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라스트 북
조란 지브코비치 지음, 유영희 옮김 / 끌림 / 200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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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펼치는 순간 사람이 죽는다. 이 소설에서 다루어지는 더 라스트 북이 바로 그런 책이다. 이야기의 시작은 파피루스 서점에서 한 노인이 죽은 채로 발견되면서부터다. 외상 흔적도 없고, 누군가와 접촉한 적도 없다. 법의관은 심장마비로 판단하고 시체를 내어간다. 사건은 이렇게 쉽게 해결될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검시 결과를 보니 심장마비가 아니다. 갑자기 죽은 원인을 알 수 없다. 원인 불명의 사인이지만 단 한 건이라면 큰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다음 날 또 다른 시체가 서점에서 발견된다. 이제 사건은 심각해지기 시작한다.  

 

 이렇게 한 서점에서 세 사람이 연속적으로 죽는다. 그곳이 파피루스 서점이고, 서점의 주인 중 한 명인 베라와 형사 루키치의 만남이 이루어진 곳이다. 처음엔 단순 관계자였던 두 사람이 시체가 한 구씩 늘어나면서 가까워지고, 연인으로 발전한다. 형사와 시체가 반복적으로 발견된 서점 주인과의 사랑이라니 무서울 수도 있는 환경에 봄 향기를 불어넣어준다. 하지만 이것은 단순한 만남이 아니다. 알게 모르게 두 사람을 정보를 주고받고, 루키치 형사는 베라와 사랑을 나눈 후면 꼭 이상한 악몽을 꾼 후 잠에서 깨어난다. 왜 그럴까? 한두 번은 우연일 수 있지만 더 반복되면 의문이 생긴다.  

 

 시체가 계속 발견되지만 명확한 사인이 없다. 여기서 현대의 고전인 <장미의 이름>이 등장한다. 그 소설에서 책을 둘러싸고 살인사건이 발생한 것에 대한 오마주다. 하지만 시체에는 어떠한 독극물의 흔적이 없다. 혹시 지금은 대중적으로 알려지지 않은 다른 독물이 있는 것일까? 의심을 하는 것도 당연하다. 또 다른 시체가 발견되면서 국가안보국이 개입하게 되고 사건은 더욱 커지고 미궁으로 빠져들게 된다.  

 

 시체가 발견되는 장소가 서점이다 보니 서점과 고객을 둘러싼 재미난 일과 사람들이 나온다. 자기 집에서 책을 가져와 책장에 꽂아두는 사람이나 자신이 산 책을 들고 와 한 장소에서 읽는 사람이나 책꽃이의 책들을 마구 뒤섞어 놓는 사람 등이 나온다. 베라는 이들을 환자라고 부르고, 그녀의 동업자는 기인이라 부른다. 어떻게 불리던 상당히 특이한 사람들이다. 이 사람들 중 한 명이자 아인슈타인으로 불렸던 박사 더 라스트 북에 대한 단서를 흘린다. 이제 사건이 해결되는 것일까? 아니다. 작가는 더욱 미궁으로 사건을 밀어 넣고 독자를 혼란 속으로 빠트린다.  

 

