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기의 풍토
이스마일 카다레 지음, 이창실 옮김 / 문학동네 / 200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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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의 궁전’을 읽은 후 참 오랜만에 그의 소설을 만났다. 한 편의 장편소설을 읽은 후 이번엔 단편소설집이다. 개인적으로 장편소설이 더 마음에 든다. 이 개인적 취향엔 나의 몸 상태도 한 몫을 했다. 왠지 모르게 집중력이 흐트러지면서 이 단편소설들이 가슴으로 파고들지 못한 것이다. 또 알바니아란 나라에 대한 정보가 부족함으로써 생긴 문제도 있다. 낯설어도 너무 낯선 그곳의 정치적 상황을 기반으로 쓴 글이기에 순간순간 빠르게 속도를 내지 못했다. 그래도 맑은 정신이 돌아오면 예상하지 못한 재미로 속도를 내었다.

 

단 세 편이 실려 있다. 표제작인 ‘광기의 풍토’와 ‘거만한 여인’과 ‘술의 나날’이다. 가장 분량이 많은 ‘광기의 풍토’가 최근작이고, 다른 작품들은 완성된 시간이 역순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래서인지 뒤로 가면서 조금 더 편하게 읽을 수 있었다. 물론 정신이 맑아온 것도 이유다.

 

‘광기의 풍토’는 바바조 가문을 바라보는 한 소년 이야기다. 바바조 가문 사람들을 탐구하면서 공산주의가 집권한 당시의 분위기를 잘 나타낸다. 재미난 점은 권력을 잡은 공산당의 당원이란 사실이 알려지면서 자살하려고 한 작은 외삼촌의 이야기다. 왜 그 당시 그들이 당원임을 알려지는 것을 두려워했는지 모르는 현실에서 그 시대를 이해하는 것을 사실 어렵다. 거대한 부를 가진 사람들이 공산당이 권력을 잡으면서 발생하는 문제들이 우리의 해방 후 북한과 다른 모습이란 점도 깊이 있는 이해를 하는데 걸림돌이 된다. 하지만 이 순진한 아이의 시선으로 바라본 그 시절의 모습은 익숙한 풍경이다. 이데올로기로 대립하는 형제와 대세를 쫓는 아이들이나 변한 시대보다 옛 주인에 대한 애정이 남아 있는 집시는 우리나라나 다른 나라의 전환기 모습과 너무나도 유사하다. 또 마지막 바바조 할아버지의 장례식 풍경은 아직도 현실과 환상의 경계에서 정확하게 다가오지 못하고 있다.

 

‘거만한 여인’은 중국 소설과 비슷한 느낌을 받았다. 장교에서 출신성분이 나쁜 집안의 여자와 결혼함으로써 자신의 미래가 꺾인 남자의 생존기라고나 할까? 말단직에서 살아남기 위해 그가 보여주는 행동과 생각들이 중국 공산주의 속에서 살아가는 한 가장의 모습과 비슷하기 때문이다. 적절하게 아부하고, 고개를 굽실거리고, 튀지 않으려는 모습은 삶의 어려움을 드러낸다. 공산주의가 됨으로써 자신들이 국내에서 가진 부를 잃게 된 장모의 기대와 불만이 그의 삶과 충돌하고 결합한다. 불만으로 가득한 마음속에서도 결국 가족이란 인식은 행동으로 이어져 발생할 수 있는 파국을 막는다.

 

