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학 지능 - 인공지능은 할 수 없는 인간의 일곱 가지 수학 지능
주나이드 무빈 지음, 박선진 옮김 / 까치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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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와 함께 살아가려면 필요한 것들

- 수학 지능

 

주나이드 무빈 지음

박선진 옮김 [까치] (2023)

 




현대 사회가 너무나 빠르게 변하고 있음을 매일 피부로 느낀다. 얼리 어답터가 아닌 나로서는 이런 변화에 발맞추어 가는 일이 이따금씩 일어나는 행사가 아니라 일상이 된 느낌이다. 하지만 깊은 산 속에 들어가지 않는 이상, 기술의 발전은 나를 가만히 놔두지 않을 것이다. 이 소용돌이의 한 가운데에 AI라는 화두가 있다. 최근에 등장한 주제는 아니지만, 지난 몇 년 사이 그 변화의 조짐이 심상치 않다. 그렇게 느끼는 사람이 나만은 아닐 테다. 더 이상 뒤처지지 않으려고 해도 빠르게 다가오는 시대를 어떻게 마주해야 할지 망설여지기도 한다.


영국의 수학자이자 교육자, 작가인 주나이드 무빈의 수학 지능AI시대의 핵심 분야인 수학을 중심에 놓고, 이 거대한 변화의 시대를 어떻게 맞이할 수 있을지 말한다. 수학자는 AI의 본질에 대해 말하고, 나아가 우리가 이 현실을 어떻게 바라볼 수 있을지 힌트를 준다. 무엇보다 미지의 대상에 대해 조금이나마 이해가 생겨난다면 우리는 두렵지 않게 다가올 미래를 맞이할 수 있지 않을까.


2024년 노벨 과학상 수상자의 연구 분야를 들어본 사람이 많을 것이다. 물리학상과 화학상 분야에서 모두 AI관련 기술이 핵심적인 도구로 활용된 점이 눈에 띈다. 이 분야는 이미 수십 년 이상 활용되어 왔지만, 작년의 노벨 과학상 발표 소식은 AI관련 기술이 이제는 첨단 연구에서도 중요한 도구이자 파트너로 활용되고 있음을 대중에게도 알린 사건이 아니었나 싶다. 물론 이 조짐은 2016년 구글의 딥마인드에서 개발한 알파고와 세계 정상급 바둑기사 이세돌의 대국에서 이미 널리 알려진 바 있다. 이 사건은 세계에 던진 하나의 충격이었다.


인류 역사에서 모든 사회는 새로운 발명이나 기술과 같은 변화의 조짐에 동요한 바 있다. 이 변화에 먼저 참여한 소수의 사람들과 달리, 대다수의 사람들은 두려움을 느끼거나 저항하기도 했다. 왜 안 그렇겠는가? 오히려 이런 반응은 지극히 인간적이고 자연스럽다. 수학 지능의 저자 주나이드 무빈은 급격한 변화에 나처럼 당황할 것 같은 독자를 위해, 우선 수학자의 관점에서 기계(AI)와 인간의 차이에 주목한다. 인간이 할 수 있지만 기계는 (아직) 하지 못하는 지점에 주목한다. 이미 알려져 있지만 제한적인 지식으로부터 새로운 통찰을 알아내는 인간의 추정 능력, 이 지식을 압축하고 효과적으로 체계화하는 표상 능력, 파악된 대상들 혹은 지식들 사이의 연관성과 의미를 찾아내는 추론 능력, 주어진 규칙을 벗어나 새로운 창의성으로 나아갈 수 있는 상상력, 그리고 질문하는 지적 호기심을 언급한다. 이러한 지능들은 아직 AI가 도달하지 못하는 인간만의 역량이라는 것이다.


저자는 인간의 이 다섯 가지 지적 능력을 특별히수학적 지능이라고 표현한다. 그는 기계가 구현하지 못하는 수학 지능의 장점을 언급하며, 관심사인 교육에까지 염두에 두고 있는 듯하다. 하지만 인간이 이런 역량을 갖추는 것만으로는 여전히 부족함을 느낀 듯하다. 왜냐하면 극도로 고도화되고 복잡한 인간 사회를 특출한 개인 혼자 이끌어나갈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인간이란 홀로 살아갈 수 있는 존재가 결코 아니기에, 저자는 여기에 조율협동의 역량을 추가한다. 특히 이 두 가지 특질은 AI가 스스로 구현하기 힘들기도 하거니와, 기술적으로 완성되었다고 해도 AI에게만 맡길 수도 없는 영역이라고 생각한다.


이는 무엇보다 AI에게 아직 마음이 없기 때문이다. 마음을 한 마디로 정의하기는 어려운 일이지만, 많은 연구자들은 인간의 마음이 신체를 매개로 생겨난 생명 현상이라는 데 주목한다. 신체를 지닌 존재로부터 생겨난 마음을 달리 표현하면 주체성이라 볼 수 있겠다. 저자는 수학적 지능이 우리에게 선사한 가장 큰 선물은 스스로 생가하고 능동적으로 다양한 발견의 단계를 탐색할 수 있는 자유, 즉 주체성이다”(326)라고 말한다. 주체성이 결여된 AI에게 아무리 많은 데이터를 학습시킨다한들, 결국 인간의 개입 없이는 어떤 결정도 내릴 수가 없다. 나아가 인간에게 도움이 되는 결말을 기대할 수도 없다. AI기술이 사람들에게 두려움을 일으킨다면, 바로 이런 지점이 아닐까 싶다.


이런 맥락에서 저자가 조율협동의 중요성에 대해 언급하는 이유가 무엇보다 인상적이다. 현재 지구에는 기후 문제와 같은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지만, 80억 명이 넘는 인구가 집단 지성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고 있는 듯하다. 하지만 기계가 아닌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메타 인지이기도 하다. 끝없이 달려가기만 하는 세계를 잠시 돌아보고 멈추게 할 수 있는 역량이 우리에게 있는 것이다. 인간에게는 자신의 실수를 돌아보고 수정할 수 있는 지연의 윤리가 깃들 여지가 있기 때문이다. 바로 이 점이 저자가 이야기하는 조율의 역량이라 이해한다.


