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은 고달파 1
모옌 지음, 이욱연 옮김 / 창비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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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 쪽이 넘는 이 소설을 처음 접했을 때 언제 다 읽을까 걱정되었다. 이전에 그의 다른 작품을 조금 힘겹게 읽은 기억이 있기에 이런 마음은 더욱 강했다. 하지만 이번 작품에는 그것이 기우였다. 전보다 훨씬 구수하고 몰입도가 높다. 현실과 환상이 교차하면서 중국 현대사를 녹여내는데 어느 순간 정신없이 빨려 들어갔다. 그의 입심이 최고조에 달한 것일 수도 있지만 다른 책에서 이미 경험했기에 읽기 부담이 없었는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해도 그가 풀어내는 이야기의 재미는 대단하다.

 

이야기는 1950년 1월 1일에 시작한다. 그 장소가 놀랍게도 지옥이다. 화자 중 한 명이 서문뇨는 악덕지주로 몰려 총살당해 지옥에 온 것이다. 그는 원한을 품고, 결코 자신이 나쁘지 않다고 주장한다. 수많은 지옥의 고통 속에서도 굴복하지 않는 그를 보면서 염라대왕은 인간세상으로 내려 보낸다. 그런데 환생한 것이 나귀다. 이 환생은 다시 소, 돼지, 개, 원숭이를 거쳐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는데 그 시간 속에서 자신을 둘러싼 사람들과의 인과관계를 풀어낸다. 그리고 그 시기는 중국 역사에서 가장 격동적인 50년이다. 이 시절을 거치면서 만나게 되는 삶은 많이 느끼고, 깨닫고, 고민하고, 감탄하고, 감동을 준다.

 

이야기를 끌고 가는 화자는 둘이다. 하나는 짐승으로 환생하는 서문뇨이자 남천세이고, 다른 한 명은 남해방이다. 동물인 서문뇨가 반쯤 의인화되어 이야기를 환상적으로 묘사한다면 남해방은 인간의 시선으로 이야기를 풀어낸다. 하지만 이 둘은 모두 인간의 감정을 그대로 드러내면서 삶의 여러 질곡에 부딪힌다. 서문뇨는 동물로 환생을 하는 과정에서 기억을 잊는 약을 마시지만 전생의 기억을 그대로 유지한다. 이 기억도 윤회를 거듭하면서 조금씩 지워지는데 그에 따른 그의 행동과 생각이 변한다. 나귀였을 때와 개로 태어났을 때를 비교하면 엄청나게 바뀌어있다. 이 변화는 그와 인연이 있는 사람들의 관계 속에서도 잘 드러난다. 서로 욕하고, 미워하고, 원한을 가지다가도 시간과 세태의 변화 속에 다시 새롭게 관계가 정립되는 과정은 흔히 말하는 뼈에 사무치는 원한이나 복수는 찾아볼 수 없다. 이 때문에 읽으면서 삶은 이런 식으로도 흘러가는 모양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50년.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시간이다. 이 시간 속에 나오는 수많은 사람들은 모두 강한 인연의 고리 속에 묶여있다. 그 정점에는 서문뇨라는 지주가 있다. 그의 자식과 아내들의 다른 자식들이 시대 속에 다른 사람들과 만나 엮이고 충돌하고 이해하고 욕하고 사랑하고 성장하고 몰락하는 과정이 보인다. 어떤 때는 너무 심하다 생각이 들고, 어느 순간은 어떻게 저렇게 다시 웃으면서 지낼 수 있을까 생각한다. 이 모든 사람들이 변화의 소용돌이 속에서 살아간다면 유일하게 자신을 지키며 살아가는 존재가 있다. 그가 바로 남검이다. 그의 존재는 처음엔 강하게 나오다 뒤로 가면서 비중이 줄어든다. 하지만 존재의 가치는 결코 줄어들지 않는다. 그를 괴롭힌 수많은 고난과 방해가 있었지만 대지 깊숙이 내린 뿌리는 흔들리지 않는다. 어쩌면 그의 이런 삶이 다른 사람들의 심한 굴곡과 변화를 더욱 돋보이게 하는지도 모르겠다.

