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래희망은, 귀여운 할머니 (5주년 에디션, 확장판, 양장) - 우리도 그렇게 만났잖니
하정 지음 / 좋은여름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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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여운 할머니' 5주년 에디션과 인연들

- 장래 희망은, 귀여운 할머니

 


하정 지음 [좋은여름] | (2024)




 

이 책이 처음 나온 지 벌써 5주년이라고 한다. 무려 90여 페이지가 추가된 빨간색 양장 에디션이 다시 나왔다. 초판이 나왔을 때 책에 담긴 사연을 무척 흥미롭게 읽었던 기억이 새롭다.


 

책 만드는 분께 소프트 커버와 양장본의 제작 방식이 또 다르다는 말을 듣고, 신기하기도하고 놀랐던 기억이 난다. 그냥 소프트커버용으로 만든 파일 그대로 양장본 제작에 사용하는 줄 알았던 나는, 책 한 권을 만드는 데 필요한 손길을 다시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요즈음 ''이란 물건이 만들어주는 사람들과의 인연에 대해 생각해보곤 한다. 물론 이건 대개 독자에게 해당될 것이다. 작가로서는 사람과의 인연이 책으로 이어진다. 이 책 장래희망은, 귀여운 할머니가 그렇다. 그것도 이 우주에서 아주 희귀한 확률 속에서 서로를 알아본다는 것에 관한 이야기다. 그리고 그 인연이 죽 이어지고 있다. 이번에 나온 귀여운 할머니’ 5주년 에디션은 이 인연이 아름답게 이어지고 있음을 보여주는 듯하다. 그동안 저자는 이 인연을 어떻게 돌보고 가꾸어왔을지 내심 궁금하다.


 

초판과 5주년 기념 에디션 모두 작은 독립서점에서 구입한 것은 묘한 우연이자 인연이다. 책방과의 인연, 그리고 책방지기와의 인연이 이 책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어쩌면 책이 나를 알아본 것이라 하겠다. 책 속의 인연이 내게도 살짝 닿아 있다는 느낌을 준다. 이건 분명 책이 마련해준 인연이다.


 

요즈음 도시의 아파트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겐 아파트의 벽이 얇아 이웃집 방귀 소리나 전화벨 소리를 생생히 들을 수 있기도 하다. 반면 이웃과 진심어린, 때론 시기어린 대화라도 나눌 기회가 드물다. 이런 팍팍하고 단절되어가는 도시 생활 속에서 '귀여운 할머니' 이야기는 독자에게 새로운 상상력을 불어넣어 준다. 우리에게는 이미 서로 이어지고자 하는 연대의 유전자가 있음을 일깨워준다. 이 책을 펼칠 때마다 발견하는 것은, 우리가 그동안 잊고 있거나 잃어가고 있는 것들이기도 하다.


 

내 장래희망은... 그러니까, 귀여운 할머니와 매일 만나는 것이다.

각자 온전한 존재로서. 자신이 좋아하는 일 하나쯤은 가슴에 품고 살아가는 사람이 되는 것. 그리고 함께하는 일상이 하나의 즐거운 의식(ritual)으로 남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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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24-01-17 14:1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한 15년 전만해도 누구네가 이사 오면 시루떡 한 팩씩 돌리기도 했는데 그런게 없어졌어요. 그때 넙죽 받아 먹지만 말고 답례도 하고 그럴 걸 그랬나 싶기도 하고. ㅋ
얼마전 양장본이 재활용이 안된다는 말을 듣고 깜짝 놀랐습니다. 양장본을 포기하고 살아야하나 싶기도 하고. 출판사도 고민이 많겠어요.
세상에 모든 여자들이 귀여운 할머니가 되면 좋겠는데 울엄마 보면...ㅎㅎ

초란공 2024-01-17 23:25   좋아요 1 | URL
아 그렇네요. 떡돌리고 음식 오고가고 했는데요. 층간/세대 간 소음이 심해서 예민해지긴 쉬운것 같고요. ˝어제 밤에 전화벨 소리 너무 크더군요˝이렇게 말할 수도 없고 말이죠.

양장본 재활용 문제도 있군요. 저는 편집 방식이 양장본하고 소프트커버용하고 완전히 다르다는 내용만 들었거든요. 그리고 귀여운 할머니는 앞으로 많아져야 할텐데 말입니다^^
 
소설처럼 문지 스펙트럼
다니엘 페낙 지음, 이정임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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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너뛰며 읽을 독자의 권리

- 소설처럼

 


다니엘 페나크 지음 | 이정임 옮김 [문학과지성사] (2023, 2)

 




소설처럼는 모로코 카사블랑카 출신의 작가 다니엘 페나크의 독서론을 담은 유쾌한 에세이다. 목차를 보다가 책의 후반부에서 침해할 수 없는 독자의 권리’ 10가지를 말하는 글들을 보고 흥미가 생겼다. 10가지 권리 가운데 건너뛰며 읽을 권리를 말하는 글에서 페나크는 이렇게 말한다.

 


만약 아이들이 모비 딕을 읽고 싶은데 멜빌이 고래 사냥의 장비며 기술을 한도 끝도 없이 장황하게 늘어놓는 바람에 번번이 도중하차할 수밖에 없다면, 읽기를 포기하느니 차라리 그 대목을 건너뛰는 편이 훨씬 나을 것이다. 나머지 내용들이야 어찌 되었든 겅중겅중 건너뛰며 열심히 에이하브 선장을 쫓아다니고 볼 일이다. 에이하브 선장에 죽기 살기로 흰 고래를 쫓아다녔듯 말이다!”(199)


 

일반적으로 소설은 앞에서부터 차근차근 읽으라고 말한다. 이야기에는 이어지는 흐름이 있고, 주로 초반에 제시되는 인물이나 장소 혹은 환경과 관련한 배경정보를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조언은 특히 소설의 경우, 수긍할만하다. 어느 정도 이 말이 맞을 것이다. 하지만 모비 딕처럼 포경선이 바다로 나간 후의 사건들이 무한히 옆으로 무한히 확장되는 듯 보이는 이야기일 경우 참 곤란해진다. 고래 분류에 대한 이야기며, 고래 해체 과정을 모두가(내게는 흥미롭지만) 흥미로워하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페나크의 불평대로 중간에 책을 덮느니, 그가 제시하는 조언처럼 지루한 부분을 넘기면 되는 것 아닌가. 그런데 착실하게 읽도록교육받은 독자일수록 중간을 건너뛰고 읽기란 쉽지 않다. 소설을 읽는 내내 기분이 찜찜한 것이다.


 

이를 예상한 듯, 저자는 첫 페이지부터 마지막 까지 교과서적으로 완독을 해야 한다는 강박에서 자유로워질 것을 말한다. 소설까지도 말이다. 이 제안에 용기를 내어, 나 역시 책의 앞부분을 대부분 건너뛰어 곧바로 건너뛰며 읽을 권리란 글부터 읽어본다.

 


저자에 따르면, 원래 이것이 어린 시절부터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 같은 소설을 읽어온 방식이었다. 그렇다면 그에게는 원래 읽기란, ‘소설처럼읽는 방식이 아니었을까...


 

한 가지 더. 이 읽기 방식에서 중요한 것이 하나 있다. 저자가 주로 염두에 두고 있는 어린 독자의 경우, 건너 뛸 부분을 아이들 스스로 결정할 것! 바로 이점이다. 어쩌면 이 읽기 방식에서 가장 중요한 사항인지도 모른다.


