하다. 그때까지 평생 세뇌당한 삶을 산 그녀이기에 어쩔 수 없다. 다른 친구들이 학업을 따라가는 방식과 다른 과정을 그녀는 거쳐야 한다. 기초 지식과 상식이 너무 부족하기 때문이다. 시험 보는 법도 제대로 모른다. 짧은 컨닝에 대한 기록은 그녀의 과거를 아주 함축적으로 보여준다. 다른 사람보다 늦은 시작은 더 많은 노력을 요구한다. 하지만 그녀가 살아온 길이 다른 학자들에게는 신선했던 모양이다. 좋은 교수들을 만난 것도 무시할 수 없다. 그녀의 자아는 여러 번 바뀌었고 다른 이름으로 불릴 수 있다. 변신, 탈바꿈, 허위, 배신. 그녀는 이것을 교육이라고 부른다. 이 특이한 가족 이야기 속에서 결코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그녀의 의지와 용기와 열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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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담수집가
전건우 지음 / 북오션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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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건우의 작품을 꽤 읽었다고 생각했는데 실제 그의 작품을 찾아보니 몇 권 되지 않는다. 작가 모음집은 상당히 많이 보이는데 실제 출간된 그만의 작품은 얼마 없다. 아마 그의 이름이 익숙한 것은 재밌게 읽었고, 다른 곳에서 그의 이름을 자주 봤기 때문일 것이다. 에세이 <난 공포소설가>를 포함하면 이제 4권이다. 읽지 않는 단행본은 세 권이다. 이렇게 숫자를 적고 보니 다른 책들도 읽고 싶어진다. 늘 그렇듯이 이 약속은 장담할 수 없다. 읽겠다고 마음먹은 작품들이 뒤로, 끝없이 뒤로 밀린 경우가 너무 많기 때문이다. 가끔 이 책들이 고물상으로 넘어가는 악몽을 빠진다.

 

공포소설가가 괴담을 수집하는 것은 당연하다. 작가는 열다섯 편의 단편 속에서 처음과 마무리를 똑같은 문장을 사용한다. ‘누군가에게 들은 이야기이다.’와 ‘물론 진실은 알 수가 없다.’가 바로 그 문장이다. 이 두 문장은 괴담의 특성을 잘 보여준다. 누군가에게 들었지만 사실인지 알 수 없다는 구전 괴담의 특성 말이다. 이 괴담들은 입으로 전해지면서 많은 변형이 일어난다. 어릴 때 누구나 한 번 이상 이런 괴담을 듣고 자랐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이 괴담집의 몇 편은 익숙하다. 읽다 보면 마무리가 눈에 들어온다. 물론 그 예상을 뛰어넘는 마무리도 있다.

 

이 괴담집은 크게 둘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귀신이 등장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일상 속에서 벌어지는 것이다. 숫자로만 보면 귀신 등이 나오는 것이 훨씬 많다. 귀신이 배제된 이야기에서 주인공은 보통 사람이다. <룸메이트>, <보이스 피싱>, <옆집 사람>, <선한 사마리아인> 등이 대표적이다. <룸메이트>는 마음에 들지 않는 룸메이트가 갑자기 조용해진 사항은 이해하게 되었지만 마지막 반전은 예상 밖이었던다. <보이스 피싱>은 업자에게 괜히 장난치고 욕하면서 일어나는 일이다. 개인정보보호가 절실하게 필요한 이유가 잘 드러난다. <옆집 사람>은 흔한 스릴러 설정이고, <선한 사마리아인>은 괜히 나섰다가는 큰일을 당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왕따 문제를 다룬 작품들도 있는데 <화약고 근무>와 <어제 죽은 친구>가 그렇다. 군대와 학교는 대표적인 공동체 모임이고, 가장 흔하게 왕따가 일어나는 곳이다. 이 두 이야기의 결말은 예상했지만 서늘함이 살아 있다. 인간의 뒤틀린 욕망이 만들어낸 이야기는 <습득물>과 <액운>이 있다. <습득물>은 지하철에서 발견한 돈다발 때문에 벌어지는 추악한 살인을 다루는데 뫼비우스 띠 같은 느낌이다. <액운>은 내 가족만 아니면 된다는 욕심이 꿈틀거린다. 작은 욕심 때문에 생긴 일을 다룬 작품이 <아르바이트>와 <구제 옷>이다. 단기고수익알바가 결코 쉽지 않다는 사실을 알려주거나 싼 가격에 산 옷에 귀신이 찾아온다는 설정은 낯익다.