 서점, 책, 형사라는 소재를 엮어 재미난 소설 한 편을 만들었다. 책 좋아하고 스릴러에 관심 있는 독자라면 누구나 관심을 가질 요소들이다. 거기다 사인도 제대로 모르고, 더 라스트 북이란 이상한 죽음의 책만 돌아다니고 있다. 뒤로 가면 이 책을 숭배하는 비밀 교단이 나와 혼란스럽게 만들고, 이제 갓 시작한 두 연인이 가는 찻집은 신비로운 분위기를 풍기면서 다가온다. 현실과 상상과 꿈이 만들어내는 몽환적인 장면들은 연쇄 죽음으로 더욱 깊숙이 감상 속으로 파고든다. 하지만 역시 마지막 반전에선 어느 정도는 예감했을 수 있지만 아쉬운 느낌이 있다. 이 부분은 역시 정밀한 기계적인 구성이나 기존 소설이나 설명 등에서 영향을 받은 바도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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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심한 듯 시크하게 Nobless Club 17
한상운 지음 / 로크미디어 / 200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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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 한상운은 무협작가다. 그가 군대 가기 전 쓴 무협으로 많은 독자들에게 호평을 받았고, 제대 후 쓴 소설로 다시 한 번 더 시선을 받았다. 그의 글은 기존 무협의 형식과 틀을 벗어났다. 영웅은 사라지고, 비열하고 배반이 난무한다. 어떻게 보면 홍콩 느와르를 무협 속으로 옮겨온 것 같다는 평도 있다. 이번 작품도 형사와 마약이 나오는 현대물이지만 기존 작품과 비슷한 연장선에 놓여있다. 형사를 무협의 수사관으로, 현대의 사건을 과거의 음모나 사건으로 바꾸면 별 차이가 없다. 그를 전작을 읽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정태석은 대한민국 형사다. 잘 생겼다. 싸움도 꽤 한다. 그런 그가 한 마약사범과의 싸움에서 깨진다. 옴팡지게 맞고 자존심이 상한다. 처음에 마약을 거래하는 피라미를 잡았다고 좋아했는데 예상하지 못한 큰 거래가 딸려왔다. 그 단서를 찾아간 장소에서 변성수란 놈에게 깨진 것이다. 대한민국 형사가 이를 포기할 리 없다. 다음 단서를 좇아 그를 다시 만난다. 그런데 또 깨진다. 삼단봉이란 무기를 들었는데도 말이다. 체면이 말이 아니다. 이렇게 변성수란 마약사범을 잡기 위해 형사 정태석은 달린다. 근데 이놈이 어디로 갔는지 사라져 보이지 않는다.  

 

 그의 흔적을 좇다 같이 있던 그의 동료가 죽은 것을 발견한다. 처음엔 변성수의 살인인 것처럼 보였다. 그런데 다음 살인사건이 또 발견된다. 부검 결과를 보면 고문을 당한 흔적이 남아 있다. 이제 또 다른 사람들이 개입한 것 같다. 창조적이지도 풍부한 상상력도 가지고 있지 않은 형사들에게 이 사건을 물어다 준 피라미가 단서를 제공한 것이다. 작가는 이 과정을 치밀하면서도 잘 짜인 구성보다 유쾌하고 재미있게 이끌어나간다.   

 

 이 마약사건을 뒤좇는 과정에 두 여자가 등장한다. 변성수와 선을 본 오선미와 태석과 하룻밤 사랑을 나눈 후 그를 쫓는 자칭 알바 현경이다. 태석은 그의 뛰어난 외모에 혹한 많은 여자들과 하룻밤 사랑으로 젊음을 즐겼다. 그런 그가 사랑이 무엇인지, 알콩달콩한 연애가 어떤 것인지 알 리 없다. 그는 이 두 여자를 통해 연애와 사랑의 감정을 키워나간다. 오선미는 변성수의 흔적을 찾기 위해서 만나고, 이전 같은 하룻밤 사랑으로 젊음을 불태웠던 현경은 은근히 여우같이 그를 압박한다. 이 둘은 팍팍한 형사들의 세계에 나른한 여자의 향기를 풍긴다.  

 

형사 영화나 드라마에 항상 등장하는 파트너 병철은 음식의 양념 같은 존재다. 중년의 위기를 겪고 있고, 이제 범인에게 맞으면서 직업에 회의를 느낀다. 젊은 여자에게 거짓말하고, 돈에 대한 관심이 하늘을 찌른다. 코믹한 인물인데 무심한 듯 시크한 태석의 곁에서 웃음을 준다. 그의 행동과 대사는 엉뚱하고 어수룩하면서도 따뜻하다. 영화로 만든다면 가장 공을 들여야 할 주연급 조연이다. 또 그의 딸 소영이 태석에게 보내는 선물과 눈길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상상하는 재미가 있다.   

 

 

 현대물로 바뀌면서 배신에 배신을 거듭하곤 했던 과거의 작품들과 어느 정도 결별을 한 것 같다. 일시적인 현상인지 아니면 이 작품만 그런 것인지는 두고 봐야 알 것이다. 전작에서 보여주었던 유머는 변함없다. 개성이 강한 등장인물들이 만들어내는 사건과 상황은 역시 발군이다. 이 멋진 인물들을 이번 한 권에서만 활용한다는 것은 아쉬운 일이다. 이들이 시리즈로 나와서 멋지게 범죄자들을 잡아들이고, 계속 웃음을 주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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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화를 보는 눈
다카시나 슈지 지음, 신미원 옮김 / 눌와 / 200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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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르네상스에서 사실주의까지 다룬 ‘명화를 보는 눈(1969)’과 인상파에서 순수추상까지를 보여주는 ‘속 명화를 보는 눈(1971)’의 합본이다. 전작이 400년의 시기를 다룬다면 후작은 그 후 100년도 되지 않는 시간을 다룬다. 그만큼 인상파부터 시작된 변화가 급격했다는 의미도 될 것이다. 이 5백년 정도의 시기를 정해놓고 서양미술을 보는 즐거움을 누린다는 점이 이 책이 주는 가장 큰 재미가 아닌가 한다. 나처럼 특정한 몇 명을 제외하고 화가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이 보아도 익숙한 화가와 대표작을 집중적으로 보여주기에 큰 무리는 없다.  

