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잃기 안내서 - 더 멀리 나아가려는 당신을 위한 지도들
리베카 솔닛 지음, 김명남 옮김 / 반비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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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잃기 안내서

: 더 멀리 나아가려는 당신을 위한 지도들

(원제: A Field Guide to Getting Lost, 2005)

리베카 솔닛(Rebecca Solnit) 지음 | 김명남 옮김 | [반비] | (2018)




그는 자신의 심연을 예민하게 들여다보고 언어의 바구니에 상실과 이질성이란 우물물을 어김없이 길어내는 작가다. 리베카 솔닛의 글을 많이 접하진 않았지만, 그의 언어를 따라가다보면 가끔 작가가 내뿜는 신비로움이 느껴지는 순간이 있다. 어떤 경우엔 그가 현대 문명에도 살아 남은 샤먼의 숨겨진 사도가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그 앞을 지나치는 모든 존재의 생겨남은 한 치의 어김 없이 소멸을 향해 나아간다. 작가는 이들 존재의 소멸을 예민하게 감지하고 바라보는 것이다.



길을 잃지 않는 현대인은 어쩌면 미래에 자신의 운명을 단단히 묶어 놓고 살아가는 이들이다. 목적, 방향감각을 분명히 지니고(있다고 믿고) 나아가는 이들은 미래에 대한 확신(또는 착각)을 의심하지 않는 미래중독자들인 셈이다. 문명인들의 모든 병은 어쩌면 이 지점에서 생겨나는 것은 아닐까? 작가가 말하는 길을 잃는 사람은 자신이 방향 감각을 상실했다는 이유로 오로지 현재에 집중하는 이들로 보인다. 이 새롭고 이질적인 감각으로 소멸을 향해 가는 우리의 존재양식을 다시 바라보게 해주는 듯하다. 길을 잃은 이들은 자신이 길을 잃었다고 인정하는 인식으로부터 출발하여, 당장 자신의 한 쪽 발을 어디에 내딛을 지에만 주목하게 되는 것이다.  



 솔닛의 글을 따라가다 책의 끝무렵 눈에 들어온 문장들이 있었다. 한 맹인에 관한 이야기를 하는데, 이 맹인의 행동이 예사롭지 않다. 그는 자신이 가보지 않은 낯선 곳으로 물건을 팔러 다닌다. 처음 가보는 길을 건널 때, 그는 타인의 도움을 당당하게 요청한다. 길을 잃은 이들에게 필요한 것들 중에는 바로 이런 기술 필요한 것이 아닐까. 여기서 내가 주목한 점은 나와 상대 사이에 도움을 주고 받는 행위를 의무로서가 아니라, 우리 삶에서 필요한 하나의 원리로서 이해하는 일이었다. 맹인은 자신의 결핍()을 당당히 받아들이고, 길 잃기의 기술을 발휘하여 자존과 자유를 얻었으며, 나아가 세상과 진정으로 연결될 수 있었던 셈이다.



 우리에게 도움이 필요하다는 사실, 도움을 구하는 행위는 아주 너그러운 행위인데 왜냐하면 남들이 우리를 돕게 하고 우리가 남들의 도움을 받게 하기 때문이라는 사실, 이런 깨닫는 것도 괜찮습니다. 가끔은 우리가 도움을 요청합니다. 가끔은 우리가 도움을 제공합니다. 그럴 , 적대적인 세상은 아주 다른 곳으로 변합니다. 도움이 받아들여지고 주어지는 세상이 됩니다. 그런 세상에서는 자신이 엮어낸 세상, 설득력 있고 확고한 세상이 다급하고 절박한 것이 됩니다. 너그러운 세상, 도움이 오가는 세상에서는 자신이 엮어낸 세상을 굳이 단호하게 고집할 필요가 없습니다. (277)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현대 문명은 구성원 서로를 고립시킴으로써 길을 잃게 한다. 내가 이해하기에 솔닛의 말은 우리 윗 세대에게 이미 있던 하나의 원리, 이들이 자라면서 습득하던 도움 주고 받기의 문화를 곧바로 떠올리게 한다. 우리는 한 가지 도움을 받으면 때로는 이에 대한 보답을 하나의 의무로서 여기기도 한다. 나아가 마음의 부담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하지만 이를 하나의 삶의 원리로 되찾을 수 있다면 방향감각을 상실한 현대인에게 큰 도움이 될 것 같다. 서로 도움을 주고 받음으로써 현재 적대적인 세상이 아주 다른 곳으로 변할 것이라 말하는 솔닛의 통찰에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다. 이번 독서에서 작가가 말하는 길 잃기의 기술 가운데 크게 공감하게 된 부분이다. 솔닛의 통찰은 언제나 놀랍고 근사하다.  






"우리에게 도움이 필요하다는 사실, 도움을 구하는 행위는 아주 너그러운 행위인데 왜냐하면 남들이 우리를 돕게 하고 우리가 남들의 도움을 받게 하기 때문이라는 사실, 이런 걸 깨닫는 것도 괜찮습니다. 가끔은 우리가 도움을 요청합니다. 가끔은 우리가 도움을 제공합니다. 그럴 때, 이 적대적인 세상은 아주 다른 곳으로 변합니다. 도움이 받아들여지고 주어지는 세상이 됩니다. 그런 세상에서는 자신이 엮어낸 세상, 설득력 있고 확고한 세상이 덜 다급하고 덜 절박한 것이 됩니다. 너그러운 세상, 도움이 오가는 세상에서는 자신이 엮어낸 세상을 굳이 단호하게 고집할 필요가 없습니다." (27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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얄라알라 2023-07-10 23:4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리베카솔닛을 문장도, 긴 머리칼과 음성도 근사하지만
작가에게서 현대 문명의 샤먼을 찾아내시는 초란공님 글이 근사합니다!
김명남 번역가님이 리베카솔닛 전문이신가봐요^^ 이런 문장들은 옮기기도 이해하기도, 공이 많이 들어갈 것 같아요^^

초란공 2023-07-11 10:42   좋아요 0 | URL
우와~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김명남 번역가는 번역도 멋진데 글도 잘쓰시더라구요. 묻지마 구입하는 번역가 입니다!!!
 