 

성폭행 등과 관계있는 작품은 <지하실>과 <죽음의 노래>가 있다. <지하실>은 과거 악행을 고백하는 부분이 충격적이다. 어쩔 수 없는 고백이라고 하지만 이 뒤가 궁금하다. <죽음의 노래>도 고백이라 장치를 사용한다. 미신이라고 믿고 행동하는 화자의 추악한 과거가 드러날 때 수많은 성폭행 피해자들의 이미지가 떠오른다. <방문자>는 인터넷 게시판을 이용한 공포물인데 그 정체를 알 수 없음이 무섭다. <초인종>도 마찬가지다. 정해진 시간에 찾아오는 존재가 부정확하다. <절대 검색해서는 안 되는 단어>는 보면서 <링>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 그 단어가 궁금한 것은 나만이 아닐 것이다.

 

실제 이 열다섯 단편을 읽는데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단숨에 읽었다. 분량이 많지 않았고, 낯익은 듯 낯선 이야기가 강한 흡입력을 발휘했다. 이야기 하나 하나의 완성도는 조금 떨어지지만 나처럼 늦은 밤 서늘하게 읽기에는 부족함이 없다. 만약 한 편 한 편 완성도 있는 단편집을 원한다면 조금 아쉽다. 물론 이것은 개인의 취향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위의 글에서 임의적으로 분류해 간단한 감상을 달았는데 누군가는 이 단편 속에서 우리 사회의 많은 모습을 찾아내어 다른 해석으로 나아갈지도 모르겠다. 착해서 당하는 인물들은 언제나 씁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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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스 어폰 어 타임 인 홍콩
마가파이 지음, 허유영 옮김 / 현대문학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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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은 중일전쟁부터 좌우 사상 대립, 홍콩 반환 협상에 이르는 근대사를 아우르는 ‘홍콩 3부작’ 프로젝트의 1부다. 원제인 ‘용두봉미(龍頭鳳尾)’는 마작 용어라고 한다. 삼합회의 우두머리이자 영국인 정보경찰의 꼬리로 살았던 주인공 록남초이의 삶을 표현한 것이기도 하다. 홍콩판 남-남판 <색.계>란 평가를 받고 있다. 이런 소개글들이 모두 나의 시선을 끌었다. 홍콩의 역사를 삼합회의 시선으로 풀어낸 것도 아주 인상적이다. 한창 유행했던 홍콩 영화 속 삼합회의 이전 역사를 들여다본다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다.

 

처음 프롤로그를 읽을 때는 마가파이 가족 이야기를 하는 줄 알았다. 하지만 금방 록박초이 이야기로 시작한다. 이 인물이 어떻게 홍콩으로 오게 되었는지, 그가 왜 남자에게 끌리는지 등을 보여준다. 이것은 자신과 아내의 과거 성폭행과 관계있다. 아내는 아빠에게, 록박초이는 작은아버지다. 이 나쁜 경험은 둘의 삶에 큰 영향을 끼친다. 록박초이의 아내 아귄은 엄청난 성욕을 발휘하고, 절정에 이르면 아빠를 외친다. 록박초이는 아내의 욕망을 완전히 채워주지 못한다. 그리고 작은아버지의 성폭행은 자신의 또 다른 성 취향을 깨닫게 한다. 물론 이 사실을 드러낼 수는 없다.

 

록박초이가 아내를 떠나게 된 데는 아내의 폭력이 큰 역할을 했다. 당시 군벌 하나에 군인으로 입대한다. 여기서 그는 비밀이 밖으로 알려졌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배운다. 이 비밀이 죽음을 가져오고, 밀고자가 누군지 알게 되는 순간 폭력 아래 놓인다. 운 좋게 살아난 그가 다시 떠나 도착한 곳이 바로 홍콩이다. 이곳에서 그는 인력거꾼이 된다. 친구들과 함께 한 집에 살게 되는 데 이때 록남초이란 이름으로 바꾼다. 그는 현재에 완전히 안주하려는 마음이 없다. 주된 고객이 영국인이다 보니 영어를 배우려고 한다. 이곳에서 그는 다른 비밀 하나를 보고 만다.

