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한 변화 : 미국은 왜 오바마를 선택했는가 - 가장 미국적인 인물이 밝히는 미국의 가장 감추고 싶은 치부들
뉴트 깅리치 지음, 김수진.김혜진 옮김 / 지상사 / 200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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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미국적인 인물이 밝히는 미국의 가장 감추고 싶은 치부들과 미국은 왜 오바마를 선택했는가란 표지 글은 사람의 시선을 끌기에 충분히 매력적이다. 하지만 그 매력은 거기에서 멈춘다. 저자의 약력을 살펴보았고, 혹시 자기비판이나 성찰이 충분히 있을 것으로 예상했다. 그리고 오바마를 선택할 수밖에 없는 이유도 나올 줄 알았다. 그러나 그런 내용은 없었다. 지독히 보수적인 한 정치인의 정치 주장만 있을 뿐이다.  

 

 진정한 변화란 제목에서 기대했던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 변화를 만나기보다는 일부 좌파로 매도하는 노조와 관료주의에 대한 혹독한 비판과 비난만 가득하다. 좌파를 매도하고, 관료주의를 비판하고, 기독교를 정치와 문화의 앞자리에 두려는 시도는 기독교 보수주의 입장에선 맞을지 모르지만 모든 사람이 충분히 공감하기엔 부족하게 느껴진다. 물론 그의 주장들이 모두 가치가 없는 것은 아니다. 귀족화되고, 고인 물처럼 발전이 없고, 엎드려 눈치만 살피는 노조와 관료들은 분명히 비판의 대상이 된다. 하지만 과연 저자의 주장처럼 그들만 매도하는 것으로 모든 문제가 해결될까? 아니다. 일부 정치인에게 문제를 넘기기도 하지만 그 정도나 빈도는 그들처럼 강하지 않다.  

 

 사실 이 책을 읽으면서 불편했다. 저자가 주장하는 사실들 때문에 불편한 것이 아니라 지극히 보수적인 입장에서 쓰인 글 때문에 불편했다. 이미 지난 대선의 결과를 알고 있기에, 신자유주의 경제가 어떤 파국을 낳았는지 알기에 더욱 그렇다. 그가 주장하는 신자유주의 경제와 상속세 폐지나 감세 정책은 분명히 그를 지지하는 사람들의 바람일 것이다. 나 자신도 세금을 줄여준다면 좋아한다. 하지만 그가 주장하듯이 직접세만 해당한다면 반대다. 그 부족한 세수를 메우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할지 알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나라의 상황도 종부세니 소득세를 줄이면서 부족한 세수를 다른 간접세로 메우려고 한다. 황당한 간판세 등을 도입하려고 한 사실에서도 알 수 있다. 현 정부가 이 책에 어떤 영향을 받았는지 모르지만 상당히 많은 부분 비슷한 대목이 많다.  

 

 만약 이 책의 내용을 하나씩 반박한다면 한 권의 책이 될 것이다. 그런 책이 나와 있는지는 모르지만 그만큼 많은 내용에 의문 부호를 달고 싶다. 베트남 전쟁에서 군사적 실패가 아닌 정치적 실패라고 주장하는 대목은 낯설다. 물론 정치적 실패 맞다. 하지만 군사적으로 성공했지만이란 전제조건이 의문을 가지게 한다. 이것을 다시 이라크 전쟁과 연결시킨다. 그것은 이미 대다수 사람들이 정치적 군사적으로 실패할 수밖에 없다고 한 것을 중복해서 말하는 것 이상으로 의미 없다. 잘못된 출발선에서 시작한 것은 무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저자가 중간에 이슬람에 대한 적대감을 드러내는 대목에서 더욱 두드러진다. 이슬람과의 대화와 화해를 주장하기보다 전쟁이란 단어를 더 사용한다. 무섭다.  

 

 그가 주장하는 사회보장제도인 개별화의 모습이 민간보험으로의 이동을 의미한다면 끔찍한 재앙이 될 수 있다. 관료제도 속에서 현재의 비효율적이고 문제 많은 운영에 대한 공격은 개선의 노력이 필요하다. 하지만 과연 그가 주장하듯이 개별화되고 민간으로 이앙되었을 때 과연 그 수혜자가 빈민층이나 중산층이 충분히 그 혜택을 누릴 수 있을지 의문이다. 많은 사회보장제도 연구가들이 미국의 현 의료보험제도가 재앙이라고 말하는 현실에서 말이다.   

