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비딕, 삶과 운명을 탐사하는 두 개의 항해로
오찬영 지음 / 북드라망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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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비딕, 삶과 운명을 탐사하는 두 개의 항해로

오찬영 지음 | [북드라망]

 



문학이 철학이 되다’: 가벼운 삶을 발견하는 고전 활용법


 

당신은 삶을 즐거운 우주적 놀이로 받아들일 수 있는 시야를 가지고 있는가?”(134) 저자의 이 돌연한 물음에 나는 무심코 몸을 움츠릴 수밖에 없었다. 내 삶이 놀이와 같던 적이 있던가? 나의 삶이 극적으로 불행한 것은 아니지만, 놀이 같다고 생각해본 적도 없었다. 내 삶이 놀이 같던 시절은 어릴 때뿐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현재 내가 느끼는 삶의 무거움은 사회의 관습과 규칙이 규정한 삶의 조건에 기인할 것이다. 그러므로 내 삶이 놀이처럼 가벼울 까닭이 없었다.


저자 오찬영의 책 모비딕, 삶과 운명을 탐사하는 두 개의 항해로(이하 항해로)은 미국의 고전 문학 모비딕을 면밀히 읽고, 다시 쓰는 과정을 통해 자기 탐구의 방향을 보여준 책이다. 독실한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나 개인적인 신앙 해체의 경험을 한 저자는 읽고 쓰는 공부를 통해 철학을 만나고, 자신을 발견하기에 이른다.


이 책 항해로모비딕의 두 주요 등장인물인 에이해브와 이슈메일을 삶에 대한 태도라는 관점에서 비교하며 철학하기를 시도한다. 저자는 작품의 배경인 당대 미국 사회의 모순적인 면면을 마주하지만, 그의 공부는 문학 작품의 분석에서 끝나지 않는다. 등장인물의 시선을 자신에게 수렴하고, 자신을 관통하도록 이끈다.


저자는 모비딕을 이해하기 위해 두 가지 키워드를 제시한다. 하나는 기독교이고, 다른 하나는 민주주의다. 이 키워드는 허먼 멜빌의 미국 사회를 비롯하여 오늘날의 미국을 읽어낼 수 있는 중요한 단서이기도 하다. 기독교라는 키워드를 보면, 저자는 성경이 부여한 정복의 자연관을 미국의 가치관으로 읽어낸다. 여기에 애니메이션 겨울왕국에 투영된 보편적 코드를 파악하는 것이다. 여기에 저자는 멜빌이 자신의 웅장한 책에서 절대적 기표로 고정되어 있던 성경적 질서를 자신만의 기의로 변용하고 있다는 점에도 주목한다.


한편 민주주의라는 키워드는 멜빌의 시대에 끓어 넘치기 직전의 인종차별, 노예 문제와 연결 지을 수 있다. 모비딕 초반에 등장하는 이슈메일과 퀴퀘그의 우정, 땅딸막한 삼등항해사 플래스크와 거구의 흑인 다구에 관한 묘사(“조그만 백인을 받쳐 든 위풍당당한 흑인!”)는 백인 사회의 편견과 계급의 존재를 드러낸다. 멜빌은 모순투성이의 미국을 이미 읽어내고 작품에 담아냈다. 170여 년 전의 미국 사회에서 이 소설이 미국인들에게 얼마나 껄끄럽게 다가왔을지 짐작하고도 남는다.


저자가 주목한 기독교와 민주주의라는 키워드는 다시 모비 딕이라는 상징으로 수렴된다. 소설에서 이 거대한 흰 고래는 남성성의 끝을 보여준다. 이는 백인 남성이 구축해 놓은 미국사회로도 읽을 수 있다. 중요한 건 이 공고한 백인 남성의 질서에 도전하는 이는 누구든 살아남지 못한다는 점이다. 이 모비 딕의 비밀을 감히 요구하며 도전한 인물이 바로 에이해브였다. 그 결과, 그는 여전히 감춰진 고래의 비밀과 함께 심연 속으로 가라앉게 된다.


이 지점에서 에이해브가 미국사회의 모순과 광기를 드러내주는 중요한 인물이었다는 것을 깨닫는다. 무엇보다 저자 오찬영이 완전히 마초이즘의 관점에서 쓰인 이 소설을, 그리고 파멸하는 에이해브를 철학하기의 출발점으로 삼고 있다는 점이 인상적이었다. 등장인물의 호감 여부를 떠나 저자의 철학하기가 신선하게 다가오는 지점이다. 저자는 미국사회를 읽는 매우 중요한 열쇠가 모비딕에 담겨 있음을 탁월하게 전달한다. 이 작업은 미국사회로부터 결코 자유롭지 못한 한국사회의 모습도 읽어낼 보편성으로, 그리고 나에 대한 앎으로도 이어질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책의 도입부에서 저자는 문학을 통해 자기 탐구를 향한 철학의 가능성을 발견했다. 특히 두려움을 자양분으로 삼곤 하던 신앙이 자기 안에서 해체된 경험을 통해, 자신에 대한 이해로 나아가는 과정을 보여주었다. 이 지점이 바로 문학이 마침내 철학이 되는 지점이었을 것이다. 여기에서 저자는 알려고 하는 의지에 주목한다. 그가 제안하는 앎의 항해로 나아가기는 지식까지 물신화되어버린 현대 사회에 우리 각자가 할 수 있는 저항이자 삶의 주체로서의 의무가 된다.


