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의 밥상 - 농장에서 식탁까지, 그 길고 잔인한 여정에 대한 논쟁적 탐험
피터 싱어.짐 메이슨 지음, 함규진 옮김 / 산책자 / 200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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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세 가족의 식단을 통해 우리가 먹는 것에 대한 윤리를 고찰한 책이다. 읽는 내내 이전에 읽었던 ‘잡식동물의 딜레마’라는 책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책속에서 피터 싱어에 대해 이야기한 것을 기억하고 있다. 그런데 이 책에서 마이클 폴란의 예를 들면서 인용하고 논쟁을 이끌어내고 이야기를 풀어내고 있다. 이 두 책의 구성을 보면 상당히 유사한 점이 많다. 자신들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위해 앞의 두 단계를 자세히 묘사하고 경험하면서 마지막 장에서 논점을 강하게 부각시킨다. 이 과정을 따라가다 보면 자연스럽게 고개를 끄덕이게 되는데 전체적인 전개와 흐름이 잘 다듬어져 있기 때문이다.

 

먹을거리와 윤리는 쉽게 생각하기 힘든 주제다. 재래시장이나 어릴 때 동물이나 고기를 잡는 모습을 본 사람이라면 잔인하다는 사실을 알겠지만 대부분 단발성 사고로 그치거나 무감각해지고 만다. 덕분에 대부분 사람들이 편하게 맛있게 육식을 한다. 그렇다고 이 사람들이 모두 동물들이 잔인하고 추악하게 살해당하는 것을 찬성하지는 않는다. 다만 그들에겐 이 동물들이 자신들에게 먹을거리 이상의 의미를 부여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저자들은 현실의 세 가족을 통해 우회적으로 길을 나선다.

 

첫 번째는 미국 보통 가족이다. 할인마트에서 먹을거리를 구입하고, 아이들과 외식하러 패밀리레스토랑을 찾는다. 현대 미국 식품산업을 상징하는 닭고기에서 먹을거리에 대한 긴 여정은 시작한다. ‘잡식동물의 딜레마’에서 옥수수부터 시작한 것을 떠올리면서 빠져들었다. 과연 그 닭고기는 싼가? 그리고 윤리적인가? 라는 두 명제를 다루면서 돼지나 소로 이어진다. 사실 우리가 구입하는 최종가격은 싸다. 하지만 사회 전체적으로 볼 때 과연 싼가? 아니다. 다른 책에서도 보여주었듯이 막대한 보조금과 환경 파괴로 인한 간접 비용들이 더 많이 들고 있다. 그 사이에서 이익은 대부분 몇 개의 거대 기업이 챙긴다. 그러면 과연 위생적이고 건강에 좋은가? 아니다. 사육장의 환경은 처참하고 잔인하고 열악하다. 그들은 사육장에 대한 공개를 꺼려하고 숨기면서 위생과 영양과 윤리 등을 외친다. 놀랍고 그 뻔뻔함에 다시 놀란다.

 

두 번째 가족은 양심적인 잡식주의자다. 여기서는 유기농과 상표와 물고기에 대해 많은 부분을 다룬다. 분명 유기농 식품은 기존 식품에 비해 가격이 비싸다. 영양에서도 더 좋지 않을까 생각한다. 하지만 좀 더 파고들면 점점 새로운 사실이 나온다. 과연 윤리적인가? 상표를 전적으로 신뢰할 수 있는가? 답은 아니다. 좀더 윤리적으로 다루는 업체가 있지만 모두가 도축되는 과정에서 고통 없이 도살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또 어류에 대한 저자의 인식은 새로운 사실을 알려준다. 남획으로 인한 어종의 멸종만이 아니라 환경이 파괴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어느 부분 알고 있었지만 그것은 단순히 연안해역의 문제였지 공유해역까지 문제가 될지는 몰랐다.

 

마지막은 완전한 채식주의자다. 사실 저자들은 이 사람들을 위해 긴 글을 쓴 것이다. 윤리적인 먹을거리에 대한 그들의 주장은 여기에 담겨있다. 최종적으로 사람들이 채식주의자가 됨으로써 자원 낭비나 종의 멸종이나 환경파괴 등을 막을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현실을 무시하지는 않는다. 육식과 채식주의자들의 논쟁을 담아내면서 윤리라는 형이상학적 이야기로 생각에 빠지게 한다. 종의 멸종보다 그가 중심을 두고 있는 것은 잔혹한 살육이나 고통이다. 영양에 대한 부분이야 수천 년 동안 스님들이 먹어 온 것이라 의심하지 않지만 그 통증이란 부분에 가면 나의 인식은 삐딱해진다. 눈에 보이거나 측정이 쉬운 통증에 집중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채소나 야채나 나무들은 통증이 없다는 말인가? 차라리 이 부분에서 불교의 윤회설이 좀더 설득력이 있지 않나 생각한다.

