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잿더미의 유산 - 한국전쟁에서 이라크전쟁까지 세계 역사를 조종한 CIA의 모든 것
팀 와이너 지음, 이경식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8년 9월
평점 :
절판
나에게 CIA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 하나는 수많은 영화와 드라마와 소설로 만들어진 멋진 조직이고, 다른 하나는 다른 나라의 역사 속에 비추어진 추악한 뒷모습이다. 이 책은 바로 추악하고 실패로 가득한 CIA의 역사를 보여준다. 전자에 의해 만들어진 수많은 이야기들이 얼마나 허위와 거짓으로 가득한지 알려주면서 후자를 위해 어떤 노력을 기우렸는지 보여준다. 제목 그대로 화려한 영광은 없고, 잿더미만 가득한 허상의 기록이다.
CIA의 역할은 사실 영화나 소설 등으로 많이 부풀려져 있다. 보통 그 사실을 알고 있다. 하지만 그들의 실패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 가끔 외신이나 뉴스나 책에서 접하는 CIA의 모습은 단편적이고 순간적이다. 그들이 어떤 실수를 했는지 추적할만한 단서를 남겨놓지도 않았고, 그 추적을 쉽게 용납하지도 않는다. 그러니 일반 대중이 그 실체에 다가가는 것이 얼마나 힘들겠는가! 그리고 CIA의 비밀공작을 통해 본 세계사는 미국을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을 준다. 결코 미국이 다른 나라의 민주주의와 평화를 위해 움직이고 있지 않음을 알려주기 때문이다. 만약 아직도 그렇게 믿고 있다면 바로 이 책을 읽고 난 후 그 환상이 산산이 부서질 것이다. 읽은 후에도 거짓이라고 믿는다면 더 이상 할 말이 없다.
CIA의 모태가 된 OSS를 알고 난 후 그 설립과정을 보는 재미는 솔솔하다. 어느 정도 알고 있던 대목도 있지만 어떤 목적과 의도로 만들어졌는지는 잘 몰랐다. 그리고 그들이 펼친 작전들이 어떤 것이 있고, 얼마나 많은 예산을 쏟아 붓고 있는지도 몰랐다. 다만 제3세계 역사를 통해 그들이 펼친 비밀공작과 그 나라 국민이 어떤 고난과 피해를 입었는지 알 뿐이다. 일본 자민당 창설에 관여한 대목에선 사실 많이 놀랐다. 그 치밀하고 지속적이면서 반민주적이자 반인륜적인 그들의 비밀공작을 들여다보면 예상을 초월한다. 그 무엇보다 놀라운 것은 역대 대통령들이 그 사실을 알고 있었고, 강하게 주장하고, 밀어붙이고, 확실한 결과를 얻고자 했다는 점이다. 최근에 다른 매체를 통해 아이젠하워나 케네디 일가에 대한 환상이 조금씩 깨어지고 있었는데 이 책으로 인해 완전히 박살났다.
왜 그런 환상이 깨어졌을까? 그것은 설립 당시부터 잘못된 출발과 최고 권력자들의 욕심 때문이다. 분명히 좋은 의도에서 만들어진 조직이지만 국가 조직 내부의 권력 다툼이 지속적으로 이어졌고, 우리가 흔히 알고 있던 전문가 집단이 아닌 아마추어 수준의 정보를 다루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세계 각국에서 비밀공작을 펼치지만 그 나라 문화도 언어도 모르는 사람들이 나가 첩보활동을 하고, 잘못된 정보를 가지고 무수한 인원을 죽음으로 몰아간 것이다. 그 대부분이 미국인이 아닌 공작지의 국민이란 점에서 그들에게 미국인이 아닌 사람은 단순한 소모품 그 이상이 아닌 것 같다. 가끔 한국에 대한 글이 나오면 깜짝 놀라곤 한다.
잘못된 출발보다 더 잘못된 것은 권력자들과의 관계다. 자신들이 얻은 정보가 대통령의 생각과 맞아떨어지지 않으면 퇴짜를 맞는다는 사실에 그들의 운명은 정해지게 된다. 윗사람 입맛에 맞는 정보만 보고가 되어지고, 조직의 존립을 위해 실패를 성공으로 포장하는 능력을 더 키워온 것이다. 정보를 분석하고 올바른 해답을 내놓을 능력을 키우기보다 비밀공작으로 한 나라의 운명을 자신들의 뜻대로 움직이는데 맛을 들인 것도 문제다. 물론 이 비밀공작이 대부분 올바른 성공으로 이어진 것은 아니지만 그 참혹한 결과는 역사에 분명히 기록되어있다.
영화 속에선 언제나 미국 스파이가 소련 스파이를 압도한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소련을 제대로 이겨보지 못했다. 철의 장막을 제대로 뚫지도 못하고, 이전의 실패에 사로잡혀 올바른 정보를 가지고 온 사람을 고문하고 취조하면서 자가당착에 빠지기도 한다. 계속된 첩보활동의 실패가 조직에 깊숙이 자리 잡으면서 진취적이고 활동적인 모습을 보여주지 못한다. 수많은 실패는 너무나도 많다. 한국전에서 시작하여 최근의 9.11까지 이어지는 실패의 역사는 현재 CIA가 미국에서 어떤 모습인지를 보여준다.
책을 읽으면서 느낀 의문이 있다. 그것은 어떻게 이렇게 많은 실패와 실수를 겪고도 조직이 지금까지 존재했는지 하는 의문이다. 물론 이것에 대한 답은 마지막 문장에 있다. “우리가 지금 치르고 있는 전쟁이 어쩌면 냉전만큼이나 오래 지속될 수 있고, 또 우리는 우리의 정보력에 따라서 이 전쟁에서 질 수도 있고 이길 수도 있기 때문이다.”라는 결론이다. 하지만 다른 조직들이 충분히 존재하고 있는 현실에서 이것이 정답은 아니다. 그리고 놀라운 것은 사설 정보업체의 등장과 정보의 아웃소싱이다. 국가에 정보를 제공하는 기업체가 생기고, 사람을 CIA에서 스카우트하는 현실을 보면서 과연 CIA는 필요한 존재인지, 과연 기업체들은 국가의 이익을 우선시할 것인지 하는 의문이 남는다.
책을 읽으면서 가장 공감하게 되는 문장은 바로 이것이다. “ 그것(CIA)은 어떤 정부가 가질 수 있는 가장 특이한 유형의 조직이다. 아마도 이런 조직을 운영하려면 이상한 유형의 천재가 필요할 것이다.”(782쪽) 이상한 유형의 천재가 아니면 운영할 수 없는 조직, 비밀공작의 특성상 거짓을 좇는 조직, 독립적이고 올바른 정보보다 윗사람들의 권력에 봉사하는 조직이 바로 CIA다. 수많은 인물이 CIA의 국장이 되었고, 많은 대통령이 은밀하게 비밀공작을 허락하였지만 제대로 된 성과물을 내놓지 못하고 매체를 통해서 그 이름을 알린 정확한 성과 없는 조직이 바로 그들의 현주소다. CNN보다 소식이 늦다는 사실에선 예산을 잡아먹는 공룡에 대한 실체를 더욱 분명히 알게 된다. 이 책을 읽으면서 소련 측 역사도 굉장히 호기심을 자극한다. 그리고 CIA의 긴 역사와 수많은 비밀공작을 다루기엔 1000쪽도 부족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