저자는 모비딕 다시쓰기를 통해 우리의 삶을 우주적 놀이로 받아들일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내 삶에도 무거움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끝없이 뻗어나가며, 다른 존재와 접속하고 교차할 수 있는 여지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므로 나의 결핍을 자각한 자리는 철학이 시작되는 자리이기도 하다. 이런 과정을 거치는 이라면, 누구든지 보다 가벼워져 우주적 놀이가 된 자신의 삶과 만날 수 있을 것이다



"나름의 배움과 공부가 그 신체를 통과하여 축적되지 않는 이상, 그 존재성은 절대 유지되지 않는다." - P18

"그 동안의 삶의 방식에 어떻게 아니오를 외치고 반격할 것인가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바로 철학아닐까?" - P49

"어린 고전이긴 하지만 <모비 딕>을 통해 시대를 들여다본다는 건 역사적 개념으로 분칠된 미국을 한꺼풀 벗겨 낸 뒤 그 안의 모순, 갈등, 위선이 우글우글 들끊는 괴이한 미국의 면면을 마주한다는 뜻이다." - P73

"미국인들은 이스라엘 히브리 민족의 선민 의식을 그대로 물려받은, 야훼의 나라다. (...) 기독교와 민주주의는 <모비 딕>에서 빠뜨릴 수 없는 키워드다." - P75

"허먼 멜빌은 좀비나 소행성 같은 설정 없이도 바다 위의 포경선 한 척에 미국인들의 종말주의적 신체를 완벽히 구현해 냈다." - P98

"로고스란 자신의 현장에서 배움의 스펙트럼, 앎의 그물망에 끊임없이 접속하고 연결되는 것이고, 이는 타나토스와는 다른 양태의 에로스의 가능성이다." - P110

"자연에 대한 관찰과 앎은 결코 인간과 동떨어져 있지 않다. 그 앎이 확장될수록, 역으로 우리는 스스로를 더 잘 이해하게 된다." - P124

"결국 삶과 운명에 대한 질문은 결국 존재에 대한 이해와 직결된다. (...) <모비 딕>에서 발견한 것은 두 가지의 존재론적 인식이다. 열정과 광기의 타나토스, 웃음과 일상의 로고스." - P138

"<모비 딕> 한 권만으로 다른 텍스트를 읽는 눈이 바뀌어 버린다." - P145

"모든 과정은 반복되지만 결코 동일하지 않은 반복으로 계속해서 오고 간다." - P163

"현대 사회에서 우리는 무엇을 망각하고 있는지, 바로 코앞에 두고 눈 감고 있는 가장 근원적인 질문이 과연 무엇인지 알려고 해야 한다. 이 알려고 하는 의지만이 무지로 인해 마비된 좀비로부터 당신의 생명력을 흔들어 깨울 것이고, 삶과 죽음을 비롯해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순간과 운명의 흐름들을 온전히 누리게 되는 기예를 알려줄 테니까." - P1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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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과비평

계간 창작과비평191(봄호)

대화: ‘청년, 한국사회를 말하다'를 읽고

 


삶의 주체가 된다는 것의 의미를 묻다

 


요즈음 우리 사회는 돈과 관련 된 모든 것이 화두가 되었다. 뉴스를 보면 주식과 부동산 이야기, 그리고 비트코인에 대한 이야기가 대부분인 듯하다. 대학생들과 젊은 직장인들의 주요 화제는 주식이 되어 버렸다. 심지어는 어느 유명 연예인이 일반인들의 주식 모임에 가서 주식 이야기를 하는 과정에 참여하는 모습을 TV를 통해 본 적도 있다. 최근에 잠시 들린 어느 책방에서는 직원들이 주식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는 걸 듣게 되었다. 마치 내가 다른 나라에 온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여기서 새로운 문제는 사회의 분위기가 주식을 하지 않거나, 내 집 마련에 굼떠 보이는 사람을 보는 시선이다. 주식에 대한 대화에 참여하지도 못하는 사람은 마치 바보가 된 느낌을 받기 쉽다는 점이었다. 이 점은 청년 활동가의 대담에서도 지적된 문제점이다.

 

지인 중에는 아이들을 가르치는 선생이 있다. 일반화시킬 수는 없지만, 소득 수준이 대체로 좋은 지역의 아이 중에는 부모가 자신의 이름 앞으로 국내 대기업이나 해외 유명 스마트폰 회사의 주식을 사주었다고 자랑스럽게 말하는 아이들도 있다고 들었다. 대학교에는 주식투자를 연구하는 소모임도 늘어나고 있다고 한다. 대담 참여자들의 문제제기처럼 경제가 최고의 가치 중심이 된 사회에서, 나아가 코로나19로 사회의 구성원들이 봉쇄, 혹은 특별 제제 및 관리의 대상이 된 상태에서, 우리 삶의 국면을 새롭게 바라볼 수 있었다. 그럼에도 현실에 직접 예민한 감각의 촉수를 내리고 보다 나은 삶을 꾸려나가고자 도전하는 젊은 활동가들의 모습을 볼 수 있어서 든든했다.

