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천의 개 - 삶과 죽음의 뫼비우스의 띠
후지와라 신야 지음, 김욱 옮김 / 청어람미디어 / 200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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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인도방랑>의 완결편이란 설명에 혹했다. 물론 이것보다 후지와라 신야란 작가의 이름에 더 혹했다. 먼저 읽은 <동양기행>에서 그가 걸어온 길들과 사진은 기존에 여행서에 대한 나의 이미지를 산산조각내었다. 간결하면서도 사실적인 문장과 주저 없으면서 거친 듯한 사진은 이 작가의 다른 책을 찾게 만들었다. 그런데 <동양기행>에서 맛만 조금 본 인도의 완결편이라니 그냥 지나가기 힘들다. 그리고 사람의 시체를 먹고 있는 개의 사진 한 장은 이런 마음을 더욱 부채질했다. 물론 강한 인상도 주었다.  

 

 첫 문장과 이야기를 읽으면서 인도 여행의 진수를 만나겠구나 기대했다. 하지만 곧바로 1995년 일본 열도를 경악하게 만든 옴진리교 사건으로 방향이 틀어졌다. 정확하게는 옴진리교의 교주인 아사하라 쇼코의 개인사와 그를 둘러싼 환경을 통해 그 사건을 다시 보기 한 것이다. 이 사건에 대한 수많은 보고서와 자료가 일본에선 넘쳐났겠지만 나에게 다른 나라에서 벌어진 참혹하고 거짓말 같은 사건 중 하나일 뿐이었다. 때문에 세부적이고 핵심적인 이야기는 잘 모른다. 그렇지만 이 사건이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는 알고 있다. 이후 수많은 작가들의 작품에서 이 사건이 언급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작가는 이 사건을 내가 기존에 알고 있던 것과 다른 시각에서 접근한다. 교주 아사하라 쇼코의 어린 시절 자랐던 고장으로 가서 한때 열심히 외었던 수은 중독인 미나마타병을 통해 그와 현대 일본을 보는 것이다. 옴진리교가 왜 그렇게 국가를 부인하는 무시무시한 테러를 하게 되었는지 작가는 하나의 병을 통해서, 그리고 그가 가르침과 깨우침을 받았다는 인도의 요기를 통해 풀어낸다. 그 과정이 조금은 기대했던 내용과 너무 달라 혼란스러웠지만 그 시도와 접근 방식은 상당히 신선하다.  

 

 다섯 장으로 나누어져 있지만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첫 부분은 옴진리교 사건의 발생 원인을 찾아보는 것이고, 다음 부분은 한 독자와의 인터뷰를 통해 자신이 경험한 인도의 풍경과 삶을 보여준다. 이 부분에서 놀라운 황천의 개를 만나게 되는데 우리가 계속 주입 받고 있는 인간의 존엄성이니 하는 것이 얼마나 허구적이며 관념적인지 알게 된다. 물론 인도의 풍경이 결코 올바르다는 것은 아니다. 수사적으로 과장되어 있고, 인간 본연의 모습보다 보여지기 원하는 모습으로 변한 인간의 허상을 자신의 경험과 명상을 통해 풀어내고 있다. 

  

 

 마지막 부분은 20대 인도여행의 경험을 말한다. 인도의 할리우드라고 할 정도로 상업화되고 변질된 수행을 보여준다. 60년대 학생운동과 히피 정신이 어떻게 변했고, 그 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동양의 종교에 귀의했는지 말한다. 이 일련의 과정을 풀어내는 작가의 말을 백 퍼센트 믿는 것은 아니지만 많은 부분 동의한다. 개인이 아닌 집단으로 변한 종교의 모순을 지적하고, 그들을 믿지 않는 작가의 글들은 한두 해 인도를 다녀온 후 전문가처럼 허세를 부리는 것이 아니라 오랜 세월 삶의 경험을 통해 내화한 것을 표현한 것이다. 물론 너무 단순화한 듯한 점도 있다.  

