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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사이 - 찢어진 예술, 흩어진 문학, 남겨진 사유
최정우 지음 / 타이피스트 / 202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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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 존재의 세계 사이에 무한에 가까운 경로가 있고, 그 한 가운데 우연히 마주치고 부대끼는 사람들을 생각해본 적이 있어요. 창작을 하는 저자는 이 세계와 세계 사에의 시간을, 혹은 사건을 어떻게 보내고 마주하는 사람일까 호기심이 일었습니디. 곧 저자와 마주치게 되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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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퍼펙트 데이스’, 의례로 충만한 하루하루 만들기 


감독: 빔 벤더스(Wim Wenders) 

주연: 야쿠쇼 코지 (국내개봉 2024)




빔 벤더스의 영화 <퍼펙트 데이스>를 통해 이 감독의 영화를 처음 보았다. 그의 이름은 익숙했는데, 나는 그의 사진집 <한번은, (Once)>를 통해 알게 되었던 까닭이다. 영화를 보면서 장면마다 딱 ‘그의 시선’이라는 것이 느껴졌다. 















영화에서도 주인공이 멀리서 풍경을 바라보는 장면에서는, 그의 사진처럼 풍경을 바라볼 때 마치 그 풍경을 품는 듯한 시선이 느껴졌다. 혹은 감상자가 바로 풍경에 몰입되어 스며드는 느낌을 주는 것이다. 물론 시선은 대상을 멀리서만 바라보지 않는다. 한 인간을 바라볼 때 화면 가득히 담기는 사람의 얼굴은, 한 단독자의 존재를 온전히 마주하고 대화하는 느낌을 주지 않은가. 이러한 시선은 상대에 대한 존중이 없다면 나오지 못할 시선이라고 생각한다. 이렇게 영화가 시작하면서부터 그의 사진집을 보고 느꼈던 감정들과 기억들이 다시 떠올랐다. 



일본의 대배우 야쿠쇼 코지가 연기한 히라야마는 도쿄시에 소속된 공공화장실 청소부로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그의 삶은 매일 반복되는 일상이 있다. 영화 전체를 통해서도 지루해보일 정도로 반복되는 루틴을 보여주는 것이다. 매일 아침에 일어나 자신의 이불을 개고, 화분을 모아둔 작은 방에 분무기로 물을 준다. 양치질을 하고 옷을 입으면 출근 준비가 얼추 끝난다. 현관 옆에 놓아둔 지갑과 공공화장실의 열쇠꾸러미를 챙기고 작은 접시에 놓아둔 동전들을 챙기면 현관을 나선다. 현관을 나서면 항상 하는 작은 의식이 이어진다. 문을 열면 보이는 하늘과 나무를 바라보고 눈으로 인사를 나누는 듯하다. 그러고나면 주차장의 자판기에서 캔커피를 뽑아 차에서 한 모금 마시면 출근 준비가 끝나는 것. 



공공화장실에서 누가 보지 않아도 꼼꼼하게 구석구석 청소하는 모습은 인상깊다. 매일의 지루한 업무를 이토록 진지하게 반복할 수 있게 하는 힘은 무엇일까. 영화의 맥락상 히라야마는 좋은 집안의 ‘도련님’으로 컸을 것으로 짐작되지만, 아마도 가족 간의 갈등으로 일찍 독립한 인물로 설정되지 않았을까 싶다. 게다가 누가 봐도 인정받지 못하는 화장실 청소부라는 설정이 반복되는 일상을 더욱 두드러지게 만들어준다. 그럼에도 매일 같은 점심 시간에 같은 샌드위치로, 같은 벤치에 앉아 점심을 먹으면서 그가 꺼내드는 자동카메라가 눈에 들어온다. 매일 바라보는 대상과 마주하며 자세히 바라보고 ‘사진’으로 남기는 그만의 의식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일상을 따라가보는 것만으로도 지루하게 느껴진다면, 다시 주인공의 삶을 면밀하게 들여다봐야 한다. 그의 하루하루가 ‘단 하루도’ 같은 날이 없다는 것을 알아챌 수 있을 것이다. 그의 일상은 삶이 끝날 때까지 지루하게 반복될 것만 같지만 말이다. 삶의 리듬(반복)이 지속되는 가운데 여기에 미묘한 차이들이 발생하고, 삶에 침투하는 것이다. 매일 같아보이는 일상 속에 작지만 변화무쌍한 변화가 일상에 침입하고 끊임없이 교란하는 모습을 발견한다. 물론 불편하기도 하지만 때로는 이를 감수하고 포용하기도 하면서 자신의 일상을 지켜나가는 모습이 참 인상적이었다. 그가 점심시간마다 공원의 벤치에 앉아 바라보며 찍는 나무의 모습, 특히 뷰파인더를 보지 않고 찍는 모습에서 그가 자신의 삶에 개입하는 우연성을 인정하고 이를 받아들이는 모습같아 보였다. 이런 장면은 항상 카메라를 갖고 다니며 사진을 찍는 빔 벤더스 감독이 아니면 보기 힘든 장면일 것 같다.



