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들 메이커
마젠 지음, 이은선 옮김 / 문학동네 / 200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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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를 보면서 누들이란 단어보다 누드란 단어가 먼저 연상되었다. 붉은 빛 도는 표지에 왠 여자가 목욕 수건을 감고 있으니 착각을 하는 것도 당연하다. 그 때문에 이 책은 한 동안 나의 눈 밖에 났었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의 평을 우연히 읽으면서 호기심이 생겼다. 호평이 이어지고, 작가의 이력을 보면서 불쑥 읽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모두 아홉 편으로 나누어져 있다. 독립적인 이야기로도 읽을 수 있지만 앞에 나오는 두 인물인 전업 작가와 전업 헌혈자가 주고받는 대화 속에서 이야기가 만들어진다. 각각의 이야기를 읽다 보면 현실의 경계를 넘어가는 장면도 나오고, 섬뜩함을 느끼기도 한다. 시대의 모순과 비리를 은유로 풀어내는가 하면 또 직설적이면서 노골적으로 비판한다. 곳곳에 드러나는 먹이사슬 같은 관계나 인간관계는 어느 순간은 너무 냉혹하여 놀라기도 한다.   

 

 그렇게 많지 않은 분량임에도 단숨에 읽히지는 않는다. 재미가 없어 그런 것이 아니라 피곤한 나의 몸 상태와 중간 중간 끼어드는 작가의 등장이 나를 몰입으로부터 밖으로 끌어낸다. 앞의 두 사람을 표현한 <전업 작가>와 <전업 헌혈가> 편을 제외하면 모든 제목이 ‘~거나’, ‘혹은’ 이 들어가는 제목을 가지고 있다. 제목을 무심코 보면 그냥 재미난 표현처럼 느껴지지만 읽다 보면 그냥 무심코 넘어갈 수 없다. 도예과에서 대형 전기 가마를 구입해 화장로로 개조해 사업하는 그의 사연을 듣다 보면 두 모자의 묘한 관계가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는다. 이런 상태에서 한 여성 예술가의 자살극은 설마를 진짜로 변화시켜 경악하게 만든다. 이런 놀라운 일들이 다음에 한 중년 남자의 지배와 피지배의 관계 속으로 들어가면서 인간 존재에 대해 생각하게 만들고, 거리의 작가의 대필 편지에선 그 노골적인 표현에 놀라고 마지막 장면에선 웃음이 나온다.   

 

 멋진 가슴을 가진 한 여인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질투와 부러움과 방해 공작은 순진했던 가슴 큰 그녀를 혼돈 속으로 밀어 넣는다. 또 장애가 있는 딸을 버리면서 아들을 열망하는 한 남자의 수많은 시도에선 아직도 뿌리 깊숙이 자리 잡은 남아선호사상의 허상이 보이고, 수많은 시도 속에 쌓이는 부녀관계는 은연중에 강한 인상을 준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말하는 개의 등장과 강간을 구경하는 사람들 이야기로 인간 사회의 허위와 저열한 호기심과 이기주의를 절실히 생각한다.   

 

 처음 몇 쪽을 읽었을 때는 이 소설이 왜 금서로 난도질 당했는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뒤로 가면서 노골적이면서 사실적인 비판과 표현들이 그 경직된 사회에 부담이 되었을 것임을 깨닫게 되었다. 역자가 중국의 문화 대혁명과 천안문 사태를 우리의 70년대, 80년대와 비교한 것이 과연 적절한지는 논외로 하고, 각 나라 사람들의 머릿속에 트라우마처럼 자리 잡은 것은 분명한 듯하다. 개인적으로 생각하기에 표지만 바꾸었다면 더 많은 호응을 얻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만약 처음에 말한 것처럼 누드 메이커로 착각한 독자를 겨냥했다면 다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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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모 오피스쿠스의 최후
조슈아 페리스 지음, 이나경 옮김 / 이레 / 200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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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호모오피스쿠스란 단어를 보고 작가가 새롭게 만들어낸 단어라고 생각했다. 내가 책을 잘못 읽은 것이 아니라면 이 단어는 책에 나오지 않는다. 책의 원제도 ‘When we come to the end'다. 그래도 혹시 해서 검색을 했다. 나오지 않는다. 출판사에서 만든 조어가 아닐까 추측한다. 최근에 이런 신조어들이 많이 만들어지고 있으니 그냥 받아들이고 넘어간다. 그렇지만 이 단어에 대한 설명이 책에 있었다면 좋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은 있다.  