 

 

 책의 구성은 간단하다. 한 작가와 그의 대표작을 저자가 선택하여 작가의 시대와 특색 등을 설명한다. 물론 작가에 대한 배경도 빠트리지 않는다. 대부분 눈에 익은 작품들이라 보는데 반갑기도 하고, 이전에 그냥 보고 지나간 부분에 대한 해설에선 아! 하고 순간 감탄을 토해내기도 한다. 단순하기에 쉽게 읽을 수 있지만 또 한 편으론 그 흐름을 읽는 이가 나름대로 정리해야하는 단점도 있다. 아마 내가 얼마 전에 몇 권의 미술관련 서적을 읽지 않았다면 더욱 어려웠거나 그냥 지나간 대목일 수 있지만 약간 안다고 이런 불만을 말하는 모양이다.  

 

 학창시절 시험을 위해 미술 사조를 외우고 화가와 그의 대표작을 머릿속에 입력하였다. 덕분에 이름들은 입에 달아 붙었는데 그 작품이나 의미 등은 뒤죽박죽이거나 허공 속으로 사라졌다. 여기저기 다른 곳에서 작가와 작품을 만나기도 하지만 몇몇 정말 유명한 작품이거나 자주 보는 것이 아닌 것은 혼돈 속에서 쉽게 그것을 구별하지 못한다. 학교 교육이나 다른 탓을 하기 전에 나에게 먼저 잘못이 있지만 전공도 아니고 취미가 있던 것도 아니니 어쩔 수 없다. 다행히 대충이라도 알고 있다는 것에 만족할 수밖에.  

 

 언제나 말하는 것이지만 그림을 보는 눈을 가지기는 쉽지 않다. 단순히 좋다 나쁘다, 라는 감상을 표현하는 정도라면 누구나 할 수 있지만 그 속에 담긴 수많은 상징이나 의미를 읽어내는 것은 일반사람들에겐 너무 어려운 일이다. 르네상스시기에 그린 그림들이 담고 있는 상징과 의미나 추상파 등의 그림이 보여주는 기하학적 모습은 친절한 설명이 곁들여진다고 해도 쉽게 고개를 끄덕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최소한 이상의 이해를 가지고 본다는 장점은 분명히 있다. 바로 이 점에서 이 책이 가진 장점이 힘을 발휘한다. 많은 화가를 다루다보니 깊이 있는 이야기나 중요한 것들이 많이 생략되기도 하지만 서양미술사의 흐름을 한눈에 되짚어 본다는 장점도 살아있다. 또 하나의 작품에 집중함으로써 그 화가의 특징을 잘 알게 된다. 비록 화풍의 변화나 다른 특징을 그냥 지나가는 단점이 있기는 하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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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정
커리드웬 도비 지음, 엄일녀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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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나라를 독재자가 다스린다는 것은 국민들에게 큰 불행이다. 하지만 이 독재자를 통해 이익을 얻는 사람들이 늘 있다. 정경유착으로, 부패로 그들은 이익을 얻는다. 그 부패의 정도가 심해질수록 그에 대한 반동도 강해진다. 그 반동의 형태가 혁명이냐 쿠데타냐에 따라 그 다음 정권의 성격이 결정된다. 물론 이것이 단숨에 결정되는 것은 아니다. 시간이 지난 후 정권이 어떻게 행동하느냐에 따라 결정된다. 그런 의미에서 이 소설 속의 정권 교체가 쿠데타란 단어로 표현된 것은 의미하는 바가 분명하고 크다.  

