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리 - 2010 제34회 오늘의 작가상 수상작 청춘 3부작
김혜나 지음 / 민음사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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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이 책에 관심이 간 것은 2010 오늘의 작가상 수상작이었기 때문이다. 최근 한국소설을 많이 읽지 않는데 가능하면 찾아서 읽은 문학상 중 하나가 바로 이 상이다. 책을 받아들고 표지 등을 보면서 처음 느낀 점은 얇다는 것과 소녀 취향의 그림이란 것이다. 바로 읽을 수도 있었는데 뒤쪽 심사평을 읽으면서‘치명적인 성애묘사’란 표현에 문학상 수상작이 얼마나 사실적으로 묘사했겠는가 하고 내려 보는 마음도 있었다. 하지만 이런 생각은 몇 쪽을 읽지 않아서 바뀌었다. 너무나도 적나라하고 사실적인 묘사 때문에 한 편의 포르노 소설을 읽는 것 같았다. 오랜만에 문학을 통해 이런 경험을 했다.

사실 이런 표현이 이전에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 유명한 마광수 교수나 장정일의 작품 속에서 이미 표현된 적이 있다. 이 작품들이 세부적이고 사실적으로 표현했지만 그 시절에 이런 묘사는 지금처럼 많은 사람들의 호응을 얻을 정도는 아니었다. 몰래 보고 자신의 느낌을 다른 사람들과 뒤섞어 표현하는 정도였다. 그런데 이번 작품은 아예 유명한 문학상을 받았다. 대단한 변화다. 이런 변화가 인정되는 것은 우리 사회의 진보이기도 하지만 소설 속에서 만나게 되는 청춘들의 삶과 방황이 현실의 한 면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제리는 노래방 도우미로 온 남자의 이름이다. 그가 중심에서 이야기를 끌고 가는 것이 아니라 그를 우연히 지명한 화자 나의 행동과 심리로 그려진다. 그녀는 노래방 도우미가 열심히 놀려고 할 때 오히려 즐겁기보다 어색하고 그 속에 몰입하지 못한다. 술로 시간을 때우고, 시간이 끝난 후 다른 파트너를 부르자는 동료들의 요청에도 불구하고 다시 그를 불러낸 것은 바로 이 어색함을 조금이라도 들어내고자 하는 마음 때문이다. 그와의 시간 속에서 즐겁게 놀지 못하지만 그녀가 느낀 감정은 솔직한 성욕이었고, 이 감정은 꿈도 희망도 미래에 대한 전망도 없는 현실의 그녀에게 하나의 도피처가 된다.

소설 속에서 만나게 되는 20대는 도덕적 시각에서 보면 음탕하고 반도덕적이다. 술과 섹스와 일탈을 즐기려는 마음만 가득하고 미래에 대한 어떠한 비전도 제시하지 못한다. 미주가 나에게 꿈을 물었을 때 그녀는 대답하지 못하는데 이것은 많은 20대의 현실이다. 추상적인 꿈을 이야기할 수 있지만 구체적으로 들어가면 대부분 그림을 제대로 그려내지 못한다. 이들을 보면서 대학 도서관과 영어회화학원을 오가면 스펙을 쌓고 있는 대학생을 생각하면 완전히 딴 세상 아이들 같다. 이런 양극화는 현실 속에서 이미 벌어질 만큼 벌어졌고, 현실에 대한 정확한 인식을 바탕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화자가 자신과 선후배의 미래를 생각할 때 현실의 높은 벽과 넓은 틈새는 결코 낮아지거나 좁아지기는커녕 더 커지기만 한다. 

현실 속 청년들은 이미 불공평한 경쟁에 대해 정확히 인식하고 있다. 외모 차이, 부모의 재력 차이, 학력 차이 등을 말이다. 하지만 이들이 두려워하는 것은 현실의 이런 차이가 미래에도 변하지 않을 것이란 확신이다. 그 때문에 제리가 “그런데 내가 진짜로 무서운 건, 죽어서도 이대로일까 봐, 죽어서까지도 늘 이따위 신세일까 봐, 또다시 이 바닥으로 떨어질까 봐 그게 너무 무서워.”(214쪽)란 말에서 잘 드러난다. 이런 그들에게 술과 섹스에 대한 갈증과 탐욕은 일시적이면서도 충동적일 수밖에 없다. 