여기에 집단 지성이 발휘되는 과정에서도 여러 문제점이 생겨날 수 있다. 소수의 지도자나 선두를 맹목적으로 따를 때 집단 전체가 위험해질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저자는 우리에게 지연의 윤리에 더하여, 집단의 다양성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지금 인류가 직면한 위기에 대응하고 극복하기 위해 인지적 다양성이 높은 집단 지성의 힘이 필요함을 강조하는 것이다. 이를테면,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를 증명하느라 홀로 7년 간 칩거한 수학자 앤드루 와일스도 있지만 현대에서는 아주 드문 사례다. 오히려 방대한 협업을 통해 수많은 논문을 펴낸 헝가리 수학자 폴 에르되시의 사례가 인상적이다. 다만 독자로서 내심 한 가지 의문은 남는다. 이토록 극도로 분열되고 원자화된 사회에서 효과적으로 협동의 가치를 구현할 수 있을까 싶은 것이다. 이 문제는 현대 사회가 직면해 있는 큰 도전이 될 것이다. 무엇보다 인류의 생존과 직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수학자이자 교육자로서 저자는 AI가 도달하지 못한 역량, 곧 수학 활동을 하면서 느낄 수 있는 만족감을 언급한다. AI가 아무리 영리해져도스스로 한 작업에 대해 감탄하고 만족해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 만족감의 의미가 공동체적이라는 점에서 주목해볼 만하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수학의 진정한 만족은 다른 사람들로부터 배우고 그러한 배움을 다른 사람들과 나누는 데에서 나온다.”(308) 이는 앞서 언급한 집단 지성의 중요한 전제 조건이기도 할 테다. 그는 책 전반을 통해 인간과 기계의 차이점에 주목하지만, 우리가 단순한 기술 혐오에 빠지거나 기술에 압도되어서도 안 된다고 여긴다. 그는 우리의 자리를 확인하고자 오래 고민해왔을 터이다. 현재의 인류는 AI를 비롯한 기계에 거부하거나 저항할 수 있는 단계는 아니다. 인간의 핵심적인 협업 파트너로서, 그리고 지적 안내자로서 AI를 대할 수 있으려면, 무엇보다 수학 지능의 역할이 중요하다고 하겠다.





[1] "컴퓨터는 세상에 대한 모델을 구축하거나 그 해답이 타당한지 판단하지는 못한다. 인간의 역할은 각 모델의 토대가 되는 전제, 모델에 투입되는 특정 입력값의 신뢰성, 출력물의 타당성을 평가하는 능력에서 비롯된다."(76) - P76

[2] "우리 뇌는 철학자 존 로크가 말한, 주변 환경에 의해서 그 내용이 채워지기를 기다리는 ‘빈 서판(Tabula rasa)’이 아니다."(105) - P105

[3] "사고와 기억은 자연적 처리 환경의 일부로서 신경세포의 연결망 전체에 분산되어 있다."(113) - P113

[4] "수학은 놀랄 만큼 압축적이다. (...) 이러한 압축에 따르는 통찰력이야말로 수학의 진정한 기쁨 중 하나이다."(118, 필즈 메달 수상자 윌리엄 서스턴의 말) - P118

[5] "돌더미를 쌓는다고 집이 되지 않듯이 사실을 축적한다고 과학이 되지는 않는다."(120, 수학자 앙리 푸앵카레의 말) - P120

[6] "모든 수학자는 가장 생생하고 이해하기 쉬운 표현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예술가이다."(128) - P128

[7] "인간 지능을 일반화하여 말하면, 단일한 기본 지식 체계 내에서 표상들 사이를 전환하고 여러 관점을 융화시키는 능력이라고 할 수 있다."(129) - P129

[8] "데카르트는 개념과 감수성이 완전히 다른 수학의 두 분야인 대수학과 기하학 사이에 심적 다리를 놓은 인물로 간주된다."(132) - P132

[9] "수학적 증명은 우리 모두를 영원한 회의론자로 만든다."(159) - P159

[10] "인간 추론의 결함이 진화의 필연이라면 우리는 사회적 상호작용에 스며든 불완전한 논증에 수학적 증명의 무오류성으로 대항할 수 있다. 또한 패턴에 굶주린 알고리즘에서 오류를 포착하도록 스스로를 단련할 수 있다."(160) - P160

[11] "수학자들은 자신의 주장을 입증하기 위해서 다양한 표상을 활용하는 등 증명에 관한 한 다원주의적인 태도를 취한다."(163) - P163

[12] "기계는 날것 그대로의 사실을 움켜쥐지만 사실의 정수는 언제나 기계의 손아귀에서 빠져나온다."(175, 앙리 푸앵카레의 말) - P175

[13] "자연은 우리에게 정확한 수를 오직 한줌만 알도록 허용했다. 4를 넘는 그 외의 모든 정수는 우리가 발명한 것이다."(192) - P192

[14] "괴델은 기초 산술을 포함하는 어떠한 계도 이와 같이 입증하거나 반증할 수 없는, 즉 언제나 증명할 수 없는 상태로 남는 진술이 항상 존재하기 때문에 무모순적이면서 동시에 완전할 수 없다는 것을 증명했다."(207) - P207

[15] "기계가 인간의 지능을 복제하려면 특정 규칙이나 행동 모음에 구속되지 않는, 즉 모순을 즐길 수 있는 기계를 설계해야 한다."(210) - P210

[16] "(질문은) 지성의 엔진, 즉 호기심을 통제된 탐구로 전환하는 두뇌 기계다."(225, 역사학자 데이비드 해컷 피셔의 말) - P225

[17] "컴퓨터의 역할은 해답을 찾는 데 그칠 뿐, 어떤 질문이 가장 흥미로운지, 어떤 질문은 인간만이 풀 수 있는지, 어떤 질문은 더 확장해야 하는지 결정하는 것은 여전히 인간의 몫이다. 컴퓨터는 우리의 탐험을 돕는 훌륭한 도구가 될 수 있지만, 여정을 계획하는 것은 결국 우리 인간이다."(241) - P241

[18] "우리가 기계에 일을 맡기기 위해서는 기계의 핵심 능력에 관여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 또한 특정 수준의 계산 능력을 갖출 필요가 있다."(258) - P258

[19] "수학에 가장 심대한 공헌을 한 사람은 토끼가 아니라 거북이인 경우가 많다."
(263, 필즈상 수상 수학자 티머시 가워스) - P263