 똑같아 보이는 숲속의 나무를 바라보고 매일 사진을 찍는 주인공의 모습, 함께 일하는 동료와의 다양한 사건들을 다시 떠올려보자. 양아치 같아 보이는 이 젊은 동료는 우리 사회의 경우로 보면 갓생을 사는 N포 세대를 대표하는 인물이다. 경제적으로 넉넉하지 않으니 ‘돈이 없어서 데이트도 못한다’는 불평을 입에 달고 다닌다. 주인공은 꿋꿋하게 자신의 일상을 반복하고 유지하고자 하지만, 끊임없이 영향을 주는 이런 동료와의 헤프닝으로 일상은 언제고 궤도를 벗어나기 마련이다. 이는 반복되는 일상에 변화는 주는 요소이면서 동시에 이 ‘얽힘’을 환기하는 장치일 것이다. 우리는 일상을 안정적으로 반복하기에는, 얼마나 많은 존재들과 얽혀 살아가고 있는가. 



나는 주인공이 양아치 같이만 보이던 젋은 동료의 선한 모습을 발견하는 장면이 좋았다. 이 젊은 동료는 어느 정신지체 청소년이 자신의 귀를 만지는 것을 좋아한다고 활짝 웃으며, 이 청소년에게 자신의 귀를 내어주는 모습말이다. 물론 빔 벤더스의 시선과 의도일테다. 모든 사람에겐 이처럼 다양한 모습을 지니고 살아가는 복잡한 존재라는 것을 내게 말해주는 듯하다. 모순적이고 불합리하다고 여겨지는 모습의 사람이라도 그에게는 또 우리가 모르는 그만의 사정이 있을 수 있음을 깨닫는다. 한 사람의 마음 속에도 여러 공간이 존재하고, 이 여러 면들이 등을 맞대고 유동하는 복잡한 존재임을 인정하게 된다. 어쩌면 우리가 이런 모습들을 확인하면서 서로에게 조금 더 너그러워질 수 있을 것 같단 생각이 들었다. 빔 벤더스 감독의 이러한 시선이 좋았다. 



주인공은 매일의 루틴이 있지만, 조금 더 긴 터울의 루틴도 있다. 일을 쉬는 주말에는 빨래방에서 밀린 빨래를 하고, 일주일에 한번씩 단골 이자까야 집에 가서 익숙한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고 익숙한 음식을 맛본다. 중고서점에 가서 신중하게 한 권을 골라온다. 한 주 동안 찍은 필름을 현상소에 맡기고 사진을 찾아와 이를 분류하고 골라 자신만의 상자에 모아두는 일 등이 그런 활동이다. 



