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남자
베른하르트 슐링크 지음, 김재혁 옮김 / 이레 / 2009년 3월
평점 :
절판


 

<책 읽어주는 남자>로 유명해진 작가의 단편집이다. 모두 여섯 편이다. 사랑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 사랑을 가끔 나 자신이 이해하지도 동의하지도 않지만 그들 각자가 펼쳐보여주는 사랑은 우리가 삶속에서 경험할 수 있는 것들이다. 사랑은 한 길만 있는 것이 아니다. 사람마다 각각 다른 길이 있다. 그 사랑을 이해하려고 할 때 자신의 경험에 의해 왜곡되어진다. 이 소설 속 사랑을 보면서 그냥 그런 사랑이 있구나 하고 생각할 뿐이다.  

 

 <소녀와 도마뱀>은 그림 속 여자에 대한 사랑이다. 어린 시절 아버지의 서재에 걸려 있던 그림을 보고 마음을 빼앗긴 소년 이야기다. 그 그림이 좋아 몰래 서재에 들어가 훔쳐보고, 학교 숙제로 그림을 묘사하려고 한다. 이때 이것을 본 아버지가 중단시킨다. 이상하다. 혼자만 감상하려는 것일까? 소년이 청년이 되어 이 그림의 정체를 밝힌다. 유명화가의 작품이다. 왜 그렇게 궁핍한 생활을 하면서도 아버지는 그림을 팔지 않았을까? 그림을 둘러싼 비밀을 파헤치는 과정에서 만나게 되는 진실은 사랑만으로 표현하기엔 너무 무겁다. 과거의 역사로부터 넘어온 진실은 삶을 더욱 힘들게 만든다.  

 

 <외도>란 제목을 보면서 남녀의 외도에 대한 감정을 담았을 것으로 미리 짐작했다. 하지만 외도는 단순히 한 순간 벌어지는 사건일 뿐이다. 이 외도가 일어나게 된 이유를 말하는 순간 외도는 삶의 순간적 일탈로 변한다. 감정이 실리지 않은 단순한 도전이다. 이번 단편에서도 시대가 만들어낸 아픔이 전해진다. 사랑을 위해 저지른 과거의 잘못이 현재의 사랑을 아프게 만든다. 화자이자 관찰자는 이 상황에서 외도의 대상이지만 무력한 존재다. 세 남녀의 삶이 비틀거린다.  

 

 <다른 남자>는 표제작이다. 아내가 죽은 후 한 남자로부터 온 편지를 통해 아내의 불륜을 알게 된 남자 이야기다. 그가 아내를 사랑했는지 모르지만 그 아내와 아이들은 그와 함께 한 행복한 시간들이 결코 많지 않았다. 아내를 추억하고 살아가기가 그에게 충분할지 모르지만 그를 제외한 가족들에게 그는 어쩌면 낯선 존재인지 모른다. 뛰어난 업무 능력으로 사회에서 인정을 받았을지 모르지만 가족들이 바란 것은 그것이 아니다. 그가 아내의 부정을 알고 딸을 찾아갔을 때 그가 어떤 삶을 살았고, 그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 게 된다. 또 아내의 부정 상대가 보여준 거짓과 허세에 조롱하고 비웃음을 날린다. 하지만 결국 그는 알게 된다. 무미건조했던 삶에서 필요했던 것이 무엇인지 말이다.  

 

 <청완두>는 한 남자의 자아 찾기다. 그는 지붕 증축 전문가다. 이 사업이 성공하는 중에 다리 설계 공모전에 2위로 당선한다. 이 일들로 승승장구한다. 그러다 문득 그림 그리기를 그리워한다. 여기도 그는 능력을 발휘한다. 이 과정에서 그는 각각 새로운 여자들을 만난다. 첫 사업의 파트너였던 유타와 결혼을 하고, 화랑을 운영하는 베로니카와 내연 관계가 된다. 이혼을 하고 새 결혼 생활을 시작해야 하는데 쉽지 않다. 이런 상태에서 세 번째 여자 헬가를 만난다. 두 여자 사이의 고민을 그녀를 통해 해소한다. 관계가 더욱 복잡해진다. 그녀들이 요구하는 것이 점점 많아진다. 그만의 시간은 더욱 없어진다. 그는 수도자 복장으로 여행을 떠난다. 그리고 일어나는 사고. 작가는 이 과정을 통해 바람둥이 같은 남자의 성공과 삶과 사랑 속에서 자신을 찾고자 하는 한 남자의 솔직한 속내를 드러낸다. 많은 것을 가졌지만 자신만의 시간을 가지지 못한 남자 말이다.  