 

소설 속에 재미난 이야기가 많은데 드러난 몇 가지만 말하자. 그 중 하나는 남검의 자손들의 이름이 중국 역사의 흐름을 대변하는 것이다. 그의 아들이 해방이고, 손자가 개방이다. 2000년에 태어난 증손자는 천세(千歲)다. 시대의 변화를 나타내는 단순한 이름이지만 강하게 다가온다. 다른 하나는 서문뇨가 환생한 동물들이 보여주는 기묘한 행동과 능력들이다. 그의 활약을 볼 때면 한 편의 판타지를 읽는 느낌마저 든다. 이야기꾼으로서 재능이 활짝 피어났다. 빠져들어 읽다보면 지겨움을 잊고, 전철에서 내릴 곳을 지나칠 정도다. 너무나도 방대하고, 풍부하면서 재미있어 작가가 보여준 것의 일부 밖에 표현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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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의 아이
필립 베송 지음, 장소미 옮김 / 문학동네 / 200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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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은 한 출판사의 기획에 의해 탄생했다. 그라세 출판사의 <이것은 실제 사건이 아니다> 시리즈다. 출판사 의뢰로 작가가 선택한 사건을 다루고 있다. 실제 사건을 다루고, 사건이 발생한 연도가 1984년으로 비교적 먼 시간이 아니다. 그리고 그 피해자인 부모가 살아있기에 많은 논쟁이 있었다고 한다. 소설 외적으로도 많은 말들이 있었고, 실제 부모가 본명으로 미니시리즈 제작을 허용한 기록이 있다.

 

1984년 10월 16일 네 살 아이가 실종된다. 얼마 후 아이는 강에 빠져 죽은 채 발견된다. 이 놀라운 사건을 작가는 연대순으로 재구성한다. 아이의 부모가 만나고, 사랑에 빠지고,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 키우는 과정을 먼저 보여준다. 그 후 아이가 죽은 날을 시간 순으로 정리한다. 그 시간표로 하루를 재구성하는데 명확한 답은 보이지 않는다.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고, 죽음 이후의 수많은 이야기를 풀어낸다. 그 이야기를 보다 보면 놀라운 사실들이 드러난다.

 

연대순으로 기록된 내용을 보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프랑스 경찰의 무능력이다. 범인을 잡지 못해서 무능력한 것이 아니라 그 과정에서 보여준 수많은 실수가 무능력을 나타낸다. 필적 감정을 할 때마다 다른 사람을 지적하고, 부검을 하면서 아이의 폐 속에 있는 물의 종류를 분류하지 않았고, 언론에 정보를 흘리면서 피해자들을 더욱 힘들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만약 제대로 수사를 하고, 자료를 더욱 정밀하게 만들었다면 현재 과학기술로 어느 정도 단서를 잡을 수 있었다는 사실은 아직도 죽은 자식을 가슴에 품고 사는 부부에게 큰 아쉬움이자 고통이 아닐 수 없다.

 

소설은 사실을 나열하는 것과 죽은 아이의 어머니의 고백을 교차하면서 진행한다. 먼저 드러난 사실을 이야기하고, 어머니가 그 사실을 이야기하는 방식이다. 물론 어머니의 이야기는 실제 어머니가 아니다. 작가의 상상 속에서 만들어진 어머니다. 하지만 그 글들을 읽다보면 그녀가 느낀 아픔과 고통을 느낄 수 있다. 언론과 경찰에 의해 자신의 아이를 죽인 어머니란 소리를 듣기도 한 그녀의 삶은 실제 이상으로 나락으로 떨어진다. 실제 그녀가 살인자가 아니라면 경찰과 언론이 퍼트린 이야기는 상상할 수 없는 고통을 그녀에게 주었을 것이다. 여기서도 언론의 선정적 보도에 의한 피해를 만나게 된다.

 

