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린 머리에게 물어봐 - The Gorgon's Look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20
노리즈키 린타로 지음, 최고은 옮김 / 비채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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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잘린 머리에게 물어봐 라는 것인지 궁금하다. sf, 환타지 같다면 잘린 머리가 직접 답을 줬을지도 모르지만 현실에서는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이 제목이 어떤 것을 의미할까? 하나의 사건과 한 명의 실종이 엮여 만들어지는 이 미스터리 소설이 제목 속에 답을 넣었고, 그 답을 찾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탐정 노리즈키 린타로를 등장시켜 시간의 흐름 속에 독자를 던져놓는다. 탐정과 함께 독자들은 실패를 경험하고, 단서를 모아 누가?, 왜? 라는 고전적인 물음의 답을 찾는다.  

 

 작가에 대한 글을 읽다보면 한국에 첫 출간된 장편이고, 엘러리 퀸의 팬이라고 한다. 그래서인지 퀸처럼 작가와 탐정 이름이 같고, 경찰 아버지가 등장한다. 이런 설정은 그에 대한 오마주일 수도 있지만 사건을 푸는데 많은 도움을 준다. 이 소설 속에서도 린타로는 경시청 경시인 아버지와 함께 직접 현장에 가고, 용의자를 심문하고, 증거를 들여다본다. 과거 천재적인 명탐정이 경찰과 함께 혹은 경찰의 요청으로 사건을 해결하던 시절이라면 가능한 일이지만 탐정이란 직업 자체가 없는 현실에서 그것은 불가능하다. 물론 이런 가능성을 머릿속에 담고 있는지는 단지 나의 추측일 뿐이다.  

 

 린타로가 고등학교 후배인 사진작가 다시로의 초청을 받고 전시회에 오면서 시작한다. 전시회 사진들은 모두 눈을 감은 사람들을 다루고 있다. 그런데 뭔가 이질적이다. 그런 느낌을 받은 것은 사람들의 정면을 다룬 것이 아니라 거울에 비친 상을 표현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이 사진을 보며 놀라고 있는데 한 미모의 여자가 갑자기 다가와 말을 건다. 그녀가 바로 가와시마 에치카다. 그녀는 다시로의 팬이자 유명한 조각가 가와시마 이사쿠의 딸이자 앞으로 펼쳐질 사건의 주요 단서인 조각상의 실제 모델이다. 그리고 유명한 미스터리 평론가 가와시마 아쓰시의 조카다. 그도 이 곳에 온다. 전시회 속의 짧은 만남은 린타로가 사건 속으로 뛰어 들어가게 되는 계기가 되는 동시에 소설에서 가장 중요한 단서를 알려준다.  

 

 조각가 이사쿠는 시걸의 기법을 바탕으로 한다. 실제 사람 형태의 본을 뜬 다음 틀 속에 석고를 부어 조각상을 만드는 것이다. 시걸이 석고의 바깥에 본을 바른 다음에 떼어내 재구성하는 것과 다른 방식이다. 이 때문에 아시걸이란 좋지 않은 소문도 있지만 그의 전 아내와 함께 한 모녀상은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하지만 이런 기법엔 치명적인 단점이 있다. 바로 눈이다. 눈을 뜬 조각상을 만들 수 없는 것이다. 눈에 석고가 들어가면 모델이 실명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각 부에 루돌프 비트코어의 이론을 통해 조각상에 눈이 어떤 의미가 있고, 어떤 식으로 표현되고 발전했는지 설명한다.  

 

 아내와 헤어지고 암으로 고생하던 그가 마지막 작품으로 딸을 소재로 하여 조각상을 하나 더 만든다. 그러다 그가 쓰러진다. 전시회장에서의 만남이 갑자기 끝나게 된 원인이다. 결국 조각가는 죽는다. 그 후 아쓰시의 요청으로 작업실에서 벌어진 이상한 사건에 대해 설명 듣는다. 이사쿠의 유작에 머리가 사라진 것이다. 경찰에 알려 조사를 해야 하지만 미술평론가이자 이사쿠의 전시회 기획자인 우사미 쇼진이 신고를 말린다. 그리고 가와시마 집안에서 일어난 수많은 소문과 의혹이 드러나기 시작한다. 이사쿠의 연인인 레이카나 에치카의 모델 경력과 과거가 드러난다. 그 속에서 자신이 찍은 사진으로 사람들을 협박하고 에치카의 스토커였던 사진작가 도모토 ?이 등장한다. 마지막으로 장례식장에 고개를 내밀었고 이 집안과 이상하게 엮인 가가미 준이치가 소개된다. 이로써 소설 속 주요 인물들은 모두 나왔다. 정당한 승부를 원하는 작가는 이들 속에 범인을 숨겨놓았고, 탐정과 우린 이 속에서 범인과 왜 그런 일이 벌어졌는지 찾게 된다.  