화자의 삶과 심리를 따라가다 보면 우리사회에서 루저라고 부르는 사람들의 삶을 만나게 된다. 학창시절엔 날라리란 이유 때문에 선생에게 성희롱 당하고, 이 사실을 믿어주기보단 그녀를 탓하는 현실을 만난다. 졸업 후 갈 대학이 없어 2년제 야간전문대에 들어갔지만 이것은 단지 다른 무엇인가를 성취하려는 욕구가 아니라 시간을 흘려보내기 위한 하나의 방편이다. 외로움 때문에 술과 섹스를 제외하면 아무런 감정 교류도 없는 강을 만나고, 가족과의 단절은 타인과의 관계보다 못하다. 이런 그녀의 일탈과 방황 속에서 마지막에 나오는 조그마한 깨달음과 감정은 이 시대 20대의 조그마한 성장을 보여준다. 그리고 노골적인 성교 묘사 너머에 있는 그들의 삶은 조용히 가슴 한 곳에서 공감대를 형성하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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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비 2010-08-09 11: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서평 잘 보았습니다^^
 
시튼 탐정 동물기
야나기 코지 지음, 박현미 옮김 / 루비박스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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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튼 동물기>를 정식으로 읽은 적이 없다. 하지만 그 책 내용 중 일부는 여기저기에서 듣거나 읽은 적이 있다. 이 유명한 작품을 작가는 원작의 범위 속에서 자신의 상상력을 동원하여 새로운 재미를 이끌어내었다. 그것은 바로 시튼을 탐정으로 등장시킨 것이다. 이 소설 속 시튼은 셜록 홈즈와 같은 역할을 한다. 사건들은 바로 그의 동물기를 배경으로 펼쳐지는데 한 편 한 편이 흥미롭고 재미있다. 동시에 <시튼의 동물기> 내용 중 일부를 알게 되는 부수입도 있다. 

<카람포의 악마>는 <늑대왕 로보>를 배경으로 펼쳐진다. 하지만 전체적인 이야기 도입부로 시튼과 기자인 화자의 만남과 인연을 설명하는 장이기도 하다. 화자가 시튼을 인터뷰하기 위해 방문하는 장면은 셜록 홈즈에 대한 오마주다. 시튼의 관찰력과 추리력을 보여주면서 현재가 아닌 과거 속으로 들어가 살인사건을 해결한다. 이후에도 이어지지만 각 단편에 등장하는 동물들이 살인을 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이용한 인간들의 살인을 다루고 있다. 이런 설정은 자연주의자였던 시튼의 사상을 그대로 투영한 결과가 아닌가 생각한다. 

연작으로 이어지게 만들기 위해 화자가 근무하는 <로스앤젤레스 타임즈> 편집장은 첫 이야기에 대한 열렬한 호평으로 다음 이야기를 요구한다. 그 결과 나온 것이 <실버스팟>이다. 실버스팟은 까마귀다. 이 까마귀가 물고 온 다이아몬드를 배경으로 사건을 풀어내는데 사실 쉽게 범인을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까마귀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하고, 이 소설이 얼마나 셜록 홈즈에 대한 오마주로 가득한지 홈즈의 대사를 그대로 인용하여 보여준다.

<숲속의 다람쥐>도 역시 쉽게 사건을 쉽게 풀 수 있다. 작가는 어렵게 사건을 꼬아놓기보다 셜록 홈즈와 <시튼 동물기>의 결합에 더 많은 비중을 두었다. 이번 이야기에서 가장 인상적인 것은 사건이 아니라 도입부에 신문 기사를 비판하는 장면이다. 진실이나 사실을 그대로 전달하기보다 사실의 일부만 도려내어 오해를 불러오거나 왜곡하는 현실을 비판한다. 이 부분을 읽으면서 몇몇 신문기자들과 신문사가 머릿속을 스쳐지나갔다. 다람쥐를 통해 드러난 진실이 범인을 알려주듯이 현실에서도 올바른 정보를 제공하는 신문이 있으니 그래도 다행이다. 