 

여기서 다루어지는 육식에 대한 논쟁은 뒤로 하고, 그 세부 사항만 읽더라도 많은 것을 배운다. 무역과 신토불이에 대한 것이나 환경오염이나 좋은 먹을거리에 대한 분석은 인식의 지평을 넓혀준다. 잔혹하고 열악한 사육현장에 대해서는 이전부터 알고 있었지만 현실에 대해 눈과 귀를 덮고 있는 정부 관계자들에게 읽어보라고 권하고 싶다. 죽음의 밥상이란 자극적인 제목이 책 내용과 어느 정도 부합하지만 원 제목인 ‘우리가 먹는 것에 대한 윤리학’이 더 명확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뭐 마케팅에서는 이 제목이 더 강한 인상을 주겠지만. 마이클 폴란의 책을 인상 깊게 읽은 사람에게 이 책을 더욱 권하고 싶다. 비교하거나 서로 보충적인 내용이나 다른 시각이 읽는 즐거움을 주기 때문이다. 책 전체가 읽기 힘든 사람이라면 이 책의 마지막 장인 ‘무엇을 먹을 것인가?’라도 읽으라고 하고 싶다. 책 전반적인 것이 잘 요약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제 단순히 먹을거리가 아닌 다른 종에 대한 윤리까지 우리가 생각해야 시대가 된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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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져가는 것들 잊혀져가는 것들 - 그때가 더 행복했네 사라져가는 것들 잊혀져가는 것들 1
이호준 지음 / 다할미디어 / 200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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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과 그리움으로 가득 차있다. 사라지고 잊혀져가는 것들을 사진과 함께 담아낸 이 책이 읽는 내내 옛 기억을 되살려주었다. 이젠 우리 주변에서 점점 사라지고 낯설어지는 용어와 단어들이 작가의 글과 사진과 함께 아련한 추억을 떠올려준다. 예전엔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있던 것들이 산업화와 생활의 편리 때문에 희귀하고 박물관의 유물처럼 변하고 있다. 작가는 이런 것들을 멋지게 한 권의 책속에 살려내었다.

 

모두 네 꼭지, 사십 편으로 엮었다. 각각 마다 문장과 서술을 달리하여 풀어내는데 읽다보면 어떤 부분은 자신의 경험담 같고, 어떤 부분은 다른 사람의 기억을 빌려 그려낸 듯하다. 세부적으로 들어가면 나의 경험이나 기억과 다르지만 전체적인 윤곽에서 보면 아득한 옛 기억이나 추억으로 되살아난다. 이 사라져가고 잊혀져가는 것들 중 아쉬운 것도 있고, 약간은 담담한 느낌을 주는 것도 있고, 어떤 것은 어쩔 수 없는 시대상을 반영하고 있다.

 

네 꼭지에 담긴 사진이나 이야기 속에 나의 경험과 동떨어진 것을 꼽는다면 첫 꼭지다. 내가 자란 곳 또한 산업화로 번성했던 도시다보니 할아버지 집에 가서야 겨우 볼까 하는 원두막이나 돌담이나 초가집이나 다랑논이나 장독대다. 죽방렴이나 염전 같이 삶의 터전이 다른 곳에 있거나 섶다리나 대장간처럼 이미 사라져버린 것들도 있다. 오히려 텔레비전에서 더 자주 보았는데 가끔 이런 장소나 풍경은 그리움과 여유와 즐거움을 준다.

 

둘째 꼭지에 담긴 추억과 기억들은 어린 시절 우리집이나 친척집 등에서 자주 보아온 것이다. 고무신이나 등잔에 대한 이야기는 나보다 더 이전 일이고, 연탄이나 손재봉틀, 괘종시계, 도시락은 순간적으로 감상적인 분위기로 빠져들게 만들었다. 특히 예전에 연탄 때문에 일가족이 죽는 경우가 많아 뉴스시간이면 한 달에 몇 번씩이나 나오던 것이 생각난다. 도시락에 대한 추억은 지금 생각해도 부끄러웠던 순간과 즐거웠던 순간을 동시에 떠올려줄 정도로 정겨운 기억이다.

