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플 붓다
한승원 지음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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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플 붓다. 이 말이 처음엔 무슨 말인지 몰랐다. 억불산의 억불을 영역한 것이 바로 피플 붓다다. 억은 만민을 뜻하고, 억불은 만민을 구제하는 부처를 의미한다. 이 억불산에는 억불바위가 있다. 소설은 바로 장흥의 억불산을 소재로 두 노손을 등장시켜 우리의 삶을 이야기한다. 그런데 이 노손의 내역이 흔한 것이 아니다. 안 교장은 실제 낳은 아들이 없고, 주운 아들을 입양해서 키웠다. 그 아들이 바로 손자 상호의 아버지다. 상호의 엄마는 월남전 당시 참전한 군인과 베트남 여자 사이에 태어난 혼혈이다. 이 구성원들은 어쩌면 점점 많아지는 한국의 다문화 가족의 현실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야기를 이끌고 나가는 것은 상호와 안 교장이다. 상호가 고3으로 과도기를 넘어가는 과정으로 다루고 있다면 안 교장은 삶의 조그마한 깨달음을 실천하는 단계에 있다. 상호의 이야기가 혼혈이 겪는 어려움과 괴로움을 다루고, 안 교장은 다른 사람의 시선으로부터 자유로운 삶을 산다. 그래서인지 두 노손의 이야기 분위기는 다르다. 손자 상호는 왕따 등의 괴롭힘으로 어두움이 드리워져 있는 반면 안 교장은 노년에 얻은 삶의 깨달음을 조용히 실천하면서 삶의 의미를 보여준다. 이 노손의 행동은 그래서 더욱 안정적이고 여유와 힘이 느껴진다.

상호의 생활을 따라가면 우리 교육계가 안고 있는 문제가 하나씩 드러난다. 상호의 저항이 약간은 비현실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지만 충분히 공감할 수 있는 내용이다. 학교가 바라는 것이 아이들의 장래가 아닌 몇 명을 서울대 등에 보낼 것인가에 더 집중하고 있음을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수험에 매달린 아이들의 정확한 적성을 파악한다는 것 자체가 어쩌면 무리일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학교의 이름을 알릴 수 있는 방법만 찾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것은 예전부터 변함없이 내려온 일이다. 오히려 전보다 더 심해진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이 때문에 왕따나 은따 같은 문제는 그냥 묻혀버린다. 상호의 성장은 바로 이런 제도권(상호 표현으로는 프로쿠르테스의 침대다)을 거부하고 넘어서는 것이다. 

안 교장은 전직 교장이자 장학관이었다. 은퇴 후 아내의 죽음부터 염장이가 된다. 소설 속에 드러나는 그의 인품과 깨달음은 높다. 그가 염장이를 한다는 소식을 듣고 제자들이 그만두길 바라고 조금씩 돈을 보태는 것도 바로 과거 때문이다. 한 싸움꾼의 이야기는 안 교장이 어떤 선생이었는지 잘 보여준다. 말과 행동을 가려하고, 학생을 배려하고, 나 자신보다 학생을 위해 노력했던 그의 과거 말이다. 물론 그의 행동 때문에 손자 상호가 놀림을 받지만 그는 인간은 결국 혼자 이겨내야 한다는 말로 용기를 북돋아준다. 당사자인 상호에겐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중간에 정성을 다해 시체를 닦는 모습을 보고 나름대로 깨달음은 얻는 장면은 아주 인상 깊다.

이 소설은 성장소설로도 구도소설로도 읽을 수 있다. 상호가 성장하는 모습에선 성장소설이, 안 교장의 행적을 따라가면 구도소설이 된다. 이 둘을 모두 잡으려는 것은 사실 큰 욕심일 수 있다. 그런데 작가는 양쪽 모두를 강하게 부각시키기보다 자연스럽게 섞으면서 무난하게 풀어내었다. 상호의 성장이나 마무리가 성장소설의 전형을 따라가는 듯한 모습을 보여주지만 말이다. 어떻게 보면 좀더 고민해야 할 안 교장의 행동이 너무 자유롭다. 염장이 일이나 송미녀나 오순옥 선생과의 스캔들로 어느 정도 고민이나 행동에 제약이 있을 법한데 말이다. 