 

 뒤표지에 ‘너무도 미국적인 우리나라’란 단어가 눈에 들어온다. 이것은 다시 ‘미국은 왜 오바마를 선택했는가’란 문구와 연결된다. 출판사의 의도가 저자의 주장을 옹호하려는 것인지 아니면 지독한 은유인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한 나라의 유력한 정치인이 보는 시각이 이렇다면 그가 제목에서 말하고 계속 주장한 ‘진정한 변화’는 힘들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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앱솔루트 바디 크로스로드 SF컬렉션 2
박민규.배명훈 외 지음 / 해토 / 200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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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한국 장르 문학 단편집이 꾸준히 나온다. 상당히 고무적인 현상이다. 장르문학이 한때의 호기심 정도로 치부되는 현실에서 이런 꾸준함은 분명히 어느 순간 빛을 발할 것이다. 이 말은 바로 아직 그 빛을 발할 정도로 탁월함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물론 가끔 탁월한 작품들이 나와 가슴을 두근거리게 하지만 꾸준함을 유지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무협이나 판타지나 추리문학의 경우는 어느 정도 궤도에 도달했다고 느끼지만 SF는 어떨까? 몇 권의 책에서 재미나 가능성을 발견하였다. 그러나 그 전반적인 수준은 아직 부족하게 느껴진다.   

 

 

 이 책에 글을 올린 작가 몇몇이 활동하는 웹진 거울은 사실 환상문학 전문이다. 박민규, 서진의 경우는 장르소설가도 아니다. 물론 그라고 SF를 쓰지 말라는 법은 없다. 이런 배경을 두고 생각하면 이 소설집을 단순히 SF컬렉션이라고 이름 붙이는 것은 너무 광범위한 분류가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들기도 한다. 물론 세계적인 SF 작품을 읽다 보면 이와 유사한 작품들이 나오기는 한다. 경계가 모호한 경우가 많은데 이렇게 광의로 묶은 것은 아마도 척박한 한국 SF계의 현실을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전반적으로 이 책에 실린 단편들은 일정한 수준에 올라있다. 박민규의 작품 <굿모닝, 존 웨인>은 너무 암울해서 그 유머가 웃음보다 허무함을 느끼게 하고, 서진의 <우리 반에서 양호실까지의 거리>는 현실과 가상공간을 엮어서 호러 분위기를 잘 연출했지만 흡입력이 조금 딸려 충분한 재미를 느끼지 못했다. 표제작 <앱솔루트 바디>는 재미난 설정과 전개를 보여주는데 장편으로 발전시키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든다. 완전체가 된 주인공과 그들 좇고 좇기는 사람들과의 대결이 상당히 흥미로울 것 같다.  

 

 송경아의 <우리 사랑 이야기>는 유전자 조작으로 만들어진 아이돌의 독백으로 진행되는데 그 사랑이 애절하고 절실하게 다가오지는 않는다. 류형석의 <어떤 미운 오리 새끼의 죽음>은 외모지상주의에 대한 비판이 정해진 궤도 위에서 움직이며 아쉬움을 준다. 갑작스런 테러리스트의 돌출은 긴장과 재미를 반감시킨다. 은림의 <환상진화가>는 많은 것을 생각하게 만든다. 이전에 읽은 <할머니 나무>에서 보여준 이야기꾼으로서의 재능이 이번에도 유감없이 발휘된다. 배명훈의 <조개를 읽어요>는 사실 조금 실망이다. 이전에 보여준 그의 다른 작품에 비해 소품이기도 하지만 산만한 느낌을 준다. 다른 작품집에서 그의 소설을 읽고 얼마나 큰 기대를 가졌던가! 기대가 컸기에 실망도 큰 것인지 모르겠다.  

 

 박애진의 <집사>는 집사 역을 하는 로봇의 감정이 상당히 돋보인다. 의도적으로 강하게 노출시키기보다 잔잔하게 감정을 깔아가는 것이 마음에 든다. 이준성의 <고래의 꿈>은 사랑이야기다. 시공간을 초월하는 빛고래를 잡으려는 우주선을 중심으로 한 남자의 사랑을 노래한다. 영원히 피터팬이고자 하는 시몬스의 욕망이 눈길을 끈다. 유서하의 <플라스틱 프린세스>는 광기를 어떻게 읽어야 할지 난감하다. 왜 그렇게 자신을 손상하여 몸을 바꿔야 했는지 명확한 이유가 없다보니 몰입하기가 더 힘들다. 내가 놓친 것인가? 박성환의 <꿈의 입자>는 꿈이 존재하지 않는 세계에서 꿈을 꾸는 소년을 이야기한다. 이야기를 풀어가는 과정이 흥미를 불러오지 못하고 뒤로 가면서 꿈과 현실이 뒤섞이면서 혼란만 가중시킨다. 좀더 장면을 분할하여 진행했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정희자의 <지구의 아이들에게>는 역사에 대한 은유다. SF라는 형식을 빌려서 강자의 역사는 어떻게 왜곡되는지 보여주는데 그 힘을 끝까지 잃지 않았다.   