 

 소설은 모두 3부로 구성되어 있다. 1부에선 대통령을 위해 봉사하는 세 사람의 이야기로 진행된다. 화가, 요리사, 이발사 등이다. 화가가 하는 일은 대통령의 초상화를 그리는 것이고, 요리사는 자신의 실력을 발휘하여 맛있는 요리를 대접한다. 당연히 이발사는 머리를 깎아주고, 면도를 해주고, 코털을 정리해준다. 이들은 각 분야에서 나름대로 인지도와 능력을 가지고 있다. 혁명을 위해 몸을 바치는 인물들이 아니라 단지 자신들의 직업에 충실할 뿐이다. 그런데 쿠데타로 정권이 바뀌면서 잠시 그들에게 위험이 닥친다. 새 정권의 수장인 두목이 잠시 동안 이들을 감금한 것이다.  

 

 이들이 감금되는 과정에서 당연히 폭력이 행사되었다. 정권을 잡기 위해 무력과 살인이 동원되었고, 그들의 주변인들이 살해되었다. 그들은 다행스럽게 살아남았다. 이제 이야기는 이 세 남자의 과거 속으로 들어가서 현재와 미래의 그들을 보여준다. 화가가 무명으로 있다가 우연히 화장실을 찾아온 아내와 사랑에 빠져 결혼하고, 그녀의 후광으로 대통령의 전속 화가가 되어 가난의 굴레를 벗어난다. 요리사는 이혼한 아내가 있고, 그의 바람기에 아내는 정신병원에 갇힌다. 그의 딸은 아버지를 꼭 닮았고, 남자들에게 인기가 많다. 이발사는 멋진 형이 독재자의 하수에게 죽은 후 복수를 꿈꾸지만 현실에 안주하고, 오히려 대통령을 위해 봉사한다.   

 

 2부에선 이 세 사람과 관련된 여자들이 등장하여 이야기를 끌고 간다. 화가의 아내, 요리사의 딸, 이발사의 형의 애인이 화자다. 그녀들의 삶은 남자들이 생각한 것과 분명히 다르다. 아내는 남편과 멀어지려고 하고, 자신의 어린 시절 받지 못한 엄마의 애정으로 결핍을 느낀다. 요리사의 딸도 역시 아버지의 바람기와 엄마의 정신병으로 쉽지 않은 삶을 살고 있다. 두목의 아내이자 이발사의 형의 애인이었던 그녀는 이발사의 과거를 떠올려주고, 현재를 다시 돌아보게 만든다. 이 과정에서 작가는 단순히 현실만 그리는 것이 아니라 건조하면서 사실적인 문장으로 이들의 삶 뒤에 숨겨진 사실을 들여다보게 만든다.   

 

 3부에선 다시 화가, 이발사, 요리사가 다시 화자로 나선다. 그리고 이들은 자신을 둘러싼 삶의 냉혹함과 부조리와 절망과 권력에 대한 욕망을 표출한다. 앞의 작업들이 깔아놓은 단서들로 예측했던 것들이 하나씩 사실로 드러난다. 혁명이라 믿고 싶었던 쿠데타가 결국 다시 독재자의 이름만 바뀐 것이나 사랑이란 이름 뒤에 숨겨진 잔혹한 진실과 아픔이나 과거에 결코 용기를 내지 못한 행동이 단숨에 벌어지는 것 등이 갑작스럽고 순식간에 벌어진다.   

 

 

 모두 여섯 명의 화자가 돌아가면서 상황과 현실을 설명한다. 짧게 과거가 요약되고, 현실의 삶이 드러나고, 놀랍고 추악한 진실이 밝혀지는 순간 파멸이 다가온다. 그 파멸 속에서 또 다른 권력의 욕망이 피어난다. 마지막 문장에서 “양심의 가책은 오래가지 않았다”(237쪽)고 했을 때 양심이란 얇은 껍질 뒤에 숨어 있던 욕망이 껍질을 깨고 나온다. 이제 권력은 욕망과 손을 잡고 또 다른 독재자의 탄생을 낳는다. 지독히도 잔인한 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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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일
오츠이치 지음, 김수현 옮김 / 황매(푸른바람) / 200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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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더위 때문인지 요즘 가벼운 책을 선호한다. 두께가 얇다면 더 좋다. 그러던 중 나의 앞에 턱하니 나타난 오츠 이치의 <베일>은 딱 맞는 선택이다. 커지 않은 판형에 많은 글이 실려 있지 않고, 212쪽에 불과하다. 한 번 잡으면 단숨에 읽기 좋다. 뭐 가끔 많지 않은 분량이지만 머리가 쥐나는 책이 있지만 이 소설은 쑥쑥 진도가 나간다. <너 밖에 들리지 않는다> 이후 처음으로 읽지만 전혀 낯설지 않다. 작가의 지명도에 비해 나의 두 번째 시도는 상당히 늦었다. 

