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중구속
크리스 보잘리언 지음, 김시현 옮김 / 비채 / 200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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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했다. 마지막 장을 덮는 순간 느낀 감정이다. 사실 이 책을 읽을 당시 집중력이 많이 깨진 상태였다. 로렐의 집착과 행동이 쉽게 이해되지 않았다. 이해하지 못하니 그녀의 행동과 심리에 몰입하기 힘들었고 주변 사람들의 반응도 너무 뜻밖이었다. 한 노숙자의 유품으로 나온 사진이 한 여자를 그렇게까지 몰고 간 이유를 엉뚱한 곳에서 계속 찾은 것이다. 그러니 감정이입도 이해도 불가능할 수밖에 없다. 

로렐 에스타브룩은 대학 2학년 가을 거의 강간당할 뻔했다. 그녀는 언더힐이란 도시 근처 산중에서 자전거를 타고 있었다. 그때 갑자기 나타난 갈색 밴에서 두 남자가 내려 그녀를 납치하려고 한다. 그녀를 자전거에서 떼어내 밴에 실으려고 한다. 다행스럽게 그녀는 자전거에 몸을 밀착한다. 다른 물건으로 그녀와 자전거를 함께 실을 수 없다. 폭력이 가해진다. 소리친다. 이런 상황에서 그녀의 비명을 들은 자전거를 타고 있던 몇 사람의 변호사가 나타난다. 달아난다. 그녀는 구해진다. 최악의 순간 그녀가 기억하고 있던 차량번호가 두 악당의 문신으로 범인은 잡힌다. 힘겨운 시간이 이어진다. 이제 그녀는 자전거를 멀리하고 수영으로 운동을 바꾼다. 노숙자를 위한 쉼터에서 봉사하다 직업으로 변한다. 그곳에서 한 노신사를 만난다. 모든 사건은 바로 그와 그가 남긴 사진에서 시작된다.

로렐은 사진에 관심이 많다. 바비가 남진 사진을 보니 전문가 수준이다. 노숙자로 전락한 그의 과거가 궁금하다. 쉼터의 대표 캐서린은 바비의 사진으로 전시회를 열어 쉼터에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 그녀는 이 작업을 로렐에게 맡긴다. 로렐은 바비의 사진을 보고 감탄한다. 그의 흔적을 좇는다. 그리고 인화되지 않은 필름들을 현상한다. 한 장의 사진을 발견한다. 그것은 그녀가 자랐던 마을의 부자 오누이 사진이다. 여기서부터 이야기는 미국의 고전 <위대한 개츠비>와 엮여 들어가게 된다. 내가 두 번이나 읽었지만 아직 그 매력을 못 느낀 걸작 말이다.

로렐은 바비의 사진을 단서로 그가 개츠비와 상관있던 부캐넌 가의 아들이었다고 추측한다. 개츠비와 스캔들이 있던 그 집안의 후손을 등장시켜 이런 의심을 더욱 부채질한다. 그렇다고 다른 스릴러처럼 그녀의 작업을 방해하기 위해 킬러나 해결사를 보낼 정도는 아니다. 변호사를 보내 협상을 하고, 계속해서 바비가 남긴 사진과 필름을 원할 뿐이다. 이런 일상적인 현실에서 로렐의 집착은 어느 순간 도를 넘어선다. 그녀가 발견한 놀라운 사실에 대해 주변 사람들의 반응은 너무나도 무관심하다. 지속적이고 끈질긴 조사 속에 바비의 과거 이력을 찾아내는데 성공한다. 그리고 또 한 장의 사진이 그녀를 더 강한 집착으로 몰고 간다. 그것은 그녀가 언더힐 근처 산중에서 자전거를 타던 뒷모습을 찍은 사진이다. 의심과 의문은 점점 자라난다.

