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아노 교사
재니스 Y. K. 리 지음, 김안나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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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남자와 두 여자. 그리고 각각 다른 시간. 사랑은 과거에서 시작하여 현재까지 이어지고, 과거의 흡입력은 너무나도 강렬하다. 이 사랑을 수많은 인종들이 복잡하게 얽혀 살아가는 홍콩을 무대로 펼친다. 그 중심에 선 남자는 윌이고, 과거는 트루디, 현재는 클레어다. 하나의 시간은 1941년부터 시작하고, 다른 하나는 1952년에서 시작된다. 이 다른 시간 속에 벌어지는 사랑은 결코 독립적이지 않다. 그 속엔 수많은 비밀과 잔혹하고 비참한 과거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

영국인 클레어는 사랑하지 않는 마틴과 결혼을 한 후 홍콩으로 온다. 정체된 삶과 어머니를 벗어나기 위해서다. 하지만 홍콩이라고 그녀에게 자유를 주는 것은 아니다. 주변 사람의 추천으로 그녀가 중국 부호 첸 가에 피아노 교사로 들어가면서 변화의 조짐이 시작된다. 박봉에 시달리는 남편의 급여만으로 부족하기에 시작한 일이고, 아이는 피아노를 배우려는 의지가 없다. 친구도 열정도 사랑도 없던 그녀가 우연히 윌을 만난다. 이 만남은 반복되고, 윌은 클레어에게 키스한다. 이렇게 이 둘은 섹스를 한다. 남자가 시작한 것이지만 그는 사랑을 갈구하지 않고, 여자는 남편에게서 느끼지 못한 쾌락과 열정과 사랑을 느낀다.

현재의 윌과 클레어가 전후 홍콩의 모습과 일상을 보여준다면 전쟁이 발발하기 전과 함락된 후의 모습은 트루디와의 관계 속에 드러난다. 트루디는 소위 말하는 혼혈아고, 엄청난 미모를 가졌고, 아버지는 더욱 엄청난 부를 가지고 있다. 사교 모임의 여왕이자 그녀의 등장으로 모든 사람을 시선을 끌던 그녀가 윌과 사랑에 빠진다. 이 사랑은 그 어떤 격렬함도 강렬함도 보여주지 않는다. 어떻게 보면 그냥 평범하고 열정 가득한 사랑이다. 그런데 이 둘의 관계는 일본군이 홍콩을 점령하고, 그가 수용소로 들어가면서 바뀐다. 일본군의 침략과 잔혹 행위와 강간과 폭력과 살인은 식량 부족과 겹치면서 수용소 안팎을 구분할 수 없게 만든다. 윌은 이런 상황에서 점령군이 요구하는 정보를 구해줘서 얻게 될 수용소 밖의 생활을 원하지 않고, 트루디는 이 정보로 현재의 삶을 이어가려고 한다. 

클레어가 현재 느끼는 삶은 활기차고 더 많은 사랑을 갈구한다. 그 대상인 윌은 만남과 섹스 외에는 큰 관심이 없다. 비록 그가 그녀의 순수함에 끌렸다고 하여도 과거 속 트루디의 그림자가 너무 짙다. 작가는 현재는 클레어의 시점으로 이야기를 진행하고, 과거는 윌의 시점으로 이야기한다. 이것은 두 사람이 살아있고 진실한 사랑을 하는 순간인 동시에 앞으로 펼쳐질 미래를 암시한다. 그들은 과거에 붙잡힌 것이다. 이들의 엇갈린 사랑은 좌절을 느끼게 만들 뿐이다.