 

앞으로의 문제는 팬데믹이 이번 코로나19로 끝나지 않을 것이라는 점과 우리 삶을 지배하는 자본의 영향력이 더 줄지는 않을 것이라는 점이다. 우리의 삶이, 그리고 우리가 믿고 있던 모든 가치가 마치 자본을 기준으로 재편되고 있는 것 같다. 활동가 공현의 지적처럼, ‘내가 이렇게 (주식/부동산) 공부를 했으니 보상을 받아야 한다, 보상을 받는 것이 정당하다는 가치관이 세대를 막론하고 영향력을 미치고 있음을 본다. 이번 대화편을 통해 모든 참여자들의 진단이 나에겐 새롭게 환기된 사항들이었고, 큰 배움을 주었다. 그 중에서 활동가 공현이 교육 문제를 잠시 언급하며 학생들이 교육의 주체가 아니라 관리의 대상이라는 취지로 한 언급이 기억에 남았다. 다시 돌아보니 모든 참여자들의 활동은 각자의 영역에서 스스로 삶의 주체가 되고자 노력하고 있었다.

 

우리의 삶은 본래적으로 결핍으로부터 시작된다고 볼 수 있다. 인간의 삶은 한 사람으로만 살아갈 수는 없으며, 무리를 이루고 사회를 구성하는 이상, 각기 다른 욕망들이 충돌하게끔 되어 있다. 이럴 때 구성원들이 마주하게 되는 이런 문제들은 정부가 왜 이걸 해결해주지 않는가?’라고 묻는 것에서 끝나지는 않는다. 우리의 삶을 결정하는 사람들은 바로 우리라는 사실을 인식한다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고 보니 대담에 참여한 청년 활동가들의 모습은 삶의 주체가 되는 인간되기를 몸소 실천하고 배우는 사람들이기도 하다. 대화자들의 한국사회 진단을 보면서, 나는 사회의 주체적인 구성원이 된다는 것의 의미를 생각해보게 되었다. 청년 활동가들은 사회 곳곳에서 관행에 균열을 내고 변화를 일구어내는 이들이었다. 고심하는 활동가들의 모습을 볼 수 있어서 좋았다.

 

한편 개인적으로 관심을 많이 갖게 된 주제는 에너지 정책 관련한 사항이었다. 아울러 기후/환경 문제에 대해 좀 더 관심을 가져보고 싶단 생각을 했다. 이와 관련하여 내 머릿속에서 떠오른 생각은 우리 사회에 근본적인 에너지 정책은 어떠해야 할까?’하는 문제다. 이 문제는 기후 위기를 비롯하여 우리 삶의 질과도 직결되는 문제다. 여기에 구체적인 문제의 진단과 논의를 더하여, 우리 사회에 좀 더 필요한 것들도 보인다. 우리 가 삶의 주체가 되기 위해 각각의 참여 활동이 많이 필요할 것이다. 하지만, 이를 위해서는 반드시 다양한 목소리가 많이 나올 수 있어야 하고, 이를 귀담아 들을 수 있어야 한다는 인식, 공감대가 필요하다는 점이다. 이러한 필요성은 코로나19로 전 세계인들이 각자 고립된 하나의 섬으로 되어버린 지금, 모든 사회에 필요한 조건이기도 하다. 다시금 청년 활동가들의 활동을 응원해본다.




"2020년에 코로나19 관련해서 등교 여부 등을 결정할 때, 정부가 학생들의 의견을 묻지 않았던 것처럼 학생들을 교육의 주체로 생각하지 않는 모습이 여전합니다."
- 청소년인권 활동가 공현의 말 - P77

"누구나 나이가 들고 아플 수 있고 다양한 이유로 취야한 상황에 놓일 수 있는데 이를 시설 수용으로 해결하려는 방식이 구조적 폭력이라는 것을 깨달았어요."
- 기본소득청‘소‘년네트워크 활동가 김주온의 말 - P79

"코로나19를 계기로 자본 입장에서 눈엣가시였던 사업들을 가장 먼저 정리해간다는 느낌도 받습니다. 모두가 힘든 코로나19 상황에서는 이런 결정에 저항하는 목소리를 내기도 힘드니까요. 상황이 이렇다보니 우리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가치를 어떻게 지킬 수 있을지에 대해 많은 생각이 듭니다."
- 영화감독, 작가 이길보라의 말 - P76

"예전에는 정치 냉소주의에 반대했다면 지금은 정치를 제도권 내 정당 혹은 정치인의 지지자나 팬이 되는 것 정도로 인식하는 데에 반대하게 되었다고 할까요? 정치를 냉소하거나 혐오하는 것은 문제이지만 기존의 질서를 거부하는 것도 정치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자신의 이야기로 이 사회를 바꾸려고 노력하는 것이 누군가를 지지하고 투표하는 것보다 더 큰 힘을 지니는 정치행위인 것 같습니다."
- 공현의 말 - P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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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화의 오리진 - 아리스토텔레스부터 DNA까지 다윈의 ‘위험한 생각’을 추적하다
존 그리빈.메리 그리빈 지음, 권루시안 옮김 / 진선북스(진선출판사)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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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화의 오리진

(On the Origin of Evolution)

: 아리스토텔레스부터 DNA까지 다윈의 위험한 생각을 추적하다

존 그리빈·메리 그리빈 지음 | 권루시안 옮김 | [진선출판사]

 


진화론에 이르는 서구 지성사의 한 단면, 진화중인 진화론의 연대기


 

