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의 정원
다치바나 다카시.사토 마사루 지음, 박연정 옮김 / 예문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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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너무나도 낯익은 다치바나 다카시와 외교관 출신으로 징역을 산 후 집필활동과 왕성한 독서와 집필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하는 사토 마사루의 대담집이다. 이 둘은 엄청난 독서광이자 소장자다. 다치바나 다카시가 소장하고 있는 책이 7~8만 권 정도고, 사토 마사루도 만 5천 권 정도 가지고 있다. 이 둘의 만남은 이런 책 소장 이야기로 시작한다. 빌딩 하나를 책으로 채우고도 공간이 부족할 정도라니 대단하다. 이런 설명을 들으면 기가 죽기도 하지만 가슴 한 켠에선 부러움과 더불어 나도 그렇게 만들고 싶다는 의욕이 생긴다. 현실적으로 이런 공간과 책읽기가 불가능하지만 말이다.

책 소장 이야기를 넘어 둘은 ‘21세기를 살아가기 위한 교양서 100권’에 대해 말한다. 100권 부족하다고 말하면서 천 권이 더 쉽다고 하는데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인다. 만약 나에게 천 권을 소개해달라고 하면 무리지만 10권 만 뽑으라고 하면 아주 고민에 고민을 거듭할 것이다. 책을 읽다 보면 너무나도 좋은 책을 자주 만나기에 적게 뽑는 것이 오히려 더 힘들다. 열 배 이상의 차이가 나지만 여기서 조그마한 공감대를 형성한 후 두 독서광의 대화 속으로 빠져들었다.

모두 다섯 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독서가 인류의 뇌를 진화시켰다는 장에서 진정한 교양은 해독제가 된다는 장으로 마무리한다. 그 사이에 지의 전체상이나 20세기에 대한 토론을 거쳐 가짜에 속지 않는 법을 끼워 넣어 그들의 방대한 지식의 세계로 나를 빠트린다. 그 깊이와 폭은 그들이 선택한 목록을 거치면서 더 분명해진다. 역사, 종교, 철학, 고전읽기, 신학, 현대정치, 사이비 과학, 마르크스주의 등을 단순히 훑고 지나가는 수준이 아니라 깊은 이해와 분석을 통해 자신의 것으로 소화했다. 이 지식들이 목록과 함께 나올 때 나의 낮은 이해와 지식이 조금 부끄러웠다.

사실 이 책을 읽으면서 그들의 지식을 모두 습득하거나 이해할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들이 보는 세계와 내가 보는 세계가 어느 정도 차이가 있음을 예상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두 사람의 대담은 그 차이를 넘어 나의 부족한 점이 무엇인지 그대로 드러나게 만들었다. 특히 그들이 서재 책장에서 꺼낸 100권 중 읽은 책이 많지 않다는 것은 두 나라의 문화나 역사적 차이를 염두에 두더라도 나의 책읽기가 편중되어 있음을 알려준다. 