 

세 번째, 마지막 꼭지에 가면 다시 나의 기억과 멀어진다. 몇몇은 얼마 전에도 경험하였지만 대부분 이것을 보기 위해서는 작가의 말처럼 힘겹게 찾아가지 않는 이상 주변에서 보기 힘들다. 이들 중 몇몇은 예전에 너무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있던 것이라 관심의 대상이 아니었다. 근데 이렇게 시간이 지나고 하나씩 사라지고 잊혀지는 것을 보니 문득 왜 그때 유심히 자주 챙겨보지 못했을까 하는 아쉬움이 생긴다. 내원마을처럼 아예 마을 자체가 사라지는 경우를 생각하면 더욱 보고 싶어지는데 참 사람 마음을 알 수 없다. 또 동시상영관이나 오래된 극장에 대한 기억은 학창시절 빼놓을 수 없는 추억인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나와 비슷한 경험을 했는지 보면서 살포시 미소를 짓는다.

 

재미있고 유쾌하며 아늑하고 따뜻한 시간을 주는 책이다. 책 속에 나오는 공간과 시간을 경험하지 못한 사람들에겐 그냥 밋밋하고 낯설고 신기한 풍경일 것이다. 조금이라도 그 시절을 경험한 사람들에겐 과거의 시간 속으로 타임머신을 타고 떠나는 기분이지 아닐까 생각한다. 유려하면서 잘 다듬어진 문장과 잘 찍은 사진은 이런 기분을 더욱 북돋아준다. 너무 빠르게 변하는 세상 속에서 그 변화가 어쩔 수 없는 것들이 태반이지만 이 기억과 기록들이 우리의 삶을 더욱 풍부하게 만들어주는 것은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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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이러 갑니다
가쿠타 미쓰요 지음, 송현수 옮김 / Media2.0(미디어 2.0) / 200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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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당히 자극적인 제목이다. 이 단편집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작품의 제목이기도 하다. 책은 처음부터 끝까지 누군가를 죽이고 싶은 마음으로 가득하다. 하지만 실천으로 옮겨지지는 않는다. 우리가 일상에서 느끼는 살의를 다룬 이 단편집이 나의 마음 한쪽에 자리 잡은 어두운 그림자를 조금 들추었다는 점은 놀랍고 누구나 가지는 마음이라는 것에 다시 한 번 더 놀란다.

 

누군가를 죽이고 싶은 마음은 누구나 가지고 있을 것이다. 살인을 다룬 수많은 책이나 영상물을 보다보면 이것을 실천으로 옮기는 것은 순간적 충동이 제어되지 않거나 그 영향이 오랫동안 지속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 무서운 감정을 다룬 이 소설이 결코 편하게 읽히지 않음은 어쩌면 당연한 것인지 모르겠다.

 

첫 편을 보고 역시 믿을만한 작가라고 생각을 하고 계속 읽다보면 끝으로 가면서 마음이 무거워짐을 느끼게 된다. 며칠을 두고 천천히 읽는다면 약간 덜할지 모르지만 단숨에 읽기에는 개인적으로 약간은 힘겨운 소설집이다. 다양한 인물과 다양한 경우를 예로 들면서 보여주는 그들의 감정은 우리가 일상에서 쉽게 느끼지만 또한 쉽게 잊어버리는 감정들이다. 순간에 타올랐다가 곧바로 사라지는 감정들인 것이다. 하지만 어느 날 그 감정이 우리를 사로잡는다면 아마 어떤 일이 벌어질까? 다행이 여기까지 작가는 나아가지 않는다. 분노와 증오와 살의가 자신을 밀어붙이지만 실행으로 옮겨가기엔 그들은 너무 평범한 일상을 사는 평범한 사람들인 것이다.

 

초등학교 시절 자신을 괴롭힌 여선생에게, 험담과 악의와 비방으로 자신을 괴롭히는 이전의 남자친구에게, 자신의 기대에 부흥하지 않고 살찐 딸에게, 결혼을 약속하고 아이를 임신하였지만 아이를 지우고 다른 남자에게 간 이전의 여자친구에게 품고 있는 그 감정은 결코 지속적인 것은 아니지만 상당히 오랫동안 그들을 괴롭히고 자신들의 삶마저 많은 부분 파괴한다. 알 수 없는 불안과 집착과 혐오 등으로 자신을 괴롭히거나 포기하면서 살아가는 그들의 모습은 우리의 또 다른 모습이다.