 

단 두 편의 이야기가 실려 있다. <천제요호>와 <A MASKED BALL - 그리고 화장실의 ‘담배’씨, 나타났다 사라지다> 두 편이다. <천제요호>는 두 사람의 글이 교차하면서 진행된다. 야기와 쿄코다. 야기가 쿄코에게 쓴 편지로 시작한다. 그가 쿄코에게 받은 은혜와 감사가 바닥에 깔리고, 그의 무섭고도 외로운 과거사로 펼쳐진다. 그 과거에서 드러난 사실은 현실성이 상당히 떨어진다. 하지만 어린 야기가 겪은 그 경험과 현실은 쿄코를 통해 사실로 드러난다. 그가 왜 온몸을 붕대로 감고 다니고, 사람들의 시선을 두려워하는 말이다. 그 모든 것은 어린 시절 한 순간의 선택과 공포가 만들어낸 결과다.  

 자신도 모르게 괴물로 변해가는 인간을 통해 외로움과 공포를 다룬다. 사람이 아닌 존재로 변해가는 자신과 자신에게 호의를 베푼 소녀와의 관계는 인간이란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만든다. 오락적으로 이야기를 이어나가지만 상대방의 피와 공포와 살인을 갈구하던 그가 순간 멈칫하고 멈춘 것은 바로 이 관계를 통해 인간성을 유지했기 때문이다. 예상된 결말로 이어진 것은 조금 아쉽지만 인간임을 잊지 않으려는 야기의 노력과 낯선 사람에게 거리낌 없이 손길을 내미는 쿄코의 모습은 그 존재를 넘어서 따스함을 전해준다.  

 

 두 번째 이야기 <A MASKED BALL>은 학교를 배경으로 이야기가 펼쳐진다. 우에무라는 초등 5학년 때 탁자 위에 놓인 담배를 처음으로 피웠는데 기침 등의 반응이 전혀 없었다. 그 후 담배를 계속 피웠다. 고등학교에 와서도 계속 피웠는데 학생의 신분으로 편하게 필 수 있는 곳이 많지 않다. 그러다 찾은 곳이 약간 떨어져 있는 화장실이다. 이곳에서 편하게 담배를 피우는데 한 낙서가 보인다. 낙서하지 말라는 낙서다. 이 밑에 댓글 형식으로 낙서를 달기 시작한다. 이후 그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낙서를 한다. 재미난 놀이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 낙서에 심각한 의미를 담은 글이 적힌다. 어떻게 보면 장난일 수도 있지만 점점 규모가 커지고, 상황은 무서워진다. 작가는 이 과정을 학원탐정물과 호러를 섞어서 풀어낸다. 규칙에 대한 강박이 만들어내는 비정상적인 상황들은 역시 어느 정도 범인이 누군지 예상하게 만든다. 비록 그 존재의 정체가 명확하게 드러나지는 않지만 말이다.  

 

 이 두 소설엔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그것은 초등학교 시절 선택한 것 때문에 현재의 삶에 큰 변화가 생긴 것이다. <천제요호>가 코쿠리 상이란 놀이를 통해 육체가 점점 잠식당하고, 과격한 본능을 충동질하는 유혹과의 끊임없는 싸움과 도피가 벌어진다.  <A MASKED BALL>도 역시 초등학교 5학년 때 처음 핀 담배로 인해 화장실이라는 공간에서 낙서라는 소통이 이루어지고, 자신도 모르게 사건에 휘말리게 된다. 그리고 이 둘 모두 자신과 관련된 사람과의 대화가 제대로 소통되지 않고 일방적이다. 야기가 사나에에게 몸을 내준 후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변해가는 것이나 우에무라가 화장실 낙서로 대화하는 것처럼 보였던 것과 달리 상대방의 의지가 일방적으로 행동으로 옮겨진 것 등이다.  

 아직 오츠 이치의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는 작품을 읽지는 않았다. 처음 읽었을 때 괜찮은 작가란 생각을 했는데 어느 날 보니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환호하고 있었다. 나의 경우 아직 그 정도는 아니다. 그렇지만 언제 나도 그 환호하는 사람들의 무리에 낄지 말이다. 이번 소설이 약간의 아쉬움을 주기는 하지만 재미난 것은 분명하다. 더구나 분량도 단숨에 읽기 딱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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