소설을 읽으면서 관심이 간 부분은 사랑이 아니다. 낯선 홍콩의 풍경이다. 홍콩이 일본군에게 점령된 후 발생한 참혹하고 잔인하고 비열한 일들이다. 전쟁이 발생하면 늘 생길 수 있는 상황이지만 왠지 낯설게 다가왔다. 홍콩이기 때문일까? 그리고 크라운 컬렉션이라는 유물도 호기심을 유발한다. 이 유물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음모와 배신이 한 편의 미스터리 같기 때문이다. 화려한 상류사회가 일본 점령 후 급격하게 변하고, 전쟁이 끝난 후 더 빠르게 변하는 것에서 환경에 적응하는 사람들의 놀라운 능력을 보게 된다. 그 이면에 숨겨진 본 모습이 가장 잘 드러나는 것은 역시 한계 속으로 몰아간 수용소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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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탈레온과 특별봉사대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4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 지음, 송병선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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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네는 특별봉사대의 아인슈타인이야.”(272쪽) 이 문장을 읽는 순간 판탈레온 판토하 대위의 노력이 어떤 결과를 가져왔는지 알게 된다. 상사들의 말도 되지 않는 요구를 완벽하게 수행하고, 새로운 수요를 창출하고, 수많은 병사들의 욕구를 충족시킨 그의 노력에 대해 이 보다 더 정확하게 표현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가 만들어낸 특별봉사대는 너무나도 효율적이고 효과적이라 자신이 의도하지 않은 방향으로까지 나아간 것이다. 그럼 그 놀라운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보자.

판토하 대위는 바른 생활맨이다. 중위에서 대위로 승진한 날 그의 상사는 새로운 명령을 내린다. 그것은 밀림 속으로 들어간 병사들이 수많은 겁탈과 강간으로 문제를 일으킨 것이다. 마을의 촌장이나 면장들이 이것을 군 상층부에 말한 것은 당연하다. 지역 주민들과 충돌이 있으니 군의 본래 목적이 무색하다. 고민을 하다 젊은 군인들의 성욕을 해소할 부대를 창설할 계획을 세운다. 당연히 이 부대는 공식적으로 존재할 수 없다. 매춘이 불법이고, 군이 이것을 운영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판토하 대위가 선택된 것은 그의 업무 성적과 바른 생활 때문이다. 그의 아내와 어머니는 승진과 더불어 좋은 곳으로 갈 것을 생각했는데 놀랍게도 간 곳은 이키토스란 마을이고, 그곳에서 그들은 군인 가족임을 나타낼 수 없다. 당연히 상대적으로 시설이 좋은 군인시설도 이용할 수 없다. 이런 상황을 판토하는 비밀업무란 것으로 무마한다. 그리고 밤의 세계를 모르는 판토하는 전문가의 도움을 받길 원한다. 이전에 술도 마시지 않았고, 여자도 사겨보지 못한 그가 이제 매춘의 세계에 발을 디딘 것이다. 

태어날 때부터 군인인 그는 위에서 내려온 일을 완벽하게 수행한다. 일선 부대에 전문을 보내 필요한 성 회수와 시간 등의 자료를 수집하고, 이것을 토대로 필요한 봉사대원의 수와 회수를 추정한다. 여기에 피 끓는 젊은이들의 욕망과 거짓이 숫자로 표시된다. 이 자료를 바탕으로 시범적으로 운용한다. 대성공이다. 봉사대원들을 조금씩 늘리지만 군인들의 거대한 욕망을 채우기엔 턱없이 부족하다. 다섯 명에서 시작하여 오십 명에 이르게 되지만 부족하기만 하다. 거기에 이 놀라운 시스템을 부러워한 사람들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일반병과 상사 이하만 대상인 것에 불만인 상사 이상 계급과 지역 주민들이 등장한 것이다. 

특별봉사대가 이야기의 중심이라면 프란시스코 형제는 미신과 광기와 열정에 휩싸인 사람들의 모습을 보여준다.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을 흉내낸 그의 모습을 성인의 모습으로 추앙하고 경배한다. 이 형제들 집단은 밀림 속에서 자라 도시로 옮겨가고, 원래의 목적을 벗어나 광기 속에 동물을 못 박든 것을 인간까지 확대하기 시작한다. 그러니 경찰이 잡으려고 한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쉽게 잡히지 않는다. 이 형제단이 이키토스와 밀림 곳곳에 자리 잡고, 은연중에 사회에 영향을 미친다. 이 이야기는 큰 줄기에 붙어 이야기를 풍성하게 만들어준다.