이렇듯 이 영화에는 주인공의 하루하루를 따라가며 만날 수 있는 한 인간의 의식으로 가득차있다. AI가 아닌 이상, 모든 인간의 하루 속에서도 다양한 감정이 교차하기도 한다. 문득 슬픔을 느끼다가도 화장실의 작은 메모지를 통해 누군가와의 비밀스러운 순간을 공유하는 것처럼 기쁨과 기대감이 중첩되기도 하는 것이다. 어쩌면 제2의 자연이 되어버린 도시에서 지루해보이는 일상을 사는 현대인이 일상을 지속할 수 있는 힘이 여기에 있다고 할 수 있다. 바로 하루하루를 자신만의 의례/의식으로 만들어나가는 일이다. 영화에서도 뚜렷하게 보여주고 있듯이 우리의 일상은 단 하루도 같지 않다. 하지만 이를 지루하게 보느냐 아니면 매일매일이 새로워질 수 있느냐는 자신의 일상적 의식 속에 이 미묘함을 알아차리는 시선에 있지 않을까. 그런 의미에서 일상의 의식은 삶을 지탱하는 뼈대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그리스 계 인류학 및 심리학 연구자 디미트리스 지칼라타스의 책 <인간은 의례를 갈망한다>(김미선 옮김, 민음사)에서 바로 이러한 의식/의례가 인간에게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를 과학자의 관점에서 접근한다. 그는 ‘습관’과 ‘의례’를 구분한다. 습관은 이 행위의 목적이 분명하고 즉각적으로 기능한다. 다시 말해 모든 이가 그 목적을 곧바로 이해할 수 있다는 의미다. 즉각적이라는 의미는 여기에 궤도를 이탈하거나 고민의 여지가 없다는 의미다. 반면 ‘의례’는 보편적이지 않다. 합리적으로 보이지도 않는다. 행위의 목적이 뚜렷하게 곧바로 이해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저 특별한 주의와 집중을 요구하며 특정한 절차를 요구하기 때문이다. 



영화의 주인공 히라야마가 매일 정성들여, 일정한 절차에 따라 변기를 꼼꼼하고 깨끗하게 닦는 행위는, 젊은 동료가 보기에 어리석어 보이기 때문이다. 눈에 보이는 부분만 대충 청소해도 검사를 통과할 수 있을 텐데말이다. 그럼에도 히라야마는 자신이 정한 규칙과 절차를 미련해보일 정도로 준수한다. 책의 저자 지칼라타스는 이런 상황을 ‘인과적으로 불투명하다’고 표현하고 있다. 이 책은 특히 인간 공동체의 의례 행위에 보다 주목하고 있기에, 영화에 등장하는 주인공의 상황에 그대로 적용하여 이해기는 어려울 수 있다. 하지만 이 ‘의례’라는 행위의 본질을 생각해보면, 공통적으로 절차와 반복, 루틴을 함께 생각해볼만하다. 



나는 이 루틴의 힘이야말로 우연과 예기치 못한 일탈의 요소를 품고 있는 우리 삶을 지탱하게 해주는 버팀대가 아닐까 생각한다. 이성과 합리의 관점에서가 아니라 보다 심리적인 기능, 그리고 삶의 스트레스를 완충해줄 수 있는 존재론적인 도구로서 말이다. 그러므로 인간이(어쩌면 다른 동물들도) 반복에 집착하고 의례에 의지 혹은 집착하는 이유는 “삶의 스트레스와 불확실성을 극복하기 위해”(<인간은 의례를 갈망한다>, 89면)서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점에서 우리가 흔이 이야기하는 ‘편집증’은 삶의 불확실성을 단단히 붙들고 통제하고자 하는 인간의 본성에서 나온 증상은 아닐까.


 