 

그러니 어른들의 잣대로 형편없이 잘리고, 훼손되고, 쪼그라들고, 말라비틀어진 몰골이 되었다가, 종국에는 아이들의 눈높이에 맞춘답시고 빈약하기 짝이 없는 언어로 다시 쓰이는 참담한 지경”(200)에 이른 책을 아이들 손에 쥐어주지 말 것! 어린 독자들에게는 그들 스스로 책을 고르고, 건너뛰고 상상할 권리가 있다! 이것 또한 어린 독자를 하나의 인격으로 인정하는 일 아닐까.




 

[1] "만약 아이들이 《모비 딕》을 읽고 싶은데 멜빌이 고래 사냥의 장비며 기술을 한도 끝도 없이 장황하게 늘어놓는 바람에 번번이 도중하차할 수밖에 없다면, 읽기를 포기하느니 차라리 그 대목을 건너뛰는 편이 훨씬 나을 것이다. 나머지 내용들이야 어찌 되었든 겅중겅중 건너뛰며 열심히 에이하브 선장을 쫓아다니고 볼 일이다. 에이하브 선장에 죽기 살기로 흰 고래를 쫓아다녔듯 말이다!"(199)
- P199

[2] "《모비 딕》이나 《레미제라블》이 졸지에 150페이지짜리로 줄어들어 형편없이 잘리고, 훼손되고, 쪼그라들고, 말라비틀어진 몰골이 되었다가, 종국에는 아이들의 눈높이에 맞춘답시고 빈약하기 짝이 없는 언어로 다시 쓰이는 참담한 지경에 이를테니 말이다! 그건 마치 피카소의 <게르니카>를 열두어 살 먹은 아이가 보기에는 지나치게 복잡하다는 이유로 누군가가 다시 그려보겠다고 덤비는 격이다."(200)

- P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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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크냄새 2024-01-16 20:5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충분히 공감하는 부분이지만 건너뛰며 읽기가 생각처럼 쉽지 않은 것 같아요. 벌써 형성된 습관일수도 있고, 책에 대한 예의가 아닌 것 같기도 하고, 뭔가 찜짐한 감정이 솟아나죠. 그래도 포기하거나 억지로 투덜대며 읽느니 과감히 건너뛰어 볼 맘이 생기네요.

초란공 2024-01-16 21:41   좋아요 0 | URL
네~ 저도 말씀하신대로 익숙해진 습관에서 보다 자유로워지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래도 이렇게 읽어도 좋다는 작가가 있어서 안심이 되기도 합니다! ㅋㅋ
 

























하루키 작품, ‘마음의 눈으로 읽기


고양이를 버리다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김난주 옮김 [비채] | (2020)

 




소설 같은 문학작품에서 작가가 만들어 낸 인물들은 작가의 분신일 수 있지만 작가는 아니다. 작가가 바라본 자신의 모습뿐만 아니라 그가 경험하고 파악했던 인물들이 새롭게(때론 복잡하게 얽혀)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소설 속 인물이 하는 말과 행동을 작가와 동일시하는 일은 오히려 작품을 이해하기에 앞서 작품 자체에 대한 왜곡된 인상을 독자가 만들어나갈 수 있다. 그럼에도 우리는 작품 속에서 작가의 모습을 무심코 발견하기도 한다.

 

최근 출간된 무라카미 하루키의 작품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역시 텍스트 속에서 작가의 모습을 조금씩 발견하게 된다. 이제 기억은 가물가물하여 신빙성 있는 비교는 불가능하지만, 대학 시절에 하루키 열풍은 지금보다 훨씬 더 대단했던 것 같다. 책을 어지간히 읽지 않았던 나도 대학 시절에 읽은 몇 권’(분명히 5권도 안될 것이다)의 책 중에 상실의 시대(언젠가 노르웨이의 숲으로 제목이 바뀌었다)가 있었기 때문이다.


 

대학 시절 나의 부실한 독서 실태로부터 알 수 있는 것은, 반대로 하루키 열풍이 얼마나 대단했는지를 보여주는 개인적인지표다. 수많은 하루키 매니아들의 유대감 어린 대화를 하나도 이해하지 못했던 시절에 유일하게 읽어낸 책이 바로 상실의 시대였다. 물론 독서에 익숙하지 않은 초보 독자들에게 두꺼운 책읽기가 고역인 것처럼, 나도 이 책을 읽다가 번번이 의식을 상실했다. 아마 책읽기가 익숙하지 않은 독자라면 이 고충에 충분히 공감할 것이다. 당시에 내게 문학이란 장르의 유일한 효용은, 숙면을 위한 것으로 한정되었다. 상실의 시대는 적당히 두꺼웠고, 더 크고 두터운 전공도서 위에 받치고 책상에서 베개로 삼기에 나쁘지 않았으니까. 이제 20여 년이 지나 온라인 서점의 서재에서 놀며 조금씩 읽다보니 다시 하루키와 만나게 된 셈이다.




















 

다시 최근에 읽은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으로 돌아가 보자. 1부에서 10대 후반의 소년이었던 화자는 이제 2부에서 40대의 중년이 되었다. 주로 현실 세계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이 펼쳐진다. 생활인으로 평범한 나날들을 살아가는데, 도쿄에서 후쿠시마현의 작은 마을 도서관장이 된다는 것이 조금 독특할 뿐이다. 화자는 신임 도서관장이 된 후 월요일마다 전임 도서관장이었던 고야스 씨의 무덤을 방문한다. 이것은 화자가 하나의 의식처럼 되풀이하여 지키는 일정이 되었다. 실제로 만나보지도 못한 한 사람의 존재를 기억하는 일이었다.


 

어느 날 화자는 고야스 씨의 무덤 앞에서 까닭 없이 눈물을 흘린다. 자신이 흘리는 눈물에서 뜨거운 온기를 느끼는 장면이 나온다. 이 대목이 내게는 꽤나 인상적이었다. 다만 이 마음을 언어로 표현하기가 어려웠다. 그러던 중 고양이를 버리다를 읽다가 이 장면에서 받은 감정을 설명할 수 있는 언어를 찾았다. 화자가 눈물을 흘리고 그 온기를 느꼈던 것은, 바로 한 인간의 소멸된 역사에 대한 애도 행위였으리란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의지와 무관하게 우연히이 세상에 던져진 존재. 그 앞에 놓인 격한 삶의 파고를 헤쳐 나갔을 인생을 기억하는 인간적인행위였다. 스스로 뜨거운 온기를 유지하며 분투했을 한 존재와의 연결됨을 자각하는 것, 그리고 그의 소멸을 애도하는, 뒤에 남은 자의 존중어린 감정이었을 테다. 적어도 내겐 그렇게 느껴졌다. 그러니 이제 눈물도 혈액과 마찬가지로 온기를 지닌 몸에서 짜낸 것이다.”(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 430) 라는 문장은 내게 보다 생생하게 피부로 느껴졌던 것이다.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에서는, 높은 벽으로 둘러싸인 도시에서 꿈을 읽기 위해 눈에 상처를 감수한 화자를 돌봐주는 노인이 나온다. 그 노인이 고백하듯 내민 한 마디 나는 과거에 군인이었네.”(97)가 기억났다. 뜬금없어 보이는 노인의 말은 곧바로 작가의 아버지를 떠올리게 했다. 아버지의 충격적인 말이 각인되었을 어린 하루키의 마음 속에 전쟁을 경험했던 남자의 이미지는 아무런 맥락없이 등장하지는 않았을 테다. 작가의 아버지가 학살이 자행된 공간에 파견되었던 부대의 병사였다는 사실. 작가의 아버지에겐 오랜 트라우마로 남았음이 분명한 사실이, 작가에게는 오래도록 진실에 대한 두려움으로 남았던 모양이다. 결국 소설 속의 노인은 작가 아버지의 모습으로도 읽혔다.


