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오덕*권정생 <선생님, 요즘은 어떠하십니까>

(9-10) 바람처럼 오셨다가 많은 가르침을 주고 가셨습니다

 이오덕 선생님

다녀가신 후, 별고 없으셨는지요?

바람처럼 오셨다가 제()에게 많은 가르침을 주고 가셨습니다. 일평생 처음으로 마음 놓고 제 투정을 선생님 앞에서 지껄일 수가 있었습니다.

선생님의 작품을 많이 읽었지만, 역시 만나 뵙고 난 다음, 더욱 그 진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선생님이야말로 가장 소중한 우리 것을 가지신 분이라 한층 미더워집니다.

어저께는 안동 김성영 씨를 만나, 선생님 얘기를 입이 마르도록 나누었습니다. 가슴이 따뜻해지고, 무엇이나 아껴 주고 싶은 마음이었습니다.

행복이란, 외모로 판단되는 값싼 것이 아닐 겝니다. 선생님이 걱정하시는 마음이 제게 많이 통하고 있다고 당돌하나마 말해 봅니다. 착하기만 해서도 안 될 것이죠.

소리소리 지르며 통곡하고 싶은 흥분이 일어날 때마다, 그것을 가슴으로 자꾸만 모아들이이는 아픔이란, 선생님은 더 많이 아실 것입니다.

체험하지 않고, 겪어 보지 않고는 절대 모르는 설움을 무엇 때문에 외면하면서 설익은 재롱만으로 문학을 한다는 것부터, 반성해야 할 것입니다.

안동에 오시는 기회가 있으시거든 종종 들러 주시기 바랍니다. 원고는 며칠 더 기다려 주세요. 그동안 사정으로 아직 정리하지 못했습니다.

그럼, 추위에 몸조심하시기 바랍니다. 다음 뵈올 때까지 안녕히!

1973 1 30

권정생 드림

: 1973 1, 권정생 선생이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고나서 이오덕 선생이 직접 권정생 선생을 방문합니다. 당시 혼자 살던 권정생 선생은 서른일곱, 이오덕 선생은 마흔 아홉. 띠동갑(12년차) 두 남자는 이렇게 만난 이후, 권정생 선생이 보낸 편지 입니다. 이 두 분은 이후 30년 가까운 우정을 지속하게 됩니다. 한 평생 이런 인연을 만난다는 것은 참 행운이라는 생각을 하게됩니다.

특히 12살 나이 차이가 무색하게 이오덕 선생은 편지에서도 언제나 권정생 선생을 존대하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참 쉽지 않은 일입니다. 그리고 권정생 선생의 작품을 출판하도록 여러 모로 배려를 하는 이오덕 선생의 인품을 간접적으로 느낄 수 있습니다. 이 두 분이 나눴을 문학에 대한 얘기도 조금 엿볼 수 있는데, 자신의 체험을 통한 솔직한 문학, 솔직한 글쓰기에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았을까 추측해봅니다. 글이 표피적으로 나아가지 않으려면 개인의 체험이 녹아나야한다는 것. 글을 쓰는 과정은 결국 자신을 알아가는 길이라는 생각을 해봤습니다 

글을 쓴다는 것이 어느 순간 부터 어렵다고 느낄 때, 내가 이전에 끄적거린 글들을 다시 보고 얼굴이 화끈거릴 때 무언가를 쓴다는 것이 너무나 큰 부담으로 다가오네요. 이럴 땐 다시 새로운 마음으로 소탈한 마음이 보이는 이러한 글들이 적힌 책을 가만히 넘겨보게 됩니다. 30년 가까운 남자들의 우정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이 흔적들을 보면서 다시금 길을 잃지 않으리라 다짐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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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덕적 불감증 - 유동적 세계에서 우리가 잃어버린 너무나도 소중한 감수성에 관하여
지그문트 바우만.레오니다스 돈스키스 지음, 최호영 옮김 / 책읽는수요일 / 2015년 11월
평점 :
품절


 

<도덕적 불감증>

(Moral Blindness: The Loss of Sensitivity in Liquid Modernity)

지그문트 바우만(Zygmunt Bauman) 레오니다스 돈스키스(Leonidas Donskis)/최호영 옮김

 

 

 

 

이 책의 폭넓은 주제에대해 잘 소화했는지 의구심이 든다.  주제넘게 서평이라고 하기보다는 책을 읽고 내 나름의 수준에서 받은 감상을 적어보았다.

   지그문트 바우만은 요즘 너무나 많이 인용되고 있어 관심이 가는 사회학자이다. 액체 근대, 유동 근대라는 용어로 고체의 특성처럼 고정화되어있지 않고, 예측이 불가능하고 불안정성이 지배적인 현대 사회의 특징을 요약하고 있는 학자로 잘 알려져있다. 그는 동유럽(폴란드계 유대인) 출신이며 마르크스 주의의 이론가로 한 때 활동했다고 하는데, 아이러니한 사실은 폴란드 공산당의 반유대 운동으로 인하여 (그것도 세계 곳곳에서 인간 해방을 부르짖던 1968년이라니!) 교수직을 잃고 국적마저 박탈당한 체 고국을 떠나야했다고 한다. 일종의 현대적인 정치적 디아스포라의 모습을 그의 삶에서 엿볼 수 있다. 그러고 보니 평생 자신의 정체성과 마주하고 이방인으로서 사회와 세계의 불합리를 몸으로 부대끼며 직시해온 서경식 교수의 목소리와도 비슷한 점이 있다는 것은 비단 나만의 인상일까. 아울러 이 책은 돈스키스가 서문에서도 밝히고 있는 것처럼 편지를 통해 서로의 의견을 교환하고 삶과 예술을 이야기하는 책이기도 하다. 이들은 과거의 수많은 문학 작품과 예술 작품을 언급하다가도 인터넷과 소셜 네트워크로 연결되어있는 지금 현재의 삶으로 되돌아오기를 반복하고 있다.  

   이 책에서는 동유럽 출신의 두 학자가 이나 정치 뿐만 아니라 대학의 의미와 인식의 변화 그리고 새로운 정치 경제적 질서에서 영향을 받는 인간 조건의 변화 등 폭넓은 주제에 대하여 자유롭게 대담하고 있다. 따라서 텍스트는 체계적인 구조를 갖고 기획된 논리적 서술의 경우보다 내용의 집중도가 다소 낮아보이기도 하다. 반면 이들이 자유롭게 언급하는 주제에 대한 배경적인 이해가 좀 더 있어야 이해될만한 사항들이 곳곳에 보였다.   

   책의 곳곳에서는 개인주의, 원자화, 유대의 파편화와 같은 단어가 반복적으로 등장하고 있으며, 아울러 디스토피아를 그린 소설과 같은 문학 작품을 반복적으로 언급하고 있다. 자유 시장 경제의 새로운 구조 속에서 우리의 삶이 어떻게 변해가는가하는 진단을 내리고 있다. 바로 원자화, 개인화가 진행되어감에 따라(원자화되는 프레카리아트) 인간은 인간다운 존재로서 인정 받지 못하고, 물건과 같이 대상화되어 결국은 상품처럼 소비의 대상으로 된다는 것을 말한다. 그 결과 우리 인간은 점점 도덕적으로 무감각해져감을 경고하고 있다. 마치 인간이 생각할 수 있는 극한 상황에 처해있을 때 오히려 비인간적 상항에 무뎌져가는 것처럼. 나는 유대인으로서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비참한 생활을 묘사했던 빅터 프랭클 박사의 기록들에서 느꼈던 당혹스러움을 바우만과 돈스키스가 그리고 있는 새롭게 변화해가는 현대사회의 모습을 이야기하는 대목에서 다시 느끼고 있다. 중요한 것은 프랭클 박사의 시대에는 보다 공포와 악의 대상이 우리의 눈에 분명히 보이는 듯하지만, 현대 사회에는 그 공포의 실체가 보이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우리가 생각하는 의 모습이 우리가 이미 익숙해져가고 오히려 자발적으로 참여하는 페이스 북일 수 있다는 점이다. 바우만은 우리의 도덕적 불감증무엇보다 신속하고 강렬하게 이해하고 느낄 것을 요구하는 시대에 우리가 스스로 선택하고 자초했거나, 숙명적으로 받아들인 도덕적 불감증(26)이라고 이야기한다. 얼마전 충격 속에서 보게되었던 빗자루로 교사의 권위를 농락하던 학생들에 대한 영상이 적나라하게 우리 시대의 도덕적 불감증을 보여주는 사례가 아닐까 생각해보았다. 이 책의 두 학자가 이야기하는 폭넓은 화제거리는 바로 한국 사회의 모습을 정확히 지적하고 있는 것 같아 놀라웠는데, 이는 인간의 조건이 그만큼 전 세계적으로, 보편적으로 인간의 존엄이 실추되는 방향으로 변해가고 있다는 반증이 아닐지 우려스러웠다. 빗자루 영상을 보며 받은 충격은 이 영상을 보며 이 사태는 진보 교육감이 초래한 교권 추락이라는 취지의 공격적인 발언을 하던 앵커의 모습을 보며 나의 충격은 배가 되었다. 이것은 또 다른 도덕적 불감증이 아닐까하는 생각을 해보았다. 

