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로칼랭
로맹 가리 지음, 이주희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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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로맹 가리의 소설을 읽었다. 이 작가에 대해 잘 모를 때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는다>를 읽었다. 그때 정말 재미있게 읽었고, 이 책이 보이면 친구에게 추천하곤 했다. 하지만 그 당시에 그의 많은 책이 절판되었고, 찾기가 쉽지 않았다. 헌책방을 돌아다니며 로맹 가리의 이름이 보이면 사곤 했지만 무지했던 그 당시 에밀 아자르가 그인지는 몰랐다. 아마 그때 에밀 아자르로 출간된 책을 샀다면 열심히 읽었을 것이다. 지금처럼 시간이 부족하지 않았고, 좋아하는 작가도 많지 않았던 시기였기 때문이다. 

이 책은 로맹 가리가 에밀 아자르라는 필명으로 낸 첫 번째 소설이다. 공쿠르 상을 두 번 받은 것으로 유명한 그이지만 <자기 앞의 생>에 나온 글을 읽다보면 작가에 대한 선입견이 어떻게 작용하는지 잘 알 수 있다. 이런 선입견을 벗어내기 위해 선택한 것이 무명의 젊은 작가 에밀 아자르다. 그의 새 이름과 작품은 출판사에 호응을 받지만 약간의 편집을 요청받는다. 아마 로맹 가리로 출판했다면 있을 수 없는 일일 것이다. 거장과 신인의 차이가 여기서 갈린다. 그리고 이 편집된 부분이 이번 책에 실려 있다. 사람에 따라 호불호가 갈리겠지만 개인적으로 편집자들의 선택이 더 읽기 편한 것은 사실이다.

그로칼랭은 쿠쟁 씨가 키우는 비단뱀의 이름이다. 그로칼랭이란 이름은 열렬한 포옹이란 뜻이다. 이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쿠쟁에게 필요한 것은 자신의 외로움을 들어줄 존재다. 2미터 20센티의 비단뱀이 쿠쟁의 몸을 감을 때 느낀 편안함과 동질감은 외로움에 지친 그를 편안한 휴식으로 인도한다. 이것은 그로칼랭만 그런 것이 아니다. 비단뱀의 먹이로 산 생쥐에게도 그의 감정은 이입된다. 이 감정은 순수한 모습을 보여주지만 그 속에 집착도 담겨 있다. 자신의 감정에 몰입하고 타인이 다가오는 것을 거부하는 행동에서 그것은 잘 드러난다. 그런 행동은 두려움과 공포가 바닥에 깔려 있지만 말이다.

“많은 사람들이 자기 껍질 속에서도 불편해 하는 것은 그 껍질이 자기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118쪽)란 문장은 비단뱀이 탈피를 하여도 비단뱀인 것에 반해 사람들은 현실 속에서 살아가기 위해 불편한 다른 껍질을 뒤집어 쓴 채로 살아야 하는 현실을 말한다. 이것은 쿠쟁 씨가 회사에 나가 잘 어울리지도 못하는 사람들과 함께 생활하는 것이나 나중에 그가 결혼을 꿈꾸었던 드레퓌스 씨의 말에서 잘 나타난다. 이런 겉과 속이 다른 삶은 사람을 지치게 만든다. 우리는 흔히 누구나 그렇게 살고 있다고 말하면서 스스로를 위로하지만 그 속에서 느끼는 외로움을 점점 깊어지고 넓어지기만 할 뿐이다. 

서른일곱에 혼자 사는 그가 창녀를 찾아가는 것은 두 가지 이유다. 하나는 분명히 성욕을 해결하기 위해서겠지만 다른 하나는 그의 외로움을 잠시나마 잊게 만들어줄 조그마한 신체접촉이 있기 때문이다. 특히 그로칼랭처럼 안아주는 것을 좋아한다. 이런 행위를 갈망하는 것은 그의 외로움이 얼마나 심한지 알려준다. 그리고 공권력이나 타인에 의한 폭력을 상당히 두려워하는데 이것은 사환의 초대와 맞물려 드러난다. 초판본과 복원판의 차이가 극명하게 갈리는 것 중 하나가 이것이기도 하다. 개인적으로 읽기 편한 것은 초판본이지만 작가의 의도를 제대로 알기는 분명히 복원판이 좋다.