[20] "수학은 기존의 아이디어와 새 아이디어에 생명을 불어넣어 이해의 폭을 확장하는 수학자들의 살아 있는 커뮤니티에서만 존재한다. 수학의 진정한 만족은 다른 사람들로부터 배우고 그러한 배움을 다른 사람들과 나누는 데에서 나온다."(308, 수학자 윌리엄 서스턴의 말) - P308

[21] "문제 해결 동기는 그 자체로 경험의 공유에서 창발된 현상이다."(318) - P308

[22] "기계는 우리의 목표를 달성하는 데 에 도움이 될 수 있지만, 그 목표를 진정으로 실현하는 것은 우리 인간이 다른 사람들과 함께할 때에만 가능하다."(319) - P319

[23] "수학적 지능이 우리에게 선사한 가장 큰 선물은 스스로 생각하고 능동적으로 다양한 발견의 단계를 탐색할 수 있는 자유, 즉 주체성이다."(326) - P326

[24] "수학 지능은 우리의 인지적 동맹, 즉 기계가 인류의 번영을 위해서 우리와 협업하도록 이끌기 위한 안내자 역할을 할 것이다."(329) - P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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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로 박사의 딸
실비아 모레노-가르시아 지음, 김은서 옮김 / 황금가지 / 202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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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고하고 경직된 질서의 세계에서 연대의 세계로
<모로 박사의 딸>
실비아 모레노 가르시아 지음
김은서 옮김 [황금가지] (2025)
 


멕시코 유카탄 반도의 외딴섬 야샥툰에는 외부 세계가 알지 못하는 존재들이 살고 있었다. 한 인간이 창조해낸‘동물 인간’들이었다. 이 동물 인간들은 19세기 중반에 프랑스에서 멕시코로 건너온 전직 외과의사 모로 박사가 창조한 생명체들이다. 그는 나폴레옹의 열렬한 지지자였던 만큼 견고한 남성적 세계의 부산물이다. 190센티미터가 넘는 거구의 이 남자는 SF의 대가 H.G. 웰스가 《모로 박사의 섬》이라는 작품에서 창조한 인물이다. 웰스는 ‘다윈의 불독’으로 불렸던 영국의 생물학자 토머스 헉슬리로부터 생물학을 배웠다고 한다. 또한 웰스의 원작이 19세기 말에 나왔기에 진화론의 자장 안에서 집필된 소설인 것도 짐작해볼 수 있다.

 
이번에 읽은 《모로 박사의 딸》은 웰스의 원작 《모로 박사의 섬》을 토대로 후대의 작가가 다른 시선에서 쓴 작품이다. 모로 박사의 딸 카를로타와 연구소의 관리인 몽고메리 로턴이라는 젊은 남자의 시선이 번갈아가며 교차하고 있다. 마치 두 사람 각각의 우주가 서로 교차하며 ‘실재’라고 하는 새로운 직조물을 만들어가는 현장에 함께 들어가 있는 느낌이다. 소설의 시간적 배경은 다윈이 1859년에 《종의 기원》을 출간한 이후인 1871년과 1877년에 맞추어져 있다. 공간적 배경도 웰스의 원작과 달리 멕시코의 한 장소인데, 멕시코 작가이기 때문만은 아닌 듯하다. 유카탄 반도는 우주에서 날아온 소행성이 충돌하여 공룡(파충류) 대멸종을 가져왔다고 여겨지는 지구적 사건의 ‘그라운드제로’라는 점을 생각해보면 의미심장하다. 세상과 동떨어진 섬 야샥툰의 깊은 숲속에, 높은 벽으로 둘러싸여 있는 요새 같은 저택을 떠올려보라. 조만간 무언가 일어날 것만 같은 분위기가 느껴지지 않은가.

 
소설은 야샥툰의 저택을 소유하고 있는 에르난도 리잘데와 젊은 몽고메리 로턴이라는 29살의 청년이 섬에 찾아오는 이야기로 시작한다. 몽고메리는 야샥툰에서 모로 박사의 저택을 관리하는 책임자(마요르도모)로 오게 된 것인데, 실상은 리잘데에게 술과 도박으로 큰 빚을 지고 벶을 갚기 위해 온 것이다. 달리 선택의 여지도 없었다. 외딴섬 야샥툰의 깊은 숲속에서 프랑스인인 모로 박사와 영국인 몽고메리의 이질적인 조합부터가 심상치 않다. 몽고메리는 부모님을 일찍 여의고 15세에 출가하여 배를 타며 자신의 삶을 추스르던 기계공이기도 했다. 서로 맞지 않는 결혼을 한 까닭에 아내와 별거중인 상태로 정처 없이 방황하던 중이었다. 점점 더 많은 돈을 원했던 아내는 남편의 무능력을 깨닫고 몰래 달아났기 때문이다.

 
모로 박사의 저택 거실에는 유독 시선을 끄는 물건 하나가 있었다. 바로 프랑스제 시계가 자리하고 있었는데, 외딴섬에는 어울리지 않는 정밀기계다. 야샥툰의 어디에도 이 기계가 알려주는 시간에 연루되어 있을 법하지 않다. 시계는 오로지 이 고립된 문명 세계의 파편 속에서만 의미를 가질 것이었다. 소설에서 정밀시계의 이미지는 소설 전반을 관통하며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모로 박사의 딸 카를로타는 새로 온 몽고메리에게 ‘natura non facit saltus(자연은 도약하지 않는다)’라는 문장의 의미를 알려주는 장면이 등장하는데, 시계는 이 장면과 연결되는 듯하다. 시간을 한 마디로 정의하긴 어렵지만, 인간이 만들어 낸 관념이라 말할 수 있다. 곧 정밀 시계는 인위적이고 공고한 질서를 상징하는 오브제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특히 시간적 배경인 1871년, 그리고 멕시코 지역의 집단 농장과 같은 환경을 고려하면 제국주의의 견고한 유물이라고 여길 수도 있겠다.

 
한편 몽고메리의 하나뿐인 누나 엘리자베스는 로턴이 결혼한 후 자신의 불행한 삶을 견디지 못하고 자살했다. 엘리자베스는 ‘살해당했다’는 표현이 보인다. 당대 여성들의 지위를 암시하는 표현으로 “여성들은 판자에 꼼작 못 하게 핀으로 고정시킨 나비 같은 신세였다.”(44)라는 작가의 시선이 드러나기도 한다. 이런 점을 떠올리면, 모로 박사의 거실에 있는 시계는 구시대, 가부장적 질서 위에 구축되어 있는 견고한 세계, 제국주의 시대의 불문율을 떠올리게 하는 사물이다. 그리고 모로 박사는 바로 이 시대를 대표하는 인물이 될 것이다.