작가는 현실과 허구의 세계를 넘나들면서 이야기를 만들었다. 교묘하게 작업한 덕분에 작가가 가리킨 방향만 계속 보게 된다. 단서를 곳곳에 남기지만 거대한 허구 속에서 그 답을 찾기는 쉽지 않다. 조용히 다가오는 마지막 반전은 그래서 더욱 강한 충격이다. 현실과 허구를 머릿속에서 분류하고, 허구를 찾아내어 고개를 끄덕이고, 그 장면이 준 의미를 깨닫게 된다. 제목이자 그레고리 베이트슨의 이론에서 나온 이중구속이 특정방식의 잘못된 양육이 무의식적으로 정신분열증을 촉발할 수 있다는 의미에서 방점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 알게 되었다. 

사실 첫 도입부가 준 강렬함에 비해 중간의 진행은 <위대한 개츠비>에 대한 이해가 없다면 지루할 수도 있다. 작가의 교묘한 작업 덕에 이야기에 빠져들지만 그녀가 느낀 의문이 그렇게 강렬한 것인지 살짝 의심이 생긴다. 그녀가 애인과 함께 하면서 보여준 행동과 반응을 통해 어느 정도 짐작을 했어야 하는데 실패했다. 중간에 삽입된 정신과의사의 진찰기록도 너무 안일하게 봤다. 완패다. 지금도 작가가 만들어낸 세계 속에서 허구와 진실을 찾아내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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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 도둑놀이
퍼 페터슨 지음, 손화수 옮김 / 가쎄(GASSE)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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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노년을 시골에서 보내기 위해 한적한 별장을 구입했다. 그곳에서 살던 그에게 우연히 들려온 목소리와 하나의 만남은 그를 과거 속으로 끌고 들어간다. 1948년 7월 초순이다. 그 당시 유일한 친구였던 욘은 그에게 말 도둑놀이를 제안한다. 그것은 말을 훔치는 것이 아니라 도둑처럼 말은 타고 달리는 놀이다. 이 놀이가 그의 삶을 바꿔놓은 것은 아니다. 그 놀이 이후 일어난 욘의 반응과 욘의 집에 일어난 비극이 변화의 시발점이다. 

욘의 집에 일어난 비극은 총기 사고다. 뛰어난 사냥꾼이었던 욘은 토끼 사냥을 마친 후 잡은 토끼를 들고 집으로 돌아온다. 그가 돌봐야 하는 쌍둥이 동생이 보이지 않는다. 총을 놓아둔 채 밖으로 나간다. 쌍둥이는 지하실에서 놀고 있었다. 집으로 올라온 그들이 총을 보고 장난을 친다. 그런데 총에 총알이 장전되어 있다. 한 발은 다른 곳을 맞추었지만 다른 한 발은 심장을 맞추었다. 즉사다. 이 비극은 욘과 그 가족을 뒤흔들어놓는다. 표면적으로 큰 변화가 없는 것 같지만 욘은 집을 떠나고, 남은 쌍둥이는 평생 낙인처럼 이것을 가슴에 찍고 산다.

작가가 만약 욘 가족에 이야기를 집중했다면 한 우발적 사고로 인한 가족의 붕괴와 해체를 다루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과거의 사고 하나로 처리하면서 지나간다. 그 사건을 더 깊이 파고들지 않는다. 화자가 그 가해자도 피해자도 아니기 때문이다. 현실적이다. 그러면서 그가 파고든 것은 화자와 아버지와 욘의 어머니다. 이 관계 속에서 열다섯 소년은 자신의 미래에 큰 변화를 맞이하고 과거가 파괴되는 그 시점을 만나게 된다. 

3년 전 아내를 사고로 잃고 홀로 살아남은 나는 조용한 별장에서 낡은 집을 수리하면서 여생을 보내려고 한다. 그런데 과거 속으로 그를 데리고 간 그 남자가 바로 욘의 쌍둥이 동생 라스다. 보통의 작가라면 라스의 과거와 현재 속으로 파고들어 이야기를 만들어내었을 것이다. 하지만 작가는 둘 모두 과거를 알지만 약간은 무덤덤하게 지나간다. 왜 그런 것일까? 의문이 생긴다. 두 사람 인생에서 아주 큰 전화기였을 순간인데 말이다. 어쩌면 그들이 처음으로 만난 밤에 있었던 대화 속에 실마리가 있는지도 모른다. 엄마와 같이 살면서 사슴을 괴롭히던 개를 총으로 쏘았던 그의 경험담 말이다.