연극이 끝나고 - '리어 왕' 역의 이순재 배우가 인사하러 무대로 나오는 모습




우리의 내면은 무엇으로 채워져 있는가

연극 <리어 왕> 관람하고

 



지난 주말에 연극 <리어 왕>을 관람했다. 연극은 내가 쉽게 다가가지 못했던 분야인데, 오래간만에 연극을 보러 나들이를 했다. <리어 왕>은 셰익스피어 원작의 4대 비극으로 소개되는 작품이다. 이번에 본 연극은 대본을 압축하지 않고 원작에 충실하게 기획되었다. 공연시간만 무려 200분이 넘었다. 이야기의 중심축을 이루는 리어 왕의 대사가 결코 만만치 않다. 아흔에 가까운 나이에 놀라운 집중력으로 맡은 배역을 열연하는 이순재 배우의 모습을 볼 수 있는 마지막 기회였다. 처음 이 연극을 홍보하는 광고를 보았을 때 이순재 배우의 연기를 한 번 더 보고 싶었다. 내겐 좀 더 개인적인 이유가 있었기 때문이다. 20여 년 전 아마도 처음 연극이라는 것을 보았을 즈음일 텐데, 당시 나는 군복무를 마치고 막 복학했던 시기였다. 대학 동기 한 명이 연극표 2장을 구하여 나에게 함께 보러 가지 않겠냐고 했다. 그 때 관람했던 연극이 <세일즈맨의 죽음>이었다. 그 때는 이 희곡의 제목이 익숙하긴 했어도 원작자가 아서 밀러라는 것을 알지 못했을 것이다. 당시에 이 연극이 나의 흥미를 끈 이유는 무엇보다 TV드라마 <사랑이 뭐길래>에서 대발이 아빠로 나왔던 이순재 배우가 세일즈맨역으로 나왔기 때문이다.

 


당시에 이순재 배우가 열연한 <세일즈맨의 죽음>을 관람하고 연극이 끝날 때 즈음에 봇물이 터진 듯 흐르는 눈물을 줄곧 닦았던 기억이 난다. 이야기 자체가 관객의 눈물을 자극하는 요소는 있었지만, 그보다는 전역을 한 달 가까이 남겨놓고 돌아가셨던 아버지를 떠올렸기 때문이다. 우리는 대화가 많지 않은 부자였다. 게다가 군대에 있는 아들과의 물리적 거리는 부자간의 대화를 더욱 귀한 기회로 만들었다. 그래서였을까, <세일즈맨의 죽음>을 관람하고 내가 아버지를 제대로 알고 있지 못했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이 연극 한 편은 내 안에 아버지라는 미답의 영역이 있었음을 깨닫게 해주었다. 갑자기 아버지가 상당히 낯설게 느껴졌던 기억이 난다. 이 계기를 열어준 것이 이순재 배우의 연기였던 셈이다. 개인적인 기억을 더듬어보는 동안, 늙고 쇠약해진 리어왕을 연기한 배우는 정말 리어왕 자신이 되어 있는 듯싶었다.




















연극을 관람하러 가기 전에 먼저 민음사에서 출간한 리어 왕(최종철 번역)을 읽었다. 다음에 아침이슬 출판사에서 출간한 버전(김정환 번역)을 추가로 조금 읽었다. 연극을 관람할 때 작품의 내용은 이미 익숙했다. 하지만 연극 공연은 시작이 다소 불안했다. 폴짝폴짝 뛰어다니며 횡설수설 지껄이던 광대가 움직일 때마다 마이크가 지직거리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또 끊임없이 이어지는 긴 대사 때문인지, 일부 배우는 잠시 머뭇거리는 모습도 보였다. 여기에 리어 왕을 연기한 이순재 배우의 조금 낮은 목소리 때문인지 발음이 잘 들리지 않았다.


 

그럼에도 연극 공연이 끝난 지금까지 잔잔한 감동이 남는 것은 배우들의 투혼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마치 랩에 버금갈 정도로 죽 이어지는 대사들에 더하여 문학적인 표현들로 가득차서 배우들에겐 한층 난이도가 높은 연극이기도 하다. ‘리어 왕을 제외하고 연기가 인상 깊었던 역은 왕을 따라다니는 광대와 온갖 고난을 겪고도 지위를 회복하는 글로스터의 맏아들 에드가였다. 광대는 왕에게 격식을 차리지 않고 말해도 되는 유일한 신분이었던 모양이었다. 끊임없이 왕 앞에서 횡설수설하는 광대의 말을 가만히 들어보면 그가 하는 말은 일말의 진실을 관객에게 전하고 연극이 향하는 방향을 일러주는 듯했다. 존재감은 미미할지 모르지만, <리어 왕>에서 광대의 역할은 꽤나 중요해 보인다. 조금 과장된 표현이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광대의 역할은 신곡에서 단테에게 지옥을 안내하며 동행하는 시인 베르길리우스만큼이나 중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인상적인 연기를 보여주는 배역을 하나 더 꼽으라면, 에드가를 떠올리겠다. 그는 글로스터 백작의 배다른 동생 에드먼드의 배신과 모함으로 왕의 큰 딸(고너릴)과 둘째 딸(리간) 세력의 추적을 받으며 위기에 처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 미치광이 거지 불쌍한 톰을 연기한다. 생명의 위협을 받고 쫓기던 에드가가 두 가지 다른 역할을 신들린 듯 능숙하게 연기하는 모습에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글로스터 백작 역시 둘째 아들 에드먼드의 모함으로 리어 왕의 둘째 딸 리건과 남편 콘월 백작으로부터 두 눈을 뽑히는 끔직한 고난을 겪는다. 어쩌면 <리어 왕>에서 가장 비극적인 인물이라고 볼 수도 있다. 혼신의 힘을 다해 연기하는 리어 왕역의 배우뿐만 아니라 글로스터 백작을 맡은 배우의 노련한 연기도 인상 깊었다.