 

그러면 이제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에서 노인이 한 말 가운데 한 가지 단서를 더 찾아볼 수 있다. “구덩이에 던져 넣고 유채기름을 뿌리고 불을 붙이지. 오후에는 도시 어디서나 그 연기를 볼 수 있어. 그게 매일 이어진다네.”(121) 하루키의 소설에서 슬쩍슬쩍 지나가는 이런 문장들이 아무런 의미 없이 사용된 것이라 생각되지는 않는다. 이 문장은 분명히 작가가 지니고 있던 학살-아버지와 관련 있는 난징학살-에 대한 기억이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이 무고한 희생자의 죽음을 떠올리게 하는 장면은 다른 문학 작품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루마니아 출생의 유대인이었던 시인 파울 첼란의 시 죽음의 푸가에서 무고한 희생자들(유대인들)을 태운 연기가 하늘로 치솟는 이미지가 등장한다. 이 시는 그의 첫 시집 양귀비와 기억에 수록된 시 가운데 하나라고 한다.


 

그는 쓴다 어두워지면 독일로 너의 금빛 머리카락 마르가레테

너의 재가 된 머리카락 줄라미트 우리는 공중에 무덤을 판다 공중에선 비좁지 않게 눕는다

(...)

그가 허리춤의 권총을 잡는다 그가 총을 휘두른다 그의 눈은 파랗다

더 깊이 삽을 박아라 너희들 너희 다른 사람들은 계속 무도곡을 연주하라

(...)

한 남자가 집 안에 살고 있다 너의 금빛 머리카락 마르가레테

너의 재가 된 머리카락 줄라미트 그는 뱀을 가지고 논다

 

그가 외친다 더 달콤하게 죽음을 연주하라 죽음은 독일에서 온 명인

그가 외친다 더 어둡게 바이올린을 켜라 그러면 너희는 연기가 되어 공중으로 오른다.

(...)

너의 금빛 머리카락 마르가레테

너의 재가 된 머리카락 줄라미트.


- (시집 죽음의 푸가중 시 죽음의 푸가, 41, 전영애 옮김, 민음사, 2011)


 















여기서 푸른 눈에 금발의 마르가레테는 허구적 개념인 '순수한 아리안족'을 상징한다. 반면 재가 된 머리카락의 줄라미트혹은 회색 빛 머리카락을 한 줄라미트는 유대인을 나타낸다. 시의 마지막 두 행은 최근에 출간된 홀로코스트 문학작품 (신시아 오직 지음)의 첫 페이지에도 수록되어 있다. 이 시에는 가해자와 희생자가 대비되고 있다. 희생자는 소각되어 연기가 되어 공중 무덤으로 올라간다는 이미지가 또렷하다. 하루키가 이 시 혹은 연기의 이미지에 영향을 받았음직한 대목은 또 다른 작품에서 발견된다. 홋타 요시에의 시간(1955)이란 소설에서다. 여기에서 이 연기의 이미지가 다시 나타난다. 이 소설 역시 난징대학살을 중심테마로 삼는데, 독자로서 놀라웠던 점은 가해국 일본의 작가가 희생국의 장교를 주인공으로 한 소설을 썼기 때문이다.


 

시체 두 구를 숯으로 해서 우주가 데워지고 있다. 아지랑이처럼 사람의 피와 기름이 증기가 되어 하늘로 올라간다. 마치 지금 이 순간의 난징을 상징하는 듯이.”(홋타 요시에,시간, 74)




 

















 하루키는 아버지의 역사를 조사하면서, 난징과 관련한 문헌을 보았을 것 같다. 이 소설 역시 말이다. 그러면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에서 벽으로 둘러싸인 도시에서 무력하게 죽어갔던 단각수들을 중일전쟁 당시 일본군에 죽어간 희생자들을 1차적으로 염두에 두고 있었다고 볼 수도 있지 않을까. 여기엔 하루키가 표현하듯이 무의미하게 죽어간 일본 병사들뿐만 아니라 전쟁과 집단의 광기에 희생된 민간인들과 관련이 있을 것이란 추정도 가능하다. 그러면 이 단각수들은 양을 쫓는 모험에서 등장하는 양들의 이미지와 연결된다. 일본 근대화 과정에서 아래로 강요된 폭력에 휘둘리고 희생된 양들의 운명을 떠올리게 하는 것이다. 혹은 적어도 관련이 있다고 생각해볼 여지가 있다.

 


 또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에서 화자가 도서관의 소녀와 함께 도시 주변부에 있는 거대한 웅덩이를 보러 가는 대목이 나온다. 이 장면에서 소녀가 이렇게 이야기한다. “사람들 말에 따르면 옛날에 여기에다 이교도나 전쟁 포로를 던져 넣었다고 해요. 벽이 생기기 전 시대에.”(145) 스쳐가듯 던져진 이 문장에서 나는 하루키가 계승한 아버지의 트라우마의 흔적을 발견한다. 나는 일본인으로서 하루키의 정신에 남은 응어리의 기억이 조금 더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 자국 내에서 발생한 간토대학살과도 무관하지 않다는 생각도 해본다. 하루키 소설에 등장하는 웅덩이 혹은 구덩이는 난징대학살이든, 간토대학살이든 무모한 전체주의의 폭력에 스러져간 희생자들을 처리한 장소가 된다. 이 장소는 이제 망각을 위한 장소, 애도가 금지당한 장소로도 이해해볼 수 있지 않은가. 그 자체로 전체주의 폭압을 암시하는 대상으로 볼 수도 있겠다.



 

 올해 첫 날 일본 본토(혼슈 도야마현)에서 진도 7.4의 큰 지진이 발생했다. 사망자가 벌써 220명이 넘었다고 한다. 나는 안타까운 희생자와 이재민에 관한 뉴스기사를 보면서, 동시에 간토대학살을 떠올려보았다. 일본군과 관계 기관에서 퍼뜨린 유언비어로 현재까지도 정확히 파악되지 않는 조선인 및 중국인과 일본인 희생자가 발생했던 사건이다. 조선인 희생자 수만 6600여명이라고 많은 사람들이 기억하고 있겠지만, 어떤 입장에서 조사하느냐에 따라 그 숫자가 크게 다르다. 중요한 건 여전히 정확한 수가 공식적으로 집계되지도 않았다는 점이다. 더 놀라운 건, 지금까지 대한민국의 어떤 정부도, 일본에 간토대학살에 대한 정식 조사를 공식적으로 요청한 적이 없다는 사실이다. 다시 말하면 이 사건은 현재진행형인 동시에 본격적으로 조사가 시작되지도 않은 셈이다. 사건 발생 100년이 넘었는데도 말이다. 아직까지 희생자에 대한 애도마저 제대로 이루어지지도 않았다는 말이다. 하루키의 소설을 읽어가면서, 그리고 관련된 자료를 찾아보면서 새롭게 알게 된 것들이다. 정리하면, 하루키 아버지의 개인사는 난징대학살이라는 세계사적인 사건 속에 엮어 있었고, 이것이 작가 하루키의 어린 시절에 큰 사건이자 오랜 기억의 응어리로 계승되고 있음을 염두에 두며 읽어갈 수 있다. 40여년 동안에나 작가의 마음 속 풍경을 차지했을 이 기억을 어떻게 다루어야 할지 그는 고민을 거듭했을법하다. 일흔이 넘은 시점에 다시 묵혀둔 글을 다듬어 3부로 구성된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을 세상에 내놓았다. 작가의 이러한 문제의식과 더불어 그의 작품을 감상해볼 수 있다.