이 대담과 목록을 읽으면서 일본의 역사와 아직 번역되지 않은 책이 나올 때는 낯설음과 아쉬움을 느꼈다. 무신론자인 다치바나와 열렬한 기독교 신자인 사토의 신학 대담은 신의 수축이란 낯선 개념을 알게 하는 즐거움은 있지만 끝장 토론이 아닌 단순한 지식의 나열에 멈춰 이 대담의 한계를 분명히 보여준다. 이런 한계는 정치나 철학 등으로 옮겨 가서도 마찬가지다. 다양한 지식을 맛볼 수는 있지만 그 깊은 곳까지 가기 위해서는 그들이 내놓은 목록과 대담 속에서 같이 다루어진 책을 읽는 수밖에 없다. 기본적으로 그들이 뽑은 목록을 중심으로 이 책의 대담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과학에 대한 독서를 강조한 다치바나와 정보계통 일을 하여 그 부분에 강점이 있는 사토의 지식이 밖으로 드러날 때는 나만의 독서법과 지식을 쌓아가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읽지 않았거나 읽었지만 읽었다는 기억만 희미하게 남아 있는 책 목록을 보면서 너무나도 방대한 책의 세계를 다시 생각한다. 사놓고 읽지 않은 수많은 책들과 읽으면서 알게 된 작가들의 새 번역본들이나 출판물을 생각하면 구입을 멈출 수 없다. 최소한 다치바나가 말한 실전에 도움이 되는 독서기술 중 하나는 실천하고 있다. 하지만 구입에 멈추고 읽기가 점점 뒤로 밀리는 현실을 생각하면 이들의 깊이 있고 체계적인 독서 지식은 부럽기 그지없다. 책읽기에 더 많은 노력과 몰입을 해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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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가운 살인자
서미애 지음 / 노블마인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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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단편들을 다른 곳에 만난 적이 있다. 장편 <인형의 정원>도 읽었다. 이전에는 그녀의 매력을 충분히 느끼지 못했다. 완성도나 재미 면에서 아쉬움을 주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번 열 편의 단편추리소설은 다르다. 각각 다른 분위기와 인물을 등장시켜 몰입하게 만들고, 감성을 자극하고, 공감하게 만들었다. 한국 추리소설을 잘 읽지 않는 나에겐 낯설지만 이미 그녀는 대단히 유명하다. 이 단편집으로 그녀를 좀더 주시하게 되었다.

표제작 <반가운 살인자>는 유오성이 주연한 영화로 더 유명하다. 이 영화에 대해 큰 관심이 없어 몰랐는데 이 단편추리소설이 원작이다. 영화는 원작과 분명 다르게 이야기가 풀렸을 것이다. 살을 더 많이 붙이고, 결말도 약간 바꾸지 않았을까 추측해본다. 살인자가 반가울 때는 언제일까? 내가 미워하는 사람을 죽였을 때, 살인자를 쫓는데 그를 만났을 때, 아니면 이 소설처럼 다른 사람 손에 죽기를 원할 때. 이렇게 소설은 의문을 품게 만들고, 아버지와 남편의 권위와 경제력을 상실한 한 남자의 이야기를 간결하면서도 여운을 남기며 풀어낸다.

<반가운 살인자>와 함께 여운을 강하게 주는 두 작품이 있다. 이 세 작품은 개인적으로 이 단편집에서 가장 마음에 든다. <숟가락 두 개>는 처음엔 손가락 두 개로 잘못 읽기도 했지만 이야기가 점점 풀려나가면서 가슴을 먹먹하게 만든다. 전과 13범과 벙어리 여자의 관계와 삶이 현실의 모순을 드러내고, 그들의 마음 씀씀이가 가슴 아프게 만든다. 그리고 마지막에 두 개의 숟가락이 의미하는 바와 형사의 의지와 의욕이 결합하여 보여주는 장면은 또 다른 아픔과 함께 긴 여운을 남긴다.

<경계선>은 한 왕따 학생의 심리와 시선을 따라가면서 우리의 모습을 보여준다. 자신을 괴롭히는 아이들을 공격하거나 반발하고 싶은 마음이 있지만 늘 상상에 멈추고, 학교 킹카 효리의 도움을 받은 후 우연히 본 낯설게 변신한 그녀를 조용히 따라다닌다. 그 속에서 만나게 되는 두 죽음은 순간의 선택이나 실수가 어떤 위치에 우리를 놓을 수 있는지 보여준다. 그 경계선에 선 두 남녀의 마지막 모습은 새로운 출발을 암시하기도 한다.

<남편을 죽이는 서른 가지 방법>과 <그녀만의 테크닉>은 이전에 읽은 듯하여 크게 새로움을 느끼지 못했고, <냄새 없애는 방법>은 우리가 자신하는 감각이 어느 순간 얼마나 왜곡될 수 있는지 보여준다. 이 작품은 그녀의 소설이 어디에서 아이디어를 얻는지 알려준다. <살인 협주곡>은 서로를 죽이려는 부부의 여행이 주는 긴장감이 왠지 모르게 뒤로 가면서 코믹하게 흘러간다. 블랙유머의 재미는 있지만 그 과정은 조금 아쉽다. <정글에 악마가 산다>는 과다한 욕심이 얼마나 위험한지 알려주고, 먹고 먹히는 정글의 법칙을 되돌아보게 한다. 