 

 

 서문에서 김탁환 씨가 ‘이 소설집은 현재 한국 SF의 가능성과 한계를 동시에 품고 있다.’하여 의문을 가졌다. 하지만 지금은 이 말에 동의한다. SF보다 판타지에 가까운 작품이 실려 있고, 좀 더 세련되거나 힘 있는 이야기가 부족하고, 미래를 그려볼 수 있는 작품이 드물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작품집이 계속 나온다면 더욱 좋은 작품들이 쏟아져 나올 것이다. 그날을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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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카 와오의 짧고 놀라운 삶
주노 디아스 지음, 권상미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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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kg이 넘는 뚱보에 잘 생기지도 못한 오스카의 삶을 따라가면 놀라운 이야기와 만나게 된다. 그가 어렸을 때는 좌우에 여자 아이들이 있었다. 하지만 곧 예쁜 여자애가 그에게 선택을 강요하고, 한 여자애를 차버린다. 그 후 그도 그 여자에게 차인다. 이후 그는 단 한 번도 여자에게 관심의 대상이 되지 못한다. 아니 그의 외모나 행동은 관심의 대상이다. 다만 남성으로 친구로 관심을 받지 못할 뿐이다. 이런 그에게 뛰어난 미모를 자랑하는 어머니와 누나가 있다. 이 세 명의 가족을 중심으로 이야기는 펼쳐진다. 그리고 도미니카 현대사와 맞물려 돌아가면서 다양한 이야기와 분위기를 보여준다.  

 

 이 소설에서 가장 매력적인 인물은 역시 오스카다. 이야기의 화자로 등장하는 유니오르는 대단한 바람둥이다. 그의 행적은 반대로 오스카의 지리멸렬한 연애사와 비교가 된다. 하지만 오스카의 대단히 오타쿠적인 삶은 우리가 오덕후라 부르던 그 모습 이상이다. 책을 읽으면서 만나게 되는 수많은 판타지, sf 소설과 영화들은 조금 아는 척하는 나조차 낯선 작품으로 가득하다. 물론 미국 코믹스를 제외하고 말한다. 미국 코믹스는 최근에야 조금 나왔지 그 전에는 출판 자체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런 작품들을 소재로 사용하면서 문장을 만들고, 오스카의 삶을 표현하는데 읽다보면 주석이 없었다면 무슨 소린지 전혀 모를 뻔했다. 그만큼 오스카의 삶을 형상화하는데 그 장르문학 등이 강한 영향을 끼친다는 뜻이다.  

 

 오스카와 달리 그의 누나 룰라는 뛰어난 미모를 가지고 있다. 선천적인 몸매가 대단하여 늦게 시작한 육상에서 빛을 발할 정도다. 그녀의 다리 근육은 사람들의 시선을 자연스럽게 끌어당긴다. 그녀도 어린 시절은 결코 순탄하지 않다. 엄마와의 충돌과 대립은 일반 가정에서 보게 되는 정도를 초월한다. 이런 그녀의 삶은 그 엄마의 과거와 묘하게 맞물려 있다. 엄마 벨리가 10대에 보여준 사랑에 대한 환상과 열정이 재현되는 것 같기 때문이다. 다르게 부각되는 점은 엄마는 멋진 가슴을 가졌다면 룰라는 절벽이란 것 정도랄까. 이 두 여자의 대립과 과거는 시간 속에서 다르게 해석되어진다.  

 

 책을 읽으면서 그냥 지나갈 수 없는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트루히요 시대의 도미니카 현대사다. 전혀 모르는 도미니카 현대사지만 책 속에 나오는 정보들은 과거 우리의 암울했던 현대사를 능가한다. 한때 박정희가 보냈다는 채화사도 보이지만 그 독재와 압재와 폭력은 상상을 초월한다. 이 부분을 읽으면서 우리의 과거사도 다른 사람들의 눈에게 이렇게 보이지 않을까 하는 의문이 생긴다. 작가는 이 시대와 공간을 배경으로 이 집안의 현대사를 재조명한다. 그 과정에서 만나게 되는 사랑과 배신과 행복과 아픔은 나를 당겼다, 놓았다 한다.  