 

 작가는 시간의 흐름 속에 탐정과 독자가 함께 나아가게 만들고, 탐정의 추리를 몇 번이나 실패하게 만든다. 그의 추리가 우사미 쇼진의 이론에 흔들리고, 너무 쉽게 남의 말에 속는다. 이런 모습은 초인적인 탐정들에 익숙한 나에게 약간은 의외이자 재미다. 뒤에 그의 아버지에게 그의 추리가 강하게 일축 당하는 모습에선 현장의 박력이 느껴지기도 했다. 정당한 승부라고 하지만 교묘하게 트릭을 사용했기에 단서들을 제대로 깨닫기는 쉽지 않다. 기시 유스케의 말처럼 5부 마지막 문장에서 크게 당한 느낌과 사건을 이해하게 된다.   

 

 전체적으로 중후한 느낌의 문장과 진행이다. 조각에 대한 이론을 들으면서 새로운 사실을 배우고, 잘 만들어진 구성과 트릭에 빠져든다. 아직 한 번 읽은 상태라 깔아놓은 단서들을 찾기는 쉽지 않다. 다시 읽는다면 아마 그렇구나! 몇 번 외칠지 모르지만 말이다. 과감하게 단서를 흘린다면 이름과 잘린 머리와 이론에 그 답이 있다. 그리고 이 모든 사건의 발생은 인간의 탐욕과 섣부른 판단과 오해 때문에 일어났다. 사실 사람들이 얼마나 자주 쉽게 저지르는 실수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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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즌 파이어 1 - 눈과 불의 소년
팀 보울러 지음, 서민아 옮김 / 다산책방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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팀 보울러의 작품을 읽을 때면 늘 환상과 현실이 교차하는 모습에 매혹된다. 환상이 환상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현실과 연결되기에 전혀 거부감이 없다. 세계적인 성장소설의 대가로 인정받고 있는 그의 작품에 환상이 끼워져 있다는 사실이 처음엔 약간 어색했다. 하지만 읽으면서 이 환상들이 성장의 밑거름이 된다는 사실을 확인한다. 독자들에겐 쉽고 편하게 읽히고, 한 번 잡으면 끝까지 달려가게 만들고, 주인공에게 감정을 이입하게 한다. 

짧은 영어 실력으로는 제목만으로 전혀 내용을 짐작할 수 없다. 눈과 불의 소년이란 부제에서 풍기는 환타지의 느낌은 어떤 모험이 펼쳐질까 기대하게 만든다. 마법이 충돌하고, 그 과정에 소년이나 소녀가 성장하는 그런 종류를 연상한다. 하지만 아니다. 그냥 ‘소년’이라고 불리는 알 수 없는 존재가 현실을 벗어난 존재임을 알려주지만 이런 장치는 더스티가 성장하게 만들 뿐이다. 그 성장은 2년 전 갑자기 사라진 오빠와 그 오빠 때문에 집을 나간 엄마에 대한 사랑과 그리움 등이다.

소설은 크게 두 줄기로 진행된다. 하나는 ‘소년’을 둘러싼 스릴러적 요소고, 다른 하나는 더스티 오빠의 실종을 둘러싼 미스터리다. 시작은 더스티에게 한 통의 전화가 오면서부터다. 늘 오빠를 그리워하던 그녀에게 우연히 건 것 같은 말로 대화가 시작된다. 자신이 죽어가고 있다고 말이다. 이름을 묻자 그는 조쉬라고 한다. 사라진 오빠의 이름이다. 그녀는 놀라 그에게 질문을 계속 던진다. 그가 있는 곳을 묻고, 그곳으로 달려간다. 발자국도 있고, 약통도 있지만 소년은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정체를 알 수 없는 남자들이 그녀를 향해 달려온다. 달아난다. 얼마 지나지 않아 잡힌다. 그들이 요구하는 것은 소년이 어디에 있느냐? 하는 것이다. 단지 그의 발자국이 있는 곳에 그녀가 있었다는 것으로 말이다. 이 사건을 계기로 그들과 더스티는 계속 충돌하고, 그녀는 마을 사람들에게 의심의 눈초리를 받게 된다.