 

고양이를 버리다를 읽으며 확인할 수 있는 점은, 하루키가 자신의 존재에 대해 끊임없이 돌아보는 작가라는 점이다. 앞에서 인용한 51페이지의 문장은 이렇게 이어진다.


 

사람의 마음은 그렇게 이어지는 것이고, 또 역사라는 것도 그렇다. 본질은 계승이라는 행위 또는 의식(儀式) 속에 있다. 그 내용이 아무리 불쾌하고 외면하고 싶은 것이라 해도, 사람은 그것을 자신의 일부로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 된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역사의 의미가 어디에 있겠는가?”(51)


 

작가 자신의 존재는 이 우연속에서 결정된 하나의 현실일 뿐이라 얘기한다. 세상에 던져진 이상, 이를 자신의 일부로 받아들일 수밖에없다고. 태어나기 전에 아버지를 선택할 수는 없는 일이다. 하루키의 아버지는 당대에 교토 제국대학 문학부에 입학한 수재였고, 미래에 대한 부푼 꿈을 꾸었던 엘리트 청년이었으리라. 다만 20세에 국가에 의해 징집되고 학살의 현장에 가야만 했던 개인의 역사를, 후손인 하루키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달리 어떤 선택이 존재할 수 있을까. 훗날 하루키는 관계가 멀어진 아버지에 대해 이렇게 이해하게 되었을 것이다. 다만 하루키에게 인간이 인간일 수 있는 이유란 인간이 이후의 삶에서 할 수 있는 선택에 관한 것이었을 테다. 하루키의 아버지는 평생 매일 아침마다 전쟁에서 희생된 이들을 위한 기도와 독경을 하며 애도했다. 마찬가지로 하루키에게 문학 행위는 인간 존재에 대한 연민과 애도를 보내는 행위였으리라 생각되는 지점이다. 그러니까 일부 독자들이 말하듯 하루키 작품을 단순히 가벼운 작품이라 규정할 수 없는 이유는, 그가 작품을 대하는 진정성에서 나온다고 본다.


 

이런 맥락에서 하루키의 문학세계를 어떻게 바라볼 수 있을까 생각해보다가, 최근 감상한 장욱진 화백의 그림과 작업들이 떠올랐다. 이 두 사람이 무슨 관계냐고? 내겐 아주 중요한 연결지점이 있다. 장욱진 화백은 평생 반복해서 그린 대상이 몇 가지 있다. (까치), , 강아지, 나무, 여인과 아이 혹은 가족 등등이다. 하루키의 경우도 다르지 않다. 우물과 웅덩이, 단각수, 고양이, 코끼리나 거북, , 소녀(혹은 소녀와의 관계), 노인 등등 작품에 반복해서 나오기 때문이다. 그것도 평생에 걸쳐 내놓은 작품들에서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장욱진 화백의 작품에서 형식적 진정성을 찾고자 시도했던 단순한 그림, 단순한 사람 장욱진(이하 장욱진)에 주목해보자. 저자 정영목이 장욱진의 작품 이해에 시도했던 감상 태도를 하루키에게 적용해볼 수는 없을까. 하루키와 장욱진 모두 평생에 걸쳐 사용했던 라이트모티프들이 등장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들의 작품들을 작가 내면의 마음 풍경을 그려낸 것으로 이해해볼 수 있겠다고 여긴다.


 

반복되는 시각적 상징들은 작가의 관념적인 마음 풍경을 전달하기 위한 의미로 작동할 뿐, 그림을 설명하거나 상징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장욱진, 71)


 















다시 말하면, 하루키의 작품을 읽을 때에도 심리적인 관점에서 접근할 수 있겠다는 단서를 얻을 수 있다.


 

장욱진이 극히 제한적인 사물 혹은 대상에 관심을 보였다든지, 그 관심의 대상들이 동어반복적인 조형 이미지로 일생 내내 작품에 반영되었다는 사실은 그의 작품을 사회심리적인 정신분석의 영역에서 바라보아야 한다는 걸 의미한다.”(장욱진, 144)


 

이처럼 장욱진 화백의 작품을 분석하고 작품 자체의 가치를 발견해보고자 했던 저자의 접근 방식 혹은 관점을 하루키의 작품에도 적용해본다. 화백의 작품 대신 하루키의 작품을 대치해도 잘 들어맞는다는 인상을 준다. 그가 청년시절부터 엄청난 독서를 한 사람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프로이트의 책도 상당히 읽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그의 많은 작품에서 이 등장하는 것 역시 프로이트나 융의 영향을 무시할 수 없을 것이란 심증을 더해본다. 여기에 하루키의 작품에 흐르는 태도에는 반복계승이라는 표현도 눈에 띈다. 이건 장욱진 작품을 분석하는 방식을 하루키에도 적용할 수 있는 실마리가 된다.

 


장욱진은 그리고자 하는 자신의 욕구와 행위를 형식의 문제가 아닌, 자연과 삶 그리고 작가와 작품의 관계에 걸쳐 있는 일종의 진실을 추구하는 문제로 보았다. 또한 조형으로서의 압축과 변화하지 않는 반복의 조형은 자신의 정직함을 나타내는 표상인 것이다. 그에게 있어서 같은 스타일을 반복한다는 것은 이미 조형 이전의 문제인 것이다.”(단순한 그림, 단순한 사람 장욱진, 47)

 


어떤가? 나는 이 접근방식이 하루키의 작품 감상에도 어느 정도 적용될 수 있다고 여긴다. 장욱진의 작품에서 나타나는 반복의 조형은 하루키에서 반복되는 대상(이를테면 단각수)이 갖게 된 독특한 맥락과 연결지어 볼 수 있지 않은가. 물론 여기에서는 문화적 혹은 관습적으로 적용되는 단각수의 상징성을 그대로 적용하기는 힘들 것이다. 또 장욱진 화백의 책 강가의 아틀리에에서도 언급되지만, 화가 자신에게 그림을 그리는 행위는 자아의 발견’, ‘자기에 대한 사고방식을 개발하고 발현시키는 일이었다. 장욱진 화백은 자꾸 반복할수록 그림이 좋은 거예요라고도 말하지 않았던가. 그러므로 반복되는 테마에서 독자들은 진부함을 지적하기 전에, 하루키 작품의 진정성을 먼저 발견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결론을 얻는다. 또 정영목 교수가 그림 속 대상은 작가의 분신이라 보아야 한다”(장욱진, 161)라고 언급했던 것처럼, 하루키의 작품에 등장하는 여러 인물들(최소한 몇몇 인물들) 역시 작가가 규정해 놓은 자신의 다른 모습들로 볼 수 있겠다. 이 말은 문학평론가이자 시인 김응교 교수가 그의 저서 일본적 마음에서 언급한 내용으로 확인되는 점이다. 하루키의 첫 작품인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나 두 번째 작품 1973년의 핀볼, 그리고 세 번째 작품 양을 쫓는 모험에 등장하는 인물 가운데, 소설 쓰는 쥐나 제이스바의 J 역시 작가 하루키의 또 다른 자아상이라는 언급에서 다시 확인할 수 있었다.





