   나는 이 책을 빠르게 읽지는 못했다. 우선적으로 나의 지식과 배경적인 이해가 부족한 이유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내가 몸을 담고 살아가며 앞으로 평생 살아가야하는 우리 사회를 너무나도 예리하게 지적하고 있는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책을 덮고 다시 생각해보고 놀라고 하는 과정이 이어졌다. 이미 100년도 전에 비인간적인 관료의 행태를 지적하고 과료제를 비판했던 톨스토이의 <부활>이 왜 고전인지 다시금 깨닫게 되기도 한다. 더운 여름에 수감자를 이송중인 교도관과 관료들을 이야기하며 규정과 의무만 알고 이를 따르는 비인간적 행태들을 개탄했을 톨스토이는 이것이 인간의 역사에서 끊임없이 반복되고 있는 일상의 악임을 간파한 듯하다. 평범한 악으로서 비인간화된 관료의 모습은 한나 아렌트의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도, 그리고 안타까운 한국의 근현대사를 통해서 끊임없이 조우하게된다.

   한병철 교수가 <심리정치>에서도 언급했듯이 개인의 사생활을 낱낱이 공개하고, 개인들의 욕망이 분출되는 디지철 고해소인 페이스북은 이 노교수의 시야를 벗어나지 않는다. DIY복종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듯이 이 신자유주의 시대의 새로운 악은 피해자들이 인지도 못한 체 자발적으로 자신을 폭로하고 스스로를 소비의 주체로 만든다고 지적한다. 우리가 손수 만드는 악마이기에 DIY라고 한 것이다. 결국 우리는 새로운 형태의 사생활의 죽음이라는 국면을 맞이한 세대가 될 것이다. 더욱 우려스러운 것은 우리의 자녀들, 다음 세대들은 사생활이라는 것, 프라이버시라는 것에대해 분명히 우리 세대와는 다른 인식을 지니게 될 것이라는 점이다. 이 책에서는 언급하지 않았으나 <심리정치>에서도 나타나듯 연결망에 한 시도 쉬지 않고 연결되어 있는 나의 모든 클릭이나 터치는 기록되어 거대한 데이터 베이스에 저장되고 있다. 이 데이터 베이스는 집단의 성향을 파악하거나 나만의 맞춤 소비를 위해 언제나 가공되고 이용될 수 있다. 우리는 스스로 우리의 정보 제공 서약에 동의하고 개성이라는 착각 속에 데어터 베이스화된 보이지 않는 틀 속에 우리를 최적화시키는 것이 우리의 삶의 모습이란 생각이 들었다. 너무 비관적인가? 하지만 비관적이라는 것은 내 삶을 진실로 마주대하고 직시할 때만 가능하다는 점에서 나는 내가 비관적이라는 사실을 긍정한다.

   아울러 내가 새롭게 깨닫게된 점은 돈스키스가 유럽에서 경제적 무능에 대한 법적 책임이 등장하게 되었다고 언급한 대목에서였다. 정치경제적으로 무능함이 드러나게되면 처벌을 받게 되는 사회. 곧 우리에게는 실패할 권리마저 박탈당하고 있다는 지적이었다. 내가 상당히 공감하게 된 대목이었다. 최근에 일흔이 다되도록 아직도 현역에서 일하고 계시는 어느 분과 이야기를 하게 되었다. 나의 아버지뻘 되는 분이었는데, 이분과 나눈 이야기 중에 인상적인 부분이 내가 읽은 책의 한 부분을 떠올리게 하였다. 그 분은 우리 때는 세련되지는 못했지만, 어떤 일을 손수시도해보고 실패도 하면서 배우는 것이 많았어. 지금처럼 해보지도 않고 실패도 않하지는 않았어.라고 말씀하셨다. 이 말은 지금 젊은 세대의 무능을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실패를 용인하지 않게 된 사회에 대한 개탄이었다. 요즘 직장에서는 성과주의 도입으로 인해 극히 소수만 실제로 연봉을 많이 받지만 나머지는 도태되고 있다. 작은 실수만 하여도 모든 것은 성과에 기록되어 반영되기에, 젊은 세대는 실패 자체를 두려워하게 된 것이다. 따라서 새로운 도전이나 어려운 문제에 도전 자체를 하지 않게 된다는 것이었다. 과연 이러한 사회경제구조 속에서 누가 젊은 세대들을 패기없는 젊은이라고 비난할 수 있을까? 과연 실패를 두려워하는 젊은 이들을 안락함 속에서 자란 게으른 세대라고 손가락질 할 수 있을까?

   다시 언급하지만 이 책에서는 우리 사회의 모습을 뀌뚫는 듯한 지적들이 많이 나오는데, 내가 공감을 많이 하게 되는 부분이 대학을 주제로한 대목이었다. 인문학이 붐을 이루고 있다는 우리 사회에서 정말로 인문학이 그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면 왜 대학에서 인문학을 대표하는 문철 관련 학과가 폐지되거나 통합되는 것일까? 오히려 한국 사회의 대학은 인문학을 홀대하고 있음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반면 경영학과 학생의 정원을 1000명으로 늘리는 시대가 되었다. 학생들마져 대학이라는 경쟁 시장에서 소비의 주체이자 대상으로 바라보게 되는 현실이 도래했다. 대학에서 인문학 열풍에 힘입어 글쓰기 강좌가 인기라고 한다.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력서를 잘쓰기위한 이른바 꿀팁을 알려주는 강좌가 인기라고 한다. 그나마 인기가 없는 것보다야 낫다고 하지만 작문 수업은 이미 수 십년간 존재하고 있는데 글쓰기 강좌가 개개 학생의 생존 기술에 요긴하다는 인식이 매우 낯설기도 하고 안타깝기도 하다. 대학의 문제에관하여 논하는 바우만도 우리가 맞고 있는 대학의 위기는 교수가 손수 가져왔다고 비판하고 있다. 그만큼 교수들이 대학의 정체성을 결정하는 데 중요한 존재인 반면, 이들은 이미 신자유주의적인 가치를 너무나 잘 학습하고 내면화하고 있다는 방증일 수도 있다. 바우만은 우리 나라에서 일어나고 있는 우려와 비슷한 지적을 동유럽, 중유럽 대학이 처한 상황에서도 언급한다. 곧 중유럽, 동유럽 대학이 마가렛 대처(신자유주의 경제학의 대부인 밀턴 프리드만의 이론을 영국에 도입했다고 알려진)시기에 대학과 교육을 상품화 시킨 영국식 대학 경영 방식을 흉내내고 있다는 점을 역시 우려하고 있다. 이렇게 놓고 보면 이러한 상황은 안타깝지만 전세계적으로 나타나고 있는 현상이라는 확신이 든다.  

   자유시장 경쟁의 구조 속에서 피할 수 없는 담론이 불평등이라 할 수 있겠다. 장하성 교수의 <왜 분노해야하는가>에서 책 전반을 통해 이야기하고 있는 것처럼 이 불평등은 구조적인 문제의 일환이라는 것이다. 개개인이 저축하는 부분보다 대기업의 저축이 많다는 것, 그리고 대기업들이 설비 및 사람을 위한 투자를 하지 않고 있다는 점은 임금의 불평등과도 직접적으로 연관되어있으며 이 것이 신자유주의 경제 구조에서 경제적 불평등이 심화되는 주요인이라는 것이다. 바우만은 이 양상을 신자유경제시대의 불안정한 무산계급이 빠르게 증가하고 있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과거 헨리 포드, 록펠러의 시대만 하더라도 자본가와 노동자 사이의 상호 의존적이어야만 하는 타협적 생활 양식이 존재하여 자본이 감당할 수 있는 불평등의 한계가 존재했다라고 평가한다. 하지만 오늘날 이런 요인이 절대적으로 부족하다고 진단한다. 급속한 중산계급의 붕괴로 프레카리아트가 증가하고 있다는 것, 나아가 이 프레카리아트는 99%라고 표현하듯, 모든 경제적 계급을 포괄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미 해고된 이들 뿐만 아니라 몇 년 후 명예 퇴직이 예상되는 정규직 노동자들이나 좋은 직장을 얻으려 열을 올리는 대학생들 마져도 여기에 포함된다는 것이다. 아울러 복지 비용 만으로 이러한 상황을 타개하기는 어렵다는 의견은 바우만 교수나 장하성 교수나 인정하고 있는 듯하다.       