이 소년과의 만남은 늘 신비롭고 환상적이다. 소년에 대한 나쁜 소문은 그녀를 불안하게 만들지만 통화하고 말한 기록은 그녀를 궁지로 몰아간다. 이런 만남이 계속된다. 소녀가 소년에게 관심을 가지게 것은 바로 사라진 오빠 때문이다. 소년이 무심코 내뱉는 말 속엔 오빠가 그녀에게 늘 하던 말들이 섞여 있다. 불안과 호기심이 자라난다. 동시에 이 혼란스러운 상황과 전개가 더스티의 가족을 뒤흔든다. 사실을 알고 싶고, 사라진 오빠의 현재가 궁금하고, 자신은 더 알 수 없다. 작가는 이런 상황들을 빠르게 읽히는 이야기 속에 풀어놓았다. 빨리 읽히는 재미 속에 이 감정들이 뒤섞여 충분히 누리지 못하는 수도 생긴다.

소년의 정체와 오빠 실종 미스터리도 궁금하지만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소문이다. 바로 소년에 대한 것인데 한 소녀를 성폭행했다거나 감옥에 갇혀 있다가 사라졌다거나 하는 것 등이다. 이 소문 때문에 자경단이 조직되어 소년을 쫓고, 소년과 친하다는 이유 하나로 더스티가 친구와 마을 사람들에게 왕따를 당한다. 결백을 주장한다고 믿어주지도 않는다. 사람들이 그것을 받아들일 준비도 마음도 없기 때문이다. 그 소용돌이의 중심에 있는 그녀만이 사실을 그대로 본다. 하지만 처음부터 그녀도 그런 것은 아니다. 의심을 거듭하고, 사람들과 충동하고, 자신을 깊숙하게 들여다보면서 얻게 된 것이다.

처음부터 작가는 하나의 사실을 암시한다. 교묘하게 장치하여 끝까지 읽기 전엔 알 수 없다. 높은 가독성은 진도가 쑥쑥 나가게 만든다. 소녀의 심리와 행동은 가끔 이해되지 않지만 그보다 어른들의 갇힌 마음이 더 답답하다. 소년으로 대변되는 마주보기는 겉만이 아니라 속도 같이 이루어져야 한다. 눈을 가리고 거울을 아무리 봐야 자신을 볼 수 없는 것처럼 열린 마음과 보겠다는 의지가 있어야 한다. 소년이 소녀 곁에서 알려주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그리움만으로 불행한 마음과 의문이 사라지지 않는다. 소년의 등장은 바로 정체되어 있던 가족과 소녀에게 변화를 일으키고, 사람들에게 자신을 마주보게 한다. 마주보기를 두려워하는 사람들이 이런 모습을 보고 마술이니 어쩌니 하는 것은 바로 두려움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진리가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자유로워야 진리를 볼 수 있다’는 말이 더 가슴에 와 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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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아들의 아버지
카렐 판 론 지음, 김지현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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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제목을 보고 생각한 것은 아들의 눈에 비친 아버지인 나의 모습이었다. 아들의 키우면서 벌어지는 나의 모습을 재미있게 혹은 가슴 아프게 그려낸 소설이 아닐까 생각했다. 그런데 아니다. 책 소개 글을 읽으면서 제목 그대로의 의미란 것을 알았다. 현재의 내가 아닌 실제 생물학적 아버지 말이다. 그것도 아이를 하나 더 낳기 위해 한 정자 검사에서 알게 되었다니 얼마나 운명의 장난인가? 거기에 생모는 예전에 죽었고, 홀로 혹은 애인과 아이를 지금까지 십 년 이상 키워온 상태다. 자신과 아이를 위해 생물학적 아버지를 찾으려고 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자신이 아이를 가질 수 없다는 것을 알았을 때 과거로부터 당연하다고 믿고 있던 것들이 산산조각 났다. 그 조각들 사이에서 그가 알고 싶은 것은 그 아이의 생물학적 아버지가 누군가 하는 것이다. 모니카의 전 애인이었던 로베르트를 가장 먼저 의심한다. 그가 이 둘 사이에 끼어들어 사랑을 쟁취했기에 더 그런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는 아니다. 다음으로 주치의였을까? 역시 아니다. 이런 의문을 가지고 있던 중 전 직장 동료였던 니코를 의심한다. 그의 아이들 중 한 명 이름이 자기 아이처럼 ‘보’이기에 의심은 확신으로 변한다. 그렇지만 그 역시도 아니다. 