지금부터 162년 전 3, 50세 생일을 막 지난 중년의 남자는 자신이 쓰던 원고의 마지막 페이지를 완성했다. 기대감과 일말의 두려움을 안고 마지막 문장의 마침표를 찍었던 것이다. 찰스 로버트 다윈, 그는 자신이 막 완성한 종의 기원이 당대에 논란의 중심이 될 것임을 짐작했겠지만, 이후 전 인류의 세계관을 바꾸어버릴 줄 짐작했을까. 오늘날 진화의 메커니즘에 관한 그의 이론을 이해하지 못하는 초등학생이라도 누구나 다윈이라는 이름은 알고 있다. 심지어 어린이를 위한 위인전에서는 천재과학자라는 타이틀도 심심찮게 사용한다. 하지만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라는 말처럼 다윈의 자연선택을 통한 진화 기작이 세상에 드러나기까지 그 역시 거인의 어께 위에 올라타고 있었다는 사실도 기억해둘 필요가 있다.


다양한 과학 분야의 소재에 대해 책을 쓴 메리 그리빈·존 그리빈 부부가 진화의 오리진에서 주목한 지점이 바로 여기다. 마치 물을 가열할 때, 물속에서 분자들의 운동이 빨라지고, ‘거대한대류가 형성되며, 바닥에서 기포가 생성되는 과정을 거친 이후에야 비로소 끊어 넘치는 것처럼, 진화론도 수많은 이들의 고민과 이의제기, 논쟁의 과정을 통해 만들어진 이론이다. 나아가 저자인 그리빈 부부는 진화론의 계보에 속한 많은 이들을 흥미롭게 조명하는 글쓰기를 보여준다. 이들의 글쓰기가 인상적인 이유는 고대의 자연철학자들부터 현대의 후성유전학 분야까지 각 분야의 선구자들이 내놓은 핵심적인 주장을 짚어 내고, 이들 사이에 존재하는 차이점을 간결하게 정리해내는 능력 때문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줄곧 느끼지만, 이런 작업은 결코 간단한 일이 아니다. 저자들은 이 진화론이라는, 섭씨 100도의 상태에 도달하기 직전의 물속을 면밀히 조명하고, 나아가 진화론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인 이론임을 보여준다.


이 책에서 소개하는 진화의 세 가지 요건은 크게 세 가지다. 첫째, 같은 종 내의 경합과 생존 투쟁이 있어야 한다는 것, 둘째, 환경의 변화에 대한 개체들 간의 변이가 일어날 수 있어야 할 것, 마지막으로 이 변이가 세대를 거쳐 상속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책에는 이 요건과 관련한 흥미로운 이야기가 소개되어 있다. ‘두 명의 사냥꾼을 쫓는 회색곰 이야기. 곰은 두 사람보다 빠르지만, 이 위기에서 생존가능성이 큰 사냥꾼은 두 사람 중에 보다 빠른 사람이다. 이 우스개에는 진화의 첫 번째 요건의 핵심이 담겨 있다. 바로 다윈이 말하는 생존 투쟁은 종 사이의 경쟁이 아니라, 같은 종 내에서의 경쟁이라는 점이다. 나머지 두 요건은 책의 후반에서 보다 깊은 의미가 다루어지고 있다. 현대생물학의 발전으로 DNA의 구조와 역할이 규명된 이후, 후성유전학과 같은 분야의 등장으로 진화의 의미가 보다 확장되고 깊이 이해되었다.


내가 주목한 부분은 이러한 진화의 개념과 요건들이 다윈 혼자 마련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이 개념은 이미 다윈의 할아버지인 이래즈머스 다윈이 고민했던 주제이기도 했다. 좀 더 가깝게는 다윈이 비글호를 타고 항해를 떠나기 전인 1831년에 패트릭 매튜(Patrick Matthew)라는 사람이 쓴 책 부록에 이미 실려 있었다. 매튜는 자연법칙에 의한 선택을 언급하면서 자연선택이라는 용어를 거의 만들어내었다(149), 라고 그리빈 부부는 지적한다. 게다가 매튜는 현대생물학 지식 없이도, 앞서 언급한 진화의 핵심 요건 세 가지를 잘 이해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이 책은 끓는 물(다윈의 진화론’)에 이르기 직전 물속의 상태를 우리에게 생생하게 들려준다. 그렇다고 다윈의 업적이 빛을 잃는 것도 아니다. 다윈은 커다란 업적은 끓기 전의 자신의 시공간이라는 물속에서 진화론이 인류의 것으로 받아들여지는데 필요한 임계치를 성공적으로 넘었다는데 있다. 그리고 이 책의 저자들은 우리가 아는 진화론으로 나오기까지 이미 많은 이들의 이야기도 있었다는 점을 들려주고 싶었을 것이다.


이 책을 읽고 배울 수 있었던 부분은, 다윈의 업적이 오랜 시간 인류의 집단지성을 통해 오랜 시간 거듭난 결과라는 점이다. 종의 기원에는 다윈이 20년에 걸쳐 다양한 실험을 수행하고, 책을 읽고 이해한 활동뿐만 아니라, 수많은 연구자들과의 서신 교환 및 토론의 흔적이 담겨 있다. 특히 진화의 오리진에는 다윈이 종의 기원을 출간하는데 결정적인 계기를 주었던 앨프리드 월리스와의 교류가 꽤 자세히 소개되어 있다. 다윈의 세계와 월리스의 세계, 이렇게 다양한 각자의 시공간이 진화론의 정립이라는 목표을 향해 실감나게 병치되어 묘사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단순히 진화론이 천재다윈의 작품이라고 하기보다, 서구지성사가 이루어낸 인류 공동의 지적 결과물이라고 이해해야 한다.