   무관심은 비난이나 증오보다도 더욱 심각한 증상이다. 구조적인 문제 속에서 파편화된 개개인은 점점 무감각해져간다.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비인간적인 환경에 끊임없이 노출되어있던 이들이 도덕적으로 무감각해져가는 모습이 마치 일상에서 벌어지고 있는 듯하다. 이러한 증상이 이제는 전 세계적으로, 그리고 자발적으로 보이지 않게 진행되고 있다. 나는 소위 X세대에 속하지만 이 책에서 바우만은 80년대 중엽부터 90년대 중엽 사이에 태어난 Y세대에 대해 언급한다. 이전보다 더 개인주의적이고 상사에게 더 반항적이지만, 무엇보다도 더 불안정한 세대로서 Y세대의 성격을 규정하고 있는데, Y세대가 겪는 현재의 문제들이 과연 그 이후의 세대들에서 완화될 수 있을 것인가 묻는다면 회의적일 수밖에 없는 현실이다. 아마도 이들이 액체 근대의 사회 구조 속에서 인터넷에 유동적으로 연결되어있는 최초의 세대이기에 예를 들지 않았을까. 불안정한 사회, 불안 속에 살게되는 세대들이 이른바 자발적으로 자유를 포기하게 되는 시대에 바우만과 돈스키스의 이 책은 우리의 감수성이 변화됨을 가차없이 이야기하고 있다. 그러길 바라지 않지만 '무감각'해진 인류가 맞게될 우리 미래의 모습같다. 아울러 이 책은 단순히 저자 자신의 폭넓은 지식을 드러내는 담론이 아니라 바로 내가 살고 있는 한국 사회의 면면을 꿰뚫어보는 듯한 책이라는 점에서 내가 몸담고 있는 현실을 다시 바라보고 생각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고 생각한다.    

 

 

책을 덮은 후

   우선 이 책은 역자 후기가 없다! 나는 모든 번역서에 역자 후기가 있어야한다고 생각한다. 번역자는 이 책의 번역 작업에 애착이 없었던 것일까? 아니면 역자는 원전의 저자 앞에 나서지 않는다는 겸손의 의도로 역자 후기를 생략했던 것일까? 또는 역자는 번역된 텍스트로만 말한다라는 자신감의 표현일까? 나는 개인적으로 역자 후기가 없는 책은 구입하지 않는다. 내 주관적인 인상으로는 번역작업을 완성하는 1%의 의무를 방기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때문에 그렇다.

   문학 평론가이기도 하지만 번역가로도 많은 문학을 번역했던 김화영 교수처럼 멋지고 유려한 글을 바라는 것도 아니다. 단순히 번역기계가 아닌 사람이 한 작업의 흔적으로서, 그리고 텍스트를 가장 깊이 읽고, 고민했던 사람으로서 번역자에게 어떤 인상을 주었으며, 이 책이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 나는 독자로서 궁금하다. 따라서 개인적으로 번역자의 후기가 없다는 점은 매우 실망스럽다. 번역은 반역이다, 번역은 새로운 글쓰기다라는 잘 알려진 표현을 굳이 들먹이지 않아도, 번역이라는 것은 지난한 과정이며 번역자는 분명 인정받아야 하는 존재다.

   한편 우리말 문장이 쉽게 읽히지는 않는데, 번역의 어투를 가만히 들여다보면 영역된 책을 우리말로 번역한 것이 아닐까하는 느낌마저 든다. 번역된 문장들만 보아도 영어 문장의 구조가 연상되는 듯하다. 아울러 1962년 생인 돈스키스가 37년의 나이차이가 있는 바우만(1925년 생)을 부를 때 자네라고 옮기는 것은 다소 생경한 느낌을 준다. 아울러 바우만의 문장은 호흡이 길고 많은 생각들이 직관적으로 침입해있는 것도 쉽게 읽히지 않는 이유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이러한 부분은 번역자가 독자를 위해 의미상 문장을 분리하여 문장의 호흡을 조절해주었으면 좋지 않았을까 하는 바램을 적어본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이것은 오래되고 우리에게 익숙한 괴테의 메피스토나 그것의 갱신된 형태인 이스트반 자보의 메피스토가 아니라 일종의 `DIY`즉 `우리가 손수 만든` 악마이다." (51면)

"우리의 악마는 이케아, 페이스북의 모습을 한 DIY다." (52면)

"역사가들이 그들의 일을 하도록 놔두어라."
- 루벵 카톨릭 대학 역사학 교수 미셸 뒤물랭의 말 (59면)

: 마치 우리의 국정 교과서 파동 문제에 대해 언급한 대목 같다.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많은 부분이다.

"유혹의 면역력을 키우는 한 가지 중요한 수단"
- `기억`은 말살될 수 없다. `역사적 기억` (61면)

: 하지만 우리의 역사는 의도된 왜곡으로 인해 우리의 `기억`을 되살리는 것이 오랜 시간이 걸릴 수 있다는 교훈을 준다.

"너무 많은 기억은 우리의 유머 감각뿐 아니라 우리 자신까지도 죽일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기억을 포기할 수 없다." (68면)

: 우리는 기억해두어야하고 기억해내려고 노력해야한다. 모르면 알려고 해야한다.

"악은 오히려 평범한 삶의 사소함과 진부함으로 간주하는 것에 숨어 있다." (69면)

"소셜 웹사이트들은 ... 모든 독재자와 그들의 첩보기관에게 하늘에서 떨어진 돈과도 같은 정말로 뜻밖의 선물이며..." (105면)

"도끼는 나무를 찍는데 사용될 수도, 머리를 자르는데 사용될 수도 있다. 선택은 도끼의 몫이 아니라 도끼를 손에 쥔 사람들의 몫이다." (108면)

"오늘날 유럽에서 우리는 경제적 무능에 대한 법적 책임이라는 개념의 등장을 목격하고 있다. 어떤 종류의 정치 경제적 무능도 처벌을 면할 수 없다." (128면)

"가장 심각한 것은 중유럽과 동유럽이 마가렛 대처 시대에 시작된 대학과 교육의 상품화에 지나지 않는 영국식 대학 경영 방식을 열심히 흉내 내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것이 앞에서 언급한 불균형과 비대칭을 제거하는 데 기여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 (28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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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두기: 나의 관심분야 도서 선정의 작은 기준들

1) 모든 책은 주로 최신간을 살펴보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책을 읽지 않은 상태라는 점을 감안하셔야한다. 따라서 여기 관심 분야 선정 도서들은 책에대한 개인적이고 주관적인 첫인상 리포트로서 고려해주시면 되겠다.

2) 책 제목에 인문학이라는 단어가 있는 도서는 가급적 피하려고 합니다. 인문학 붐에 편승하려는 얄팍하고, 상상력마져 부족한 마케팅의도를 배제하고 싶네요. 제발 책제목에 인문학은 이제 그만~!

3) 실제 국내 도서 시장에서 번역서의 비중이 30% 미만인데도 개인적으로 체감하는 번역서의 비중은 절반이 넘는 것 같습니다. 좋은 번역서도 반드시 필요하지만 국내 저자들의 좋은 신간들(절판된 책들의 복간을 포함하여)을 꾸준히 찾아 더 알리고 싶습니다. 특히 좋은 책이지만 초판으로 절판되곤하는 인문사회예술분야 중 국내 저자의 책들을 좀더 알리고 응원하고 싶습니다.   