이 연작집에서 유일하게 시간을 거꾸로 올라간 작품이 <외양간 밀실과 메기 조>다. 시튼의 어린 시절을 다루는데 그의 탁월한 관찰력과 추리력이 어디에서 생긴 것인지 알려준다. 두 개의 사건이 벌어지는데 나이 탓인지 다른 사건에 비해 조금 가볍다. 하지만 그의 뛰어난 탐정 실력은 그 떡잎을 알 수 있게 만든다. 달걀 이야기에선 좋은 달걀이 어떤 것인지 조금은 알게 되고, 먹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게 된다.

그의 명성 탓에 동물 탐정 비슷한 역할을 기대하는 사람들이 많은 모양이다. 그런 일 중 하나가 <로열 아날로스탄 실종사건>이다. 니카보카 고급고양이 및 애완동물협회 주간 품평회에서 만장일치로 일등상을 탄 고양이를 찾아달라는 부탁을 받고 이를 추적하는 이야기다. 고양이의 놀라운 능력도 흥미롭지만 부유층의 헛된 욕망이 만들어낸 허상이 더 많은 재미를 준다. 요즘이라면 고가브랜드에 혹한 수많은 사람들이 아닐까?

<세 명의 비서관>은 대통령을 암살하려는 적에 동조하는 내부의 적을 찾으려는 시도를 담고 있다. 시튼의 친구로 테오도어 루즈벨트가 등장한다. 그리고 어떤 동물이 나라의 상징 동물이 될 것인가에 대한 이야기가 이어지는데 시튼의 주장이 상당히 재미있다. 이전에 대머리독수리 말고 다른 동물도 나왔다는 이야기를 읽은 적이 있는데 만약 시튼의 주장대로 그 동물이 상징동물이 되었다면 어땠을까 생각하면 킥킥 웃었다. 스파이를 찾아내는데 일등공신이기도 하지만.

마지막 작품인 <곰의 왕 잭>은 첫 번째 이야기와 닮아 있다. 동물을 이용해 살인사건을 조작한다는 설정이다. 역시 범인은 쉽게 알 수 있다. 하지만 이 소설에서 가장 눈길을 끈 것은 “과학자가 아닌 사람이 과학적인 용어로 정확한 표현을 할 수 없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풍부한 경험을 가진 사람의 이야기에는 과장이 있기 마련입니다.”(242쪽)란 문장이다.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정확한 표현을 하지 못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문득 머릿속을 스쳐지나간다. 그리고 곰에 대한 정보는 역시 편견을 넘어 사실에 도달한다.

이 작품을 읽으면서 역시 가장 많이 생각한 것은 <시튼 동물기>다. 아직 제대로 읽지 않았지만 이 연작단편집으로 그 재미를 간접적으로 누렸다. 끈기 있는 관찰과 조사와 열정과 사랑이 만들어낸 그 결과물에 대해 관심이 자연스럽게 가고, 그 동물들의 이야기 속에서 인간 이상의 삶이 펼쳐지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생긴다. 그와 동시에 작가가 이 흥미로운 결합을 계속 이어가면서 속편을 만들어주었으면 하고 바란다. 아직 다루지 못한 <시튼 동물기>가 많이 남은 것을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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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려한 수업
아니샤 라카니 지음, 이원경 옮김 / 김영사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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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교육계를 이야기할 때 사립학교는 빠지지 않는 주제다. 늘 공교육이 무너진 미국의 현실을 보면서 놀라곤 했는데 최근 한국도 그런 경향이 점점 강해지고 있다. 아니 이미 무너졌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무엇보다 놀라운 것은 미국 교사의 급여수준이다. 교사의 급여가 청소부보다 적고, 방학이나 평소에 다른 일을 하지 않으면 생계를 유지할 수 없을 정도라는 사실에 다시 한 번 더 놀란다. 이런 사실을 들으면서 왜 미국의 학력이 점점 떨어질 수밖에 없는지 알게 되었다. 부모들이 공립학교를 배척하고, 사립학교에 보내려고 노력하는 것이 단순히 안전문제만이 아님을 생각할 때 우리가 특목고에 열광하는 것과 어느 정도 유사한 점이 있지 않나 생각하게 된다. 