<비밀을 묻다>는 프롤로그와 에필로그만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구성이 눈길을 끌지만 너무 쉽게 결말이 예상된다. 하지만 그 결말보다 부자 남편의 죽음을 둘러싸고 퍼지는 소문과 질시가 더 흥미롭다. <거울 보는 남자>는 어떻게 읽느냐에 따라 다르게 해석이 가능한 작품이다. 자신이 받았던 핍박을 타인에게 전가하려는 사람과 무책임한 학설을 내놓은 학자의 대립이 간결하면서도 많은 것을 생각하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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측천무후
쑤퉁 지음, 김재영 옮김 / 비채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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측천무후가 중국 유일의 여황제였기 때문인지 유명 작가들이 관심을 가진다. 샨사의 <측천무후>가 몇 년 전 번역되었는데 이번엔 쑤퉁이다. 최근 작품인가 하고 연보를 찾아보니 비교적 초기인 1993년 작품이다. 얼마 전 텔레비전 드라마로 만들어진 신라 선덕여왕을 생각하면 남성위주의 사회에서 여왕이나 여황제는 시선을 끌 수밖에 없는 존재다. 물론 이 둘의 왕위 쟁탈 과정은 완전히 다르다. 무측천에 대한 여러 가지 평을 생각하면서 쑤퉁은 어떤 점을 부각시켰을까 호기심을 자극했다. 아마 다음에 샨사의 작품을 읽고 남녀가 어떤 차이를 가지고 무측천을 보게 되는지 비교하는 것도 재미있을 것 같다.

두 가지 시각을 가지고 이야기는 전개된다. 하나는 측천무후가 되기까지 과정과 그 후를 다루고, 다른 하나는 그 사이에 그녀의 자식들 이야기를 집어넣었다. 처음엔 재인 무조가 된 배경과 태종의 궁녀로 살다가 그의 죽음 후 어떻게 비구니로 전락했는지를 다룬다. 이후 새로운 황제의 황후와 소의 간의 다툼 속에 일개 소의에서 어떻게 자신의 위치를 다졌는지 보여준다. 권력에 대한 집착과 열정은 비정하고 조금도 주저함이 없는데 이것은 그녀가 천후가 되는 지름길이다. 권력을 완전히 잡은 후 여황으로 오른 그녀의 전횡은 역사적 사실에 작가의 상상력이 덧붙여져 생생하게 살아있다. 하지만 쑤퉁은 그녀의 위대함보다 그녀가 풀어놓은 공포에 더 초점을 맞추었다.

그녀의 비정함과 무서움과 권력욕은 그녀의 아들들에 의해 잘 드러난다. 먼저 나오는 태자 홍은 천후였던 어머니에게 독살된다. 독살된 배경을 귀신이 된 그가 삶을 압축적으로 설명하면서 보여준다. 그는 꿈꾸던 당의 미래는 천후가 꿈꾸던 미래에 방해물이다. 자신의 딸마저 목 졸라 죽여 정치적으로 이용할 정도로 무시무시한 그녀에게 이런 행동은 큰 일이 아니다. 이후 태자 현을 거쳐 예종으로 이야기가 건너가면서 정적이나 신하의 시선이 아닌 아들이자 최대의 적인 당의 황자들 시선으로 풀어낸다. 이 이야기 속에서 그녀가 권력 주변에 풀어놓은 공포와 권력에 대한 강렬한 욕망과 의지를 읽을 수 있다.