이 한 권의 소설은 많은 이야기를 품고 있다. 다문화 가족, 교육문제, 왕따, 정체성, 성장하지 못하는 학문과 사람, 일방적인 맹신의 부작용, 노인문제 등이 담겨 있다. 조그마한 마을 무대로 하여 이렇게 많은 이야기를 다루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닐 텐데 아주 자연스럽게 풀어내고 있다. 가볍게 읽을 수 있지만 담겨 있는 이야기가 풍부해 머릿속에서 계속 이야기가 꿈틀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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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의 미궁
이시모치 아사미 지음, 김주영 옮김 / 씨네21북스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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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나쁜 기억력은 이 작가의 작품에 대한 분석을 할 정도가 아니다. 운 좋게 모든 번역 소설을 읽었지만 특징을 하나로 풀어낼 정도의 능력도 없다. 일반인이 탐정으로 등장한다는 것도 다른 사람이 말해줘서 알았다. 하지만 한 가지 분명하게 아는 게 있다. 그것은 재미있고, 계속 관심을 가져야 할 작가란 것이다. 일정 부분 아쉬운 점이 있고, 약간은 과장된 살인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 생기고, 너무 도식적인 결말이 있기도 하지만 말이다.

밀실 살인, 한밤의 연쇄살인, 환상 등을 전작에서 재미있게 다루었다면 이번엔 수족관이다. 한밤에 홀로 수족관의 수온을 확인하던 가타야마가 죽는다. 사인은 과로에 의한 돌연사. 이렇게 한 인물의 죽음으로 이야기는 시작한다. 그리고는 3년 후로 넘어가 하루 동안 벌어진 사건을 다룬다. 그것은 아르바이트생에게 우연히 발견된 핸드폰을 통해서다. 이 핸드폰을 관장에게 전달할 것을 요구한다. 전달된 의문의 핸드폰에 메일이 온다. ‘도쿄만의 오염이 심하군요’란 문장이다. 이것은 하네다 국제환경 수족관의 J1 수조를 암시한다. 직원들이 달려간다. 그곳에서 알코올이 담긴 병을 발견한다. 큰 위험은 없지만 조그마한 문제가 될 수 있는 일이다. 이렇게 문자가 올 때마다 수조들에선 문제가 될 수 있는 이물질들이 발견된다. 

하나의 핸드폰 메일에서 시작했지만 그 속엔 많은 것을 암시하고, 의문을 품고 있다. 백만 엔이란 많지 않은 금액을 요구한 것도 그렇고, 협박범이 설치한 도구들이 수족관에 치명적인 피해를 끼칠 정도가 아니란 것도 그렇다. 메일을 보낸 후 직원들이 금방 그 도구를 발견할 수 있게 한 것도 의문이다. 그리고 이 날은 이 수족관이 회생하는데 결정적인 공헌을 한 가타야마의 3주년 기일이다. 왜 이 날을 선택했을까? 첫 장면에서 벌어진 죽음이 혹시 누군가의 트릭에 의한 살인일까? 부제처럼 나온 수족관의 비밀 프로젝트 때문에 벌어진 음모가 있는 것일까? 이런 의문이 뭉게뭉게 피워나면서 사건은 진행된다. 

시간 순으로 벌어지는 사건을 조사하고 이야기하는 역할은 수족관 직원 고가가 맡았다. 그의 역할은 홈즈 시리즈에서 본다면 왓슨이다. 홈즈 역할은 그의 친구이자 외부인인 후카자와다. 이 콤비는 처음엔 큰 역할을 하지 못한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후카자와가 그 존재감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단순히 선배의 기일을 찾아온 인물에서 바뀌어 탐정 역을 맡은 것이다. 사건이 계속 진행되고, 마침내 수족관의 오시마 계장이 죽은 채 발견되면서 분위기가 바뀐다. 협박사건에서 살인사건으로.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이 죽음을 경찰에게 알리지 않고 자신들이 어떻게 해결하려고 하는 것이다. 보통의 소설이라면 여기서 더 큰 문제가 발생하는데 말이다.

한정된 공간인 수족관과 수족관을 열어놓은 시간 동안 벌어지는 이야기다. 재미있게 읽히지만 긴박감이나 긴장감을 강하게 주지는 못한다. 사건 자체가 위험하거나 강력한 범죄의 분위기를 전해주지 않기 때문이다. 모두 읽은 지금 영화로 만든다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한다. 다만 협박 메일 후 실제 수조에서 발견되는 이물질을 더 위험물질로 바꾸고, 시간제한을 두면서 긴장감을 높이는 방향으로 약간 손본다는 전제 조건이 붙는다. 그리고 멋지게 편집하고 결말을 다르게 한다면 재미있는 스릴러물이 될 것 같다. 물론 이것은 나만의 생각이다.