 

 이 세 부분이 전혀 상관없는 듯 전개되지만 자세히 읽다보면 결국 옴진리교 사건과 연결된다. 미나마타병과 인도와 집단화된 요가의 풍경은 결국 현대의 굴절되고 왜곡된 현실의 파편이다. 나쁘지 않은 시도에서 만들어진 모임이 결국 종교로 발전하고, 엄청난 테러로 표출된 현실에서 작가의 과거 인도 여행 경험을 통해 깨달은 바를 풀어낸다. 그런데 이것이 결코 낯설지 않다. 인도라는 장소와 그 영성의 경험이 과거와 현재의 작가를 거쳐 표현되었기 때문이다. 기대와 달라 조금 낯설지만 다시 한 번 더 돌아봐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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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을 걷다 - 2009 경계문학 베스트 컬렉션 Nobless Club 11
김정률 외 지음 / 로크미디어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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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장르 문학을 대표하는 열두 작가의 이름을 확인하는 순간 그냥 넘어가기 힘들었다. 무협소설로 판타지로 이름을 떨치고 있는 그들이기에, 혹은 이미 무협에서 그의 작품을 보기 힘들어진 작가도 보이기에 더욱 반가웠다. 그들의 초창기 작품과 최근에 나온 작품들의 발전을 본 경우거나 처음으로 만나게 된 단편들의 경우는 상당한 기대감과 어떤 식으로 풀어낼지 호기심을 자아내었다. 결론을 말하자면 재미있었고, 대부분 만족을 주었고, 새롭게 이 작가들의 단편을 만날 수 있을까 하는 기대를 가졌다.

열두 작가의 단편 열셋이 실려 있다. 유일하게 두 편이 실린 작가는 진산이다. 아직도 기억하지만 그녀의 등단은 하이텔 무림동이다. 물론 남편인 좌백을 만나게 된 계기도 그곳이다. 얼마 전 이들의 지하서고(?)를 보았을 때 부럽고, 그들의 애정이 묻어나는 책들로 서고에 대한 나의 꿈을 다시 불태우기도 했다. 예전에 무림동에서 그녀의 작품들은 장편보다 단편이 너 낫다는 말들이 꽤 있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 자신이 무협의 단편 가능성을 그렇게 높게 보지 않았던 시기다. 이런 선입견 때문인지 그녀의 단편들이 그렇게 뛰어나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이번에 그녀의 판타지 두 편을 읽으면서 더 성숙해지고 매끄러워진 글들 때문에 그들의 의견에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이 음유시인을 주인공으로 한 권의 단편집을 내놓아도 재미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실제 읽을 때는 몰랐는데 다른 이의 지적으로 작가들의 순서가 가나다 순서임을 알게 되었다. 이 순서가 책을 읽는데 조금 들쑥날쑥한 부분도 있지만 나름대로 즐거움을 준다. 특히 김정률의 <이계의 구원자>는 자신의 특징인 이계 진입물로 지극히 남성적이면서 파괴적인 특성을 재미위주로 살려내었다. 장편은 취향에 맞지 않아 읽다가 말았는데 단편이라 부담이 없었다. 문영의 <구도>는 자객 형가를 형가의 시선이 아닌 개잡이의 시선으로 감상과 그리움을 풀어내었다. 형가 이야기의 새로운 접근이다. 민소영의 <꽃배마지>는 인간의 욕심과 이기심을 표현해내었는데 그 과정과 결말이 조금 아쉽다. 윤현승의 <인카운터>는 날로 발전하는 작가의 세계관과 문장을 발견할 수 있었다. <흑호>에서 <하얀 늑대들>로 발전한 그 결과 이번에 다시 한 번 더 확인했다. 최근에 나온 장편 소설도 관심이 생긴다.

이재일의 <삼휘도>는 사실 가장 많이 기대한 작품이다. 언제 완간될지 모르는 <쟁선계>를 기다리다 이미 지친 나이기에 단편이나마 만날 수 있다는 반가움을 주었다. 그의 필력은 말할 것 없이 매끄럽고 화자를 바꾸면서 진행하는 복수는 끝을 알 수 있지만 무협 특유의 재미를 잘 살려내었다. 이미 그의 단편집 <칠석야>에서 충분한 재미를 누렸으니 개인적으로 단편들보다 죽기 전에 <쟁선계>의 완간을 더 보고 싶다. 전민희는 항상 그녀의 첫 작품을 생각하게 한다. <룬의 아이들>을 읽으면서 1권과 끝 권의 발전과 차이를 확연히 느꼈다. 단편은 처음이다. 이번 단편 <11월 밤의 이야기>는 조금 흐릿한 풍경이라 조금 아쉬움을 느낀다. 더 흐릿하면서도 이야기를 아련하고 아프게 풀어낼 수 있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조진행의 <월아 이야기>는 꿈을 다룬 다른 이야기와 차별성이 거의 없다. 장편을 써 온 그에게 아직 낯선 모양이다.

