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미오보다 여행이다!
경민선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0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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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투박한 여행기다. 화려한 사진도 풍부한 지역 설명도 없다. 단지 29살 줄리엣의 동남아와 유럽 3개국 여행에 대한 이야기다. 한곳에 대한 집중적인 설명도 없고, 깊이 있는 분석도 없다. 한 지역에 오래 머물며 멋 부리듯이 아는 척도 하지 않고, 어느 순간은 어리버리한 모습도 자주 보여준다. 그래서 마음에 들지만 가슴 속에 불을 지르지는 못한다.

 

한때 후배가 한 달 동안 동남아 일대를 여행하지고 했다. 처음 무지한 나는 동남아 볼 것이 뭐 있다고 한 달이나 머무냐? 고 말했다. 하지만 그것은 나의 무지와 오만이었다. 두세 번 간 동남아는 짧은 기간이었지만 강한 인상을 주었고, 늘 부족한 느낌이었다. 떠날 때는 아쉬움을 뒤로 하고 다음엔 어디로 가야지 하는 마음을 먹게 만들었다. 그리고 느낀 것은 한 달도 부족하다는 것.

 

저자는 한 달이 아니고 일 년을 계획하고 떠났다. 이 조그마한 책 속에 일 년이란 시간과 많은 나라를 넣다보니 감상과 짧은 경험이 주를 이룬다. 잘 짜인 일정에 따라 바쁘게 돌아다닌 것이 아니라 세계 일주를 계획하는 사람에겐 큰 도움을 주지는 못한다. 하지만 여행자를 따라가다 보면 만나는 사람들과 그곳에서 마주한 현실에서 빚어진 생각들은 나를 돌아보게 한다. 그것도 세련되지 못하고 간결하고 투박하다.

 

자주 속는 이야기가 나온다. 환전상들에게 속고, 버스 기사에게 속고 하면서 길을 간다. 속을 당시 얼마나 가슴이 아팠을까? 많은 돈을 가지고 룰루랄라 하면서 다닌 여행도 아닌데. 그래서 속으로 웃고 좀더 여기저기 연구하고 갈 것이지 하는 마음도 생긴다. 하지만 나도 여행을 가면 속지 않으려고 발버둥치지만 결국 속고마니 속는 다는 것이 여행자의 동과의례인 모양이다.

 

속는 이야기와는 다르게 길에서 만난 사람과의 인연으로 그들 집에 머무는 이야기는 살짝 부럽다. 그 동네 음식에 적응한다는 것 자체가 쉽지 않고, 그 친절에 쉽게 마음을 열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배낭 하나만 매고 여행을 떠나게 되면 이렇게 되는 것일까? 낯가리는 나를 생각하면 문뜩 이렇게 떠나보고 싶은 마음도 생긴다.

 

많은 이야기 속에 재미있는 것이 하나 있다. 고산병에 대한 내용인데 저자가 엄청나게 무식함을 드러낸다. 고산병에 대해 “예방주사를 맞으면 되나요?” 묻는 장면이다. 재미를 위한 연출이라면 읽는 동안 즐거움을 주었다. 하지만 정말 몰라 그랬다면 정말 대책 없이 여행을 떠났다. 나 자신도 고산병에 대해 대책 없는 자신감을 보이지만 이 정도로 무지한 대응은 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것도 여행을 떠나면서 만나는 재미라 생각하면서 재미있게 웃었다.

 

만약 여행지에 대한 화려한 정보나 화려한 사진을 보고자 하는 사람에겐 권유하고 싶지 않은 책이다. 전문 여행가의 글도 아니고, 사진도 풍부하지 않다. 잘 짜인 일정으로 움직이며 많은 경험을 세밀하게 다룬 책도 아니다. 하지만 이런 것이 없지만 한 29살 여자의 좌충우돌하면서 나아가는 모습을 보고 싶거나 여행지에서 한국을 돌아보고 싶다고 한 번쯤 읽어보시라 하고 싶다. 투박하고 고생이 가득하고 길에서 만난 사람들로 즐겁고 가슴 아파하는 한 여성의 여행기다. 물론 즐거움도 가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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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놀 지는 마을
유모토 카즈미 지음, 이선희 옮김 / 바움 / 200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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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어느 날 이야기만 듣던 외할아버지 짱구 영감이 집에 나타난다. 처음 보지만 짱구 영감임을 안다. 이렇게 등장한 할아버지는 이 소설의 중심인물이다. 그리고 짱구 영감은 이혼한 후 불안정했던 엄마와 나의 생활에 알게 모르게 활기를 불어넣는다. 밋밋하고 변화 없는 일상에 조그마한 파문을 일으킨 것이다. 비록 사건 사고가 벌어지지는 않지만.