전체적으로 무난한 작품이다. 소품으로 나쁘지 않지만 그 이상으로 나가지 못했다. 수족관이란 공간이 주는 매력이 살아있지만 역시 결말은 아쉬움을 많이 준다. 섬세하면서도 치밀하게 준비된 협박이 중반에 쉽게 예측이 가능해진 것도 그렇지만 가장 아쉬운 것은 역시 결말이다. 과연 현실에서 이런 일이 가능할까 하는 의문이 강하게 든다. 등장인물들의 개성이 강하게 부각되지 못한 것도 역시 아쉽다. 고가가 무력한 존재처럼 나오면서 상대적으로 후카자와가 부각되지만 갑작스런 부분이 많다. 하지만 비밀 프로젝트는 멋지다. 만약 실제로 실현된 곳이 있다면 한 번 가보고 싶다. 전작들에 비해 아쉬움이 많다. 다음 작품은 어떨까? 여전히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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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 루이스 레이의 다리 - 손턴 와일더의
손턴 와일더 지음, 김영선 옮김 / 샘터사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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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문장이 시간과 장소와 하나의 사건을 말하면서 시작한다. 하나의 다리가 무너져 여행객 다섯 명이 추락해 죽은 사건이다. 시간은 1714년 7월 20일 금요일 정오, 장소는 페루 산 루이스 레이의 다리다. 페루에서 가장 멋진 다리로 불리던 것이 무너졌다는 사실보다 다섯 명의 여행객에 관심을 둔 사람은 그들보다 먼저 다리를 건넌 주니퍼 수사다. 그가 왜 이 사건에 관심을 두었을까? 그것은 그 사건 속에 숨겨져 있는 신의 의지를 밝혀내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희생자들 관련 인물들을 만나 인터뷰하고 그 기록을 한 곳에 묶어 책으로 내었다. 

교회는 이 책을 이단으로 몰아붙인다. 책과 그는 불탔지만 한 권은 도서관에 남았다. 작가는 이 책을 발견한 것을 바탕으로 하나의 이야기를 만들었다. 무척 두터운 책의 내용을 줄이고, 자신의 의견을 삽입한 것처럼 꾸며서 말이다. 형식적으로 본다면 요즘 나오는 르포문학과 비슷한 부분이 많다. 이런 저런 생각을 뒤로 하고 책 속으로 들어가면 다섯 명의 희생자에 대한 이야기가 펼쳐진다. 한 명 한 명 별개의 이야기지만 동시에 지역적 시대적 특성에 의해 그들을 연결하는 줄이 계속 이어진다.

다섯 명의 희생자는 몬테마요르 후작 부인, 그녀의 하녀 페피타, 피오 아저씨, 하이메라는 어린아이, 에스테반 등이다. 몬테마요르 후작 부인과 페피타를 하나의 장으로 묶고, 피오 아저씨와 하이메를 하나로 묶었다. 에스테반은 별도처럼 나오지만 쌍둥이 형제가 있었다. 작가는 왜 이들이 같은 날, 같은 시간, 같은 장소에 모였는가를 이야기하기보다 그들의 삶 속으로 들어간다. 그들의 아픔과 괴로움과 그리움과 사랑을 다루면서 이 다리에 오기까지를 말이다. 덕분에 운명이니 우연이니 하는 단어 대신 삶이 그 자리를 차지한다.

200 여쪽에 불과한 소설이지만 매력적인 인물로 가득하다. 스페인 문장에 큰 영향을 끼쳤다는 몬테마요르 후작 부인의 사연은 불쌍하지만 강한 사랑이 느껴진다. 하녀 페피타가 본 마님의 모습이 너무 처량하고 불쌍하지만 그녀 또한 고아로 힘겹게 자란 아이다. 이 둘이 수녀원을 다녀온 후 다짐하는 장면과 그 다음에 벌어진 사건은 아이러니하다. 피오 아저씨는 최고의 배우인 카밀라 페리콜의 선생이자 아버지 같은 인물이다. 하지만 카밀라가 성공하자 나태해지고 통속적으로 변하면서 안타까움을 느낀다. 그래서 그가 선택한 인물이 카밀라의 아들 하이메다. 이 두 노소가 함께 가게 된 사연도 결코 평범하지는 않다. 마지막으로 에스테반은 쌍둥이 형제가 바로 카밀라에 대한 강한 사랑을 품고 있고, 열병을 앓고, 우연히 다친 사고로 죽는다. 이 죽음 후 그는 방황한다. 이 방황을 마치고 새로운 삶을 선택한다. 그런데 산 루이스 레이 다리를 건너다 추락한다. 

