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몽의 엘리베이터 살림 펀픽션 1
기노시타 한타 지음, 김소영 옮김 / 살림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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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악몽도 꿈이다. 그런데 악몽이 현실로 변한다면 어떻게 될까? 어쩌면 가벼울 수 있는 소설이 점점 무서워지는 것은 바로 악몽이 현실로 변했기 때문이다. 거기에 공간도 엘리베이터라는 한정된 곳이다. 이곳에 갇히면 벗어날 방법도 없다. 밀실 공포가 없다고 하여도 함께 있는 사람들이 평범하고 평소에 알던 사람이 아니라면 어떨까? 그들이 말하는 과거의 비밀이 드러나는 순간 평범한 사람이라면 그 불안감과 공포가 더욱 거세어질 것이다. 그리고 발생하는 예상하지 못한 사건들.  

 

 네 명이 엘리베이터에 갇힌다. 첫 번째 화자 오가와는 임신한 아내 몰래 바람을 피우는 바 레스토랑의 바텐더다. 그는 술 취한 애인을 바래다주고 오는 길에 엘리베이터에 갇힌다. 눈을 떴을 때 자신을 둘러싼 이상한 세 명의 사람들이 있다. 첫 인상은 그냥 양복을 입은 중년, 오타쿠로 보이는 안경 쓴 남자, 까만 옷을 입은 젊은 여자다. 하지만 함께 있으면서 그들이 보여주는 행동이 심상치 않다. 임신한 아내는 출산이 급하다고 남자에게 연락을 하였고, 남자는 그 전화에 급하게 애인 집에서 나온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중지된 엘리베이터에 갇혔다. 탈출을 위해 몸부림을 치고, 사랑하는 아내를 위해 같이 갇힌 사람들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이 사람들 전혀 탈출을 위해 노력하는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다. 가끔 보여주는 행동은 코믹하기까지 하다.   

 

 모두 세 사람의 악몽을 다루고 있다. 오가와, 마키, 사부로다. 악몽이 현실로 바뀌는 것은 마지막 사부로부터다. 이전 두 사람의 이야기에 많은 단서가 담겨 있지만 읽는 사람들이 그것을 알아채기는 쉽지 않다. 오히려 코믹하고, 재미난 상황극 정도로 인식할 뿐이다. 밀실에서 벌어지는 상황들이 읽다 보면 연극의 한 장면처럼 느껴지는데 이것은 작가의 이력 때문인 것 같다. 이 소설을 무대로 옮겨 연출을 한다고 해도 전혀 무리가 없을 것처럼 느껴진다. 각 등장인물들의 개성이 말이나 행동에서 잘 드러나기 때문이다.   

 

 

 사실 예전에 짧게 엘리베이터에 갇힌 적이 있다. 어릴 때였는데 큰 공포는 아니었다. 장난삼아 가끔 엘리베이터를 중지시키고 놀았던 적도 많다. 하지만 이런 상황은 나의 통제 아래에 있었다. 아니면 경비실과 연락이 닿아 금방 문이 열리곤 했다. 오히려 나를 공포에 빠지게 한 것은 절반쯤 걸친 엘리베이터의 위치다. 혹시 내가 빠져나가는 순간 엘리베이터가 작동한다면 어떻게 될까? 하는 공포가 자리잡고 있었다. 이것은 영화의 한 장면에서 받은 영향도 무시할 수 없다.  

 

 오가와의 악몽에서 가장 긴장감을 조성하는 것은 함께 탄 세 명이 자신들이 저지른 범죄를 말하는 순간이다. 좀도둑, 방화범, 유괴범에 대한 고백이 이어지는데 평범한 오가와에겐 이 상황이 정말 악몽 같다. 달아날 공간도 없고, 사랑하는 아내는 출산에 임박했다. 그런데 갇힌 공간에서 공포를 들어내기 위해 이런 진실게임을 하다니 이상하다. 공포를 들어내기 위한 진실게임이 오히려 공포를 더욱 가속화시킨다.   