‘술의 나날’이란 제목은 학창시절 내 주변 사람들의 삶이다. 하루라도 술을 마시지 않으면 몸에 가시가 돋는 사람들의 생활이다. 이 소설 속 두 주인공도 술로 매일을 이어간다. 그 시절의 권태가 강하게 풍기는데 어느 순간 찾아온 알 수 없는 열정이 새로운 곳으로 움직이게 한다. 그 도시에서 벌어지는 해프닝과 오해와 자신들의 권태는 원래의 목적을 잃게 하고, 오해와 오명으로 뒤범벅된다. 이 소설이 작가의 20대 중반에 쓰인 것을 생각하면 자전적 요소가 강하게 담겨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체적으로 작가의 특색이 묻어나는 작품집이다. 40년의 세월을 뛰어넘은 작품들이라 문장이나 소재도 다르다. 단편이다 보니 순간적으로 집중력을 잃으면 중요한 내용을 잊게 되는데 그런 불상사도 조금은 있었다. 다시 읽어야 제대로 그 맛을 알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래도 시대와 국가를 초월한 삶의 다양한 모습들이 비슷하게 다가온 것은 작가의 역량이 아닌가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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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단의 팬더
타쿠미 츠카사 지음, 신유희 옮김 / 끌림 / 200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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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식가, 그들은 어쩌면 축복보다 저주 받은 사람들인지도 모른다. 나같이 둔한 사람은 맛없는 음식도 그냥 가볍게 먹을 수 있지만 그들은 분명히 엄청난 고역일 것이다. 맛있는 것, 더 맛있는 것을 추구하는 과정은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최고의 경지를 추구하는 열정과 노력이다. 하지만 그 광기에 빠져들게 되면 목적을 위해 어떠한 수단도 마다하지 않는다. 바로 거기서 비극은 탄생한다. 그리고 무시무시하고 끔찍한 살인도.

 

맛있는 음식을 싫어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같은 가격이면 맛있는 집을 찾아가는 것이 보통의 발걸음이다. 좋은 재료로 최고의 맛을 내는 것은 실력 있는 요리사라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지만 보통의 재료에서 제대로 된 맛을 이끌어내는 것은 대단한 실력이 필요하다. 이 소설 속에서 이야기를 끌고 가는 두 사람 중 한 명인 프랑스 요리인 코타가 그런 실력을 가지고 있다. 일류 레스토랑에서 실력을 닦은 다음 자신만의 식당을 열어 매일 바뀌는 메뉴를 제공한다. 뛰어난 요리 실력에 미각도 발달되어 있다. 하지만 여기엔 최고의 재료로 환상적인 요리를 만들어내는 요리사와 엄청난 미각을 가진 미식가가 나온다.

 

미식가 나카지마 옹은 정말 대단한 미각과 후각을 가지고 있다. 그를 만족시킬 요리사는 많을지 모르지만 감동시킬 요리사는 거의 없다. 여기에 늘 그를 감동시키는 천재 요리사가 등장한다. 그에 대한 설명을 보다 보면 인간의 감정이 없는 것처럼 느껴진다. 나카지마 옹이 이시구니와 함께 코타의 식당 ‘비스트로 코타’에서 미식가와 팬더의 육식에 대한 이야기는 새로운 정보와 더불어 앞으로 펼쳐질 사건에 대한 단서를 제공한다. 조금 눈치 빠른 사람이라면 알 수 있다. 아니면 이와 비슷한 광기에 휩싸인 사람이 나오는 책을 본 사람이라면 끔찍한 예감에 사로잡힐 것이다.

 

이야기를 끌고 가는 또 다른 축인 형사 아오야마는 이 소설이 미스터리임을 알려준다. 만약 그가 없다면 아마 그냥 끔찍한 소재를 다룬 소설로 생각했을 것이다. 그는 다른 수많은 경찰소설에 나오는 주인공처럼 윗사람이 시키는 일만 하지는 않는다. 수사본부의 방향 설정이 잘못되었을 때 그 틀을 벗어나 자신이 세운 추리에 따라 움직이고, 하나씩 단서를 모은다. 경찰을 모습과 권력을 가진 탐정역이다. 아오야마가 있어 살인사건에 대한 단서들이 하나씩 모이고, 그 단서들은 독자들에게 추리를 하게 만든다. 그렇다고 잘 만들어지고 구성된 추리소설의 모습을 보여주지는 않는다. 다만 편하고 빠르게 읽히면서 재미있고 불편할 뿐이다.