이 다섯 명은 묘하게 하나의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아픔을 이겨내고 새로운 희망을 가지고 새 출발을 마음속으로 다짐했다는 것이다. 이런 그들에게 잔혹한 미래가 펼쳐진 것이다. 이 죽음에서 주니퍼 수사가 아무리 신의 의지를 발견하려고 해도 할 수 없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 그들의 삶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신의 의지를 수학적으로만 증명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이것은 수녀가 마지막에 “그 다섯 사람에 대한 모든 기억은 지상에서 사라질 것이다. 우리 자신도 한동안 사랑을 받다가 잊힐 것이다. 그러나 그 정도 사랑이면 충분하다.”(212쪽)에서 말한 대목과 상당히 다르다. 그렇다. 이 소설은 다섯 여행객의 죽음을 단 하나의 단어로 설명한다. 그것은 ‘사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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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시간 7일 모중석 스릴러 클럽 25
짐 브라운 지음, 하현길 옮김 / 비채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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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얼리티 프로그램이 요즘 많이 방송된다. 연출과 대본과 편집에 의해 어느 정도 각색이 되겠지만 점점 강도가 강해진다. 아직 우리나라의 경우 완전한 상업화가 덜 되어 조금 강도가 약한 부분이 있지만 가끔 케이블에서 방송하는 리얼리티 방송을 보면 놀랄 때가 많다. 현실과 가상의 경계가 무너지고, 나 자신의 감정을 이입하는 순간이 발생하기도 한다. 이런 프로그램은 강도가 강할수록 시청자의 눈을 끈다. 나의 이성보다 감성이 더 강하게 작용하기 때문이다. 이런 작용을 이 소설은 아주 잘 포착하고 표현했다.

<24시간 7일>은 한 케이블 방송사가 기획한 프로그램 이름이다. 이 프로그램은 바사 섬에 628개의 무인 카메라를 설치하여 12명의 출연자를 24시간 감시한다. 동시에 각 개인별 임무가 주어지고 시청자의 투표로 탈락자를 결정한다. 우승자에겐 2백만 불과 평생 원하던 것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각각의 출연자는 돈과 명예와 개인의 바람을 가지고 이 방송에 출연한다. 그런데 방송 첫 날 사고가 발생한다. 12명의 출연자를 제외한 모든 스텝들이 죽는 것이다. 그것도 강력하게 설계된 에볼라 바이러스에 의해 거의 동시에 말이다. 이제 방송은 정말 생존을 위한 것으로 변한다. 이 모든 사건의 주재자 컨트롤에 의해서 말이다.

이야기는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진다. 하나는 당연히 출연자들이고, 다른 하나는 이 방송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대응과 접근이다. 출연자 중 여주인공은 다나 커스틴이다. 그녀는 학창시절 한때의 사랑으로 임신한 후 소위 말하는 인생이 꼬인 경우다. 거기에 태어난 딸은 근육퇴행위축증을 앓고 있다. 그녀가 이 프로그램에 참여하길 원했던 것은 바로 2백만 불이란 거액도 있겠지만 평생 원하는 것을 들어주기 때문이다. 그녀의 바람은 딸 제나를 이 병에 대해 신약을 개발하고 임상 실험하는 스위스로 보내는 것이다. 그녀는 최종심사에서 탈락했다. 그런데 출연예정자 중 한 명이 아파 대타로 방송에 참여한다. 지옥 같은 7일 간의 생존 게임에 그렇게 마지막으로 참여한다.

섬 밖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은 터커 손이다. 그는 보도기자가 되길 원하는 사진기자다. 죽었다고 알려진 폭탄 테러범을 찾아갔다가 오히려 죽을 뻔한 인물이다. 노조에게 경고까지 받지만 행운이 찾아온다. 사랑했던 여자의 아버지로부터 온 한 통의 전화다. 그가 바로 이 사고로 생긴 정부 태스코포스에 참여한 셔먼 로릭 박사다. 그의 전문분야는 테러범과 인질상황이다. 컨트롤이 원하는 것을 역이용할 목적으로 그가 선택한 인물이 바로 터커다. 그런데 이 선택이 예상을 완전히 빗나가게 만든다. 그것은 터커가 지닌 능력과 상황들 때문이다.