비단뱀 그로칼랭에 대한 글이라고 말하지만 사실 현대인의 삶과 외로움을 담고 있다. 점점 기계화되고 산업화되면서 우린 서로가 신체접촉할 일이 줄어들고 고독을 느낀다. 이것이 극대화된 것이 생태학적 결말에서 그로칼랭과 자신 사이에서 정체성의 혼란을 겪는 부분이다. 앞부분과 달라진 분위기 탓에 쉽게 적응하지 못하지만 몇 번이고 펼쳐 읽게 만든다. 그래도 어렵다. 아마 이런 이유로 편집자들이 삭제를 요구한 모양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부분은 초판본과 다른 분위기를 풍기면서 에밀 아자르이자 로맹 가리인 그를 이해하는데 필요한 단서를 제공한다. 아직 내가 정확하게 발견하지 못했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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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령여단 샘터 외국소설선 3
존 스칼지 지음, 이수현 옮김 / 샘터사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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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초에 <노인의 전쟁>을 샀다. 언제나 처럼 사둔 뒤 읽지 않았다. 이번 책을 읽기 전 시리즈 전편을 읽고자 했는데 책이 보이지 않는다. 어딘가에 숨어 있는 모양이다. 어쩔 수 없이 <유령여단>을 먼저 읽었다. 보통 때 같으면 어떻게 해서든지 전편을 찾아 읽었겠지만 다른 사람들의 글을 보니 이 작품을 먼저 읽어도 문제가 없다고 한다. 그래서 펼쳐 읽기 시작했고, 광대한 우주 이야기 속으로 빠져들었다.

책 앞쪽에 <노인의 전쟁> 줄거리가 나온다. 개인적으로 이 부분은 상당히 불만이다. 아직 전작을 읽지 않은 사람에게 결과를 알려주기 때문이다. 하지만 전작의 주인공인 존 테리가 이번엔 직접 나오지 않는다. 이런 점이 아마도 이 소설을 먼저 읽어도 전체를 이해하는데 문제가 없다고 한 모양이다. 그리고 이번 이야기 속에 나오는 많은 설명들이 나중에 <노인의 전쟁>을 읽을 때 그 세계를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을 줄 것 같다. 읽는 순서가 바뀔 때 주는 이득 중 하나가 아닌가 생각한다.

마지막 장을 덮으면서 다음 이야기와 앞 이야기에 관심이 많이 갔다. 그와 동시에 이번 소설에서 다루고 있는 뇌도우미란 존재가 일본 애니메이션 <공각기동대>의 전뇌를 연상시켰다. <공각기동대>가 어떤 영향력을 미쳤는지 정확하게 알지는 못하지만 소설 곳곳에 일본 문화의 흔적이 나오는 것을 생각하면 무시하지 못할 것 같다. 그리고 작가도 곳곳에서 sf 걸작들을 말하면서 그 영향을 말한다. 다행히 읽은 책들이 많아서 공감대가 형성된 부분이 많다. 

뇌도우미란 존재보다 인간의 의식 혹은 기억 등을 물리적으로 저장하는 것이 가능할까 하는 의문이 먼저 생긴다. 이것은 이미 <공각기동대>에서 다루어진 것이지만 인간의 존재 가치를 생각할 때 그냥 넘어갈 수 없는 문제다. 이런 철학적 물음을 던지면서 또 하나의 중대한 문제를 다룬다. 그것은 DNA 조작을 통해 만들어진 인간이다. 이 소설의 주인공인 재러드 디랙도 바로 그렇게 탄생한 인물이다. 특수부대용으로 만들어진 육체에 부탱의 의식을 집어넣어 그가 만들어졌다. 그가 만들어진 목적은 부탱을 잡기 위해서다. 그러나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은 그가 아무리 의식을 이식받았다고 하여도 단숨에 모든 기억을 되살려 그의 추적하는 것은 무리다. 그래서 그에게 스트레스를 가하고, 억압된 상황과 부탱의 기억이 만나는 곳에서 그 흔적을 찾고자 한다. 