소설은 감정을 강하게 이입하지 않는다. 오히려 문체는 간결하고 건조한 느낌이다. 덕분에 냉정한 시선으로 그 사건을 바라볼 수 있다. 연대순으로 진행되어 사건의 추이를 알 수 있는 것도 이런 건조함에 일조한다. 하지만 그 밑으로 흐르는 사회적 분노와 부모의 좌절과 고통은 행간에 깊이 심어져 있다. 아이가 죽을 당시 조금 덜 고통스럽기를 바라는 어머니의 마음은 범인을 찾거나 범인을 아는 누군가가 알려주길 바라는 그 이상이다. 책을 읽으면서 표지를 본다. 아이가 눈 오는 날 하늘에서 떨어진다. 처음 보았을 때는 그냥 그런 느낌이었다. 그러나 책을 읽으면서 보니 다른 느낌이다. 머릿속에 차가운 강에 떨어져 고통 받는 아이가 떠오른다. 결국 현재까지 미해결 사건으로 남았다. 수많은 이야기 속에 마음속에 강한 울림을 주는 문장은 이 이야기가 사랑이야기라고 말한 대목이다. 한 아이의 죽음을 다루면서 사랑이야기라고 하다니 아이러니하면서도 강한 여운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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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색의 수수께끼 - 에도가와 란포상 수상 작가 18인의 특별 추리 단편선 밀리언셀러 클럽 90
나루미 쇼 외 지음, 유찬희 옮김 / 황금가지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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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로 읽는 에도가와 란포상 수상작가 추리 단편선이다. 출간순서대로 읽을까도 생각했는데 청색을 찾지 못해 비교적 얇은 흑색부터 읽었다. 적색에선 그래도 아는 작가들이 좀 있었는데 이번 작품선에는 읽어본 작가가 한 명도 없다. <연애 시대>의 작가 노자와 히사시도 이름만 알지 한 번도 읽어본 적이 없다. 이것은 장점이면서 단점이다. 작가에 대한 정보가 없으니 선입견 없이 읽을 수 있다는 장점과 너무 정보가 없다보니 끝까지 읽으면서도 흐름과 결말을 예측할 수 없는 단점이 있다. 이 단점이 미스터리에서 장점이 아니냐고? 보통의 미스터리라면 분명히 장점일 수 있다. 하지만 이 작품선에 실린 두 작품은 추리라고 하기엔 좀 부족하다. 그래서 읽으면서 책의 장점을 흡수하는데 방해가 된다.

 

먼저 추리소설 같지 않은 두 편을 먼저 이야기하자. <화남(花男)>은 중이염에 걸린 렌지라는 남자의 일상을 다루고 있다. 그는 연상의 아내와 그녀가 낳아온 아들과 함께 살고 있다. 이들과의 일상은 많이 다루어지지 않는다. 하지만 그들과의 관계는 왠지 모르게 거리감이 있다. 친아버지가 아니기 때문인지 아들은 어리광도 부리지 않고, 그녀는 더욱 깍듯이 그를 대한다. 그의 일상은 충실한 남편과 조금 거리가 있다. 가족을 성실하게 부양하지만 그에게 달려드는 여자들을 냉정하게 거절하지 않는다. 그리고 몇 년 전엔 자신의 아이를 임신한 아내가 태내에서 죽은 기억도 가지고 있다. 이런 일상을 버무려 이야기를 풀어내는데 미스터리를 느낄 만한 장면을 포착하기 힘들다. 마지막 장면을 읽으면서는 혹시 다른 이야기가 더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문조차 들었다. 긴 이야기의 한 토막을 잘라낸 느낌이라고 할까.

 

<목소리>는 두 남자의 만남과 헤어짐과 추억을 다룬다. 강에서 낚시를 하던 다이치는 물에 빠진 다노쿠라를 구한다. 이 강에선 다이치의 아버지가 죽었다. 왠지 미스터리의 냄새가 풍긴다. 혹시 그가 범인이고 복수를 다루는 것일까 추측한다. 하지만 그런 일은 없다. 스무 살의 다이치는 다노쿠라로부터 아버지의 추억과 기억을 얻게 되고, 다노쿠라는 이번 여행으로 점점 잃어가는 삶의 의욕을 되찾는다. 그들의 공통점은 다이치의 아버지와 강과 낚시 관련된 기억과 추억이다. 살인사건에 집중하느라 상당히 매력적인 작품임에도 충분히 즐기지 못한 아쉬움이 있다.

 

<저벅 저벅>은 잔혹한 복수에 대한 이야기다. 29년 전 10살 나이로 그녀는 중학생으로부터 성추행을 당한다. 그날의 기억은 그녀의 삶을 지배한다. 한때 그 기억을 털어내기 위해 그 남자를 찾아다녔지만 찾을 수 없었다. 그 기억은 현재의 남편을 만나기 전까지 남자를 거부하게 만들 정도로 강했다. 소설은 그녀의 고백으로 이어지는데 사실 그때의 남자에 대해서는 중간쯤에 파악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 소설은 한 소녀의 성추행에 대한 피해와 함께 그 피해를 극복하기 위한 복수를 위한 마지막 반전이 뒤끝을 강하게 남긴다. 그냥 무난하게 읽히다가 마지막 장에선 삶의 모순과 점점 피어나는 사악한 기운에 깜짝 놀란다.