 

‘인생 베스트 텐’에서 느낀 감정이 이 소설엔 많이 없지만 그녀의 수상 내역이나 세심한 관찰을 보다보면 앞으로 계속 관심을 두고 읽어야 하는 작가임에 틀림없다. 집에 묻혀있는 그녀의 책 몇 권을 다시 관심을 두고 읽어봐야겠다. 그런데 지금 나는 누굴 가장 죽이고 싶을까? 음! 당장 생각나는 사람이 한 명 있다. 하지만 말할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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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Diary - 니콜라스를 위한 수잔의 일기
제임스 패터슨 지음, 서현정 옮김 / 북스캔(대교북스캔) / 200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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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콜라스를 위한 수잔의 일기라는 부제처럼 소설의 대부분은 수잔의 일기로 구성되어 있다. 흔히 보는 사랑이야기처럼 전개되는데 사실 이 작가가 유명한 스릴러 작가임을 생각하면 이 소설에 대한 기대는 크지 않다. 한때 몇몇 작품에서 대단한 속도감과 재미로 나를 사로잡았는데 자주 읽다보니 비슷한 구성과 진행으로 조금 질리기도 하였다. 그렇다고 그의 책을 포기하기엔 그 속도감에 대한 중독이 너무 강하다. 그래서 약간은 매너리즘에 빠진 듯한 요즘 책보다 이전 책을 구해보려고 하고 있다.

 

큰 기대가 없이 보았기 때문인지 생각보다 나쁘지는 않았다. 다섯 개의 공에 대한 이야기는 공감이 가는 부분이고, 가끔 보여주는 작가의 이력을 생각하게 만드는 가벼운 장난들은 웃음을 짓게 한다. 글 속에 자신의 특기를 잘 살려내어 쉽고 빠르게 읽을 수 있지만 가슴속 깊이 파고드는 느낌이 많이 없다. 빠른 장면 전환과 간결한 대사와 문장은 변함없지만 역시 울림을 전해주지는 못한다.

 

출판사 편집장 케이티과 첫 시집을 출간하는 시인 매트가 만나 사랑에 빠진다. 어느 날 이 남자에게 아내와 아들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리고 헤어짐과 동시에 그녀에게 한 권의 일기장이 날아온다. 그 속에 담겨있는 그 남자의 아내 수잔이 그녀의 아이 니콜라스에게 쓴 이야기들이 들어있다. 그 일기장을 읽으면서 느끼는 케이티의 감정과 뒤에 드러나는 충격적인(?) 사실이 그녀를 새롭게 만든다. 수잔에 대한 매트의 사랑, 매트와 니콜라스에 대한 수잔의 사랑, 그리고 행복했던 기억들이 가득 들어있는 일기장과 마지막 매트의 편지. 이 모든 것들이 편안하게 읽힌다.

 

가끔 결말을 알지만 재미난 소설을 만나기도 한다. 하지만 대부분 결말이 눈에 들어오는 순간 흥미는 반감된다. 긴장감을 만들어내는 스릴러 등에서 그 진행이 눈에 흔하게 들어온다면 재미는 반감될 것이다. 사랑이야기에서 두 남녀가 사랑에 부딪힌 암초를 어떻게 넘고 결말이 어떨까 예상하는 것은 스릴러의 결말 못지않게 흥미로운 대목이다. 그런데 이 소설은 중반부터 눈에 들어온다. 예정된 결말을 향해 나아가 긴장감을 떨어트린다. 다행히 간결한 문장과 장면 전환 덕에 그렇게 지겹지는 않다. 영화로 만든다면 하고 생각하게 만드는 장면들과 진행임을 생각하면 그의 글쓰기가 얼마나 영상에 비중을 두는지 알게 된다. 소설로써 큰 매력을 느끼지 못했지만 영화로 만든다면 어떨까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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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삼킨 책
볼프람 플라이쉬하우어 지음, 신혜원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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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당히 자극적인 제목이다. 세상을 삼킨 책이라니 도대체 어떤 책일까 호기심을 자극한다. 헌데 친절하게도 책 표지에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임을 알려준다. 학창시절 힘겹게 겨우 한 번 읽은 이 책이 세상을 삼킨 책이라니 놀랍다. 철학을 전공했다면 몇 번이라도 읽고 그 의미를 이해하려고 했겠지만 읽었다는 포만감을 중시했던 그 시절을 생각하면 그냥 스쳐 읽었을 뿐이다.