 

 사실 이 소설은 쉽게 읽히지 않는다. 책에 대한 설명 중 카프카가 나올 때 어느 정도 예상은 했다. 하지만 얼마 전에 읽은 <월스트리트 몽키>를 생각하면서 그런 종류의 이야기가 아닐까 생각했다. 이런 짐작은 몇 쪽을 읽기 전에 깨졌다. 먼저 힘들었던 것은 화자가 누군지 나오지 않는 것이다. 개개인의 이름이 나오거나 우리란 단어 속에 숨겨진 화자가 읽는 내내 궁금증을 자아내었다. 혹시 어딘가에 나오지 않을까 하고 집중을 하였지만 쉽게 그 실체를 드러내지 않는다. 만약 책을 하나하나 분석하면서 읽는다면 추측이 가능할지도 모르겠다.  

 

 배경이 되는 장소는 광고회사다. 이곳에서 일하는 직원들의 삶을 하나씩 풀어내는데 시간의 흐름을 따라가지는 않는다. 하나의 사건을 둘러싸고 다양한 시선을 그려내는 것도 아니다. 과거와 현재가 뒤섞여 나오면서 조금 혼란스럽다. 강한 개성을 지닌 등장인물들의 등장과 낯선 외국 이름은 초반에 이미지 연결에 어려움을 주기도 했다. 그럴 때면 앞에 나온 주요 등장인물 소개를 보면서 이미지를 그려본다. 이것은 뒤로 가면서 한 명 한 명 인상을 그려내는데 많은 도움을 준다. 그리고 그들의 일에 대해서는 많이 나오지 않는다. 광고회사니 당연히 멋진 카피나 광고 작업에 대한 이야기가 가득할 것으로 생각하지만 정리해고와 개인들의 신상에 더 많은 공을 들인다. 그러다보니 나의 존재는 더 뒤로 숨게 되고, 이야기는 하나의 미로 속에서 맴도는 것처럼 느껴진다.  

 

 예전에 카프카의 소설을 읽을 때도 느꼈지만 문장은 잘 읽힌다. 하지만 그것은 순간만 그렇다. 강한 집중력을 요구하고, 한순간 흐름을 놓치면 헤매기도 한다. 이야기와 이야기가 이어지고, 개인에서 개인으로 넘어가고, 소문과 진실이 뒤섞이면서 진행된다. 이것이 잘 정리되어 읽기 편하게 진열되었다면 속도감 있게 단숨에 읽혔겠지만 작가는 의도적인지는 모르지만 다시 앞 이야기를 돌아보고 연관성을 생각하게 된다. 그리고 곳곳에 심어놓은 풍자와 사실적이면서 가슴을 콕 찌르는 묘사는 고개를 끄덕이고 직장인임을 느끼게 만든다. 특히 요즘처럼 직장인의 목숨이 파리 목숨 같은 현실에선 사장실에 불려가는 그들이 느끼는 불안과 공포에 공감하게 된다. 짤렸지만 회사에 나오고, 회사로 돌아와 의자를 분해하려는 그들을 보면 남의 일처럼 생각되지 않는다.   

 

 난해하고 복잡한 이야기 속에서 흥미로운 점은 소문과 사실이다. 광고회사 대표 린의 소문이나 그들 내부에서 유통되는 소문과 사실들은 혼란을 가져오기도 하지만 한 회사에서 늘 있는 일이기에 공감 한다. 자신감을 상실하거나 자신을 잃어가는 그들이나 일이 없어 일을 열심히 하는 것처럼 창작하는 것이 실제 일하는 것보다 더 어렵다는 대목에선 희비가 교차한다. 정리해고라는 거대한 바람 앞에선 그들 모두 연약한 촛불이다. 다만 자신은 그 대상이 아니길 바라지만 언제 자신에게 불어올지 모른다. 현실적일 것 같지 않은 이야기들 속에서 현실이 더 비현실적임을 생각할 때 소설 속 등장인물들의 삶이 이상하게 생각되지 않는다. 단지 마지막까지 머리를 싸매고 고민하는 것은 화자는 누굴까 하는 호기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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츄리닝 Chewrining Vol.1
이상신 지음, 국중록 그림 / 애니북스 / 200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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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도 인터넷으로 즐겨보는 츄리닝은 나에게 웃음을 많이 준 만화다. 내가 자주 가는 사이트에 이 만화가 올라오면 항상 기대감을 가지고 보았고, 혼자서 피식 피식 혹은 넘쳐나는 웃음을 참아야 했다. 이 만화와 더불어 몇몇 작가의 작품이 큰 인기를 얻고 있는데 많지 않은 분량이기데 하루의 즐거움을 주기에 언제나 부족함이 없었다.  