이 시대 특수부대용으로 만들어진 인물들의 능력은 대단하다. 뇌도우미와 유전자 조작을 통해 보통 사람이 수십 년을 배워야 할 수 있는 것을 며칠 만에 익힌다. 이미 육체적으로 성인의 외형을 갖추었고, 능력은 유전자 조작으로 강화되어 있다. 뇌도우미는 필요한 자료를 무수히 많이 가지고 있다. 이 뇌도우미는 특수부대원 사이를 통합시키면서 유대감을 높여주고, 생각만으로 대화가 가능하게 한다. 이런 능력은 전투능력을 극대화시키고, 각 발육한 그들의 경험을 높여주는 역할을 한다. 물론 이 뒤에는 다른 의도가 숨겨져 있지만 말이다.

밀리터리 SF소설의 재미를 어느 정도 간직하면서 뇌도우미란 설정을 통해 과학적 철학적 질문을 던진다. 이런 어려운 질문을 뒤로 두고 이야기에 집중만 해도 충분히 재미있다. 음모가 중첩되고, 특수부대의 전투가 긴박한 액션과 속도감을 주기 때문이다. 어려운 개념과 설정이 초반에 약간 진도를 더디게 만들지만 재러드가 본격적으로 활약을 펼치면서 집중도와 가독성이 높아진다. 작가가 만들어낸 무기와 도구들은 머릿속에서 어떤 것일까 상상하는 즐거움을 주고, 광대한 우주와 외계인의 낯선 모습은 이전에 본 SF영화의 한 장면을 떠올려보게 만든다. 빨리 <노인의 전쟁>을 찾아서 읽고, 다음 이야기가 나왔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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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체오페르 2010-09-08 20: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바로 어제 하드SF 라고 하는 제임스 호건의 '별의 계승자' 를 재밌게 읽고났더니 이런 책이 또 끌립니다. 이 책도 좋아할만한 내용인것 같네요.
리뷰 잘 봤습니다.^^
 
카사노바 살인사건 탐정 글래디 골드 시리즈 3
리타 라킨 지음, 이경아 옮김 / 좋은생각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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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작에서 멋지게 살인사건을 해결하고 연인 잭과 함께 여행을 떠난 그녀에게 한 통의 전보가 온다. 소피가 위급하다는 전보다. 두 연인의 아름다운 사랑이 결실을 맺으려는 순간에 온 이 전보는 오히려 둘의 관계를 위태롭게 만든다. 그것은 소피의 상태가 정상이고, 이 둘의 아름다운 여행이 글래디 골드의 조그마한 마음 씀씀이 때문에 깨어졌기 때문이다. 작가는 이 두 노 연인의 사랑을 정말 애타게 만든다. 그리고 또 다른 연인들의 헤어짐은 살인사건이 개입되어 있다. 다만 피해 여성들이 너무 나이가 많다는 점에서 사고사로 판정이 나지만 말이다.

연쇄살인범 필립 스마이스는 치명적인 매력을 가진 노신사다. 그가 실버타운에 등장하면 홀로 사는 노부인들의 열정이 불탄다. 그의 사랑을 갈구하고, 노골적인 시선을 던진다. 이런 행동은 그의 숨겨진 정체를 모르기 때문이지만 그만큼 매력 있기 때문이다. 그의 연쇄 살인에 그 누구도 의문을 가지지 않았다. 그런데 어머니 에스더의 죽음을 이상하게 생각한 아들 앨빈 퍼거슨이 우리의 멋진 노부인 탐정단에게 이 사건을 의뢰한다. 진실을 알고 싶다고 하면서 말이다. 물론 95세의 시어머니가 죽은 것에 조금도 관심이 없는 아내의 반대를 뿌리치고 말이다. 

사건 의뢰를 받고 용의자를 조사해야 하는데 그가 돌아다니며 머무는 실버타운이 보통 비싼 곳이 아니다. 그녀가 머무는 실버타운처럼 정이 넘치는 곳은 아니지만 그 화려함은 노부인들의 시선을 사로잡기에 충분하다. 이제 필립 스마이스가 머물 예정인 윌밍턴 하우스로 잠입해야 한다. 의뢰자의 허락만으로 부족한 것이 이런 곳의 특징이다. 가십을 무기로 조용히 머물면서 용의자를 조사하겠다는 조건으로 그녀들의 입주가 허락된다. 이 멋진 곳에 들어가고 싶어 하는 그녀 친구들의 바람은 동생 애비의 차지가 된다. 