 
이처럼 자연을 바라보고 대하는 부분에서, 모로 박사는 자신만의 왕국을 세우고 규칙을 강요하여 왕국을 통제하려는 예언자이자 신의 지위에 있다. 그가 창조한 동물 인간은 불완전한 피조물에 불과하다. 그는 합리와 이성을 대표하는 인물인 셈이다. 반면 모로 박사의 저택에서 오래 일해 온 가정부 라모나는 모로 박사의 시선과 대척점에 있는 인물로 볼 수 있다. 그녀는 모로 박사의 딸 카를로타를 비롯하여 다른 동물 인간들을 애정으로 돌본다. 자연의 모든 존재를 애니미즘적인 관점, 경외의 눈으로 바라본다. ‘모든 사물에도 신성함이 깃들어 있다’는 생각을 지니고 있다. 그녀에게는 신적 질서를 믿는 마음이 있다. 물론 모로 박사의 ‘신’과 라모나의 ‘신’이 같은지는 의문이지만 말이다. 아무튼 그녀의 보살핌 때문이었는지, 모로 박사의 딸 카를로타는 “정글에 있는 돌과 꽃과 짐승 하나하나에 모두 신이 실재한다는 사실”(485)을 받아들이고 있다.

 
앞서 밝혔듯이 소설의 배경은 다윈의 진화론이 세상에빛을 본 이후의 1871년이다. 모로 박사가 다윈의 ‘범생설’에 입각하여 생명의 시작이 ‘제뮬’이라는 입자로부터 비롯된다고 믿는 것은, 아직 유전체의 존재가 발견되기 전이니 일견 합리적인 가정으로 보인다. 모로 박사는 “우리 눈에는 볼 수 없지만 제뮬은 거기 존재한다네.”(47)라는 신념을 거듭 밝힌다. ‘자연에 도약이란 없다’라는 인식이 역사적·문화적 불문율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는 상황에서, 박사는 여러 동물의 제뮬을 섞어 동물을 새로운 형태로 만들어 내고자 한다. 그는 당대의 믿음을 깨고‘자연의 도약’을 손수 만들어내고 있었던 셈이다. 물론 애초에 ‘동물 인간’을 만든 이유는, 고용주의 이익을(임금 줄이기) 위해서였으므로, 기존의 제국주의/식민주의 시대에 활약(?)했던 값싼 노동력(이를테면 흑인들)을 대체할만한 ‘상품’을 개발하기 위해서라고 볼 수도 있다. 다만 모로 박사는 동물의 ‘제뮬’을 이용한 생명공학적 방법으로 접근한 것일 뿐이다.


거실의 정밀 시계는 절대적인 시간•공간의 세계처럼 마치 불변의 세계처럼 보이기도 힌다. 하지만 모로 박사가 구축한 왕국은 리잘데의 아들 에두아르도와 사촌 이시드로의 방문 이후 조금씩 금이가는 모양새다. 리잘데의 아들이 카를로타에게 반하기 때문. 일주일만에 다시 돌아왔을 때 본격적으로 ‘동물 인간’의 존재를 마주하게 된 에두아르도 일행은 카를로타에게 프로포즈하는 에두아르도와 카를로티의 승낙, 그리고 이를 저지하기 위해 나타난 리잘데의 개입으로 야샥툰 세계의 운명은 급격히 위기에 처하게 된다. 섬과 ‘동물 인간’을 소유하고자 하는 리잘데와, 카를로타와 결혼하고 자신의 독립을 바라는 에두아르도, 이를 시기하면서도 보수적인 종교인의 시선을 드러내며 결혼을 막고 ‘동물 인간’에 대한 적대감을 공공연하게 드러네는 이시드로의 충동이 야샥툰의 몰락을 견인하고 있다.


소설의 구체적인 결말을 이야기하진 않겠지만 인물들이 충돌의 과정에서 모로 박사의 거실에서 변함없이 작동하던 정밀 시계가 몽고메리와 에두아르도가 실랑이를 벌이는 과정에서 파괴되기에 이른다. 리잘데의 그릇된 욕망과 그에 장단을 응하며 자연의 질서를 거스른 모로 박사의 세계는 이로써 몰락을 맞는다. 이 소설에서는 어느 독자도 프랑스제 정밀시계의 상징성을 주목하게 될 듯하다. 결국 야샥툰에 구축된 모로 박사의 세계와 질서는 파괴되기에 이른다. 작가는 동물 인간 두 명과 리잘데 가문 사람들에게도 죽음을 선고했다. 그러면 작가는 소설 속 세계의 몰락을 통해 어떤 결말을 원했을까? 몽고메리와 카를로타의 결합이 아닌, 우정과 연대를 추구하는 것이 아니었을까. 동물 인간인 루페와 카치토와 카를로타와 더 단단한 우정의 연대가 형성되고 있다는 단서를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는 몽고메리 로턴의 말 중에서 다음의 문장이 인상적이었다. “지구상에 완벽한 장소는 없어. 어디를 가든 나는 인간의 잔인함과 과도함을 봤어. 그게 바로 내가 야샥툰에 와서 여기 머물게 된 이유야. 야샥툰은 적어도 행복과 비슷한 뭔가를 줬거든. 나는 야샥툰에서 괴물을 본 적은 없어.”(396) 이 대목을 보면 인간의 세계에서 상처입고 잘 지내지 못했던 몽고메리가 오히려 외양이 ‘이상한’ 동물 인간과 함께 지낼 때 안식을 찾았다는 말이다. 그는 오히려 ’괴물‘은 우리 인간의 내면에 도사리고 있는 잔인함일 수 있음을 역설하는 듯하다.