사실 나의 20대에 좌백처럼 강한 인상을 준 작가도 드물다. 무협의 신세대 기수였던 그가 이제는 완숙한 경지에 도달했을 텐데 아쉽게도 그의 무협작품은 만나기가 쉽지 않다. 사실 절필 상태가 아닌가 생각한다. 협소한 무협시장에서 발을 뺀 것은 현실의 어려움 탓일 것이다. 진산이 로맨스 소설을 최근에 더 많이 낸 것을 생각하면 이해가 된다. 최근에 좌백이 철학을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책도 낸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런데 이번 단편은 sf와 판타지의 결합물이다. 조금 낯설다. 무협으로 다시 만날 수 있길 바란다. 이것은 나만의 바람만은 아닐 것이다. 아니면 <천마군림>이라도 빨리 완성해주길.

<앵무새는 단지 배가 고팠을 뿐이다>의 하지은은 이름도 낯설고 처음 만난다. 그녀의 장편의 이름은 만난 적이 있지만 그녀는 기억 못한다. 이번 단편을 읽으면서 한때 판타지에서 유행했던 가볍고 재미있고 톡톡 뛰는 문장들을 다시 만나 반가웠다. 다른 작품들의 성향이 어떤지도 궁금하다. 한상운은 이번에도 비열하고 비정한 강호 세계를 보여준다. <거름 구덩이>란 한 장소와 등 돌리면 칼을 꼽는 강호 현실을 극대화시켜 인간 속에 숨어 있는 어둠을 잘 표현하고 있다. 무협작가 중 단편에서 가장 빛을 발하는 작가가 아닌가 생각한다. 홍성화의 <마그니안>은 큰 기대가 없었는데 그 사랑을 표현하는 방식이 상당히 재미있다. 특히 마지막 저주에 대한 마녀의 설명은 많은 것을 생각하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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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아 2010-03-18 17: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좌백님, 이번에 교보 북로그에 새 무협 연재 시작하셨더라구요. 혹시 보셨어요? 기대중입니다.
 
링컨의 우울증 - 역사를 바꾼 유머와 우울
조슈아 울프 솅크 지음, 이종인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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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책 마지막 장에 자신의 목적을 밝힌다. “링컨이 생활하고, 고통받고, 성장하던 모습을 가능한 명석하게 보여 주자는 것”(396쪽)이라고 말한다. 그렇다. 이 책의 목적이자 저자가 계속해서 말하는 것은 링컨의 삶 속에 자리 잡은 우울증을 통해 그의 삶을 새롭게 조명하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 어떤 삶을 살았는지 보여주는 것이다. 화려한 링컨의 업적이나 전설을 기대했다면 아마 책을 빨리 덮는 것이 좋을 것이다.   

 

 모두 3부로 구성되어 있다. 그의 우울증이 어디에서 왔는지, 유머로 우울증을 맞서 싸운 그와 우울증이 그의 위대함에 끼친 영향을 주제별로 연대순으로 그려내고 있다. 시간 순으로 그의 삶을 따라가다 보면 후대에 그를 칭송하고 전설화한 수많은 이야기가 아닌 인간 링컨의 삶 속으로 들어가게 된다. 젊었을 때 사랑했던 여인 애너 메이스 루틀리지가 죽은 후 친구들이 그의 자살을 걱정했다는 일화나 우울증으로 의사에게 치료를 받았다는 사실들은 피상적이자 하나의 이미지로만 알고 있던 링컨을 새롭게 보는 계기가 되었다.  