물론 책을 읽으며 진화론에 이르는 과정이 지난한 길이었음을 알 수 있었다. 그 이유는 이 과정이 무엇보다 기독교 전통이 강했던 유럽, 특히 영국에서 하느님의 섭리와 대립해온 인간 지성의 도전을 그대로 보여주기 때문이다. 이 상황은 책에서 소개되고 있는 샤를 보네(Charles Bonnet)진화(evolution)’라는 용어를 자신의 책에 처음 사용한 사례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이 용어는 펼친다는 의미의 라틴어 에볼루치오넴(enolutionem)'서 나왔다고 한다. 다만 보네가 이 용어에 담고 있던 생각은 하느님이 종을 창조했으며, 이 종은 불변 한다’(51)는 것이었다. 바로 이미 적혀 있는 (하느님의) 두루마리를 펼친다’(54)는 의미였기에, 창조자를 인정하지 않는 현대의 진화관념과는 정면으로 배치된다. 그러므로 진화라는 용어의 개념조차도 진화해온 셈이다. 그 밖에도 진화론자들이 생물학자이자 사제였던 많은 이들과의 토론과 논쟁을 겪는 사례는 이루 말할 수 없고, 현재까지도 진행 중이다.


또 하나의 사례는 사제이자 역사학 및 정치경제학교수를 지냈던 토머스 맬서스의 인구론이다. 맬서스는 자신의 인구론(1798)에서 인간을 대상으로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날 수 있는 인구 증가 기작을 언급했다. 나아가 인구 증가의 억제 요인으로 포식자, 질병, 가용 식량’(151)을 제시한다. 앞에서 언급한 앨프리드 월리스도 자신의 책 나의 인생 My Life에서 맬서스의 인구론 에세이가 중요하게 작용했다’(198)고 기록하고 있다. 다윈의 경우, 그가 비글호 항해를 다녀오고 1년이 지나지 않은 시점에서 이미 진화에 대한 생각을 하고 있었지만, 맬서스의 인구론은 그 다음 해(아마도 1838)에 처음 읽었다고 한다. 이 때는 비글호 항해기를 집필하던 시기이므로, 이 과정에서 인구론을 접하고 진화론에 대한 보다 결정적인 아이디어를 얻게 되었을 것이다. 이처럼 맬서스의 인구론은 진화론이 형성되는데 중요한 계기를 마련한 것은 사실이다.


다만 맬서스 인구론의 기본 논리에는 문제가 있다는 점을 지적해둘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이 인구론의 기본 가정을 간단히 정리하면 환경 속에서 생존에 유리한 개체는 우월하기에 살아남은 것으로 보고 있다는 점이다. 이 논리는 자칫하면 살아남은 자들의 우월성을 강력히 지지하는 증거로 왜곡되어 변용될 수 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우생학의 역사가 이러한 논리의 극단적인 형태라고 볼 수 있다. 이런 논리에 정면으로 대항하고 있는 책으로 나는 제레드 다이아몬드 교수의 대표적인 저서 , , 를 떠올렸다. 다이아몬드 교수는 자신의 책에서 현재 살아남은 세력이 우위를 누리게 된 이유로 맬서스의 논리와 정반대의 입장을 취한다. 곧 현재 우위의 차이는 바로 우연한여러 환경적, 문화적 차이에 기인한 바가 크다는 점이다. 어느 개체나 집단이 살아남은 것이 그 자체로 우월했기 때문이 아니었다는 말이다. 그의 가정이 맬서스의 논리와 미묘하게 차이난다고 생각될 수 있지만, 이 차이가 도달하는 지점의 결과는 극명하게 나뉠 수 있다. 다윈의 진화론은 이처럼 개인의 굳은 믿음 혹은 신학적 신념의 비판과 공격, 얽히고설킨 입장 및 논리의 차이를 겪어내며 등장한 이론인 셈이다.


이렇게 진화론의 역사만 보더라도, 진화론은 분명히 과거의 전통 위에 서있음을 알 수 있다. 또 한편으로 다른 인간적인 요인으로 자연에 대한 우리의 이해가 정체되기만 한 것이 아니라, 후퇴한 사례도 볼 수 있다. 이를테면 프랑스의 진화론 발달사가 그러하다. 이 책에서는 조르주 퀴비에(Georges Cuvier)의 사례를 떠올려볼 수 있다. 저자의 소개에 따르면, 퀴비에는 아프리카코끼리와 인도코끼리의 골격을 비교하고, 이를 매머드 화석과도 비교 연구를 한 인물이다. 또 코끼리를 닮은 오하이오 동물에 마스토돈이라는 이름을 붙인 인물이기도 하며, 멸종이 실제 일어난 일임을 최종적으로 입증한 인물이기도 하다(135). 문제는 1810년 무렵 이후 사망할 때까지 당시 유럽에서 영향력이 가장 컸던 생물학자였다는 점이다. 그는 종이 멸종한다는 사실을 입증했지만, ‘진화한다는 사실을 반대했다. 그 결과 적어도 진화론을 진지하게 연구하던 라마르크와 조프루아의 연구가 한 순간에 빛을 잃게 되었다. 프랑스 생물학계는 그대로 더 나아가지 못했다. 이 후의 역사는 우리가 알고 있는 대로다. 퀴비에의 영향력으로 진화론 연구의 중심은 바다 건너 영국으로 이동하게 되었다.