 

 사실 단숨에 읽으려고 마음먹었다. 근데 어느 순간 진도가 잘 나가지 않았다. 중간에 화자가 바뀌고, 오스카가 비중이 줄면서 약간 혼란스러웠다. 하지만 다시 책을 펼쳐 읽다보니 어느 새 마지막 장에 도달했다. 적응을 한 후 펼쳐지는 이야기는 정말 매력적이다. 도미니카의 현대사는 새로운 정보와 놀라운 사실을 알려주고, 오스카의 변신은 눈을 번쩍 뜨게 한다. 또 좀 더 검은 몸을 지녔다고 냉대를 받는 그들을 보면서 비백인의 자기혐오는 혼혈로 가득한 그 나라에서조차 사라지지 않고 그 영향력을 행사함을 알 수 있다. 이 소설의 많은 부분이 암울했던 한국 현대사와 유사한 곳이 보이는데 많은 점을 생각하게 한다. 오스카 와오, 그의 짧지만 놀라운 삶은 빛의 스펙트럼을 통과하여 우리에게 다양한 빛깔의 이야기를 전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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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도가와 란포 전단편집 3 - 기괴환상
에도가와 란포 지음, 김은희 옮김 / 도서출판두드림 / 200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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란포의 소설을 처음 접한 것이 통신을 통해서가 아닌가 생각한다. 그 당시 통신에 번역된 단편소설들이 올라오곤 했는데 그때 읽은 작품이 <인간의자>다. 당시 기발한 착상과 진행과 반전이 강한 인상을 남겼다. 그 후 <음울한 짐승>에서 다시 만났는데 그때도 역시 감탄했다. 이번을 포함하면 세 번 읽게 되는데 길지 않은 분량에 담겨 있는 이야기가 늘 색다르게 다가온다. 늘 단편으로만 읽었기 때문인지 그의 작품은 나의 취향과 잘 맞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후기를 보니 그 이유가 있었다.  

 

 이번 단편집엔 22편이 실려 있다. 이 중에서 2편(<공기사나이>, <악령>)은 미완성작이다. 이 두 편을 읽으면서 갑자기 끝나기에 이상하다고 생각했는데 완성하지 못한 작품이었다. 두 작품은 모두 초반에 흥미를 불러오지만 끝부분이 갑자기 변하고 의문을 달게 한다. 장편으로 발전했다면 어땠을까 잠시 생각해보지만 아마 단편처럼 매력적일 것 같지는 않다. 차라리 단편으로 잘 마무리했다면 더 좋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사실 이 모든 작품이 마음에 드는 것은 아니다. 전단편집이라고 하지만 실제 이 단편집에 실린 것은 란포의 소설 중 일부일 뿐이다. 란포 전집이 18권임을 생각하면 극히 일부만 실린 것이다. 하지만 이 3권들은 란포의 대표작일 수는 있다. 먼저 나온 1권에 실린 단편들이나 아직 나오지 않은 2권이 본격 추리를 다루고 있다면 이번 3권은 제목 그대로 기괴하고 환상적인 이야기로 채워져 있다. 본격추리에서 추구하는 트릭이나 범인은 누구? 같은 것에 집착하지 않고, 상황과 분위기로 독자의 시선을 끌어당긴다. 한 번 그 괴이한 분위기에 빠지면 정신을 차릴 수 없다.  

 

 단편들을 읽으면서 기이하고 환상적인 이야기에 빠져들지만 어딘가에 본 듯한 느낌을 많이 받았다. 물론 이것은 이미 읽은 작품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쌍생아>처럼 츠카모토 신야 감독에 의해 영화로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제목이 같아서 혹시 했는데 그 분위기와 전개로 어느 정도 확신을 가졌고, 검색으로 확인하였다. 이 단편을 보면서 오히려 옛 영화의 기억을 되살리며 더 많이 이해했다면 조금 이상할까!  

 

 <인간의자>를 비롯하여 강한 인상을 주는 몇 작품이 있다. <붉은 방>, <고구마벌레>, <방공호>, <메라 박사>, <거울지옥>, <벌레> 등이다. 앞의 두 작품과 마지막 두 작품은 이미 다른 곳에서 읽었지만 시선을 끌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특히 <붉은 방>은 이야기를 풀어가면서 마지막에 터트리는 반전이 절묘하고, <벌레>는 사랑이란 이름으로 저지른 살인과 집착과 광기를 시간의 흐름에 따라 점점 더 강하게 그려주면서 시선을 끌었다. <방공호>는 한 남자에게 남자와 여자가 하룻밤의 경험을 이야기하는 방식인데 앞에 이야기한 남자의 환상이 무참하게 무너지는 뒷 여자의 이야기가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죽을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만난 한 남녀의 하룻밤 이야기가 이렇게 달라질 수 있다니 대단하다. 문득 원효대사의 고사가 생각나는 것은 왜일까?  