판토하 대위가 조직한 수국초특(수비대와 국경 및 인근 초소를 위한 특별봉사대)은 처음 목적한 것 완전히 달성한다. 그런데 이 목적 달성 과정에 예상하지 못한 일이 생긴다. 판토하 대위의 이름을 본따 판타랜드란 이름으로 불리는 것과 수많은 매춘여성들이 참여하려는 곳으로 변한 것이다. 초기에 많지 않은 여성을 거느린 곳이 이제 환상을 키우고, 안정된 직장으로 탈바꿈한 것이다. 유명한 방송국 MC는 뇌물을 요구하고, 강간 등의 피해가 사라지자 이제는 옛날 문제는 잊고 매춘을 비판하고 나선 것이다. 거기에 이 봉사대를 이용하지 못하는 사람들의 질투와 부러움까지 나타난다. 웃기지만 씁쓸한 전개다. 

작가는 이 과정을 기존의 소설 문법으로 보여주지 않는다. 대화와 대화 속에 움직임을 넣고, 다른 이야기와 상황들이 펼쳐진다. 하나의 사건을 신문 기사로 길게 보여주고, 정보를 라디오 방송을 통해 알려준다. 딱딱한 군 문서로 어떻게 판타랜드가 만들어졌는지 알게 되고, 그 운용이 이루어지는지 알 수 있다. 처음에 읽으면서 난감하고 어리둥절했는데 이런 전개와 구성 때문이다. 하지만 어느 정도 적응을 하게 되면 바른 생활맨 판토하 대위가 업무를 달성하기 위해 집에서 어떤 일을 했는지와 그의 탈선과 완고함이 만들어내는 재미에 빠지게 된다. 

책 소개를 보고 우리의 아픈 과거인 위안부를 먼저 생각했지만 조금 시간이 지나면서 다른 이야기임을 알게 되었다. 다행이다. 독특한 구성과 신랄한 풍자와 다양한 인물이 만드는 넘치는 유머와 익살은 재미있다. 그의 의도가 곳곳에서 웃음과 더불어 드러난다. 하지만 악의적으로 이 소설을 이용할 경우 문제가 될 수도 있다. 이 점은 분명하게 기억하고 명시해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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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 산책 긴다이치 고스케 시리즈
요코미조 세이시 지음, 정명원 옮김 / 시공사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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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세이시의 책을 읽었다. 그의 소설엔 일본색이 강하게 풍긴다. 이것이 매력이지만 가끔은 트릭을 풀 때 난감한 경우가 많다. 항상 출간되면 관심을 끌지만 이번엔 더 눈길이 갔다. 그것은 요코미조 월드라는 곳에서 이 작품의 순위가 전 작품을 통틀어 2위에 올랐기 때문이다. 어떻게 보면 별 것 아닐 수 있지만 특정 집단에서 좋아한다는 점은 늘 매력 있다. 그래서 평소라면 며칠을 두고 천천히 읽었을 텐데 이번에 받고 금방 달려들었다. 그리고 단숨에 끝을 보았다.

먼저 목차를 보면서 긴다이치가 늦게 등장하는 것이 조금 의아했다. 처음은 화자로 등장한 삼류 추리소설 작가 야시로와 그의 물주인 센고쿠의 이야기로 시작한다. 그런데 이야기가 기이하다. 유명한 카바레에서 정체를 알 수 없는 여자가 유명한 꼽추화가 하치야를 저격한 사건이 생긴 것이다. 왜 이 사건을 이야기한 것일까? 그리고 센고쿠가 모시는 주인집 후루가미 가문의 딸 야치요에게 이상한 편지가 온다. 목이 잘린 꼽추의 사진이 같이 온 것이다. 뭔가 사건을 암시한다. 

작가는 일찌감치 하치야를 저격한 사람이 야치요임을 센고쿠를 통해 말한다. 야치요를 둘러싼 예언이 있다. 그것은 그녀가 꼽추와 결혼한다는 것이다. 저격을 한 그녀가 하치야를 병문안 가고, 이 둘의 관계는 가까워진다. 그런데 그녀를 좋아하는 사람이 또 있다. 그녀의 오빠다. 그는 꼽추다. 예언에 의하면 그도 가능성이 있다. 이 둘이 한 집안에서 만나고, 충돌의 가능성이 있다. 동시에 목 잘린 꼽추의 사진은 불길하다. 그녀는 삼류 추리소설 작가라도 도움이 될 테니 야시로가 왔으면 하고, 센고쿠는 그를 집으로 초대한다.