미국 대학을 이야기할 때 아이비리그 대학들이 많은 수의 학생을 부유층 자녀들의 기부입학으로 재정을 튼튼하게 하고, 그 돈으로 각 지역을 뛰어난 학생을 장학생으로 뽑아 학교의 이름을 떨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아버지가 아이비리그 출신이면 그 자식도 아이비리그를 나와 부를 대물림하고, 그들만의 리그를 만들어 소위 말하는 상류층으로 군림한다. 이런 현실이 바로 이 소설의 배경이 된다. 부모들이 자신의 아이들이 아이비리그에 입학하고, 졸업하여 자신이 물려받은 부와 권력을 유지하기 바라는 것이다. 작가는 이런 현실의 일부만 소설 속에서 빠르게 진행하면서 유쾌하게 그려낸다. 그리고 한국도 이미 상위 몇 개 대학에서 강남 부유층 출신을 우선적으로 선별하고 있는데 이것과 겹쳐지는 느낌이 든다.

소설은 참된 교사가 되겠다는 의지가 가득한 애나의 일 년을 담고 있다. 그 일 년은 천당과 지옥을 오가는 시간이다. 뛰어난 사립학교 랭던홀에 채용되었을 때만 해도 그녀의 신념은 순수하고 열정으로 가득했다. 첫 수업 후 그녀가 겪게 되는 수난은 현실에 대한 무지와 열정이 충돌했기 때문이다. 학생들에게 숙제를 많이 내주었다고, 말도 없이 퀴즈를 내었다고 학부모들이 불평과 비난이 쇄도한다. 아이들 또한 수업에 대한 열정이 없다. 그러다 보게 되는 과외수업을 하는 랜디의 모습은 그녀로 하여금 분노하게 만들고, 이를 바로 잡으려고 한다. 하지만 이 시도는 그녀의 일자리를 위협할 정도로 되돌아오고, 그녀는 현실에 굴복한다.

과외에 대해 굴복했지만 그녀가 게임처럼 만들어가는 수업은 학생들의 열정을 자극하고,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만든다. 대성공이다. 하지만 이 성공이 오히려 부모들에게 불만과 불안을 가져다준다. 아이들이 밤늦게 몇 시간이고 이 수업준비에 집중하는 것이다. 다시 불평과 불만이 터져 나오고, 일자리를 걱정하는 그녀는 신선한 수업 방식을 접을 수밖에 없다. 그러다 과외에 대한 유혹이 다가온다. 월급 1800달러에 집세 1200달러를 내고 나면 생활이 어려운 그녀에게 시간당 200불은 너무나도 강한 유혹이다. 이제 그녀는 달콤한 유혹에 빠지고, 그 돈으로 자신을 치장하고, 과외 때문에 부족한 수업준비를 자습이나 도서관 보내기 등으로 채운다. 그런데 오히려 그녀의 이런 변신이 학부모들과 학생들의 열광하게 만들고 인기를 더 높이게 한다.

본업보다 아르바이트가 더 많은 수입을 가져온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이 소설은 그런 상황을 설정하고, 무너진 학교 교육의 풍경을 그려내면서 부유층의 삶의 일면을 보여준다. 고가 브랜드로 온 몸을 휘감고 다니고, 손에선 최신 기기가 자신들의 존재를 알리며 계속해서 움직인다. 자식에 대한 무한 신뢰는 비판이나 비평을 용납하지 않고, 달콤한 이야기만 요구한다. 숙제는 과외교사가 대신하고 그들은 점수만 받는다. 혹시 몇 시간 동안 책 한 권을 읽고 글을 써야 하면 부모들은 온갖 이유를 붙여 아이들이 왜 책을 읽을 수 없는지 말한다. 그 덕분에 과외교사들은 천 불 이상의 수입이 생긴다. 이제 모든 시간은 과외로 돈을 벌기 위한 것으로 바뀌고, 본연의 임무는 뒤로 밀린다. 