100페이지가 되지 않는 하루키의 고양이를 버리다를 읽다가 이야기가 길어졌다. 우연히 20여년 만에 하루키 문학을 다시 접하게 되었는데, 하루키와 그의 작품이 정말로 궁금해졌다. 작가의 아버지에 대한 고백이 담긴 이 책과 작가의 최근 작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를 읽고, 이어서 작가의 초기 작품 세 편(바람의 노래를 들어라, 1973년의 핀볼, 양을 쫓는 모험)을 읽고 비교하며 반복되는 주제들도 찾아보았다. 이 반복이란 키워드에서 장욱진 화백의 작품 감상에 대한 방법론을 하루키의 작품 감상에도 적용할 수 있지 않을까하는 생각을 해보았다. ‘아마추어 독자의 읽기 놀이로 보아주시면 될 것 같다. 내게는 하루키의 작품을 새롭게 바라보게 한 기회가 된 독서 경험이었다. 아직 어설픈 독자이긴 하지만, 작가 하루키가 평생 구축한 문학 세계라는 성에 들어가기 위한 열쇠가 될 만한 단서들을 생각해보았다. 이 단서를 설명하는 키워드로 나는 마음의 눈이란 표현에 주목한다.

 


관찰할 대상을 정확하게 재현해내는 것이 아닌, 마음의 눈으로 관찰한 대상을 독창적인 형식으로 표현하고자 하는 서구 모더니즘의 기본 개념을 반영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글이다.”(장욱진, 49)


 

결국 하루키의 작품 역시 심리적인 관점에서, ‘마음의 눈으로 접근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감상을 그의 작품을 읽으며 떠올려보았다. 흥미로운 건 이 마음의 눈이란 표현이 최근에 등장한 표현은 아닌 듯하다는 점이다. 셰익스피어의 작품에도 이 표현이 나온다.

 


햄릿: 내 아버지 - 아버님을 본 것 같아.

호레이쇼: 오 어디서요, 왕자님?

햄릿: 마음의 눈으로, 호레이쇼.

[햄릿, 김정환 옮김, 아침이슬, 25]


 

장욱진 화백의 작업 세계와 작품 감상에 대한 접근법을 기계적으로 하루키의 작품에 그대로 적용할 수는 없을테지만, 하나의 방법으로서 참고할 수 있겠다. 다만 작품 속에 반복되는 대상에 대해 일대일 대응물을 찾듯이 그 상징성을 하나하나 캐물어야할 필요는 없을 듯하다. 대신 이를 반복하는 작가-하루키의 진정성을 알아보자는 것이다. 그가 전하고자 하는 마음의 풍경을 들여다보자는 제안인 것이다. 한번쯤 독자는 아버지를 발견한 햄릿의 마음의 눈으로 하루키의 작품에도 접근해볼 수 있지 않겠는가.























(그림: 가오 옌)






[책 속으로]


[1] "왜 그 고양이는 해변에 갖다 버려야 했을까? 왜 나는 그 일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을까? 그건 - 고양이가 우리보다 빨리 집으로 돌아왔다는 사실과 더불어 - 지금도 하나의 수수께끼다."(16)

[2] "아버지가 왜 번듯한 불단이 아니라, 그렇게 조그만 유리 케이스 앞에서 매일 아침 독경을 했을까? 그것도 나는 알 수 없는 일 중 하나다. 그러나 아무튼, 그 일은 아버지에게는 하루의 시작을 뜻하는 중요한 습관이었다."(17)

[3] "어린 시절에 한 번, 그에게 물은 적이 있다. 누구를 위해서 독경을 하는 것이냐고. 그는 말했다. 전쟁에서 죽어간 사람들을 위해서라고. 전쟁에서 죽은 동료 병사와 당시에는 적이었던 중국인들을 위해서라고. 아버지는 그 이상은 설명하지 않았고, 나도 그 이상은 질문하지 않았다."(18)

[4] "중국 병사는 자신이 죽을 것을 알면서도, 두려워하지 않고, 소란을 피우지도 않고, 그저 눈을 감고 조용히 거기에 앉아 있었다. 그리고 참수되었다. 실로 훌륭한 태도였다, 하고 아버지는 말했다. 참수된 중국 병사에 대한 경의를 - 병사이며 중인 그의 혼에 - 크나큰 응어리가 되어 남아 있었던 것은 분명한 듯하다."(49)

[5] "이 시기에 중국 대륙에서는, 초년병이나 보충병을 살인 행위에 길들이기 위해 포로로 잡은 중국 병사를 죽이라고 명령하는 일이 흔했던 것 같다. 요시다 유타가 쓴 《일본군 병사》에 다음과 같은 문장이 있다.
후지다 시게루는 1938년 말부터 1939년에 걸쳐 기병 제28연대장으로서, 연대 장교 전원에게 ‘병사를 전장에 적응케 하는 가장 빠른 방법은 살인이다. 즉 담력을 시험하는 것이다. 이에는 포로를 사용하면 된다. 4월에 초년병이 보충될 예정이니, 최대한 빨리 기회를 만들어 초년병을 전장에 적응케 하고 강하게 만들어야 한다.’ ‘이에는 총살보다 척살이 효과적이다‘하고 훈시했다고 회상했다."(50)

[6] "어쨌거나 아버지의 그 회상은, 군도로 인간을 내려치는 잔인한 광경은, 말할 필요도 없이 내 어린 마음에 강렬하게 각인되었다. 하나의 정격으로, 더 나아가 하나의 의사 체험으로. 달리 말하면, 아버지의 마음을 오래 짓누르고 있던 것을 - 현대 용어로 하면 트라우마 - 아들인 내가 부분적으로 계승한 셈이 되리라. 사람의 마음은 그렇게 이어지는 것이고, 또 역사라는 것도 그렇다. 본질은 ‘계승’이라는 행위 또는 의식(儀式) 속에 있다. 그 내용이 아무리 불쾌하고 외면하고 싶은 것이라 해도, 사람은 그것을 자신의 일부로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 된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역사의 의미가 어디에 있겠는가?"(51)

[7] "나는 손을 움직여 실제로 문장을 쓰는 것을 통해서만 사고할 수 있는 인간이기에(태생이 추상적, 관념적으로 사색하는 것에 서툴다) 이렇게 기억을 더듬고, 과거를 조망하고, 그걸 눈에 보이는 언어로, 소리 내어 읽을 수 있는 문장으로 환치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문장을 쓰면 쓸수록 그리고 그걸 되읽으면 되읽을수록 나 자신이 투명해지는 듯한 신비로운 감각에 휩싸이게 된다."(88)

[8] "나는 툇마루에 앉아 소나무를 올려다보면서 자주 상상했다. 조그만 손톱을 세우고 온 힘을 다해 소나무에 들러붙은 채 죽어서 말라비틀어져간 조그맣고 하얀 새끼 고양이를. 그것은 내 어린 시절의, 고양이에 얽힌 또 하나의 인상적인 추억이다. 그리고 그 추억은 아직 어린 내게 생생한 교훈을 남겨주었다. ‘내려가기는 올라가기보다 훨씬 어렵다’ 하는 것이다. 보다 일반화하면 이렇게 된다 - 결과는 원인을 꿀꺽 삼켜 무력화한다. 그것은 어떤 경우에는 고양이를 죽이고, 어떤 경우에는 사람도 죽인다."(92)