 

실제 공연되는 연극만의 고유한 특징이라면, 아마도 원작에 충실하면서도 극작가나 배우 나름의 해석이나 장치를 곁들일 수 있는 이 존재한다는 점일 것이다. <리어 왕>이 비극이라고 하더라도 공연 도중에 유머와 위트가 보이는 요소가 여러 번 눈에 띄었다. 리어 왕에게 직언을 하다가 추방당하는 켄트 백작은 자뭇 심각한 역으로 일관될 수 있는 인물이다. 하지만 이번 연극에서 켄트 백작이 보여주는 유머러스한 연기는 공연시간이 200분이나 되는 연극에 대한 관객의 몰입도를 유지하는데 큰 도움을 주었다고 생각한다. 물론 셰익스피어의 ‘4대 비극에 속하는 <리어 왕>에는 여러 인간들이 평생 살면서 겪을 수 있을 법한 비극적인 사건들이 응축되어 있다. 인간이 나이가 들어 신체와 정신이 쇠약해지는 모든 사람들의 운명을 담고 있다. 더불어 다양한 죽음의 모습을 품고 있기도 하다. 자녀의 죽음을 먼저 보아야 하는 부모의 고통, 질투와 탐욕으로 모두가 파멸하는 자매의 모습, 부와 권력에 대한 욕망으로 부모와 형제를 배신했지만 그 자신도 죽음으로부터 비껴가지 못했던 인간의 나약한 모습이 한 작품에 담겨 있었다. 또 리어 왕 자신의 운명은 어떤가. 그는 모든 것을 잃었고, 평생 아꼈다고 믿었던 자녀들로부터도 냉대와 멸시를 당한 채 갈 곳을 잃은 인간의 당혹감과 비애를 보여주었다.


 

무엇보다 이번 공연이 특별한 건 이순재 배우의 리어 왕연기를 마지막으로 만날 수 있는 기회였기 때문이다. 이번 공연이 끝나면 이순재 배우는 세계 최고령 리어왕으로 기네스북에 등재 신청될 예정이라고 한다. 그는 1956년에 처음 연극 무대에 데뷔했다고 한다. 지금까지 68년 간 무대에 서온 셈이다. 마지막으로 연기하는 배역 리어 왕을 준비하고 무대에 서는 배우의 감회가 어떨지 궁금하다. 이번 공연은 무엇보다 배우 자신이 겪어온 삶의 모든 경험들이 리어 왕에 녹아들어 있을 것이다. 배우로서 그의 연기는, 버럭 소리를 지르던 대발이 아빠뿐만 아니라 말없이 가족을 위해 희생하는 세일즈맨의 모습으로 내 기억에 남아 있었다. 이제 노배우는 천둥과 번개가 내리치며 이따금씩 암흑을 몰아내던 광야를 정처 없이 헤매던, 쇠락한 리어 왕의 모습으로도 내 기억 속에 남게 될 것이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소설이나 희곡에는 관심이 거의 없었다. 어떤 이유로 늦은 나이에책을 손에 들게 되었는지는 모르겠다. 다만 내게는 삶의 이 나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자주 마련되었다. 여러 직장을 전전하고 불안정한 고용에 일하는 날만큼이나 쉬는 날도 많았기 때문이다. 일이 없을 때는 남들이 출근하던 시각에 모자를 눌러쓰고 알라딘 중고책방으로 출근할 때도 있었다. 엊그제의 일처럼 느껴진다. 오늘의 나는 아마도 중고책방을 발견하면서 비롯되었는지도 모른다. 아마도 이 때 나 자신을 본격적으로 들여다보기 시작했던 것 같다. 문학에 대한 옅은 관심도 이 시기에 시작되었을 테다. 알라딘 사이트의 구매함을 검색해보니 내가 셰익스피어의 리어 왕을 세 가지 버전으로 소장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자주 느끼는 것이지만 내가 이 책은 언제 샀지?’ 라고 반문할 때가 있다. 알라딘 서재에 글을 꾸준히 올리는 분들은 아마 익숙한 상황일지도 모르겠다.




 















연극을 관람하기 전에 먼저 읽은 버전은 민음사 버전이다. 평생 셰익스피어와 희곡 연구에 매진해 온 최종철 교수의 번역 및 주해 판본이다. 오랜 시간 운문 형식의 문장으로 다듬어 온 역자이기도 하다. 이따금 만나는 문장은 너무 간결하여 어색한 느낌을 줄 때도 있었다. 반면 다시 문장을 음미해볼 때 텍스트로 드러나지 않은 을 채울만한 뉘앙스를 발견하는 즐거움도 크다. 최근에는 최종철 교수가 번역한 셰익스피어 4대 비극 리커버 특별판도 나왔다. 성우들이 참여한 오디오 버전도 나와 있는 모양이다. 다만 독자들의 반응은 호불호가 뚜렷하게 나뉘는 것 같다. 언제나 새로운 시도에서 예상할 수 있는 반응들이다.


 

내가 구매한 민음사 버전은 2012년에 나온 셰익스피어 4대 비극 세트다. 각 권의 표지는 유명 화가들이 작품을 읽고 그린 그림들이 있다. 리어 왕의 경우, 화가 포드 매덕스 브라운(Ford Madox Brown)이 그린 <리어와 코딜리아>(1848-49)가 표지로 사용되었다. 이 그림의 장면은 아마도 밤새 폭풍우 몰아치던 광야를 헤매고 정신과 기력이 쇠해버린 리어 왕을 모신 후, 침대에 누워 잠든 아버지를 바라보는 셋째 딸 코딜리아의 모습으로 보인다. 바다 건너 프랑스 왕과 결혼한 코딜리아가 직접 프랑스군을 이끌고 브리튼 섬에 상륙하여 큰 언니 고너릴와 둘째 언니 리간의 진영과 결전을 치르기 직전의 모습일 것이다. 아버지의 재산과 영토, 권력을 받기 위해 화려하지만 속이 텅 빈 언어로 아버지에 대한 사랑을 꾸며내던 두 언니와 달리 막내 딸 코딜리아는 할 말 없음으로 아버지의 오해와 미움을 사게 되었다. 하지만 아버지에 대한 코딜리아의 사랑은 자신과 아버지 사이의 빈 공간을 가득 채울 만큼 커다란 진실을 품고 있는 듯하다. 해당 표지 그림은 이런 배경을 담아낸 듯한데, 막내 딸 코딜리아의 심정을 짐작해볼 수 있다. 평생 셰익스피어를 연구한 국내 정상급 학자가 원작을 비판적으로 읽어 내고 자세히 정리한 작품 해설을 읽을 수 있다는 것은 민음사 버전의 큰 장점이다.