야시로가 간 후루가미 가문의 집은 괴이한 분위기에 휩싸여 있다. 센고쿠의 아버지는 술에 취해 칼을 들고 하치야를 죽일 듯이 달려들고, 야치요의 어머니 류는 동안의 미모로 묘한 분위기를 풍긴다. 센고쿠는 야치요가 자기 아버지의 자식이라고 생각한다. 가문의 당주인 야치요의 오빠 모리에는 이런 가정 때문에 야치요를 탐낸다. 두 꼽추는 한 집에서 충돌하고, 불안감을 더욱 깊어진다. 이런 불안감 속에 센고쿠는 아버지가 휘두른 칼을 금고 속에 넣어두고 싶어 한다. 열쇠는 자신이 가지고, 비밀번호는 야시로가 혼자 기억하게 만들면서 넣어둔다. 두 사람이 함께 하지 않으면 절대 금고를 열 수 없다. 이런 상황 속에 밤은 깊어지고, 몽유병이 있는 야치요는 밤에 취한 듯 걷는다. 

저녁 식사 시간에 동참하지 않은 하치야는 자정이 다 되어 하녀에게 물을 가져달라고 한다. 그 전에 야치요는 그의 방으로 음식을 들고 간다. 이 밤 뭔가 일어날 것 같다. 결국 아침에 하치야의 방에서 시체가 발견된다. 그런데 목이 없다. 사체는 꼽추다. 모리에일까? 아니면 하치야일까? 확인을 위해 옷을 벗긴다. 저격사건으로 오른 다리에 총상이 있기 때문이다. 총상이 있다. 하치야다. 이런 생각은 모리에의 유모가 나타나면서 혼란 속으로 빠진다. 모리에 역시 총을 가지고 놀다 총상을 입은 적이 있는 것이다. 이 시체는 과연 누굴까? 그리고 이 둘은 불안감을 느끼면서 금고를 연다. 칼에 혈흔이 잔뜩 묻어 있다. 어떻게 된 것일까? 몽유병이 있는 센고쿠의 아버지가 꿈결에 모리에의 머리를 발견하면서 시체의 주인이 모리에로 일단락된다. 범인은 당연히 하치야로 좁혀진다. 과연 그럴까? 의문 속에 하나의 사건이 조용히 묻힌다.

이것으로 끝난다면 시시할 것이다. 작가는 무대를 다른 곳으로 옮겨 새로운 살인사건을 만들어낸다. 이번 살인사건에 긴다이치가 등장한다. 평소처럼 후줄근한 모습은 변화가 없다. 눈만은 빛난다. 야시로의 시각에서 모든 이야기가 풀려나오는데 후반에 잠깐 긴다이치의 의견이 들어간다. 이 의견은 방향을 잡는 것 정도다. 더 중요한 것은 이야기 너머에 있다. 

전작들과 다르게 진행되었고, 비교적 일본색이 약해 빠르게 읽혔다. 후반으로 오면서 위대한 추리작가의 작품이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나만 느낀 것이 아닌 모양이다. 일본에서도 문제가 되었다니 말이다. 이 무시무시한 살인들은 과거에 심어놓은 원념이 발전한 것이다. 물론 그 원념만이 원인은 아니다. 그것은 총알이고 방아쇠를 당기게 된 것은 다른 이유다. 한 사람에겐 가벼운 놀이자 장난인 것이 다른 사람에겐 삶을 뒤흔들 일인 것이다. 전쟁이 만들어낸 또 다른 괴물이 튀어나온 것도 역시 무시할 수 없다. 분명하게 이번 작품은 세이시의 다른 작품과 다르다. 많은 논란이 된 공정성 문제부터 구성의 유사성까지 말이다. 하지만 변함없는 것 하나가 있다. 그것은 재미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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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림슨의 미궁
기시 유스케 지음, 김미영 옮김 / 창해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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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의 첫 느낌은 강렬하다. 자세히 쳐다보면 거대한 손이 미로 속에 한 사람을 내려놓고 있다. 이 핏빛 표지가 의미하는 바가 무얼까? 띠지엔 배신과 살아남는 것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작가의 이력을 생각하면 미로 속에 갇힌 사람들의 생존을 둘러싼 이야기임을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이야기는 여기에 멈추지 않는다. 그 생존 자체도 하나의 목적을 가진 것이다. 읽으면서 생각했던 것 중 몇 개는 예상한 대로지만 나머지는 예상한 것과 다른 방향으로 흘러갔다. 그리고 빠른 속도로 읽히면서 그 끔찍한 설정과 전개에 놀란다.