 

많지 않은 분량이다. 간단하고 빠르게 읽을 수 있다. 하지만 이야기 중심이 아니다. 갑자기 현재의 내가 끼어들어 해설을 하고, 다시 과거로 들어가 이어진다. 이 과정이 무난하게 이루어진다. 이 전환이 화자의 현재와 과거를 동시에 보여주면서 잔잔하게 그 당시 느낌을 전해준다. 현재의 그리움과 과거의 추억은 화려하지도 애절하지도 않지만 가랑비에 옷 젖듯이 가슴으로 스며든다. 역자가 행간을 읽어야한다는 의미를 조금은 이해할 것 같다.

 

짱구 영감의 과거를 보면 좋은 아버지가 아니다. 한때 벌이가 좋았을 때도 있었다. 월급쟁이 한 달 수입보다 하루 벌이가 더 좋았던 시절도 있었고, 타고난 능력으로 말을 다루던 때도 있었다. 하지만 그 시절은 이미 지나갔다. 그 지나간 시절에서 그가 보여준 행동은 책임감 강하고 자식들에게 애정을 쏟는 평범한 아버지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다. 물론 자식들이 아버지에 대한 멋진 추억 한두 가지는 가지고 있다. 그 추억만으로 힘겹게 살아온 그들이 그를 쉽게 용서하고 받아들이기는 무리다. 그러나 시간 속에 가족이란 울타리와 정이란 감정은 일상의 행동 속에서 살며시 묻어난다.

화장실 가는 척하며 일부러 발을 밟고, 청소할 때마다 청소기 끝을 부딪치는 미운 감정과 식욕 없는 짱구 영감에게 조금 더 먹이려고 바지락 된장국에 문어머리 회, 쑥갓나물 등 좋아하는 반찬을 늘어놓는 등 가족애가 들쑥날쑥하며 나타난다. 이 뒤죽박죽 감정이 절정에 달한 행동은 한밤중 손톱깍기다. 한밤중에 손톱을 깍으면 부모의 임종을 보지 못한다는 이야기에서 알 수 있듯이 어머니의 이 행동은 자신의 숨겨진 감정의 적나라한 표현이다. 이것은 후에 자신을 버리고 떠난 아버지가 전화로 병문안을 요구했을 때 가지 않고 손톱을 깍았던 그의 행동으로 이어진다.

 

어머니의 할아버지에 대한 감정이 이런 일상에서 나왔다면 아버지의 딸에 대한 애정은 딸이 불륜으로 임신한 아이를 잃은 후 나타난다. 새벽부터 먼 길을 걸어 두개의 양동이 가득 피조개를 가지고 온다. 몸도 불편한 영감이 삶의 의욕을 잃은 딸을 위해 온종일을 걸어 바다에서 가져온 것이다. 이 때문인지 어머니는 다기 생기를 찾는다. 애증이 교차하는 두 부녀의 감정이 묘하게 드러난 대목이다.

 

소설을 모두 읽고 나서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만약 짱구 영감이 어머니의 어린 시절 좋은 추억을 만들어주지 않았다면 과연 그를 받아들였을까 하고. 술주정뱅이 아버지들이 하듯이 아이들과 어머니를 때렸다면 그렇게 쉽게 같이 살 수 있었을까 하고. 이제 성인이 된 나 자신도 어린 시절 부모님과 함께한 몇 가지 추억이 문득 문득 되살아나 기쁨과 즐거움을 준다. 소설 속 화자도 짱구 영감과 함께한 일 년이란 시간이 그의 삶에 가장 강한 추억과 기억을 남겨둔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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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주의 지도
에밀리오 칼데론 지음, 김수진 옮김 / 북스토리 / 200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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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주의 지도란 존재하지 않는다. 순수한 작가의 창조물이다. 그래서인지 이 소설에서 이 지도는 다른 스릴러처럼 뺏고 빼앗는 행동이 나오지 않는다. 또 이 지도를 둘러싼 긴박하면서도 엄청난 활극도 펼쳐지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소설은 2차 대전 전후의 시간을 다루면서 빠른 전개와 풍부한 이야기로 나를 사로잡았다. 이유는 무얼까?