 
















또 흥미로운 건, 펭귄 클래식 판 리어 왕의 표지 그림 역시 같은 화가인 포드 매덕스 브라운이 그렸다는 점이다. 이 그림의 제목은 <코딜리어의 운명>이다. 같은 화가가 리어 왕을 모티브로 그림을 그렸다지만 그림이 주는 느낌은 꽤나 다르다. 아마도 그림에 등장하는 인물의 모습 보다는 인쇄된 그림의 색감에 큰 차이가 나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하지만 그림이 묘사하는 자체 정황도 사뭇 다르다. 민음사 버전의 표지 그림은 근경과 원경이 층을 이루며 함께 나타난 중세의 그림 스타일을 닮았다. 반면 펭귄 버전 리어 왕 표지 그림은 동화책 일러스트의 느낌이 강하다. 장면에 대한 몰입감이 다르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여기에 인물을 그린 스타일이 어떤 면에선 단테의 영원한 연인 베아트리체를 그리기도 했던 단테 가브리엘 로세티(Dante Gabriel Rossetti)의 그림과도 닮았다. 정면을 향한 인물이 약간 아래로 내린 시선과 타오르는 듯 붉은 머리카락을 지닌 베아트리체의 모습 때문이다. 펭귄 판 표지 그림의 <코딜리어의 운명>에서도 코딜리어로 보이는 여인은 붉은 머리카락을 지닌 채 몽롱한 시선을 비스듬히 아래로 내린 모습이다.


 

한편 코딜리어의 왼손을 두 손으로 붙들고 있는 남자는 그녀와 결혼한 프랑스 왕으로 보인다. 옅은 코발트색 옷을 입고 왕관을 쓰고 있기 때문이다. 코딜리어의 왼쪽에는 왕의 권위를 상징하는 을 오른손에 쥔 리어 왕의 모습이 보인다. 상심에 따른 분노를 억누르는 듯 의자의 팔걸이를 꼭 붙들고 생각에 잠긴 모습이다. 영락없이 노쇠한 남자의 모습이다. 이들의 바로 뒤에 보이는 인물은 코딜리어와 결혼하기 위해 프랑스 왕과 경쟁하던 버건디 공작일 것 같다. 이 인물은 붉은 색 점박이 옷을 입고 손을 입에 갖다 대었는데, 리어왕으로부터 아무런 재산도 물려받지 못하게 된 코딜리어 공주와 결혼을 망설이는 버건디 공작의 모습을 상상해볼 수 있기 때문이다. 대신 푸른 옷을 입은 왕은 코딜리어의 손을 잡고 위를 올려다본다. 라파엘로가 그린 아테네 학당에서 손으로 하늘을 가리키는 모습으로 나온 플라톤처럼 말이다. 반면 손으로 땅을 가리키던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세처럼, 땅 위의 유한한 존재와 재물에 대한 욕망을 추구하던 버건디 공작은 눈을 살며시 내리고 고민에 빠져 있는 모습이다. 펭귄 판의 표지 그림에 나온 장면은 프랑스 왕이 아버지에 대한 순수한 사랑을 지니고 있던 코딜리어를 선택하겠다고 결심하는 장면 같아 보인다. 이 희곡에서 프랑스왕의 역할은 그리 크지 않지만 사랑의 형이상학을 믿고 선택하는 인물이다. 이 부분은 내게 사랑이란 무엇인가라는 의문을 던져주는 장면이기도 하다. ‘그래 인간에게 사랑이란 과연 무엇인가?’


 

여기서 펭귄 클래식 버전의 리어 왕이 지닌 특징이라면, 외국의 셰익스피어 전문가가 제공하는 서문 및 주해를 접할 수 있다는 점이다. 셰익스피어라는 대작가를 배출해 낸 장소의 후손이 어머니의 언어로 읽어낸 작품은 어떤 것일까 들여다보는 재미가 있다. 국내의 학자가 해석한 작품의 의미를 또 다른 시각에서 들여다볼 수 있는 기회이기 때문이다. 아마 내가 왜 세 권의 리어 왕버전을 샀는지 궁금해 하다가도 각각의 버전을 다시 들여다볼 때 비로소 이해가 되기도 한다.


















 

다 읽지는 못했지만 김정환 번역가가 내놓은 아침이슬 출판사의 리어 왕버전도 있다. 이 책은 우선 크기가 작지만 책은 무척 예쁘다. 가방에 넣고 다니기에 튼튼하고 부담이 가지 않는다. 표지의 간결한 그림도 마음에 든다. 아쉬운 점은 책의 크기가 작은 만큼 폰트가 작다는 점이고 역자의 해설이 짧다는 것. 그럼에도 운문 형식을 위해 엄격하게 문장을 다듬고 줄인 민음사 버전보다 문장이 친근하게 다가오고 이해가 쉬운 편이라는 장점이 있다. 글자 크기가 문제가 되지 않는다면, 처음 셰익스피어를 접하는 이들이 친근하게 다가갈 수 있는 판본으로 추천할 만 하다. 특히 김정환 번역가는 프로필만 보더라도 정말 다재다능한 작가라는 생각이 든다. 많은 책을 번역만 한 것뿐만 아니라, 시와 산문, 평론을 쓰기도 했으며, 음악에 대한 방대한 애정과 지식을 가진 분임을 알 수 있다. 우선 붉은 색 양장본이 마음에 들어서 번역가가 전부 번역해놓은 셰익스피어 작품 시리즈를 기회 될 때마다 모으고 있다. 언제 다 모을지 모르겠지만, 가끔 원작에 충실하게 기획된 셰익스피어 연극을 공연하게 되면 다시 꺼내 읽어 보려한다.