영화 속의 인물 히라야마에게도 불안정한 삶의 조건과 가족과의 갈등이 있었다. 타인들과의 얽힘 속에서 상처와 트라우마가 있었던 것을 짐작할 수 있다. 특히 아버지와의 갈등과 그로 인한 여동생과의 서먹서먹한 관계가 한 가지 단서다. 나는 최근 “이 세상에 노예 아닌자가 누가 있는가?”라는 세네카의 말을 자주 떠올린다. 그가 말한 이 ‘노예’의 조건에는 단순히 사회경제적인 상황에 의해서 주어지는 경우를 우선 떠올릴 수 있지만, 나아가 인간이라면 불가피한 관계, 이 ‘얽힘’이 있기 때문에 주어지는 조건이 아닐까 싶다. 이 모든 상처와 교란의 요소들 속에서 자신의 하루를 지탱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이 바로 영화 속 주인공이 보여주었던 일상의 의식들이 아닐까. 개인적인 의례로서의 작은 의식은 마치 하루를 영원히 살 수 있을 것만 같은 안정감을 주니 말이다. 삶은 반복적인 리듬이 지속되면서도 끊임없이 미묘한 차이를 발생시키는 존재의 장(場)이다. 이 의식/의례는 오늘 나의 하루를 완벽하게 만들어주는 토대가 된다. 자신만의 작은 의식들과 더불어 그 속에서 피어나는 미묘한 변화를 감지하는 눈, 그리고 이를 받아들이는 마음이 버무려져 ‘완벽한 하루’를 만들어가는 것이 아닐까.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재즈 싱어 니나 시몬이 부른 ‘Feeling Good’이 흐른다. 동쪽에서 태양이 찬란하게 떠오르는 하루다. 중인공 히라야마는 운전하며 미소를 짓지만, 이내 눈시울이 붉어진다. 우리의 삶은 단 하루도 같지 않다. 하루에도 슬픔과 기쁨이 교차한다. 오랜 기억이 소환되어 상처를 확인하기도 하고, 젊은 동료의 우스꽝스러운 모습에 미소짓기도 하고, 그의 무례한 행동에 화가 나기도 한다. 우리 모두는 누구에게든 그런 모습을 보이며 사는 존재가 아니던가. 마지막 장면을 보면서 타인에게 좀 더 너그러워지자고 생각하게 되는 것은 나뿐일까싶다. 우리의 삶을 지탱하는 것은, 이처럼 매일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변화의 미묘함과 존재에 대한 자각 행위, 그 자체가 아닐까 싶다. 무엇보다 영화 <퍼펙트 데이스>는 한 인간이라는 소우주 속의 반복되는 일상을 의미있게 만들어주는 의례/의식으로 가득한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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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넬로페 2024-08-15 13:3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퍼펙트 데이즈‘
정말 좋더라고요^^
빔 벤더스 감독의 인터뷰에
히라야마의 과거가 약간 언급되어 있어요.
결국 루틴이란 것도 많은 경험과 각성의 결과라는 사실을 이 영화로 다시 한번 깨달았어요^^

초란공 2024-08-15 13:46   좋아요 1 | URL
정말 좋죠~!! 빔 벤더스 감독 인터뷰도 한번 찾아봐야겠어요~^^
 





그림자의 강 - 이미지의 시대를 연 사진가 머이브리지


리베카 솔닛 지음, 김현우 옮김 [창비] (2020)

 



요세미티에서는 물과 바위가 머이브리지의 주된 소재였다. 물이 변화와 지나가는 순간을 대변한다면, 바위는 견딞과 지질학적인 무한대를 암시했다.

(...)

강은 언제나 눈앞에 있지만, 그 안의 강물은 영원히 움직이고, 영원히 변화하고, 영원히 새로워지는 어떤 것, 종종 시간에 대한 비유로도 쓰이는 영원한 순간성을 상징했다.”(130)

 


사진 속 남자들은 마치 막 풍경을 발견한 것처럼 사진 전면에 서 있는 것도 아니고, 자연을 정복하여 문명을 만들어갈 것처럼 역동적으로 그 풍경에 개입하지도 않는다. 야생 속으로 질주하던 지치지 않는 진보는 머이브리지의 관심사가 아니었던 듯하다. 그의 인물들은 그 풍경을 처음 본 것도 아니고, 그것을 정복하는 것도 아니며, 대중을 위해, 미국과 이성적인 정신을 위해 그 자리에 서 있는 것도 아니다. 그들은 모호하고, 서로 이어져 있지 않으며, 그 어떤 실용적인 목적과도 관련이 없다. 그리고 바로 그 모호함에는 미국에 자연스럽게 스며들지 못했던 이민자 머이브리지와 미국인 동료 사진가들 사이의 간극이 숨어 있었다.”(136)


 

그들(미국인들)은 인류사에서만큼은 캘리포니아가 완전히 새로운 곳이 되기를 원했고, 따라서 그들보다 먼저 그곳에 왔던 이들, 즉 원주민이나 스페인 정착민의 역사는 무시하거나 폄하하는 경향이 있었다. 새로움은 미국의 정체성에서 아주 두드러지는 특징이었다. 스스로를 에덴동산 같은 갓 태어난 풍경 속에서, 무한한 자원과 무한한 가능성을 지닌 채 이제 막 시작하는 존재로 여기는 사람들의 새로움이었다.”(141)


그런 새로움에 대한 환상의 초기 단계에서, 아메리카원주민의 존재는 피해갈 수 없는 사실이었고, 보통은 에덴동산에서 쫓아내야 할 짐승으로 표현되었다. 하지만 그 땅이 그대로 지켜지기를 바랐던 쪽은 오히려 원주민들이었고, 도끼를 휘둘렀던 아담들은 개발에 장애물이 된다는 이유로 원주민들을 몰아냈다. 그다음 단계에서 아메리카원주민들은 말 그대로 삭제되었다.”(142)