4) 인문분야이기에 - 자유롭게 사고하고 행동하는 인간을 위해 인문학이 존재해야하는 것이 아닐까요? 그렇다면 쉬워보이는 책, 쉬운 책만 찾을 것이 아니라 머리를 지끈지끈하게 만들고, 나를 숙면에 들게하는 책도 한 번씩은 도전해봐야하지 않을까요? 머리아픈 경험을 통해 조금씩 성장한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크려고' 아프다는 사실은 아직도 진리인 것 같습니다.  우리에게 불편하게 다가오는 사실들, 불편한 역사적 사실들을 직시하고 나의 삶을 바라보는 일도 필요한 것이죠. 다른 분야는 몰라도 적어도 인문 분야라면 나를 불편하게 만들지만 진정성이 담긴 그런 책에도 관심을 가져보는 것도 필요하겠습니다. 그런 의도에서 관심 분야 도서의 목록을 좀더 늘였습니다. 대기업에서 원하는 인재상, 대기업에서 원하는 일꾼의 자격에 최적화된 월급쟁이를 양산하거나 이들이 스펙처럼 이야기하는 쭉정이같은 기업용 인문학을 배제하고 싶네요.    

5) 지난 달에 나온 도서 중 새롭게 눈길이 가는 도서도 포함해봅니다. 특히 월 말에 나오는 도서는 시기적으로 주목 신간 도서에 반영이 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관심이 많이 가는 책임에도 지난 달에 관심가는 도서 목록에 넣지 못했던 도서들을 좀더 들여다보고 싶었습니다.

6) 주요 5권의 신간들 중 예술 분야와 과학 분야에 최소 각 1권씩 고려해보고자 하였습니다. 그리고 본문은 편의상 경어가 아닌 '이다'체로 씁니다.

 

 

 

 

 

 

 

 

 

 

 

 

 

 

 

 

 

 

1. <왜 분노해야 하는가: 분배의 실패가 만든 한국의 불평등>

장하성 지음/헤이북스

- 제목으로만 보자면 이 책은 강준만의 <사람들은 왜 분노를 잃었을까>, 존 커크 보이드의 <왜 분노하지 않는가>, 스테판 에셀의 <분노하라>, <분노한 사람들에게>등의 계보를 잇는 책으로 보인다. 우리에 익숙한 <맨큐의 경제학>은 이른바 신자유주의의 핵심 교리를 전파해온 시카고학파의 한 교수가 지은 책인데, 많은 사람들이 이 책으로 공부한 경험이 있을 것이다. 이런 주류의 경제학적 관점과 다른 시선을 가진 경제학자로서 저자가 대한민국에 살면서 분노해야하는 이유를 경제적 관점, (경제적)불평등에서 찾고자 한다. 한국 사회에서 이 불평등의 기원이 어디에 있는가하는 의문에 답을 찾고 있는 것 같다. <무쇠 한스 이야기>라는 책에서 저자 로버트 블라이는 인간이 분노하는 것은붉은 피를 가진 동물로서 포유류의 특징이라 언급한 적이 있다. 짝찍기를 위해 상대 수컷에 분노를 표출하는 일 혹은 지금 당장 배고픔을 해소하기위해 먹이를 앞에 두고 싸우는 일이 아닌, 불의를 보고 분노할 줄 아는 것은 인간만의 특징이자 특권일 것이다. 분노는 흔히 부정적으로 치부되기 쉽지만 인간의 탐욕에대한 저항이자 거부의 몸짓으로 볼 수도 있다. 이런 분노를 억누르고 삭히기만 할 것이 아니라 이러한 책을 통해 내 삶을 다시 돌아보고 보다 긍정적인 에너지가 형성되도록 할 수 있지 않을까

 

 

 

 

 

 

 

 

 

 

 

 

 

 

 

2. [문화/예술]

<보는 눈의 여덟 가지 얼굴 - 시각과 문화: 당신은 누구의 눈으로 세상을 보고 있는가>  

베른트 슈티글러, 마리우스 리멜레 지음/문화학연구회 옮김/글항아리

진화적인 관점에서 은 아주 독특한 신체기관이라고 한다. 도대체 인간은 왜 전자기파의 넓은 영역 중 아주 좁은 가시광선 영역만을 감지하는 눈을 갖게 되었을까? 그리고 이런 결과가 생겨나기전 그 시초는 무엇일까가 나에게는 아직도 궁금한 의문들이다.

이 책은 사회의 여러 단면에대한 시각을 그 주제로 하고 있다. 눈을 통하여 보는 세상, 그리고 개개인에게 형성된 이미지(눈에 보이는 어떤 형태뿐 아니라 마음에 생겨난 심상도 포함)는 결국 각자가 세상을 바라보는 의미를 규정할 것이다. 존 버거의 <다른 방식으로 보기 Ways of Seeing>이 아니더라도 우리는 이미 이미지가 갖는 다면적인 특성을 인지하고 있을 것이고 이로부터 독립적으로 살아갈 수는 없게되었다. 출판사에서는 매체기술과 과학, 권력과 이데올로기, 인지심리학, 종교, 대중문화 속에서 복잡하게 만들어지는 '눈의 문화들'에 관한 입문서라고 이 책을 소개하고 있는데, 진중권 교수의 <이미지 인문학>(디지털 문화를 좀더 비중있게 다루고있긴 하지만)과 같은 책과 병행하여 읽어보는 것도 흥미로울 듯하다. 아울러 철학자 미셸 푸코가 언급했던 제레미 벤담의 파놉티콘에 관한 장도 눈에 띈다. 한병철 교수가 그의 책에서 언급했던 디지털 파놉티콘에 관한 담론도 연결지어 생각해볼 수 있겠다.

 

 

 

 

 

 

 

 

 

 

3. [과학]

<시간의 장벽을 넘어 - 최초의 타임머신 개발을 향한 경쟁>  

제니 랜들스 지음/안태민 옮김/불새

 

시간은 우주가 생겨난 이래 지금처럼 흘러왔을까? <최초의 3>이라는 스티븐 와인버그의 책도 있듯이, 시간은 물리학의 주요 연구 대상이기도하다. 우주가 탄생한 이후 시간은 균질하게 흘러왔을까?하는 의문도 든다. 사람은 시간을 어떻게 인식하는가하는 부분도 매우 흥미로운 주제다. 개인적으로는 처음 허버트 웰즈의 소설 <타임머신>을 읽었을 때, 80만년 후라는 과도한 미래의 설정에 생경한 느낌과 신선한 충격을 받은 기억이 있는데, 이는 시간여행이라는 과업(?)이 현대과학의 급속한 발달에도 불구하고 과연 가능할까?라는 의구심에서 나온 숫자일 것 같다. 이런 시간시간의 장벽을 뛰어 넘는다는 상상은 수많은 영화나 예술가, 작가들에 영감을 준 상상력의 원천이다.

   영화 <백투더 퓨처 II>의 시간적 배경이 되었던 지난 2015 10, 주인공인 브라운 박사와 마티가 캘리포니아에 나타나지 않았으나 우리에게 시간을 거슬러 여행하거나 심지어 미래로 가는 어떤 통로에관한 궁금증은 분명히 우리의 상상력을 자극한다.

   이 책의 흥미로운 점은 과학을 전공한 후 베스트셀러 작가로 TV와 다큐멘터리 프로를 제작하기도 했던 저자가 시간여행과 관련한 주제의 여러 내막이다. 이렇게 추상적인 하나의 대상을 주제로 쓴 글은 삶과 관련한 모든 분야를 다 들여다 볼 수 있는 것 같다. 문학이든, 종교든 과학이든 이 모든 주제들은 우리와 뗄 수 없는 것들이다. 우리가 만나는 많은 과학적 개념들 뒤에는 결국 인간이 만들어낸 흔적이 남게 되는데, 이 책은 그 흔적을 추적하는 책이라 생각한다.