[9] "내가 이 개인적인 글에서 가장 말하고 싶었던 것은 딱 한 가지뿐이다. (...) 나는 한 평범한 인간의, 한 평범한 아들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 그것은 아주 당연한 사실이다. 그러나 차분하게 그 사실을 파헤쳐 가면 갈수록 실은 그것이 하나의 우연한 사실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이 점차 명확해진다. 우리는 결국, 어쩌다 우연으로 생겨난 하나의 사실을 유일무이한 사실로 간주하며 살아있을 뿐이 아닐까."(92)

[10] "바꿔 말하면 우리는 광활한 대지를 향해 내리는 방대한 빗방울의, 이름 없는 한 방울에 지나지 않는다. 고유하기는 하지만, 교환 가능한 한 방울이다. 그러나 그 한 방울의 빗물에는 한 방울의 빗물 나름의 생각이 있다. 빗물 한 방울의 역사가 있고, 그걸 계승해간다는 한 방울로서의 책무가 있다. 우리는 그걸 잊어서는 안 되리라."(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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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학과 문학 사이 

- 국내에 처음 소개되는 드리스 슈라이비의 단순한 과거

 


드리스 슈라이비 지음 | 정지용 옮김 | [을유문화사] | (2024)




 

드리스 슈라이비의 소설 단순한 과거와 만난 첫 인상 몇 가지를 정리해본다.


 

[1] 작가 드리스 슈라이비는 1926년 모로코 출생이다. 이 정보만으로도 많은 정보를 짐작해볼 수 있겠다. 모로코는 아프리카 북서부의 국가로 프랑스와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한 것은 1950년대라고 한다. 과거에 마라케시라는 이름에서 유래한 영어식 이름이 바로 모로코라고 한다.


유럽, 특히 1920년대의 유럽, 그리고 법적으로 프랑스의 식민지 상태였던 시대. 이 배경 정보는 정말 많은 것을 짐작할 수 있게 한다. 1차 세계대전 직후 세계적인 경제불황과 나치 독일의 등장이 임박했던 시기. 오래 지속되어온 인종 혐오와 종교 갈등은 점점 더 긴장의 수준을 높여놓았을 테다.


이번에 출간된 단순한 과거는 국내에 작가 드리스 슈라이비의 첫 소개 작품인 듯하다. 소설가가 성장했을 시대, 특히 30-40년대를 고려해보면, 개인으로서도 결코 만만치 않은 시대를 살아낸 인물이란 짐작을 해본다. 이 정보만으로도 오늘 만나는 작품의 아우라가 느껴진다.



 

[2] 제목 단순한 과거는 문법 용어 단순 과거에서 온 말 같다. 시제와 관련하여 복합 과거뭐 이런 문법 용어도 있었던 것 같은데... 과거의 좋았던 시절에 대한 희구가 담긴 소설일까도 생각해보았다. 물론 주인공은 가부장제도, 그리고 억압적인 프랑스 제국주의 관행들과 충돌할 것이란 정보를 흘깃 보긴 했다. 이런 분위기만으로도 눈에 힘이 조금 들어간다. 어떤 이야기가 전개될지 궁금해지긴 한다.



 

[3] 이 소설은 현재 진행 중인 하마스-이스라엘 전쟁과 직접적인 관련은 없을 테지만, 책의 표지를 보다 갑자기 시오니즘과 중동문제들에 대한 이야기를 쓴 아모스 오즈의 작품과 동시에 이 전쟁이 떠올랐다.


표지 사진의 골목은 언젠가 이스라엘에 출장을 갔을 때 보았던 예루살렘의 어느 동네 골목 풍경을 떠올리게 했다. 지금은 쑥대밭이 되었을 가자지구를 방문해본 적이 있었는데, 경계너머로 가자지구를 보았던 기억이 났다. 그 때는 고요한 낮시간이었다. 붉은 꽃잎을 한 꽃들이 민들레처럼 여기저기 피어 산들바람에 휘청이던 풀밭을 조용히 보고 있던 순간 어디선가 갑자기 기관총을 쏘아대는 소리가 들렸더랬다. 우리 일행은 총소리를 듣고서야 나는 정신을 차리고 가자지구를 벗어났던 경험이 떠올랐다. 여기 사람들에게는 이런 일들이 일상이었던 것이다.


 

단순한 과거에서는 모로코와 프랑스. 이슬람 국가와 기독교 국가. 북아프리카인과 유럽인의 구도가 뼈대를 이루는 듯하다. 작가가 살던 시대뿐만 아니라 지금도 여전히 진행 중인 종교·이념간의 갈등과 맞물린 제국주의·식민주의의 잔재들. 지금 지구 한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하마스-이스라엘 전쟁과 소설의 대결 구도는 결코 무관하지 않은 것이다.


 

올 겨울이 다 가기 전에 드리스 슈라이비의 단순한 과거와 아모스 오즈의 블랙박스, 사랑과 어둠의 이야기읽기 목표가 생겼다.










 











[4] 단순한 과거의 목차를 보면 다섯 편의 제목들이 특이하다.

기본원소, 전이기간, 반응, 촉매, 합성원소


 

모두 화학용어다. 마치 프리모 레비의 자전적 단편소설 주기율표같은 느낌이 들었다. 프리모 레비는 화학자였기 때문에, 이 소설집에 실린 단편의 제목들을 모두 주기율표의 원소이름에서 따왔다. 작가 다니엘 슈라이비의 작가 연표를 보니 그도 청년시절에 화학을 전공했다고 한다. 흥미롭다. 프리모 레비의 주기율표에서는 이를테면, ‘증류에 대한 묘사나 화학 개념을 우리의 삶과 연결 지은 부분이 인상적이었다.


 

제목의 전개가 왠지 소설의 -전개-위기-절정-결말5가지 구성 요소를 보는 것 같아 흥미를 더한다기본원소가 합성원소로 되는 이야기. 그 사이에 얼마나 무수한 원소들이 충돌하고 반응했을까.





 












[5] 책 맨 뒤에 실린 을유세계문학전집 연표를 발견했다. 지금까지 출판사에서 나온 작품의 연대를 표로 정리한 것인데, 어떤 편집자님이 만들었을까. 이 연표가 마음에 들었다! 이 연표를 어떻게 구경해볼까 하다가 내가 좋아하는 멜빌의 모비 딕을 기준으로 사용해본다. 모비 딕은 1851년에 나왔다. 바로 앞에 있는 호손의 주홍 글자를 중심으로 작품들을 살펴본다. 멜빌의 선배 작가 호손이 그보다 1년 먼저 이 유명한 작품을 내었구나. 에밀리 브론테의 워더링 하이츠(폭풍의 언덕)와 샬럿 브론테의 제인 에어1847년에 나왔다는 정보도 확인해본다. 도스토옙스키의 그 유명한 죄와 벌 1866년에 나왔구나. 이런 식으로 어떤 작품이 어느 시기에 빛을 보게 되었을까 앞뒤로 살펴보고 비교해보는 재미가 있다. 이 표만으로도 한 시간은 거뜬히 혼자 놀아볼 수 있겠다


 

, 그런데 아직 첫 페이지도 넘기지 못했구나! 이제 읽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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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24-01-10 23:0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오옷 벌써 읽으셨군요 :>
전 느린 걸음으로 읽어 보렵니다.