이번 작품은 전작 같은 할머니들의 활약이 조금 부족하다. 잠입한 곳 특성상 그녀들이 직접 현장에서 움직일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녀들의 외곽 지원과 이어지는 변태 사건과 여기저기에서 발생하는 에피소드들이 소소한 재미와 즐거움을 준다. 거기에 애비는 필립 스마이스와 진짜 사랑에 빠진다. 오랫동안 억눌러져 있던 감정이 치명적 매력을 가진 그의 등장으로 폭발한 것이다. 이 때문에 자매 사이에 논쟁이 벌어지고 틈이 생긴다. 하지만 애비는 인생에서 최고로 행복한 시간을 보내게 된다. 이 위험한 인물 탓에 글래디 골드는 불안함이 가중된다. 빨리 이 사건을 해결해야 하는 이유가 또 생긴 것이다.

노년의 로맨스가 이번에도 펼쳐진다. 이 사랑은 너무나도 치명적이다. 그런데 이 살인으로 살인자가 얻게 되는 경제적 이익이 없다. 유산을 얻는 것도 아니고, 어떤 원한 관계가 있는 것도 아니다. 이런 현실에서 그를 의심한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우리의 할머니 탐정단은 보통의 탐정들이 아니다. 그녀들의 다양한 경험과 직관은 알게 모르게 사건을 해결하는 단서를 제공한다. 바로 이런 점이 이 소설을 재미있게 만든다. 그리고 언제 어떤 일이 생겨도 이상할 것이 없는 노년의 불안함과 그들의 숨겨진 열정들이 잘 버물려져서 긴장감을 유지시킨다. 특히 알츠하이머병에 대한 두려움과 외로움은 곳곳에서 드러난다. 바로 이런 감정과 심리들이 살인자에게 이용되는 것이다. 유쾌하고 즐거운 이야기 진행 속에서 알싸한 기분을 느끼게 만드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이 시리즈를 읽으면서 너무 짧은 시간에 많은 연쇄살인이 벌어진다고 느낀다. 아마 그녀들의 나이를 생각하면 어쩔 수 없는 설정일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개성 강한 노부인들의 활약과 세밀한 심리 묘사는 드러난 범인을 쫓는 그 이상의 재미를 준다. 사실에 점점 접근하고, 그 속에 드러난 위협이 현실로 드러날 때 멋진 액션은 없지만 그녀들은 다른 힘으로 상대를 제압한다. 이 또한 이 소설을 읽는 재미 중 하나다. 그리고 이번엔 변태의 정체가 밝혀지고, 이 사건이 이상하게 풀리면서 머릿속에서 즐겁고 재미난 상상을 하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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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금의 나라 백성의 나라 - 상 - 북리 군왕부 살인 사건
김용심 지음 / 보리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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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 재미있는 내력을 가지고 있다. 2005년도에 <천자의 나라>란 제목과 김유인이란 이름으로 보리의 자회사인 오두막 출판사에서 출간되었었다. 겉장은 새롭게 만들었지만 나머지는 이전 것을 그대로 사용했다. 재활용 혹은 재간을 이런 식으로 하는 것은 처음 보았다. 사실 처음엔 이 사실을 몰랐다. 책을 모두 읽은 후 잠시 여운을 즐기면서 우연히 읽게 된 글 속에서 이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 사실을 알고 인터넷으로 검색을 하니 절판된 책과 함께 나름 좋은 평을 받은 것이 나온다. 살려낼 가치가 있었다는 보리 출판사의 글에 어느 정도 수긍한다. 재미 측면과 정치의 의미 둘 다를 생각해도 말이다.