 








솔닛의 글을 읽다보면 캘리포니아를 비롯한 대자연의 풍광을 담은 사진들에서 서구 백인들의 정치적 시선을 읽어낼 수 있다. 그들(백인)이 원래 살던 터전으로부터 밀어내어 요세미티의 숲 속에서 근근이 살아가던 원주민들에 대한 무시와 폄하를, 솔닛은 서부의 광대한 자연 풍경 사진으로부터 읽어 낸다. 자연에서 원시성, 새로움을 찾으려는 백인들의 열망은 원주민들과 관련한 이슈들과 오버랩되는 장() 가운데 하나가 바로 서부의 풍경사진으로 볼 수도 있을 듯하다. 백인들은 애초에 이 땅에는 아무도 없었으며, 우리들이 찾아내 차지한 땅이다'라는 말을 하고 싶었던 것일 테다. 이런 시선이 요세미티를 비롯한 미국 서부의 자연 풍광을 담아내고 선별하는 과정에서 무의식적이지만 강력한 프리즘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자연보호라는 명목으로 요세미티를 비롯한 지역이 국립공원이 된 배경에는 아메리카원주민에 대한 무시와 역사 지우기 행적을 덮어주는 효과도 있었을 것이다.

 

저자 리베카 솔닛이 캘리포니아 자연의 새로움과 원시성을, '타락하고 쇠퇴해가는 유럽의 분위기'와 비교하며, 미국인들이 느끼는 '문화적 열등감'이 아니라 우월한 '도덕적 가치'를 상징하는 지표로 활용했다고 지적하는 지점도 인상 깊다. 이런 주제를, 한 사진가의 삶을 다루는 글에서 자연스럽고도 치밀하게 녹여 낸 솔닛의 탁월한 글쓰기에 또한번 반하게 된다.

 

머이브리지는 사진의 역사에서 단순히 연속촬영과 영화 매체를 견인한 기술적 선구자에 머물지 않는 인물이라고 여겨진다. 국내에서 리베카 솔닛의 페미니즘적인 시선만 크게 부각되어버린 듯한데, 역사학자이자 사진연구가, 사진 비평가로서의 면모와 놀라운 통찰, 예리한 안목을 잘 보여주는 책이 바로 이 그림자의 강이 아닐까 싶다. 처음부터 철도 건설을 중심으로 서구 백인이 자행한 원주민 학살과 동물 학살에 대한 주제, 여성에 대한 남성의 시선과 부조리한 관계, 식민주의/제국주의의 문제 등이 하나의 큰 강처럼 이어지고 흘러가는 듯하다. 소수자/타자에 대한 서구 사회의 지배와 폭력적 시선이 한 인간과 사진의 역사와 더불어 층층이 교차하고 있는 글로 읽었다.



"요세미티에서는 물과 바위가 머이브리지의 주된 소재였다. 물이 변화와 지나가는 순간을 대변한다면, 바위는 견딞과 지질학적인 무한대를 암시했다.

(...)

강은 언제나 눈앞에 있지만, 그 안의 강물은 영원히 움직이고, 영원히 변화하고, 영원히 새로워지는 어떤 것, 종종 시간에 대한 비유로도 쓰이는 영원한 순간성을 상징했다."(130)

"사진 속 남자들은 마치 막 풍경을 발견한 것처럼 사진 전면에 서 있는 것도 아니고, 자연을 정복하여 문명을 만들어갈 것처럼 역동적으로 그 풍경에 개입하지도 않는다. 야생 속으로 질주하던 지치지 않는 진보는 머이브리지의 관심사가 아니었던 듯하다. 그의 인물들은 그 풍경을 처음 본 것도 아니고, 그것을 정복하는 것도 아니며, 대중을 위해, 미국과 이성적인 정신을 위해 그 자리에 서 있는 것도 아니다. 그들은 모호하고, 서로 이어져 있지 않으며, 그 어떤 실용적인 목적과도 관련이 없다. 그리고 바로 그 모호함에는 미국에 자연스럽게 스며들지 못했던 이민자 머이브리지와 미국인 동료 사진가들 사이의 간극이 숨어 있었다."(136)