에필로그에 이르면, 카를로타와 루페가 사건을 ‘처리’하고 유산을 상속받으며 새로운 삶의 기회를 얻는다. 보통 서사의 구조 같으면 몽고메리와 카를로타는 서로에 대한 우정과 신뢰를 통해 연인이 될 수도 있겠지만, 작가는 서로의 행운을 빌어주며 몽고메리가 떠나는 것으로 마무리하고 있다. 카를로타의 동생뻘인 동물 인간 ‘루페’와는 결속력이 강해짐을 느끼고 새로운 삶에 대한 희망을 찾게 된 듯하다. 웰스의 원작리 신적 질서에 도전한 인간의 경솔함과 무모함을 경고했다면, 작가 실비아의 작품은 분명히 희망적이다. 인간-비인간의 돌봄과 우정의가치와 중요성, 그리고 연대의 가능성이라는 씨앗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동일한 소재를 다른 관점에서 새롭게 쓴 시도는 분명 독자의 판단을 유보하게 하고 다면적인 시각을 요구하는 측면이 있다. 독자에게는 서사의 윤리성을 함께 생각하게 해주는 독서 경험를 줄 수도 있을 것이다.


#모로박사의딸 #실비아모레노가르시아 #김은서번역가 #황금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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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다 가블레르
헨리크 입센 지음, 조태준 옮김 / 지만지드라마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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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 양식의 선구적인 탐구 작업

<헤다 가블레르 Hedda Gabler>


헨리크 입센 지음

조태준 옮김 [지만지드라마] (2019)




 

희곡이라는 장르는 조금씩 알아갈수록 새로운 매력을 발견한다. 희곡을 읽어보게 된 것은 몇 년 되지 않았고, 특정 작품을 따로 찾아 읽으려고 하던 장르는 아니었지만 기회가 되면 읽어보려 했다. 헨리크 입센은 국내에서 특히 <인형의 집>으로 가장 잘 알려진 작가이지만, 그의 다른 작품을 주목하여 따로 읽었던 것은 아니었다. 큰 관심이 없을 때 읽어서 그런지 스토리가 잘 기억나지 않는다.


 

극중 인물인헤다 가블레르는 장군의 딸(귀족/상류층)이다. 그녀는 29살이고, 공부에 뜻을 둔 중산층 출신의 30대 초반의 샌님과 결혼하여 이제 6개월의 기나긴 신혼여행에서 막 돌아온 참이다. 우리가 이야기하는사랑은 흔히 길어야 2년이라는 말이 있지만, 헤다가 애초에 사랑 없이 선택한 결혼은 사회적 굴레에 갇힌, 동시에 상류층이라도 선택의 여지가 많지 않았던 여성의 권태와 불만, 그리고 이 굴레 너머의 삶을 갈망하나 이로부터 유발되는 불안을 조명한다.

 


입센이 창조한 헤다는 하나의 사회적 징후로 볼 수 있다. 욕망을 갖는다는 것은, 생에 대한 의지를 갖는 모든 유기체의 존재 양식일 텐데, 유복한 환경에서 성장한 그녀에게 결혼을 통해 선택의 여지가 줄어든 삶은 그녀의 일상을 더욱 힘들게 했을 법하다. 인간은, 나아가 모든 생명체는 태양의 잉여 에너지로 비롯되었다. 무질서함을 향해가는 물질세계에서 그 질서를 역행하는 아주 특별한 우주의 파편인 것이다. 그런 까닭에 무언가를욕망한다는 것은 모든 생명체의 숙명을 고려할 때, 지극히 당연하다고 여겨진다.


 

헤다의 경우도 다를 바 없다. 다만 그녀는 무언가를 언제나 갈망하나, 그 대상이 뚜렷하게 드러나지는 않는 듯하다. 욕망의 실체 없음이 헤다에게는 가장 큰 존재론적 문제가 아니었을까. 하지만 이 모습에 대해 헤다에게 그 책임을 물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모든 인간, 모든 존재가 특정한 시간과 공간(곧 환경)으로부터 독립적일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러면 질문의 방식을 다르게 시도해야 할 듯하다. 헤다 자신의 욕망이 무엇인지, 자신이 원하는 바가 무엇인지 정확히 알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당대의 여성에게 사회가 제약하는/가두어 놓은 현실에는 책임이 없는가? 어쩌면 우리는 한 여성이 자신의 욕망이 무엇인지 모르는 상태에 주목하고, 그 이유를 물어봐야 하지 않을까란 생각을 해본다. 단순히 너 자신을 알라.’는 명제를 넘어서, 이 맥락과 결부된 인간의 조건을 함께 들여다보는 일이 필요할 듯하다.


 

그것이 (남성 중심의) 사회적 관습일수도 있고, 보다 폭넓게는 이분법적인, 양성적 사고에서 비롯된 공동체의 공고한 규범들일 수도 있겠다. 현재 지구에 80억 명의 인구가 있다면, 80억만큼의 다양한 인간이 살아가는 것이다. 각자 어떠한 정체성으로 살아가든, 그저 나름의 존재 양식 속에서 살아가는 것뿐이다. 이렇게 다양한 생물학적/존재론적 다양성을 지닌 존재를 이분법적인 사회 제도에 욱여넣는 일에는 저항이 생겨나기 마련이다. 근본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라는 의미다. 그러므로 한 인간의 고유함은 수많은 스펙트럼 속에서 한 자리를 차지하는 당당한 존재로서 인정되어야 한다.


 

이런 맥락에서 고유한 존재로서의 헤다는, 당대 사회에서 기대되는 여성상의 틀에 맞지 않는 인물일 뿐이다. 문제는 이 사회적 기대/기준을 벗어나는 경우, 사회/공동체는 개개인에게불안을 심어준다. 보이지 않는 사회적 압박인 셈인데, 의도된 불안이야말로 (남성적) 사회를 공고히 하는 데 은밀히 활용되어 온 유지 전략이자, 체스판 위의 규칙이 아닐까.

 


따라서 헤다의 자살은자신의 미학적 기준에 의하면, 관자놀이에 정확히 총구를 겨누는 일이런 의미에서 충격적이다. 역자는 자살에 대한 헤다의미학적인 기준을 언급한다. 비슷한 맥락에서 나는 헤다가 추구한 자살 방식이 하나의 의식(ritual)으로 해석해 보았다. 방아쇠를 당겨 맞는 미학적인 죽음, 그리고 옛 연인의 귀중한 원고를 불에 태워 소멸시키는 행위가 일종의 정화의식처럼 여겨졌기 때문이다. 이런 의식은 외부의 시선으로 보았을 때 논리성이 결여되어 보인다. 왜 그렇게 행동하는지 합리적인 설명이 부재하기 때문이다. 헤다의 행위에는 그 이유에 대한 설명이 가시적으로 드러나지 않는 것이다. 투명성이 부족하다. 나는 이 점이 우리가 의식/의례라고 부르는 인간의 행동 양식에 부합한다고 느꼈다.