 

 

 세 명의 악몽으로 진행되는 구성은 잘 짜여있다. 오가와가 갑작스럽게 갇혔고, 급하게 갈 곳 있는 사람의 심리를 잘 드러내었다면 이후 나온 두 사람은 상황을 코믹하게 만들거나 그 상황을 설명하거나 예상하지 못한 진행으로 몰아간다. 공간적 배경이 넓지 않다보니 더욱 연극의 무대처럼 느껴지고, 적은 수가 등장하다보니 이런 느낌을 더욱 강하게 만든다. 어떻게 보면 이 마지막 반전이 공정한 게임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중간에 단서를 흘렸는지 모르지만 급속하게 변하는 분위기 때문에 중간에 알기가 쉽지 않다. 그렇지만 한 번 잡으면 멈추지 않는 엘리베이터의 움직임처럼 끝까지 쉼 없이 달려간다. 그리고 분위기 반전과 스멀스멀 피어나는 긴장감과 공포를 만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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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 더스트 Nobless Club 2
오승환 지음 / 로크미디어 / 200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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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승환이란 이름을 처음 만난 것은 <가을왕>이란 판타지에서였다. 당시 상당히 재미있게 읽은 기억이 있다. 판타지지만 현대의 전술 이론을 바탕으로 이야기를 풀어내는 능력이 눈길을 사로잡았다. 다른 사람들에게도 호평을 받은 것을 보고 읽었는데 조금 아쉬운 대목이 있었지만 만족스러웠다. 그래서 다음 소설도 기대하고 있었다. 하지만 다음 작품인 <1254 동원예비군>은 읽지 못했다. 최근 나의 독서 방식이 몇 권으로 된 장편을 거의 읽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 중에 한 권으로 나온 이 소설이 눈에 들어왔다.  

 

 가까운 미래를 배경으로 한 초인적인 용병의 활약을 그린 소설이다. 단순한 스릴러라기보다 장르 복합적이다. 미래와 최첨단 군사장비들은 sf문학을 연상시키고, 라훌라로 대변되는 이진후의 활약은 무협의 절대고수를 보는 듯하다. 그래서인지 예전에 자주 읽었고, 지금도 좋아하는 장르문학의 재미를 만끽할 수 있었다. 한 번 잡으면 놓기 싫어질 정도로 재미있고, 속도감이 있다. 물론 이것은 작품의 완성도와는 별개다.  

 

 2010년 영종도에서 한 인물이 사람을 죽인다. 그는 인신 매매범이다. 라훌라는 조금도 주저함 없이 그를 죽인다. 시간은 1년 정도 흘러갔다. 라훌라는 존 이엔이라 중국계 꽃집 주인으로 살아간다. 겉으로 드러난 그의 삶은 평온 그 자체다. 가끔 그의 반응을 보면 아직도 긴장감을 늦추지 않고 있다. 그의 손님이었던 한 남자가 납치되고, 휴식을 취하던 라훌라는 잠시 기지개를 켠다. 이어 벌어지는 놀라운 활약은 보통의 스릴러 액션에선 볼 수 없는 장면들이다. 하지만 이 장면은 뒤에 나올 이야기의 조그마한 시작일 뿐이다.  

 

 라훌라가 소속된 조직은 용병회사 AEC다. 미국 CIA가 만들었지만 그 조직 자체가 너무 커버렸다. 미국 내에서도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 이 조직을 보면서 예전에 어딘가에서 읽은 전쟁대행회사들의 무시무시한 능력이 떠올랐다. 아마 거기에서 이 조직의 아이디어를 빌려온 것이 아닐까 추측해본다. 그리고 이 조직원들이 보여주는 능력은 일반 경찰이나 군사조직을 능가한다. 특히 라훌라가 개입할 때면 몇 배나 월등하다. 초인적인 능력을 좋아하지 않는 독자라면 여기에 불만이 많을 것 같다.  

 

 속도감 있게 이야기가 진행되고, 재미가 있지만 구성은 조금 허술하다. 라훌라로 대변되는 이진후의 삶이 현재와 과거를 교차하면서 그 뿐만 아니라 그 주변인들의 삶을 같이 표현하지만 뒤로 가면서 삶보다 라훌라의 개인 능력에 더 기댄다. 특히 규모를 자꾸 키우면서 아슬아슬한 긴장감이 오히려 사라진다. 과거 사랑했던 여인 수영이 죽고 난 후 그가 벌인 연쇄살인의 장면과 사연은 처절하지도 애절하지도 않다. 감정의 깊이를 드러내기보다 한 남자의 잔인한 행동만 돌출되어 보이기 때문이다. 동시에 그 속에 엮인 여인의 감정과 행동은 다른 여자들의 감정과 함께 이전 무협에서 자주 보았던 여성의 모습이라 아쉬웠다.  