미국 사립학교의 이면과 사교육에 대한 놀라운 이야기는 즐겁고 재미있다. 그 속에 담긴 풍자와 사실은 현실을 돌아보게 한다. 특히 마지막에 데미언이 말하는 학생들의 입장은 선생들이나 부모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고민해야 할 문제다. 현실이 비록 그것을 인정하지 않는다고 하여도 말이다. 할리우드적인 진행과 설정과 마무리지만 빠르게 잘 읽히고 몰입도가 높아 단숨에 읽을 수 있다. 물론 교육에 대한 비판과 현실에 대한 정확한 묘사도 그 재미에 한 몫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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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메리칸 러스트
필립 마이어 지음, 최용준 옮김 / 올(사피엔스21)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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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작품에 대한 화려한 찬사들과 수상 경력은 시선을 끌기에 충분하다. 그것이 데뷔작임을 생각하면 더욱 대단하게 느껴진다. 이런 찬사들을 가슴 한 곳에 담고 읽게 되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대단한 작품임을 깨닫게 되었다. 처음엔 연쇄살인에 대한 이야기가 아닐까 하고 착각을 했다. 하지만 계속 읽으면서 하나의 살인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다양한 사람들의 심리와 행동을 통해 몰락하고 있는 한 사회의 풍경을 담아내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나 자신이 그들의 행동과 심리에 완전히 동조를 하지 못한다고 하여도 현실은 그대로 진행되고 있고, 그 끝없어 보이는 삶의 왜곡과 상처들은 계속해서 가슴으로 파고든다.

처음에 아이작이 아버지 돈 4천불을 훔쳐 달아나려고 했을 때 어떤 삶이 앞으로 펼쳐질지 전혀 짐작도 못했다. 떠나기 전 그를 돌봐주고, 그가 가르쳐 무사히 졸업하게 한 학교 풋볼 영웅 포를 만나러 간다. 하지만 이 만남과 잠시 동안의 동행이 이 두 남자의 삶을 완전히 뒤바꿔버린다. 그것은 둘 중 누구의 잘못이 아니다. 단지 잠시 화를 잘 참지 못하는 포의 기질과 차마 자신을 돌봐준 포를 버리지 못한 아이작의 우발적인 행동이 부랑자들의 도발과 결합했기 때문이다. 이 우발적인 살인은 이제 둘만의 문제가 아닌 그들을 둘러싸고 있는 가족과 그 관계자 모두의 문제로 번진다.

처음 살인사건이 벌어지는 장면을 제외하면 이야기는 여섯 명의 등장인물들 시점으로 전개된다. 그들은 아이작, 그의 누나 리, 아버지 헨리, 포와 그의 어머니 그레이스, 그레이스를 좋아하는 경찰서장 해리스 등이다. 이들 중 역시 중심이 되는 인물은 아이작과 포다. 실제 살인을 한 사람은 아이작이지만 살인 현장과 증인으로 등장한 인물이 범인으로 가리킨 것은 포다. 그것은 포가 이전에 보여준 행동과 전과 덕분이다. 이 오해는 이 사건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다양한 사람들의 심리 묘사를 통해 애증과 절망과 도덕심과 속죄 등과 뒤섞인다. 

뛰어난 지능이 있지만 사람들과 잘 어울리지 못하는 아이작에 비해 그의 누나 리는 사람들의 비위를 잘 맞추고 뛰어난 성적으로 예일 대학에 들어가 부유한 남편을 만난다. 이 둘의 현재 모습이 갈리게 된 분기점은 바로 엄마의 자살과 아버지의 산재다. 리는 가족의 어두운 그림자를 뿌리치고 자신의 삶을 찾아간 반면에 아이작은 아버지를 벗어나지 못함으로서 자신의 재능을 썩혀버리고 있다. 그가 가출을 결심한 것은 성장을 향한 조그마한 도전이지만 그 시작부터 문제가 생겼다. 이 문제를 뒤로 하고 그가 도망갔을 때 마주하는 현실들은 그가 얼마나 큰 보호 속에서 살았으며 세상에 대한 무지가 깊은 지 보여준다. 그리고 힘겨운 도망 속에서 자아와 자신을 일치시키고 성장하는 모습은 포의 성장과 같이 맞물려 한 편의 성장소설로도 해석이 가능하게 만든다.