이처럼 커다란 영향력을 가진 인물이 지성사에 악영향을 미친 사례로, 스탈린 시대의 생물학을 떠올릴 수 있다. 흔히 리센코 사건이라고도 불리는 이 사례는 스탈린의 요청을 받은 소련 생물학자 리센코가 미국과 유럽에서 논의되는 유전 및 진화이론을 공공연하게 부정했던 사건이다. 일명 반멜델주의 생물학으로 표현되는 리센코의 생물학은 스탈린 치하의 공식 생물학으로 자리 잡으면서, 소련 과학계에 치명적인 피해를 준 사례에 해당한다. 이 이론에 반대하던 과학자들은 직업을 잃는 것은 물론, 목숨을 잃기도 했다. 고대 중국 진나라의 지록위마(指鹿爲馬) 고사가 현대사에 실현된 사례라고 할 수 있겠다. 참고로 진화론을 세상에 등장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앨프리드 월리스와 다윈이 인간의 위치에 대한 관점에서 크게 달랐다는 점도 주목해본다. 이렇듯 합리성과 객관성으로 대표되는 과학 연구도 결국은 사람의 일이기에 인간적인 요인으로부터 결코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을 진화론의 역사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이 책의 후반에는 현대생물학, 유전학의 발달 이후의 진화론에 대해 다룬다. 이제 과학자들의 관심은 다양한 생물 종과 개체들에서 세포 안으로 향하게 되었다. 현미경 및 결정학의 발달 등으로 생물학은 유전 인자에 대한 이해를 더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 책을 읽으면서 용어만 알고 있던 후성유전학의 간단한 개념을 이해할 수 있었던 것이 내겐 큰 수확이었다. ‘획득형질이 유전 된다는 라마르크의 진화론은 과학자들의 외면을 받고 완전히 사라진 것이 아니었다. 결국 후성유전학의 교훈은 특정 환경 속에서 개체가 획득한 특징이 최소한 몇 대에 걸쳐 대물림될 수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수평유전자 전달사례처럼 유전되는 특성이 수직적이지만은 않다는 것, 그러니까 유전자 수준에서 획득형질이 유전될 수 있다는 의미를 이해하게 되었다.


저자인 그리빈 부부는 책을 마무리하면서 진화의 과학적 이해는 지금도 여전히 진화하고 있다’(311)라고 했다. 다윈 이후의 진화론은 현대생물학의 발달이 더해져 생명에 대한 이해를 지금도 더하고 있다는 말이다. 이 책은 우리가 알고 있는 다윈의 진화론이 형성되기까지 기독교 사상을 비롯한 사회의 통념과 금기시된 지식에 대한 도전의 역사와 다윈 이후를 다루었다. 이 과정에서 우리는 이 무대에 최후의 승자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실제로 큰 기여를 했지만 사회적 관습에 종속되어 있던 인간의 모습도 발견한다. 월리스와 다윈의 경우는 그나마 훈훈하게 마무리된 보기 드문 사례다. 실제로는 지배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던 계급의 차이나 성차별적인 관행에 의해 뛰어난 과학자들의 공헌이 가려지고 무시된 경우가 더 많았다. 특히 한 번 더 노벨상을 수상했을 법한 매클린톡의 사례는 후대의 사람들이 주목하는 한 가지 사례에 불과할 것이다. 이 책은 진화론이 형성된 역사에 초점을 맞추었지만, 인간의 편견과 신념이 어떻게 여기에 개입했는지 그리고 심지어는 어떤 폐해를 남길 수 있는지도 보여주었다. 저자에 따르면, 우리는 현대생물학의 발달로 유전체는 항상 역동적인 변화 상태’(299)에 있는 존재라는 것과 생물체가 돌연변이 없이도 변화할 수 있다는 것’(311)을 알게 되었다. 나아가 생물체의 진화와 마찬가지로 진화론 역시 우리의 이해가 넓어짐에 따라, 지금도 여전히 진화중이라는 것을 보여주었다.



 

"지구상의 생물이 복잡한 정도에 따라 각기 순서대로 자리를 잡고 있는 ‘존재의 사슬‘ 내지 ‘생명의 사다리‘ 관념을 그리스 도교 사상가에게 전해준 것도 아리스토텔레스였다." - P17

"루크레티우스는 원자론자로 (...) 루크레티우스조차 인간은 특별하다고 생각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는 살아남은 동물은 자기 종족을 복제할 수 있어야 했다는 점도 강조한다. 여기에는 오늘날과 같은 자연선택에 의한 진화 이론의 요소가 확실히 존재한다." - P21

"린네는 종교적이어서, 새로운 변종의 식물이 때때로 생겨난다는 것을 인식했음에도 새로운 종이 진화하여 생겨날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희한한 일은 종은 불변하며 종을 창조한 것은 하느님이라고 믿은 다른 사람이 ‘진화‘라는 용어를 생물학에 도입했다는 사실이다. 그는 린네와 같은 시대 사람인 샤를 보네다." - P51