 

 <아들>은 중남미의 어떤 나라를 배경으로 펼쳐진다. 산만한 마음 때문에 다른 소설보다 깊이 빠져들지 못했다. 아들을 그리워하는 마음이 나에게 잘 전달되지 않는다. <주유소의 여인>도 그의 감정에 빠져들지 못했다. 여행 중 갑자기 벌어진 것인지 아니면 삶 속에 쌓여 온 것이 그 순간 터져 나온 것인지 말이다. 이 두 소설은 나중에 다시 정독을 하여야만 그 재미를 찾을 것 같다.  

 

 이 단편집은 단순한 사랑 이야기가 아니다. 시대의 상황과 역사를 같이 다루고 있다. 사람들이 현실의 상황에서 완전히 떨어져 사랑을 나눌 수만은 없다. 문장도 상당히 건조한 편이다. 쉽게 몰입하게 만들지 않는다. 감정을 깊이 있게 파헤치기보다 상황과 현실 속에 묻어 표현한다. 독일 단편을 오랜만에 읽는데 아직도 낯설다.  또 검색을 하다 보니 <사랑의 도피>란 제목으로 이전에 출간된 적이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댓글저장
 
흑소소설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이선희 옮김 / 바움 / 2007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제목에서 느껴지는 것처럼 블랙유머를 담고 있다. 처음부터 이것을 예상하고 선택한 것이지만 읽다보니 자신도 모르게 빨려 들어갔다. 대부분 그의 추리소설만 읽다 이런 종류의 단편을 읽으니 예상하지 못한 재미를 발견했다고 해야 하나? 그의 문장이나 구성을 생각하면 어쩌면 당연한 것일지도 모른다. 군살 없고 간결하면서 잘 구성된 작품들을 생각하면.  

 

 모두 13편의 단편이 담겨있다. 그 중 마음에 드는 작품도 있고, 조금은 아쉬운 작품도 있다. 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재미있다는 것이다. 특이한 능력이나 상황을 만들고 뒤통수를 때리는 마지막 반전까지 깔끔한 느낌이다. 짧은 글들에 사람들의 욕망과 심리를 잘 녹여낸 수작들을 보면서 감탄을 하고, 새롭게 해석해 낸 동화에 놀람도 느꼈고, 기발한 발상에 즐거웠다. 

 

몇 개로 묶어 소제목을 달아도 무리가 없지 않을까 하는 단편들이 있다. 문학상을 중심으로 벌어지는 작가와 편집부의 동상이몽을 다룬 것들인데 ‘최종심사’, ‘불꽃놀이’, ‘과거의 사람’, ‘심사위원’ 등이 그렇다. 반면에 ‘거대유방 망상증후군’, ‘임포그라’, ‘시력 100.0’, ‘사랑가득 스프레이’ 등은 카툰 같은 재미와 반전이 있다. 만화 같은 상상력이 뒤따라 나오는 상황과 전개로 웃음을 주지만 흑소소설이란 느낌은 좀 덜하다.   

 

 나머지 5편 중 ‘신데렐라 백야행’은 동화를 새롭게 꾸며낸 작품인데 너무 현실적이고 계획적인 방법이 가슴에 와 닿고, ‘임계가족’에선 현재 애니메이션과 결합한 산업에 의해 끌려가는 가정을 씁쓸하게 느끼게 한다. ‘스토커 입문’에선 애인의 요청에 의해 스토커를 배우는 한 남자의 모습에 쓴 웃음을 짓고, ‘웃지 않는 남자’에선 마지막 문장 때문에 헛웃음이 나왔다. 그리고 ‘기적의 사진 한 장’은 조금 밋밋한 느낌을 준다.  