시작은 조금 평범하다. 한 남자가 자신도 낯선 곳에서 깨어난다. 어떻게 이런 곳에 왔는지 모른다. 비에 젖은 채 온통 선명한 심홍색으로 물든 세계다. 이런 저런 생각을 하다 자기 옆에 놓여 있는 물통과 도시락과 파우치를 발견한다. 파우치 속에 게임기가 들어있다. 켠다. 화성의 미궁에 온 것을 환영하는 문자가 뜬다. 단순한 장난처럼 보인다. 계속해서 게임기는 정보를 내보낸다. 게임이 시작했음을 알리고, 그가 가야 할 방향을 보여준다. 어린 시절 배운 경험으로 방향을 설정하고 움직이다. 그러다 한 사람을 만난다. 쫓아간다. 여자다. 그녀는 앞으로 펼쳐질 끔찍하고 참혹한 게임의 동반자가 되는 아이다. 

이 둘이 움직여 다음 목적지로 간다. 다른 사람들이 모여 있다. 각자 게임기에 규칙 등의 정보가 제공되어 있다. 대략적인 설명을 본 후 서로 네 방향으로 갈 곳을 정한다. 북쪽은 정보, 남쪽은 식량, 동쪽은 서바이벌 아이템, 서쪽은 호신용 아이템이다. 주인공 후지키는 낯선 곳에 있으므로 식량을 선택하려고 한다. 그때 아이가 북쪽으로 가자고 한다. 이렇게 해서 여기에 모인 아홉 명은 네 방향으로 흩어진다. 그리고 그곳에서 얻은 것을 가지고 돌아오기로 한다. 이 선택이 어떤 영향을 미칠까 호기심을 자아낸다. 

잠시 이 상황에서 나 자신에게 묻는다. 나라면 어디로 갈까 하고 말이다. 아마 식량을 선택할 것이다. 지역이나 상황에 대한 정보가 없는 상태라면 식량 확보가 최우선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선택은 최악이다. 최선은 정보다. 이 지역과 음식물 등에 대한 정보가 있기 때문이다. 완전한 사막이 아니기에 많은 동물과 식물은 살아남기에 부족하지 않는 식량을 제공해준다. 거기에 게임 참가자가 가지게 될 것에 대한 정보까지 있으니 현명한 선택이다. 하지만 이 선택만으로 생존이 보장되지 않는다. 동물적 본능과 생존의지와 노력이 없다면 아무 소용없다. 낯설고 황량한 이곳에서 생존을 위한 싸움이 시작된다. 처음엔 먹고 살기 위한 노력이라면 뒤로 가면서 무섭게 변한 인간들로 인해 생존을 위한 것으로 변한다. 

극한 상황이 만들어내는 인간의 사악하고 잔인한 본성이 고개를 쳐든다. 그 과정에 가감 없는 묘사로 섬뜩하고 잔혹한 모습을 보여준다. 생존을 위해 도망치고, 인간의 감정은 이미 기괴한 욕망에 사로잡히고, 그 사람은 그 욕망에 충실한 덕분에 사람을 뒤쫓는다. 그 과정에 의문을 하나씩 흘린다. 예상한 것도 있다. 공포에 질린 사람들의 도망과 욕망에 사로잡힌 인간의 추적은 공포영화의 한 장면 같다. 게임북처럼 진행되지만 살기 위해서는 어떤 짓이든 해야만 한다. 생존을 위해 저 깊은 바닥까지 내려가고, 심연 깊은 곳에서 마주한 공포는 이성을 마비시킨다. 그리고 하나의 의문에 대한 답을 내놓은 동시에 새로운 의문을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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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을 만든 사람들 - 나라를 위한 선비들의 맞대결
이성무 지음 / 청아출판사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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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매력적인 제목이다. 조선을 만든 사람들이라니. 정확하게는 조선왕조의 건국에서부터 조선 후기까지 조선 역사의 방향을 바꾼 7가지 역사적 전환점을 다룬다. 그 시대의 대표 두 사람을 등장시켜 각각의 입장과 노선을 보여주면서 대결시킨다. 기획만 따지고 본다면 성공이다. 라이벌 열전은 늘 사람들을 흥미롭게 만들기 때문이다. 조선왕조 5백년 속에 나오는 낯익은 열네 명의 인물이라면 두 말할 필요도 없다. 