이야기는 현실과 과거를 오가면서 진행된다. 현실에선 과거의 회상 순간과 현실의 삶을 그려내고, 과거는 그 모든 것이 변하고 파괴되기 전의 상황을 보여준다. 소년이 한 사람의 일꾼으로 남자로 성장하는 과정을 담고 있다. 육체의 힘겨움을 견디면서 일을 하고, 아이디어를 내놓아 일을 무난하게 풀어낸다. 이런 과거는 이제 육체적으로 쇠락한 현실의 그와 비교된다. 하지만 아픔을 견디고 이겨내는 내면의 힘은 과거로부터 시작하여 현재까지 이어져온다. 

이 소설의 매력은 바로 그의 성장과 노년의 모습이 함께 엮여가면서 진행되는 것이다. 현재의 나는 과거의 무수한 나의 결합들의 결과물이다. 그리고 작가는 삶에서 우리가 호기심을 가지고 알고 싶어하지만 결코 알지 못했던 것을 그대로 묻어둔 채 나아간다. 그것이 삶이자 현실이다. 마지막 문장에서 표현된 그의 결정이 현재의 나와 이어진다. 이 묘한 상호작용은 머릿속에서 수많은 생각을 만들어낸다. 그리고 정확한 이유나 답을 내놓지 않은 의문들에 대한 답도 알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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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럼 아일랜드 - 판타스틱 픽션 블랙 BLACK 5-1 존 코리 시리즈 1
넬슨 드밀 지음, 서계인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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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선 작가다. 하지만 <장군의 딸> 작가라면 예전에 본 영화가 생각난다. 집에 찾아보면 책도 어딘가에 있을 것이다. 옛날에는 영화로 만들어진 소설에 대해 관심이 없었다. 영화로 핵심 줄거리를 보았기에 책 볼 마음이 생기지 않았다. 그런데 요즘은 조금 변했다. 영화보다 원작이 더 궁금하다. 원작을 뛰어넘은 영화를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원작 소설이 있는 영화를 요즘은 멀리한다. 원작의 재미를 놓치지 않기 위해서다. 왜 이런 이야기를 하냐고? 이 소설을 영화로 만든다면 할리우드 공식이 거의 들어있어 큰 힘이 들지 않을 것 같기 때문이다.

존 코리 시리즈의 첫 권이다. 매력적인 주인공들을 시리즈로 만드는 것은 언제나 환영이다. 그런데 이번 주인공 마초맨이다. 물에 빠지면 입만 둥둥 떠다닐 것 같고, 자신의 남성 매력을 널리 알리지 못해 환장했다. 미국식 유머가 넘쳐나고, 자신 외에 다른 섹시남이 나타나면 경쟁심을 불태운다. 사건을 조사하면서 만난 멋진 여자형사를 은근히 유혹하고, 경쟁자를 밀어내려고 한다. 그렇다고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잊고 있을 정도로 멍청한 형사는 아니다.

그가 사건에 휘말리게 된 것은 롱아일랜드에 있는 삼촌의 집에서 휴양 중일 때다. 그를 노린 저격사건으로 몸에 총상을 입은 후 쉬고 있었는데 그 마을 보안관이 살인사건 컨설턴트로 그를 고용한 것이다. 몸이 아직 정상이 아니라 거절하려고 했는데 피살자들이 아는 고든 부부다. 그들은 플럼 아일랜드에서 바이러스 등을 연구하는 과학자 부부다. 친구 부부가 죽었다는 사실과 그들이 근무한 플럼 아일랜드를 둘러싼 온갖 소문들이 그를 사건에 깊이 관여하게 만든다. 그리고 그들이 연구했던 작업 때문에 FBI나 CIA 등이 개입한다. 만약 이 부부가 돈을 위해 탄저균이나 에볼라 바이러스 등을 판매하려다 사살되었다면 화학무기가 미국을 덮칠 수 있기 때문이다.