 

 

 

 

 

 

 

 

4. <음식과 성 - 도스토옙스키와 톨스토이 I>

로널드 르블랑 지음/조주관 옮김/그린비

요리를 여자에 비유하여 다소 위험(?)해 보이는 상상력을 펼친 무라카미 류의 <달콤한 악마>처럼 이 책의 간결하고 단도직입적인 책 제목부터 눈에 띈다. 아울러 성욕을 평생 기피해야하는 죄악으로까지 치부한 톨스토이는 여기에 왜 나온 것일까 더욱 궁금해진다. 목차를 보니 아마도 러시아의 문학을 이야기하면서 성에대한 고찰과 음식 특히 육식 등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있는 것 같다. 출판사에 따르면 이 책은 슬라비카 총서 6권 중 첫 번째 책으로서 도스토옙스키와 톨스토이를 중심으로 19세기 러시아 소설을 분석하는 책이다. 말하자면 문학 텍스트에 나오는 음식과 성에 관한 주제를 인문학적 시각으로 다르게 보기를 시도해보는 책으로 보인다    

 

    

 

 

 

 

 

 

 

 

 

 

5. <전체 안의 전체 사고 속의 사고 - 김우창의 인문학을 읽다>

현광일 지음/살림터

- 기계공학을 전공했지만 비판문화 이론등을 공부하여 사람에대한 지대한 애정과 관심을 갖고있는 저자가 인문학자 김우창의 인문학을 이야기한다. 자유롭고 독립적으로 사고하고 행동하는 인간이 되기위한 평생의 지기로서 인문학을 이야기하고 김우창 선생의 저작과 사상을 통해 우리의 삶을 변화시켜갈 것을 권유하는 듯하다. 인문학자 김우창 선생의 여러 저작들에대한 훌륭한 출발점이 될 수 있지 않을까한다. 이 책과 더불어 지난 12월에 나온 김우창 선생의 책 <궁핍한 시대의 시인: 현대 문학과 사회에 관한 에세이> (민음사)도 무척 반갑다. 한자가 많이 나와 읽기 쉽지 않았는데, 이번에 김우창 전집으로 새롭게 한글세대들을 위해 기획한 듯하여 반가운 소식을 전한다. 앞으로의 전집이 기대가 된다.

 

 

 

 

 

 

 

 

 

 

6. <니체를 읽는다: 막스 셸러에서 들뢰즈까지>

박찬국 지음/ 아카넷

실존철학의 거장 하이데거나 자크 데리다, 질 들뢰즈와 같이 세계적으로 유명한 근현대의 유명한 철학자 뿐 아니라 카잔차키스, 뭉크, 이사도라 던컨 등 수많은 작가 및 예술가들에게 크나큰 영향을 준 사람. 나아가 루돌프 슈타이너라는 교육철학자 에게 영감과 영향을 주어 발도르프 교육이라는 교육방식을 정립하게 한 이 사람. 미국 신보수주의(네오콘) 집단의 정신적 대부 레오 스트라우스에게도 커다란 영향을 준 이 니체라는 (위험한) 인물은 도대체 어떤 인물이었을까? 누구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라는 제목을 알지만 모든 사람을 위한, 그러나 그 누구를 위한 것도 아닌 책이라는 니체의 표현처럼 제목을 아는 사람들 중 소수만 읽어낸 하지만 커다란 파괴력을 지닌 책을 쓴 바로 이 사람, 100년도 더 된 이 사람이 왜 이렇게 회자되는 것일까. 그래서 니체에 관한 책을 여러 권 옮기고 펴낸 박찬국 교수의 이 책이 더욱 궁금해진다

 

 

 

 

 

 

 

 

 

7. <노근리 이야기 세트 - 2 - 그 여름날의 기억 + 끝나지 않은 전쟁 l 평화 발자국> 박건웅 그림/정은용, 정구도/보리

- <노근리 이야기>는 11월 말에 나온 책으로 내가 검색할 당시에 내가 발견하지 못하고 지나간 책이다. 이 책은 현재 많은 관심을 불러모으는 현대사책이 아니다. 출판사에 따르면 노근리 이야기 1부는 정은용이 쓴 실화 소설 <그대, 우리의 아픔을 아는가>를 원작으로 했으며, 2부는 정은용의 아들 정구도가 쓴 <노근리는 살아 있다>를 원작으로 한 만화라고 전한다. 이 책은 작가 정은용이 1950년 한국 전쟁이 발발한 해 여름, 미군들의 총에 어린 아들과 딸을 잃은 개인의 절박한 체험을 담은 개인의 기록이기도 하다. 한국 전쟁 당시 어린 아들과 딸이라면 지금 바로 나의 부모님 세대가 되는데, 살아계셨으면 지금 60대 정도가 되셨을 것같다. 이 두 권의 책은 사실들이 기록되는 공식적인 역사책 이면에 개개인들이 겪은 전쟁이란, 인간의 잔혹성이란 어떤 것인가를 배울 수 있는 귀중한 책이 아닐까한다.

 

 

 

'병신년' 새해에는 알찬 독서생활로 시작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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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는 뭐랄까 지극히 개인적인 견해로는 ‘필사’문화가 번성했던 해가 아닐까 한다. 사실 책을 그다지 읽지 않은 나는 부끄럽지만, '필사' 라는 단어를 올해 처음 듣게되었다. 반면 신문에는 조정래 작가의 태백산맥 10권을 필사한 80대 할머니가 기사화되어 나오기도 했고, 거리를 지나다보면 성경 필사반 모집이라는 플래카드가 걸려있었다. 새봄 출판사에서 한국 단편을 필사하는 책이 나와 인기를 많이 확보한 모양이다. 나아가 <마음 필사>, <이토록 멋진 문장이라면> 같은 필사책도 나오기도 하고 명시를 필사하며 음미하는 책도 있다. 그런가하면 천병희 교수가 본인이 번역한 고전 중 가려 뽑은 <필사 다이어리>시리즈도 있지 않은가. 문화센터에서는 필사 수업이 생겨나기도하고 아뭏든 올해는 필사가 눈에 띄게 붐을 이룬 한 해가 아니었나 싶다. 문득 기존의 작가들, 그리고 작가 지망생들이 많이 해왔던 필사가 이렇게 폭넓게 영향력을 미치게 되었을까 궁금해진다.

   우선 글쓰기에대한 관심의 증가가 그 한 이유일 것이다. 글쓰기 책은 유독 2000년대 들어 눈에 띄게 많이 나오는 것 같은데, 글쓰기에 대한 관심과 출판되는 책은 어느 정도의 주기가 있는 모양이다. 혹자는 글쓰기에 대한 지대한 관심, 예컨대 글쓰기 책이 잘 팔리고, 대학에서 글쓰기 강좌가 붐을 이루는 이유를 경제난과 취업난에 따른 결과라고 지적하기도 한다. 말하자면 대학에서 글쓰기에 관심을 갖는 학생들의 주된 목적이 자기소개서를 쓸 때 필요하기 때문이라고 지적하는 이도 있었다. 그럴듯한 이유이다. 하지만 그렇다고해도 <서평 쓰기>와 같은 책들이 나오는 것을 보면 책읽기글쓰기 혹은 서평쓰기에대한 관심이 많이 높아지는 것도 사실일 것이다. 이유가 어찌되었건 나는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시행착오라면 시행착오도 많을 수록 좋을 것이다. 많은 이들이 책읽기글쓰기를 시도해보고, 좌절해보고, 나름대로 다시 도전해보고 하는 과정에서 각자는 나름의 길을 언젠가는 발견해나가리라 믿는다. 그런 의미에서 얄팍한 목적의 글쓰기 수업이 붐을 이룬다고 해도, 없는 것보단 낫다는 입장이다. 모든 사람들이 똑같은 효과를 얻거나 계획된 길을 따라갈 수는 없는 것이다.

   또 다른 이유는 글쓰기자체에 대한 중요성을 인식하게 된 일이다. 독서에대한 중요성의 인식 뿐 아니라, 시험제도로서의 논술이 갖는 영향력도 무시할 수 없겠다. 개인적으로는 초중고 및 대학생들의 외국 유학생들이 많아짐에 따른 영향도 있다고 생각한다. 외국, 예컨대 미국에 일찍 유학을 나간 수많은 학생들이 새로운 방식의 수업방식에 접하게 되었을 것이다. 글쓰기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미국에서 이 유학생들은 글을 잘 쓰는 사람이 그렇지 못한 사람보다 취직이나 연봉에서 더 많은 기회를 얻을 수 있다는 통계를 수도 없이 접했을 것이다. 글을 쓸줄 안다는 것의 힘에대해 그리고 중요성에대해 보다 폭넓은 인식이 생겨난 부분도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이런 분위기는 블로그와 같은 플랫폼을 통해 자기 표현을 할 수 있는 공간이 확대된 것도 무시할 수는 없을 것이다.    

   아울러 인문학 열풍을 타고 독서 모임의 활성화가 책읽기글쓰기에대한 관심이 더욱 증가된 원인이기도 하다. 사사키 아타루가 언급했듯이 책을 읽는다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유신 말기 1978년 부산에서 양서협동조합이라는 독서 모임이 생겨났다. 이 모임에서 나온 인물들이 카톨릭 사제이자 활동가로서 중앙정보부에 48회 이상 체포되면서도 독서모임을 이끌었던 송기인 신부를 비롯하여, 무명의 노동 변호사였던(나중에 대통령이 되는) 노무현도 있지 않은가. 아울러 이 모임은 여러 명의 국회의원도 배출해내어 책을 읽는다는 것의 위험성(?)을 잘 보여주는 사례라고 볼 수 있겠다. 결국 사사키 아타루가 언급한 것처럼 책을 읽는다는 것은 정말 위험한 활동인 것이다. 책을 읽고야 말았다는 것은 책을 읽은 후 독자는 책을 읽기 전과는 다른 사람이 되었다는 것이다. 내가 책을 읽기 전과 다를 바가 없다면 <논어>에 나온 것처럼 책을 읽은 것이 아님을 의미한다.  