 


누군가의 번역 작업을 통해 작품과 만나는 독자에게는 어느 한 번역가의 작업이 언제나 독보적으로 월등한 경우는 아직 없었던 것 같다. 예를 들어, 같은 작품을 여러 번역가가 번역해 놓은 고전 작품의 경우, 어느 문장, 어떤 장면에서는 한 번역가가 탁월하게 표현해내더라도, 다른 번역가가 또 다른 부분에서 더 멋지게 표현해내는 것을 보게 된다. 따라서 어떤 특정 번역가가 한 작업이라서 믿고 사보는번역서라도 독자의 마음에 드는 문장과 그렇지 않는 문장은 언제나 공존하기 마련이다. 그리고 이런 부분은 번역가나 독자에 따라서도 다르게 느껴질 것이다. 그만큼 번역본을 대하는 마음가짐은 명확한 기준으로 접근하기 어렵다. 어떤 번역가의 특정 표현에 일희일비하기 보다는, 오히려 다양한 해석과 표현을 만날 수 있다는 마음가짐도 필요할 것 같다. 그러면 이렇게 표현할 수도 있겠지라고 공감하면서도 나라면 어떤 표현을 쓸 수 있을까 도전해보는 재미도 쏠쏠할 것이다.


 

3시간이 넘는 연극 공연이 드디어 끝나고 박수갈채가 이어졌다. 환호를 받으며 걸어 나오는 리어 왕이순재 배우가 박수를 받으며 들어 갈 때 관객에게 보이던 그의 뒷모습이 기억에 남는다. 70년에 가까운 세월동안 무대 위에서 관객과 교감해온 배우는 그의 존재가 바로 당신이 역을 맡았던 모든 이들을 닮았을 것 같다. 아이들과 가정을 지키기 위해 머물지 못하고 끝없이 방랑하던 가장이자 세일즈맨이었던 모습이다가도, 밤새 폭풍우 몰아치던 광야를 헤매던 초라한 왕의 그것이기도 했다. 동시에 배우의 이마와 얼굴에 새겨진 주름은 어느 새 돌아가신 아버지의 주름을 떠올려주었다. 아버지의 사망 소식을 듣고 급히 부대를 나와야 했던 아들의 모습은 얼마나 초라했을까. 아들은 아직 온기가 남아 있던 아버지의 이마를 어루만져 보았다. 24년이 지난 지금도 생생히 그 온기와 촉감을 떠올리곤 한다. 누구나 삶에서 가벼워지거나 결코 지워지지 않는 기억이란 있기 마련인가보다.


 

문학이란, 또 연극이란 다른 사람의 입장을 상상하게 해주는 사고 실험으로 볼 수 있다. 우리 자신을 다시 만나게 해주는 인류의 위대한 발명품이 아닌가. 평생 한 길을 걸을 수 있었던 배우의 삶이란 어떤 것이었을까. ‘일생일대의 배역이라고 언급하기도 한 큰 무대를 마무리하는 배우의 심정을 상상해보려 하지만, 적어도 말로는 표현하기 어려울 것 같다. 이순재 배우의 마지막 리어 왕연기를 보고 밖으로 나왔다. 무대에 서기까지 부단한 노력과 치열함을 붙들고 관객들과 만나온 모든 연극인들에게도 작은 인사와 커다란 마음의 응원을 전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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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리아스
호메로스 지음, 이준석 옮김 / 아카넷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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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 여름 새로 나온 <일리아스>와 함께 보내게 되었네요. <오딧세이아>도 새로 만나보았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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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의 기원
토니 모리슨 지음, 이다희 옮김 / 바다출판사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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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니 모리슨이 추적하는 타자화의 과정

- 타인의 기원를 읽고

 


토니 모리슨을 소개하는 데 공통적으로 제시되는 경력은 언론 최고의 상인 퓰리처상과 노벨문학상이다. 여기에 한 가지 정보를 덧붙인다면, 그가 평생 성차별인종차별의 문제와 마주하고 탐구했다는 점이다. 무엇보다 작가의 경력에서 놀랐던 부분은 그가 노벨문학상을 받은 1993년에 흑인 여성 작가 최초로 수상했다는 사실이었다. ‘인종에 따라 다르게 흘러갔던 시간을 감지할 수 있었던 기록이었다. 그는 대학에서 영문학을 전공한 후 출판사 편집자로 일하기도 했으며, 소설가와 학자로 존재감을 분명히 남겼던 인물이다. 오늘 읽은 에세이 타인의 기원은 작가가 평생 추구해온 작업과 관심을 간결하게 정리한 글이었다.


 

저자는 무엇보다 와 다른 존재를 만들어 내는 일이 왜 필요했던가라는 물음으로 시작한다. 우선 저자는 한 집단이 강한 결속을 바탕으로 타 집단을 만들어내고, 이 구도를 유지한 채 이 집단을 지배 내지는 통제하는 데서 오는 이득이 매우 크기 때문이라 진단한다. 짐작하겠지만, 타자화의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인종 차별이다. 작가 토니 모리슨이 평생 관심을 갖고 허물고자 했던 공고한 성이었다. ‘인종이라는 개념은 역사학자 유발 하라리가 사피엔스에서 지적한 바 있는, 현생 인류의 허구 지어내기 본능에 딱 들어맞는 사례로 볼 수 있다. 이는 토니 모리슨이 자신의 글에서 인용하는 역사가 넬 페인터의 말 인종은 관념이지 실재가 아니다.”(15)라는 한 문장으로 요약된다. 이렇게 허구적인 인종 개념에 근거한 타자화 과정은 타자화된 집단에 대한 지배권(통제권)을 장악하고자 한 집단의 욕망을 그대로 드러낸다. 이 상황 역시 역사가 브루스 바움의 한 마디, “인종은 권력의 결과물이다”(57)라는 말로 표현된다.


 

세계사에서 대표적인 인종차별 사례는 미국의 노예제도에서 찾을 수 있다. 하지만 인종차별은 비단 미국인들만의 문제는 결코 아니다. 모든 인종을 포함하는 인간 집단에서 타자화의 과정이 발견되기 때문이다.