 

헤다 자신은, 비록 자신의 욕망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몰랐을지 모르지만, 그녀는 끊임없이 출구를 찾고 있었다. 물론 그럴 때마다 번번이불안이 유발하는두려움때문에 다시 굴레 안으로 되돌아와야 했지만 말이다. 옛 연인과의 결합을 바라면서도, 타인의 시선, 스캔들을 두려워하는 모습을 보인다. 하지만 그녀의 자살은 하나의 기호이자 메시지이기도 하다.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을 때, 자신의 존재 이유를 더 이상 찾지 못했을 때, 그녀는 세상에 대해 강력하게 경고하기로 결심했던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헤다의 자살은 예수가 사랑이 부재한 공동체에 가져온 평화가 아니라 이 아니었을까 싶다. 이건 단순한 항변이 아니라, 자신의 욕망이 정확히 무엇인지 알지 못하게 만드는 인간 조건/사회에 대한 저항의 몸부림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녀의 행동을 단순히 미화하거나, ‘남성의 문제라고만 단정짓기 전에, 이 문제는 공동체 전체, 모두의 문제라고 보아야 할듯하다. 고질적인 이분법의 한계를 벗어나기 위해서라도 말이다.


 

입센이 생의 말년, 작가로서 완숙한 시기에 쓴 희곡 <헤다 가블레르>에서 제시하는 인물은 지극히 입체적이고 현대적이다. 누군가는 이렇게 물을 수 있을 듯하다. ‘남자가 여성의 심리를 이렇게나 탐구하여 묘사해 놓은 것이 놀랍다고 말이다. 절반은 동의하지만, 이것 역시 남자라는 존재를 하나의 단일한 범주로 욱여넣는오류가 아닐까. 입센이 헤다를 비롯하여, <인형의 집>에 등장하는 노라처럼, 작품에서 주목하고 그려낸 여성들은, 그가 자기 안의 여성성, 혹은 자기 안의다양성을 발견하고 탐구해 온 발자국을 보여주는 듯하다. 발자국의 주인이 어떤 보폭으로, 어디를 향하고 있었는지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우리 각자는 결코 타자를 온전히 이해할 수 없다. 타자에 대한 이해에도 본질적인 불확정성은 존재하는 셈이다. 이 조건을 받아들인다면 비로소 타자를 향하는 시선을 좀 더 소박한 마음으로 지켜낼 수 있지 않을까.

 



 

#헤다가블레르 #헨리크입센 #희곡 #지만지드라마 #조태준번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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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이면 눈 냄새가 난다 위고의 그림책
사라 스트리츠베리 지음, 사라 룬드베리 그림, 안미란 옮김 / 위고 / 202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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덤덤하게 이어지는 일상의 어느 순간, 훅하고 들어오는 그런 그리움의 감정이 있다. 추운 겨울 날 내쉴 때 보이는 입김처럼, 왔다가 사라지는 그런 감정들... 쉼호흡을 크게 하고 붙들고만 싶은 순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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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사들의 엄격함 - 보르헤스, 하이젠베르크, 칸트 그리고 실재의 궁극적 본질
윌리엄 에긴턴 지음, 김한영 옮김 / 까치 / 202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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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일한 실재는 없다 - 천사들의 엄격함

: 보르헤스, 하이젠베르크, 칸트 그리고 실재의 궁극적 본질

(원제: The Rigor of Angels)


윌리엄 에긴턴 지음 | 김한영 옮김 [까치] (2025)

   



종종 한 권의 책을 읽고 떠오르는 이미지처럼 단어가 떠오를 때가 있다. 천사들의 엄격함을 읽고 나서 입가에 맴도는 단어는 백일몽이라는 단어다. 인류의 역사에 큰 족적을 남긴 인물 세 사람-칸트, 보르헤스, 하이젠베르크-을 중심으로 실재란 무엇인가를 탐구했던 발자취를 따라가는 독서였다. 저자는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 상당히 거리감이 있는 세 사람을 어떻게 주목하고 연결짓게 되었을까 놀랍다. 이 책에는 근대 철학의 원형을 제공했다고 평가받는 철학자 임마누엘 칸트, 문학가이면서 실재와 영원성에 대해서도 깊이 사색했던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그리고 양자 역학의 토대를 세우는데 기여함으로써 현대 물리학의 역사를 새로 쓴 베르너 하이젠베르크가 등장한다.


 

무엇보다 이 세 사람이 이 책에 모여 연결될 수 있었던 단초는 철학자 칸트가 제공했다. 칸트의 사상에 익숙하지는 않지만, 저자는 세계에 관한 우리의 모든 지식이 감각으로부터 온다고 주장한 철학자 데이비드 흄으로부터 큰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인간의 감각은 인간이 세계를 파악하는 창구이자 세계로 통하는 채널이다. 달리 말하면, 세계를 파악하는 데 제약이 되기도 하는 것이 바로 우리의 감각이다. 저자 윌리엄 에긴턴이 소환한 사상가 세 사람은 바로 실재의 본질을 탐구한 이들이다. 이들에게 실재, 존재에 의해 감각되어 재구성된 이미지라고 정리해 볼 수 있을 것 같다. 특히 하이젠베르크는 우리가 살아가는 시공간에서 실재란, 측정 행위에 의해 결정된다고 보았고, 칸트 역시 바라보는 존재(주체)의 절대적인 역할을 강조했다. “우리가 관찰하는 것은 자연 그 자체가 아니라 우리의 질문 방식에 노출된 자연이다.”(115)이라는 하이젠베르크의 언급에서 이 점을 분명히 확인할 수 있다.


 

흥미로운 점 한 가지는, 저자가 보르헤스나 하이젠베르크가 모두 칸트의 사상에 크게 영향을 받았음을 주목했다는 점, 그리고 이를 생생한 인물의 모습으로 되살려 놓은 부분이다. 실재의 모습을 파악하는 문제에 있어 현대 물리학의 역사 일부를 생생하게 들여다본 느낌이기도 하다. 다만, 지금의 내가 살아가는 이 시공간이라는 토대 위에서 원자는 실재하는 것도 아니고 물체도 아니다라는 하이젠베르크의 입장은 상식에서 멀리 벗어나 있는 것처럼 보인다. 지금 내 앞에 펼쳐져 있는 현실이, ‘실재하는원자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면 과연 우리는 무엇인가? 결국 이 문제는 존재와 우주의 근거를 설명하는 본질과 이어져 있는 질문이라고 볼 수 있겠다. 이러한 질문이 단순히 철학과 문학의 영역뿐만 아니라, 현대 물리학의 중요한 문제를 관통하고 있었다.