이 소설의 주인공은 그 유명한 판관 포청천에서 그를 도와주었던 협객 전조다. 남협으로 불리며 모두에게 사랑받았던 전조를 전면에 내세운다. 그와 동시에 그 당시 천자였던 인종이 전조와 함께 한다. 기본 줄거리는 무협소설을 따르지만 그 바닥엔 인종이 어떻게 그런 현군이 되었는지 상상으로 구성하고 있다. 이 점이 바로 무협의 재미와 함께 정치란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만드는 것이다. 무협의 형식을 빌린 역사 소설이라고도 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인종을 통해 지속적으로 그 시대와 정치에 대한 깨달음을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기본 줄거리는 전조가 포청천의 명을 받고 북리 군왕부의 살인사건을 해결하기 위한 과정이다. 그런데 이 살인사건의 범인을 책 중반도 가기 전에 이미 누군지 알게 된다. 살인사건과 이것을 해결하는 과정은 사실 큰 매력을 주기 힘들다. 그리고 무협소설이 지닌 강한 무공에 대한 열망과 대결이 많이 나오지도 않는다. 남성 작가라면 남협 전조를 중심으로 많은 무공대결을 넣어서 볼거리를 늘렸을 것이다. 그런데 작가는 여자이자 이런 대결에 큰 의미를 두지 않는다. 오히려 매력적인 캐릭터 만들기에 더 주력한다. 이 캐릭터들과 그들이 함께 나누는 대화가 사실 이 소설의 가치를 더 높여준다. 

전조. 그는 천하제일검이지만 답답한 남자다. 살검보다 활검을, 한 사람을 죽이기보다 한 사람을 살리길 더 원한다. 자신의 강함을 내세우기보다 부드럽게 굽히고 들어가면서 상황을 넘어가려고 한다. 하지만 강호는 강즉정의 세계다. 강한 것이 정의인 곳에서 그의 부드러움은 약자의 비굴함으로 보일 뿐이다. 이때 드러나는 전조의 무공은 진정 강한 것이 무엇인지, 왜 무공을 수련해야 하는지를 은근히 알려준다. 그리고 너무나도 인간적이고 고지식한 그의 행동은 뒤로 가면서 우연과 천운이 결합하면서 억지스럽게 다가오지만 그의 특성을 가장 잘 드러내어준다. 그 덕분에 그의 매력은 더욱 빛나기도 하지만 말이다.

인종. 그는 작가가 역사의 시간을 살짝 바꿔 자신의 정체성을 의심하게 만들고 전조를 통해 갑자기 변한 정치 개혁의 원인을 찾아보려고 한다. 무협에서 자주 나오는 인피면구를 쓰고 암행을 하던 중 전조의 협객행을 보고 반한다. 그 후 북리 군왕부까지 따라가면서 수많은 사건을 겪고, 정신적으로 정치적으로 성숙해지고 많은 깨달음을 얻는 인물이다. 이것은 이전 제목 <천자의 나라>라 지닌 두 가지 의미를 동시에 보여준다. 천자(天子)를 단순히 만인지상의 존재인 하늘의 아들로 규정하기보다 땅위에서 사는 백성들도 바로 하늘의 아들임을 내세우면서 기존 인식을 깨트린다. 바로 이 부분이 평범한 무협소설의 구성과 재미를 넘어 가치를 논할 수 있게 만드는 것이다.

그 외 다양한 인물들이 소설의 재미를 더해준다. 아령, 북리현, 승휴 등을 비롯한 조연 혹은 단역들이 재미뿐만 아니라 감정의 깊이도 더해주면서 그 시대를 재구성한다. 애틋한 사랑과 강렬한 욕망과 무공대결이 잘 결합하여 책읽기의 속도를 높여준다. 잘 만들어진 무협소설로는 분명히 부족함이 있지만 멋진 캐릭터와 그들의 대화 속에 담겨 있는 역사의식과 정치철학은 단순한 재미만이 아닌 무언가를 생각하게 만드는 매력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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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꾸로 선 탑의 살인 미스터리 야! 7
미나가와 히로코 지음, 지세현 옮김 / 들녘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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쉽게 단숨에 읽을 수 있는 미스터리는 분명히 아니다. 하지만 읽을수록 그 매력이 묻어난다. 그 매력이 본격적으로 펼쳐지는 중반 이후는 작가가 의도한 구성과 전개에 몰입하게 만든다. 그렇지만 역시 앞부분은 낯선 나라의 풍경과 삶이 약간은 지루하다. 비록 그곳이 우리와 너무나도 가깝고도 먼 일본이라고 하여도 말이다. 지루한 부분을 지나고 난 후 마지막에 이르게 되면 조심스럽게 작가가 심어놓은 단서들이 눈에 들어온다. 