제목과 가장 가까운 두 인물은 역시 정도전과 이방원이다. 왕권과 신권의 대결이자 향후 왕조의 방향을 설정하는데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결국 이방원의 승리로 끝이 났지만 정도전이 세운 기반은 굳건하게 역사 속에 자리 잡고 있다. 조선 초기 역사에서 이 둘을 제외한다면 말이 되지 않을 정도니 당연한 등장이다. 다음으로 등장한 인물들은 조광조와 남곤이다. 사림파와 훈구파의 대결이란 점에서 뿌리 깊은 정쟁의 시작이라고 하였는데 이후 역사가 사림파 사이의 대결임을 생각하면 사람의 정계 진출 쪽에 더 비중을 두었어야 하지 않나 생각한다. 어릴 때 생각한 조광조의 이미지가 지금은 조금 다르게 다가와 변하는 나에게 놀라기도 한다.

이황과 조식을 등장시킨 것은 이후 그들의 후예가 펼친 당쟁 때문일 것이다. 조선 중기 두 거두의 모습에 경애를 표하지만 약간은 인물 열전 같은 분위기다. 개인적으로 가장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이이와 유성룡이다. 임란 전후 가장 중요한 정치인들이지만 이런 대결 구도 속에 들어올 상황이 아닌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단순히 급진파와 중도파란 관점으로 이 둘을 보기엔 너무 도식적이지 않나 생각한다. 최명길과 김상헌으로 넘어오면 더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그들을 주화와 척화로 나누는데 이미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그들이 역사의 흐름을 바꾼 것을 생각하면 그렇게 중요하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쟁점으로 삼아야 한다면 광해군과 그들의 쿠데타가 더 중요하다.

송시열과 윤휴 이야기는 어찌 보면 참으로 별 것 아닌 것으로 싸움을 한 것 같다. 하지만 그 속에 담긴 의도와 사상적 기반을 생각하면 정말 무시무시하다. 주자 교조주의자 송시열에 대한 비판이야 이덕일의 책에 잘 나와 있으니 그것을 참조하면 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정약용 대 심환지와 노론 벽파를 등장시켰다. 정약용에 비해 심환지의 무게가 떨어져서 그런 것일까 아니면 무리한 설정이기 때문일까? 긴장감이 많이 떨어진다. 당대에 정약용이 끼친 영향력이 그다지 커지 않았음을 생각하면 그의 등장 또한 의문이다. 물론 후대에 그의 그림자는 짖게 드리워져 있다.

흥미로운 구도와 진행이다. 아마 많이 말해지는 사람들을 등장시켜 대결구도를 만든 듯하다. 저자도 말했듯이 짧은 기간 안에 쓴 글이다 보니 깊이가 부족하다. 기획은 좋았으나 그 내용이 충분히 받쳐주지 못한 꼴이다. 이것은 나의 입장이고, 조선사에 입문하는 사람에겐 흥미로울 것이다. 낯익은 이름과 대결구도가 약간 따분할 수 있는 역사를 재미있게 이끌기 때문이다. 하지만 역시 조선사에서 가장 중요한 위치에 있었던 왕들이 빠지고, 신권과 왕권의 대결을 제외한다면 부족한 부분들이 더 많아질 뿐이다. 이 책의 몇몇 장은 왕과 신하의 대결로 만들었다면 더 좋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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