 

 <메라 박사>와 <거울지옥>은 거울이란 소재가 눈에 들어온다. 요즘은 너무 일상적이라 느끼지 못하지만 한때는 거울이 지닌 마력에 많은 사람들이 휘둘렸다고 한다. 거울을 소재로 한 영화나 소설이 계속 나오는 것을 보면 나를 비추어주면서 나와 반대로 있는 거울 속 존재는 참으로 매력적인 모양이다. 가끔 동양 판타지에서 거울은 악마를 물리치는 도구로도 사용되는데 이 점도 기억할 대목이다. 특히 <거울지옥>에서 거울이 비추어주는 자신의 다양한 모습에 빠지고 만 남자의 일생은 정말 기묘하다. <메라 박사>의 살인 방법은 과연 이것이 가능할까? 생각하지만 달빛과 음산한 분위기가 잘 조화를 이룬다면 어떨까? 기이하고 절묘한 착상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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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년수 작가정신 일본소설 시리즈 21
오기와라 히로시 지음, 이규원 옮김 / 작가정신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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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흔히 이런 이야기를 자주 듣는다. “내 인생을 책으로 엮으면 끝도 없어.” 백년을 살지 못하는 인간이 이러니 천 년을 산 나무는 얼마나 많은 이야기를 품고 있을까? 이 소설의 배경이자 이야기의 시작점인 녹나무는 그 긴 세월만큼 수많은 사연을 담고 있다. 작가는 이 사연들을 과거와 현재를 적절히 섞어 다양한 분위를 연출하면서 펼쳐 보여준다.   

 

 모두 8편의 이야기가 있다. <맹아>에서 <낙지>로 이어지는 그 과정을 따라가다 보면 한 특정한 지역과 시간을 두고 벌어지는 사연들이 가슴으로 파고든다. 왕따를 당하던 한 소년에겐 자살을 생각하게 만들고, 죽은 연인을 잊지 못해 오지 않을 그를 기다리고, 친구에게 전해줄 츄잉 껌을 병에 담아 타임캡슐처럼 전달하고, 자신의 분노를 표출하는 장소가 되고, 조폭이 사람을 죽이려고 마음먹고, 재혼한 부부의 새로운 사랑이 확인되고, 생각하지 못했던 할머니의 연애가 벌어진 추억이 있다. 이 이야기 하나 하나가 과거의 사연들과 맞물려 펼쳐지면서 시선을 사로잡고 생각에 잠기게 한다.  

 

 보통 고령의 나무 밑은 사람들의 휴식처가 대부분이다. 그 크기가 크면 클수록 우린 사연을 만들고, 그곳을 즐기고, 추억하게 된다. 하지만 이 거대하고 오래된 녹나무는 다르다. 이 나무에 얽힌 사연 중 가장 유명한 것은 아이들의 실종이다. 괴담처럼 퍼진 이 이야기는 소설 전체를 휘감아 돌면서 지속적으로 괴이한 분위기를 연출한다. 이상한 어린 아이가 나타나 자살을 충돌질하고, 거울 속에선 한 젊은 여자가 말을 건다. 나무의 우듬지엔 누군지 알 수 없는 존재가 불쑥 나타나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하나의 독립된 이야기로도 읽을 수 있지만 완전히 독립적이지는 않다. 작가는 직접적으로 강하게 연관성을 드러내지 않지만 지나가듯이 사연들을 말하면서 나아간다. 전체적으로 밋밋하다고 생각하는 순간 마지막 한 문장에 가슴이 따뜻해지고, 긴장감을 가지고 읽다 그 음울한 분위기에 빠지고, 조그마한 오해가 만들어내는 기분 좋은 연애사는 빙그레 미소 짓게 한다. 이 과정을 작가는 결코 과장되게 표현하지 않는다. 그러다 보니 한 권의 소설에서 긴 세월의 흔적을 맛보게 된다. 가끔 긴 세월을 다룬 소설 중 잘 된 작품들에서 만나게 되는 느낌이다. 

 

역자도 말했듯이 이번 소설은 그의 다른 작품과 분위기가 다르다. 아직 그의 작품을 많이 읽지는 않았지만 내가 읽은 작품과도 완전히 다른 느낌이다. 밝고 경쾌하고 유머러스하고 재치 가득한 전작들에 비해 이번은 조금 어둡다. 그 시작을 여는 것이 바로 한 가족의 죽음이니 어쩔 수 없을지 모른다. 그렇다고 어둡고 무겁고 암울한 것은 아니다. 빠른 장면 전환과 상황 설정으로 이야기꾼 재능을 유감없이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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