 

사실 책 뒷면에 소개된 냉장고 속 끔찍한 재료는 나에게 그렇게 끔찍하지는 않는다. 다른 소설에서 다루어졌고, 그 요리법을 다룬 책이 있다는 사실도 알기 때문이다. 하지만 끔찍하게 느껴진 것은 그 재료가 아닌 그 재료를 마련한 인간들의 생각과 행동 때문이다. 맛의 끝을 추구하기 위해 벌이는 과정이 너무 비인간적이고 놀랍다. 바로 이 때문에 앞에서 미식가는 저주 받은 사람일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인간이 가진 가장 강한 욕망 셋 중 하나인 이것을 충족하기 위해 벌인 그 일들이 이성을 넘어 욕망에 굴복했기 때문이다. 책 전반부와 중반에 멋진 요리에 대한 묘사로 입안에 침이 고이게 만들었는데 후반에 벌어진 끔찍한 사실은 순식간에 미각을 잃게 만들 정도다.

 

표지의 이미지에 속지 말아야 한다. 대나무를 먹는 팬더와 그 팬더에 양념을 치는 요리사의 모습은 약간 코믹한 느낌을 준다. 미식 미스터리는 맛있는 음식들과 그것을 둘러싼 사건을 예상하게 한다. 요리사와 평론가라는 두 존재가 등장하면서 갈등과 긴장감을 고조시킬 것이라고 생각했다면 잘못된 생각이다. 분명 최고의 요리사와 평론가가 나오지만 그들이 미스터리를 풀어내는 탐정은 아니다. 이 역할은 형사 아오야마다. 다만 그들은 사건의 배경으로 작용하면서 약간은 밋밋한 살인사건에 풍부한 이야기와 상상력을 덧붙여 준다. 그 살인사건 이면엔 우리가 예상하지 못한 엄청난 사건이 숨겨져 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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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실 비치에서
이언 매큐언 지음, 우달임 옮김 / 문학동네 / 200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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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한 남녀가 체실 비치에 신혼여행을 와 겪게 되는 첫날 밤 이야기다. 사랑과 낭만으로 가득해야할 첫날밤이 그들에겐 이별의 순간이다. 이 순간을 그려내는 작가의 필력을 보면서 대단하다고 느꼈다. 두 남녀의 감정과 심리를 섬세하고 아름답게 그려내면서 그들의 삶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왜 그들은 헤어져야 하고 남은 삶의 긴 시간 동안 그 순간을 돌아보고 의문을 가져야 했을까? 누군가를 사랑한다고 생각하는 것과 몸으로 느끼는 반응이 다른 것을 보면서 사랑이 얼마나 오묘한지 다시 한 번 더 생각한다.

 

20대 초반의 두 남녀는 교육을 잘 받았고 순결을 유지한 채 결혼했다. 그 시절엔 많은 사람들이 그랬다고 한다. 한 해 동안 그들은 많은 스킨십을 가지고 사랑을 키웠다. 남자는 늘 성적 욕망으로 가득 찼지만 절제를 하였고, 여자는 남자의 스킨십이 은근히 부담스러웠다. 첫날밤. 얼마나 설레는 시간인가? 남자는 모든 것을 제쳐두고 침대로 가고 싶다. 여자는 그의 깊은 키스나 손길에 거부감을 느낀다. 하지만 그들의 마음과 행동은 생각과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첫 번이라는 것에 그들은 걱정과 두려움을 느낀다. 그리고 미숙한 행동과 감정의 폭발은 파국을 불러온다.

 

삶에서 사랑과 선택의 순간은 늘 있다. 그 순간을 되돌아보면 언제나 왜 그랬을까? 하는 의문이 생긴다. 현실에 아픔이나 어려움이 있을 경우 더 자주 그런 생각이 난다. 작가는 바로 이 순간에 눈길을 돌렸고 멋지게 풀어내었다. 단순히 하룻밤의 이야기라면 더 간결하게 그려낼 수 있었지만 두 남녀가 살아온 삶의 길과 생각들을 그 속에 담아내면서 단순히 두 사람만의 이야기가 아닌 그 시대의 한 모습을 보여준다. 욕망으로 가득하지만 시대의 분위기에 의해 억압되었던 그 시간들. 에드워드가 플로렌스에게 청혼을 했던 그 순간도 사랑 그 이상의 욕망이 충동적으로 작용했다. 그 충동은 그들의 이별에도 이어지니 젊은 시절 혈기와 열정은 무서울 정도로 대단하다.

