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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환상 문학 단편선
김이환 외 지음 / 황금가지 / 2008년 7월
평점 :
품절
이 단편선을 읽고 난 후 첫 느낌은 한국 환상문학이 점점 좋아진다 였다. 물론 이것은 지극히 개인적인 판단이다. 장르문학 중 판타지는 대부분 대여점용으로 양산되면서 무협과 유사한 전개를 보여주고 있다. 몇몇 작가의 놀라운 작품이 외국의 판타지에 뒤지지 않는 멋진 작품을 만들어내지만 아직 그 층이 얇은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이 단편선을 읽으면서 어느 정도 그 불신감을 지웠고, 앞으로의 가능성을 발견했다.
모두 10편이다. 판타지와 sf를 다루고 있는데 이 중 다른 작품을 읽어본 작가는 몇 없다. 최근 sf나 판타지를 잘 읽지 않은 것도 하나의 이유지만 시선을 끄는 작가가 없었던 것도 있다. 아직 한 번도 읽은 적이 없지만 그의 장편에 대한 좋은 평을 들었던 김이환의 ‘미소녀 대통령’은 읽고 난 후 첫 느낌이 장편의 도입부 같다는 것이었다. 이계진입에 은근히 남자의 판타지를 바탕으로 이야기를 시작하는데 이 단편선의 도입부에 적당한 소설이다. 장편으로 연재되고 있다고 하니 그 느낌은 나름대로 정확했던 모양이다.
김주영의 ‘크레바스 보험사’는 재미있게 읽히지만 개성이 없다. 시간의 틈새를 다니는 보험회사 직원들이란 설정이 이미 수많은 판타지 장르에서 본 것이기에 색다른 느낌도 없다. ‘마산 앞바다’는 림보를 다루었다고 하지만 그보다 더 시선을 끈 것은 몇 년 전 태풍 매미로 큰 피해를 입은 마산을 글 속에 재현한 것이다. 그리고 죽은 자를 보게 되는 바다의 모습은 화자의 과거와 더불어 강한 인상을 남겨준다. 마지막 장면은 한 번 읽고 그 의미를 정확히 파악하기 어렵다.
박애진의 ‘문신’은 상당히 흥미롭다. 죄를 지어면 얼굴부터 그 죄를 문신으로 새기는 도시 이야기다. 문신이 없다는 이유로 그 사람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의 모습은 굉장히 역설적 표현이다. 앞으로 어떤 죄를 지을지 모른다는 점은 이해하지만 앞으로 일어날 일에 대한 두려움이 기우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윌리엄 준 씨의 보고서’나 ‘서로 가다’는 특별함이 없다. 요정이야기와 환상을 다루는데 그 마지막 장면들이 강한 인상을 주기보다 약간 식상한 느낌이다.
‘할머니 나무’는 글 중반에 그녀들의 걱정에 대한 답을 예상했다. 하지만 여자에게만 전해지는 나무가 되는 이야기가 저주가 아닌 축복처럼 다루어진 점은 상당히 인상적이다. 화려함은 없지만 잔잔하게 감정을 풀어내는 재미가 있다. 배명훈의 ‘초록연필’은 재미있다. 이야기를 하나의 시선으로 이끌고 나가지 않아 약간 혼란스럽지만 예언과 그 실현이란 그 결론을 보면서 역시 최근에 본 작가 중 최고라는 느낌이 들었다. 초록연필에서 시작한 이야기가 악마에 대한 예언으로 이어지면서 펼쳐지는 마지막 장면과 문장은 반전이자 많은 생각거리를 제공한다. 이미 그의 단편을 다른 책에서 재미있게 보아서 그 이름을 기억하고 있었지만 이번 소설로 확실히 각인하게 되었다.
‘콘도르 날개’는 3류 영화에서 시작한 환상과 현실을 다루고 있다. 예전에 즐겨보던 영화들의 어색하고 조잡한 장면들이 연상되었다. 은근히 비판을 담고 있어 무난한 재미를 준다. 배명훈과 더불어 이름을 기억하고 있던 김보영의 ‘몽중몽’은 꿈과 현실의 경계를 보여주면서 꿈속을 헤매게 한다. 쉽게 그 실체를 파악하지 못하게 하는 매력이 있지만 동시에 어지러운 느낌도 전해준다. 장자의 호접지몽을 연상시키는 마지막 장면은 ‘서로 가다’의 마지막과 비교해도 좋을 듯하다.
전체적으로 모두가 만족스럽지는 않다. 하지만 이것은 수십 년 동안 환상문학을 발전시켜온 외국 작품집을 보아도 느끼는 감정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 작품들이 실리는 공간이 있고, 책으로 나오면서 발전 가능성을 열어놓았다는 점이 고무적이다. 장르문학을 좋아하는 나로서는 이 작품선이 계속해서 나왔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