 

<가을날 바이올린의 한숨>은 사라진 아인슈타인 박사의 바이올린을 찾는 과정을 다루고 있다. 노벨 상을 수상한 아인슈타인은 일본으로 온다. 짐 운반 과정에서 박사의 바이올린이 바뀌는 사고가 발생한다. 고가의 물품은 아니지만 애정과 추억이 실린 바이올린이다. 이 사건이 표면적으로 드러나면 일본과 독일의 외교문제가 될 수도 있다고 판단하여 그를 초대한 출판사는 게이오 대학의 도도로키 교수에게 사건을 의뢰한다. 어학에 탁월한 재능을 가진 교수는 탐정 역에도 탁월한 재능을 발휘하고 있다. 그 과정을 보면 보통의 고전 추리소설과 별다른 차이가 없다. 마지막 사건을 풀어내는 방식도 역시 크게 특별하지 않다. 오히려 숨겨진 정보들이 마지막에 쏟아지면서 작가만의 미스터리가 된 듯한 느낌마저 준다. 하지만 재미는 있다. 특히 돈가스 덮밥에 대한 과도한 애정과 칭찬은 그 시대를 보여주는 듯하다. 읽으면서 영화로 만들어진다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계속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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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레니엄 1 - 상 - 여자를 증오한 남자들 밀레니엄 (아르테) 1
스티그 라르손 지음, 임호경 옮김 / 아르테 / 200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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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 이 책의 표지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읽기 전에도 약간 그런 마음이 있었는데 읽은 후는 더 심하다. 보통의 경우라면 그냥 표지를 탓하지 않았겠지만 지금은 탓하지 않을 수 없다. 그 이유는 표지가 이 책이 지닌 가치를 제대로 표현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최근에 읽은 서양 추리소설 중 이 책처럼 강한 인상을 준 작품도 드물고, 사람을 끌어당긴 책도 없다. 띠지에 흔히 사용되는 통속적인 문구가 정말로 다가오는 경우는 드문데 이번엔 사실이다. 책을 받은 후 다른 책처럼 놓아두지 않고 있다가 방을 정리하면서 읽기 시작했는데 정말 대단히 매혹적이다.

 

최근에 읽은 몇 권의 책에서 스웨덴의 복지국가의 표본이다. 물론 사람 사는 곳이니 문제가 없을 수 없지만 최소한 사회제도란 측면에서 보면 많은 사람들의 부러움의 대상인 것은 분명하다. 높은 복지수준과 안락해 보이는 삶 속에 숨겨진 비밀은 그래서 더 자극적인지도 모르겠다. 재벌 집안의 오랜 미스터리와 역사 속에 존재했던 나치의 흔적과 부와 권력에 아부하는 기자들의 모습은 언론에 포장되어 비쳐지는 스웨덴의 모습과 사뭇 다르다. 작가는 그 모습의 일부를 결코 빠르다고 할 수 없는 속도로 풀어내고 있다. 하지만 늪에 빠진 것처럼 읽기 시작하면 좀처럼 빠져나오지 못한다.

 

매년 11월 1일이면 연례행사처럼 꽃이 보내어져 온다. 여든두 번째 생일날이다. 하나의 미스터리를 암시한다. 그리곤 한 남자의 소송 종결에 대한 이야기로 이어진다. 소송은 패소했다. 패소한 인물이 바로 주인공인 미카엘이다. ‘밀레니엄’이란 잡지의 편집장인 그는 항소조차 하지 않는다. 왜 그가 베네르스트룀 사건에 빠져들게 되었는지 간략하게 말한다. 그 앞에 펼쳐질 미래는 결코 밝지 않다. 여기서 이야기는 한 여자로 넘어간다. 그녀는 또 다른 주인공인 리스베트 살란데르다. 그녀는 보안업체에서 근무하며 탁월한 조사능력을 보여준다. 하지만 대인관계는 부족하다. 아주 많이. 그녀의 조사대상 중 하나가 미카엘이다. 이들의 만남은 조사자와 그 대상으로만 존재한다.