 

평범한 인력거꾼이던 그가 영국인들을 태우고, 언어를 배우려고 하면서 영국인 정보경찰 모리스와 엮인다. 모리스는 록남초이를 통해 정보를 얻으려고 하고. 록남초이는 그에게 끌린다. 결국 록남초이는 모리스의 은밀한 애인이자 정보원이 된다. 하지만 하나의 사건이 일어나면서 그는 홍콩을 떠날 수밖에 없게 된다. 다시 집에 돌아온 그가 본 것은 중일전쟁으로 척박해진 동네와 아내 아귄으로 인한 복잡한 가족 관계다. 동생이 아귄가 집을 떠났고, 동생을 보기 위해 간 광저우에서 그는 새로운 사실과 함께 삼합회의 일원이 된다. 나중에 매춘부를 관리하게 되면서 수많은 여성을 상대하지만 마음 한 곳에는 모리스가 차지하고 있다.

 

사실 록남초이보다 동생이 더 삼합회에 어울린다. 성격과 행동을 봐도 그렇다. 이때 록남초이가 하나의 마케팅 안을 내는데 이것이 조직에 큰 이익을 가져다준다. 그러다 홍콩에 새로운 삼합회 조직을 세울 필요가 생긴다. 그가 속한 조직의 두목 아들도 데리고 가야 한다. 그가 만든 조직은 손흥사로 불리고, 예전 친구들도 합류한다. 이 당시 삼합회는 군벌의 영향 아래에 있었다. 작가는 이 조직들이 바라는 바를 간단하게 말한다. 바로 돈이다. 나중에 조직들 사이에 알력이 생겼을 때 이것을 아주 노골적으로 보여준다. 동시에 그들 위에 누가 있는지도.

 

이 소설은 홍콩의 역사이지만 중국 역사의 한 자락을 차지한다. 당시 군벌들 사이에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상하이에서 일어난 암살 사건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보여준다. 폭력배들이 거리를 장악하고 있고, 이들을 뒤에서 경찰이 봐준다. 상납의 고리가 만들어진다. 중일전쟁과 더불어 일제의 침략은 홍콩을 혼란의 도가니로 몰아간다. 정보가 중요해진다. 모리스와 록남초이는 이런 이익관계 속에서 서로를 탐한다. 이 둘의 관계는 홍콩 역사의 이면이다. 경찰은 자신들의 편리함을 위해 삼합회 조직을 이용했고, 이것이 결국 홍콩 삼합회를 거리의 지배자로 만든다. 나중에 일제가 점령했을 때도 이것은 마찬가지다.

 

평범한 인력거꾼이었던 그가 어떻게 삼합회의 두목이 되고, 권력과 엮이고, 자신의 동성애 취향을 숨긴 채 살았는지를 역사 속에서 보여준다. 홍콩하면 한때 떠나지 않았던 마작과 매춘과 마약이 역사의 한 자락을 차지한다. 이것들이 엮이고 얽힌 과거사 속에 한 인간의 사랑과 욕망이 조용히 꿈틀거리며 자란다. 비밀을 지키려고 하지만 드러날 수밖에 없고, 이 비밀은 또 다른 사람의 삶에 큰 무게로 작용한다. 이것을 작가는 ‘좆대로’란 단어로 삶의 기준을 삼게 만든다. 거대한 역사의 흐름 속에서 개인의 의지와 힘은 너무 무력하다. 상당히 가독성이 좋고, 작가가 발표하려고 한 나머지 2부작도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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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사관 살인사건 일본 추리소설 시리즈 8
오구리 무시타로 지음, 강원주 옮김 / 이상미디어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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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일본 추리소설 3대 기서 중 한 권을 읽었다. 다른 두 권도 집에 있는데 솔직히 말해 언제 읽을지 모르겠다. 현학적이란 글을 보고 교코쿠도 나츠히코의 소설을 재밌게 읽었던 기억 때문에 이 소설을 조금은 쉽게 읽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은 나의 오만이자 착각이었다. 정말 힘들게 다 읽었다. 현학적인 내용은 뺀다 해도 트릭 등을 아주 열심히, 집중해서 읽지 않으면 따라가기가 쉽지 않다. 어떻게 보면 나도 활자만 따라간 것인지도 모르겠다. 혹시 다시 읽게 된다면 지금보다 훨씬 느리고 천천히 음미하면서 읽어보고 싶다. 혹시 하는 마음 때문이다.