소설의 초반은 코리의 개성 넘치는 행동과 특징을 보여주면서 플럼 아일랜드를 소개하는데 공을 들인다. 만약에 일어날 수 있는 가능성은 연구소 방문과 조사와 그 부부의 생활을 통해 지워내는 계기가 되었다. 하지만 이것은 형사 코리의 추론과 결론이고, 정부와 다른 조직들은 혹시나 하는 위험을 계속해서 조사하고 가능성을 검토 중이다. 이것을 보면서 권력을 가진 자들의 속성과 도둑이 제 발 저린다는 말의 의미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사실 이 부분은 조금 지루했다. 아마 코리의 경쟁심과 질투와 유머가 없었다면 속도가 더뎠을 것이다.

하나의 가능성이 사라졌다면 새로운 가설을 세워야 한다. 우연히 아이디어가 번쩍였다. 그것은 보물찾기다. 고든 부부의 씀씀이와 카드 내역이나 전화 통화 기록을 보면서 범인에 대한 단서를 좇던 중 생겼다. 정부 요원들이 테러의 가능성을 좇을 때 코리는 새로운 가설을 세운 것이다. 그 가설은 사실 황당해 보인다. 이미 많은 보물사냥꾼들이 도전한 것이 때문이다. 작가는 고든 부부의 친구 관계와 옆집 노부부의 증언을 통해 하나씩 차근차근 조사를 해나간다. 그런데 그에게 사건 컨설팅을 의뢰한 보안관 맥스가 그 권한을 없애버린다. 공식적인 권한이 없다고 조사를 멈춘다면 주인공도 근성 있는 뉴욕형사도 아니다. 

잘 읽힌다. 700쪽에 가깝지만 속도감 있게 나아간다. 코리는 대단히 마초맨 같지만 순정은 있다. 의심이 나면 계속해서 파고들고,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면 주저 없이 행동으로 옮긴다. 이런 특징은 소설 마지막 부분에 크게 발휘되는데 이 부분을 보면서 할리우드 영화로 만들면 많은 호응을 얻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 태풍이 몰려올 때 모터보터를 타고 펼치는 대결은 긴장감과 스릴감을 높여준다. 그리고 비교적 빨리 밝혀지는 진실은 반전은 약하지만 다른 반전을 기대하게 만드는 매력이 있다. 이 부분은 혹시나 하는 기대가 만들어낸 것이다. 개인적으로 아쉬운 것은 작가가 풀어내는 블랙유머의 재미를 온전히 다 누리지 못한 것이다. 몇 곳에선 저절로 웃음을 터트렸지만 어디선가는 그냥 밋밋했다. 문화의 차인가? 시리즈 다음 작품이 기대되며 다른 시리즈인 <장군의 딸>도 소설로 읽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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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월의 이틀
장정일 지음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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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장정일의 소설을 읽었다. 변함없이 잘 읽힌다. 류시화의 시에서 따온 책 제목은 나의 지나간 시간 혹은 다가올 시간을 생각하게 만든다. 구월의 이틀. 단순하게 생각하면 어느 시점의 이틀일 뿐이다. 하지만 삶을 생각하면 이 시기는 인생의 전환점이 되는 시간이다. 작가는 한국 우익청년 성장기란 목표를 가지고 썼다. 그리고 두 청년, 금과 은의 뒤바뀌는 삶의 과정도 함께 그려내고 있다.

금과 은, 원래 제목으로 정하려고 했던 것이자 두 주인공 이름이다. 그들의 출생지는 부산과 광주다. 첫 시작은 이 두 사람이 자신이 살던 곳을 벗어나 서울로 오면서부터다. 은이 부산을 떠난 것은 아버지의 사업실패 때문이고, 금이 광주를 떠난 것은 아버지가 참여정부에 들어갔기 때문이다. 겉으로 보면 아버지들의 성공이 자식으로 이어질 것 같지만 사실은 다르다. 금의 아버지는 민주화 운동 등을 하면서 제대로 된 재산을 마련하지 못한 반면 몇 번의 사업실패를 하였지만 은의 아버지는 늙은 어머니 모시기 싫은 부동산 부자이자 미국으로 떠난 큰형의 집에서 편안하게 산다. 작가는 여기서부터 환경이 주는 힘을 보여준다.