먼저 시간적 배경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그 때는 2차 대전 말 무렵이다. 1945년에서 이야기는 시작하여 과거와 현재를 오간다. 첫 번째 화자는 친구들에게 따돌림을 당하는 이브 아베 긴코다. 그녀는 그 당시의 상황을 설명하면서 낯선 시간 속으로 우릴 인도한다. 사실 그녀의 이야기는 아주 평범하다. 보통 학교에서 일어날 수 있는 일을 말한다. 하지만 시대는 보통 여학교의 삶을 용납하지 않는다. 공습과 기아로 친구와 가족이 죽고, 학생들은 가미가제 특공대를 위해 군수 공장에서 일한다. 그녀의 이야기는 도입부지만 앞으로 펼쳐질 이야기의 기초와 단서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이야기는 한 사람의 화자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소설 속 일기와 그 속의 소설이란 것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소설의 제목도 바로 일기 속 소설 제목인 <거꾸로 선 탑의 살인>에서 비롯한 것이다. 재미난 것은 이 소설이 한 사람의 작품이 아니라 여러 사람이 같이 쓴 작품이란 점이다. 먼저 첫 사람이 이야기의 도입부를 쓰고, 다음 사람이 계속해서 이야기를 이어가는 것이다. 하지만 교묘하게 작가는 순서를 잠깐 바꾸고, 사람들의 혼란을 불러 올 작업을 조금씩 펼친다. 덕분에 중반까지도 그 미스터리를 제대로 깨달을 수 없었다. 이브의 이야기가 미와 사에다로 넘어가면서 그 혼란을 더 가중시키기 때문이다.

약간 복잡한 구성이지만 읽는 데는 전혀 힘이 들지 않는다. 전시 상황과 그 속에서도 피어나는 순수한 우정과 사랑은 한 편의 청춘소설을 읽는 재미를 주기 때문이다. 그런 바탕 위에 세워진 미스터리는 공동 작업 소설로 드러나지만 그 중요성에 비해 분량은 많지 않다. 이 부분은 분명히 아쉬운 부분이다. 마지막에 가서 현실과 가상 세계를 연결시키는데 그 연관성을 쉽게 깨닫지 못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또 작가는 충분한 단서를 제공하기보다 각각 다른 화자를 등장시켜 다양한 시각에서 사건을 보게 만든다. 이런 점이 중반까지 약간의 혼란을 가져오게 했다. 

많은 책과 작가와 화가와 그림이 등장한다. 그 중에선 앙리 바르뷔스의 <지옥>은 가장 중요하다. 이 작품이 중요한 것은 바로 훔쳐보기 때문이다. 이 작품 속에서 훔쳐보기는 사건의 중요한 요소다. 각각 다른 화자를 내세워 이야기를 이끌어 나가는 것이 이런 시각을 조금은 반영한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훔쳐보기를 통한 사건 전개와 이에 대한 오해는 재미를 더한다. <지옥>은 이전에 읽었지만 취향에 잘 맞지 않아 정확하게 기억하지 못해 조금은 아쉽다. 다음에 다시 읽고 싶다. 

소녀들의 성장과 사랑과 우정을 다룬다. 감정이 풀려가는 속에 만나게 되는 소녀들은 순수하다. 전시 상황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고분고분하게 살아간다. 아니 조금의 반항이나 돌출 행위는 사회적으로 용납되지 않는 시대다. 이것은 패전 후 선생들의 행동 속에서 그 위선이 살짝 벗겨진다. 하지만 더 이상의 고민을 진전시키기보다 하나의 배경으로 활용만 한다. 이것은 다시 정신대라는 단어를 우리와 완전히 다르게 사용함으로서 두 나라의 간극을 더욱 극심하게 드러낸다. 아쉽지만 한계를 뛰어넘는 작품을 기대하기는 조금 무리다. 

표지와 제목이 주는 섬뜩함이 소설에선 찾아보기가 힘들다. 액자 구성 속 소설에서 잠시 그 기미를 보여주지만 너무 잠깐이다. 미스터리 요소를 극대화시키기보다 비밀스럽고 미묘한 감정 묘사에 더 공을 들였다. 이 감정들이 미스터리와 결합하여 반전을 보여주는 마지막은 그래서 더 눈길이 간다. 감정이 순수하고, 그 순수함이 과격한 열정으로 비뚤어질 때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알려주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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