 

현대 물리학의 두 기둥인 상대성이론과 양자 역학은 인간이 세계를 바라보는 방식을 완전히 새롭게 보는 방식을 마련해주었다. 그렇다면 칸트의 시대와 지금의 시대에 인간이 파악한 실재란 같을 수 없을 것이고, 심지어 동시대인에게도 이 실재란 같을 수 없지 않겠는가. 나아가 각 존재에 의해 구성된 실재는 각 주체가 세계로부터 추출한 극히 작은 이미지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때 파악된 실재는 결코 실재와 동일할 수 없다. 모든 것을 기억하는 남자에 대한 에피소드는, 주체에 의해 파악된 실재의 이미지가 실제의 실재와 동일한 경우 그 주체는 자유를 잃고 그 실재에 구속될 수밖에 없음을 말한다. 모든 것을 기억하는 남자는 이 놀라운 능력과 반대로, 자신이 받아들인 정보를 통합하여 의미를 추출하는 일은 잘하지 못했다. 결국 완벽한 기억혹은 완벽한 재현이란 불가능할 수밖에 없으며, 따라서 존재는 내부에서 질서를 부여하고 구조화하는 기능이 필요할 듯하다. 결국 주체가 세계를 파악하려면 세계로부터 흡수한 정보를 통합하고 의미를 추출하는 추상 능력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결론에 이른다.


 

또 한 가지 인상적이었던 점은, 양자 역학의 토대를 놓은 하이젠베르크가 자신의 행렬 역학으로 양자 역학을 구축하는 과정에서 보여준 대화의 방법이었다. 그는 모든 진영에게 열린 중간 지대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기존 지식이나 현상에 대해 다른 의견을 지닌 사람들이 서로 대화의 여지를 남겨두는 영역이 하이젠베르크가 생각했던 중간 지대에 가까운 것 같다. 하이젠베르크는 핵이나 전자처럼 눈에 보이지 않는 입자의 정체를 이해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견해와 다르고 때론 논쟁도 벌였던 닐스 보어, 이보다 더 큰 견해차를 지니고 대립했던 아인슈타인과도 중간 지대를 유지한 점에 주목해 본다. 지대는 그와 이 영역 내에서 공존했던 이들에게 서로의 논리를 다듬고 재점검하는 기회를 주었다. 이런 맥락에서 하이젠베르크의 중간 지대는 견해차에 따른 상대방을 배제하기만 하는 우리의 현실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지대는 서로 이질적이고 모순적으로 보이는 존재들이 공존할 수 있는 여지를 확보하는 역할을 한다. 이번에 책에 등장하는 여러 사상가가 언급한실재의 본질을 깊이 있게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큰 틀에서 주체가 파악하는실재는 각 주체만큼이나 다양한실재가 존재한다고 이해된다. 따라서 하이젠베르크의중간 지대는 단지 학문적이고 심도 있는 대화를 위해서만 요구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존재 혹은 의식 있는 주체에게 필수적인 요건 혹은 덕목이 아닐까 싶다. 무엇보다 서로의 관계가 경직되고 메말라가는 지금, 기후 정의와 같이 시급한 인류 공동의 문제를 직시하는 데에 절실히 필요한 덕목이라 생각한다.


 

전후 하이젠베르크의 신변에 대한 이야기도 인상적이었다. 동료 과학자이면서 나치에 의해 부모님 모두 희생당한 홀로코스트 생존자로서 구드스미스와 하이젠베르크의 인연이 책의 대미를 장식한다. 구드스미스가 하이젠베르크에 대한 비판적인 입장을 거둔 것은, 어쩌면 저자가 말한대로 자신을 위한 조치일 수도 있겠지만, 나는 구드스미스 자신이 하이젠베르크라는 인간을 완벽하게 이해할 수 없다는 깨달음에서 스스로에게 관대해진 것은 아닐까 싶다. 다르게 말하면 타자를 이해하는 일에 있어서, 이 세상의 실재는 객관적이고 고정된 것이 아니라 하이젠베르크에게는 그만의 실재가 존재할 수 있었음을 깨달았기 때문이 아닐까. 이 부분은 나의 생각이지만, 타자를 완벽히 이해하기란 불가능하다는 실재의 개념을 마찬가지로 적용하면 납득할 수 있는 지점이라고 생각한다.


 

이 책에 담긴 세 사상가의 실재에 대한 주장을 온전히 이해했다고 말하긴 어렵다. 하지만 칸트의 사상이 보르헤스와 하이젠베르크에 영향을 주었고, 실재를 파악할 때 실재의 본질이 이를 바라보는 이, 곧 주체에 달려 있음을 어렴풋이 이해할 수 있었다. 마치 우리 각자는 세계라는 이미지가 통과하는 다른 렌즈를 지닌 것처럼 말이다. 한편, 이 책은 실재란 무엇인가?’를 탐구한 현대 물리학사의 한 단면을 담고 있기도 하다. 이 주제에 대한 관심은 현재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보어와 하이젠베르크, 보른을 포함한 코펜하겐 해석을 지지하는 집단과 슈뢰딩거 아인슈타인의 논쟁은 일단 현대 물리학계의 실험을 통해 하이젠베르크가 제안한 해석에 손을 들어주었지만 말이다. 또한 이 책은자유의지라는, 사상사의 오랜 주제에 대한 이해의 출발점으로서 나름의 역할을 생각해볼만 하다. 무엇보다 서로 무관해 보이기까지 한 세 명의 지식인들을 실재라는 주제로 엮어내는 저자의 통찰과 안목을 경험할 수 있었던 독서였다.