생각난 김에 신청하려고 했더니
15일 출간이라고 되어 있어서 한
템포 늦춰야겠네요.

Falstaff 2024-01-11 16:13   좋아요 1 | URL
저도 예약이 되어 있네요. ㅎㅎㅎ 그때 보는 걸로.... 하시죠. ^^
 
임금님의 이사 문지아이들
보탄 야스요시 지음, 김영순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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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용한 쓸모의 유희적 발견


임금님의 이사

 

보탄 야스요시 글·그림 | 김영순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7)

 




가끔 아내가 보는 그림책을 가져다 보곤 한다. 관심분야가 하늘과 땅만큼 차이 나는 우리 부부는 각자 다른 책을 보다 가끔 그림책 앞에서 만난다. 안녕!

 


임금님의 이사도 이렇게 만났다. 그림책에는 다양한 형식과 이야기 구조가 있다. 어린 아이들을 대상으로 만들어진 책도 있지만, 생각할 거리들이 많아 각 페이지마다 머물다 책장을 넘기게 되는 책도 있다. 또 그림 한 점 한 점에 시선을 빼앗기다 책장을 넘기는 그림책도 있었다. 그림책이 아이들만을 위한 장르라고 여긴다면 오산이다. 그림과 텍스트 작업은 한 작가가 하는 경우도 있지만, 많은 경우 글과 그림 작가가 협업을 많이 한다. 어떤 경우든 그림책은 그림과 글이 거의 무한대에 가까운 다양한 개성을 드러내며 서로 만나는 장이다. 글 없는 그림책이라면 제목이 그림과 잘 어울리는지도 살펴보는 재미가 있다. 대개의 경우 글 작가와 그림 작가의 작업이 서로 잘 어울리는지, 그리고 그림책의 방향에 대한 이해의 정도를 짐작해보기도 한다. 그림책은 결코 아이들만을 위한 장르가 아니다. 그림을 그리는 화자(그림 작가)의 화면 구성 혹은 프레이밍이 텍스트를 어떻게 해석했는지, 그림 작가의 개성이 텍스트와 얼마나 잘 조응하며 드러나는지 등등, 보이지 않지만 그림책을 통해 많은 것을 읽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림책을 볼 때 중요한 건 각자가 자신의 관심사에 맞게 읽어내고 즐기는 일이다.


 

아이들이 그림책을 읽는 방식이 어떤지 궁금하긴 하다. 어린 독자들은 글보단 그림에 먼저 눈길을 주기 때문에 아이들이 이야기를 통해 그려낸 세계 속에서 여행을 지속할 수 있게 해주는 흐름이 무엇보다 중요하지 않을까 싶다. 따라서 어린 독자들에게는 그림을 통해서 이야기를 가장 효과적으로 전달할 수 있는 방식을 찾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할 것 같다. 텍스트 역시 문장이 만들어내는 소리와 리듬감이 독자들에게 쉽게 가 닿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모든 글자와 단어가 세심하게 다듬어져야 하지 않을까. 이런 의미에서 그림책 작업은 그 자체로 하나의 예술 장르다. 그림책의 대상 독자는 대개 아이를 포함한 폭넓은 독자다. 따라서 더 많은 고민과 연구가 필요하다. 폭넓은 독자의 마음을 얻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마흔에 읽는 철학책과 같은 기획과는 완전히 다를 수밖에. 그림책 작가들은 무엇보다 글과 그림의 결이 맞는지, 그리고 글과 그림의 전달력을 어떻게 확보할 수 있을지에 많은 시간과 공을 들일 것이다. 한 권의 그림책을 완성하기 위해 수차례 더미북을 만드는 과정이 필요한 이유다. 특히 아이들을 위한 그림책 작업 과정은 아이라는 세계를 이해하기 위해 분투하는 과정이다.


 

임금님의 이사는 어느 독자를 대상으로 할까. 특정 연령대의 독자를 정해 두지는 않은 듯하다. 어린 독자들에게는 그들 나름의 글-그림 해석이 발생할 것이고, 성인 독자 역시 각각의 관심사에 맞는 수용 방식을 따를 것이다. 이 작품은 그런 그림책이다. 작가 보탄 야스요시는 1971년 오사카 출생으로, 그의 그림은 상당히 섬세하다. 반면 자세히 보면 또한 느슨한 여유가 엿보인다. 간결하게 그린 윤곽에 무심한 듯 채색되어 있는 묘한 인상을 주는 작품이다. 섬세해 보이는 채색 방식은 자칫 답답하고 경직될 수 있는 반면, 그의 그림에서는 은근하고 느슨한 자유로움마저 느껴진다. 그림을 감상하는 이들은 숨을 죽이고 그림을 관찰하다가도, 어느 순간 숨통을 틔워준다고 할까. 또 인물이나 동물들에 과도하게 익살맞거나 귀여운인성을 부여하지 않아 좋다. 이건 물론 나의 취향일 뿐이다.

 


그림책 중에는 원화가 궁금해지는 작품이 있다. 내게는 임금님의 이사가 그렇다. 대부분의 그림의 파노라마 판형이기에 그림의 절반이 접혀 보이는 경우가 많다. 책으로 그림을 감상하기에는 조금 아쉽다. 투명한 수채화 그림의 발색은 과하지 않으나 선명한 인상을 준다. 섬세하게 그려졌기에 원화가 더욱 궁금해지는 그림들이다. 한편 임금님과 친구들이 기다란 수레에 엄청난 짐을 싣고 이동하는 장면은 동양과 서양적인 사물들이 모인 호기심의 방을 연상케 한다. ‘분더카머’, 혹은 쿤스트카머라 불렸던 서구 근대의 전유물인 호기심의 방은 유럽 귀족들이 전 세계에서 수집한 동물과 식물, 문명의 유물들을 모아놓은 방을 의미했다. 중국풍의 도자기와 동방의 양탄자 같은 물건이 보이고, 서구적인 의복이나 실내 장식물, 심지어 축음기와 대형카메라까지 보인다. 이런 그림을 좀 더 큰 한 장의 원화로 감상해보고 싶은 것이다.


 

이야기의 주요 인물은 부끄럼이 많은 임금님과 덤벙대는 친구여섯 명이다. 글에는 친구라고 나와 있지만, 이들에게 임금은 임금이다. 명령이 내려지면 친구들은 이를 수행한다. 항상 빨간 망토를 하고 다니는 임금님은 부끄럼이 많다곤 하지만, 그냥 아이 같은 캐릭터다. 그를 규정하는 특징은 무엇보다 동정적이라는 것. 남들이 곤경에 빠졌을 때 그들을 도와주고 싶어 한다. 여기에 거의라고 말해도 좋을 만큼 물욕이 없다. 왠지 이야기의 시작부터 예사롭지 않다. 임금님은 좋은 의도(목적)으로 행동하려 했지만, 이를 위해 동원되는 수단은 독자의 기대를 간단히 넘어버리는 것이다.