 

 단행본으로 처음 이 책을 선택했을 때 다시 보면 재미있을까? 하는 의문이 있었다. 기발한 상상력과 반전을 주로 다루는 만화이다 보니 거의 대부분 본 것이라 마지막을 대충 기억하고 있다. 하지만 이 만화를 들고 보면서 그것이 단순히 기우였음을 알게 되었다. 이전에도 웃었고 지금도 웃게 되는 작품들이 곳곳에 포진하고 있었다. 간간히 터져 나오는 웃음은 약간의 우울함도 처진 기분도 모두 날려주었다. 가히 웃음 제조기라 불러도 부족함이 없을 듯하다.  

 

두 명의 남자가 작업하는 작품이다 보니 군대나 남자들만이 느낄 수 있는 소재가 많다. 여자들까지 아우르는 재미를 가진 작품도 많지만 역시 남자들이 느끼게 좋은 소재가 더 많다. 약간의 아쉬움이 들기도 하는 대목이다. 그렇다고 다른 재미가 없는 것은 아니다. 앞을 건성으로 보았다가 마지막을 보고 앞에 깔아놓은 장면을 이해하고 웃음을 터트리고, 마지막 장면에서 예상하지 못한 모습에 어떻게 저런 기발한 생각을 하였을까? 하고 감탄을 자아낸다. 많은 인터넷 만화가가 있고 각각 다른 재미와 느낌을 주지만 츄리닝 팀이 주는 재미는 놀라운 그림 실력과 더불어 꾸준함도 같이 보여준다.  

 인터넷으로 접한 만화가들이 단행본으로 나와 우리를 즐겁게 해주는데 많은 경우 이미 본 것들이 대부분이다. 가끔은 인터넷보다 그림이 작아 약간 아쉬움도 생기지만 단숨에 보는 재미가 있다. 내가 사랑하는 많은 만화가 중에 이들을 올려놓고 매일 매일 이들의 만화를 기다리는 즐거움은 아는 사람들은 모두 알 것이다. 이들의 기발한 상상력과 반전이 언제까지 계속될지 의문이지만 그래도 그들이 보여주는 것들이 즐거울 듯하다. 사랑스러운 캐릭터와 돌출적인 행동이 있는 한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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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아름다운 나라 문학동네 청소년 1
김진경 지음 / 문학동네 / 200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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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연 이 소설의 제목처럼 우리들의 나라는 아름다울까? 하루하루 쫓기듯이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아름다운이란 단어는 그냥 단어일 것이다. 나 자신도 그 아름다움을 제대로 누리지 못하고 학창시절을 보냈는데 지금의 아이들은 내 때보다 더 심한 경쟁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물론 나보다 더 많은 자유와 아름다움을 누리고 살아가는 친구들도 있겠지만 더 많은 아이들이 경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쫓기듯이 절대공부를 추구하고 있다.  

 

 

 절대공부란 단어는 책을 읽으면서 유일하게 웃었던 장면에서 나온다. 누구나 알고 있는 절대반지의 패러디다. SKY산을 오르는 골룸이 가지고자 한 절대공부, 하지만 정상에서 주어진 것은 참 잘했어요 도장. 웃음이 입가에 걸리고, 이 속에 담긴 의미들의 가슴속으로 파고들었다. 이처럼 이 소설은 우리의 교육문제에 대해 엄숙함을 벗어던진다. 물론 이 소설의 배경은 암울하다. 어떻게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는지 정말 대단하다. 아니 현실에 대한 정확한 인식에서 나온 것인지도 모르겠다. 얼마 전 세계화란 이름으로 전 지구적으로 펼쳐진 현상을 생각한다면 말이다.  

 

 첫 장면부터 충격적이다. 밤에 일어나 아침이라고 말하고, 등교하고, 출근한다. 이유는 지구 반대편에 있는 나라의 시간과 맞추기 위해서 대통령 등이 정했다고 한다. 야당은 소수당이니 거대야당이 이를 승인했다. 밤낮이 뒤바뀌었다. 이전 같으면 천지가 개벽할 일이다. 그러나 현실은 이것을 따르지 않을 수 없다. 그보다 더 놀라운 것이 있다. 학생들의 머리에 씌워진 시계모자다. 공부 잘하게 도와주는 기계라고 하는데 어떤 기계가 부작용이 없겠는가? 그것이 뇌에 작용하는 것이고, 하루 종일 쓰고 있다면. 이런 시대적 상황적 배경을 바탕으로 중3 학생들을 전면에 내세워 이 괴상한 시대를 이야기한다.   