  

 

 아직 노블레스클럽 시리즈를 한 권밖에 읽지 않았다. 몇몇은 낯익은 이름이고, 좋아하는 작가다. 장르문학을 예전처럼 많이 읽지 않는다고 하지만 언제나 관심을 두고 있는 나에게 이 시리즈는 주목 대상이다. 10대나 20대처럼 이런 종류의 책만 골라 읽지는 못하지만 복잡하고, 어렵고, 책이 읽기 싫을 때면 즐거운 마음으로 찾을 것 같다. 무협이나 판타지가 너무 장편이라 쉽게 손이 가지 않는데 이 시리즈는 대부분 한두 권이라 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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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머의 루머의 루머>를 리뷰해주세요.
루머의 루머의 루머 내인생의책 푸른봄 문학 (돌멩이 문고) 5
제이 아셰르 지음, 위문숙 옮김 / 내인생의책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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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숨에 읽었다. 적지 않은 분량임에도 뒷이야기가 궁금하여 계속 읽었다. 결코 밝은 소설이 아님에도 사람을 끌어당기는 힘이 대단하다. 한 소녀가 자살하기까지 자신에게 영향을 준 13명의 사람들에 대해 테이프로 녹음한 것을 바탕으로 진행한다. 테이프의 육성과 이것을 듣는 소년의 심리와 행동이 교차하면서 이야기가 흘러간다.  

 그녀가 남긴 것은 모두 7개의 테이프다. 순서가 정해져 있다. 테이프 한 면에 한 사람에 대한 그녀의 기억과 추억과 악행이 담겨 있다. 그 순서를 따라 가다보면 그녀가 자살한 이유를 만나게 된다. 왜 그녀는 자살을 한 것일까? 이 진행이 한 편의 미스터리 같다. 그리고 그녀를 좋아했던 순진한 남자 클레이의 감정은 그녀에 대한 그리움과 그녀가 보낸 수많은 신호를 새롭게 돌아보게 만든다. 그녀의 자살을 막지는 못했지만 어쩌면 그가 다른 자살을 막는데 조그마한 도움을 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을 던져준다.  

해나 베이커. 그녀는 소문으로 상처를 입는다. 늘 이런 이야기에서 만나게 되는 사소한 장난 같은 소문이 그녀를 상처 입히고 힘들게 만든다. 단순히 한 번 지나가는 정도고, 좋은 친구와 솔직하게 자신의 감정을 말했다면 이런 처참한 일이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그녀에겐 좋은 친구가 없었다. 아니 있었다. 이 소설을 이끌어가는 클레이다. 그는 해나를 좋아했다. 그렇지만 그가 그녀에게 영향력을 발휘하기에는 너무 늦게 만난 감이 있다. 이미 수많은 상처로 가슴이 너덜너덜해진 그녀가 용기를 내기엔 상처가 너무 깊었다. 오히려 마지막으로 그녀가 자신을 잡아주길 원했던 선생이 더 중요했을지도 모른다.  

이런 가정은 사실 결과론이다. 만약 우리 주변에서 이런 일이 발생하면 수많은 말이 오갈 것이다. 그녀의 나약함을 질타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고, 얼마나 힘들었으면 그랬을까 하는 동정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녀가 왜 자살을 해야 했는지와 그녀가 보낸 수많은 신호를 우리가 놓쳤다는 것이다. 솔직히 말해 누군가가 신호를 보낸다고 하지만 그것을 알아채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다. 일상은 우리를 힘들게 만들고, 그 도움을 바라는 신호를 정확하게 해석하기 위해서는 많은 노력과 이해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작정 도움을 필요한 신호로 받아들여 나서기도 쉽지 않다. 물론 이 소설을 보면 그 신호에 적극적으로 반응할 필요가 있음을 느낀다. 오해로 상대방을 번거롭게 만들지언정 최악의 상황은 막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녀의 자살에 대한 13가지 이유, 그것은 결코 즐거운 이야기가 아니다. 무심코 던진 한 마디, 불어나는 소문, 일상적인 거짓말, 이기적인 행동들, 훔쳐보기 등의 수많은 사연들이 그녀를 죽음으로 몰아갔다. 하나씩만 놓고 본다면 큰 일이 아닐 수 있다. 하지만 이런 일들이 쌓인다면 어떨까? 물론 이런 일이 쌓인다고 모두 극단적인 행동으로 옮기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가능성은 높아진다. 만약 그 곁에 좋은 친구나 대화 상대가 있어 이해해 준다면 다르게 흘러갈 수 있다.  