 

사실 제목이나 책 첫 장을 넘기면서 전형적인 스릴러를 예상했다. 현재의 시간에서 누군가가 죽고, 과거로 돌아간다면 누구나 긴박하고 무시무시한 활극을 예상할 것이다. 하지만 어디에도 그런 전개는 없었다. 약간은 평범한 한 건축학도의 삶으로 시작한다. 그리고 스페인 아카데미 도서관에 있던 한 권의 고서적으로부터 변화는 일어난다. 빈곤했던 재정 상태를 개선하기 위해 고서적을 팔았는데 여기에 바로 창조주의 지도를 얻기 위한 단서가 담겨있는 것이다. 보통의 스릴러라면 다음이 예상될 것이다. 그러나 이 소설은 그 예상을 뒤엎는다. 창조주의 지도는 적의 수중에 들어간다. 그러면 이야기는 끝일까? 아니다. 여기서 파생한 수많은 이야기들로 이어진다.

 

주인공 호세 마리아는 화자다. 그는 이 한 권의 책 때문에 스파이가 된다. 그가 사랑하는 여인 몬세는 파시스트인 후니오 대공과 사랑에 빠진다. 전형적인 삼각관계 구도다. 이런 관계는 마지막까지 이어지며 전혀 예상하지 못한 결말을 보여준다. 이 소설이 다루고 있는 최고의 미스터리다. 하지만 소설 전반에 걸쳐 중요한 것은 이 세 사람의 애증과 시대의 격변기 모습이다. 대의보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스파이가 된 주인공과 파시스트인 후니오 대공을 사랑하였지만 그의 실체에 실망을 하면서 변하는 몬세, 그리고 창조주의 지도와 파시스트 행동으로 점점 그 위세를 굳건히 하는 후니오 대공은 그 어두웠던 2차 대전의 암흑기에 상징처럼 보인다.

 

배경 전반적으로 음모론이 깔려있다. 각 세력의 스파이들이 활약하고, 음모론과 신비론은 신화와 허구로 환상을 만들어내면서 명확한 실체를 드러내지 않는다. 단시간 벌어지는 좇고 좇기는 긴박감보다 역사의 긴 시간 속에 사람과 시대를 유기적으로 연결하여 이야기를 풀어내면서 새로운 스릴러를 만들어내었다. 스파이의 활약을 2차 대전 전후의 역사와 절묘하게 조화시켜 장르소설이란 느낌을 배제하게 만들었다. 속고 속이고 숨기고 파헤치는 과정이 거대한 역사의 흐름 속에 잘 스며든 것이다. 개인적으로 이 부분은 상당히 마음에 든다.

 

역사의 도도한 흐름 속에 놓인 한 남자의 시선을 따라가다 보면 만나게 되는 사실과 음모는 마지막 반전으로 멋진 대미를 장식한다. 이 반전 속에 작가가 말하는 한 마디는 2차 대전 후 사회와 역사의 변명을 그대로 보여준다. “유럽은 모든 죄를 독일에 전가시켰고, 독일은 모두가 나치 탓이었다고 둘러댔으며, 나치는 또 이 모든 게 다 이미 죽고 없는 히틀러 탓이라고 말 할 뿐……”(412쪽) 자기반성과 현실에 대한 냉정한 판단보다 남 탓으로 그 비극을 벗어나려는 시대에 대한 정확한 일침은 단순한 스릴러와 역사의 만남을 뛰어넘었음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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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지여 꿈을 노래하라 1 내인생의책 푸른봄 문학 (돌멩이 문고) 2
밀드레드 테일러 지음, 위문숙 옮김 / 내인생의책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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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편한 사실이 담겨있다. 이미 미국 역사에서 인종차별이 얼마나 뿌리 깊은지 알고 있었다. 이 책을 읽으면서 그 사실을 다시 한 번 더 인식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 차별을 뚫고 자신이 원하는 대지를 얻게 되는 주인공의 모습은 진한 감동을 준다. 예상하지 못한 재미로 읽는 즐거움을 단단히 누렸고, 간악한 백인들의 행동에선 분노를 느꼈다.