이런 내 아들의 아버지 찾기가 이야기의 한 축을 이룬다면 모니카와의 과거는 또 다른 한 축이 된다. 현실이 아버지 찾기로 이어지고, 이 과정에 과거는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과거는 추억으로 변하고, 그 추억은 잠시 그리움으로 되살아난다. 작가는 이런 과정을 명확하게 구분하여 진행하지 않고, 그 경계를 세심하게 살피지 않으면 시간을 혼돈하게끔 만들어놓았다. 이것이 작품을 위한 의도적인 연출인지 아니면 원래 그의 방식인지는 모르지만 화자 아르민을 둘러싸고 일어난 상황을 표현하는데 아주 적절한 방식인 것은 분명하다.

흔히 우리는 한 아이가 태어나면 아빠와 닮은꼴을 찾기 바쁘다. 조금이라도 비슷한 구석이 있으면 닮았다고 외치고, 아빠와 엄마를 안도시킨다. 이것은 엄마는 분명하지만 아빠는 유전자 검사를 하기 전까지 정확하게 알 수 없는 현실을 반영하고 있다. 가부장적 사회가 만들어진 이후 여자의 처녀성을 더 없이 중요하게 생각하게 된 것도 바로 이런 불안이 반영된 것이다. 책 속에서도 다루어지지만 한 연구 결과에 따르면 수많은 남편들이 생물학적으로 자기 아이가 아닌 아이를 키우고 있다고 한다. 이런 연구 결과는 처음 읽었을 때 충격적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어느 정도 고개를 끄덕인다.

아르민이 보가 자기 아이라고 확신하게 된 것에는 자신과 닮은 점이 많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사실 위에 모니카와의 추억과 사랑은 조금도 그 사실을 의심하지 않게 만들었다. 이런 확신 속에 펼쳐지는 이 두 사람을 둘러싼 추억과 섹스들은 보수적인 기준에서 보면 문란하다고 할 정도다. 결혼 정절이 순간 무너지고, 불륜은 곳곳에서 범람한다. 이런 사회 분위기에서 자신의 애인과 배우자를 믿지 않는다는 것은 관계를 깨는 것이다. 그러니 믿는다. 그리고 닮은꼴을 찾는다. 이 불안과 모순 속에 현대인의 삶이 있다. 

소설은 읽는 독자에게 당신이라면 어떻게 하겠는가? 하는 의문을 던진다. 그리고 아르민의 여정을 따라가면서 만나게 되는 사실들을 인식하게 만들고, 의심의 그림자를 키운다. 혹시 검사의 실수는 아닐까? 추측해보지만 아니다. 등장인물들과의 관계들과 순간의 실수들을 생각하면서 누가 진짜 아버지일까? 고민하게 만든다. 이 여정은 빠르고 흥미롭게 진행된다. 그리고 밝혀지는 사실은 놀랍지만 앞에 단서를 흘려놓은 것이다. 단지 우리의 선입견과 편견이 눈을 가렸을 뿐이다. 그리고 아르민이 그 사실을 알고 집착했던 몇 가지 질문은 놀라운 사실과 망가진 자존심의 순간적인 폭발이다. 이성보다 감정이 앞선 그 순간 어쩌면 가장 솔직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작가는 몇 개월의 시간을 둔 후 일상으로 복귀하는 모습을 통해 그 가족이 지닌 힘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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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러블 꿈꾸는 달팽이
게리 D. 슈미트 지음, 김영선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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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려한 수상경력은 언제나 눈길을 끈다. 특히 처음 만나는 작가일 경우는 더욱 그렇다. 사실 이 책 앞부분은 지루했고 너무 뻔할 것 같은 결말과 피곤한 몸 때문에 진도는 더뎠고 집중력도 떨어졌다. 하나의 사고를 둘러싸고 펼쳐지는 일들이 정해진 궤도를 벗어날 생각을 하지 않으니 더욱 그랬다. 책 중간 중간 다른 화자를 집어넣어 결말을 암시하고, 숨겨진 비밀을 조금씩 알려줘 기대감은 더 낮아졌다. 하지만 그런 지루함과 뻔함은 거기까지였다. 그가 중간 중간 심어놓은 설정들이 하나씩 꽃을 피우고, 비밀이 드러나고, 진실을 알게 되고, 불행은 인정하는 순간 왜 이 작가의 작품이 수많은 상을 받았는지 알게 된다.