"모든 온혈동물은 위대한 제1원인으로부터 동물성을 부여받은 단 하나의 생명 가닥으로부터 생겨났으며, (...) 따라서 타고난 원래의 활동 방식에 의해 지속적으로 개량해 나가는 성질과 그렇게 개량된 점을 세대에서 세대로 영원히 물려주는 성질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너무 지나친 상상일까."
- 찰스 다윈의 할아버지 이래즈머스 다윈이 자신의 책 <주노미아>에서 밝힌 생각 - P120

"매튜는 자연선택에 의한 진화의 세 가지 핵심 요건을 잘 이해하고 있었다. 종의 개체가 늘어나 경합과 ‘생존투쟁‘이 일어날 것, 한 종에 속한 개체들 간에 ‘변이‘가 있을 것, 변이가 ‘상속‘될 수 있을 것이 그 세 가지다." - P150

"체임버스의 <창조 자연사의 흔적>(1844)은 선풍적인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진화를 상류 인사들의 대화 주제로 만들었다. " - P159

"월리스가 말레이 제도로 떠나기로 결정한 데는 두 가지 요인이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밴 와이는 빈 출신의 어느 비범한 여성이 말레이 제도에서 보내온 귀중한 표본을 스티븐스가 취급한 적이 있다는 점을 지적했다. 그 여성은 이다 라우라 파이퍼(Ida Laura Pfeiffer)로, 1797년 태어나 1842년 남편이 죽은 뒤 여행을 시작했다." - P178

"1854년 9월부터는 종의 변성과 관련하여 내가 적어둔 어마어마한 양의 노트를 정리하고 관찰하고 실험하는 데 내 모든 시간을 바쳤다."
-다윈이 따개비 연구를 끝내고 다시 진화에 관심을 돌려 <종의 기원>을 본격적으로 쓰기 시작한 정황 - P182

"(<종의 기원>에서) 가장 중요한 내용은 현대의 종이 어떤 단일 개체로부터 이어 내려온 공통의 후손이라는 생각이었다." - P218

"세부 논쟁은 여전하지만 (진화론에 관한) 현대종합이론은 1930년대 초에 확고히 자리를 잡았다." - P254

"1980년대에 이르러 우리 인간이나 참나무 같은 복잡한 생물체의 유전체는 고정불변한 것이 아니라 역동적인 변화 상태에 있다는 것이 분명해졌다." - P299

"‘생명의 책‘은 그대로 유지된다고 해도, 그 책에서 어느 구절을 읽고 행동할지는 세포가 처해 있는 상황, 즉 환경에 달려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 P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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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당신들만 옳고 우리는 틀린가? - 인간과 사회를 사유하기 위한 새로운 철학입문
다케다 세이지 지음, 박성관 옮김 / 이비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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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 이론을 소개하는 입문서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철학자들의 주장이 현실의 맥락과 어떻게 닿아 있는지 보여준다. 사회를 바라보고 ‘생각하기‘의 방법을 제시함으로써 철학하는 ‘나‘의 자리를 돌아보는 철학입문서라고 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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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y Henry (Paperback)
Kerr, Judith / HarperCollins Children's Books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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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y Henry

Judith Kerr 지음 | [HarperCollins Children's Books]

 


[부부가 함께 읽는 그림책

우리의 현재가 언제나 기억될 소풍이 될 수 있기를

 

이번에 읽게 된 그림책은 독일계 영국 작가 겸 일러스트레이터 주디스 커(Judith Kerr, 1923.06.14-2019.05.22)의 작품 My Henry이다. 국내에는 주디스 커의 작품이 꽤 잘 알려져 있어서 작가에 대한 정보를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다. 주디스 커는 세계 제1차 대전이 끝난 후 몇 년이 지난 뒤, 독일 바이마르 공화국에서 유대인 가족에서 태어났다. 당시 독일은 전후 극심한 경제난을 겪고 있었고, 나치는 서서히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던 시기였다. 나치 세력이 발흥을 하고 독일 내에 있는 유대인들에게 위협이 되어가던 1935(당시 12)에 주디스 커 가족은 영국으로 이주를 했다. 작가는 지난 2019년에 95세를 일기로 사망할 때까지 이 곳 영국에서 살면서 아이 및 어른을 위한 동화 작가, 일러스트레이터로 활동을 했다. 무려 83년을 고국이 아닌 타지인 영국에서 살았던 인물이다. 사실상 영국인라고 할 수 있겠다.

 

이 책 My Henry는 주디스 커가 88세가 되던 해인 2011년에 출판되었다. 먼저 세상을 떠난 남편 나이젤 닐(Nigel Kneale, 2006년 사망)을 떠올리면서 작업한 책이다. 화자인 노인는 자전적인 주인공이다. 소파에 앉아 오후에 마시는 차 시간을 기다린다. 마치 실버타운 혹은 요양원에서 여생을 지내고 있는 듯하다. 화자는 매일 오후 4시에서 7시 사이에 차도 마시고 자유롭게 시간을 보낼 수 있는 모양이다. 다른 사람들은 잘 모르겠지만, 이 시간은 화자가 먼저 떠난 남편을 만나는 시간이었다. 생전에 소심하여 모험을 좋아 하지 않았던 남편(왠지 낯설지 않다...)과 호기심과 모험심이 많던 화자는 생전에 함께 해보지 못했던 모험을 하는 것이다. 사자 사냥을 함께 떠나거나, 커다란 나무 높은 곳에 올라 저절로 채워지는 차 주전자로 차를 마시고, 소풍을 나간다. 높은 곳을 무서워하지 않는 화자는 남편과 에베레스트 산에 오르기도 한다.