 

그들이 왜 헤어졌을까? 그녀는 그 문제에 대해 생각한다. 그들이 너무 예의 바르고, 너무 경직되고, 너무 소심하고, 서로에 대해 거의 알지 못하고, 사교적인 배려로 그들의 차이를 덮어버려서 눈을 멀게 했다고. 이것은 그 당시 팽배한 사회 분위기다. 그녀만의 문제가 아니다. 하지만 그들은 이 과정을 통해 얻을 수 있는 두 사람의 미래를 한 순간의 잘못된 행동 때문에 날려버린다. 물론 그들의 삶이 여기서 멈추지는 않는다. 또 다른 기회와 사랑이 다가온다. 그러나 그 순간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기억의 한 칸에 자리를 잡고 불쑥불쑥 튀어나온다. 그리움과 아쉬움을 가지고.

 

이언 매큐언의 소설을 읽을 때마다 놀란다. 언제나 사랑을 다루는데 그 섬세하고 아름다운 문장에 반하고, 삶과 사랑을 풀어서 펼쳐 보여주는 이야기에 빠져든다. 감정을 세밀하고 그려내고, 관계를 풀어내는 과정에서 보여주는 미세한 감정들은 보면서 감탄하게 만든다. 외국 두 남녀의 하룻밤 이야기에서 나 자신의 수많은 미숙한 행동과 그 때문에 생긴 그리움과 아쉬움이 점점이 묻어난다. 그들의 이야기가 나의 기억에 불을 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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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디더블 - 판타스틱 픽션 블랙 BLACK 6-4 리졸리 & 아일스 시리즈 4
테스 게리첸 지음, 박아람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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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자신의 눈앞에 자신이 죽어있는 모습을 발견하면 어떤 기분일까? 이 소설의 시작은 이렇게 문을 연다. 의학학회차 파리로 갔다 돌아온 법의관 마우라가 자신의 집 앞에서 마주한 사실이다. 그녀와 너무나도 닮은 시체를 발견한 그녀의 동료들이나 주변 사람들이 살아 움직이는 그녀를 보고 놀란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이다. 그녀와 닮은 그녀는 누구고, 그녀는 왜 살해당한 것일까? 그리고 그녀의 정체는 무엇일까? 이렇게 많은 의문을 제공하면서 멋지게 출발한다.

 

책 소개에 그녀의 정체가 나온다. DNA 검사 결과 쌍둥이 자매다. 여기서부터 나의 추리와 상상력은 힘차게 뛰어다니기 시작한다. 혹시 유전자 복제와 관련된 것이 아닐까? 아니다. 혹시 그녀의 정체가 증인보호 프로그램 중에 있는 사람은 아닐까? 아니다. 그럼 왜 그녀는 죽었을까? 누가 죽였을까? 이 사건을 둘러싸고 시작한 이야기는 다른 무시무시한 이야기를 이끌어내기 위한 시발점에 불과하다. 그것은 아이를 수확하는 최악의 악당을 보여주기 위한 사전 작업에 불과하다.

 

의사 시리즈 중 첫 권인 ‘외과의사’만 읽었다. 상당히 재미있었지만 할리우드 영화 같은 느낌을 받았다. 그 당시 여주인공 리졸리의 연약한 듯 강인한 모습에 강한 인상을 받았는데 이 소설에선 강인함만 가득하다. 자신의 출생을 둘러싸고 고민하고 괴로워하는 마우라 박사가 오히려 연약한 모습을 보여준다. 출생의 비밀을 하나씩 알게 되면서 느끼는 공포와 두려움이 그녀의 용기를 조금씩 잠식한다. 하지만 이 두 여인들 내면은 아직도 강하다. 그 강함은 물리적 폭력이 아니라 사실을 직시하고 해쳐나가는 용기를 말한다. 이런 여주인공과 달리 매우 심약한 모습을 보여주면서 납치된 임산부 매티는 여자는 약하지만 어머니는 강하는 말처럼 아주 강하다. 이야기 중간에 갑자기 납치된 그녀가 어떤 존재인지 보여주는 마지막 장면은 굉장히 인상 깊다.