 

소설은 회상 형식으로 시작한다. 한 노인과 그의 손녀가 변한 세상의 도구인 기차를 타고 50년 전 여인을 찾아간다. 그녀의 이름은 막달레나. 단순한 로맨스를 다룰 것처럼 보여주는 도입부와는 달리 과거 속 한 시간과 공간에서 만나게 되는 것은 처참한 죽음과 살인이다. 주인공 니콜라이의 직업은 의사다. 그 당시 전문직으로 현대물에서 전문직 종사자가 주인공을 등장하는 것과 유사한 설정이다. 의사가 주인공이다보니 의사의 시각과 해석이 많은 부분 등장하는데 읽다보면 불과 200년이 조금 더 지났을 뿐인데 의학수준에 이렇게 큰 차이가 있다는 사실에 다시 한 번 더 놀란다. 뭐 다른 책에서 현대의학이 본격적으로 시작한 것이 얼마 되지 않았다는 것을 읽었지만 그래도 늘 새롭게 다가오는 사실이다.

 

니콜라이는 대학에서 의학을 전공한 후 자신의 마을에서 발생한 고양이들의 죽음을 둘러싼 괴소문과 대책회의에 자신의 견해를 밝혔다가 비웃음을 산다. 이 일로 그는 신중해지고 새로운 마을에서 새롭게 시작할 수밖에 없었다. 이때가 1780년이다. 늦은 밤 일상 진료에 지친 그에게 한 하녀가 찾아온다. 자신의 영주가 죽어가니 진료를 부탁한다. 힘겹게 발걸음을 옮긴 그에게 알도르프 백작은 시체로 모습을 드러낸다. 그냥 단순한 죽음이 아니다. 시체가 발견된 이틀 후 제국에서 조사관이 도착할 정도다. 이 조사관 디 타시는 냉혹하면서 거침없다. 이어서 발견되는 시종 젤링의 처참한 주검과 신비스러운 소녀 목격자 막달레나의 등장은 곳곳에서 벌어지는 우편마차 습격사건과 더불어 단순한 음모나 살인사건이 아님을 암시한다.

 

작가는 살인사건과 음모를 연결하면서 이야기를 풀어간다. 당시 독일에 대한 역사를 가지고 있다면 더 많은 재미를 누리겠지만 아쉽게도 나의 지식은 그것까지 미치지 못한다. 하지만 책을 읽는데 지장을 주지는 않는다. 백작의 죽음과 그를 둘러싸고 벌어진 사기와 그 사기로 만들어진 거액이 사라진 것은 조사관 디 타시를 긴장시키기에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 이 엄청난 금액은 군대를 무장할 정도라고 하니 어쩌면 당연하다. 그러니 이 냉혹한 조사관이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움직이는 모습을 보면 절로 긴장감을 불러온다. 단서를 찾기 위해 죽은 시체를 헤집는 모습은 상당히 충격적이고 그의 특징을 잘 나타내어준다. 그러나 아쉽게도 그의 활약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한다.

 

책을 읽으면서 계속해서 궁금했던 것은 언제 <순수이성비판>이 나올까 하는 것이다. 출판사에서 세상을 삼킨 책이 칸트의 책임을 알려주지 않았다면 알 수 없었을 정보지만 전체적인 흐름 상 나올만한 대목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비밀조직과 음모와 살인사건이 엮어있는데 한 권의 책이 사건의 단서로 작용할만한 모습을 보여주지 않고 있다. 물론 이것은 작가의 구성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다. 이 부분에선 움베르트 에코의 <장미의 이름>을 연상하게 만든다. 세상을 변하시키는데 가장 큰 역할을 한 것이 문자와 책임을 알고 있기에 때문이다.

 

전체적으로 이 작가의 다른 작품인 <퍼플라인>에서 약간 지루함을 느꼈는데 이번엔 빠르고 재미있게 읽었다. 그렇다고 아쉬움이 없는 것은 아니다. 처음에 나온 고양이들의 죽음에 대한 해답을 보여주지 않는 점이나 뒤로 가면서 드러나는 사실들이 명확한 인상을 심어주지 못하고 있다. 한 권의 책이 세상에 어떤 여파를 미치게 되었는지 보여주는 장치가 약하다. 또 냉혹한 조사관 디 타시를 끝까지 살리지 못한 것이나 우편마차 습격이 너무 싱겁게 마무리되었다. 이런 아쉬운 점에도 불구하고 작가가 정신사적 범죄소설이라고 붙인 것에는 동의를 한다. 역사와 철학과 살인이 어우러져 만들어내는 긴장감과 재미가 살아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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