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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놀 천사
아사다 지로 지음, 양윤옥 옮김 / 노블마인 / 2010년 10월
평점 :
절판
정말 오랜만에 아사다 지로의 소설을 읽었다. 지금의 누구처럼 한동안 아사다 지로의 모든 소설이 번역될 정도로 인기 있을 때가 있었다. 아마 그때 읽기 시작했을 것이다. 그리고 가끔은 웃고, 때로는 눈시울을 붉히고, 어떤 순간은 뭔가 아쉬움을 느꼈다. 하지만 하나 변함없는 것이 있었다. 그것은 재미였다. 빠르게 읽혔다. 너무 읽다보니 어색한 혹은 과장된 설정이 나왔다. 그럴 때 읽어야 하나 고민하는 순간 끝까지 달려가고 있었다. 그만큼 그는 가독성이 좋고 재미있는 작가다.
이번 단편집은 자전적인 요소가 강하다. 그가 태어난 시기와 상황을 비교해보면 더 알기 싶다. 그렇지만 담고 있는 감성이나 재미는 이전과 별 다른 차이가 없다. 가슴 속에 오랫동안 묵었다가 조용히 터져 나오는 그리움과 사랑과 삶의 한 순간은 정말 일품이다. 그런 점에서 표제작 <저녁놀 천사>의 마지막 장면은 중늙은이의 허세 속에 가려져 있던 속내와 감정을 아주 정확하게 표현해내었다. 그리고 분코의 과거 속으로 들어가 왜? 에 대한 답을 구하기보다 자살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이해하려고 한다. 알 수 없는 과거보다 추억과 기억 속의 그녀가 더 소중하고, 그녀에 대한 감정이 더 중요하기 때문일 것이다. 이것은 또 다른 우동집 주인과도 어느 정도 맞닿아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차표>는 할아버지 위층에 세 들어 살던 한 남녀의 이별 속에 성장하는 소년의 모습을 그렸다. 이혼한 부모와 떨어져 할아버지와 히로시는 같이 살고 있다. 히로시의 엄마는 재혼을 했고, 그녀와 이어주는 연결로 차표 한 장이 있다. 이 차표는 엄마가 립스틱으로 전화번호를 써준 것이다. 아직 어린 그에게 이 차표는 엄마에 대한 그리움을 불러오고, 언제나 만날 수 있다는 희망을 암시한다. 하지만 현실은 학교와 집 주변만 겉돌게 된다. 이때 다가온 야치요 아줌마는 엄마 대신이자 동경의 대상이다. 그리고 여탕에서 만난 반친구 치카코는 동경 올림픽 뒤에 가려진 사람들과 재일조선인들의 삶을 밖으로 드러내는 역할을 한다.
<특별한 하루>는 언제일까? 길지 않은 인생이지만 특별한 하루는 꽤 있었다. 하지만 오늘 정년퇴직하는 직장인이라면 어떨까? 분량 면에서 이 단편집에서 가장 길다. 장편으로 만들어도 좋을 정도의 내용을 담고 있다. 중간중간 나오는 회상과 기억들이 너무 풍부하고, 그의 삶이 그 시대 직장인의 한 모습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초일류 인생이란 범위가 아주 좁게 설정되어 있고, 그 밖의 사람들에게는 무한한 선택의 갈림길이 있는 것이다.”(103쪽)란 문장은 우리 사회의 현실을 그대로 보여주는 멋진 표현이고 사실이다. 이런 삶속에서 보내는 그가 바라는 것은 특별한 하루로 만들지 말자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쉽지 않다. 마지막 반전이 놀랍지만 그 여운은 찰나를 넘어 한 순간으로, 하나의 삶으로 이어진다.
<호박>은 시골 한 구석에서 커피숍을 운영하는 한 남자 아라이와 이제 퇴직을 얼마 남겨두지 않은 형사 요네다 이야기다. 이 두 사람은 모두 아내와 헤어졌다. 아라이의 아내는 죽었고, 요네다는 이혼했다. 이 둘의 과거를 다루기보다 현재를 말한다. 과거는 현재 속에서 잠시 스쳐지나간다. 물론 현재가 과거의 축적이고, 현재의 그들을 만들었다. 그런데 작가는 이 둘의 만남을 통해 하나의 감정을 토해낸다. 그 매개체로 호박이 등장하지만 그것은 소재일 뿐이고, 자신들의 삶이 중심에 있다. 진행 중으로 이야기는 끝났는데 다양한 결말이 예측 가능한 열린 구조라 이런저런 생각을 해본다.
<언덕 위의 하얀 집>은 사랑 이야기다. 가난해 학교 장학금을 받는 두 학생 이야기다. 학교에서 그냥 장학금만 주면 될 것을 훈시와 잔소리로 밝히고 싶지 않은 가정사를 들춰낸다. 그런데 재미난 것은 이 가정사가 거짓이란 것이다. 물론 사실도 있지만 말이다. 이렇게 오자와와 기요타는 이어졌다. 이 연결이 언던 위의 하얀 집 소녀에 의해 깨어지기 전까지 말이다. 작가는 너무나도 다른 두 학생을 등장시키고, 부잣집 딸의 환상과 알 수 없는 의도로 이를 돕는 여자를 중간에 등장시켜 두 삶을 엇갈리게 만든다. 이 엇갈림이 현재로 이어지고, 마지막에 드러나는 사실은 안타까움과 분노를 강하게 느끼게 만든다.
이 단편집 중에 자전적이라는 느낌을 가장 많이 주는 작품이 <나무바다의 사람>이다. 자위대 통신병으로 산 속에 훈련을 갔다가 짧은 순간 경험한 것을 회상하는 형식이다. 현재와 과거의 나를 비교하는데 이것은 어느 정도 소설가로 성공한 그의 삶을 되짚어 보는 작업이자 또 다른 삶의 전환점을 알려주는 역할을 한다. 자신이 바라던 바를 성취한 그이기에 가능한 것일지도 모르지만 그의 노력을 생각하고, 현실의 삶 속에 그냥 안주한 나를 나란히 놓아본다. 그리고 방을 둘러본다. 비슷하지만 다른 두 방이 머릿속을 스쳐지나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