"그들(미국인들)은 인류사에서만큼은 캘리포니아가 완전히 새로운 곳이 되기를 원했고, 따라서 그들보다 먼저 그곳에 왔던 이들, 즉 원주민이나 스페인 정착민의 역사는 무시하거나 폄하하는 경향이 있었다. 새로움은 미국의 정체성에서 아주 두드러지는 특징이었다. 스스로를 에덴동산 같은 갓 태어난 풍경 속에서, 무한한 자원과 무한한 가능성을 지닌 채 이제 막 시작하는 존재로 여기는 사람들의 새로움이었다."(141)

"그런 새로움에 대한 환상의 초기 단계에서, 아메리카원주민의 존재는 피해갈 수 없는 사실이었고, 보통은 에덴동산에서 쫓아내야 할 짐승으로 표현되었다. 하지만 그 땅이 그대로 지켜지기를 바랐던 쪽은 오히려 원주민들이었고, 도끼를 휘둘렀던 아담들은 개발에 장애물이 된다는 이유로 원주민들을 몰아냈다. 그다음 단계에서 아메리카원주민들은 말 그대로 삭제되었다."(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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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상관찰학 입문
아카세가와 겐페이.후지모리 데루노부.미나미 신보 지음, 서하나 옮김 / 안그라픽스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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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의 눈으로 거리를 관찰한 사람들의 이야기

- 노상관찰학 입문

 


아카세가와 겐페이 외 지음 | 서하나 옮김 [안그라픽스] | (2023)

 




노상관찰학 입문이란 책의 제목을 보았을 때, 일종의 계시를 받은 느낌이었다. 그 이유는 두 가지였다. 하나는 한국의 모더니스트로 알려진 소설가 박태원의 작품 소설가 구보 씨의 일일(이하 구보 씨) 때문이고, 다른 하나는 한때 거리 사진에 관심을 두었던 기억 때문이다. 소설 구보 씨에서는 거리에서 관찰하기라는 행위가 고현학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한다. 그러면서 이 고현학을 모데로노로지오(modernologio)라고 옮기고 있다. 특정한 관점을 가지고 거리에서 사람들의 행동이나 옷차림 등을 관찰하는 행위를 가리키는 의미로 등장한다. 아니나 다를까, 노상관찰학이라는 이름의 기원이 바로 일본의 20-30년대를 풍미했던 고현학에 있었다.

 


고현학은 지금으로부터 101년 전 일본을 강타했던 간토대지진과 관련이 있다. 한국인으로서 간토대지진은 재일조선인 6600여 명으로 추정되는 희생자를 낳은 사건으로 기억된다. 따라서 고현학이 지진 직후 시작했다는 기록에는 보다 다른 호기심으로 주목할 수밖에 없었다. 혹시 고현학을 시작한 이들도 거리에서 간토대학살에 가담한 것은 아니었을까하는 의구심 때문이다. 하지만 곧바로 그 의구심을 거두어 들였다. 이들은 오히려 폐허가 된 도시와 사람들을 돌보고 이를 재건하는 일에 힘을 모은 이들이었기 때문이다. 한편 14명의 공저자 대부분은 예술분야를 공부한 이들이었다. 대부분 50년대 전후에 출생한 베이비부머 세대였기에, 1923년에 고현학을 시작한 세대와는 대략 한 세대가 차이 한다. 고현학을 보다 일상의 활동으로 가져온 측면이 있는 것처럼 보였다. 이들은 고현학이란 이름 대신, ‘노상관찰이란 표현을 쓰기 시작했던 것이다.


 