 

 대충 세 범주로 묶어 말했지만 문학상을 다룬 작품을 제외하면 어느 것을 읽어도 상관없다. 개인적으로 가장 마음에 든 것은 ‘신데렐라 백야행’과 ‘임계가족’이다. 이 소설 제목과 가장 잘 어울리기 때문이다. 재미라는 측면에서 본다면 카툰 같은 내용들이 유쾌하고, 편집부와 작가들의 뒷모습을 잠시 보는 소설도 좋았다. 전체적으로 마음에 드는 작품집이고, 괴소소설이나 독소소설이 어떤 모습을 띄고 있을지 궁금해진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댓글저장
 
쇼퍼홀릭 1 : 레베카, 쇼핑의 유혹에 빠지다 - 합본 개정판 쇼퍼홀릭 시리즈 1
소피 킨셀라 지음, 노은정 옮김 / 황금부엉이 / 2009년 3월
평점 :
품절


 

뭔가에 중독된다는 것은 삶에 있어서 활력소다. 하지만 그 중독이 쇼핑이라면 어떨까? 카드를 결제하고, 새로운 쇼핑백에 물건을 담는 순간 그 기쁨은 대단하다. 그렇지만 카드 결제일에 명세서를 보게 되면 자신의 행위에 대해 한탄과 후회로 점철된다. 결코 보고 싶지 않은 카드 명세서와 독촉장. 그리고 이런 스트레스를 날려 보내기 위한 쇼핑의 악순환은 누구나 빠질 수 있다. 이 소설 속 레베카도 바로 그런 누구나 중 한 명이다.  

 

 처음 이 소설을 읽으면서 레베카의 절제할 줄 모르는 쇼핑과 현실에서 눈 감고, 숨어버리는 모습에 화도 났다. 독촉에 대응하는 그녀의 행동은 자신의 얼굴만 가리고 엉덩이를 하늘로 치켜든 동물의 이야기를 생각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이런 최악의 상황에서도 그녀의 쇼핑은 멈추지 않는다. 아니 자신의 스트레스를 풀고, 절약을 위한 당연하고 올바른 선택이라고 자신을 세뇌한다. 세일즈 프로모션에 당하는 그녀의 모습에선 나 자신도 순간 뜨끔했다. 1+1 이나 포인트 적립은 그냥 넘어가기 힘든 유혹이기 때문이다.   

 

 한때 나 자신이 굉장히 합리적으로 구매를 한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구매 형태를 좀 더 천천히 들여다보면 충동구매가 상당하다. 마트에서 음료수나 과자를 살 때, 인터넷에서 책 주문을 할 때, 가격비교 사이트에서 전자제품을 구매할 때 나름 냉정하게 판단하고 신중하게 구입한다고 생각하지만 1+1 과 포인트라는 달콤한 유혹에 넘어간 것이 한두 번이 아니다. 당장 볼 책도 아닌데 지금도 마음에 드는 작가나 책이 나오면 벌써 인터넷 서점을 들락거리면서 주문을 한다. 더 이상 둘 곳도 읽을 시간도 없지만 책은 점점 쌓여간다. 싸다는 이유로 잘 마시지 않은 음료수를 사놓고 한두 달을 보낸 것도 여러 차례다. 이런 소비 습관을 가진 내가 그녀의 쇼핑 중독을 탓하기는 조금 부끄럽다.  

 

 레베카의 이야기를 따라 가다보면 새로운 브랜드와 쇼핑 중독이 만들어내는 놀라운 효과를 직접 만나게 된다.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어느 순간 결제를 하고, 쇼핑백 가득 들고 나오는 모습은 읽는 순간 바보 같다고 느끼지만 좀 더 생각하면 주변에서 가끔 만나게 된다. 그냥 단순히 물건을 둘러보러 갔다가 최면에 빠진 것처럼 쇼핑백을 들고 나온다. 누군가의 말처럼 카드를 결제하는 순간 그 물건이 자기 것이란 기쁨을 느끼고, 그 동안 쌓였던 스트레스가 날아간다고 한다. 뭐 나 자신도 이와 비슷한 감정을 몇 차례 느꼈기에 공감한다. 그렇다고 레베카처럼 고가의 물건을 마구 사재기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조그마한 것이라도 사는 것을 멈추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이게 더 문젠가?  