같은 학교 다른 과에 입학한 두 청년이 우연히 통성명을 하게 된 것은 한 문학수업 때문이다. 작가 자신이 실제 수업에서 인용하곤 했던 류시화의 <구월의 이틀>에 대한 탁월한 은의 이해 때문에 금이 다가간 것이다. 이 둘은 이 자리가 첫 만남이 아니다. 이미 자신의 고향을 떠나 서울로 오는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잠시 부딪힌 적이 있다. 이것보다 더 기억에 남는 것은 그들이 올라오면서 본 교통사고의 현장이다. 이 기억과 그보다 앞에 있었던 하나의 조그마한 사건을 공유하면서 둘은 친구가 된다. 

금은 아버지의 영향으로 정치가가 되고 싶고, 은은 문학에 재능은 있지만 엄마의 뜻에 따라 국어교육학과로 들어간다. 아직 자신이 진정으로 하고 싶은 것을 찾지 못한 대학생 새내기일 뿐이다. 원대한 계획과 꿈을 꾸기도 하지만 현실은 쉽게 그것을 호락호락하게 허락하지 않는다. 여기에 금과 은의 연애사를 집어넣는다. 금은 잘 생긴 외모를 가지고 있고, 그 때문에 한 연상녀와 첫경험을 한다. 이 경험은 지속적으로 이어지고, 가볍고 쿨해야 할 관계는 어린 새내기의 열정으로 심각하고 무거워진다. 반면에 은은 우연히 한 전시회에서 본 환상의 여자를 갈구한다. 그녀를 찾아 미술관과 전시회 등을 전전한다. 그녀는 나타나지 않는다. 환상은 현실에서 그를 벗어나게 만드는 힘이자 그가 붙잡고자 한 인생의 목표인지도 모른다.

어떻게 보면 너무나도 큰 대척점에 서 있는 이 둘이 친구가 되었다는 사실이 놀랍다. 현실적으로 살고자 하지만 현실의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한 금이나 이상을 찾고 다니지만 이미 자신도 모르게 현실적으로 변한 은의 모습은 그 순간부터 바뀔 미래를 보여준 것인지 모른다. 그리고 이 둘은 작가의 글처럼 ‘극단적인 모범생들’이다. 주변과 충돌하고 새로운 경험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기 전에 이미 ‘집안의 부모 친지나 학교 선생님들이 가르쳐준 가치관을 고스란히 내면화했고, 자신들이 자라면서 접했던 지역 사회의 정서를 육화’(160쪽)한 것이다. 이 둘도 이 현실을 인정하고 있다. 

다른 환경과 다른 경험을 한 두 청년이 우정을 다지고 나아가는 과정에 변화가 생긴 것도 역시 아버지들 때문이다. 이 과정을 작가는 너무 급작스럽게 진행하면서 앞의 흐름을 깨어버린다. 둘이 동시에 동일선상에서 변화를 일으키고, 동성애를 집어넣고, 변화하는 가치관을 늘어놓으면서 조금 힘이 빠졌다. 우익청년으로 변하는 은의 모습은 비약처럼 다가오고, 그의 성장이 종교처럼 느껴진다. 거북선생과의 관계나 그에게 배우게 되는 우익의 논리가 비록 허술하고 논리적 정형성이 떨어진다고 해도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노인네가 벌인 해프닝 수준을 벗어나지 못했다는 점에선 아쉬움이 크다. 멋진 우익을 만들고자 했지만 결국 흔히 말하는 수구골통을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그래서인지 혹시 그가 기획했다는 다음 이야기가 기다려진다. 과연 얼마나 은이 성장했는지 보고 싶기 때문이다. 아니 정확히는 건전하고 멋진 보수수의자의 철학과 삶을 보고 싶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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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 철학 스케치 1 - 이야기로 만나는 교양의 세계
김선희 지음 / 풀빛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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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로 만나는 교양의 세계란 표지가 보인다. 그 이야기가 동양철학이다. 학창시절 잠시 동양철학에 대해 배운 적이 있다. 비록 그것이 수박 겉핥기였다고 하여도 말이다. 심오하다거나 난해하다는 표현을 많이 사용했던 기억이 있다. 동양철학의 경우 체계적으로 공부한 적도 없고, 그 흐름에 대해 깊이 있는 생각을 한 적도 없다. 소설 등에서 단편적으로 많이 만났는데 그 표현들이 상당히 나를 끌어당겼다. 그런데 이 책을 읽으면서 그 문장들이 어디에서 나왔는지, 어떤 시대였는지 알게 되었다. 잘못 인용되거나 가져다 붙인 것들이 머릿속을 스쳐지나간다.