작가는 프로그램과 함께 설정에 많은 공을 들였다. 고립된 섬과 정해진 시간에 발병하는 바이러스 병을 설정하여 그들을 구출할 가능성을 사전에 차단했다. 너무나도 강력하게 설계된 바이러스는 거의 정확한 시간에 감염자를 죽음으로 내몬다. 현실에서 거의 불가능하지만 이 때문에 소설 속에선 강력한 조연 역할을 한다. 그리고 또 하나는 방송 카메라들이다. 처음엔 그들의 24시간을 촬영하여 편집본을 내보내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제 인터넷으로 24시간 생중계가 가능하다. 628개의 카메라와 참여자들 목에 걸린 개별 목걸이 카메라까지 포함하여 그들의 생활이 모두 노출된 것이다. 그들의 말과 행동 하나하나가 중계되고, 그들을 본 시청자는 투표로 탈락자를 결정한다. 

투표는 간접적인 참여방식이지만 이 소설에선 가장 강력한 간접 살인 수단이다. 투표를 세밀하고 분석적으로 그려내지는 않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더 많은 사람이 참여한다. 자신들이 살리고 싶은 사람을 위해서 혹은 죽이고 싶은 사람을 위해서 그들은 쉴 새 없이 번호를 누른다. 이성이 사라지고 감성이 그 자리를 차지한다. 이것은 다시 방송사가 이 사건으로 엄청난 타격을 받았다가 다시 이 프로그램 하이라이트를 그대로 방송하면서 벌어진 해프닝에서 잘 드러난다. 이 프로그램을 보기 위해 시위자들이 그 시간엔 모두 사라진 것이다. 이것은 터커가 잠시 고민한 것과 연결된다. 네트워크가 다른 사람의 불행으로 막대한 수익을 얻어도 되는가 하고 말이다. 그런데 사실 대부분의 매체들은 대형 사건, 사고로부터 수익을 얻는다. 우린 이미 관음증 환자이자 중독자들인 것이다.

엄청난 속도감으로 읽히고, 리얼리티 프로그램이 지닌 위험성에 대해 생각하게 만든다. 조금 현실과 맞지 않는 설정이 눈에 들어오지만 사건 전개에 필요한 것들이다. 누가 최후의 생존자가 될 것인가와 컨트롤의 정체가 누군지가 마지막까지 긴장감을 불러온다. 뭐 생존자야 정해졌지만 말이다. 하지만 그녀의 생존이 얼마나 험한 과정을 겪을지, 어떤 변수가 생길지는 전혀 예측할 수 없다. 이런 과정을 작가는 아주 세밀하게 구성하였고, 현재와 미래의 리얼리티 방송이 어떤 식으로 펼쳐질지 보여준다. 마지막 장면은 지극히 할리우드 방식이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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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놀 천사
아사다 지로 지음, 양윤옥 옮김 / 노블마인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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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오랜만에 아사다 지로의 소설을 읽었다. 지금의 누구처럼 한동안 아사다 지로의 모든 소설이 번역될 정도로 인기 있을 때가 있었다. 아마 그때 읽기 시작했을 것이다. 그리고 가끔은 웃고, 때로는 눈시울을 붉히고, 어떤 순간은 뭔가 아쉬움을 느꼈다. 하지만 하나 변함없는 것이 있었다. 그것은 재미였다. 빠르게 읽혔다. 너무 읽다보니 어색한 혹은 과장된 설정이 나왔다. 그럴 때 읽어야 하나 고민하는 순간 끝까지 달려가고 있었다. 그만큼 그는 가독성이 좋고 재미있는 작가다.