무겁지만 의미심장하고 흡입력이 있다. 테이프와 현실이 교차하면서 즉각적으로 반응이 일어나고, 자살의 원인을 찾아가는 과정이 미스터리 같아 속도가 빠르게 붙는다. 현재에서 본 과거의 신호를 해석하는 모습에서 나 주변 사람들이 나에게 보낸 신호 중에 혹시 이런 위험한 상상이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보게 된다. 세월이 지나면 하나의 에피소드나 추억으로 남을 수 있는 일들이 현실의 무거움과 절박함에 부딪혀 있는 사람에겐 너무나도 큰 고통이고 아픔이다. 내가 장난으로 연못에 던진 돌에 개구리가 맞아 죽을 수 있다는 속담처럼 말 한 마디에도 신중해야함을 다시 한 번 더 느낀다.  

- 서평 도서의 좋은(추천할 만한) 점   

 결코 밝은 소설이 아님에도 잘 읽히고, 우리가 사소하게 그냥 말하는 것의 최악을 연상하게 한다.  

- 서평 도서와 맥락을 같이 하는 '한핏줄 도서' (옵션)

 유령인명구조대. 자살자들이 자살하고자 하는 사람을 구하는 과정에서 자살을 다시 생각하게 한다.

- 서평 도서를 권하고 싶은 대상

 나에겐 재미지만 당사자에겐 아픔이나 충격일 수 있다는 사실을 종종 잃고 있는 모든 사람들이나 타인과의 솔직한 대화를 주저하고 있는 사람들

- 마음에 남는 '책속에서' 한 구절

 해나가 아직 살아있을 때. 그녀와 사귈 기회가 영영 사라졌나 싶어 조바심을 내면서. 혹시 무례한 말이나 불쾌한 행동을 한 건 아닌지 곱씹기도 했다. 해나에게 말을 걸기가 너무 두려웠다. 선뜻 다가서려니 가슴이 떨렸다.

 그런데 그녀는 죽었고, 기회는 영원히 사라졌다.(33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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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굴장으로 - 제139회 나오키상 수상작
이노우에 아레노 지음, 권남희 옮김 / 시공사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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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나오키 상 수상작이다. 이 소설을 선택하게 만든 것은 두 가지다. 하나는 나오키 상이고, 다른 하나는 문장에 대한 칭찬이다. 심사위원이 ‘질투가 날 정도’란 말에 과연 어떤 문장일까 궁금하였다. 이런 마음으로 시작을 하였지만 문장의 아름다움이나 간결함보다 행간에 숨겨진 감정의 파편들이 더 다가왔다. 어떻게 보면 심심한 것 같고, 부정확한 감정이지만 한정된 공간에서 벌어지는 일이기에 솔직해지기 쉽지 않은 것도 있는 것 같다.  

 

 남쪽 섬에서 1년 2개월 동안 일어난 일을 다루고 있다. 사건이 거대하거나 감정이 격하게 표현되지는 않는다. 화자인 세이는 섬 학교의 양호 선생이다. 남편은 화가로 섬에서 작업을 한다. 결혼한 지 몇 년이 지났지만 그들 사이에 아이는 없다. 둘의 사이는 좋다. 평온한 일상이 흘러가는 어느 날 신학기를 맞이하여 새로운 선생이 온다. 음악 선생 이사와다. 그의 첫 인상은 결코 시선을 끌 정도가 아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만남이 이어지면서 감정은 조금씩 자라난다. 이 감정을 작가는 결코 직설적으로 표현하지 않는다. 그녀의 행동과 사소한 변화 속에 담아낸다. 약간 격렬한 사랑을 기대했는데 그런 장면은 없다. 그런 점에서 이 소설은 조금 심심하다.  