저자는 교과서적인 철학적 개념이나 이론을 목적하지 않았다. 그녀가 관심을 둔 것은 ‘철학들이 문제를 발견하고 이해하고 자신의 언어로 바꾸고 실천하는 힘’(1권 15쪽)이다. 그리고 이야기는 연대순으로 이어진다. 중국 고대문명에서 시작하여 19세기 조선과 일본까지의 철학을 다룬다. 그 중심에 있는 철학은 유학이다. 어쩔 수 없다. 동아시아의 긴 역사 속에 유학보다 강한 힘을 발휘한 철학이 없기 때문이다. 불교나 도교를 비교 대상으로 놓을 수는 있지만 사회구조나 정치권력을 생각하면 유학이 더 비중이 높다.

동양철학이란 제목을 달고 있지만 중국철학이란 표현으로 바꿔도 큰 문제가 없을 것 같다. 물론 시기상으로 불교를 다룬다거나 조선과 일본의 철학을 논의하지만 그 비중은 크지 않다. 처음 읽으면서 이 부분이 사실 눈에 거슬렸다. 동양철학과 중국철학이 거의 동일선상에 놓여 있는 느낌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큰 의미에서 동양철학으로 본다거나 조선과 일본에 미친 영향을 생각하고 그 세부내용을 읽어가면서 그 빛은 점점 사그라졌다. 그리고 어떤 변천을 거쳤는지, 시대와 어떻게 소통하였는지, 그 용어의 의미가 무엇인지, 개념에서 유사점과 차이점은 무엇인지 등을 돌아보게 되었다.

모두 6부 18장을 이루어져 있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철학이 어떻게 변했는지 보여준다. 학창시절 단순히 외우기만 했던 이름이나 의미를 하나씩 풀어내면서 철학의 세계로 이끈다. 피상적이거나 덧씌워져 있던 허상을 하나씩 제거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이기도 했다. 시대의 변화와 유학과 불교와 도교 등이 어떤 길을 걸었고, 유학이 어떤 식으로 발전하게 되었는지 조금씩 감을 잡았다. 이기일원론이니 이기이원론이니 하는 이론의 의미를 제대로 알지 못했는데 이번에 조금은 이해하게 되었다. 아마 단순히 학설에 대한 설명만 읽었다면 피상적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유학의 발전과정을 통해 접근하면서 그 의미가 더 분명해진 것이다. 물론 이 한 권의 책으로 수천 년을 내려오면서 발전한 철학을 이해한다는 것은 무리다. 하지만 그 흐름을 통해 전체적인 윤곽이나 의미를 깨닫게 되고, 동양철학에 흥미를 가지게 되었다면 그것은 또 다른 문제다.

비교적 쉽게 풀어내었다. 비교적이란 단어를 사용한 것은 이야기처럼 썼다고 하지만 결코 쉬운 내용이 아니기 때문이다. 동양 철학사를 정리하는 과정에 저자의 의견이나 이해가 개념 정리나 본래의 의미를 넘어선 경우도 보인다. 동양 철학사를 통해 동양 역사를 다루니 이런 오해나 충돌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다. 사실 이 책을 재미있게 읽었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일이다. <소피의 세계>만큼 재미있고 흥미롭게 읽었다. 아마도 이것은 지금까지 읽은 소설 등에서 단편적으로 얻은 지식을 체계적으로 정리하는 기회가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아마도 동양철학에서 말하는 개념들이 낯설고 어렵다면 고역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양철학에 관심이 있다면 이 책 읽기를 권하고 싶다. 과문해서 다른 좋은 책을 만나지 못한 것일 수도 있지만 이 정도의 재미와 흥미와 난이도를 가진 책을 만나기 쉽지 않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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