 

 

한 해를 마무리하면서 올해 책읽기글쓰기에대한 관심과 더불어 필사와 관련한 출판 서적 및 관심이 증가한 이유를 나름대로 생각해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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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로 떠나는 상자 속에서>

류가헌 사진 전시 (2015.12.01-12.13)

 

 

 

 

 

 

 

 

 

 

 

사진집 정보:

 <바다로 떠내려가는 상자 속에서>

필립 퍼키스 사진, 글/박태희 옮김/안목출판사

 

* 일러두기: 사진 전시를 보고 메모해둔 두서없는 글입니다.

 

 

 

 

 

#텅빈 철길에 메마르게 서 있는 나무가 있는 사진

   아마도 대부분은 우리 나라의 풍경일 듯하다, 불모의 겨울을 찍은 필립 퍼키스의 이미지들은 절제되어 있으며 고요하다. 삶과 죽음의 경계가 희미해져 혼재해있는 어느 지점에 놓여 '거기에' 있는 죽은 생물들마저 겨울 풍경 속에 침잠해있다. 눈 덮힌 텅빈 들판의 풍경은 초월적인 공간의 이미지다. 앗제가 말년에 담은 파리 공원의 초월적인 공간처럼 보이기도한다. 마른 나무가지와 강이 있는 겨울 풍경은 내가 눈으로 보고 몸으로 기억해두었던 뉴욕 주 어느 시골의 겨울 풍경과도 닮아있다. 하지만 필립 퍼키스가 대상으로하는 배경은 이미 지역이 갖는 특수성을 상실한다. 온타리오 호수를 따라 끝없이 동쪽으로 뻗어있는 기차 길 위에는 젊은 사진 작가 신디 셔먼이 뉴욕 주 서부의 작은 도시 버팔로에서 대도시 뉴욕으로, 두려움과 희망을 동시에 안고 지나갔을 기차길이 겹쳐있다. 나는 겨울 온타리오 호수 가의 적막한 철길을 떠올린다.

 

 #죽은 동물이 반쯤 잠겨있는 사진, ‘-시의 죽음

    무진기행에 나오는 한 장면처럼 어둡고 음울하게 드리워진 검은 나무 그림자가 수면에 비치고 있고, 그 경계에 죽은 동물이 있다. 사체는 수면위로 일부만 나와있다. 처음에는 새일까 아니면 강에 사는 비버 같은 동물이 아닐까 생각했다. 다시 자세히 들여다보니 수면위로 나와있는 부위는 등과 동물의 뾰족한 귀로 보인다. 길다란 목은 한 쪽으로 힘없이 꺾인 채 가느다란 머리 부분이 수면 아래에 잠겨있다. 죽어서 물에 불어버린 사슴같다. 내가 여기서 더 놀랐던 이유는 수면 위로 화살의 깃이 살짝 드러나있기 때문이었다. 이제야 비로소 죽음의 전말이 조금 드러난다. 이 사체는 누군가의 화살에 맞아 죽은 후 물에 퉁퉁 불어버린 사슴으로 보인다.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밀려나있는 이 존재마저 자연의 질서를 거부당한채 인간의 손길에 의해 죽음을 맞았던 것이다. 삶이란 죽음에대한 강렬한 저항의 몸짓이다. 하지만 삶과 죽음은 모두 자연의 질서에 속한 다른 양상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이 수면 아래에 잠겨있는 동물에게 닥친 죽음은, 한 생명의 삶이 충만하고 의미 있게 완결될 수 없었던 불-시의 죽음이었던 것이다.

 

* 무진기행의 한 대목

   거리는 어두컴컴했다. 다리를 건널 때 나는 냇가의 나무들이 어슴푸레하게 물 속에 비쳐 있는 것을 보았다. 옛날 언젠가 역시 이 다리를 밤중에 건너면서 나는 저 시커멓게 웅크리고 있는 나무들을 저주했었다. 금방 소리를 지르며 달려들 듯한 모습으로 나무들은 서 있었던 것이다.”

   김승옥 작가는 물 속에 비쳐있는 냇가의 나무들, 시커멓게 웅크리는 나무들을 소설의 후반에 나오는 자살한 여인의 이미지와 연결시킨다. 곧 이 시커먼 나무의 그림자들은 죽음의 이미지와 잇닿아있다. 주인공 윤희중은 냇가에서 자살한 여인의 뒷모습을 보고, 아마도 여인이 새벽 통행금지 사이렌이 해제되던 4시 즈음 죽어갔을 것이라 생각한다. 같은 시각 슬며시 잠이 들었던 주인공은 그 여인이 마치 자신의 일부인 것처럼 느끼며 자기 분열적인 체험을 하고 있다. 내가 필립 퍼키스 선생의 사진을 가만히 들여다보면서 떠오른 이미지가 바로 무진기행의 이 대목이었던 것이다.

 

 #다리 난간에 놓여있는 목장갑이 있는 사진

   가만히 사진을 들여다보면 다리 난간 사이로 검은 개가 사진가를 쳐다보고 있다. 사진가도 분명 난간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난간 사이에 보이는 그늘 속에서 조용히 자신을 응시하고있는 검둥 개를 발견했을 것이다. 그늘 속 검둥 개와의 조우! 사진집에 나온 이 사진보다 실제로 필립 퍼키스 선생이 인화한 사진의 톤이 좀더 어둡다. 따라서 실제 프린트를 보며 이 검둥개를 발견하는 데 시간이 좀더 걸렸던 셈이다. 다시말해 필립 퍼키스 선생이 직접 인화한 사진이 내게는 좀더 비밀스럽게 느껴진다. 전시장에서 인화한 사진을 보다가 사진집을 보면 사뭇다른 느낌을 만나게 되는데, 이는 한편으로는 새로운 발견의 즐거움을 주기도한다.

 

 #눈 덮힌 들판의 풍경

   위 아래로 거대한 트럭의 바퀴자국처럼 보이는 흔적이 화면의 가운데에 뚜렷하게 드러나는 메마른 땅에 눈이 살짝 덮여있다. 화면의 오른쪽 아래에서 밝게 빛나고 있는 눈의 섬들과 왼쪽 위에서 화면을 꽉 덮은 구름의 살짝 열린 부분을 통해 새어나오는 밝은 빛은 이 정적인 이미지에서 동적 균형을 주는 요소들같다. 한편S자 모양의 바퀴자국은 이 두 요소 사이를 안내하며 나의 시선을 이끌고있다.

 

#고요 속의 움직임

   하늘에 던져진 나무가지가 나아가는 방향을 향해 잘 보이지 않는 검은 강아지 한마리가 물에 뛰어들 테세다. 하늘에 정지해 있는 나무가지는 초현실적인 느낌을 더해준다. 정중동(精中動). 이 사진집에 나온 이미지들은 이 전의 이미지들보다 더 비밀스럽다고 느낀다. 아마도 이 사진들은 2007년 사진가가 사진을 60년 가까이 찍어오면서 주로 쓰던 한 쪽 눈을 실명한 이후 찍은 사진들이기에 더욱 그럴 수도 있겠다. 사진가의 인화는 세세한 기교를 초월해있다고 생각한다. 구도가 어떠하고, 노출이 어떠한지에관한 문제들을 너머 사진가는 어둡게 찍힌 사진들은 어두운 그대로를 보여주기위해 인화를 했다고 말하는 대목을 어디선가 읽은 적이 있다. 여기에는 그의 스승이기도 했던  프린트 마스터 안셀 애덤스의 기교와는 대척점을 이루고 있다.