헨리의 형 프랭클린은 바닷가 마을 블리스베리에서 스타 운동선수다. 뛰어난 럭비 선수인데 그가 어느 날 달리기를 하러 나갔다가 캄보디아 난민 출신인 차이의 트럭에 치인다. 헨리에겐 그는 영웅이다. 그리고 함께 카타딘 산을 오르기로 약속한 상태다. 이 집안은 불행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곳에 집을 지으면 불행이 결코 찾아오지 않는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이런 불행한 일이 생긴 것이다. 부모에게는 자랑스러운 자식을, 동생들은 사랑하고 존경하던 오빠와 형을 잃은 것이다. 이 비극이 집안에서 고요하게 폭풍전야 같은 움직임을 보인다면 이웃집이나 마을사람들은 괜히 나서 감정을 상하게 만들고 호기심으로 머리를 들이민다. 이런 불편함은 소년과 가족들 모두에게 큰 상처를 남긴다.

이 사고를 둘러싸고 펼쳐진 법원의 공방전은 외형적으로 가해자에겐 다행이고, 피해자 가족에겐 더 큰 아픔을 남긴다. 특히 헨리에겐 더욱 그렇다. 그는 자기 형을 차로 친 캄보디아 차이가 그 정도 형벌만 받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다. 마을사람들도 이 판결을 둘러싸고 인종차별적인 발언을 한다. 이 사고 이전에도 있었지만 겉으로 드러나지 않은 감정들이 이 사고를 계기로 밖으로 표출된 것이다. 이 판결에 대해 가장 정확하고 중립적인 입장에서 바라다본 인물은 아이러니하게도 헨리의 엄마다. 아마 이런 사실 때문에 프랭클린의 죽음을 마주하고 그렇게 서글프게 울었는지도 모른다.

헨리가 감정을 주체하지 못할 때 바다로 몰고 간 카누로 만난 한 마리의 개가 있다. 이름은 검둥개다. 처음 이 개가 집으로 들어와서 펼치는 난장판을 보고 곧 버려지겠구나 생각했다. 상실감 때문인지 아니면 관대함과 개의 애교 때문인지 집에서 키우게 된다. 검둥개는 외로움과 분노의 감정 속에서 방황하는 헨리의 가장 친한 벗이 되어 곁을 늘 지켜준다. 하지만 이 또한 앞부분에 복선을 깔아놓은 것이다. 조금만 신경 쓰면 쉽게 알 수 있다.

헨리와 마을 사람들에게 영웅이었던 프랭클린의 과거는 결코 바르지 않다. 그와 동료들이 차이에게 가한 폭력과 모독은 정도가 심했다. 이것을 알고 있는 교장의 대처는 자신의 속내를 여지없이 드러낸다. 그래서인지 헨리의 아버지가 프랭클린의 미래를 생각하고 걱정하고 고민하는 장면이 가슴으로 파고든다. 숨겨진 아들의 비리가 드러났기 때문일까? 아니면 다시는 개선할 수 있는 기회가 사라졌기 때문일까? 부모 모두가 대단하다.

작가는 진도가 나가는 중간에 복선을 하나씩 심어놓는다. 쉽게 발견되는 부분도 있고, 예측가능한 부분도 있다. 대부분 작가들이 이런 장치를 깔아만 놓고 제대로 활용을 못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 작가는 다르다. 소설이 탄력을 받고 진정한 힘을 발휘하는 대목에 이르면 이 복선들과 관계들로 저절로 고개가 끄덕여진다. 앞에서 느낀 약간의 지루함과 진부함도 그냥 날아가버린다. 만약 앞부분에 좀더 속도감이 있다면 정말 정신없이 읽게 될 것 같다. 그리고 가족, 죽음, 인종차별, 독재, 과거, 현재를 아우르면서 이야기를 풀어내는 힘이 정말 대단하다. 되새기면 더 많은 것들이 생각나는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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샐리의 따뜻한 아침식사
리처드 르뮤 지음, 김화경 옮김 / 살림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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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하고 솔직한 이야기다. 사업 실패로 가족에게 버림받고 노숙자 생활을 하게 된 지은이의 실제 경험을 담고 있다. 그의 글 속에서 만나는 노숙자들은 우리의 선입견과 편견의 장막이 치워져 있다. 그는 알콜 중독자도 마약 중독자로 그대로 보여준다. 이런 사람들 속에도 다른 사람을 위해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내놓는 사람들이 나오는데 이것을 볼 때는 괜히 부끄러워진다. 매일 잠들면서 조용히 자신을 하늘나라로 데리고 가달라고 기도를 한다는 그들을 보면서 그들의 삶이 얼마나 힘들고, 사람들의 시선이 얼마나 차가운지 알게 된다.