 

 이야기의 진행은 레베카의 시점을 따라간다. 그녀가 느끼는 감정과 현실과 환상이 가볍게 펼쳐진다. 결코 무겁게 진행되지 않는다. 그녀의 거짓말은 어쩌면 이 소설에서 가장 재미난 대목인지도 모른다. 너무나도 뻔한 거짓말이 통하고, 혹은 그 거짓말을 알고 있다고 하여도 속아주는 척하는 사람들의 모습에서 그녀의 순진함을 만나게 된다. 그녀를 괴롭히는 금액이 많지 않는 1천 파운드 정도인 것을 생각하면 쉽게 해결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반복되는 소비 방식이 그것을 결코 쉬운 일로 놓아두지 않는다. 읽는 순간 냉정하고 객관적 시선에서 월급에서 빨리 갚으면 될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현실에서 그녀가 보여주는 삶은 그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알려준다. 경험하지 못한 사람이라면 이해하지 못할 장면들이다.   

 

 그녀의 소비 방식과 중독을 잘 이해하지 못한 초반은 조금 더딘 진행이었다. 너무 뻔한 거짓말과 반복되는 쇼핑중독은 지루한 감도 있었다. 하지만 그녀가 구석으로 몰리고, 새로운 반전이 펼쳐지는 순간 이야기는 분위기가 완전히 바뀐다. 흥미진진하게 흘러가면서 레베카의 숨겨진 매력이 발산된다. 물론 그녀의 이런 매력을 중간 중간에 작가는 다른 사람의 입을 통해 말한다. 그 매력을 충분히 읽는 사람에게 납득시킬만한 것이 아닌 것이 문제지만. 한 20대 쇼핑중독자의 삶을 통해 우리의 숨겨진 욕망을 바라보게 된다. 된장녀라고 욕할 정도지만 그녀의 어수룩하고 귀여운 행동은 재미있다. 이 시리즈의 끝에 만나게 될 그녀의 모습이 사뭇 기대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댓글저장
 
전쟁 전 한 잔 밀리언셀러 클럽 4
데니스 루헤인 지음, 조영학 옮김 / 황금가지 / 2009년 3월
평점 :
절판


 

데니스 루헤인을 처음으로 만난 것은 영화 <미스틱 리버>를 통해서다. 책으로 처음 접한 것은 <살인자들의 섬>이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이 작가의 이름을 기억하고 좋아하게 된 것은 켄지&제나로 시리즈로 첫 출간된 <가라, 아이야, 가라>다. 어쩌면 시대에 맞지 않는 이 커플 탐정이 지독한 현실의 부조리를 배경으로 탁월한 활약을 보여준다. 그 속을 들여다보면 지저분함과 더러움과 가슴 아픈 현실이 가득하다. 그래서 읽고 난 후 개운함보다 씁쓸함이 더 남는다. 

 

이 작품은 시리즈의 첫 작품이기도 하지만 작가의 처녀작이다. 처녀작에서 이런 멋진 탐정 콤비를 만들다니 대단하다. 하지만 한국에 번역된 순서는 시리즈 중 세 번째다. 시리즈의 경우 첫 작품부터 읽기를 좋아하는 나에겐 아쉬운 일이다. 그래도 나와 준 것만으로 고맙다. 보통 시리즈가 순서대로 나오다 중단되어 아쉬움과 안타까움을 남긴 작품들이 많은데 이 시리즈는 나머지 작품도 출간한다니 기대가 된다.  

 

 먼저 출간된 작품을 읽은 것이 상당히 오래되었다. 정확한 기억은 많이 퇴색하였지만 그 당시 느낀 감정들과 이 시리즈 첫 권에 대한 기대는 아직도 남아있었다. 하지만 이런 감정과 기대보다 새로운 정보들이 더 기뻤다. 이 커플 탐정이 어떻게 연결되었는지와 켄지의 과거가 놀라운 정보를 제공하면서 신선하게 다가온 것이다. 덕분에 왠지 모르게 최근 미국 할리우드가 시리즈의 기원으로 돌아가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현실을 떠올려주었다. 순서대로 읽지 못한 아쉬움이 단숨에 날아간 것이다.  

 

 이번에도 켄지가 사건을 받아온다. 이 콤비의 특징인 사람 찾기다. 상원의원의 사무실에서 청소부 제나가 자료를 가지고 사라진 것이다. 공식적으로 경찰에게 일을 의뢰하지 않았다는 사실에서 구린내가 난다. 사람을 찾아주고 돈을 받는 탐정일이 본업이니 거절할 이유가 없다. 이 콤비는 생각보다 쉽게 제나를 찾아낸다. 그녀는 자신이 발견되었다는 사실에 놀라지만 켄지에게 시간 유예를 부탁한다. 그는 이것을 받아들인다. 다음 날 그는 그녀와 함께 은행 금고로 자료를 가지러 간다. 자료를 찾아 나오던 그녀를 향해 한 갱이 총을 쏜다. 그녀는 죽고, 그는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아 살인자를 쏜다. 그가 본업에 충실하지 않은 대가를 치룬 것이다. 그리고 그 뒤에 숨겨진 더럽고 무시무시한 진실이 드러나기 시작한다.  