역사적 사실을 따라 흘러가면서 만나게 되는 이야기들은 그녀의 위대함이 아니다. 가장 높은 곳에서 어떻게 신하를 다스렸고, 그녀가 만들어놓은 상황 속에서 어떻게 그들이 움직였는지 잘 알려준다. 이 모든 중심엔 여황이 되고 무 씨 왕조를 만들고자하는 의지와 욕망이다. 밀고와 부패와 공포와 고문은 그녀의 정치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들이다. 자신을 거스르는 존재는 아들마저도 거침없이 제거하는 그녀의 행동은 다른 사람들에게라면 두 말할 필요가 없다. 욕망에 충실했고, 그것을 실현하기 위해 보여준 행동들은 거대한 부패와 비리를 양산했지만 제국의 운영에 큰 부담을 준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물론 이것은 그 후 당의 역사를 다시 공부할 필요가 있다. 천측무후를 말할 때 늘 나오는 남창들이 그녀를 비난하는 하나의 도구로 사용되지만 늙은 재상이 그녀를 위대한 여황으로 평가하는 부분에선 약간 혼란스럽고 어느 부분에선 고개를 끄덕인다. 

그녀의 위대한 업적에 대한 이야기를 소설은 뺐다. 욕망에 집중한다. 이 과정을 보면서 한 명의 소녀가 어떻게 위대한 여황으로 변신했는지 알게 된다. 그녀의 위대한 업적을 모르는 사람에겐 그 위대함이 낯설다. 고문과 학살과 밀고 등이 그 중심에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 여인의 욕망이 어떤 과정을 통해 드러나고 실현되는지 보는 것은 참혹한 장면들이 이어지지만 흥미롭다. 남성 작가가 본 측천무후의 욕망과 여성 작가가 본 욕망이 어떤 차이와 비슷한 점이 있을지 궁금하다. 그녀를 다룬 다른 작품을 읽고 다시 한 번 더 쑤투의 측천무후를 생각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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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니 먼로의 죽음
닉 케이브 지음, 임정재 옮김 / 시아출판사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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빠르게 읽히지만 난감한 소설이다. 그렇게 도덕적인 인간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버니의 현실과 환상은 불편함을 준다. 섹스중독자에 알코올까지 쉼 없이 마시는 그를 보면서 흔히 왜 그가 그렇게까지 전락한 것인가를 묻기보다 그의 행적을 따라간다. 시간 순으로 흘러가는 도중에 환상과 과거가 교차하는 구성이다. 섹스중독자의 상상력이란 그런 쪽으로만 이어지는 것일까? 이런 의문도 던져본다. 하지만 그의 행동 속엔 현대인의 삶이 들어있다. 너무 노골적이라서 그렇지.

버니 먼로는 아내가 우울증을 앓고 있고, 빨리 와 달라는 요청 전화를 받는 순간에도 창녀와 함께 있다. 최악이라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냉정하게 주변을 둘러보면 적지 않은 수의 남편들이 어느 순간 자신도 모르게 이런 행동을 한다. 정도의 차이가 조금 있을 뿐이다. 누구나 처음엔 이런 증상에 겁을 먹거나 죄책감을 느끼게 되지만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둔감해진다. 우리가 흔히 자신의 배우자가 죽으면 화장실에 가서 웃는다는 말을 하는 것과 닮은 점이 있다. 섹스중독자 남편이라면 아마도 더 많지 않을까 생각한다. 

이런 남편을 나쁜 놈이라고 욕하는 것은 쉽다. 왜 이런 행동을 하는지 아는 것은 어렵다. 그런데 작가는 왜 이런 행동을 하게 되었는지 자세히 알려주지 않는다. 흔히 좋은 소설이 왜? 라는 의문을 파고드는데 이 소설은 그것을 많은 부분 생략했다. 그럼에도 많은 호평을 받는 것은 왜일까? 그것은 아마 소설 곳곳에 나오는 현대인의 삶의 단면들 때문이 아닌가 생각한다. 극한 우울증과 공포에 굴복하여 자살한 버니의 아내나 버니가 한 판 하려고 방문한 집 속의 여자들이 현대 여성의 삶이 잘 보여주지 않는 어두운 면을 드러낸다. 외로움에, 따뜻한 손길에, 분노에, 추억에 빠져 있고, 그들은 버니의 방문판매 속에서 나름대로의 반응을 보여준다. 