 

 우울증. 사실 어릴 때는 이 병이 얼마나 위험한 병인지 몰랐다. 이 증상으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자살을 했는지도 몰랐다. 그러다 책이나 주변 사람들의 이야기를 통해 그 위험을 조금씩 알게 되었다. 그리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 증상으로 괴로워하고 고통스러워하는지도 알게 되었다. 가끔 역사 속 위인들이 힘든 고난과 병마를 이겨내고 위대한 업적을 이룬 것을 보았지만 직접 경험하지 못한 나에겐 하나의 에피소드처럼 느껴졌다. 그런데 이 증상이나 병에 대한 경험과 사실들을 만나면서 그 위대함을 더욱 절실하게 느꼈다. 이제 그 위대함에 한 명 더 이름을 올린다.   

 

 쉽고 빠르게 읽히는 책은 아니다. 미국의 역사에 대해 사전 지식이 있다면 좀더 흥미진진하게 읽을 수 있을 것이다. 링컨에 대해서는 어린이용으로 나온 위인전 중 일부와 전설이나 신화처럼 부풀린 이야기만 알고 있던 사람에겐 그도 우리 같은 평범한 삶을 살았다는 사실에 놀랄 것이다. 물론 그의 삶이 나처럼 평범했던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힘들고 어려운 삶을 살았다는 사실은 변함없다. 사랑에 아파하고, 자신의 삶을 잠식하는 우울증과 함께하면서 유머로 이를 승화시키고 이겨내는 장면들은 많은 것을 알려준다.  

 

 

 저자는 링컨만을 이야기하기보다 그 시대의 풍경과 삶도 같이 보여준다. 그 시절의 의학이나 사람들의 삶을 현재의 관점이 아닌 그때의 관점으로 보여주면서 현재와 달랐던 그들을 그들의 시선으로 보게 만든다. 그렇다고 현재의 시선을 없앤 것은 아니다. 기본 시각에선 변함없이 현대의 성과물을 바탕으로 깔고 있다. 다만 그 시대의 한계를 말해주면서 그를 똑바로 보게 만든다. 이것은 역사나 한 인물을 바라보는데 매우 중요하다.  

 

 책 속 많은 이야기 속에서 눈길을 끄는 대목들이 있다. 그가 성취한 위대함을 개인적 고통에 대한 승리로 보지 않고, 우울증이라는 기질로부터 자연스럽게 성취된 것으로 본다거나 그의 생애를 변모의 스토리가 아닌 통합의 스토리로 보고 이 내면의 힘이 위대한 사업의 불을 계속해서 발화시키는 기름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남북전쟁에서 양측의 공통 잘못을 인정하고 공통의 기회를 찾아야 한다고 주장하며 “누구에게도 악의를 품지 않고 그 누구에게나 자비를!”(352쪽)를 외친다. 이 연설문의 일부가 대중적인 표어가 되지 않고 그들이 끝없는 징벌을 바라면서 그 당시에 엄청난 후유증을 가져왔고 현재까지 그 여파를 미쳤다는 점에선 그의 암살이 더욱 안타깝게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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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컷 밀리언셀러 클럽 - 한국편 9
최혁곤 지음 / 황금가지 / 200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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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선 작가다. 제목으로 서평으로 이미 이 작품을 만났다. 한국 추리소설 시장이 갈수록 줄어드는 시점에 이 책이 나왔을 당시 많은 호평을 받은 것을 기억한다. 그래서인지 이 책을 선택하고 읽는데 주저함이 없었다. 오랜만에 읽은 한국 액션 스릴러란 점도 그냥 넘어가기 힘들었다. 물론 오래전에 나온 책이기는 하다. 나의 게으름과 수없이 쏟아져 나오는 다른 작품들 탓을 잠시 해본다.   

 

 암살자와 전직 형사의 대결 구도다. 정확히는 쫓고 쫓기는 관계라기보다 각자 자신의 삶을 그려내면서 엇갈린 시간을 맞추어간다고 해야 할 것이다. 처음 이야기의 문을 연 것은 경찰 내부의 비리로 짤린 전직 형사를 민 사장이란 사람이 사건을 의뢰하면서부터다. 그리고 장면이 바뀌어 한 킬러가 살해 대상을 쫓아 들어가 살인하는 장면으로 이어진다. 그런데 재미난 것은 이 두 장면의 시간 순서가 뒤바뀐 것이다. 암살자의 살인이 세 번째로 이어지는 현장이라면 전직 형사가 나타난 장면은 이미 세 번째 살인이 벌어진 후다. 이렇게 작가는 두 시간을 다르게 배열한 상태에서 이야기를 진행한다. 이 시간은 점점 가까워진다. 그리고 어느 한 순간 그들은 동일 시간 동일 장소에서 만나게 된다.  