 

그냥 조금 평범한 시작이다. 호기심을 자극하지만 특별히 강렬하게 자극적인 것이 등장하지도 않는다. 하지만 책에서 눈을 떼기 어렵다. 미카엘이 소설 속 미스터리 중 하나인 38년 전 반예르 집안의 하리에트 실종 사건에 관심을 가지고 빨려 들어가듯이 끌려들어간다. 거대한 재벌의 손녀딸이 사라졌으니 얼마나 많은 공권력과 사적 인력이 동원되었겠는가. 그리고 그 조사의 주체인 헨리크 반예르가 38년간 그 미스터리를 풀기위해 노력했고, 그 모든 가능성을 검토했다. 또 그녀가 사라진 그날은 섬과 이어주는 다리가 사로로 막혀있었다. 섬 자체가 거대한 밀실로 변한 것이다. 밀실미스터리의 조건에서 자신들의 한계를 절감한 그가 외부에서 사람을 데리고 와 미스터리를 풀려고 한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 그들에겐 제3자의 새롭고 날카로운 시각이 필요했다.

 

38년 동안 모든 가능성을 검토한 사건을 다시 뒤져본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한때 거대한 재벌이었다가 점점 약해진다고는 하지만 아직도 반예르 가문을 무시할 수는 없다. 그 집안의 역사를 조사한다는 것은 그 사건을 둘러싸고 있는 과거와 현재를 파악하는 것이다. 왜 그녀는 사라졌을까? 죽었을까? 그럼 시체는 어디에 있을까? 그리고 매년 오는 꽃은 누가 보내는 것일까? 이런 의문을 작가는 표면으로 부각시키지 않고 진행한다. 그러면서 리스베트의 이야기를 보여주면서 두 사람의 만남으로 이어간다. 둘이 만나는 순간부터 이전에 있던 수많은 가정과 추측이 하나의 결과로 나오게 된다. 그 결과는 결코 만족스럽지도 않다. 오히려 추악하다. 그 바닥을 보면 볼수록 혐오스럽고 놀라운 추악한 사실들이 드러난다.

 

소설은 각 장마다 놀라운 스웨덴 통계자료를 인용한다. 스웨덴 여성의 18%가 살면서 남성의 위협을 한 번 이상 받은 적이 있다거나 46%가 남성의 폭력에 노출되어 있다거나 13%는 심각한 성폭행을 당한 경험이 있다거나 성폭행 당한 여성 중 92%가 고소를 하지 않았다는 자료다. 세계최고의 복지국가란 이미지 속에 숨겨진 이런 통계자료는 이 소설의 부제인 여자를 증오하는 남자들과 글 속에서 생각하지 못한 사실을 드러내면서 폭발적인 반응을 불러온다.

 

모두 읽고 나면 이 소설에서 다룬 트릭은 너무나도 간단하다. 만약 트릭에 집중했다면 조금 싱거웠을  것이다. 하지만 책의 가치는 실종 사건을 둘러싸고 드러나는 반예르 가문의 추악한 과거와 두 주인공의 매력에 있다. 천재 해커에 정신장애가 있지만 카메라 같은 기억을 가진 사회부적응자인 리스베트와 오는 여자 막지 않고 진실을 밝히는 데 최선을 다하고 날카로운 통찰력을 가진 미카엘을 작가가 치밀하면서도 절제된 문장으로 이야기하기 때문이다. 1권을 모두 읽은 지금 다음 권을 기대한다. 아니 10권을 기획했다가 3권까지 내고 죽은 작가에 대한 아쉬움이 느껴진다. 정말 할 이야기가 무궁무진한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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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문난 옛날 맛집 - 정성을 먹고, 추억을 먹고, 이야기를 먹는
황교익 지음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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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맛집을 찾아다닌 적이 있다. 십 수 년 전인데 그 당시는 지금처럼 매체에 노출이 된 집이 그렇게 많은 편이 아니었다. 대부분이 잡지나 신문 등에 맛있다고 소문나거나 통신 등으로 입소문이 난 집이었다. 그 당시도 맛있게 먹은 집은 많지 않았다. 맛있어 몇 년을 다닌 집은 그 후 친구들과 함께 가 맛을 본 후 맛이 변했음을 알고 이제는 발걸음이 움직여지지 않는다. 이 책 한 구석에 그 집에 대한 평이 나오는데 정말 공감한다. 그래도 아직 맛있는 집에 대한 욕망은 버리지 못하고 있다. 매체에 노출된 집보다 먼저 먹은 주변 사람들의 말을 더 신뢰하면서 찾아가지만 좀처럼 입맛에 맞는 집을 찾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가끔 시간과 거리 때문에 가지 못하는 식당들이 불쑥 머릿속에 떠오르기도 한다. 그 식당들이 모두 일요일에는 쉬니 토요일 점심시간이 아니면 시간이 나지 않기 때문이다. 몇  개월 만에 찾아가니 아주머니가 오랜만에 왔다고 말씀하시는데 그 후로도 꽤 시간이 흘렀다.