아이작에 비해 포는 머리는 딸리지만 뛰어난 육체와 운동신경이 있다. 풋볼에 재능이 있지만 결국 잘못된 선택을 하면서 새로운 삶의 기회를 놓친다. 자신을 제대로 제어하지 못하고, 엄마의 그늘에서 벗어나려는 노력을 하지 않음으로써 학창시절 영웅이 어떻게 몰락하는지 보여준다. 대표적인 몰락은 여자들이 그를 대하는 방식이다. 고등학교 시절 그와 자기 위해 조금도 주저하지 않았던 그녀들이 이제는 그가 애걸을 하여도 잘까 말까 한다. 현실의 높은 벽은 그들이 사회로 나오면서 더욱 높아지고, 한때의 열정은 현실 앞에 차갑게 식는다. 포의 심리를 따라가면 아직도 그 시절의 치기 혹은 영웅심이 남아있지만 현실은 그것을 용납하지 않는다. 하지만 아이작을 위해 그가 다문 입과 감옥에서 대처하는 모습을 보면 그 속에 내재한 연약함과 그것을 딛고 성장하는 그를 보게 된다.

가족을 버리고 새로운 도시로 옮겨가고 결혼했지만 결코 행복하지 못하고 가족에게 마음이 빼앗긴 리나 역시 많은 기회가 있었지만 남편 버질에게서 벗어나지 못함으로 자신의 삶을 수렁으로 밀어 넣은 그레이스나 이런 그레이스 때문에 위험한 일을 저지르는 서장 해리스 등도 이 사건을 통해 좀더 자신들의 현재와 과거를 돌아보게 된다. 삶이 선택의 연속이고, 후회는 아무리 빨라도 늦다는 말처럼 이들을 통해 드러나는 현실은 냉혹하고 비정하다. 그들이 잠시 서글픈 희망을 품는 것도 황량한 현실에서 잠시 벗어나기 위한 조그마한 시도다. 

작가는 “큰 문제들을 개인의 행동 탓으로 돌리는 것, 아메리칸 드림의 추악한 이면이었다.(349쪽)”고 말하면서 소설 속에 등장하는 수많은 사람들의 행동과 사회 현상을 날카롭게 그려낸다. 몰락한 도시에 벌어지는 수많은 사람들의 삶은 끔찍하다. 경제적인 능력이 사라지고, 미래가 사라진 도시에서 희망마저 사라지고 있다. 이런 마을에서 개인은 너무나도 무력하다. 아이작과 포가 부랑자들을 만난 것도 바로 실업 때문이고, 이들의 부모에게 문제가 생긴 것도 철강 산업의 몰락과 관계있다. 이 몰락이 단지 인건비가 높고 노동조합 때문이라고 말하는 것은 일본과 독일이나 스웨덴 같은 복지국가의 성장을 비교하면 얼마나 거짓인지 보여준다. 신자유주의가 내세운 거짓은 연쇄적으로 몰락한 도시들을 통해 새로운 절망과 서글픈 희망과 암울한 미래를 보여준다. 그리고 이 소설 속에서 발생한 사건은 바로 이런 현실의 연장선상에서 벌어진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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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진 왕국 1 환상 왕국 연대기 1
제로니모 스틸턴 지음, 이현경 옮김 / 주니어RHK(주니어랜덤)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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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환상 왕국 연대기 중 첫 번째 이야기다. 숲의 왕국이 검은 여왕에게 함락된 후 그곳을 탈출한 아기 요정 옴브로소의 활약을 그렸다. 그는 별들의 왕국에서 15세가 될 때까지 자란다. 그 후 숲의 왕국을 구하기 위해 문을 열고 자신이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는 왕국으로 들어간다. 그곳에서 그가 보여주는 활약은 엄청난 것이 아니다. 아슬아슬한 모험이나 새롭게 엄청난 힘을 얻어서 적을 무찌르는 것이 아니다. 용기와 동료들의 도움으로 앞에 놓인 고난을 이겨낸다. 이 부분이 동양 판타지와 조금 다른 부분이다. 