 

지구상의 거의 모든 집단은, 권력이 있든 없든, 자기 집단의 신념을 강화하기 위해 타자를 만들어 세움으로써 비슷한 방식으로 타 집단을 통렬히 비난해왔다.”(29)

 


이 메커니즘이 어딘가 익숙하게 느껴지지 않은가? 이 타자화 메커니즘은 인간의 역사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되기 때문이다. 전쟁과 애국심, 당파간의 대결, 계급 간의 투쟁 등에서 찾아볼 수 있다. 토니 모리슨은 흑인-여성으로서 주로 백인에 의한 인종 및 남녀 차별의 문제를 면밀히 들여다보고 고민해왔다. 이는 그가 이 문제들을 구체적으로 상상하기와 같은 작업을 평생 멈추지 않았음을 말해준다. 다만 타인의 기원에서는 주로 인종차별의 문제에 주목하고 있다. 저자는 서구 백인 사회에서 이 인종이라는 개념이 권력과 통제의 필요에 의해 발명되어진 관념이라는 사실을 말하고자 했다. 나아가 이 관념에 공고히 뿌리내린 인종적 우월감이 이들 집단의 결속 도구, 접착제가 되어 주었음을 거듭 지적하고 있다.

 


그렇다면 타자화과정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저자에 따르면, “타자화는 강의나 교육을 통해 배우는 것이 아니라 남이 하는 것을 보고 따라 배우게 된다.”(30) 이 대목을 읽고 곧바로 떠오른 기억이 있다. 학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던 시절, 한 아이(아이는 자신이 국내 모 재벌 기업의 손녀라고 말하곤 했다)가 수업 중에 나를 보고 아파트 경비원 같아요라고 한 적이 있었다. 아이는 나를 무시하려는 의도는 없어보였다. 그저 해맑게 내가 입은 검은색 바지와 남색 폴로 티셔츠를 보고 그렇게 말한 것이었다. 모리슨의 글을 읽으면서 나는 아이의 부모가 나와 같은 차림을 한(또는 지위에 있는) 사람을 타자화하는 모습을 바로 아이가 습득하고 내면화했음을 깨닫게 되었다. 토니 모리슨이 인종차별과 관련하여 언급한 타자화 과정 역시 남이 하는 것을 따라 배운다는 점에서 내가 겪은 경험과 다를 바 없을 것이었다.


 

다만 이 경험에서 내가 안타깝고 두려웠던 것이 있다. 바로 자기 자신을 아직 들여다보고 성찰하지 못하는 어린 아이가 성장 후에도 지닐 수 있는 무지의 선량함이었다. ‘그럴 의도가 전혀 없었다고 습관적으로 말하거나, 상대방의 처지를 구체적으로 상상하지 못하는 성인이 되지 않길 바랄뿐이었다. 무지의 선량함이야말로 정치 철학자 한나 아렌트가 말했던 악의 평범성개념과 무엇이 다른 것일까 따져보게 된다. 물론 나 역시 무지의 선량함을 가진 자의 범주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는 없다. 의도적이지 않고, 인지하지 못하는 나의 선한말과 행동이 다른 누군가에게는 커다란 상처가 될 수 있지는 않은지, 나아가 사회에 존재하는 부조리와 악을 더욱 공고히 하는 데 무심코 참여하는 것은 아닌지 거듭 질문해볼 일이다.


 

이제 저자는 인종차별의 정체성 정치에 관한 논의를 좀 더 정교하게 문학의 영역으로 확장해 나간다. 그는 노예제도를 유지하기 위해 백인 집단이 동원한 방법 두 가지를 언급한다. 하나는 이미 익숙하게 보아온 폭력이라는 방법이다. 다른 하나는 주의 깊게 들여다보지 않으면 파악하기 힘든 방법으로, 제도 자체를 낭만화하는 일이다. 제도 유지를 위해 폭력에 호소하는 방식은 이미 많은 문학에서 제시되고 있다. 당장 알렉스 헤일리의 소설 뿌리가 떠오른다. 이 소설에서 묘사되고 있는 것처럼, 신체적·심리적 폭력은 타자화된 대상을 통제하는 가장 우선적인 방법이다. 작가의 분노는 다음과 같은 언급에서 보다 분명히 느낄 수 있다. “그들(백인 노예 주인들)이 채찍질을 하다가 지쳐 쉰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그들이 가하는 처벌은 교정을 위한 행위라기보다 엄연히 사디즘 행위다.”(62)라고 말이다.


 

한편 토니 모리슨은 어렸을 때 집을 방문한 증조할머니에 대한 기억을 떠올린다. 증조할머니는 방에 들어와서 바닥에서 놀고 있던 모리슨 자매를 보고 한 마디 내뱉었다. 얼굴을 찡그리며 지팡이로 자신을 가리키며 섞였구만, 이 애들.”(24)이라고 했던 것이다. 흑인에게 섞였다는 말은 단순히 혼혈임을 확인하는 데서 끝나는 말이 아니었다. 이 말은 조상 중에 누군가가 백인 노예 주인에게 강간당했다는 표현을 암시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섞였다라는 표현은 흑인 가족에 대물림되어 상처를 주는 폭력의 역사를 보여준다. 이 역시 인종이라는 허구적 개념이 흑인들에게 (후손의 자기혐오와 같이) 얼마나 파괴적이고 깊은 상처를 줄 수 있는지 보여주는 사례다. 나아가 저자는 영국 귀족 토마스 티슬우드의 일기를 통해, 노예에 대한 강간을 엄연한 주인의 권리로 여기고 있었던 정황을 고발하고 있기도 한다.