 

 시종일관 작가는 위트 넘치고 유쾌하게 이야기를 전개한다. 그 바닥에 깔린 사실이 가혹하고 냉정하고 가슴 아프다 해도 이것은 변함없다. 콤비를 위협하는 적들의 행동은 단순한 위협이 아닌 사실적인 공격으로 이어진다. 거침없는 총격은 여유 있어 보이던 상황을 단숨에 반전시킨다. 전통적인 탐정 소설에서 보기 힘든 장면들이다. 미국의 현실이 어떤지 모르지만 하룻밤에 벌어지는 갱들의 전쟁은 보통 사람들이 생각할 때 다른 세계의 모습이다. 이런 상황에서 그들이 느낄 심리적 압박과 두려움은 손에 잡힐 듯 생생하다. 그런데 이 상황에서도 동료와 헤어져 집으로 돌아가는 앤지의 모습은 직장인들의 업무 후 귀가처럼 여유가 있어 보인다.  

 

 이전 작품에서도 상당히 인상적이었던 부바를 다시 만나서 반가웠다. 냉혹하고 대단히 무시무시한 인물인 그가 보여주는 매력은 역시 단순함과 순진함이다. 이 커플의 적을 죽이는데 조금의 주저함도 없지만 앤지에게 보여주는 반응은 부끄러움 많은 귀여운 소년 같다. 그리고 역시 이전부터 궁금했던 이 커플의 시작을 알 수 있어 좋았다. 대단한 운동능력을 가진 그녀가 매 맞는 아내였다는 사실도 놀랍지만 그 기간이 상당히 길다는 사실은 더욱 놀랍다. 켄지의 표현을 빌리면 그녀는 남편의 현재를 보는 것이 아니라 과거의 영광에 사로잡힌 것 같다. 그 환상이 언제 깨어질지는 모르지만.  

 

 또 하나 놀라운 정보가 있다. 켄지의 아버지에 대한 것이다. 소방 영웅이었다는 사실보다 대단히 권위적이고 독재자였고, 폭력을 주저 없이 휘둘렀다는 사실이다. 이 과거의 기억 중에 특히 인상적인 것은 그의 명성이 올라갈수록 집에서 보여주는 강박관념이 더 강해진 것이다. 불이 날 수 있는 어떠한 상황도 만들지 않으려는 그 모습에서 그가 지닌 공포를 살짝 엿볼 수 있었다. 하지만 어린 시절 켄지에게 남긴 상처는 평생 아픔이었다. 존경의 대상이어야 할 아버지가 그에겐 증오와 혐오의 대상이다.  

 

 책을 읽다 만나게 되는 미국의 현실은 영화나 드라마의 환상 속에서 만난 것과 사뭇 다르다. 인종차별과 그 역차별 문제가 드러나고, 아동학대와 소아성애자의 역겨운 행위와 10대 청소년들의 거침없는 총질은 놀람을 넘어 경악스럽다. 이 커플 탐정이 찾아낸 사진에서 만나게 되는 사실은 인간에 대한 믿음이 깨어지고, 왜 그렇게 행동하게 되었는지 조금은 이해하게 된다. 역시 이 시리즈는 재미나게 읽히지만 뒤끝은 씁쓸하고 가슴 저린 아픔을 남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댓글저장
 
악몽의 엘리베이터 살림 펀픽션 1
기노시타 한타 지음, 김소영 옮김 / 살림 / 2009년 5월
평점 :
절판


 

악몽도 꿈이다. 그런데 악몽이 현실로 변한다면 어떻게 될까? 어쩌면 가벼울 수 있는 소설이 점점 무서워지는 것은 바로 악몽이 현실로 변했기 때문이다. 거기에 공간도 엘리베이터라는 한정된 곳이다. 이곳에 갇히면 벗어날 방법도 없다. 밀실 공포가 없다고 하여도 함께 있는 사람들이 평범하고 평소에 알던 사람이 아니라면 어떨까? 그들이 말하는 과거의 비밀이 드러나는 순간 평범한 사람이라면 그 불안감과 공포가 더욱 거세어질 것이다. 그리고 발생하는 예상하지 못한 사건들.  