 


 

#천사들의엄격함 #윌리엄에긴턴 #보르헤스 #하이젠베르크 #칸트 #철학책 #철학책추천

[1] "입자가 취한 경로는 입자를 관찰하는 우리의 행위, 바로 이것을 통해서만 생겨난다."(25, 하이젠베르크의 말)

"우리가 관찰하는 것은 자연 그 자체가 아니라 우리의 질문 방식에 노출된 자연이다."(115, 하이젠베르크의 말)
- P25

[2]"사실 영혼이나 의식은 시간에 걸쳐 존속하는 통일된 자아감이다. 영혼 또는 의식이란 세계를 지각하기 위해서, 그리고 우리가 지각을 말로 표현하기 위해서 어떤 것이 바로 이 순간에서 다른 순간으로 연결되고, 또다시 다른 순간으로 연결되어야 한다는 단순한 사실에 불과하다."(77, 칸트의 입장)
- P77

[3] "따라서 우리가 어떻게 과학을 실행해야 하고, 어떻게 세계에 관한 정확한 판단을 형성해야 하는가를 항상 비판적으로 조율하고, 그럼으로써 우리가 우리의 이성에 자연스럽게 끌려 너무 멀리 가기 전에 우리 자신을 붙잡는 것이 절대적으로 중요하다."(79)
- P79

[4] "실제 운동은 무한한 공간과 무한한 시간이 아니라 한정된 공간과 한정된 시간 속에서 일어나기 때문이다."(80, 제논의 역설에 대한 헤겔의 반박)
- P80

[5] "모든 진영에게 열린 중간 지대가 필요하다."(89, 하이젠베르크의 입장)
- P89

[6] "우리는 무엇을 관찰하기로 정했는가에 따라서 실재의 각기 다른 측면을 볼 수 있고 두 가지 측면은 서로를 보완하지만, 실재의 전모를 파악할 수는 없다."(124, 닐스 보어의 상보성)
- P124

[7] "우리의 근본적인 비결정론 가설은 실험과 일치합니다."(127, 코펜하겐 해석을 낳은 보른과 하이젠베르크의 입장)
- P127

[8] "외부 세계는 추하기 이를 데 없지만, 연구는 아름답습니다."(146, 하이젠베르크가 1935년 어머니에게 보낸 편지 중에서)
- P146

[9] "시간은 상실이다. 시간은 비통함이다. 시간은 영원함에 대한 욕망이다."(190, 보르헤스의 <알레프>에 나타난 시간에 대한 통찰)
- P190

[10] "확률적으로 모든 것이 생겨날 수 있으니 우주에는 정말 독창적인 것은 없을 것이다."(211, 글쓰기 주제로 카발라를 택한 보르헤스의 말)
- P211

[11] "세계에 존재하는 원자의 수는 유한하므로, 시간을 무한대로 늘리면 가능한
순열의 수가 소진되어 우주는 되풀이될 것이다."(212, 니체의 입장)

"니체의 초인은 똑같은 것이 영원히 반복되는 우주적 부조리에 용감히 맞서거나, 더 나아가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이고 똑같은 삶을 기꺼이 반복적으로 영원히 사는 존재였다."(212)
- P212

[12] "도서관은 하나의 구체이고, 그 구체는 한가운데가 어찌 되었든 육각형이며, 구체의 바깥 둘레에는 도달할 수 없다."(222)

"끝없이 절망적이고 부조리한 도서관에서 길을 잃은 보르헤스에게는 당신이 어디에 있든 그것이 중심이고, 그 둘레, 그 불가능하고 모든 것을 감싸는 점이자 기원은 어디에도 없거나, 적어도 도달할 수가 없다."(224)
- P222

[13] "일반 상대성 이론은 단순히 실험 자료를 해석한 것도 아니고, 더 정확한 법칙을 발견한 것도 아니었다. 그것은 실재를 완전히 새롭게 보는 방식이었다."(244)
- P244

[14] "숭고는 우리가 만든 세계 표상에 대하여 우리가 내리는 판단의 반작용이다."(282)

"숭고라는 미학적 감정은 우리가 시간과 공간과 우연성에 둘러싸인 존재의 울타리를 벗어나 절대적인 어떤 것 – 광활한 우주, 우리의 피할 수 없는 선택의 의무 – 을 그려볼 수 있다는 깨달음에서 생겨난다."(286)
- P282

[15] "인간의 이해력은 무한하다. 우리가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궁극적인 것들에 관해서까지도."(286, 하이젠베르크의 입장)
- P286

[16] "자유의지는 형이상학적인 이식물이나 위대함에 대한 망상이 아니라, 알 수 없는 미래 앞에서 우리가 잘못을 저지르기 쉬움에 대한 인정이다."(297)
- P297

[17] "그만 하면 됐네(Es ist gut)"(313, 칸트의 마지막 말)
- P313

[18] "시간과 세월의 담요에 감싸이기 전에 칸트는 이 자유를 마음껏 누렸다. 생각한다는 것은 자유롭다는 것이다."

"자연계에서 흡수한 것으로부터 최소한의 것을 뽑아내고 추상하는 능력은 그 존재에게 자유를 그 세계 안에서 자기 자신을 보고 행동 과정을 결정하고 선택을 판단하는 능력을, 더 나아가 필요성을 부여한다."(315)
- P315

[19] "(양자가 취하는 경로는) 우리의 관찰, 오로지 이것을 통해서만 생겨난다."(317, 하이젠베르크의 입장)
- P317

[20] "원자는 실재하는 것도 아니고 물체도 아니다."(357, 하이젠베르크의 입장)

"양자 역학의 역설은 하이젠베르크의 발견을 신의 눈으로 자연을 보는 관점에 일치시키려는 시도로부터 생겨났고, 그것은 애초에 우리의 관점이 아니었다."(357)
- P357

[21] "자유와 책임은 다르게 선택했을 경우를 상상할 줄 아는 존재의 필수적인 가정이자, 지금 이 삶을 여러 갈래의 길 중 내가 선택한 하나의 길로 이해할 수 있는 가능성의 조건이다."

"다른 사람의 행동이나 의도를 판단할 때 우리는 절대로 그 사람의 생각에 접근할 수 없고, 그들의 눈으로 세계를 볼 수가 없다. (...) 그 사람의 마음속에 간직한 비밀을 안다는 것은, 내가 그 사람과 같은 입장이었다면 했었을 행동, 해야만 했을 행동을 고려하는 것이다."(367)
- P367

[22] "사실, 다른 사람을 판단한다는 것은 가지 않은 길에 대한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는 것이다."

"그(구드스미스)가 내린 면죄는 하이젠베르크를 위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그 자신을 위한 것이었다."(368, 마지막 문장)
- P3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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