노상관찰학 입문에는 대담 형식을 정리한 텍스트와 관찰 기록을 서술한 형식의 글 등 다양한 활동이 담겨 있다. 흥미로운 점은, 이들의 글에서 공통적으로 느낄 수 있는 감성이 있다는 것이다. 바로 노상관찰활동에 참여하는 사람들 사이의 유대감과 유머감각이었다. 노상관찰이란 표현대로, 이 활동에 참여하는 이들은 기본적으로 관찰기록활동을 기본으로 한다. 여기에 때로는 수집활동이 더해지는데, 우리가 생각하는 수집가들과는 거리를 두고자 하는 이유도 재미있다. ‘노상관찰자들이 수집가들과 달리 스스로를 차별화는 지점은 타인의 인정을 구하는 데 관심이 없다는 데 있었다. 수집활동은 기본적으로 소유를 전제로 하는 활동이 많다. 노상관찰들은 이 지점에서 자신들의 정체성을 구분하는 것이다. 이를테면, ‘수집가는 다종의 희귀한 아이템(따라서 대개는 교환가치가 높은 사물들)을 소유할수록 환호를 받고 인정을 받는다. 하지만 노상관찰자들은 이러한 물성을 소유하는 것이 본질이 아니라고 말한다. 오히려 이들의 접근 방식은 비물질적이다. 물질을 소유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만들어 낸 대상들을 알아보고, 분석하고, 역사를 읽어내는 일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시대적 문화적 코드를 사물로부터 읽어내는 작업에 더 가깝다. 인간이 만들어 낸 모든 대상들 각각이 모두 하나의 문화적 기호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노상관찰학방법적으로는 기호론에 가깝다”(33)라고 말하는 것이다. 노상관찰자들에게는 소유가 중요한 활동의 본질은 아닌 것이다.


 

가족 중 누군가가 학창시절부터 평생 맨홀 뚜껑을 관찰하여 기록한다던가, 먹이를 주며 거리의 강아지의 반응을 보거나 거리를 어슬렁거리며 강아지똥을 조사한다고 상상해보라. 혹은 해체된 건물의 파편들을 집으로 가져온다던가, 심지어 여고 교복을 관찰하는 사람이 있다고 생각해보라. 우선 이들이 하는 활동은 집에 아무리 천사 같은 부모 혹은 아내가 있다고 하더라도 환영받기는 매우 어려울 듯하다. 그런데 이들이 각자의 관심사와 호기심을 주체하지 못하고 지속하는 이런 활동들을 보노라면 나 역시 이들 뒤를 따라가 보고 싶어지는 것이다.


 

지금 시점에서 저자들이 활발하게 활동했던 시기는 60-70년대이다. 일본의 경제가 급속하게 팽창하는 한편, 전통적인 공동체가 해체되고 공동체가 추구하던 가치로부터 이탈하는 세대가 나오기 시작하던 시대. 새로운 사회를 꿈꾸며 투쟁하던 청년들과 이들의 깊은 좌절이 함께 했던 시대가 아닌가. 저자들은 이제 대부분 70-80대가 되었을 것이다. 이들은 거리에서 호기심과 에너지를 분출하던 청년 시절이 있었음을 생각해본다. 그들은 어쩌면 일본 사회의 경직성과 고독, 그리고 상실감에 대한 반작용으로 거리로 눈길을 돌렸던 것은 아닐까 생각해보기도 한다. 20년대에 간토대지진으로 폐허가 된 삶을 응시하고 회복을 꿈꾸었던 한 세대 전의 청년들처럼 말이다. 고현학이 이들에게 간토 대지진과 같은 일상의 파괴로부터 자신의 모습을 되찾는 상상력을 동원하는 행위였던 것처럼. 달리 말해, 죽음의 공간으로부터 삶의 공간으로 탈주하고자 한 욕구의 발로는 아니었을까 싶은 것이다.


 

노상관찰활동을 엉뚱하고 쓸모없게 여기는 사람도 많을 테지만, 내게는 무척 흥미롭다. 아니 흥미 이상이다. 한때 거리에서 사람들의 모습을 담곤 했던 나는 우연히 구성되는 사건들에 무척 흥미를 갖고 지켜보는 편이었다. 자주 가는 장소의 계절 변화를 지켜보는 일, 혹은 주변의 건물들에 생긴 변화들 등을 알아차리면 곧바로 걸음을 멈추고 만다. 어쩌면 나도 언어 문제를 제외한다면, 이 저자들과 만나 무척 엉뚱하고도 흥미로운 대화를 나눌 수도 있을 것 같다.