 

 네 명이 엘리베이터에 갇힌다. 첫 번째 화자 오가와는 임신한 아내 몰래 바람을 피우는 바 레스토랑의 바텐더다. 그는 술 취한 애인을 바래다주고 오는 길에 엘리베이터에 갇힌다. 눈을 떴을 때 자신을 둘러싼 이상한 세 명의 사람들이 있다. 첫 인상은 그냥 양복을 입은 중년, 오타쿠로 보이는 안경 쓴 남자, 까만 옷을 입은 젊은 여자다. 하지만 함께 있으면서 그들이 보여주는 행동이 심상치 않다. 임신한 아내는 출산이 급하다고 남자에게 연락을 하였고, 남자는 그 전화에 급하게 애인 집에서 나온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중지된 엘리베이터에 갇혔다. 탈출을 위해 몸부림을 치고, 사랑하는 아내를 위해 같이 갇힌 사람들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이 사람들 전혀 탈출을 위해 노력하는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다. 가끔 보여주는 행동은 코믹하기까지 하다.   

 

 모두 세 사람의 악몽을 다루고 있다. 오가와, 마키, 사부로다. 악몽이 현실로 바뀌는 것은 마지막 사부로부터다. 이전 두 사람의 이야기에 많은 단서가 담겨 있지만 읽는 사람들이 그것을 알아채기는 쉽지 않다. 오히려 코믹하고, 재미난 상황극 정도로 인식할 뿐이다. 밀실에서 벌어지는 상황들이 읽다 보면 연극의 한 장면처럼 느껴지는데 이것은 작가의 이력 때문인 것 같다. 이 소설을 무대로 옮겨 연출을 한다고 해도 전혀 무리가 없을 것처럼 느껴진다. 각 등장인물들의 개성이 말이나 행동에서 잘 드러나기 때문이다.   

 

 

 사실 예전에 짧게 엘리베이터에 갇힌 적이 있다. 어릴 때였는데 큰 공포는 아니었다. 장난삼아 가끔 엘리베이터를 중지시키고 놀았던 적도 많다. 하지만 이런 상황은 나의 통제 아래에 있었다. 아니면 경비실과 연락이 닿아 금방 문이 열리곤 했다. 오히려 나를 공포에 빠지게 한 것은 절반쯤 걸친 엘리베이터의 위치다. 혹시 내가 빠져나가는 순간 엘리베이터가 작동한다면 어떻게 될까? 하는 공포가 자리잡고 있었다. 이것은 영화의 한 장면에서 받은 영향도 무시할 수 없다.  

 

 오가와의 악몽에서 가장 긴장감을 조성하는 것은 함께 탄 세 명이 자신들이 저지른 범죄를 말하는 순간이다. 좀도둑, 방화범, 유괴범에 대한 고백이 이어지는데 평범한 오가와에겐 이 상황이 정말 악몽 같다. 달아날 공간도 없고, 사랑하는 아내는 출산에 임박했다. 그런데 갇힌 공간에서 공포를 들어내기 위해 이런 진실게임을 하다니 이상하다. 공포를 들어내기 위한 진실게임이 오히려 공포를 더욱 가속화시킨다.   

 

 

 세 명의 악몽으로 진행되는 구성은 잘 짜여있다. 오가와가 갑작스럽게 갇혔고, 급하게 갈 곳 있는 사람의 심리를 잘 드러내었다면 이후 나온 두 사람은 상황을 코믹하게 만들거나 그 상황을 설명하거나 예상하지 못한 진행으로 몰아간다. 공간적 배경이 넓지 않다보니 더욱 연극의 무대처럼 느껴지고, 적은 수가 등장하다보니 이런 느낌을 더욱 강하게 만든다. 어떻게 보면 이 마지막 반전이 공정한 게임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중간에 단서를 흘렸는지 모르지만 급속하게 변하는 분위기 때문에 중간에 알기가 쉽지 않다. 그렇지만 한 번 잡으면 멈추지 않는 엘리베이터의 움직임처럼 끝까지 쉼 없이 달려간다. 그리고 분위기 반전과 스멀스멀 피어나는 긴장감과 공포를 만나게 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댓글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