리처드는 노숙자가 되기 전 잘 나가던 출판사의 사장이었다. 친구들과 골프를 치고, 아내와 유럽 여행을 다닐 정도로 여유가 있었다. 하지만 한 순간의 실패는 그에게서 가족도 친구도 모두 빼앗아 갔다. 책을 읽으면서 가장 놀란 것은 망한 그를 대하는 친구와 가족들의 모습이다. 단편적인 상황만 나오다 보니 왜 그들이 그렇게 대응하게 되었는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매몰차고 냉정하게 그를 몰아내는 장면을 보면서 삶의 씁쓸한 한 단면을 보게 된다. 

가진 자들이 그가 자신들의 세계로 들어와서 피해줄 것을 두려워한 반면에 노숙자들과 노숙자들을 위해 음식을 제공하는 곳은 다르다. 그가 만난 사람들이 어느 정도 특별한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우울증으로 고생하고 굶주림으로 힘들어하는 그를 돕는데 큰 힘이 된다. 특히 C로 불리는 거리의 철학자는 리처드가 노숙생활을 하는데 엄청난 도움을 준다. 그를 통해 굶주린 배를 채우고, 차를 몰 가스비를 충당하고, 새로운 삶의 활력을 찾는다. 그리고 구세군 급식소를 말하는 샐리네는 수많은 노숙자들의 배를 채워주고, 그들끼리 삶을 이어주며 정보를 교환하게 만들고, 현실을 바라보게 한다.

샐리네에서 만난 노숙자 중에 몇몇은 베트남 전쟁의 후유증을 겪고 있고, 어떤 사람은 화재현장에서 동료를 잃고 방황을 한다. 마약에 찌든 사람도, 술에 중독된 사람도 있지만 이들은 하나의 울타리 안에서 모두 온순한 양처럼 밥을 먹고, 감사하고, 하루를 이어간다. 쓰레기를 뒤져 거기에서 나온 물건을 팔아 술이나 음식 등을 사고, 거리에서 구걸을 한다. 이 돈을 술을 사서 현실의 힘겨움을 벗어나려는 사람도 있지만 리처드는 먹고 쉬고 움직일 비용을 원할 뿐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 또한 수많은 노숙자들과 같이 잘못된 시선으로 본다. 그가 가스비를 위해 5달러를 구걸할 때 그의 가장 중요한 동료인 윌로우를 팔 것을 요구하는 것이다. 그가 리처드를 바라보고 말하는 그 방식은 바로 우리가 노숙자를 바라보는 그것과 결코 많이 다르지 않다. 

흔히 노숙자는 일하기 싫어하는 사람들로 모두 치부해버린다. 물론 그중에는 그런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사회가 그들에게 일을 주지 않는다면, 일자리까지 갈 버스비가 없다면, 겨우 시간당 몇 불 받는 것으로 쉴 곳을 찾을 수 없다면 어떨까? 예전에 새벽 인력시장의 풍경을 테레비를 통해 본 적이 있다. 일을 위해 새벽부터 나오지만 사람을 태우고 가는 숫자는 늘 부족하다. 재수 좋게 오늘 타고 간다고 해도 내일이 보장된 것은 아니다. 그런데 우린 흔히 일할 생각을 않는다고 말하고 그들을 무시한다. 

부자와 정치인들이 외면한 현실의 어두움을 직시하고 그들을 도우려고 실천하는 신자들과 자신이 가진 조그마한 것도 나누려는 노숙자를 볼 때 아주 조그마한 희망의 불씨를 보게 된다. 가난 속에서도 자신이 가진 돈을 털어 하룻밤의 평화로운 잠자리를 제공하거나 자신의 교회에 그를 기거하게 만들면서 러처드가 글을 쓰게 만드는 장면을 보면 거리 곳곳에 가득한 천사들을 보는 것 같다. 지독한 감기 속에서 이 책을 읽었다. 아마 리처드가 만난 수많은 천사들이 없었다면 끝까지 읽어내지 못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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