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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절한 균형 ㅣ 아시아 문학선 3
로힌턴 미스트리 지음, 손석주 옮김 / 도서출판 아시아 / 2009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읽으면서 놀라운 사실들을 만나고, 그런 일이 가능할까 생각하고, 과거 우리나라의 흔적을 느꼈고, 마지막 문장을 읽는 순간 눈시울을 붉혔다. 읽는 동안 단 한 번도 눈물을 자아낼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그들의 비극이 우리의 비극과 겹치는 장면에서 가슴이 아렸고, 이성적으로 판단했을 때 이해할 수 없는 수많은 사건들을 보면서 분노했다. 그런데 왜 에필로그에서 만나고, 스쳐지나간 그들의 삶이 가슴 먹먹하게 만들고 눈시울을 붉히게 만들었을까?
네 사람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끌고 간다. 미망인이자 셋집을 잃는 것을 두려워하는 디나, 천민계급을 벗어나고자 하였지만 계급의 벽에 의해 가족들이 죽은 재봉사인 삼촌 이시바와 조카 옴, 유일한 대학생이자 학교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하는 마넥 등이 그들이다. 이들이 중심이라면 그들과 관련된 과거와 현재 속에 만나게 되는 가족과 친구들은 인도 사회의 처절하면서도 강인한 생명력을 가진 삶속으로 우릴 데려간다. 그 속에서 만나게 되는 수많은 사건과 사고와 사실들은 그들의 의지와는 전혀 상관이 없다.
네 사람의 과거로부터 현재로 오는 과정은 인도 계층의 삶을 함축적으로 보여준다. 과거 속에서 만나는 삶보다 더 큰 충격으로 와 닿는 것이 있다. 그것은 재봉사들의 사건이다. 어느 날 출근길에 총리의 연설을 위해 강제로 버스에 태워지거나 세를 내고 살던 집이 어느 날 갑자기 포클레인 등에 의해 밀려버린다거나 노숙자처럼 자다 경찰에 의해 강제 노역에 처해진다. 이 불행들은 보면서 그래도 그들은 기술이 있으니 다행이란 생각을 약간 했는데 결말에 이르게 되면서 어쩌면 이렇게 처절하고 처참하고 불행한 삶이 있나 한탄을 하게 된다.
하룻밤 잘 곳과 한 끼 식사를 걱정하는 그들에 비해 비교적 좋은 환경을 가진 두 사람의 고민은 사치처럼 보인다. 최소한 삶의 가장 낮은 곳으로 그들은 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그들의 고민과 아픔이 약하다는 것은 아니다. 가진 것들이 많았기에 박탁감은 더 클 수도 있다. 하지만 재봉사들이나 그들과 함께 무허가촌에 살았던 도시 빈민들의 삶은 그 무엇으로 표현하기 힘들 정도로 충격적이다. 가끔 다큐멘터리에서 영상으로 본 적이 있지만 그렇게 살 수밖에 없는 현실의 높은 벽은 그 이상의 의미와 충격으로 가슴속에 파고든다.
900쪽에 가까운 이야기다 보니 수많은 사람이 등장한다. 네 사람과 관련되어 등장하는 그들의 삶은 다양한 계층의 삶을 보여준다. 디나와 관련된 사람들은 전문직이거나 부유한 사람들이고, 마넥의 주변도 큰 어려움이 없어 보인다. 하지만 재봉사들의 주변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낯설면서도 익숙하다. 낯선 것은 현재 내가 주변에서 잘 보지 못하거나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이고, 익숙한 것은 그들의 기록에서 우리의 과거 역사가 얼핏 보이기 때문이다. 특히 정치와 경찰과 폭력이 결합된 곳에서 만나게 되는 현실은 불과 수십 년 전 우리나라를 자연스럽게 연상하게 만든다. 지금도 휘황찬란하고 거대한 부의 그늘 속에 그 흔적이 점점이 남아있지만 말이다.
표지의 사진을 보면서 진짜일까? 생각했다. 이 사진은 소설 속 장면이다. 내가 느낀 것은 대단하다, 저런 것이 가능할까, 진짜일까? 하는 의문과 감탄이었다. 그런데 작가는 이 장면을 묘사하면서 대단함보다 긴 장대 위에 서 있는 아이들의 안전에 더 초점을 맞춘다. 배부르고 안전한 곳에 있는 나에게 신기하고 대단한 장면으로 다가온 것이 가난하고 굶주린 사람들에겐 불안과 공포를 안겨준 것이다. 이 다른 시각이 나 자신의 현재 위치를 돌아보게 만들었다.
적절한 균형. 이것은 마넥이 기차에서 만남 남자와의 대화 속에 나온 것이다. 그는 삶에 대해 ‘희망과 절망의 적절한 균형을 유지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 소설 속 상황과 진행들은 대부분 절망에 가깝다. 그들의 사이에 있던 벽이 무너지고 행복한 미래를 꿈꿀 때 과거의 절망들은 사라지고 희망이 꽃을 피운다. 하지만 그 희망은 무참하게 짓밟힌다. 다시 절망 속으로 빠진다. 그런데 수 년이 지난 후 그들의 모습을 보면 꼭 절망 속에서 살고 있는 것 같지가 않다. 그리고 권력의 소용돌이 속에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휘둘리는 사람들과 가장 비참할 것이라고 생각한 그 순간에도 결코 포기하지 않는 그들의 강인한 생명력은 가슴 속 깊이 여운을 남긴다. 그것은 그들의 삶속에서 이 땅의 선조들이 보여준 것과 동일한 것을 보았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이 책 한 권을 두고 둘러앉아 이야기를 한다면 그 소재와 주제가 무궁무진할 것 같다. 너무 긴 글이 될 것 같아 여기서 줄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