 

하지만 노예 제도 유지에 동원되는 보다 정교한 방법은, 이 현상에 대한 사람들의 감각을 무화시키고, 나아가 이를 선호할 만한 것으로 만드는 일이다. 토니 모리슨은 문학에서 그 예를 찾는다. 하나는 해리엇 비처 스토의 톰 아저씨의 오두막에서 노예 제도의 낭만화 장치를 언급한다. 백인으로서 스토 여사의 작품은 결국 백인 독자를 위해 쓴 소설이라고 지적한다. 백인과 흑인 아이의 순수함과 같은 장치를 통해 노예 제도의 성과 낭만을 무균 상태로 만들었으며, 여기에 향수를 뿌리기도 했다’(41)고도 말한다. 토니 모리슨의 비판적인 시각은 우리가 단순히 노예제도에 대한 묘사에서 만족할 것이 아니라 보다 정밀하게 대상을 들여다보도록 주문한다.

 


저자의 민감한 눈은 노벨문학상 수상자 헤밍웨이도 비켜가지 않았다. 그는 헤밍웨이의 소설에서도 피부색에 따른 차별을 낭만화하는 방식을 찾아내었다. 이를 테면 가진 자와 못가진 자 To Have and Have Not에서 럼 밀수업자 백인과 배에 탑승한 흑인이 쿠바 관리들과 충돌하여 총을 맞은 상황을 언급하는 대목에서다. 두 사람이 모두 다친 상황에서 흑인은 더 심하게 다친 백인에게 도움을 구하는 나약한 흑인으로 묘사되고 있다고 지적한다. 에덴 동산 The Garden of Eden에서는 헤밍웨이가 검은 육체는 매우 아름답다는 주제로 판에 박힌 인종적 관념을 에로틱하고 매혹적인 느낌으로 교묘히 바꿔버렸다라고 비판하기도 한다. 남성의 시각에 이미 길들여지고 익숙해져 있는 독자(나를 포함하여)가 놓칠 수밖에 없는 지점을, 토니 모리슨은 정밀하고 능숙하게 짚어 독자를 일깨워준다.

 


평생 여러 방식의 차별문제에 주목하여 탐구했던 작가의 에세이 타인의 기원은 얇은 책이지만, 결코 가볍지 않은 책이기도 하다. 그는 20세기 흑인들이 더 이상 노예가 아닌 상황인데도, 여전히 실제적인 위험을 마주하며 살아야 하는 현실과 맞서 싸우며 흑인성을 재구성하고자 했다. 저자가 제기한 문제들은 지금 우리 사회를 보더라도, 여전히 매우 유효하다고 믿는다. 이미 익숙한 성차별뿐만 아니라, 여전히 생산되고 있는 난민들에 관한 문제, 이슬람 사원 건립을 둘러싼 갈등 문제, ‘성소수자와 퀴어 축제와 관련한 문제 등에서 이 타자화의 과정이 끊임없이 반복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문제를 풀어갈 실마리는, 아마도 타인에 대해 구체적으로 상상하는 일에서부터 시작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타인에 대해 상상해보는 일은, 나 역시 나의 의도와 무관하게 타자가 될 수 있음을 인식하고 받아들이는 일이다. 아울러 어느새 타인이 될 수 있는존재의 연약함까지도 끌어안는 일이다. 현재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이 타자화과정에는 하나의 예외도 없이 모두 허구적 관념에 기반한 권력과 통제의 욕망이 숨어 있다는 점도 알아야 할 것이다.



이제 대작가가 타계한 지 4주기가 되어간다. 글을 마무리하면서 책에 소개된 그의 말 한마디를 인용하기로 한다. 어쩌면 이 두 문장에 책의 주제가 다 담겨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인종을 무력화하는 동시에 극화하기 위해 시종일관 애썼다. 그렇게 해서라도 인종이라는 구성물이 얼마나 유동적이고 철저히 무의미한 개념인지 알리고 싶었다.”(112)





[책속으로]


[1] "인종은 관념이지 실재가 아니다."(15)
- 역사가 넬 페인터의 말

[2] "지구상의 거의 모든 집단은, 권력이 있든 없든, 자기 집단의 신념을 강화하기 위해 타자를 만들어 세움으로써 비슷한 방식으로 타 집단을 통렬히 비난해왔다."(29)

[3] "타자화는 강의나 교육을 통해 배우는 것이 아니라 남이 하는 것을 보고 따라 배우게 된다."(30)

[4] "(해리엇 비처) 스토는 노예제도의 성과 낭만을 무균 상태로 만들었으며, 게다가 그것에 향수를 뿌리기도 했다."(41)

[5] "미국으로 온 이민자들은 ‘진짜’ 미국인이 되려면 태어난 나라와의 연을 끊거나 그 연을 아주 경시함으로써(자기 부정) 백인성을 포용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미국성’이 무엇인가 하는 정의는 (애석하게도) 많은 사람들에게 곧 ‘피부색’과 동일한 의미가 되었다."(44-45)

[6] "인종은 권력의 결과물이다."(62)
- 역사가 브루스 바움의 말

[7] "노예를 굳이 전혀 다른 종으로 취급해야 하는 필요는 무엇 때문일까? 아마도 자기 자아가 지극히 정상임을 확인하려는 그들(백인들)의 절박한 시도가 아닐까 싶다."(62)

[8] "헤밍웨이는 이런 판에 박힌 인종적 관념을 에로틱하고 매혹적인 느낌으로 교묘히 바꿔버리기도 한다."(84)

[9] "이탈리아나 러시아 인이 미국으로 이민 오면 ‘고향에서 상상할 수 없었던 무언가가 되어야만 한다. 즉 백인이 되어야 한다는 얘기다. (...) (이것은) 어쨌거나 항구적인 정체성을 갖게 되는 방법이다. 여기에는 여러 장점과 특정한 자유도 따라온다. 반면 아프리카 사람들과 그 후손들은 한 번도 그런 선택권을 가져보지 못했다."(89)

[10] "오직 이타적으로 남을 돌보는 일만이 진정한 성숙에 이르게 한다."(92)

[11] "나는 기필코 값싼 인종주의를 무력하게 만들 것이며, 피부색에 대한 쉽고 간단하며 일상적인 집착을, 노예제도 그 자체를 상기시키는 이 집착을 절멸시킬 것이다. 그 신빙성조차 떨어뜨릴 것이다."(95)

[12] "나는 인종을 무력화하는 동시에 극화하기 위해 시종일관 애썼다. 그렇게 해서라도 인종이라는 구성물이 얼마나 유동적이고 철저히 무의미한 개념인지 알리고 싶었다."(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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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23-06-20 08:5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나와 다름을 통해 이루어지는
타자화를 극복하고, 상대방을
포용하기가 쉽지 않음을 다시
한 법 깨닫게 됩니다.
 