 

 조용하고 모두가 알고 지내는 듯한 섬에서 활기차고 사건을 만드는 것은 쓰키에다. 그녀는 유부남과 사귀고 있다. 이 유부남이 한 달에 한 번 정도 그녀를 찾아온다. 자신의 감정을 솔직하게 표현하는 그녀의 행동은 거침없다. 그 남자를 기다리는 것도, 만나는 것도 그녀의 삶을 살찌워주는 것 같다. 이런 그녀의 삶을 누구도 탓하지 않는다. 어떻게 보면 개인적일 수 있지만 그녀의 삶을 그대로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 그녀를 두고 두 남자가 결투를 한 후에도 이 사건은 그냥 하나의 해프닝일 뿐이다. 그녀의 이런 솔직함은 세이의 솔직하지 못하고 숨겨둔 감정과 상당히 대조적이다.  

 

 쓰키에와 함께 밋밋한 듯한 소설에 변화를 일으키는 사람은 시즈카 할머니다. 아흔을 넘긴 듯한 나이의 그녀는 세이와 상당히 사이가 좋다. 노구지만 활기차고, 나쁜 감정 없는 독설을 내뱉는다. 이런 그녀가 병의 징조를 보이고, 입원해서는 음란한 꿈을 꾼다. 그녀가 꿈속에서 외치는 남자의 이름은 과연 그녀의 남편일까 하는 의문을 남기기도 한다. 그녀가 세이에게 마지막에 한 말을 봐서는 아닌 것 같다. 이 할머니의 역할이 하나 더 있다. 바로 세이와 이사와를 은연중에 이어주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세이가 이사와를 새롭게 인식하고 그와 대화를 하게 되는 계기가 할머니의 집에서 비가 샌 날이고, 할머니의 병원 입원임을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이사와는 소설 속에서 가장 미스터리한 인물이다. 그의 과거는 거짓과 비밀로 쌓여있다. 작가는 결코 사실을 말하지 않는다. 시즈카 할머니가 결국 죽을 것이라고 말하면서 풍기는 분위기는 어떤 특별한 사연이 있을 것 같다. 무표정한 얼굴을 가졌지만 아이들과 놀 때면 열성적인 그의 행동 뒤에 숨겨진 어떤 감정의 조각들은 이런 의심을 더욱 강하게 만든다. 그리고 그가 세이에게 가진 감정의 실체는 어떤 것일까? 그들의 마지막 만남에서 얼핏 드러나지만 확실하게 표현하지는 않는다.  

 

 터널을 파나갈 때 제일 끝에 있는 지점을 채굴장이라고 한다. 터널이 뚫리면 채굴장은 사라진다. 터널이 뚫리지 않고 계속 파면 그 곳이 바로 채굴장이다. 이 둘의 관계가 바로 이 곳에 머물러 있다. 둘 사이의 터널을 뚫어야 하지만 막혀서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다. 잔잔한 듯하면서 격렬함을 머금은 감정이 현실의 벽에 부딪혀 멈춰 선 것이다. 어쩌면 이들에게 이 시간들은 긴 인생의 한 순간 바람 같은지도 모르겠다. 뜨겁지만 결코 그 열기를 밖으로 말할 수 없는 바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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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허
스콧 스미스 지음, 남문희 옮김 / 비채 / 200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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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소설로 그의 작품 모두를 읽었다. 이렇게 말하고 나니 그가 엄청나게 많은 소설을 쓴 것처럼 보이지만 단 두 편뿐이다. 13년 전에 쓴 <심플 플랜>과 이 작품이다. 전작이 엄청난 호평과 성공을 하였고, 동시에 영화로 제작되었는데 이번 소설도 마찬가지다. 영화로도 본 전작이 원작의 재미를 제대로 살려내지 못했다고 생각되는데 이번 소설은 어떨지 모르겠다. 소설을 읽으면서 영화의 이미지를 상상했는데 몇몇 장면에선 정말 끔찍할 것 같다.   

 

 사실 초반은 조금 지루한 부분도 있다. 특별한 설명도 없고, 한정된 공간으로 들어간 그들을 둘러싼 마야 인들과 조금씩 드러나는 폐허의 비밀은 화끈하고 급속한 공포를 기대한 나를 조급하게 만들었다. 언제쯤 공포가 밀려올 것인지도 궁금했다. 작가가 은연중에 깔아놓은 장치에 의해 공포의 대상이 덩굴임을 알게 되었지만 이 덩굴이 어느 정도인지는 생각하지 못했다. 한정된 공간과 무시무시한 덩굴과의 대결은 <13일의 금요일> 같은 공포영화의 빠른 전개를 기대한 사람에겐 조금 더딘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더딘 듯한 공포가 후반으로 가면서 점점 쌓여간다. 그리고 그렇게 쌓인 공포가 인간의 감정 가장 깊은 곳을 건드리기 시작한다.  