이번 단편집은 자전적인 요소가 강하다. 그가 태어난 시기와 상황을 비교해보면 더 알기 싶다. 그렇지만 담고 있는 감성이나 재미는 이전과 별 다른 차이가 없다. 가슴 속에 오랫동안 묵었다가 조용히 터져 나오는 그리움과 사랑과 삶의 한 순간은 정말 일품이다. 그런 점에서 표제작 <저녁놀 천사>의 마지막 장면은 중늙은이의 허세 속에 가려져 있던 속내와 감정을 아주 정확하게 표현해내었다. 그리고 분코의 과거 속으로 들어가 왜? 에 대한 답을 구하기보다 자살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이해하려고 한다. 알 수 없는 과거보다 추억과 기억 속의 그녀가 더 소중하고, 그녀에 대한 감정이 더 중요하기 때문일 것이다. 이것은 또 다른 우동집 주인과도 어느 정도 맞닿아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차표>는 할아버지 위층에 세 들어 살던 한 남녀의 이별 속에 성장하는 소년의 모습을 그렸다. 이혼한 부모와 떨어져 할아버지와 히로시는 같이 살고 있다. 히로시의 엄마는 재혼을 했고, 그녀와 이어주는 연결로 차표 한 장이 있다. 이 차표는 엄마가 립스틱으로 전화번호를 써준 것이다. 아직 어린 그에게 이 차표는 엄마에 대한 그리움을 불러오고, 언제나 만날 수 있다는 희망을 암시한다. 하지만 현실은 학교와 집 주변만 겉돌게 된다. 이때 다가온 야치요 아줌마는 엄마 대신이자 동경의 대상이다. 그리고 여탕에서 만난 반친구 치카코는 동경 올림픽 뒤에 가려진 사람들과 재일조선인들의 삶을 밖으로 드러내는 역할을 한다. 

<특별한 하루>는 언제일까? 길지 않은 인생이지만 특별한 하루는 꽤 있었다. 하지만 오늘 정년퇴직하는 직장인이라면 어떨까? 분량 면에서 이 단편집에서 가장 길다. 장편으로 만들어도 좋을 정도의 내용을 담고 있다. 중간중간 나오는 회상과 기억들이 너무 풍부하고, 그의 삶이 그 시대 직장인의 한 모습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초일류 인생이란 범위가 아주 좁게 설정되어 있고, 그 밖의 사람들에게는 무한한 선택의 갈림길이 있는 것이다.”(103쪽)란 문장은 우리 사회의 현실을 그대로 보여주는 멋진 표현이고 사실이다. 이런 삶속에서 보내는 그가 바라는 것은 특별한 하루로 만들지 말자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쉽지 않다. 마지막 반전이 놀랍지만 그 여운은 찰나를 넘어 한 순간으로, 하나의 삶으로 이어진다.

<호박>은 시골 한 구석에서 커피숍을 운영하는 한 남자 아라이와 이제 퇴직을 얼마 남겨두지 않은 형사 요네다 이야기다. 이 두 사람은 모두 아내와 헤어졌다. 아라이의 아내는 죽었고, 요네다는 이혼했다. 이 둘의 과거를 다루기보다 현재를 말한다. 과거는 현재 속에서 잠시 스쳐지나간다. 물론 현재가 과거의 축적이고, 현재의 그들을 만들었다. 그런데 작가는 이 둘의 만남을 통해 하나의 감정을 토해낸다. 그 매개체로 호박이 등장하지만 그것은 소재일 뿐이고, 자신들의 삶이 중심에 있다. 진행 중으로 이야기는 끝났는데 다양한 결말이 예측 가능한 열린 구조라 이런저런 생각을 해본다.

<언덕 위의 하얀 집>은 사랑 이야기다. 가난해 학교 장학금을 받는 두 학생 이야기다. 학교에서 그냥 장학금만 주면 될 것을 훈시와 잔소리로 밝히고 싶지 않은 가정사를 들춰낸다. 그런데 재미난 것은 이 가정사가 거짓이란 것이다. 물론 사실도 있지만 말이다. 이렇게 오자와와 기요타는 이어졌다. 이 연결이 언던 위의 하얀 집 소녀에 의해 깨어지기 전까지 말이다. 작가는 너무나도 다른 두 학생을 등장시키고, 부잣집 딸의 환상과 알 수 없는 의도로 이를 돕는 여자를 중간에 등장시켜 두 삶을 엇갈리게 만든다. 이 엇갈림이 현재로 이어지고, 마지막에 드러나는 사실은 안타까움과 분노를 강하게 느끼게 만든다.

이 단편집 중에 자전적이라는 느낌을 가장 많이 주는 작품이 <나무바다의 사람>이다. 자위대 통신병으로 산 속에 훈련을 갔다가 짧은 순간 경험한 것을 회상하는 형식이다. 현재와 과거의 나를 비교하는데 이것은 어느 정도 소설가로 성공한 그의 삶을 되짚어 보는 작업이자 또 다른 삶의 전환점을 알려주는 역할을 한다. 자신이 바라던 바를 성취한 그이기에 가능한 것일지도 모르지만 그의 노력을 생각하고, 현실의 삶 속에 그냥 안주한 나를 나란히 놓아본다. 그리고 방을 둘러본다. 비슷하지만 다른 두 방이 머릿속을 스쳐지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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