 

 대결 구도인 것처럼 보이지만 각자의 목적을 위해 움직이다보니 추격으로 인한 긴장감은 약하다. 암살자의 현재와 과거를 비추어주면서 그녀의 삶의 굴곡을 드러내고, 전직 형사의 비루한 현실을 통해 경찰에서 떨어져 나와 점점 돈 벌레가 되어가는 한 인간의 삶을 들여다보게 한다. 이 과정을 작가는 장면과 시간을 바꾸면서 때로는 거칠게 토해내고, 때로는 감상적으로 표현한다. 죽이고자 하는 킬러와 왜 죽이려고 하는 지 알아내려는 전직 형사의 대결은 직접적이고 물리적인 충돌 이전에 이렇게 그들의 과거와 현재를 보여주면서 한 발짝씩 나아간다.  

 

 킬러와 형사의 대결이란 점에서 김성종의 추리소설들이 먼저 머리를 스쳐 지나간다. 읽은 지 하도 오래되어 대략적인 것만 생각나는 그 작품들이 <B컷>을 읽으면서 다시 생각난 것이다. 그 작품들을 지금 읽는다면 과연 어떨지 모르지만 한국 추리소설에서 독보적인 존재였던 그를 생각하면 이 작품에서 그를 연상한다는 것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닐 것 같다. 물론 김성종 또한 외국의 다른 유명작가들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것을 알고 있지만 말이다.   

 

 영향력을 뒤로 하고 작품 자체만 놓고 본다면 어떨까? 간결한 문장과 빠르게 바뀌는 장면들은 영화 이미지를 부각시키고, 냉정한 듯하면서 여린 킬러의 내면과 점점 자신을 파괴하는 황 형사의 모습은 각 등장인물의 성격을 잘 표현하고 있다. 만약 이 소설을 영화로 옮긴다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나만 한 것은 아닐 것이다. 어쩌면 작가가 이 소설을 구상하고 집필하면서 이것을 염두에 둔 것인지도 모르겠다. 많은 장점에서 흠이라면 마지막 장면에서 강하게 터지는 액션이나 반전 등이 없다는 것과 황 형사에게 의뢰한 목적이 너무 빨리 드러난다는 점이다. 그리고 얼마 전 읽은 책 때문인지 첫 문장을 킬러가 사람을 죽이고 속으로 삼켰던 그 말로 했으면 어땠을까 생각한다. 그 문장은 “이제 하나 남았다.”(19쪽)다. 너무 뻔한 감이 있지만 강한 인상을 주면서 킬러의 의지 혹은 감정을 드러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섣부른 기대를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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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루의 불행학 특강 - 세 번의 죽음과 서른 여섯 권의 책
마리샤 페슬 지음, 이미선 옮김 / 비채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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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이 두껍다고 느낀 것은 한 권으로 나왔기 때문이다. 만약 두 권으로 나누어 나왔다면 두껍다는 느낌은 사라졌을 것이다. 800쪽이 넘는 분량은 사실 들고 다니면서 읽기 쉬운 편이 아니다. 움직이는 지하철에서 책을 펼치고 오랫동안 읽기엔 너무 무겁다. 하지만 블루의 이야기에 빠져들게 되면 순간 나도 모르게 이 무게 잊게 된다. 그리고 그녀가 보여준 수많은 책들은 나로 하여금 부족함과 절망으로 몰아간다. 아직도 이렇게 읽어야 하는 책이 많다니 하면서. 