 

후리야기 성관은 중세 유럽에서 흑사병으로 죽은 사람들의 시체를 넣어둔 성관과 닮았다고 하여 흑사관으로 불린다. 이 흑사관의 주인은 산테쓰 박사였다. 그는 유럽에서 의학과 마술을 연구한 인물이다. 이 가문은 카테리나 데 메디치의 사생아라는 비앙카 카펠로로부터 시작한다고 전해진다. 이 이름과 보스포루스 해협 동쪽이란 지명 때문에 이 흑사관이 일본이 아니라 터키 근처에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탐정부터 출연하는 인물들이 모두 일본인이다. 아주 현학적인 탐정인 노리미즈 린타노나 하제쿠라 검사나 구마시로 수사국장 등이 바로 그들이다.

 

후리야기 가문은 이상한 죽음을 계속하고 있다. 산테쓰 박사가 1년 전에 기괴한 방법으로 자살했고, 흑사관 안에서 감금된 채 길러진 네 명의 외국인들이 있다. 이들은 어린 나이에 흑사관에 들어왔고, 밖으로는 한 번도 나가지 못했다. 이들 중 한 명이 죽으면서 노리미즈가 하제쿠라와 구라시로 등과 함께 흑사관에 들어와 수사를 한다. 비극적인 가문 이야기와 연쇄살인과 신비주의 등을 엮어 이야기가 전개되는데 사실의 나열보다 신비주의, 점성술, 종교학, 심리학, 암호학 등의 다양한 학문들이 더 많은 부분을 차지한다. 다른 추리소설에서도 그렇지만 이런 전문 분야 이야기가 나오면 집중력이 흩어진다. 수많은 문헌과 그 책에서 인용한 문장과 지식 등은 감탄을 자아내게 한다. 뭐 덕분에 이 부분을 가볍게 스쳐지나가듯이 넘어가게 되지만 말이다.

 

살인사건이 일어나고, 수사를 의뢰하고, 용의자 등을 심문하는 과정은 일반 추리소설과 별 차이가 없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독자를 압도하는 작가의 지식들이 끝없이 나열된다. 앞에서 말했듯이 대단하다. 어떤 순간에는 이 모든 문헌들이 작가의 창작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작품 해설에 따르면 이 작가가 엄청난 장서가인 듯하다. 책 사느라고 사업이 망하고, 가세가 기울 정도라니 대단하다. 그보다 더 대단한 것은 이 문헌들을 읽고 자신의 작품 속에서 인용했다는 점이다. 솔직히 말해 책 사는 것보다 산 책을 읽는 것이 더 힘든 일이지 않는가. 물론 이 내용을 소설 속에 제대로 녹여내는 것은 더 힘들다.

 

아무리 힘든 소설이라고 해도 추리소설을 읽다 보면 누가 범인인지 추론하게 된다. 그런데 이 작가는 이 추론을 아주 어렵게 만든다. 현학적인 내용들로 용의자로 심문하고, 용의자들도 현학적으로 대답한다. 그의 추론과 상관없이 누군가가 죽어나간다. 추리 내공으로 한 가지 가능성을 머릿속에 염두에 두고 읽었는데 범인과는 상관없었다. 무엇보다도 이 소설에서 나를 곤혹스럽게 한 것은 흑사관의 구조와 과학을 이용한 가능성들이다. 고전 추리소설에서 자주 만나게 되는 트릭인데 개인적으로 이 부분에 약하다. 음에 대한 것은 또 어떤가. 솔직히 내가 지금 소화하기에 버겁다. 괜히 일본 추리소설 3대 기서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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롱 웨이 다운
제이슨 레이놀즈 지음, 황석희 옮김 / 밝은세상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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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혀 예상하지 못한 방식의 소설이다. 아니 소설이라고 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300쪽이 넘지만 단숨에 읽을 수 있다. 왜냐고? 운문으로만 구성된 책이고, 이 운문이 하나의 이야기를 구성하기 때문이다. 이 소설이 매력적인 것은 운문으로 구성되었기 때문이 아니다. 간결하면서도 명확한 문체가 가독성을 높이고, 엘리베이트를 이용한 설정은 다음 층에서는 누가 등장할지 호기심을 자극하기 때문이다. 단순히 호기심에 멈추지 않고 예상하지 못한 반전이 일어난다. 미국 흑인들의 삶이 어떤 것인지 잠시 엿볼 수 있다.