 

 시계모자를 거부하는 아이들의 모임이란 것을 만들어 학교에서 소위 왕따를 당하는 아이들이 있다. 전교생 대부분이 착용하고 있는 시계모자를 이들은 거부한다. 나머지 아이들이 전자파에 압도되어 자신을 잃고 있는데 반해 이들은 맑은 정신을 유지하고 있다. 한때 이 모임을 만들었던 이카루스 기우는 어머니가 죽고, 고위직 아버지 자리가 위태하자 친구들을 버리고 시계모자를 썼다. 그런 그가 어느 날 강화학교란 곳으로 끌려가고, 그 후 탈출하게 된다. 여기서부터 이야기는 현실에 대한 이야기가 아닌 현실의 벽을 깨부수고 넘기 위해 변한다. 지하도시 사람들의 도움으로 자신을 괴롭히는 시계모자를 벗고, 정신을 조금씩 차리게 되지만 매일 자신을 찾아오는 미지의 존재는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그 미지의 괴물은 그 자신이다. 시계모자 때문인지 부작용을 경험하는 그의 모습은 마지막 장면을 위한 포석이자 결국 자신이 극복해야할 존재도 그 자신이란 평범한 사실을 알려준다.  

 

 300쪽에 많은 이야기를 담기는 사실 힘들다. 시대 설명도 해야 하고, 등장인물들 하나하나에 생명을 심어주어야 한다. 그러다보니 조금 허약한 전개와 진행도 있다. 하지만 이 소설이 펼쳐 보여주는 세상은 끔찍하다. 과연 현실에서 일어날 수 있을까 생각하지만 그런 생각을 무색하게 만드는 일들이 벌어지는 요즘 현실을 생각하면 가능할 것도 같다. 판타지란 외피를 둘러싸고 있지만 그 속에 담긴 이야기는 한국의 현실이기에 더 공감한다. 부분적으로 미스터리 형식을 띄고 있어 읽는 재미도 솔솔하다. 작년 촛불시위 때문인지 아니면 작가의 이전부터의 작업 연속성인지는 모르겠지만 청소년들의 행동력과 기발한 착상은 보는 이로 하여금 뿌듯함과 즐거움을 준다.  

 

 소설을 읽으면서 행동하는 청소년과 시민단체에 박수를 보내지만 학생에게 언제나 정의니 윤리니 솔선수범을 외치는 선생들이 복지부동하는 모습을 보여줘 안타깝다. 실제 현실에서도 선생들은 이미 그런 모습을 보여준다. 몇몇 행동하고 실천하고 노력하는 선생들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대다수는 현실 속에 안주하고, 방관자로, 혹은 권력에 기생하면서 살아가고 있다. 그래서인지 작가는 선생 중 한 명을 제외하곤 거의 등장시키지 않는다. 아니라고? 그럼 다행이다. 지금 한국의 현실을 보면 이 소설이 결코 판타지처럼 다가오지 않는다. 그것은 나뿐만이 아닐 것이다. 희망을 보여주지만 그 현실이 너무 가슴 아프다. 눈을 크게 뜨고, 천 개의 눈을 가진 신들이 그리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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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지 아일랜드 감자껍질파이 클럽
메리 앤 셰퍼.애니 배로우즈 지음, 김안나 옮김 / 매직하우스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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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의 모든 글이 편지나 쪽지로 이루어진 소설이다. 흔히 볼 수 있는 형식이 아니다. 이런 방식으로 근 500쪽에 달하는 소설을 재미있게 끌고 나간다는 것은 대단한 능력이다. 앞부분에 조금 적응기를 거치고 나면 재미나고 즐거운 등장인물들 때문에 그냥 빨려 들어간다. 소설 속 중심인물인 줄리엣을 비롯한 수많은 사람들의 따뜻하고 진솔한 감정과 에피소드들은 화려하지도 긴장감을 심어주지도 않는다. 그럼에도 요즘 우리가 잊고 살아가는 감성과 감정들로 입가에 미소를 띠게 하고, 전쟁이란 비극 속에 벌어진 안타깝고 감동적인 이야기로 가슴이 먹먹하고, 머릿속으론 각각 인물들의 모습을 그려보고, 건지 섬의 풍경을 상상하게 만든다.  