대부분의 판타지 영웅들이 동료들의 도움으로 임무에 성공하듯이 이 소설에도 멋진 동료가 등장한다. 먼저 그와 같이 자란 별들의 왕국의 레굴루스다. 형제처럼 자랐고, 옴브로소와 동행하여 그에게 많은 도움을 준다. 혼자 알지 못하는 미지의 왕국에 들어가 자신이 할 일을 찾아야 하는 옴브로소 입장에선 최고의 동료다. 또 다른 한 명도 역시 별들의 왕국에서 같이 자란 스피카다. 그녀는 레굴루스의 동생이다. 처음엔 함께 동행하지 못하지만 별들의 왕국에서 펼쳐 보여주는 그녀의 성장과 활약은 시리즈의 다음 이야기를 기대하게 만든다.

소설은 재미난 설정을 몇 개 보여준다. 그 첫 번째가 바로 문이다. 각 왕국으로 이동하기 위해서는 문이 필수적이다. 각 왕국을 왕래하기 위해서 반드시 큰 용을 타고 가야 했다. 이 때문에 요정들은 넓고 많은 환상의 왕국 땅을 하나로 잇고, 평화와 지혜와 조화를 널리 퍼뜨리기 위해 문을 만들었다. 그런데 이 문을 통해 작고 어두운 왕국에 사는 마녀들이 악의 힘을 넓히기 위해 그 문을 드나든 것이다. 바로 이 문이 다른 왕국들의 함락과 침략을 막는 역할을 동시에 한다. 그리고 문을 여는 열쇠들이 등장하는데 아주 중요한 장치이자 다음 이야기에선 어떤 것이 열쇠로 나올지 호기심을 자극한다.

두 번째는 모두가 요정이란 것이다. 요정들의 왕국이고, 그들을 공격하는 인물들도 요정이거나 늑대로 불리는 존재다. 이런 설정은 배경을 완전히 새롭게 만들고, 혹시 다른 존재가 있는 것은 아닐까 의문을 가지게 한다. 그리고 마녀들의 수하로 나오는 존재가 늑대란 것은 늑대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을 반영한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그와 함께 등장하는 어린 용 졸파렐로는 귀여운 모습을 보여주고, 성장한 후 어떤 모습일지 기대하게 만든다.

마지막은 사냥꾼의 정체다. 처음엔 그냥 지나가는 요정 중 하나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뒤로 가면서 그의 정체가 궁금해진다. 단순히 용을 잡기 위해 덫을 놓는 존재였던 그가 옴브로소가 가야 할 길을 알려주고, 위험에 빠진 스피카를 구해준다. 뒤로 가면서 그의 정체가 밝혀지겠지만 머릿속을 스쳐지나 가는 인물이 한 명 있다. 그것이 맞는지 알고 싶고, 또 어떤 모습으로 등장하여 이야기에 미스터리를 불어 넣을 지 궁금하다.

사실 처음에 이 소설이 만화인줄 알았다. 만화 컷을 보여줘서 더욱 그랬다. 원작에서도 이런 구성인지는 모르겠지만 만화는 소설 속 이야기에서 생략된 것을 잘 보여주고 재미있다. 전체적인 이야기 속에서 어딘가에서 본 듯한 장면이나 설정이 보이지만 나름대로 부드럽게 넘어간다. 그리고 이번 이야기가 시리즈의 처음임을 생각하면 다음에 펼쳐질 이들의 활약이 더 기대된다. 도전과 모험을 통해 성장하고 앞으로 나아갈 그들의 모습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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