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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에 물들다 1 - 흔들리는 대지
아라이 지음, 임계재 옮김 / 디오네 / 2008년 5월
평점 :
예상하지 못한 재미가 가득하다. 처음 몇 쪽을 읽었을 때는 조금 밋밋한 것이 아닌가 생각했다. 티베트 투스의 둘째 아들로 태어난 주인공이 바보로 불리고, 바보와는 다른 생각과 행동을 보여줘 어색함을 느꼈다. 하지만 주머니 속 송곳처럼 바보로 불리는 외피를 깨고 탁월한 능력을 보여주면서 속도도 붙고 재미있었다. 끝까지 읽은 지금도 그의 몇 가지 바보스런 모습은 그의 정체를 의심하게 만들 정도다. 행운과 뛰어난 판단을 가진 바보로.
티베트 소설로는 처음이다. 투스라는 지위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왕과 같은 권력을 누리지만 정확하게 우리가 알고 있는 왕과는 다르다. 부족장이라고 하기엔 그가 다스리는 지역이 너무 광범위하다. 그냥 티베트의 절대권력을 가진 투스라는 지위가 있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이 투스의 둘째 아들이 만약 똑똑하다면 어떻게 될까? 아마 형제간의 쟁탈전이 벌어질 것이다. 하지만 다행히 그는 바보로 태어났다. 덕분에 그의 아버지와 형은 편안하게 그들 대하게 된다. 그러나 그가 능력을 보여주면서 고민과 갈등이 생긴다. 재미난 대목이다.
그가 태어나고 자란 시절은 세계가 격변하던 때다. 티베트 각 지역을 다스리던 투스들이 새로운 변화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하던 시대다. 이때 주인공 아버지 마이치 투스가 보여준 발 빠른 대응은 그의 통치지역을 부유하고 강력하게 만들기에 충분하다. 신식무기로 군대를 무장하고, 양귀비 재배로 부를 축적한다. 하지만 이 양귀비 재배는 언제나 부를 약속하지 않는다. 거대한 시장인 중국의 상황에 따라 그 가격이 변하기 때문이다. 곡식을 심어야할 곳에 양귀비를 재배한다면 식량이 부족해지는 것은 당연하다. 이 변화의 순간부터 바보는 행운인지 능력인지 알 수 없는 업적을 보여준다. 여기부터 몰입도도 높아지고 재미있어진다. 한 인간의 성장과 시대의 변화를 동시에 보여주기 때문이다.
바보가 보여주는 행동과 판단은 전혀 바보스럽지 않다. 고정된 사고에 묶여 있던 사람들에겐 바보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미래를 알고 있는 독자에겐 탁월한 판단이자 능력이다. 물론 그는 냉철하고 정확한 판단만 보여주지 않는다. 아름다운 타나에게 빠져 정신을 잃고, 갑자기 감정에 휘둘린다. 인간적 약점이 곳곳에 드러난다. 마음속으로 강렬하게 원했던 투스의 지위도 순식간의 판단 착오로 얻지 못한다. 하지만 그가 누린 지위에 대한 평가는 마지막에 나온다. 투스들의 투스. 그가 이룬 업적과 능력에 대한 가장 정확한 표현이다. 하지만 그 또한 시대의 변화 속에선 어쩔 수가 없다. 무지와 감정이 그를 평온하게 놓아주지 않는다.
‘색에 물들다’에서 색은 어떤 의미일까? 가장 먼저는 성(性)이 떠올랐다. 어린 나이에 성에 눈을 뜨고 미모에 휘둘리기 때문이다. 책의 마지막에 와서는 국민당과 공산당을 뜻하는 두 색, 흰색과 빨간색으로 이해했다. 그의 마지막 모습과도 같이 연상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에 와서는 그냥 변화로 생각하고 싶다. 하나의 색이 아닌 시간과 시대의 변화를 상징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아니면 이 모든 것을 포괄하는 의미가 있지 않을까? 꿈보다 해몽이란 말처럼 너무 앞서가는 것일까?
화려하지도 않고 정밀하게 계산된 모습을 보여주지 않지만 책을 덮고 난 지금은 좋고 재미난 책을 읽었다는 포만감이 생긴다. 한 바보의 성장과 티베트의 몰락을 동시에 보았기 때문이다. 세계가 변하는 속에서 자신이 변하지 않거나 뒤처지는 경우 어떤 결과가 나오는지와 곳곳에 담겨 있는 풍자는 예상하지 못한 즐거움이다. 그러고 보니 아직 주인공 바보의 이름도 모르고 있다. 나도 바보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