 

천진난만해 보이는 노부부의 모험을 담담하게 그려낸 작업을 한 장 한 장 들여다보면서 작가의 삶을 거슬러 상상해보게 된다. 독일에서 태어난 유대인으로 참혹한 2차 세계 대전을 겪었다. 나는 이 삶의 실존적인 의미를 결코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다만 상상만 해볼 뿐이다. 아무 것도 없이 영국에 도착하여 생존의 위기 앞에 서야했을 주디스 커 가족의 두려움을 상상해본다. 여기에 새로운 세상에 대한 소녀의 천진난만한 호기심과 모험심이 함께 더해져 작가를 만들었을 것이라 생각해본다. 52년을 함께 했던 작가 부부의 삶은 과연 어떤 모습이었을까. 얇은 그림책 한 권이지만, 사람과 생에 대한 단단한 신뢰와 존중이 느껴지기도 한다. 작가의 삶을 오롯이 짐작해볼 수 있어 숙연해지기도 한다.

 

작가는 이 책에서 노부부가 함께 하는 상상 속의 소풍 활동을 모두 색연필로 작업하여 표현했다. 우선 부드럽고 따뜻한 인상을 준다. 마치 화자의 꿈속에 들어간 기분이다. 88세의 작가가 작업했다고는 믿기 어려울 정도로 귀엽고 미소를 짓게 해주는 그림들이다. 아마도 화자는 햇빛이 들어오는 창가의 소파에 앉아 낮잠을 잘 때, 남편 Henry와 소풍을 떠날 것이다. 생전에 함께 해보지 못했던 활동을 시도해보면서 말이다. 화자는 이럴 때 영락없이 호기심 많은 소녀의 모습이다. 그녀는 생전에 Henry와 함께 했던 시간을 추억하며, 그 모든 시간들이 얼마나 좋았는지 돌이켜 본다. 그럴 때면, 아이들이 태어나고, 성장하는 것을 지켜보며, 함께 나이를 먹어 가는 서로를 바라보았을 모든 순간들이 스쳐갔을 것이다. 부부가 된다는 것, 그리고 부모가 된다는 것은 장석주 시인의 시 대추 한 알처럼 저절로 익는 것은 아닐 터이다. 천둥과 벼락, 땡볕과 서리 맞는 시간을 함께 해야 단단히 잘 여문 대추 한 알을 맞이할 수 있다. 이 시간을 함께 거쳐 왔을 그림 속 부부의 모습이 정말로 아름답고 감동적으로 다가왔다.

 

이 책은 외견상 담담하고 천진난만해 보이는 그림책이지만, 애틋하고 쓰라린 감정도 불러일으키는 책이기도 하다. 아이들은 이 책을 어떻게 읽을지 궁금해지기도 한다. 아이들은 부모가 영원히 자신과 함께 잊지 않으리라는 것, 지금의 시간이 소중하다는 것을 나름의 방법으로 이해하고 소화할 수 있지 않을까. 난 화자가 꿈에서 먼저 간 남편과 돌고래가 끄는 수상 스키를 타고, 인어와 놀고, 유니콘을 타고 즐거운 시간을 보냈음에도, 남편과 헤어지면서 내일은 달에 소풍갈까요?’하는 대목을 읽을 때, 내 안의 슬픔이 고통으로 바뀌는 순간을 경험한다. 아직 내 안에 있는 대추가 둥글어지고 붉어지려면좀 더 서리를 맞아야 하는 모양이다. 이번에 읽은 My Henry는 텍스트가 길지 않아 원서를 구해다 읽었다. 작가 주디스 커가 담담하게 써내려간 문장을 여러 번 읽어보고, 소리 내서도 읽어보았다어려운 시절을 겪었던 작가의 손길로부터 삶에 대한 애정과 따뜻한 시선이 담겨있는 이 책은 읽을 때마다 깊은 감동을 전해주는 보물 같은 그림책이다. 천상병 시인의 시처럼, 지금 내가 함께 하는 사람들과의 이 시간이 훗날 소풍처럼 추억될 수 있길 바라게 하는 책이다.




이 그림책에 대한 아내의 리뷰 [번역본 & 원서]

[알라딘서재]누가 상상이나 할까요 (aladin.co.kr)


[알라딘서재]MY HENRY (aladin.co.kr)




 

"They think I‘m sitting in this chair
Just waiting for my tea."

"But sometimes we prefer to give
The world a miss, because
We picture how we used to live
And think how nice it wa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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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로 2021-08-09 13:2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어머 아내분과 함께 알라딘을 하시는군요!!! 넘 부러운 걸요!!^^

초란공 2021-08-09 18:09   좋아요 0 | URL
각자 좋아하는 장르가 달라서 그림책을 같이 읽어보자했어요. ^^;; 한동안 정신이 없어서 그림책을 올리지 못했네요...