 

문제는 덤벙대는 친구들이 임금님의 말을 잘 못 알아듣는 데서 발생한다. 이들이 좁은 침대에서 자는 모습을 안타깝게 여긴 임금님은 자신의 친구들을 위한 큰 침대를 만들라고 지시한다. 여기까지는 임금님의 공감과 연민이 빛을 발하는 듯하다. 하지만 해결사 친구들이 만든 침대는 너무 커서 성에 들어가지 못할 정도였다. 이때 임금은 이 침대를 집어넣을 수 있는 큰 성으로 이사 가기로 결정한다. 이 장면은 나의 빈곤한 상상력을 자극한다. 자신의 침대를 넣기 위해 더 큰 공간으로 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문제는 임금님과 친구들사이에 정확한 소통이 이루어지지 않아 계속 새로운 문제를 낳는다는 점이다. 누군가는 임금님이 구체적이고 명확하게 지시를 내렸어야 한다고 지적할 것이다. 또 누군가는 임금님의 속내를 이해하고 행동에 움직였어야 하며, 모르면 물어봤어야 하는 것 아니냐고 반문할 수도 있겠다. 모두 틀린 말이 아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이 책은 온전한 소통은 가능한가?’라는 문제를 우리에게 던질 수도 있겠다. 이 질문을 조금 다르게 비틀면, ‘타인에 대한 온전한 이해는 가능한가?’라는 문제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이번에는 임금님의 해결사 친구들을 조금 더 주목해보자. 어떤 의미에서 이들은 임금님의 친구들이지만, 결국 임금님의 명령을 수행하는 이들이다. 명령을 거부하는 일 없이 따르는 일상에 익숙한 이들이다. 어떤 맥락에선 임금과 신하의 수직적 관계 속에서 맹목적인 명령과 복종이 야기할 수 있는 문제들(소통의 문제를 포함하여)로 읽어낼 수 있을 것이다. ‘생각하지 않는사람들, 혹은 묻지 않는 사람들의 모습을 발견할 수도 있겠다. 우리의 삶에서 물음을 갖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나는 삶에서 세계에 대한 호기심을 갖는 일이 타자를 더 이해하는 데 꽤나 도움을 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 삶에서 갖는 물음은 어떤 대상에 대한 조그마한 관심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만약 이 친구들이 임금님의 침대를 더 크게 만드는 목적이나 이유에 대해 궁금해 했다면, 결과는 달라질 수 있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그림책처럼 간단해 보이는 작품에서도 인간의 삶에 나타나는 다양한 문제들과 연관 지어 생각거리를 건져 올릴 수 있다. 우선 단독자와 단독자 사이에 온전한 이해란 불가능한 일이라고 해도, 소통의 간극을 좀 더 줄일 수 있는 것은 보다 나은소통을 위해 양자가 노력하는 일에도 있음을 생각해본다.


 

임금님과 친구들이 이사 가는 길에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곧이어 일행이 비를 피한 집에서 비가 새기 시작한다. 동정심 많은 임금은 집주인에게 도움을 주라는 어명을 내린다. 임금의 말에 친구들은 임금의 그릇을 모두 꺼내 빗물을 모으는 데 사용해버린다. 이 때 빗물이 만들어내는 톡 토독 토동하는 소리에 모두가 즐거워했다는 점이 놀랍다. 임금님이 이번에는 비를 쫄딱 맞은 아이를 보고 흐음, 옷을 입혀 주어라.”라고 말하니, ‘친구들은 마을에 있는 조각상에 임금의 옷을 모두 꺼내 입혀준다. 임금님이 이런 모습에 흥겨워하는 모습은 이 그림책이 내놓는 또 다른 반전이다. 현실의 방식과는 달리, 그림책에서는 이런 소통의 어긋남이 꽤나 유쾌하게 이어진다. 차분하고 진지한 듯한 분위기 속에 스며든 해학이 엿보인다. 엉뚱한 상상력이 뜻하지 않은 장면에서 웃음을 주는 것이다. 물론 여전히 온전한 소통의 부재라는 문제는 남는다. 다만 임금님은 시종일관 그림책에서 보이는 소통의 어긋남이 만들어낸 이벤트를 더 좋아하는 듯하다. 심지어 즐기기까지 하는 것 같다. 이제 더 큰 성에 도착한 임금님과 친구들일행에는 임금님이 원래 사용하던 침대 하나만 남았다. 더 큰 성에 애써 왔는데, 남은 물건은 쓰던 침대 하나라니. 어쩌면 우리의 경직된 일상에서 가끔, 혹은 자주 필요한 것은 바로 이런 유희적 순간이 아닐까 싶다. 이 그림책은 소통의 문제를 던져줄 수도 있겠지만, 우리의 삶을 더 흥겹게 만들어주는 유희성에 좀 더 방점이 있는 듯하다. 나는 이를 무용한 쓸모의 유희적 발견이라 정리해본다. 우리의 일상에서 생산적이지 못한 행위나 활동은 무용하다고 치부되곤 한다. 하지만 견고한 규범과 관습이 만들어낸 경직된 세계에서 우리에게는 인간다움을 유지하게 해주는 놀이의 요소, 유희성이 남아 있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최근에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영화 <괴물>을 보았는데, 정체가 모호하게 느껴졌던 학교 교장선생이 아이에게 해준 말이 기억났다. 정확한 문장은 기억나진 않지만, 대략 이런 의미였다. “모두가 누릴 수 없다면, 그건 행복이 아니야라고. 임금님의 이사역시 우리가 함께 행복할 수 있는 길을 제안한다고 볼 수도 있겠다. 엉뚱해 보이는 상상력으로 독자의 관성적인 사고를 가볍게벗어나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의 매력을 꼽으라면, 나는 무용한 쓸모를 유희적으로 발견하는 경쾌함, 바로 이 가벼움을 선택하겠다. 공동체의 삶에 약간의 상상력이 가미된 가벼움, 마치 허세 가득한 남자들의 경직된 세계에서 구성원 사이의 긴장을 느슨하게 해주는 방향제의 역할을 할 수 있지 않을까 싶은 것이다. 사람들의 숨통을 틔워주고 종종 미소도 짓게 해줄 수 있기 때문이다. 가끔은 규범의 경계를 훌쩍 넘는 일탈도 감행해보기도 하고 말이다.


 

마지막으로 임금님과 친구들이 한 침대에서 함께 잠드는 장면(나라면 사양하겠다), 우리의 삶에서 정말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묻는 듯하다. 임금님은 큰 침대를 집어넣기 위해 큰 성으로 이사를 감행했다. 하지만 결국 이들에게 남은 것은 임금님이 원래 쓰던 침대 하나. 그럼에도 그는 친구들과 함께 행복할 수 있었다. 이 마지막 장면은 우리의 삶을 영위하는 데 필요해 보이는 요소들은 많아도, 본질적으로 필요한 것은 그다지 많이 필요하지 않다는 메시지를 주기도 한다. 삶의 에센스가 뭔지 따져본다면 함께 행복한 삶을 가능하게 해주는 것이 아닐까 한다. 한 권의 그림책을 보다 옆길로 들어가 나만의 세계에서 놀다 다시 제자리로 돌아온 느낌이다. 저자는 독자에게 이런 발견의 기회를 마련해보라 말하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톡 토독 토동

이 소리를 들은 임금님은
주위를 둘러보고 깜짝 놀랐어요!

방 안 가득 임금님의 그릇이
놓여 있지 뭐예요.

컵에 톡
접시에 토독
냄비에 토동

빗물이 연주하는 멜로디를
모두 함께 들으니
왠지 즐거워졌답니다.
- P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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