모두 세 개의 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난봉꾼, 세일즈맨, 데드맨이다. 기본적으로 그는 난봉꾼에 세일즈맨이다. 아내의 자살 후 아들을 데리고 다니면서 판매 공부를 시킨다고 핑계를 되지만 사실 맡길 곳이 없다. 홀로 방치하지는 못하고 자신의 아버지가 한 것처럼 아들을 데리고 다니며 화장품 방문판매를 한다. 그가 영업을 하거나 섹스를 하는 동안에 아들은 차안에서 백과사전을 읽거나 환상에 빠진다. 가끔 죽은 엄마를 만난다. 이런 환경 속에서도 아들이 아빠를 무척 사랑한다. 아이에겐 미워할 누구보다 좋아할 누군가가 더 필요했던 것이다. 이런 생활이 아들 버니 주니어에게 늘 행복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엄마가 자살한 후 아빠가 필요했다. 다른 누구의 도움이 아니라 아빠의 존재가 말이다.

주변에서 가장 많이 만나는 아버지들이 자식에 대한 사랑으로 가득한 아버지들이다. 아직 미혼인 나에게 그들의 사랑은 놀랍다. 가끔 의무감에 휩싸여 있는 경우도 많은데 그 밑바닥엔 끝없는 애정이 있다. 자식의 팔다리가 부러졌을 때 자신이 아팠으면 한다는 말에선 진심이 가득 묻어나고, 아이를 돌보기 위해 달려가는 모습은 아름답다. 하지만 현실에서 이런 아빠들만 있는 것이 아니다. 윤리나 도덕에 의해 이런 역할은 연기하는 사람들도 있고, 아예 이것조차 무시하는 사람들이 있다. 버니는 이 중에서도 후자다. 그리고 아내의 죽음에 죄책감을 느끼고, 급속하게 무너진다. 돌아갈 곳을 잃은 그가 아들과 함께 떠돌아다니는 과정과 그 속에서 일어나는 에피소드와 환상은 그것을 더욱 가속화시킨다. 술과 섹스와 환상이 현실의 경계를 무너트린다. 이 장면들의 묘사 노골적이고 직접적이고 집착적이다. 

버니의 아버지, 버니, 버니의 아들 버니 주니어 이 삼 대의 만남이 이루어지는 순간 이 가족의 과거, 현재, 미래가 충돌하고 얼마나 닮았는지 알게 된다. 버니의 섹스중독이 아버지의 그것과 닮아 있고, 과거 속에서 이런 단서를 발견한다고 하지만 개인적으로 충분한 설명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엄청난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마지막 장면은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놓는다. 이 소설을 읽으면서 가장 인상적이고 강한 여운을 남기는 장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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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S 원숭이
이사카 고타로 지음, 민경욱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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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카 고타로의 작품은 대부분 빠르게 재미있게 읽힌다. 가끔 그 의미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해 힘든 경우도 있다. 이번 작품은 후자의 경우다. 사실 앞부분을 읽으면서 현실과 환상이 교차하는 부분을 보면서 혼란스러웠다. 엑소시스트가 나오고, 서유기의 이야기가 펼쳐지면서 이 둘의 접점을 찾기 위해 머리는 빠르게 움직였다. 당장 찾아질 리가 없다. 그런 흐름 속에 자연스럽게 빠지면 후반부에 왜 이런 구성이 생겼고, 서유기가 등장하게 되었는지 알게 된다.

내 이야기와 원숭이 이야기가 교차하면서 진행된다. 내 이야기의 주인공은 전자제품을 파는 엔도 지로다. 부업으로 엑소시스트를 한다. 그가 이런 부업을 하게 된 이유는 이탈리아 유학을 갔을 때 친구의 아버지이자 신부이자 엑소시스트를 따라다니며 경험을 쌓았고, 돌아와서는 이런 경험이 알려지면서 의뢰가 들어왔기 때문이다. 그러던 중에 어릴 때 짝사랑하던 옆집 헨미 누나가 히키코모리 아들을 도와달라고 요청한다. 바로 여기서 이야기가 시작한다. 엑소시스트와 히키코모리라는 이상한 구도가 성립되는 것이다.

