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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프 홀 1 - 2009년 맨부커상 수상작
힐러리 맨틀 지음, 하윤숙 옮김 / 올(사피엔스21) / 2010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먼저 이 작품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천일의 앤이라고 불리는 앤 불린 이야기를 알아야 한다. 동시에 이 소설의 주인공인 토머스 크롬웰과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올리버 크롬웰이 다른 인물임을 알아야 한다. 학창시절 나처럼 대충 이름을 외운 사람에겐 이 두 인물의 차이가 명확하지 않을 수도 있다.(나만 그런가?) 토머스는 사실 역사 속에서 간략한 몇 줄만 나오는 인물이고, 올리버는 칼뱅주의 신앙을 바탕으로 왕당파를 몰아내고 그 유명한 청교도적 사고방식을 확대하는데 기여한 인물이다. 사실 이 둘에 대한 부정확한 나의 지식은 읽으면서 많은 오해를 불러왔고, 왜 내가 기대한 이야기가 나오지 않나 하는 헛된 바람만 계속해서 가지게 만들었다. 덕분에 충분히 그 재미를 누리지 못한 부분도 많다.
어린 토머스 크롬웰이 자신의 아버지에게 폭력적으로 맞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간신히 기어서 누나 집에 도착한 그가 선택한 다음 행동은 집을 떠나는 것이다. 작가는 배타고 떠나는 어린 그를 보여준 후 바로 27년 후로 넘어간다. 그가 어떤 삶을 살았고, 어떤 경험을 했는지 알려주지 않고 말이다. 물론 그의 삶에 대한 단편적인 정보들을 긴 이야기 속에 조금씩 알려준다. 하지만 그 정보들만으로 그의 파란만장한 성장기와 성공담을 알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 이 책의 긴 분량을 생각하면 한 장 정도로 압축해서 충분히 보여줄 수 있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1527년 토머스 크롬웰은 당시 최고 권력자였던 요크 대주교인 울지 추기경의 도움을 받고 있었다. 하지만 울지의 권력은 헨리 8세의 욕망과 권력구조의 변화에 따라 점점 몰락하고 있었다. 작가는 바로 이 시기부터 시작하여 토마스 크롬웰이 권력의 정점에 올라서는 1535년 시점까지 이야기를 풀어낸다. 무려 1000여 쪽에 달하는 분량으로 말이다. 단숨에 읽기에는 너무 많고, 수많은 낯선 등장인물은 속도감 있게 읽는 것을 힘들게 한다.
기본적으로 시간의 흐름을 따라 가면서 그 시대의 권력구조나 미세한 정치 작업을 세밀하게 그려낸다. 울지 추기경의 몰락과 다른 귀족의 권력 장악, 왕과 앤의 밀고 당기는 관계 속에 또 다시 바뀌는 권력의 구조를 약간은 지루할 정도로 느리면서도 세밀하게 보여준다. 특히 헨리 8세가 왕비 캐서린을 몰아내고 앤 불린과 결혼하고자 하면서 발생하는 문제는 이 소설의 중심이자 그 시대의 가장 큰 혁명적 사건이다. 단순히 한 국왕의 결혼 문제가 아니라 그 시대의 정치와 종교와 인척 관계가 엮인 엄청난 사건인 것이다. 그런데 작가는 약간은 정치적 경제적인 부분을 약하게 다루고 헨리와 앤의 욕망을 강하게 부각시키면서 그 중심을 토머스 크롬웰로 이동시켜버린다. 바로 이 두 사람 사이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그가 맡아서 하기 때문이다.
이 책을 읽은 후 토머스 크롬웰에 대한 정보를 검색했다. 강력한 왕권 밑에서 최고의 자리에 오르기까지의 과정이 흥미로웠지만 그에 대한 정보가 너무 없다. 소설 속에서 세밀하게 다루어진 그와 몇 줄의 간략한 정보만 다루어진 그 사이의 괴리는 심하다. 그래서 지금 그 둘의 틈새를 메우는 것이 쉽지 않다. 그 유명한 책 <유토피아>의 저자 토머스 모어와 토머스 크롬웰의 관계는 소설 속에서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는데 단편적인 정보 속에는 단순히 정적일 뿐이다. 이런 점만 생각한다면 이 소설이 지닌 풍부하고 세밀한 묘사와 서술들은 상당히 인상적이고 매력적이다. 하지만 영국 역사에 무지하고, 속도감 있는 진행과 명확한 전개를 원하는 사람들에겐 힘든 책읽기가 될 수도 있다. 취향을 많이 탈 수 있다는 의미다.
근대 권력의 탄생을 알리는 장엄한 서사시라고 했는데 그것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다. 토머스 크롬웰이 귀족의 재산과 권력을 조금씩 무너트리고, 헨리 8세의 권력과 부를 쌓는 부분은 충분히 이해했다. 교황의 절대적 권력이 무너지고, 루터 파와 같은 새로운 종교의 등장과 영국 성공회가 어떻게 설립하게 되었는지도 알았다. 하지만 이런 거대한 작업들이 읽는 동안에는 하나로 꿰어져서 이어지지 않았다. 긴장을 불러오기 위한 장치를 작가가 사용하지 않았고, 충실한 역사의 재현처럼 보이는 설정과 전개로 오히려 긴박감이 떨어졌기 때문이다. 속도감 있게 상황을 만들고, 각 권력자들의 충돌과 음모를 만들었다면 달랐겠지만 말이다. 힘들게, 가끔은 정신없이, 때로는 흥미진진하게 읽었지만 쉬운 책은 아니다. 그렇지만 왠지 모르게 뿌듯하다. 그리고 토머스 크롬웰의 삶과 그 시대가 머릿속에서 살아 움직인다. 읽을 때는 느끼지 못했던 것들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