 

#투명한 천막 속 아주머니의 모습

   투명한 천막 속에서 한 아주머니가 오뎅 꼬치의 끝으로 보이는 나무 막대들이 있는 테이블에 무표정하게 앉아 앞을 응시하고 있다. 천막의 밖에 가스통이 있고, 그 위에 씌여진 강원 동해'라는 글자만이 대상의 위치를 짐작하게 해준다. 다시 주의 깊게 사진을 들여다보면 깍지낀 두 손이 슬며시 천막 밖으로 나와있다. 장사를 하는 아주머니만 외롭게 자리를 지키는 것이 아니었다. 이 손은 뒤에 앉아 무표정하게 앞을 응시하는 여인의 심리적 표출과도 같이 느껴진다. 이 무위(無爲)의 손은 다시 오른쪽 가스통 위에 구겨진 채 놓여있는, 하얗게 빛나는 고무장갑에 가 닿는다. 이 고무 장갑이 특히 나의 시선을 끈다. 나에게 있어 이 고무 장갑은 이 사진의 전체 이미지를 함축적으로 보여준다. 나는 롤랑 바르트의 <카메라 루시다>에서 본 윌리엄 클라인의 사진을 곧바로 떠올린다. 거리의 아이들을 찍은 윌리엄 클라인의 사진에는 누군가 장난감 총을 쥔 채 한 어린 아이의  머리에 겨누고있는데, 정면을 응시하며 웃는 아이의 모습에서 롤랑 바르트는 유독 어린 소년의 썩은 이빨을 끈덕지게 바라보게 되었다고 이야기한다. 필립 퍼키스의 사진에 나온 하얀 고무 장갑이 나에겐 롤랑 바르트가 계속 바라보았을 아이의 썩은 이빨과도 같이 여겨진다.

   나는 사진을 나의 기억과 경험치로만 느낄 뿐이다. 나의 기억과 나의 경험은 내가 한 인간으로서 나의 정체성을 끊임없이 확인하고 세계를 탐색하도록 해주는 가장 중요한 요소일 것이다. 나의 기억은 내가 인식하는 시간성의 본질을 이루고 있을 것이며, 나의 오감과 직관을 통한 나의 경험들은 내 외부 세계를 인지함으로써 나 자신과 내가 존재하는 공간성을 확립하게 해주는 요소이기 때문이다. 결국 사진을 보며 무언가를 느끼는 행위, 셔터를 누르게하는 그 무언가는 지극히 내밀한 나만의 개인적인 활동이 되는 것이다. 결국 타인의 사진을 보면서 느끼는 내 개인적인 감정들은 나에게만 정답일 것이며, 타인에게 강요될 수 없는 요소이다. 내가 느끼는 나의 감성이 정답이라는 것(이는 나와는 다른 타인이 느끼는 감성도 그들에게 정답이며 옳다라고 인정하는 것, 타인을 배려하는 태도를 포함한다). 이게 내가 나름대로 이해하고 있는 현대 사진의 본질이다. 

 

#부인 시릴라의 모습

   차 안에 앉아있는 필립 퍼키스의 부인 시릴라는 유리창문을 통해 사진가를 바라보고 있다. 사진을 찍는 사진가의 반영이 부인의 왼쪽 어깨에 겹쳐져있다. 마치 함께 커플 사진을 찍는 것처럼, 하지만 연륜이 있는 커플 답게 익숙하고 편안하게 사진을 찍고 있는 모습이다.

   사진가의 부인 시릴라의 또 다른 사진. 그녀는 가로줄이 나있는 옷을 위 아래 입고있는 노년의 모습이다. 필립 퍼키스가 사랑하는 가족들의 사진들, 등장하는 인물들은 모두 억지로 웃는 모습이 아니라 그저 담담한 표정으로 사진가를 응시하거나 사진가의 시선을 받고 있다. 노년에 이른 부인의 사진은 필립 퍼키스의 첫 번째 사진집 <인간의 슬픔THE SADNESS OF MEN>에 나오는 젊고 도발적인 모습과는 또 대비된다. 세월은 흘렀지만, 더욱더 깊어진 눈빛을 한 여인은 삶의 경이와 기적을 소박하고 겸손하게 나에게 증거하고있다.

 

#차 앞유리를 통해 바라보는 백구의 모습

   사진에 등장하는 개는 흡사 다이도 모리야마의 길위에서 유랑하는 개의 존재같다. 뒤에 '민박'이라는 간판이 없었다면 한국이라는 정보를 알 수 없었으리라. 민박이라는 것도 결국 인간이라는 존재가 을 떠나 길의 한 가운데로 나온 사람들만이 잠시 지나가며머무는 곳아닌가. 백구는 누군가를 주인으로 두고 마을 내에서만 돌아다니는 주인있는 개일 수도, 아니면 마을마다 돌아다니는 유랑하는 개일 수도 있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자신의 집을 떠나 길의 한 가운데로 떠나온 자만이 자신과 삶에대해 더 잘 알게 되리라는 점이다.

 

이 사진을 보아서인지 나는 톨스토이가 생애의 말년에 쓴 한 책에서 만난 글에 크게 공감한다. 

 

「삶은 지나간다」

우리가 두려움을 느끼는 존재로

창조되었다는 점만 제외한다면

죽음을 두려워할 이유는 없다.

 

우리는 이 삶을 끝내는 것이 아니라

단지 지나간다는 것을 기억하라.

삶은 안락한 집이 아니라

죽음으로 향하는 기차이다.

죽는 것은 육체뿐 영혼은 영원히 산다.

(…)

악과 고통은 나를 괴롭히지만

죽음은 나를 자유롭게 한다.

그러니 어떻게 죽음을

좋게 생각하지 않을 수 있는가?

 

- <살아갈 날들을 위한 공부> 레프 톨스토이 지음, 이상원 옮김 186

 

#뉴욕 거리의 울타리 사진, 경계

   필립 퍼키스의 사진에는 간간이 사진가의 상체 또는 머리의 그림자가 나온다. 사진가는 그만큼 대상과 가까운 거리에서 사진을 찍었다는 말이된다. 뉴욕의 어느 거리로 보이는 한 사진. 어느 집의 철장으로된 울타리의 바깥에는 휠체어에 홈리스로 보이는 남자가 고개를 푹 숙이고 잠을자고 있다. 하지만 울타리의 안쪽에는 집에 거주하는 사람으로 보이는 한 여인이 커다란 개 뒤에서 벤조로 보이는 악기를 연주하고 있다. 하지만 나의 이 관찰도 진실과는 무관할 수 있다. 진실이란 과연 무엇일까? 그리고 안과 밖이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나의 자의적 구분은 나의 편견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일 수도 있다. 사람은 누구나 지나가는사람이자 이방인이기에 나의 편견을 발견하고 또다시 부끄러움을 느낀다. 해가 내리쬐는 어느 겨울 오후, 사진 속의 여인은 평소에 친하게 지내는 할아버지를 위해 음악을 연주하고 있는 것일 수도 있지 않은가. 그리고 휠체어에 앉아 있는 할아버지는 단지 햇볕을 쬐다 음악소리를 들으며 단꿈을 꾸고있는 것인지 누가 알 것인가. 진실이 어떠한 것이든 사진가는 프레임의 안쪽으로 들어간 자신의 그림자를 담음으로써 이들과 하나의 현장을 이루며, 홈리스로 보이는 이를 대상으로 사진을 찍는다는 일말의 죄책감이나 판단하려는 의도 없이 그저 존재 그대로를 응시하고 있다.

 

   뉴욕 거리의 모습을 보고 나는 다시 J. D. 샐린저가 만들어낸 한 캐릭터를 떠올린다. 크리스마스 직전, 바로 지금 이맘 때 학교에서 퇴학 처분을 받은 후 학교를 떠나게된 홀든 콜필드는 펜실베니아주 어느 시골에서 밤기차를 타고 뉴욕의 맨하탄에 내린다. 규정과 속박의 세계로부터 익숙하지만 매여있지 않은 세계, 곧 소외되고 고립된 공간으로 던져진 홀든은 추운 맨하탄 거리를 새로운 세계의 이방인처럼 배회한다. 부끄러운 기억이지만 나는 어느 한 책방에 쭈그려 앉아 잠시 <호밀밭의 파수꾼>을 읽은 적이 있었는데, 홀든이 메마른 뉴욕의 추위 속에서 지극한 외로움을 느끼며 거리를 배회하던 장면에 이르러 울컥해지고 먹먹했던 적이 있다. 홀든이 안고있던 짐과는 분명 달랐을 것이지만, 나를 짓누르는 무거운 짐을 떠올리며 헌 책방에 주저앉아 나의 것이기도 했던 홀든의 고독감을 발견한 적이 있다. 어쩌면 필립 퍼키스 선생의 사진들은 나의 경험처럼 볼 때마다 새롭게 발견해내는 사진들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전시장 사진집을 보고

   숲 속의 한 가운데 모여있는 세 개의 흰색 표식과 사물, 그리고 사람들, 모두 안개 속 아니면 흐린 날의 뿌연 숲 속의 이미지들이다. 사진가의 추억을 떠올리는 표식일까? 사진가는 이 세 장의 이미지들을 연달아 배열 해 두었다. 필립 퍼키스의 사진들은 찰나의 순간으로 대변되는 방식, 곧 한 장의 사진으로 승부하기를 거부한다. 오히려 필립 퍼키스의 사진들은 50년대 후반 사진가에게 강렬한 인상을 주었던 로버트 프랭크의 <미국인들 The American>의 사진 연결하기(sequencing) 방식을 닮은 것 같다. 사진 한 장에 모든 메시지를 전달하려는 근대 사진의 형태가 아니라, 사진의 연결을 통해 사진가 자신을 드러내는 그런 방식 말이다. 여기에는 어떠한 규칙도 존재하지 않는다. 오로지 사진가의 안목과 직관만이 사진 배열의 기준이 될 뿐이다.