정보의 지배 - 디지털화와 민주주의의 위기 한병철 라이브러리
한병철 지음, 전대호 옮김 / 김영사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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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사는 신세계의 모습

- 정보의 지배를 읽으며

 


출근하기 전에 잠시 집어 들었던 한병철의 정보의 지배에서 흥미로운 대목을 읽고 글을 남겨본다.


사회비평가이자 커뮤니케이션 이론가 닐 포스트먼은 죽도록 즐기기에서 이렇게 말했다.

 


“(올더스) 헉슬리는 이렇게 말을 잇는다. ‘1984에서는 사람들에게 고통을 줌으로써 사람들을 통제한다.’ 멋진 신세계에서는 사람들에게 즐거움을 줌으로써 사람들을 통제한다. 요컨대 오웰은 우리가 몹시 싫어하는 것이 우리를 몰락시킬 것을 두려워했고, 헉슬리는 우리가 몹시 좋아하는 것이 우리를 몰락시킬 것을 두려워했다.” (한병철, 정보의 지배, 33면에서 재인용)


 

철학자 한병철은 헉슬리가 구축한 신세계가 오웰의 감시국가보다 여러 면에서 우리의 현재 모습에 더 가깝다고 진단한다. 저자가 말한 대목을 좀 더 들어보자.


 

멋진 신세계는 진통사회다. 거기에서 고통은 기피된다. 강렬한 감정들도 억압된다. 모든 바람, 모든 욕구는 곧바로 충족되어야 한다. 사람들은 재미, 소비, 즐거움에 휩싸여 몽롱해진다. 행복을 향한 강박이 삶을 지배한다. 국가는 주민들의 행복감을 높이기 위해 소마soma'라는 약을 나눠준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에는 텔레스크린 대신에 감각영화관이 있다. 그 영화관은 향기 오르간등을 써서 온몸으로 느끼는 체험을 제공함으로써 사람들을 마비시킨다.”(같은 책, 33)


 

이런 대목을 읽으면 한병철의 언급대로 우리는 지금 헉슬리의 신세계한 복판에서 허우적거리며 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다. 소름이 돋는다. 이 세계에서 국가가 주민들에게 나눠준다는 약(소마soma)은 그리스어로 영혼과 대비되는 육체’, ‘육신을 가리키는 단어에서 온 것일 테다. 우리 몸, 신체의 욕망을 곧바로 충족시켜주는 쾌락의 영약이라는 의미에서 그럴듯한 이름이다. 몇 년 전 자동차 업계에서는 인공지능 기술을 이용한 감정 반응 자동차를 선보였던 기사가 기억난다. 이 자동차에서는 운전자 및 탑승자의 신체, 심리 상태 등을 감지하여 이들의 감정을 돌봐주는 역할을 하는 기능인 것이다. 기분이 좋으면 즐거운 음악이나 기분이 좋아지는 향을 내뿜고, 우울하거나 슬퍼 보이는 표정이라면 이 또한 감지하여 기분을 북돋아 주는 역할을 하게 될 것이다. 나는 무엇보다 끊임없이, 잠시도 자신만의 사적 공간이 소멸된 환경이 당황스럽기만 하다. 한병철의 언급대로 우리의 생활에 이미 행복을 강요하는 강박이 자리 잡은 듯하다.


 

특히 오늘 짬을 내어 읽은 대목에서는 텔레비전이 담론을 파편화한다.’(31)란 표현이 기억에 남는다. 대통령 후보의 토론회를 비롯하여 사회의 문제들을 다루는 프로는 점차 단축되고 오락화된다. 나아가 일종의 쇼, 공연이 되어 가면서 이미지 정치가 되어 간다는 의미였다. 대신 시청자들은 오락프로그램이 주는 행복에 중독되어간다는 것이다. 결국 속이 빈 이미지들, 이러한 쇼들은 헉슬리의 소설에서 국가가 주민들에게 내어주는 약 소마에 다름 아닐지도. 공포의 지배 방식에서 한 층 업그레이드되어 이제 이미지 소비자들은 스스로, 능동적으로 이 약에 중독되어 간다는 진단을 저자는 내놓는다. 자가당착적이지만 매우 중독적인 도취의 형태다. 현대 SF의 거장인 필립 K. 딕이 언급한 바대로, 현대사회의 특징 하나는 공적 공간의 소멸인 것이다. 이제 공론장은 사적 공간들로 파열해버리고 있다.


 

오늘 독서는 여기까지. 저자는 자신의 진단에 대해 어떤 이야기를 하게 될지 기대해본다.   


[1]
"(올더스) 헉슬리는 이렇게 말을 잇는다. ‘《1984》에서는 사람들에게 고통을 줌으로써 사람들을 통제한다.’ 《멋진 신세계》에서는 사람들에게 즐거움을 줌으로써 사람들을 통제한다. 요컨대 오웰은 우리가 몹시 싫어하는 것이 우리를 몰락시킬 것을 두려워했고, 헉슬리는 우리가 몹시 좋아하는 것이 우리를 몰락시킬 것을 두려워했다." (한병철, 《정보의 지배》, 33면에서 재인용)

[2]
"멋진 신세계는 진통사회다. 거기에서 고통은 기피된다. 강렬한 감정들도 억압된다. 모든 바람, 모든 욕구는 곧바로 충족되어야 한다. 사람들은 재미, 소비, 즐거움에 휩싸여 몽롱해진다. 행복을 향한 강박이 삶을 지배한다. 국가는 주민들의 행복감을 높이기 위해 ‘소마soma‘라는 약을 나눠준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에는 텔레스크린 대신에 ’감각영화관‘이 있다. 그 영화관은 ‘향기 오르간’ 등을 써서 온몸으로 느끼는 체험을 제공함으로써 사람들을 마비시킨다."(같은 책, 3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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