 

언제부터인가 주말이면 내가 가는 식당이 정해져 있다. 다른 곳도 도전해봄직한데 좀처럼 이 식당들을 벗어나지 못한다. 몇 년 동안 자주 가면서 소위 말하는 인이 박힌 것인지 아니면 맛있다고 소문난 식당들에 대한 실망이 쌓여서인지 잘 구분이 되지 않는다. 그래도 새롭게 발굴한 식당은 줄기차게 도전한다. 다른 사람을 데리고 가면 맛있다고 하는 사람도 있지만 그날 음식이 너무 짜거나 밋밋하여 별로라고 하는 경우도 있다. 그런 중에 내가 자주 나가는 도심에 맛있다고 저자가 말하는 식당이 나오면 책에 조그마한 표시를 한다. 혹시 다음에 친구를 만나면 데리고 가서 맛을 보기 위해서다. 저자의 말마따나 만약 맛집에 대한 소개가 없었다면 아마도 상당히 아쉬워하며 인터넷 검색에 많은 공을 들였을 것 같다.

 

이야기는 모두 네 꼭지로 나누어져 있다. 추억, 정성, 머리, 이야기다. 이 중 셋은 음식관련 만화나 책에서 자주 접하는 것이지만 머리는 조금 낯설다. 하지만 저자의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이것이 단순히 머릿속에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경험에서 우러나온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의 미각이 타고난 것이 아니라 수많은 공을 들인 끝에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노력이 쌓여 데이터를 만들고, 그 데이터가 맛의 기억과 추억과 이야기로 이어진다. 그 과정을 보면 언제나 자연과 사람이 있다. 그들의 긴밀한 관계와 공생이 가슴속으로 머릿속으로 다가오면서 즐거운 시간을 가지게 만든다.

 

사실 나는 맛에 둔감한 편이다. 친구나 선후배들과 식당에 들어가 먹다보면 그들이 맛이 없다고 하는 음식을 맛있게 먹는다. 그들이 맛있다고 한 식당의 음식에선 가끔 맛을 느끼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미각이 발달하지 않아서 그런지 아니면 다른 환경에서 자란 탓인지 잘 모르겠다. 얼마 전 상경한 아버지를 모시고 북어국집에 갔는데 다행히 맛있다고 하셔 가슴을 쓸어내린 적이 있다. 예전에 한 식당에서 식당 아줌마에게 맛없다고 바로 말씀하신 기억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예전에 자주 갔던 냉면집 기억도 난다. 처음 그 집에 갔을 때 너무 심심한 맛이라 시장 냉면과 너무 비교가 되었다. 그런데 자주 그 집에 가다보니 소문난 다른 곳 냉면은 조미료 맛이 너무 강했다. 다시 강한 양념이 담긴 냉면을 먹다보니 다시 그 집 냉면이 심심한 맛으로 느껴졌다. 한 번은 어머니를 모시고 갔는데 맛없다는 말에 어떻게 표현해야 할 지 참 난감하기도 했다. 저자가 말한 화학조미료에 길들여진 입이 거의 조미료를 사용하지 않은 음식에서 맛을 느끼지 못한 것이다.

 

이 책은 맛집을 소개하는 책이 아니다. 물론 맛집도 나온다. 하지만 그것은 저자의 추억과 이야기 속에서 잠시 머물 뿐이다. 그의 추억과 이야기를 하나씩 감상하다 보면 나의 경험과 부딪히는 곳도 있고, 부러움의 눈길을 보내는 순간도 있다. 그리고 아직 내가 가보지 않은 많은 맛있는 식당들이 있음을 보고 행복한 마음이 들었다. 아! 수많은 이야기 중에 주목해야 할 것 하나. 뭐 책 속에서 주목할 것이 한둘이겠냐 만은 일단 하나만 말하자. 그것은 식당에 별 달기에 대한 그의 글이다. 서양과 달리 우리나라 식당에서 그런 행위는 큰 의미가 없다는 이야기와 그들의 장인정신을 이야기하는 대목은 절로 공감하게 된다. 우리나라도 별 달기가 정착할 수 있는 식당들이 많아졌으면 한다. 단 그 식당들은 서민들이 쉽게 먹을 수 있는 곳이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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