 

 두 쌍의 미국 커플과 그리스 청년과 독일인이 마야의 유적지를 찾아간 것은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서다. 독일인의 동생이 반한 여자를 쫓아가면서 남겨놓은 지도를 따라간다. 그들에게 이 방문은 휴양지의 따분한 일상을 벗어나기 위한 소풍과도 같다. 그 장소를 찾아가는 길이 결코 무난하고 쉽지는 않지만 권태를 벗어날 기분 좋을 모험 정도로 생각했다. 하지만 이것은 그들이 엄청난 착각이다. 그곳에서 그들을 기다리는 것은 결코 벗어나지 못할 공포와 죽음이다. 그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는 이미 늦었다.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친구 파블로가 돌아오지 않는 것을 알아챈 그리스 인들이 구해주러 오길 기다리는 것뿐이다.   

 

 

 소설을 읽으면서 한 인물과 한 괴물에 빠져들게 되었다. 한 사람은 제프다. 그는 이 모험이 위험에 빠졌을 때 가장 냉정하게 대처하면서 상황을 헤쳐 나가는 인물이다. 최악의 상황을 생각하면서 다음을 준비하고, 희망을 버리지 않으면서 빠르고 정확한 행동을 한다. 처음엔 독일인 마티아스가 냉정을 잃지 않고 함께 나가는 듯하지만 곧 중요한 결정을 하는 일에서 제프가 나선다. 파블로가 다쳤고, 덩굴이 그의 다리를 먹어갈 때도 원시적인 도구를 이용해 참혹한 수술을 이끈 것도 그고, 물이 없어질 것을 대비해 오줌을 받아놓거나 비가 오면 비를 받을 도구를 준비한 것도 그다. 만약 이 팀들이 최후까지 살아남는다면 아마도 그 덕분이 아닐까 생각한다.  

 

 

 괴물은 당연히 덩굴이다. 페허에 살고 있는 이 덩굴은 정말 무시무시하다. 처음에 껍질에 있는 산성으로 사람들 피부를 태우는 것을 보고, 만지지만 않으면 되겠지 하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것은 모르고 하는 소리다. 이 덩굴은 살아 움직이고, 기생하고, 시체나 동물을 먹고, 소리를 흉내낸다. 그보다 더 무서운 것은 절대 조급하게 생명체를 공격하지 않는 것이다. 이 괴물의 능력이 하나씩 드러날 때마다 공포는 자라고 희망은 사라져간다. 마야 인들이 이 일행이 덩굴을 건드리고, 폐허에 들어갔을 때 둘러싸고 밖으로 나오지 못하게 한 것을 이해하게 된다.   

 

 소설 중간에 만약 이들이 구조된 상황을 가정하면서 영화로 만들 경우를 추측하는 장면이 있다. 실제 상황과 다르게 각자의 배역을 새롭게 만드는데 과연 실제 영화에서 어떤 식으로 만들어졌을지 궁금하다. 설마 소설 속 가정처럼 만들지는 않았겠지! 그리고 작가는 한계 상황을 만들면서 인간의 심리를 그려낸다. 전작에서도 한 인간이 무너지고 파괴되는 과정을 차근차근 보여주었는데 이번 소설도 역시 마찬가지다. 제프가 책임감과 점점 날카로워지는 이성에 기댄다면 다른 인물들은 감정에 휩쓸리고, 자신의 판단보다 타인의 판단에 의존하게 된다. 공포가 자신들 속에서 자라는 상황에서 그것을 이겨내려는 노력보다 현실에 머물면서 그냥 참아낼 뿐이다. 어쩌면 이런 장면들이 초반에 조금 몰입을 방해하지 않았나 생각한다. 읽으면서 만약 내가 이런 상황에 부딪히면 어떻게 행동할까 생각해봤다. 하지만 이런 상상들은 그 덩굴의 지닌 능력을 하나씩 알게 되면서 점점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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