 

주인공 폴 에드워드는 백인 아버지와 인디언 혼혈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유색인의 피가 섞였다고 그는 유색인으로 취급받는다. 비록 아버지처럼 하얀 피부를 가지고 있지만 그의 출생에 대해 아는 사람들은 그 사실을 결코 놓치지 않는다. 여기서 다시 마주한 사실은 백인들이 남북전쟁 전까지 얼마나 유색인을 인간 취급하지 않았는지 느끼게 된다. 폴의 어머니에 대한 아버지의 행동이 사랑보다 욕망에서 비롯하였음을 보여주는 몇 장면에서 그 사실이 잘 드러난다. 그 아버지가 어머니 몸에서 난 주인공과 누이를 집안에서 차별 없이 키웠다고 하지만 대외적으론 유색인이고 백인과 결코 한 식탁에 앉을 수 없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어린 시절 폴은 어중간한 존재였다. 백인 아버지에 백인처럼 하얀 피부를 가지고 있었기에 유색인 소년들에게 배척의 대상이었다. 후에 그의 평생의 친구가 된 미첼이 그냥 그를 때리는 장면에서 잘 드러난다. 폴 자신만이 유색인임을 자각하지 못하고 있지 그 주변의 모든 사람들은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이 은연 중 행동이 같은 연배의 아이들에게 거슬린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 하지만 자신을 좀더 알게 되고 미첼과 협상을 함으로써 그는 동년배 폭력으로부터 벗어나게 된다. 그러나 그를 기다리고 있는 진실은 더 가혹하다. 바로 배다른 형제이자 가장 친했던 로버트가 그를 배신한 것이다. 이 사건으로 그는 자신의 정확한 위치와 신세를 깨닫게 된다.

 

전반부가 폴이 자신의 위치를 깨닫기까지 과정을 다루었다면 후반부는 그가 원하는 땅을 얻기 위한 그의 피나는 노력과 사랑을 담고 있다. 자신만의 것을 갖기 위한 그의 노력과 좌절과 고통은 약간은 밋밋한 일상의 반복 속에서 자연스럽게 묻어난다. 아버지의 그늘에서 달아나게 된 결정적 요인인 백인 마주의 약속 불이행에서 얻은 교훈도 결국은 백인이란 이유만으로 무너지는 현실 앞에선 너무 무력하다. 불과 수십 년 전 흑인들이 남부 등지에서 살해당하고 진실이 왜곡된 현실을 생각하면 이 소설의 120년 전은 너무나도 오래 전 이야기다. 그러니 당연히 유색인인 폴이 동등한 대우나 지위를 가진다는 것이 얼마나 꿈같은 일이겠는가!

 

불편한 사실이 담겨 있는 만큼 이 책을 싫어하는 사람들도 많은 모양이다. 학교 추천도서 최종목록에서 슬그머니 제외되고, 도서관에 꽂힐 때마다 몰래 치워졌다고 한다. 인종차별이 없다고 외치는 미국에서 금서로까지 지정되었다니 찔리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다. 그 시대의 언어를 사용함으로써 그 사실성을 더 높였는데 순간적으로 울컥한 적도 많다. 세상은 불공평하고 열심히 일한다고 해서 성공하는 것도 아니고 착한 편이 항상 이기는 것도 아니라는 다른 책 소개 글이 이 소설에 정말 잘 어울린다. 착하고 열심히 노력하지만 백인과 유색인이란 그 두꺼운 벽 앞에 얼마나 불공평한 세상인지 잘 보여주기 때문이다.

 

깊은 인종차별보다 더 가슴에 와 닿은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주인공 폴 에드워드다. 가혹한 현실 앞에 너무 무력한 유색인이지만 그는 결코 좌절하지 않는다. 어린 시절 꿈이었던 대지를 얻기 위해 그가 보여주는 노력과 열정은 조금씩 가슴속에 쌓여 거대한 불꽃이 된다. 빠른 진행도 없고, 시선을 끌어당기는 장면전환이나 사건도 없지만 사실에 바탕을 둔 탄탄한 이야기 전개는 강하게 책속으로 끌어당긴다. 일독을 권하고 싶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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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의 밀사 - 일본 막부 잠입 사건
허수정 지음 / 밀리언하우스 / 200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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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팩션이 점점 좋아지고 있다. 이야기의 짜임새와 풀어내는 힘이 예전과 달리 탄탄해지고 있다. 상당히 고무적이다. 개인적으로 역사와 추리소설을 좋아해 팩션을 자주 읽는데 어설픈 경우가 상당히 많았다. 한국형 팩션으로 나온 몇 권은 과도한 민족주의나 허술한 구성으로 실망을 안겨주기도 했다. 하지만 이번 소설은 어느 정도 수준에 올랐다고 생각한다. 물론 최고의 작품이라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등장인물들을 제대로 살려내고, 역사적 사건을 섬세하게 그려낸 것을 생각하면 분명히 진일보했다.