   세 개의 흰 색 표식이 있는 사진의 앞에는 또 흥미로운 두 장의 사진이 배열되어있다. 글라이더로 보이는 동체의 긴 날개가 화면의 위아래를 가르며 잔디밭에 붙어 서있다. 그 뒤를 잇는 사진은 평범해보이는 수면과 초원의 사진이다. 하지만 수면과 대지를 이루는 경계의 면은 앞 사진의 글라이더의 형태를 닮아있음을 깨닫게 된다. 이 두 사진에 나오는 소재들 사이에는 어떠한 연관성도 없어 보인다. 하지만 나에게는 두 이미지가 어떤 직관적인 연관성으로 이어져 있는 듯이 느껴진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자연이라는 것이 이미 존재하지 않은 이 지구상에서 필립 퍼키스 선생은 무관하지만 지극히 인공적인 이 두 풍경을 응시하고 있었으며 이를 연달아 배열해두었다는 것. 이 사진에 대해 그 이상 내가 말할 수 있을까?

   <필립 퍼키스와의 대화>에서 필립 퍼키스는 “(사진)편집에서 중요한 것은 물리적인 공간이나 소재가 아니라 정신적인 차원의 연결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곧 사진가에게 있어 한 사진집을 완성하는 일은 지극히 개인적인 작업인 동시에 자신의 존재를 온전히 외부에 드러내는 과정이기도 하다. 필립 퍼키스의 연결된 사진들은 사진가 개인의 마음 풍경(mind-scape)을 드러내주는 개인적인 다큐멘터리라고 볼 수도 있겠고, 그 연속된 전체로서 사진가의 삶의 이력을 드러내주는 자서전적(autobiographical) 작업이라 할 수도 있겠다. 필립 퍼키스는 5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쉬지 않고 일관되게 흑백 사진을 찍으며, 현상과 인화를 하고 사진을 선별해내었다. 사진을 고르고 고르는 편집과정을 끊임없이 반복한 저자의 손을 거친 이 사진집은 이 작업이 바로 필립 퍼키스 자신이라는 것을 나에게 말하고 있다.

 

* 전시를 본 후 메모

   사진집의 이미지들을 다시 하나 하나 떠올려보고 필립 퍼키스 선생의 사진들을 문학작품과 비교해볼 수 있지 않을까하는 생각을 해보았다. 굳이 비교한다면 나는 톨스토이의 작품들을 필립 퍼키스 선생의 사진들과 함께 떠올려본다. 나의 편견에 치우친 판단일 수 있겠지만, 필립 퍼키스의 첫 번째 사진집 <인간의 슬픔 The Sadness of Men>은 톨스토이의 거대한 장편 소설들같이 느껴진다. 반면 이번에 나온 두 번째 사진집 <바다로 떠나는 상자 속에서 In a Box Upon the Sea>는 톨스토이가 노년에 쓴 아포리즘 선집 같이 느껴진다. 톨스토이의 장편 소설이 인간이 살아가며 맛보는 모든 보편적인 경험들 곧 희노애락의 다채로움을, 그리고 인간이 삶에서 마주하게되는 폭넓은 감정의 양상을 보여준다고 한다면, <인간의 슬픔>에서 필립 선생은 50년에 가까운 시간동안 마주해온 자신의 자전적인 삶의 모습을 아우르고 있다. 때론 호기심어린 시선으로, 혹은 위트가 담긴 시선으로 견고한 두 다리로 버티며 대상을 탐색하고 세상을 관찰하는 듯하다. 여기에 등장하는 사진들은 때론 신비스럽기도하고, 교통사고를 당한 어느 자전거 주인의 죽음을 목격한 안타까운 현장을 보여주기도 한다. 이는 로버트 프랭크의 사진집 <미국인들>에 나오는 교통사고로 사망한 이의 현장 사진에대한 오마주같기도 하다. 나아가 여기에는 딸의 어릴 때 사진과 성장한 딸이 아이를 낳아 안고 있는 기쁨의 순간도 있으며, 젊고 아름다운 부인의 모습도 등장한다. 다시말하면 필립 선생의 첫 사진집은 생동하는 한 인간이 경험한 삶의 폭넓은 스펙트럼이 다 담겨있는 듯하다. 필립 퍼키스의 첫 번째 사진집은 나이가 들어가면서 아침에 새롭게 눈을 뜰 때 만나게 되는 삶의 경이와 같은 느낌의 사진집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런 점에서 나는 톨스토이의 소설들과 닮아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다시말하면 그의 첫 사진집에는 인생의 봄∙여름∙가을∙겨울이 호기심어린 시선으로 담겨있는 것이다.

   반면 두 번째 사진집 <바다로 떠나는 상자 속에서>에 나오는 사진들은 전보다도 훨씬 더 절제되어있음을 느낀다. 물론 일부는 첫 번째 사진집에서 보던 연결고리를 놓지 않는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진은 거기에서 좀더 나아가며 인생의 겨울을 담담하게 바라보는듯한 시선이 담겨있다. 이전에 보였주었던 호기심과 위트가 담긴 시선이 아니라 사진은 좀더 신비스러움을 주고있다. 인생의 내밀한 깨달음 같은 것이다. 글로 따지면 한 문장이 갖는 밀도와 무게가 더해져있는 그런 짧은 글을 보는 느낌이다. 노사진가가 담담하게 드러내 펼쳐 보이는 원숙한 삶의 정수(精髓)가 이것이리라. 사진가는 대상을 관조하며 이전보다 더 고요한 사진들을 보여주고있다. 마치 무위(無爲)의 자유속에 노니는 듯 하다. 내가 받은 이런 느낌들이 톨스토이가 만년에 집필한 그의 아포리즘과 같다고 느낀 것이다. 공교롭게도 톨스토이는 그의 아포리즘에서 노자의 무위(無爲)에대해서 언급하기도 하는데. 나는 이런 인상을 필립 퍼키스의 인화방식과 흑백의 톤, 그리고 절제된 사진의 구성에서 더욱 피부로 느낀다.

   필립 선생의 두 번째 사진집과 톨스토이의 아포리즘은 모두 삶과 죽음의 문제에 좀더 큰 관심을 가지고 사유하는 듯하다. 이 두 거장 모두 삶과 죽음을 두려움과 무지가 아닌 하나의 삶의 모습으로 이해하고 바라보고 있다고 느낀다. 물론 사진집에 나온 모든 사진이 나와 공명하기를 바랄 수는 없다. 인생의 어느 단계에서 유독 특정한 사진이 나에게 말을 걸어올 수도 있을 것이며, 어느 날에는 다른 사진들이 갑자기 나에게 다가올 수도 있을 것이다. 그의 모든 사진을 이해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필립 퍼키스 선생이 대상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셔터를 눌렀듯이, 나에게 말을 걸어오고 이에 공명하는 사진들을 좀더 유심히 바라보기를 반복할 따름이다. 특정 사진을 보다가 문득 나의 오래된 기억이나 경험들을 떠올리기도하고, 먹먹해지는 느낌을 받거나 삶의 경이를 느끼는 것. 그것 이외에 내가 필립 퍼키스 선생의 사진들을 더 말로 표현할 수 있는 것이 있을까?

 

 

 

 

 

 

필립 퍼키스의 첫 번째 사진집

<인간의 슬픔 The Sadness of Men>

 

 

 

*사진집 관련 문의는 안목출판사 블로그에서...

http://anmocin.blog.me/2205644656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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