 

마우라 박사의 자매 애너의 죽음에서 시작한 과거의 흔적과 새로운 살인사건은 작가의 놀라운 시선 유도에 빠져들게 한다. 범인에 대해 몇 번이나 추리하고 확신을 가지고 있지만 마지막 장면은 전혀 예상 밖의 인물이 등장한다. 공정한 독자와의 경쟁이냐 하고 묻는다면 아니다. 하지만 이 소설에선 그렇게 중요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왜냐고? 그것은 이 소설이 주는 재미가 범인을 맞추는 것도 있지만 새로운 범죄 유형과 마우라 박사의 과거와 현재가 계속해서 의문을 주고 긴장감을 이어가기 때문이다. 또 그녀의 사랑에 대한 갈등은 사람을 기대하게 만들어놓고 조용히 사라진다. 그리고 그녀가 움직인 곳에서 발견된 살인의 흔적은 그녀의 과거와 현재 뿐만 아니라 희생자들의 사라진 흔적을 밝은 곳으로 끌어내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형사 리졸리가 그 흔적들을 가지고 추리한 내용은 지금까지 본 추리소설 악당 중 손에 꼽힐 정도로 잔혹하고 나쁜 놈이다.

 

간결한 문장으로 사건을 만들고 풀어내는 능력은 역시 대단하다. 매력적인 두 여주인공을 배치한 후 새로운 멋진 여성을 등장시킨 일이나 하나씩 사실이 밝혀지면서 드러나는 사실은 긴장감을 고조시킨다. 여주인공들이 나오다보니 남성 사회에서 그녀들이 어떤 대우를 받는지 알게 되고, 사랑이란 이름 속에 담긴 강한 소유욕이 어떤 불행을 불러오는지 알 수 있다. 인간의 욕망이 만들어낸 비극 중 최악 중 하나를 만나면서 느끼는 감정은 착잡하고 가슴 아프다.

 

보통 시리즈의 경우 첫 권부터 보는 것을 좋아한다. 가끔 모르고 중간부터 보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이 시리즈는 너무 평이 좋아 그냥 최근작을 보았다. 주인공이 이어서 나오지만 사건 자체가 독립적이기 때문이다. 다시 앞으로 돌아가 리졸리와 마우라 박사의 과거를 둘러보고 싶다. 거칠고 배타적인 남성 사회에서 두 여주인공이 어려움을 헤치고 사건을 해결한 장면들을 보고 싶기 때문이다. 이 책을 보게 되면서 순서대로 봐야지 하는 장벽이 사라짐으로써 사놓은 지 좀 된 ‘파견의사’를 부담 없이 볼 수 있게 되었다. 이것을 두고 일거양득이라고 해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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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스릴러문학 단편선 Miracle 1
강지영 외 지음, 김봉석 엮음 / 시작 / 200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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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대 이상이다. 사실 많은 기대는 하지 않았다. 단편 추리소설들에게 많은 실망을 한 경험이 있기에 더욱 그렇다. 기대를 많이 하지 않아서 그런지 모르지만 상당히 재미있게 읽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멋진 캐릭터가 등장하는 경우 다음 이야기가 궁금하다. 엮은이가 지적한 할리우드적 기반은 약간 아쉬움으로 남지만 많지 않은 한국 스릴러 작가와 작품을 생각하면 상당히 고무적이다.

 

8편이 실려 있다. 첫 번째 이야기인 ‘인간실격’부터 강한 인상을 준다. 인간을 먹는 괴물과 처절하게 싸우는 한 남자의 이야기다. 괴물과 싸우며 그 자신도 괴물로 변한 남자의 모습은 처절하고 잔혹한 싸움 장면과 비현실적 존재가 잘 어우러진 소설이다. 물론 장편으로 개작하여도 충분히 재미난 소설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나의 왼손’은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는 손 이야기다. 이 소설을 보면서 예전에 본 공포 영화가 떠올랐다. 정확한 제목은 생각나지 않지만 저주 받은 손에 대한 것이다. 물론 이 소설과 다른 이야기지만 이성의 의지를 배반하고 멋대로 움직이는 손의 행동은 그 영화 속 손과 너무 유사하다. 잔혹하고 예상되는 진행은 긴장감을 조금씩 감소시킨다.