 

어느 날 윌리엄의 형 숀이 총을 맞고 죽었다. 세상이 무너지는 느낌이다. 너무 슬퍼다. 엄마의 통곡은 또 어떤가. 경찰에 밀고할 수도 있지만 이 동네에 룰이 있다. 첫째 울지 마라, 둘째 밀고 하지 마라, 셋째 복수해야 한다. 윌은 울지 않으려고 하고, 밀고 하지 않는다. 그리고 복수를 하려고 한다. 숀과 함께 쓰는 방에서 숀의 총을 발견한다. 윌은 누가 범인인지 짐작할 뿐이다. 마지막 룰을 지키기 위해 그는 허리춤에 총을 차고, 엘리베이트를 탄다. 본격적인 이야기는 바로 이 엘리베이트 안에서 일어난다. 자신이 생각한 살인자를 죽이기 위해 탄 엘리베이트가 로비 층에 도달하는 과정에서 일어난다. 그것도 각층마다 새로운 인물이 타면서 과거와 현재가 이어진다.

 

각층마다 멈추는 엘리베이터에서 윌이 아는 사람들이 탄다. 이 인물들은 모두 숀이나 윌과 관계있다. 이 인물들은 이 룰이 만들어낸 비극을 차분하면서도 분명하게 보여준다. 복수란 이름 아래 행해진 살인의 이면과 숨겨진 사실을 낱낱이 드러낸다. 룰에 지배받던 윌은 억눌렀던 감정을 표출한다. 단 한 번도 총을 잡은 적이 없던 열다섯 살 소년의 삶이 뒤흔들린다. 총에 몇 발이 장전되는지도, 사람을 겨냥하는 방법도, 제대로 총을 휴대하는 법도 그는 모른다. 하지만 이 동네에서 살아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이 룰을 지켜야 한다.

 

룰 때문에 비극은 끊임없이 이어진다. 이 엘리베이터의 시간은 그것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로비까지 가는 과정이나 대화를 생각하면 물리적 시간은 비현실적이다. 물론 등장인물들도 마찬가지다. 엘리베이트란 공간 속에서 만남이 이어지지만 이야기의 공간은 밖으로 확대된다. 이 확대된 공간과 이야기가 전체적으로 이야기의 깊이를 더한다. 이 이야기 속에서 드러나는 비극은 단순히 한 개인의 비극이 아니다, 가족의 비극이자 동네의 비극이고, 미국 흑인들의 비극이다. 이런 글을 읽을 때면 언제나 가슴이 먹먹하다. 자신의 의지가 아닌 타인의 의지가 그들을 죽음으로 내몰고 있다.

 

단순히 운문으로 쓴 것과 비극을 보여준 것만으로 이 소설을 평가하기는 부족하다. 군더더기 없는 문장과 담배 연기 가득한 엘리베이트 안의 풍경과 그 속에서 만난 사람들의 과거가 나열되면서 풀려나오는 사실이 유기적으로 잘 엮여 있다. 한 편의 서사시를 읽는 느낌이지만 현학적이거나 어려운 표현이 없어 가독성을 더 높여준다. 진실에 다가가는 과정은 또 어떤가. 그렇게 해서 밝혀지는 불편한 진실들은 또 어떤가. 인터넷 서점에 나온 수많은 수상 이력이 괜히 나온 것이 아니다. 예상한 것을 훨씬 뛰어넘은 작품이다. 일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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