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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 년의 침묵 - 제3회 대한민국 뉴웨이브 문학상 수상작
이선영 지음 / 김영사 / 2010년 1월
평점 :
무리수를 발견한 히파소스를 피타고라스학파가 우물에 빠뜨려 죽였다, 라는 한 줄의 글에서 이 소설은 시작되었다. 작가는 이 문장에 전율하였고, 그들의 이야기가 가슴 속에서 아우성쳤다. 물론 그 당시는 어릴 때였다고 한다. 하지만 그 전율과 아우성은 긴 세월을 거치면서도 결코 사그라지지 않았다. 이렇게 우리 앞에 그녀가 만든 세상이 펼쳐진다. 좀처럼 한국에서 보기 힘든 수학을 소재로 한 미스터리 소설이 말이다.
학창시절 수학시간에 반드시 만나야했던 한 수학자가 있다. 피타고라스다. 그의 공식은 머릿속에 각인되었다. 그 당시 수학공식은 이해를 못해도 외워야했다. 나름대로 열심히 외우고, 문제를 풀고, 그 이유를 배우고 공부했다. 하지만 어느 순간 이런 지식들은 머릿속에서 사라졌다. 얕은 수준의 앎이 시간의 흐름 속에 퇴색한 것이다. 어쩌면 작가는 여기서 힌트를 얻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불현듯 든다. 제목처럼 천 년 전 바빌로니아 사람들이 피라고라스의 정리를 이미 발견하고, 공식화했기 때문이다. 단지 후세 사람들이 그 공식을 이해하지 못하고, 제대로 전달하지 못했을 것이다.
수비학에 대해 듣다보면 피타고라스는 만날 수밖에 없다. 피타고라스 개인의 업적으로 치부되던 것이 실제는 그 학파의 것이란 학설을 근래 많이 보았다. 그 덕분에 이 소설에서 현자로 불리는 피타고라스를 추종하고 배우는 무리들의 모습과 삶에 거부감이 생기지 않는다. 작가는 그 학파의 행동강령과 불문율에 공을 들였다. 실제 사실을 알 수 없기에 근래 발견한 학설에 기대어 역으로 재구성한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학파 속에서 제자가 발견한 정리나 해석은 모두 현자의 것으로 변한다. 이것을 보면서 한때 제자의 연구 성과를 자신의 것으로 발표했던 수많은 교수들이 떠오른 것은 일맥상통하는 점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사실 미스터리 요소는 약하다. 피타고라스학파에서 수학하던 디오도로스가 바다에서 시체로 발견될 때만 하여도 그의 동생 아리스톤의 탐정 활약을 기대했다. 하지만 그의 탐정 활약보다 그 시대의 삶과 모습을 비롯하여 권력의 이동과 디오도로스가 발견한 비밀에 더 공을 들이면서 힘이 약해졌다. 사실 초반에 이미 피타고라스가 범인임을 알려준다. 단지 왜 그가 죽게 되었는지, 그가 기록한 것의 의미가 무엇인지가 의문을 남길 뿐이다. 그런데 죽음의 원인을 불문율과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쉽게 알려준다. 이제 남은 의문은 그가 연구한 성과를 친구 히파소스가 어떻게 풀어낼 것인가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과연 죽음을 불러올 정도의 것인가 하고 말이다.
한 사람의 죽음과 학파 내부에서 생긴 문제를 하나의 축으로 한다면 피타고라스와 크로튼의 참주 킬론의 대립은 또 다른 재미를 준다. 새롭게 자라는 권력과 구 권력의 충돌뿐만 아니라 학파가 누리는 혜택으로 빈곤에 허덕이는 일반 시민들의 삶은 또 다른 대립축이 된다. 대부분의 학파 사람들이 귀족 출신임을 생각하면 킬론의 사주에 따라 움직이는 니논과 시민세력은 흥분과 순수함과 분노만 가득할 뿐 정치적 술수에선 아마추어다. 그들의 욕망과 분노가 학파로 향할 때 이성은 사라지고 폭력만 가득하다. 이에 비해 귀족들은 욕망에 충실하고, 자신의 이익을 챙긴다. 다른 두 계급이 현실을 인식하는 수준에서 차이를 보인다.
이 소설의 재미는 단순히 그 시대를 충실히 재현하고, 미스터리 요소를 부각시키고, 새로운 사실을 알려주는 것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바로 수학과 철학을 같이 연결시키고, 추론과 명상을 통해 그 이론을 더욱 발전시키는 것이다. 현재 수학과 철학을 분리해서 생각하는 우리를 생각할 때 이 점은 상당히 중요하다. 그리고 도발적인 상상력으로 표현한 피타고라스의 모습은 기존의 이미지를 산산조각 낸다. 가끔 현재의 기록을 역으로 끼워 넣은 듯한 설명이나 단어에서 어색한 느낌을 받기도 하지만 재미있고 빠르게 읽히는 속도감 속에서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