 

‘피해의 방정식’은 1980년 광주를 배경으로 한다. 그 참혹했던 공간과 시간을 배경으로 한 남자의 분열된 심리를 다루고 있다. 그때의 광주를 배경으로 수많은 이야기가 만들어졌지만 스릴러 장르에서 충분히 깊이 있는 이야기가 다루어진 것을 본 기억은 없다. 이 소설도 그렇다. 비극의 현장이 가슴속으로 파고들지 못하는 아쉬움이 있다. 호러나 스릴러로 그 시절 광주의 비극을 풀어낼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주었다는 점에 더 점수를 주고 싶다.

 

‘질주’는 좋은 소재를 다루었다. 인간의 욕망을 돈과 삶이란 두 축으로 진행한다. 왜? 라는 이유는 없다. 도박으로 상황이 만들어지고 주인공은 쫓기고 도망 다닌다. 쫓는 자는 잡아서 돈을 얻고자 하고, 도망자와 그를 보호하여 돈을 벌려는 두 축의 이야기가 긴장감을 불러와야 하는데 조금 힘이 딸린다.

 

‘주말여행’은 결말이 보인다. 구성과 진행이 너무 낯익다. 죽이고자 하는 사람과 죽는 이가 뒤바뀐 상황에서 벌어지는 마지막이 긴장감을 불러와야 하는데 조금 약하다. ‘액귀’는 귀신을 다루고 있는데 다른 소설들에서 너무 많이 접한 내용이다. 묘사와 진행이 긴장감을 주기보다 어딘가에서 본 듯한 느낌을 더 많이 주어 약간 산만하게 다가온다.

 

가장 매력적인 두 캐릭터가 나오는 ‘사냥꾼은 밤에 눈뜬다’와 ‘세상에 쉬운 돈벌이는 없다’는 가장 재미있게 읽었다. ‘인간실격’의 주인공이 장편으로 한 번에 끝날 이야기라면 이 소설에 나오는 두 주인공은 연작으로 나와도 충분히 재미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사냥꾼’은 통증을 느끼지 못하는 주인공이 살육의 현장에서 싸우는 장면을 다루고 있고, ‘세상에’는 해결사와 스토커의 대결이 재빠르면서 속도감 있게 다가온다. 개인적으로 이 단편선에서 유일하게 유쾌하게 읽을 수 있는 작품이다.

 

‘사냥꾼’의 살육현장은 처참하다. 부유층이 한 번의 오락을 위해 사람을 잡아놓고 사냥하는 현장에서 무통증 주인공이 보여주는 활약은 반영웅의 등장처럼 느껴진다. 그의 이 특별한 능력 또는 저주와 잃어버린 기억들과 약점을 더 다룬다면 더 많은 이야기가 나올 것 같다. ‘세상에’의 해결사 주인공은 일상의 소소한 이야기에서 시작하여 그 규모를 조금씩 키워나가도 충분히 통할 것 같다. 전직 형사 출신인 경비원 아저씨와 연결시켜 새로운 임무를 만들어내고 밝은 분위기를 좀더 부각시키면 멋진 연작이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약간 아쉬운 점을 많이 쓴 듯하다. 기대 이상의 재미가 있었지만 해외 걸작에 비하면 아직 부족함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가능성과 매력적인 등장인물들이 시선을 끈다. 한때의 바람이 아니라 꾸준히 이런 작품들이 나온다면 우리도 분명히 해외 걸작에 버금가는 멋진 작품들이 많이 나오지 않을까? 이런 기대를 하게 만든다. 최근에 읽은 한국 장르문학 단편선 중 가장 마음에 든다. 몇 권 있지도 않고, 몇 권 읽지도 않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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