 

 

 3부 36강으로 나누어져 있다. 서문을 제외하고 각 강의는 필독서로 제목이 정해져있다. 원작엔 각 필독서에 대한 해설이 없는데 번역본에선 내용이 조금 요약되어 있다. 이 덕분에 내가 읽지 않았거나 그 내용을 기억하지 못하는 책들의 내용을 알게 됐다. 어떤 의미가 있냐고. 각 필독서가 각 강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모두 36권의 책을 내세우는데 이 중에서 한 권은 실존하지 않는 가상 서적이다.  하지만 이것은 이 소설 속에 나오는 수많은 책들에 비하면 정말 새발의 피다. 수많은 인용과 주석은 처음엔 한 번 찾아볼까 하는 마음을 불러왔지만 곧 포기하게 만들 정도다.  

 

 

 기본 줄거리는 어머니가 교통사고로 죽은 후 아버지와 함께 미국 전역을 돌아다니면서 살던 블루가 마지막 고등학교 학기를 맞이하여 도착한 스톡턴에서 벌어진 사건을 회상하는 형식이다. 24번이나 전학을 다녔던 그녀가 세인트 골웨이 고등학교에서 마지막 학기를 보낸다. 이 학교에서 그녀는 이전과 다른 학생들을 만나게 된다. 멋쟁이들인 그들은 그녀를 자신들의 모임 블루블러드에 초대한다. 그런데 이 모임을 은연중에 조정하는 사람이 있다. 그녀가 바로 한나 슈나이더다. 방금 전학 왔고 친구도 없던 그녀를 이 모임으로 끌어당긴 것이다. 거기에 그녀는 엄청난 미녀이기도 하다.  

 

 전반적으로 느끼기엔 미스터리가 좀 약하다. 한나의 죽음이나 그녀의 집에서 죽은 스모크의 사인을 두고 그런 요소가 있지만 책 전반에 걸친 엄청난 주석과 인용들은 지적소설로 다가오고, 그녀가 새롭게 경험하는 학창시절은 청춘소설의 모습이다. 하지만 이런 분위기도 뒤로 가면서 변한다. 음모론이 살짝 깔리면서 자살로 처리된 죽음에 의문이 드러나고, 새로운 사실들이 튀어나온다. 물론 이 과정에서도 작가의 수많은 인용과 상상력의 결합은 결코 중단되지 않는다.  

 

 쉽게 읽히는 책은 분명 아니다. 이 책에서도 자주 말해지는 <율리시즈>(제임스 조이스) 정도로 난해하거나 어렵지는 않지만 단숨에 읽히지도 않는다. 속도감 있게 사건을 만들고, 풀어내는 형식이 아니라 여기저기를 쑤시고 건들이면서 천천히 진행된다. 너무 많은 책이 인용되니 사실과 작가의 상상력이 만들어낸 것이 어떤 것인지 구분이 잘 가지 않는다. 이것은 <밤의 음모>(스모크 하비)란 가상의 책을 한 강의로 설정한 것에서도 알 수 있다. 강의 필독서니 구분이 쉽게 되지만 만약 이것을 내용 속에서 간단히 인용하고 지나갔다면 놓쳤을 것이다. 사실 그 많은 책들을 다 확인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 대부분이 우리나라에 출간되지 않았음을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블루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그녀의 박학다식함에 놀라고 주눅이 들었다. 이 소설이 지닌 매력 중 하나다. 주눅이 들 정도의 수많은 책들은 새로운 문장 구조를 만들어내었고, 복잡하게 얽힌 구성은 정말 조심조심 꼼꼼하게 읽지 않으면 놓칠 것들이 많다. 단숨에 읽다 보면 오히려 수많은 책들과 인용에 놓치는 것이 더 많을 것 같다. 문장도 결코 빨리 읽히는 구조가 아니다. 짧은 문장도 많지만 의도적으로 길게 늘인 문장과 주석들은 호흡을 길게 가져야만 제대로 즐길 수 있다. 덕분에 오랜 시간 집중해서 보면 조금 피곤을 느끼기도 한다. 그렇지만 매력적이다. 블루와 블루블러드의 관계와 행동이 낯설면서도 재미있고, 후반에 펼쳐지는 미스터리를 둘러싼 음모론과 분석은 앞에 펼쳐놓은 단서들을 다시 생각하게 만든다. 그리고 마지막 기말고사의 문제들은 작품을 정리하는 동시에 의문과 여운을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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