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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월의 이틀
장정일 지음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9년 11월
평점 :
오랜만에 장정일의 소설을 읽었다. 변함없이 잘 읽힌다. 류시화의 시에서 따온 책 제목은 나의 지나간 시간 혹은 다가올 시간을 생각하게 만든다. 구월의 이틀. 단순하게 생각하면 어느 시점의 이틀일 뿐이다. 하지만 삶을 생각하면 이 시기는 인생의 전환점이 되는 시간이다. 작가는 한국 우익청년 성장기란 목표를 가지고 썼다. 그리고 두 청년, 금과 은의 뒤바뀌는 삶의 과정도 함께 그려내고 있다.
금과 은, 원래 제목으로 정하려고 했던 것이자 두 주인공 이름이다. 그들의 출생지는 부산과 광주다. 첫 시작은 이 두 사람이 자신이 살던 곳을 벗어나 서울로 오면서부터다. 은이 부산을 떠난 것은 아버지의 사업실패 때문이고, 금이 광주를 떠난 것은 아버지가 참여정부에 들어갔기 때문이다. 겉으로 보면 아버지들의 성공이 자식으로 이어질 것 같지만 사실은 다르다. 금의 아버지는 민주화 운동 등을 하면서 제대로 된 재산을 마련하지 못한 반면 몇 번의 사업실패를 하였지만 은의 아버지는 늙은 어머니 모시기 싫은 부동산 부자이자 미국으로 떠난 큰형의 집에서 편안하게 산다. 작가는 여기서부터 환경이 주는 힘을 보여준다.
같은 학교 다른 과에 입학한 두 청년이 우연히 통성명을 하게 된 것은 한 문학수업 때문이다. 작가 자신이 실제 수업에서 인용하곤 했던 류시화의 <구월의 이틀>에 대한 탁월한 은의 이해 때문에 금이 다가간 것이다. 이 둘은 이 자리가 첫 만남이 아니다. 이미 자신의 고향을 떠나 서울로 오는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잠시 부딪힌 적이 있다. 이것보다 더 기억에 남는 것은 그들이 올라오면서 본 교통사고의 현장이다. 이 기억과 그보다 앞에 있었던 하나의 조그마한 사건을 공유하면서 둘은 친구가 된다.
금은 아버지의 영향으로 정치가가 되고 싶고, 은은 문학에 재능은 있지만 엄마의 뜻에 따라 국어교육학과로 들어간다. 아직 자신이 진정으로 하고 싶은 것을 찾지 못한 대학생 새내기일 뿐이다. 원대한 계획과 꿈을 꾸기도 하지만 현실은 쉽게 그것을 호락호락하게 허락하지 않는다. 여기에 금과 은의 연애사를 집어넣는다. 금은 잘 생긴 외모를 가지고 있고, 그 때문에 한 연상녀와 첫경험을 한다. 이 경험은 지속적으로 이어지고, 가볍고 쿨해야 할 관계는 어린 새내기의 열정으로 심각하고 무거워진다. 반면에 은은 우연히 한 전시회에서 본 환상의 여자를 갈구한다. 그녀를 찾아 미술관과 전시회 등을 전전한다. 그녀는 나타나지 않는다. 환상은 현실에서 그를 벗어나게 만드는 힘이자 그가 붙잡고자 한 인생의 목표인지도 모른다.
어떻게 보면 너무나도 큰 대척점에 서 있는 이 둘이 친구가 되었다는 사실이 놀랍다. 현실적으로 살고자 하지만 현실의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한 금이나 이상을 찾고 다니지만 이미 자신도 모르게 현실적으로 변한 은의 모습은 그 순간부터 바뀔 미래를 보여준 것인지 모른다. 그리고 이 둘은 작가의 글처럼 ‘극단적인 모범생들’이다. 주변과 충돌하고 새로운 경험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기 전에 이미 ‘집안의 부모 친지나 학교 선생님들이 가르쳐준 가치관을 고스란히 내면화했고, 자신들이 자라면서 접했던 지역 사회의 정서를 육화’(160쪽)한 것이다. 이 둘도 이 현실을 인정하고 있다.
다른 환경과 다른 경험을 한 두 청년이 우정을 다지고 나아가는 과정에 변화가 생긴 것도 역시 아버지들 때문이다. 이 과정을 작가는 너무 급작스럽게 진행하면서 앞의 흐름을 깨어버린다. 둘이 동시에 동일선상에서 변화를 일으키고, 동성애를 집어넣고, 변화하는 가치관을 늘어놓으면서 조금 힘이 빠졌다. 우익청년으로 변하는 은의 모습은 비약처럼 다가오고, 그의 성장이 종교처럼 느껴진다. 거북선생과의 관계나 그에게 배우게 되는 우익의 논리가 비록 허술하고 논리적 정형성이 떨어진다고 해도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노인네가 벌인 해프닝 수준을 벗어나지 못했다는 점에선 아쉬움이 크다. 멋진 우익을 만들고자 했지만 결국 흔히 말하는 수구골통을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그래서인지 혹시 그가 기획했다는 다음 이야기가 기다려진다. 과연 얼마나 은이 성장했는지 보고 싶기 때문이다. 아니 정확히는 건전하고 멋진 보수수의자의 철학과 삶을 보고 싶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