 

지금도 일본에서는 노상관찰활동이 이루어지는지 궁금하기도 하다. 아마 도시에 관한 다큐멘터리 작업의 일환으로 건물이나 거리의 사물을 이미지 기록으로 남기는 활동가들은 많을 것 이다. 이러한 노상관찰자들의 활동이 지속성을 지니게 되고, 이들의 관찰 결과가 일관되게 기록되어 일종의 아카이브로 남겨질 수 있다면, 이 자료들은 특정 시공간에서 살았던 사람들의 흔적, 문명의 코드를 담은 역사 사료로서도 가치가 있을 것이다. 예를 들면, 사라진 건물의 잔해로부터 이 과정을 목격한 노상관찰자의 개인적인 기억과 기록은 특정 시공간의 맥락을 형성하고 후대에 전해주는 역할을 할 수 있게 된다. 그럼 단순한 공간으로서만 남는 것이 아니다. 그 공간은 이 기억과 기록이 더해지며 비로소 역사성을 획득한 장소로서의 의미를 갖게 될 것이다.


지금은 이러한 관찰과 기록의 전통이 남아 있는지는 모르겠다. 그럼에도 이 책을 읽는 동안 60-70년대에 청년이었던 저자들은 꾸준히 내게 메시지를 전하고 있었다. 어쩌면 그들의 메시지는 우리가 사는 세계를 때로는 새로운 눈으로 바라볼 수 있는 마음가짐으로 삶을 살아가보라는 것이 아니었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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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음악의 세계적인 거장 류이치 사카모토(Ryuichi Sakamoto)의 마지막 콘서트 같은 기록 영화 <오퍼스 opus>를 보고 왔다.



암투병의 여파인지 젊은 시절의 인상과 많이 달라 보였다. 병마와 싸우면서도 연주에 몰입하는 모습에 안타까웠고 숙연해지기도 했다.



하지만 카메라 앵글이 관람객들에게 들이미는 악기 브랜드 “야마하 YAMAHA"의 텍스트가 영화 내내 거슬리고 힘들었다. 결국은 불쾌하기까지 했다. 영화가 끝나고 나오면서 느낀 점은, 이 영화가 거장을 이용한 악기 광고 같다는 인상만 받았던 것. 이 점이 가장 아쉬웠다. 상업적으로 영상에 상품명이나 브랜드를 노출시키는 건 법적으로 허용되었다. 당연히 ‘법적으로’ 문제 될 건 없다. 나는 이걸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이 영화는 류이치 사카모토나 그를 좋아하는 팬들, 관람객들이 있던 것이 아니라, 악기에 대한 기업의 자부심과 잠정적인 고객만 있을뿐이란 생각만 들게했다. 잠시도 쉴 틈을 주지 않고 배회하는 악기 브랜드명. 화면의 중앙이나, 화면의 경계 언저리에 배회하는 ‘야마하‘ 상표는 시종일관 나의 시선을 흡수하고 있었던 것이다. 음악을 제대로 들을 수 없어서 아쉬웠다. 화면 처리, 연주자를 잡는 앵글, 편집 방식 모두 왠지 모를 경박함이 느껴지는 영상이었다. 악기 브랜드에 대해 개인적인 악감정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나의 영화감상을 끊임없이 방해했던 시간이었다.



카메라 감독이나 편집한 이는 과연 거장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었을까? 앞에 있었다면 뒷통수를 때려주고 싶은 심정이다. 이들이 관람객에게 들이미는 악기 브랜드의 텍스트는 심지어 폭력적이란 느낌도 받았다. 내가 예민한가보다. 끊임없이 들이미는 브랜드명이 나를 압박하고 답답하게 했다. 영화를 보다가 뛰쳐나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나의 반응은, 우수한 악기를 만드는 한 회사에 대한 반감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이는 시각 언어를 감상자에게 어떻게 제시하는지에 대한 문제이며, 한 거장 음악가에 대한 존중의 문제인 동시에, 타인-감상자를 얼마나 배려하는지에 대한 문제다. 이 영상을 만든이들 마음 속에는 자신들의 CV나 이력서 말고 거장이나 관람객들이 과연 얼마나 자리잡고 있었을까 묻고 싶다.



<오퍼스>의 영상은 다시 보고 싶지 않은 영상이다.
이런 맥락에서, 영화가 끝나고 나오는 라틴어 문장,

“예술은 길고, 인생은 짧다.”란  키치스러운 문장이 내게는 이렇게 보였다.


“인생은 짧아도 야마하는 길다.” 


내게 이 영화는 거장을 이용한 악기 광고처럼 보였다.

거장의 생각을 담은 책을 읽거나 OST나 들어야겠다.








































#오퍼스 #류이치사카모토 #류이치사카모토오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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