 

때는 조선시대다. 효종은 북벌을 계획하면서 배후를 튼튼하게 하기 위해 일본에 보내는 통신사 편에 밀사 남용익을 보낸다. 그의 임무는 막부의 실력자와 만나 그를 평가하고 밀서를 전해주는 일이다. 그런데 이 밀사가 술에 취해 사고를 친다. 아니 정확히는 함정에 빠진 것이다. 이 부분에 고개를 갸웃하지 않을 수 없다. 왕의 중대한 임무를 띤 밀사가 술에 취하다니. 여기서부터 밀사는 사라지고, 밀사를 돕던 역관 박명준이 탐정 역을 맡는다. 그는 임진왜란 당시 납치된 도공의 아들로 10살까지 일본에서 산 인물이다. 비록 지위는 낮지만 그가 보여주는 활약은 통신사 속 그 누구보다 뛰어나다.

 

이 박명준이란 인물은 이 소설에서 중심인물이다. 그는 소위 말하는 일본통이다. 10살까지 일본에서 살았고, 그 후 일본과 교역을 하면서 지식을 쌓아왔다. 그가 수행 역관으로 선택된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 그냥 평범한 역관이었다면 이 놀라운 음모 속에서 허둥지둥하였겠지만 그는 은근히 정을 느끼고 있던 남용익과 조선을 위해 발 벗고 나선다. 하지만 이 살인사건은 단순히 누명만 벗기면 되는 사건이 아니라 그 속엔 일본과 조선을 뒤흔들 거대한 음모가 깔려있다. 이 음모 속에서 만나는 인물들은 과거 그가 일본에 살 당시 인연을 맺은 인물들이다. 이제 왕의 밀사를 둘러싼 음모는 그 자체의 힘으로 누구도 거부할 수 없는 무서운 태풍으로 성장한다.

 

박명준이 소설의 중심인물로 이야기를 끌어나간다면 일본 막부를 둘러싼 힘의 대결과 음모는 긴장감과 의문을 만들어낸다. 막부의 쇼군이 아직 완전히 성장하지 않은 상황에서 권력을 잡으려는 대신들의 물밑 싸움은 대의 명문을 만들어내어 상대를 꺼꾸러트리려고 한다. 계획한 음모는 예상하지 못한 돌출행동으로 막히고, 단서를 가진 사람은 살해당하거나 사라진다. 권력을 위해서라면 제2차 임진왜란도 불사하려는 사람들이 나타나고, 단서를 좇는 박명준의 앞엔 정체를 알 수 없는 적들이 등장한다. 이런 좇고 좇기는 상황과 서로가 의심하는 상황은 사건의 배후와 목적에 관심을 가지게 한다.

 

무대를 조선이 아니라 일본으로 잡으면서 풍부한 자료와 상상력을 잘 결합시켰다. 일본 역사와 신화를 끌고 와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내고, 조선의 전운이 단순히 국내문제만이 아닌 일본과의 관계에서도 생길 수 있음을 보여준다. 역사의 결과를 알기에 전쟁이 없을 것을 알지만 막부 내에서 벌어지는 살인과 음모는 충분히 흥미롭다. 하지만 아쉬운 점도 있다. 팩션으로서 어느 정도 힘을 유지하고 있지만 마지막에 모든 음모를 해설하는 박명준의 존재가 너무 과장된 것 같기 때문이다. 불안해하고 좇기는 와중에 고전추리의 명탐정처럼 모든 사건을 정확하게 설명하는 그의 존재는 감탄의 대상이 아니라 해설자로 전락한 듯한 느낌을 준다. 사건의 진행 속에 충분히 단서를 하나씩 풀어낼 수 있었는데 마지막에 너무 집중했다. 그리고 마지막 엔딩에 보여주는 또 다른 반전은 조금 과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약간의 아쉬움은 있지만 간결한 문장과 빠른 진행과 각 등장인물들의 적절한 역할 분배는 상당히 매력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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