 

 이 소설이 나오기까지의 이야기도 흥미롭다. 작가 메리 앤 셰퍼의 첫 작품이자 유작이란 것도 있지만 언젠가 책을 쓰기를 원했던 그녀에게 “닥치고, 글을 쓰라고!” 란 친구의 말에 자극을 받아 쓰기 시작했다는 것과 건지 섬에 가서 안개 때문에 공항에 발이 묶이면서 무료함을 이기기 위해 이 섬에 대한 자료를 읽고 매혹되어 글을 썼다는 사실이다. 친구의 말 한 마디와 안개가 없었다면 아마도 우린 건지 섬과 그 섬에 사는 매력적인 인물들을 만나지 못했을 것이다. 이건 분명 우리의 행운이다.  

 

 줄리엣이 한 통의 편지를 도시에게서 받으면서 건지 섬 사람들과의 인연이 시작한다. 시대적 배경은 전후 1년이 지난 1946년이다. 줄리엣은 몇 년 간의 전쟁으로 황폐해진 나라에서 예상하지 못한 칼럼 모음집이 베스트셀러가 되면서 이름을 알린다. 우연히 그녀의 이름과 주소가 있는 책을 산 도시가 그녀에게 찰스 램에 대해 알고 싶어 편지를 쓴다. 이 한 통의 편지는 앞으로 펼쳐질 재미나고 감동적이며 가슴 아프고 사랑스러운 이야기들의 시발점이다. 두 사람의 편지 왕래는 곧 건지 섬에서 일어난 문학 동호회 감자껍질파이 클럽 탄생 비화로 이어지고, 이것은 곧 클럽 회원들의 편지로 각각의 이야기를 풀어낸다. 요즘 같은 디지털 시대에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이야기는 크게 두 가지로 진행된다. 하나는 줄리엣을 둘러싸고 일어나는 이야기고, 다른 것은 건지 섬에 있었던 과거다. 예상하지 못한 책의 성공과 그녀의 로맨스가 한 축을 이루면서 새로운 글에 대한 고민과 친구 오빠이자 출판사 대표인 시드니와의 편지 왕래는 그녀의 과거와 현재를 잘 나타내준다. 반면에 건지 섬 클럽회원과의 편지 왕래는 전쟁 때 있었던 어려움과 안타깝고 애절한 사연들이 잘 살아있다. 그 중에서도 엘리자베스의 이야기는 활기차면서도 사랑스럽고 즐겁지만 가슴 아픈 이야기로 이어지면서 가슴이 아릿아릿하다.   

 

 도시의 믿음직한 행동이나 아멜리아의 따스한 마음씨나 이솔라의 활기차고 덤벙거리는 모습들은 각각의 매력으로 즐겁게 만들어준다. 가끔 나오는 독일군과의 에피소드는 독일인에 대한 일방적인 매도가 아닌 가슴 따뜻하고 인정 많고 사랑스러운 사람들이 많았음을 보여주고, 독일군에서 자행한 수많은 악행들은 보는 이로 하여금 분노에 휩싸이게 한다. 전쟁 때문에 먹을 것이 없어 서로 고생한 사연에선 점령자와 피점령자의 문제가 아닌 생존의 문제로 다가온다. 건지 섬 주민들의 독일에 대한 반응도 집단과 개인으로 나누어져 있는데 이것을 보면서 많은 것을 생각하게 된다.  

 

 

 즐겁고 유쾌하고 재미있다. 가슴 따뜻하고 유머 넘치고 위트 있는 단어 사용은 읽는 순간 미소를 짓게 만든다. 역사 속에서 전체나 개인에게 일어난 비극적 사건들은 너무 큰 충격이고 아픔이다. 그 와중에도 웃음을 짓고, 서로를 격려하고, 다른 사람을 돕는 그들을 보면 인간이 지닌 힘을 느끼게 한다. 또 전체적인 분위기에서 풍기는 영국 여성작가들의 향기는 읽는 내내 가슴으로 스며든다. 책이 없어, 혹은 좋아서 몇 권의 책만 반복해서 읽는 그들을 보면 다독으로 책장을 채우는 나 자신을 돌아보게 된다. 건지 섬, 갈 수 없을지 모르지만 내 마음 속에 그 섬이 지금도 생생하게 살아있다. 그 섬에 살고 있는 주민들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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