원숭이 이야기는 서유기 속의 손오공이 화자다. 하지만 등장인물은 이가라시 마코토라는 사고원인 조사원이다. 그는 최고의 조사원으로 꼽히는데 그것은 감정의 개입을 배제한 상태에서 냉철하게 인과관계를 쫓아가기 때문이다. 그에게 내려진 임무는 전산조작의 실수로 생긴 300억 엔의 오발주 사고 원인을 조사하라는 것이다. 그의 조사결과에 따라 프로그램 제작회사와 증권회사의 희비가 교차할 수 있다. 조사를 시작하는데 면담 대상들이 서유기 속 등장인물로 다가오기 시작한다. 전반부의 혼란 대부분이 이런 환상과 손오공의 개입에서 비롯한다.

지로는 타인의 고통이나 슬픔을 느끼면 SOS 신호를 받은 것처럼 달려가 도와주지 않으면 마음이 불편하고 견디기 힘든 사람이다. 이런 마음 때문에 엑소시스트 의뢰가 왔을 때 달려간 것이다. 첫사랑 헨미 누나가 히키코모리 아들 마사토 문제를 상당했을 때도 마찬가지다. 그것에 대해 아는 것도 없으면서 다음 약속을 잡은 것이다. 마사토가 현재처럼 변하게 된 시점을 찾아가던 중 한밤중에 노래하는 특이한 사람들을 만난다. 이 만남은 과거의 사건과 마사토에 대한 새로운 정보를 제공한다. 하지만 이런 단순한 정보들이 마사토의 히키코모리 문제를 단숨에 깨트릴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마코토의 조사는 사고가 발생한 팀으로 먼저 움직인다. 그곳에서 만난 까까머리 과장은 왜 이런 일이 생겼을까 하는 의문에 대한 조그마한 대답을 제공하지만 그 원인을 속 시원하게 풀어주지는 않는다. 이제 조사는 오발주 사건을 일으킨 다나카 도루로 옮겨간다. 그가 다나카 도루를 만나로 가는 도중에 생긴 조그마한 에피소드와 장소는 내 이야기와의 접점을 제공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그 실체를 정확히 파악하기는 힘든다. 그리고 다나카 도루와의 면담은 또 다른 원인에 대해 단서를 던져준다. 그 단서가 다시 그 원인에 대한 의문을 던지지만 말이다.

현실의 내 이야기와 환상의 손오공 이야기가 다른 사람의 이야기로 바뀌면서 그들은 만난다. 이 만남은 앞에 나온 이야기를 이어나가는 동시에 한 번 더 비틀고 더 깊숙이 파고들고 풍성하게 만든다. 악마, 폭력, 무의식, 죄의식, 정의 등의 무거운 개념들이 그 속에 뿌리를 내리고 다양한 사고와 의미를 탐색하게 만든다. 지로의 과거 엑소시스트 경험은 악마에 대한 서양의 선악 개념을 살짝 비틀고, 현실 속에서 그 원인을 찾고자 한다. 오발주 사건은 소설 속 모든 인과관계의 종착점이자 또 다른 의미를 던져준다. 이야기의 주술적 힘이 가능한가? 하고 말이다. 

빠르게 읽고, 혼란스러움을 느끼기도 했지만 지금 이 순간 잘 짜인 구성과 작가가 곳곳에 던져놓은 이야기들이 많은 것을 생각하게 만든다. 별개의 것처럼 흘러가다 하나로 이어지고, 인과관계를 치밀하면서도 교묘하게 연결하여 다시금 소설 속으로 생각을 던지게 만들고, 끝없이 상상력을 펼치게 한다. 그리고 손오공 분신 이야기는 대단히 흥미롭고 놀랍다. 서유기에 대한 새로운 해석은 원작에 대한 오마주가 엿보이며 그 의식의 끝자락에 무엇이 있는지 궁금하다. 작가가 가장 쓰고 싶었다는 말에 고개를 끄덕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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